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7 전투기 입력 : 2020.08.31 08:47
선입견을 산산조각 낸 엄청난 싸움꾼
시범 비행 중인 P-47D-40. 둔중한 모습 때문에 오해를 받았지만 제2차 대전 당시 최고의 전투기 중 하나로 명성을 날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
개발의 역사
1938년 9월 30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수뇌들이 뮌헨에 모여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기로 결정했다.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묻지도 않은 일방적인 조치였음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막았다고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만에 독일은 체코를 강제합병하고 슬로바키아를 분리시켜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이제 평화가 물 건너 간 것은 확실했다.
리퍼블릭의 전신인 세베르스키에서 제작한 미국 최초의 전금속제 전투기인 P-35. 이후 P-47의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 (cc) Alan Wilson at wikimedia.org >
미국에도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중립을 외쳤지만 결국 전쟁의 폭풍 속으로 말려들어간 제1차 대전처럼 유럽의 위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USAAC(미 육군항공단)는 주력 전투기로 이제 막 P-40의 도입을 시작한 시점이었으나 영국의 스피트파이어나 독일의 Bf 109과 비교하면 성능이 부족하다는 분석에 따라 후속기 사업을 시작했다. 이에 많은 제작사들이 경쟁에 참여했다.
지난 1935년에 미국 최초의 전금속제 전투기인 P-35를 개발해 소량이지만 미군에 납품하고 스웨덴과 필리핀에도 수출한 바 있던 세베르스키(Seversky Aircraft)는 전작을 기반으로 플랫휘트니 R-1830 성형 엔진을 장착해 성능을 향상시킨 AP-4를 당국에 제안했다. 검토에 들어간 USAAC는 좀 더 골격을 보강할 것을 요구하고 1939년 5월 제식 부호 YP-43라는 이름으로 13기의 프로토타입을 주문했다.
P-43 랜서.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지만 미군의 주력기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 Public Domain >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며 회사명이 리퍼블릭(Republic Aviation)으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YP-43의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0년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USAAC는 리퍼블릭의 개발 비용을 고려해서 P-43 랜서(Lancer)라는 이름으로 54기와 추가 80기를 발주하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종료했다. P-40과 그다지 성능 차이가 나지 않아 굳이 후속기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카트벨리(Alexander Kartveli)가 이끄는 리퍼블릭 개발진은 AP-10으로 명명된 후속작 개발에 나섰고 이에 USAAC는 XP-47라는 부호를 부여하고 관심을 표명했다. 철저히 스피트파이어, Bf 109을 벤치마킹한 XP-47은 앨리슨 V-1710 수랭식 엔진과 2정의 12.7mm 기관총을 장비한 경량 전투기였다. 하지만 당시 절정으로 치닫던 영국본토항공전을 검토한 결과 USAAC는 XP-47에 만족하지 못했다.
카울링이 제거된 P-47 기수 앞에 장착된 플랫휘트니 R-2800 성형 엔진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
이에 카트벨리는 좀 더 성능을 개량한 XP-47A를 제안했으나 USAAC는 그보다 빠른 속도, 어지간한 타격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기체 그리고 강력한 화력을 요구했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방어력과 공격력을 강화하려면 필연적으로 기체가 커져야 했다. 결국 리퍼블릭은 확장이 불가능한 XP-47A을 파기하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P-43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종 개발에 착수했다.
카트벨리는 8정의 기관총으로 화력을 대폭 늘리고 주요 부위에 장갑판을 설치해 방어력을 향상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외형은 P-43을 전후좌우로 늘린 형태가 되었다. 늘어난 크기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골격을 보강하고 2300 마력의 플랫휘트니 R-2800 성형 엔진과 지름 12피트의 4엽 프로펠러를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이 엔진은 해군의 명검인 F6F, F4U의 심장이 되기도 했다.
초기 양산형인 P-47B. 미국의 참전이 이루어진 직후 양산이 시작되었다. < Public Domain >
그런데 경쟁 기종보다 700~800 마력 더 나가는 강력한 엔진이 장착되었어도 기체가 스피트파이어, Bf 109보다 30퍼센트 정도 커진 만큼 선회력 같은 성능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파이팅에서 상당히 불리한 점이지만 카트벨리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빠른 비행 속도와 향상된 방어력 등으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실전을 통해 그의 생각이 맞았음이 입증되었다.
