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군 함대 (Numbered Fleet) 조직/편제
- 2함대 - 대서양
- 3함대 - 동태평양
- 5함대 - 아라비아만 및 인도양
- 6함대 - 지중해
- 7함대 - 서태평양
1함대는 종종 미해안경비대의 정보참조기호로 쓰이곤 하지만, 사실 이 기호가 해안경비대의 공식 참조기호로 쓰이거나 해군 내 부대의 단대호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비공식적 명칭은 미해군 창설 이전인 1790년~1798년 당시 미해안경비대의 선조로써 새로운 공화국의 해안을 보호하고 무역과 해양 이해관계를 보호했었던 커터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표시하는 차원의 기호이다. 현재의 미해안경비대는 상시 무장조직으로써의 성립 및 필요시 미해군으로의 인도 조항을 포함한 신법에 의해 1915년 1월 28일 창설됐다.
2함대는
평시 대서양 전투함대의 전기 습득 및 새로운 해군전술 개발평가, 그리고 전구전투전단의 즉응성 유지를 위한 훈련임무를 담당한다. 2함대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미주 해안에서 유럽 해안까지의 대서양에서 주로 작전한다. 또한 남미의 양측 해안이나 중미의 서부해안 일부도 작전구역이다. 전체적으로 3천 8백만 평방마일(9841만 9548.2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면적을 커버한다. 미군 2함대는 1945년 12월 미해군 재편성 및 미해군 8함대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다. 1950년 2월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됐으며 미군대서양사령부의 일원이 됐다. 버지니아주 노포크에 위치한 2함대는 현재 USS 마운트 휘트니(LCC-20)를 기함으로 삼고 있으며 항공모함, 수상전투함, 잠수함, 정찰자산, 상륙함 및 상륙군과 기동군수단 등으로 구성된 조화된 전력으로 구성돼 있다.
3함대는 동태평을 작전구역으로 하며 샌디에이고항을 모항으로 하는 USS 코로나도(AGF-11)함을 기함으로 한다. 3함대는 1943년 3월 15일 '황소' 핼시 제독 휘하의 전투부대로서 창설됐으며, 1975년 2월 1일 중부 및 동부태평양을 작전대상구역으로 재구성됐다. 3함대는 항모기동부대 및 상륙준비단, 상륙준비단에 승함한 해병원정군의 작전준비태세를 책임지고 있다. 또한 태평양에서 아라비아만에 걸친 지역에서의 어떠한 종류의 인도적 긴급사태나 평화유지임무, 혹은 주요 지역분쟁에 대한 즉각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 3함대의 임무들은 할당된 전투단이 태평양 및 인도양에서 긴급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함대 사령관 및 해상배치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의 권한으로 수행된다.
4함대는 1943년 3월 15일 대서양군에서 창설됐다. 4함대는 남대서양에서 통상파괴선단(raiders)과 봉쇄돌파선(blockade runners), 잠수함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다. 1943년 4월, 16 함대항공단(Fleet Air Wing 16)이 노포크에서 브라질 나탈로 이동해 남대서양의 4함대 소속으로 직접항공대잠초계 작전을 실시했다.
