행주산성

행주산성은 수도권 요지에 위치해 항상 올림픽대로나 자유로를 이용하며 보는 곳이지만 그리 쉽게 가지지는 않는 곳이다. 한동안은 행주산성 주위의 유명 음식점을 찾은뒤 산책겸 올라오는 그런 곳으로 전략 되기도 했었다. 그후 산성이 복원되고 또 성역화 되면서 이제는 제대로 된 산텅으로의 면모를 찾았다고 할 수 있겠다. 행주산성은 행주산성의 의미보다는 치마에 돌을 날라 전투의 도움이 되었던 "행주치마" 의 이미지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이 더욱 떠오르는 그런 곳이다. 행주대첩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전반 생략하고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짧은치마에 돌을 날라 전투에 기여하여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행주산성 안내도...]

행주산성(幸州山城)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56호.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 (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안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대첩문이란 현판이 걸린 행주산성 유적지 삼문...]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 백과사전에 서술되어 있다.

[권율장군 동상...]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 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한양으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뜨리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 한양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승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한양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권율장군 동상...]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 군은 권율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 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셀 수 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관 군"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관 군 - 권율 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였을 때에 큰 북을 세 번 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큰 칼을 뽑고 진두 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 졌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의 병"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의 병 -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자원한 민간인으로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훨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승 군"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승 군 - 승군은 승리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웠다. 이때에 권율 장군이 전투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여 성"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여 성 - 우리 군은 산성 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그 후부터 "행주치마" 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새로 조성된 쉼터...]

[오르는 길목은 한산하기만 하고...]

[충장사 입구 홍살문...]

[삼도와 삼문의 의미를 알려주는...전에도 우리는 우측통행을...]

[충장사 삼문...]

[행주대첩 중건비의 내용이 적힌 조형석...]

[충장사 중건비...]

충장사 앞에 놓여 있는 중건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비의 뒷면에 조인영이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비문을 짓고, 이유원이 글씨를 썼다.

[충장사 중건비...]

[충장사 삼문이 활짝...]

[권율장군 영정이 모셔진 충장사...]

충 장 사(忠 莊 祠)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충장사는 권율(權慄) 장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곳으로, 원래는 행주 나루터 안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행주기공사(記功祠)가 있었으나 6.25사변 때 소실되어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 곳에 충장사를 다시 지었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 건평 842평방m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이며 사당 안에 봉안된 권율장군의 영정은 장우성(張愚聖) 화백이 그린 것이다.

[권율장군 영정...]

[삼문 옆담이 갈라져...]

[토성으로 가는 삼거리 길...]

[기감천(奇甘泉)이라 쓰인 약수터...]

[우이동에 불이났다더니 연실 물을 퍼나르는 소방헬기...]

[행주 기씨 유허비...]

[행주 기씨 유허비 안내문...]

[행주 기씨 유허비...]

[토성으로 오르는 길...]

[행주산성 토성에 대한 안내문...]

[복원된 토성의 모양...]

[계속 야트막한 토성이 이어지고...]

[또한번 급히 오르며 꺾어지고...]

[이제 정말 성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높은 토성...]

[정상부에 오르면 숭의정이...]

[행주산성 숭의정...]

[숭의정 건물 처마의 멋진 선...]

[충의정 난간에서 내려다 본 고양시 강매동 인터체인지와 창릉천...]

[멀리 북한산이 그림같이 병풍을 이루고...]

[방화대교 입구를 깃점으로 난지 하수처리사업소 건물쪽 새로 건설되는 다리가...]

[행주대첩비탑의 옆모양...]

[오래된 살구나무가 위엄을...]

[방화대교가 바로 밑으로 보이는 덕양정...]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한강 습지공원...]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방화대교...]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방화대교 아치...]

[덕양정에서 올려다 본 행주대첩비탑과 대첩비각...]

[행주대첩비탑과 대첩비각의 어울림...]

[행주대첩비탑 주위엔...]

[행주 대첩비탑...]

[행주대첩비탑...]

[행주대첩비탑 밑 석판에 큰글은 고 박정희 대통령것이고 글은 시석호, 글씨는 서희환쓰다. 1970년 11월...]

[행주대첩비탑에 조각되어 있는 전투도, 병사를 지위하고 있는 권율장군...]

[행주대첩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행주대첩비...]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초건비로 불리우는 한 기는 선조 35년(1602)에, 또 중건기로 불리우는 또 한 기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이다. 덕양산 정상에 세워졌던 비가 바로 이 초건비 인데,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오래 되어 글씨가 닳아 없어져 알아보기 어렵다. 현재 탁본을 대첩기념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헌종 때 다시 세운 비는 그 이전에 세운 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헌종에 다시 세운 비 는 1970년 건립된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입구에 있다.

[행주산성에 펄럭이는 순시 깃발...]

[행주대첩비탑 앞에서 내려다 본...]

[다시한번 올려다 본 행주대첩비탑...]

[앞쪽엔 행주대교가 뒤로는 김포대교가 보이고...]

[행주대교 뒤로 전호산이 예쁘게...]

매년 3월 14일에는, 행주대첩을 기념하고 당시 공을 세운 권율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행주대첩제가 열려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하는데, 일주일 늦게 찾게 되어 아쉽다. 내년엔 화이트데이를 찾을께 아니라 권율장군과 행주대첩을 생각해보는 그런날로 하루를 보내고 싶어진다.   -<끝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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