개발안을 검토한 USAAC는 1940년 9월에 XP-47B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프로토타입을 발주했다. XP-47B는 제식 부호 때문에 XP-47A의 개량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개발 방향과 콘셉트가 전혀 다른 별개의 전투기다. XP-47B는 1941년 5월 6일 초도 비행 이후 각종 시험을 거치면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했다. USAAC에서 확대 개편된 USAAF(미 육군항공대)는 171대를 발주하고 P-47 썬더볼트(Thunderbolt)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공교롭게도 초도 물량이 인도되기 시작한 1941년 12월은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미국이 제2차 대전에 참전한 시점이었다. 당시까지 확인된 바로는 P-40이 Bf 109는 물론 일본 해군의 A6M에게도 열세로 평가되었기에 고도 25000 피트에서 시속 691km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는 P-47B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때문에 즉시 양산에 들어가 전선에 공급되었고 성능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 제2차 대전 최고의 전투기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특징
공중전은 살아남는 쪽이 승자다. 대공미사일이 등장하기 전에는 기관총(포)탄으로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싸웠는데 상대를 격추시키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려면 최대한 많은 명중탄을 날려야 했다. 그런데 격추에 준할 정도로 집중타를 얻어맞은 전투기가 무사히 귀환했다면 당연히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패한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P-47은 패하기 어려운 전투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P-47. 강력한 공격력과 뛰어난 방어력을 갖추었다. < Public Domain >
P-47의 상징은 튼튼함이다. 엄청난 명중탄을 얻어맞고도 생환했다는 무용담이 흔할 정도다. 앞서 언급처럼 기골이 보강되고 주요 부위에 장갑판을 둘렀기 때문이지만 공랭식 엔진에다 비행 제어 계통의 설계가 준수했던 점도 생존성을 높여 주었다. 그래서 유럽 하늘에서 P-47을 마주한 독일 조종사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내용으로 보면 이겼지만 상대를 격추시키지 못했기에 헛고생한 것과 다름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항속 거리를 늘리기 위해 보조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비행 중인 P-47D < Public Domain >
물론 P-47이 방어력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둔중한 덩치로 말미암아 독파이팅에 약할 것 같지만 공중전에서 결코 독일 전투기에 밀리지 않았다. 기동력은 떨어졌지만 터보차저 덕분에 고고도에서 속도가 빨랐고 불리한 위치에 놓이면 급강하해서 상황을 모면하는 식으로 응전했다. 8정의 기관총은 충분한 화력을 제공해 주었다. 동시대 경쟁 기종보다 탑승 공간이 넓어 조종사들의 호평을 받았다.
운용 현황
P-47은 1945년까지 총 15,636 기가 제작되었다. 1942년 말, 영국으로 전개된 미 제8공군 예하 제56전투비행단에 배치되면서 실전에 투입되었다. 뉴기니 포트모르즈비에 주둔한 제348전투비행단에서 운용하는 등 제2차 대전에서 미군이 참전한 모든 곳에서 활약했으나 아무래도 주 전장은 유럽전역이었다. 각각 별도의 전투기를 사용하던 육군이 유럽전역을, 해군(해병대)이 태평양전역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이 버마 전선에서 사용 중인 썬더볼트 Mk.II < Public Domain >
최초 임무는 영국 본토 방어 및 폭격기 호위였다. 여담으로 둔중한 외모 때문에 미군 조종사들이 차라리 스피트파이어를 타겠다며 탑승을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타보면 자신의 오해를 반성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만큼 흡족한 성능을 발했다. 항속 거리가 짧아 뒤에 등장한 P-51에게 폭격기 호위 임무를 넘겨주지만 든든한 방어력과 강력한 화력과 뛰어난 폭장량을 발판으로 공격기로 변신해 좋은 활약을 펼쳤다.
로켓을 이용해 지상 목표를 공격하는 모습. 제2차 대전 말기에 공격기로 변신했다. < Public Domain >
대부분 제2차 대전 중에 미군이 사용했고 영국을 비롯한 20여 개국에 공급되었다. 소련의 요청으로 203 기의 P-47D를 보냈으나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전후 제트전투기가 도입되며 1949년부터 미국에서 퇴역이 시작되었다. 6·25전쟁에서 공격기로 사용하던 P-51이 대공 화기 공격에 약하다는 평가에 따라 투입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여타 국가에 공급된 기체도 COIN용도 등으로 사용되다 퇴역했다.
변형 및 파생형
XP-47B: 프로토타입. 1기.
P-47B: 초도양산형. 171기.
< Public Domain >
XP-47E: P-47B 기반 고고도 전투 실험기. 1기.
< Public Domain >
P-47C: 중기 양산형. 602기.
< Public Domain >
P-47D: 후기 양산형. 12,602기.
< Public Domain >
P-47G: P-47D 커티스 위탁 생산형.
< (cc) John5199 at wikimedia.org >
XP-47H: 크라이슬러 XIV-2220-1 엔진 장착 실험기.
< Public Domain >
XP-47J: 카울링, 엔진, 무장 등을 개량한 실험기.
P-47M: V1 비행폭탄, Me 262 대항 개량형. 130기.
< Public Domain >
P-47N: 태평양전역 B-29 호위용. 1,816기.
< Public Domain >
XP-72: P-47 기반 실험기. 2대.
< Public Domain >
제원(P-47D-40)
전폭: 12.429m
전장: 11.0173m
전고: 4.472m
주익 면적: 29.91㎡
최대 이륙 중량: 7,938kg
엔진: 플랫휘트니 R-2800-59 18기통 공랭식 성형 엔진(2,000 마력)
최고 속도: 686km/h
실용 상승 한도: 13,000m
전투행동 반경: 1.660km
무장: 12.7mm M2 기관총포 X 8
5인치 로켓 X 10
2500 파운드 폭장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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