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주’ 패밀리의 유일한 폭격기

 

미라주 IV는 미라주 패밀리의 유일한 폭격기로 핵 투발임무를 수행하는 전략자산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개발의 역사

1954년, 이집트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는 서방 영향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제창하면서 수에즈(Suez)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였고, 이는 당장 수에즈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분노를 샀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가 적대국인 이집트 통제 하에 들어갈 경우 지중해와 홍해(紅海) 간의 해군 전력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를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으므로 이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고, 이에 따라 국유화에 대한 반발 조치로 1956년 10월 29일에 시나이(Sinai) 반도로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11월 5일 자로 수에즈 운하 지역에 공정부대를 투입하면서 본격적인 전쟁 양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국제연합(UN)이 곧 중재에 나섰고, 특히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만약 영국이 이집트 본토로 공세를 지속할 경우 강력한 금융 제재에 나설 것임을 시사하자 전쟁은 신속하게 수습 단계로 들어가 종료됐다.

이집트의 수에즈 국유화에 대항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시나이 반도로 침공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종료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병사들은 장비를 잘 갖추고 훈련 상태도 좋았으나, 워낙 전후 재건 문제와 경제 악화 때문에 전비(戰費) 부담을 겪어 작전에 크나큰 제약을 받았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 군에게 장악됐을 당시 핵 무장 상태로 신속하게 전개해 적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 개입 전력(Strategic Intervention Force)’이 빈약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 시기의 주요 강대국들 대부분이 핵 운용 분야에서 앞서가기 시작한 점도 프랑스를 불안하게 만든 요소였다. 소련과 미국은 우주에 인공위성을 띄워 놓고 있었고, 미국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급 잠수함에 폴라리스(Polaris) SLBM을 싣고 전 세계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실전 배치가 가능한 방향으로 핵 투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잡힌 상태에서 1958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대통령은 공세 저지용 핵 투발 수단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기 몰레(Guy Mollet, 1905~1975) 총리는 우선순위로 항공기, 차 순위로 탄도 미사일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프랑스 국방부는 이를 위한 전략 핵 폭격기 요구도를 수립하면서 최대 무게 3톤, 길이 5.2m의 핵폭탄을 장착하고 공중 급유 없이 2,000km 비행이 가능할 것을 요구했으며, 여기에 초음속 비행 능력을 필수로 넣었다. 프랑스 국방부는 기체의 양산을 맡아줄 항공사로 프랑스 국내 항공업체인 다쏘 항공(Dassault)을 선택해 함께 협의에 들어갔으며, 양측이 조율한 최종 요구도는 1957년 3월 20일 자로 최종 발행됐다. 입찰이 개시되자 다쏘 외에도 수다비옹(Sud Aviation)사와 노다비옹(Nord Aviation)사도 기존 보유 중인 항공기를 바탕으로 한 제안서를 제출했으며, 최종 후보는 ‘보뛰르(Vautour)” 항공기에 스네크마(SNECMA) 아타르 엔진을 장착해 전투 범위가 2,700km에 달하고, 최고 속도는 마하 0.9까지 도달 가능한 “슈페르 보뛰르(Super Vauteur)”를 제안한 수다비옹의 제안서, 그리고 1956년 초 미라주(Mirage) III 전투기를 쌍발 엔진으로 재설계하고 야간 전투기 형상 변경한 다쏘의 제안이 경합했다. 프랑스 국방부는 1957년 4월까지 두 제안서를 면밀히 검토한 후 다쏘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시험 비행 조종사인 르네 비강, 창업주 마르셀 다쏘의 아들인 세르지 다쏘(Serge Dassault), 롤랑 글라바니 준장의 모습. (출처: Dassault Aviation)

