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우표 우표속에 나타난 대통령들의 모습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근대사를 볼 수 있습니다. 4대 대통령취임기념 우표에 대해 당시 4대 윤보선 대통령은 " 살아있는 내가 어찌 우표에 들어갈수 있느냐 " 며 우표발행에 들어갈 사진제공을 거부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취임기념 우표 대신 4293년(1960년) 10월1일 " 새정부수립기념 " 우표가 발행되었습니다. 우표속에 모습을 남기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1919 :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2대 : 1952~1956. 3대 : 1956~1960
윤보선 4대 :1960~1962
박정희 5대 :1963~1967 6대 :1967~1971 7대 :1971~1972 8대 :1972~1978 9대 :1978~1979
▲ 점치는 풍경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점보는 풍경을 그린 것 같은데 복장이 한국인의 복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음.
▲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 서울 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비인 현감 이승렬.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초이다. 1826년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 등 서해안 탐사 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례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이들의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818년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었다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홀 일해의 상륙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년 8월 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었던 나폴레옹을 방문하였다.
나폴레옹과 홀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피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아,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때 홀은 대답하기를,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
▲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산 등이 그려져 있다.
▲ 소청도 주민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 것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 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어 있다.
▲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 엿장수 소년들.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외국에서 발행된 엽서로 추산이라는 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 문화 속에서 심지어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란 비법도 유행했다. 전녀위남법이란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가문을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면 소박맞는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시절, 후사를 잊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 가운데 '임신 중여아를 남아로 바꾼다'는 이른바 전녀위남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이다. 가슴을 내놓는 행위는 젖먹일 아들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매우 흥미롭게 이러한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매우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 『코레아 코레아』1904)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 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리 위까지 녹색 장옷을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 듯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싸면서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하겠다는 가냘픈 조선 여인의 태도는 모슬렘이나 터키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거북스럽고 불필요한 의상을 조롱이나 하듯이 유방은 내놓고 다닌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 1901)
▲ 온돌,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다.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사진. 구들장(온돌)을 놓는 모습이다.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 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100년 전 우리 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이 '뜨거움'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상당히 편리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자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으나 얼마 후 추워서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오분 후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 안에 아주 배어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 때가 있어 그럴 때에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코레아 코레아 > 중 )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한 것이다. 그 곳은 열기와 벌레들, 빨래할 더러운 옷가지들과 '메주'라고 하는 간장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는 콩, 그리고 다른 저장물들로 가득 차 있어 누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은 남겨두고 있다. 밤이면 뜰에 밝혀진 너덜너덜한 등롱과 방의 등잔불이 손으로 더듬거리며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조명을 제공한다.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섭씨 33도 정도가 평균 온도이며, 자주 35.5도로 올라간다. 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897 )
조선 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 6척 높이에 넓이는 8척 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 써야 하는데도, 밖의 기온이 영하 15∼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돌방 밑에 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다란 돌을 덮어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 사람들이 빵을 구어 낼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방바닥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딱하다가는 엉덩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 곳 사람들이야 수백 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 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 써드의 『서울 견문록』중에서)
▲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있는 사진으로 '궁궐 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 미혼의 한국소년.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an unmarried korean boy'(미혼의 한국 소년)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고종황제.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
▲ 결혼한 한국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Korean married man'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음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제목은 'Woman employed in the palace'.
▲ 다양한 한국인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한 여인', '겨울 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 군인 모자(설명이 잘못된 듯)'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지게를 진 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지게를 진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것임.
때때로 차를 버리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오로지 발바닥으로 흙바닥과 교감하며, 길의 질감을 느끼고 싶은 길이 있다. 도계 인근 무건리 가는 길이 그렇다. 무건리(‘물건네’에서 유래) 소재말에서 큰말까지 이어진 십여릿길은 차와 사람을 전혀 만날 수 없는 심심하고 무료한 길이다. 이 은밀한 길은 산 아래 소재말에서 시작된다. 소재말에서 가파른 고개(국시재)를 올라서면 고갯마루에 성황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거기서부터 큰말까지는 비탈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내내 이어진다. 다만 너무 심심하지는 않게 길은 산자락의 굽이를 따라 구불구불 에움진다. 산의 능선도 길처럼 흘러서 멀찍이 다른 능선과 만나고 겹치고, 헤어진다.
무건리 큰말로 들어가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산모롱이길.