5함대는 아라비아(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위협을 억지하거나 대응하는 가시적으로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해군 중부군사령관은 미군 중부군사령부 해군구성군사령관으로써 중동지역에서의 전투작전 책임을 지고 있다. 5함대는 1944년 4월 26일 중부태평양군을 모체로 창설됐으며 전후 해체됐다. 1980년대를 통틀어 수 척의 프리깃 및 구축함, 소해함 및 지원함들이 중동군(Middle East Force)에 할당됐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대함대가 사막의 방패 작전 및 1991년의 사막의 폭풍 작전 지원을 위해 걸프 지역에 집결했다. 중동군은 전후에도 존속한 미해군 중부군사령부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 동안 7함대 사령관은 중부군사령부의 해군구성군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차 걸프전쟁 이후로 미해군 중부군사령부(NAVCENT)는 해군구성군사령부 및 함대 사령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동반구 및 서반구에서 온 함정들이 함대를 구성했으나, 관행적으로 이해돼 온 구조나 함선 숫자 없이 작전을 벌였다. 1995년 7월에 와서는 그간의 사태 진행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함대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결국 48년간의 동면 끝에 5함대가 잠에서 깨어나 중동으로 나아갔다. 미해군중부군사령부 사령관은 바레인 마나마에 설치된 기지에서 전 작전구역의 해군 작전을 지시하고 통제한다. 미해군 전력이 보통 해당 전구의 미군 군사력의 70% 이상을 구성하기 때문에 미해군 중부군사령부의 존재는 미군 중부군사령부가 전역 전략을 성공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주요 연습에서 UN 제재 실시와 같은 일상적 임무에까지 미해군 중부군사령부는 해당 지역의 안정성 유지 및 위협 억제를 위한 주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미해군 중부군사령부의 대다수 작전전력을 태평양함대나 대서양함대에서 주기적으로 파견돼 온다. 이 전력들은 보통 항모전투단(CVBG; Aircraft Carrier Battle Group), 상륙준비단(ARG; Amphibious Ready Group), 수상전투함, 잠수함, 해상초계 및 정찰기와 군수함들로 이루어져 있다.
6함대는 USS 라살르 함을 기함으로 40여 척 가량의 함정, 175기의 항공기와 2,1000명 가량의 인원으로 구성돼 있다. 지중해의 6함대는 미해군 유럽군사령부의 주요 작전 구성군이다. 6함대의 주요 타격력은 배속된 항공모함 및 항공기, 잠수함 및 상륙함에 배치된 강화 해병대대급의 상륙전력으로 구성돼 있다. 6함대 사령관은 미군 및 나토에 모두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미군 지휘계선상에서는 미해군 유럽군사령부사령관(Commander-In-Chief, US Naval Forces, Europe (CinCUSNavEur))에게, 6함대가 나토의 남부타격군(StrikForSouth) 소속으로 작전할 때에는 미군 남부군사령부 사령관에게 보고한다. 런던에 기지를 둔 미해군 유럽군사령부는 유럽 지역에서의 미해군 작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으며 나토의 유럽연합군총사령부(NATO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 예하의 나토 남유럽연합군사령부(CinC Allied Forces Southern Europe) 자리도 겸임하고 있다. 미해군 유럽군사령부 사령관은 유럽 지역의 미해군 전력에 대한 행정적 책임은 갖고 있지 않으며, 해당 책임은 대서양함대 사령관이 지고 있다.
7함대는 1943년 2월 19일 남서태평양군을 모체로 창설됐으며, 현재 미해군의 가장 거대한 전 방전개 함대로서 50~60척 가량의 함정, 350여 대의 항공기와 6,0000명 이상의 해군 및 해병대원으로 구성돼 있다. 미 해안에서 최대 1,1000마일(1,7700km) 떨어진 서태평양과 인도양 및 아라
비아만을 무대로 작전하는 7함대는 기동부대 사령관들의 지원을 받아 세 종류의 과업을 맡는다. 먼저 C7F는 자연재해나 합동군사작전시에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지정된다. 둘째로 C8F는 해당 지역에의 모든 해군 전력의 작전지휘관이 된다. 마지막으로 C7F는 한반도 방어를 위한 연합해군구성군사령관으로 지정돼 있으며, 적대 행동시 해당 전역의 모든 우방 해군전력은