다쏘는 프랑스 국방부가 채택한 설계 안을 미라주 IV로 명명했다. 이 기체는 삼각익 넓이가 훨씬 더 넓고, 쌍발 엔진을 채택했으며, 중량도 훨씬 더 무거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미라주 III와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다쏘는 우선 장시간 동안 마하 1.8로 초음속 순항(슈퍼크루즈, Super Cruise) 비행을 한 항공기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시험을 위해 미라주 IV 01번 시제기 제작에 들어가 파리 상클로드(Saint-Cloud) 공장에서 18개월간 제작하여 1958년 말에 출고했다. 미라주 IV-01기는 최종 마감 작업을 위해 믈룅-빌라로슈(Melun-Vilaroche) 시험 비행장으로 이전 됐으며, 이곳에서 지상 시험을 실시했다. 01번기의 초도 비행은 1959년 6월 17일에 실시했으며, 시험 비행 조종사는 2차대전 중 자유 프랑스 군에서 활약하다가 1954년 프랑스 공군에서 5년간 휴직하고 다쏘(Dassault)에서 시험 비행 조종사로 재직 중이던 롤랑 글라바니(Roland Glavany, 1922~2017, 대장 예편) 준장이 맡았다. 미라주 IV는 1959년 6월 20일, 르부르제(LeBourget)에서 열린 파리 에어쇼(Paris Air Show)에서 세 번째 비행을 실시하면서 샤를 드골 대통령 앞에서 비행하는 위엄을 과시했으며, 글라바니 장군은 유럽계 전투기를 몰아 마하 2에 도달한 첫 조종사로 기록됐다. 1960년 9월에는 글라바니 장군을 대신하여 르네 비강(René Bigand, 1923~1967)이 미라주 IV를 조종해 파리에서 멜륀(Melun) 공군 기지까지 비행하며 1,822km/h를 달성해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으며, 138회 소티인 9월 23일에는 마하 2.08~2.14 사이로 비행하면서 평균 속도 1,972km/h를 기록했다. 이후 미라주 IV는 1959년 가을에 설계 개선을 실시하여 기체 전고를 낮추고 미익을 크게 키웠다.

생산 라인에서 조립 중인 미라주 IV. (출처: Dassault Aviation)

다쏘는 양산 단계로 넘어가면서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 J75 엔진의 스네크마(SNECMA, 現 사프란) 엔진을 장착하고 주익 면적도 기존 70㎡에서 120㎡로 넓혔으며, 최고 속도 역시 마하 2.4로 상향 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엔진 출력 상승과 주익 크기 확대에 따라 총 중량(항공기 동체와 기본 및 장착 무장, 고정 장비, 조종사, 연료를 비롯한 유류 계통이 모두 포함된 중량) 64,000kg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때 샤를 드골 행정부는 미라주 IV가 양방향 폭격 임무를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제시해 이 조건을 수용한 미라주 IVB의 개발이 추진됐으나, 기체에 공중 급유 능력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가 논란이 되어 개발이 지연되던 중 개발비 상승 폭이 커지자 결국 IV-B형의 개발 자체가 취소됐다. 이에 다쏘는 개발 비용을 덜어내기 위해 ‘가격 대비 성능’에 중점을 둔 중형 크기의 미라주 IVA 개발을 다시 진행했다. IVA는 시제기보다는 살짝 컸지만 IVB보다는 작았으며 가격 대비 성능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대당 가격은 프랑스 정부가 감당할만했으므로 프랑스 국방부는 총 3대의 시제기 개발 계약을 다쏘와 체결했다. IVA형의 주익 면적은 77.9㎡에 중량은 32,000kg 정도였다. 프랑스 국방부는 이 정도면 양산비를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1960년 4월 4일 자로 50대 양산 계약을 체결했으며, 당초 계약했던 3대의 시제기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되어 1961년 10월 12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다. 2번 시제기는 1962년에 알제리 남부의 콜롱베샤르(Colomb-Bechar) 시험장에서 가상 핵 폭격 시험까지 실시했으며, 3번기에는 항법/폭격 장비 및 공중급유용 파이프(Probe)가 설치됐다.