수시로 몸을 바꾸는 구름과 바람에 잎들이 맞부딪치며 내는 미묘한 소리와 봄산을 아찔하게 물들이는 초록 계통의 빛깔과 흰색에서부터 붉은색까지 길가에 핀 갖가지 봄꽃과 숲에 깃든 적막과 적막을 흔드는 어떤 새의 음악들. 그 속으로 걸어간 발자국들. 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나는 길 위에서 보았다. 차를 타거나 속도를 내서 지나가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길 위의 보행에서 나는 보았다. 그것이 가끔씩 산중의 비포장길에 차를 버려두고 굳이 내가 흙길을 밟아보는 이유다. 인류 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가 길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것은 속도와 물류 기능이 더해진 ‘도로’가 되면서 자연과 자원을 파괴하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
무건리 큰말 가는 길에 만난 산비탈의 외로운 집 한 채.
동양에서의 길이 인생의 순리나 깨우침을 뜻하는 ‘도’(道, 길)였다면, 서양의 길은 단지 교통과 이동을 목적으로 한 ‘로’(路, 도로)에 가까웠다. 서양에서는 옛날에도 산허리를 자르고 속도를 내기 위해 직선으로 길을 내고, 바닥에 돌로 포장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모든 길이 통한다던 로마의 길도 그러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일부러 산을 까뭉개고 바닥에 돌을 깔면서까지 길을 내지는 않았다. 고개가 있으면 넘어가고, 산이 있으면 돌아가면 되는 거였고, 사람이 다니던 자취가 쌓여 자연스럽게 길이 되었다. 동서양 길의 차이는 바로 삶의 양식과 정신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사람이 떠나 빈집으로 남은 무건리 큰말의 흙집 한채.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오지와 극지를 탐사했으며, 또 그런 사람을 위대한 탐험가로 부르곤 한다. 그들이 오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았고, 이미 문명과 사회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눈에 띄었다는 것만으로 ‘발견’이라고 한다. 서양인이 자랑하는 콜럼버스나 아문센은 정복을 위한 선발대에 다름아니었다. 그들이 다녀간 뒤에는 그들이 왔던 길을 따라 어김없이 총칼을 앞세운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리하여 탐험가들이 다녀간 곳은 십중팔구 식민지가 되거나 주객이 전도되어 원주민이 되레 오랜 터전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들의 탐험은 정복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길은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우리의 길이 맨 처음 파괴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가 침략과 수탈로에 다름아닌 철길과 교통로를 건설하면서부터이다.
무건리 산모롱이길에서 만난 수수꽃다리(위)와 붉은병꽃(아래).
물자수송과 침략을 위해서는 되도록 넓고 곧게 도로를 건설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천년이나 이어져 온 우리의 길은 뭉청뭉청 잘려나가거나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가 되고 말았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시작된 경제개발시대에 이르러 또한번 우리의 옛길은 대대적인 수난을 당해야 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길은 계속되고 있다. 길이 사라진 곳에는 어김없이 포장된 도로가 생겨났다. 길은 교통로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자연이고 문화이고, 삶의 유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제 길이란 보기 좋게 포장해서 사람과 자동차가 좀더 편하게 다니도록 만들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안에 깃든 자연과 문화와 숱한 사연과 전설과 사람에게 전해주는 정서적 기능과 미적 기능을 모두 외면한 채 그저 깔아뭉개서 시원하게 포장도로를 만들어야만 하는 게 건설공화국의 의무이자 사명처럼 인식되고 있다.
무건리 산모롱이길에서 만난 분꽃나무.
그래서 더욱 겨우 남아 있는 시골길은 눈물겹다. 간신히 흘러가는 시골길은 안쓰럽다.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걸어야 제격인 무건리 가는 길. 이 길을 나는 가을에도 왔고, 봄에도 왔다. 가을에는 침엽수의 무덤덤한 갈색 빛깔을 구경하며 이 길을 걸었고, 봄에는 갖가지 꽃 핀 풍경을 보며 또 이 길을 걸었다. 길 위에서의 시간은 가을보다 봄이 더디었다. 가을에는 너무 늦게 그 길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을 때는 날이 다 저물었다. 어둡기 전에 내려오려고 그 때는 너무 빨리 걸었다. 봄에는 아침 일찍 떠나서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야 내려왔다. 봄빛과 봄꽃을 구경하느라 발걸음도 덩달아 더디었다. 가을 저녁의 길은 약간 두려웠고, 봄 아침의 길은 더없이 눈부셨다.