C7F의 통제에 속한다. 보통 50~60척의 함정이 7함대에 속해 있으며 18척은 일본이나 괌의 미해군 시설에서 작전한다. 이 전방전개 부대들은 7함대 전력의 핵심을 이룬다. 7함대의 영구 전방전개전력 18척은 미국의 아시아 지역 세력 과시의 중심추이다. 이 전력들은 아시아의 근접한 지역에 배치돼 미대륙에 배치된 대응전력보다 17일 빨리 대응할 수 있다. 미대륙에서 순환배치되는 방식으로 이 18척의 전방전개 전력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감 및 위기대응 능력을 갖추려면 3~5배 가량의 전력이 필요할 것이다. 7함대 전력의 50%는 책임구역 전체에 걸쳐 해상에 배치돼 있다
8함대는 1943년 3월 15일 북서아프리카군을 모체로 창설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상륙전을 주임무로 지중해에서 작전했다. 전쟁의 종료와 함께 8함대로 변경돼 상륙군, 대서양함대와 추후 미북서아프리카수역군(United States Forces North-West African Waters)을 배속받았다. H. 켄트 휴이트 제독의 지휘 하에 이 함대는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유럽대륙 강습상륙 및 침공이었던 시실리 및 살레르노 상륙을 지원했다. 8함대는 1944년 9월 연합군의 남프랑스 상륙을 강력한 함포사격과 항공 공습으로 지원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12월 실시된 미해군 재편성으로 8함대는 1946년 3월 1일 마크.A.미처 제독을 사령관으로 현역으로 돌아왔다. 미해군 대서양함대 사령관의 전체적인 지휘 하에서 8함대는 대서양함대의 강력한 타격전력으로 활동했다. 8함대는 숫적으로 우세했던 대서양함대의 항모 자산, 특히 신형 고속항공모함인 미드웨이 및 프랭클린.D.루즈벨트함 및 호위전력과 지원함들로 구성됐다. 후자에는 위스콘신함 및 미주리함으로 구성된 고속전함전대는 포함되지 않으며, 이 전함들은 대서양함대 직속지휘 아래 있었다. 1950년 2월 미해군 8함대는 미해군 2함대로 이름을 바꿔 미군 대서양사령부의 일원이 됐다.
10함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U보트 울프팩들에 의한 호송선단 및 상선 손실에 대항하기 위해 특수대잠전 조직으로 구성돼됐다. 전쟁 전 기간의 상선 손실 중 절반 이상이 1942년 대서양전투 동안 U보트들에 의해 입은 것이며, 대부분은 미군보호구역 내에서 기록된 것이었다. 워싱턴DC에 기지를 둔 10함대는 1943년 5월 20일 미해군 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에 의해 1943년 5월 20일 대서양에서의 미해군 대잠작전을 통제하기 위해 창설됐다. 10함대가 미해군의 대잠전 관련 노력에 필요했던 질서를 부여하자, 이 때부터 독일은 대서양전투에서 전략적 선제권을 상실했다. 10함대는 미해군 내에 존재했던 특이한 조직으로, 한 척의 함선도 배속되지 않았고 구성인원은 50명을 넘지 못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10함대는 1945년 6월 해체됐다.
12함대는 1943년 10월 1일 미해군 유럽군사령부 사령관인 스타크 제독 휘하의 전력으로 창설됐다. 당시 영국에서 작전하던 모든 미해군 전력은 스타크 제독 휘하였다. 미육군에서의 경우와 같이, 노르망디 침공을 위한 전술 조직 구성은 앨런.G.커크 해군소장이 12함대를 구성했던 1943년 가을까지 지연됐다. 1943년 9월 9일 킹 제독은 유럽의 모든 해군 전력을 단일 지휘체계로 묶어 스타크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12함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처럼 지휘 체계가 간략화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여전히 복잡한 채였다. 동시에 킹 제독은 영국해협 강습을 통제하고 연습할 기동부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동부대는 앨런.G.커크 해군소장 휘하의 122 기동부대로 편성됐다. 작전 및 행정적 사령부는 여전히 분리된 채였다. 12함대 예하에 또 다른 두 개의 주요 하위 사령부가 구성됐다. 11상륙군 및 유럽 상륙정 및 기지대(Landing Craft and Bases, Europe)는 1943년 여름 창설돼 침공을 위한 상륙정 건조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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