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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선우 기자

입력 2021.02.09 03:00

 

“똥물 먹어라.” “더러운 놈.” “아가리 벌려라.”

2019년 6월 6일 현충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민족문제연구소, 평화재향군인회 등 친여(親與) 단체 회원 수십 명이 모였다. 이들은 유공자 봉분과 묘비에 준비한 가축 배설물을 뿌렸다. 참가자들은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고 손뼉을 쳤다. “이 X새끼” 등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019년 6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친일 인사들의 묘 이장을 촉구하며 묘 이장 퍼포먼스, 가축 오물 뿌리기, 꽃 훼손 등을 하고 있다. / YTN

 

이들은 ‘민족의 반역자 묘 파 가라!’고 적은 모형 삽을 들고 봉분을 발로 밟은 채 파묘(破墓) 퍼포먼스를 했다. ‘몰아내자’ 구호도 목청껏 외쳤다. 한 팻말엔 ‘역사의 쓰레기를 치우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석물을 짓밟으며 조화를 뽑아내 봉분에 던지거나 봉분에 일본 제국주의 상징 욱일기를 올려놓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 주변엔 악취가 진동했고 묘비를 세척하느라 상당히 애먹었다”고 했다. 참가자들이 오물을 뿌리며 퍼포먼스를 벌인 묘에 묻힌 이들은 현대사 속에서 일부 일제에 협력한 일도 있지만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6·25 등에서 공훈을 세웠다. 논란은 있지만 국립묘지 안치 요건을 갖춘 인물들이다.

지난 5일 대전현충원 백선엽 장군 묘 안내판이 철거당하자, 친여 단체들이 ‘친일 청산’을 주장하며 국립묘지에서 하는 각종 시위가 비상식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군 관계자는 “망인(亡人)들의 역사적 공과(功過)를 가리거나 이장을 주장하는 건 분명 각자의 자유”라면서도 “하지만 묘를 짓밟고 오물을 뿌리거나 욕설을 하는 건 사회 정서에 어긋난다”고 했다. ‘현대판 부관참시’라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일본군·만주군 경력이 있는 친일파가 대전현충원에만 28명 묻혀 있다”며 “당장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망인들은 6·25전쟁 등에서 올린 공훈을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됐다는 것이 국가보훈처 공식 입장이다. 회사원 김모(32)씨는 “친일이 나쁘다는 건 알겠는데 다른 유공자들도 계시지 않느냐”며 “일반 공동묘지에서도 상상 못 할 일이 국립묘지에서 버젓이 벌어진다니 충격”이라고 했다.

대전현충원엔 순국선열, 호국 영령 13만여 위가 잠들어 있다. 현충탑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노산 이은상)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국가의 성역(聖域)이라는 것이다.

 

국립묘지에 오물 붓고 조화 뽑고… 그들의

 

이 같은 비상식적 시위를 용인하는 현충원 태도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시 현충원은 오물 투척 당사자에 대해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했다. 백선엽 장군묘 안내판 철거와 관련한 현충원의 해명도 모순투성이다. 현충원은 “백 장군 안내판은 임시로 설치했던 것이고 최근 참배객이 줄어들어 철거가 예정돼 있었다”고 했다. 현충원 측은 친여 단체 집회 직후 안내판을 철거한 것과 관련해서도 “어떻게 하다 보니 시기적으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다.

현충원에 따르면 코로나 대확산기였던 지난해 12월~지난 1월에도 하루 최대 37명이 백 장군묘를 방문했다. 지난해 7월 안장 직후보다 숫자는 줄었지만 꾸준히 방문객이 있었다. 게다가 현충원이 천안함 수색 작업을 하다 숨진 한주호 준위, 수류탄 위로 몸을 던져 부하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 묘소 등의 안내판은 계속 유지하면서 백 장군묘 안내판만 7개월 만에 철거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향군인회는 8일 백 장군 묘 안내판 철거와 관련, “구국의 영웅을 욕되게 하고 국군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했다. 향군은 “호국의 성지인 국립묘지에서 왜곡된 이념 성향을 가진 단체가 소란을 피우고 정치 행위를 한 데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호국 영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청와대는 이날 국가보훈처 관계자들에게 사건 관련 보고를 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을 관리하는 국방부의 서욱 장관에게도 이날 예비역 장성들이 우려 전화를 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건 표현과 사상의 자유 영역이지만, 호국 영령이 잠든 국립묘지에서 지나치게 소란을 피우거나 시설물을 훼손한다면 법적으로 엄중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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