주인 없는 무건리의 빈집 마당에 핀 산복사꽃.
소재말에서 큰말로 오르는 고개에는 아예 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기를 만들어 놓았다. 설령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길은 걸어서 발바닥으로 길의 질감을 퍼올려야 제격인 길이다. 길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내게 보여주며 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령 난생 처음 보는 귀룽나무꽃이라든가 분꽃나무가 그랬고, 흔하게 보았지만 여전히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이며, 개살구꽃이 그랬다. 무건리 큰말에는 농사철에만 한시적으로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까닭에 이른 봄, 늦가을에는 길에서 사람구경조차 할 수 없다. 봄에도 가을에도 큰말의 집들은 모두 텅 비어 있다. 집이라고 해봐야 고작 10여 채도 되지 않지만, 대부분은 쓰러져가는 빈집이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집도 겨우 서너 채에 불과하다.
무건리 오르는 길에 만난 산자락의 매발톱꽃.
큰말의 빈집 마루에 앉아 있으면, 산바람이 금세 걸어오면서 흘린 땀을 식혀준다. 도계 인근 산자락의 장쾌한 풍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집은 주인이 떠난 뒤, 부엌이며 안방의 벽이 다 무너져 내렸다. 어떤 집은 아직도 사람이 오며가며 하는지 농기구며 세간이 그대로 다. 집이 몇 채 안되는 관계로 집 구경은 금세 끝이 난다. 마을 뒤편으로는 두루뭉실한 산자락을 통째로 빌린 비탈밭에 무언가를 심었다가 거둔 흔적이 역력하다.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마을 구경을 마치고 나는 주인도 없는 빈집 마루에 벌렁 누워 한참이나 한량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다 얼핏 잠이 든 것도 같은데, 일어나보니 점심 때가 한참 지났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좀더 오래 그곳의 빈집 마루에서 빈둥거렸을 것이다.
무건리 소재말에서 만난 전동섭 씨가 아궁이 불씨를 꺼내고 있다.
큰말에서 내려와 다시 소재말에 이르렀을 때, 마을에서 만난 전동섭 씨(72)는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 있었다. 아궁이 옆에는 옛날부터 써오던 화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젊었을 때만 해도 무건리의 약 70여 가구가 대부분 너와집이거나 굴피집이었다고 한다. 더러 청밀짚을 지붕에 이은 청밀 초가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목이 말라서 마실 물을 청하자, 그는 바가지 가득 찬물을 떠와 건넨다. 물맛이 달다. 오랜만에 왕복 이십여릿길을 걸은 터라 단숨에 나는 찬물 한 바가지를 다 비워냈다.
과거 변변한 시계조차 없던 시절,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울던 수탉은 우리에게 긴요한 알람시계요, 괘종시계나 다름없었다. 수탉의 울음이 새벽을 알렸으므로 민간에서는 수탉이 울면 밤중에 왔던 귀신도 돌아가고, 산짐승도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새벽을 알리는 영물이요, 귀신을 쫓는 길조인 까닭에 닭은 혼례나 굿과 같은 중요한 행사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재물로 올랐고, 백년손님인 사위에게도 아끼던 씨암탉을 내놓았다. 물론 닭이 꼭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머리 나쁜 사람을 일러 “닭대가리”라 하였고, 여자가 너무 나서는 것을 두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도 하였다.
먹을거리로도 닭은 소나 돼지만큼이나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음식인데, 요즘에는 순수한 혈통을 지닌 토종닭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가 돼버렸다. 본래 우리 토종닭은 외국산에 견주어 몸집이 작은 반면, 당차고 번식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털빛은 주로 검정과 갈색, 다리는 회백색과 황색을 많이 띠었는데, 옛날에는 그 종류 또한 많아서 땅이름을 그대로 딴 파주닭, 나주닭, 무안닭, 보은닭을 비롯해 오골계와 투계도 따로 있었다. 그러나 외국산 닭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네 토종닭은 점차 지역적 순종의 특성이 사라져 오늘날과 같은 잡종의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토종닭의 순종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사라진 것이 닭둥우리라는 것이다. 이른바 외국산 닭을 키우는 대형 양계장이 곳곳에 생겨나면서 굳이 집집이 닭을 기르지 않아도 싼값에 닭고기를 맛볼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소량으로 키워왔던 토종닭이 씨가 마르기 시작하면서 토종닭을 지켜주던 따뜻한 보금자리인 닭둥우리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이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암탉이 알을 낳고 꼬꼬꼬꼬 울어대면 어머니 몰래 닭둥우리를 뒤져 달걀을 훔쳐내 톡톡 알을 깨고 몰래 입안에 털어넣던 일. 그러나 암탉이 알을 낳는 것은 빤한 일이어서 아무리 시치미를 뗀다 해도 어머니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대부분은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기 일쑤였지만, 때때로 날을 잘못 잡아 명절을 앞두고 달걀 서리를 하다가 공연히 어머니에게 매타작을 벌기도 하였다.
그 시절 달걀이란 것이 귀하디 귀한 것이어서 우리네 어머니는 그것을 짚으로 된 달걀 꾸러미나 쌀독 안에 신주 모시듯 보관해오다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때나 곶감 빼오듯 꺼내와 밥상에 올렸다. 닭장이 넉넉하게 닭이 많은 집에서는 며칠씩 낳은 달걀을 모아 달걀 꾸러미에 정성껏 꾸려 오일장에 내다팔았다. 그 때만 해도 “달걀 한 꾸러미 주시오”라는 말이 낯익었지만, 요즘에는 대형 마트의 “계란 한판”이 판을 치고 있다. 이제는 닭둥우리도, 달걀 꾸러미도 그저 까마득한 추억의 풍경일 뿐이다.
쩡 쩌엉 쩌엉 쩡. 어디선가 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낙안읍성 한복판에서 들리는 이 소리는 대장간에서 나는 소리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쇳덩이와 쇳조각들,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커다란 모룻돌, 화덕에서 발갛게 갈탄이 타고 있고, 이따금 손님이 낫이나 부엌칼 따위를 갈러 오면 대장장이가 스윽슥 스윽슥 숫돌에 날을 별러 주는 모습이 오래 전 시골 장터에서나 보던 대장간 풍경 그대로다.
대장장이가 달궈진 호미를 모룻돌에 올려놓고 메질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대장간에 풀무와 화덕을 비롯해 모루, 메, 망치, 집게 등의 연장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그 때는 순전히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화덕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혹은 망치질)과 담금질만으로 낫이며 망치, 호미, 곡괭이, 칼, 쇠스랑, 도끼, 작두, 장도리, 보습 등등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전에 쓰이던 손풀무는 전기 풀무로 대체된 지 오래다. 풀무를 쓰려면 고정적으로 풀무질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도 사람이거니와 풀무질하는 시간이 만만치가 않다. 손풀무가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본래 옛날에는 대장간에 최소한 풀무잡이와 집게잡이, 메잡이 등 3명이 필요했었다. 풀무질을 어느 정도 익히면 메질을 하는 메잡이가 될 수 있었고, 그 다음이 집게잡이였다. 집게잡이는 메잡이가 메를 들고 내리칠 때 벌겋게 달구어진 쇠를 집게로 잡아 이리저리 돌리며 골고루 메질이 돌아가게 하는 노릇을 한다. 오랜 경험과 기술 없이는 집게잡이 노릇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화덕에서 벌겋게 달궈진 호미를 꺼내는 대장장이.
대장간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70년대부터다. 그 때부터 서서히 수요가 줄더니 8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대장간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이른바 농촌에서도 기계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대장간도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 예로 60~70년대까지만 해도 곡성에는 무려 일곱 군데의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곡성에는 대장간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오랜 세월 시장에서 대장장이를 하던 분은 힘에 부쳐 그만둔 상태이다.
모룻돌에 놓인, 벌겋게 달궈진 호미.
지금은 그만둔 곡성 대장장이 조수익 씨의 아내는 그 때의 고생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손님이 오면 손님 세워놓고 고물상 가서 쇠 사와서 허고, 개탄 떨어지면 애기를 등에 업고 남원까지 가 탄을 사서 버스로 실어날렀어요. 그 띠는 셋방 살았는디, 낫 한 가락에 150원 할 띠요. 우리 애기덜도 고상 마이 했소. 용돈 하나 안쓰고, 큰아들이 그 띠 광주로 학교 대녔는데, 하루 1000원을 주면 차비 냉기면서 대니고. 하이고, 우리가 첫날 장에 300원을 냉기고, 니어까 끌고서 집으로 들어가는디 기맥히듬마요. 처음에 둘이 일꾼도 안두고 참 억척으로 했어요. 초창기엔 하루 만원, 2만원 그랬이요.” 낫이 150원, 호미와 부엌칼이 20~30원, 작두가 1500원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대장간에서 만든 낫과 호미와 부엌칼, 곡괭이들.
시대가 변한 요즘에 대장장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굶어죽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보통 낫 한 자루가 모양새를 갖추자면 일곱 번 이상 화덕에 들어가 불구덩이 신세를 져야 하고, 한번 들어갔다 나온 낫가락은 백번 이상 망치를 맞아야 비로소 ‘쓸모 있는’ 낫이 된다. 낫 한 자루에 약 천번 정도의 망치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낫을 하루 10자루만 만들어도 만번의 망치질이 필요한데, 요즘에 어디 하루 한 자루의 낫이 팔리기나 한단 말인가.
산이 높으니 골이 깊다고 했던가. 앞산 뒷산 빨랫줄을 매고 산다는 정선의 두메산골에는 봄이 한 발짝 늦게 온다. 남녘에서 실랑실랑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산그늘 눈이 녹기 시작하고, 겨우내 꽁꽁 얼었던 앞개울도 눈 녹은 물을 한 모금 맛보고 나서야 지이직 쩌엉, 얼음 풀리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 때를 기다려 개울에 나온 산골 아이들이 있으니, 분명 얼음배를 타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아이들 본새를 보아하니, 저마다 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챙겨 삿대 흉내를 냈다. 한 아이가 막 갈라지기 시작한 얼음 조각을 작대기로 밀어 그 위에 찰방, 올라타자 또 다른 아이도 그 옆의 얼음배를 밀어 제법 사공 시늉을 내본다. 배도 아닌 것이 뗏목도 아닌 것이 아이들을 한 명씩 태우고 개울을 미끄러진다.
정선 동면 소금강의 얼음배 타는 아이들.
이 얼음배는 한 아이가 간신히 타서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크기가 고작인데, 한 가지 문제는 배 위에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얼음이 이제 막 풀릴 때쯤이어서 오랜 동안 사람을 태우고 있기에는 배가 너무 허술하고 위험하다. 물론 처음 얼음배를 타는 아이들은 얼음배만 믿고 너무 오래 타다가 물 속에 첨벙, 빠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산골 아이들은 이런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해서 어느 정도 얼음배를 가지고 놀다가는 다시 새로운 얼음배로 갈아타곤 한다. 이렇게 몇 번이나 얼음배를 타고 나면 물에 빠지지는 않았더라도 신발이며 바짓단 아래가 축축이 젖어 있게 마련이고, 그대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을 게 뻔한 일인데, 여기에도 산골 아이들만의 비책이 있다. 옹기종기 개울가에 모여 불을 피워놓고는 신발이며 바짓단을 다 말린 뒤,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영월 주천강의 얼음썰매 타는 아이들.
이 산골 아이들에게 있어 산골짝의 개울은 놀이터나 다름없다. 하긴 정선의 두메산골에 무슨 컴퓨터 오락이 있을 것이며, 놀이동산이 있을 것인가. 한겨울이면 이 곳의 아이들은 얼음판 위에서 앉은뱅이 썰매를 타거나 못난이로 대충 깎은 팽이를 치고 논다. 겨울이 끝날 때쯤에는 때맞춰 얼음배를 타고, 여름에는 입술이 시퍼렇도록 멱을 감거나 어깨 너머로 배운 서툰 돌꽝(커다란 돌을 내리쳐 돌 밑에 숨은 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방법) 솜씨로 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이제 정선의 두메마을 풍경도 예전 같지 않아서 애당초 개울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기 어려우니 아이들 놀이조차 만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지사.
그러고 보면 옛날 시골 아이들의 놀이에는 분명 운치와 낭만이 있었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보듬고, 그것과 어우러지는 멋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처럼 빤하고 삭막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산골짝 마을에까지 컴퓨터라는 것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정선의 두메산골 아이들도 침침한 방안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얼음배와 썰매를 대신한다. 그러니 이제 어디 가서 얼음배 타는 아이들을 다시 만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