시제기인 미라주 IVA01. (출처: Dassault-Aviation)

다쏘는 미라주 IV의 양산이 개시되자 주익과 동체 일부를 수다비옹(Sud Avion)에 하청을 주었으며, 브레게(Breguet Aviation)에는 미익 하청을 주었다. 당시 미라주 IV 프로젝트는 프랑스의 핵 전력 운용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해외 업체의 참여를 최대한 피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 기업 중에는 관성항법장치(INS: Inertial Navigation System) 제조 기술을 가진 업체가 없어 항법 능력에 제한을 받았다.

미라주 IV 비행 장면. (출처: 유튜브 채널)

미라주 IVA의 양산기는 1963년 12월 7일 자로 초도 비행에 성공했으며, 1차 생산분으로 62대가 양산되어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순차적으로 프랑스 공군에 인도됐다. 프랑스 정부는 미라주 IVA가 배치됨에 따라 이를 주요 핵 투발 수단으로 삼았으며, 향후 원자력 잠수함이 도입될 때까지 항공 전력을 활용한 적지 종심 침투 및 항공기를 통한 핵 폭격이 프랑스의 주요 핵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된다.

https://youtu.be/vsTkWaUdWa4


특징

미라주 IV 중(重) 전략폭격기는 프랑스의 전략핵무기 운용을 위한 주요 항공 투발(投發) 수단이다. 통상 두 대의 미라주 IV가 한 조를 이루며, 한 대의 폭탄 수송 항공기는 폭격기 임무를 수행하고, 다른 한 대는 전자 정찰 및 공세적 재밍(jamming) 임무를 수행하여 기습 폭격 임무 간 폭탄을 장착한 항공기보다 먼저 투입되어 폭격기의 길을 뚫은 후 버디(buddy) 급유 방식으로 연료를 채워준 후 이탈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됐다.

ASMP 핵 미사일을 투발하는 미라지 IVP <출처: 프랑스 공군>

미라주 IV의 항공 역학 설계는 미라주 III와 거의 유사하나 내부는 새로 설계한 항공기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미라주 IV는 장거리 폭격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므로 두 대의 엔진을 채택했으며, 연료 탑재량과 탑재 중량 확장을 위해 전체적인 중량이나 날개 면적 모두가 미라주 III보다 커졌다. 특히 장거리 비행을 실시해 적지 종심을 돌파하도록 설계했으므로 연료 탑재량은 미라주 III의 세 배를 자랑한다. 시제기의 경우 길이가 20m, 날개 길이 11m, 날개 면적 62 제곱미터, 중량은 25,000kg에 달한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미라주 IV의 배면. (출처: US Navy)

미라주 IV는 수평 미익이 없이 60도로 젖혀진 삼각익을 채택했으며, 고속 비행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익의 두께를 얇게 제작했다. 미라주 IV 주익 두께는 당시 유럽제 전투기 중 가장 얇았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얇은 편에 속하는 전투기였다. 미라주 IV의 에어 브레이크는 삼각익 양측의 윗 면과 아래 면에 설치됐으며, 착륙 시 활주거리를 줄이기 위해 감속용 낙하산인 드래그 슈트(drag chute)가 동체 후방에 설치되었다. 랜딩 기어는 3개 축 형태의 통상적인 랜딩 기어가 채택됐으며, 후방 랜딩 기어 두 개에는 바퀴 4개, 전방 랜딩 기어에는 2개가 장착됐다. 미라주 IV는 스네크마 사의 아타르(Atar) 엔진 두 기를 채택했으며, 공기 흡입구는 기수 좌우에 설치된 ‘전형적인 미라주 시리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미라주 III와 미라주 IV의 모습. 유사한 실루엣을 갖고 있으나 형상이 더 커진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Dassault-Aviation)

미라주 IV의 내장 연료는 14,000리터 가까이 주입이 가능했으나, 출력이 큰 엔진이 두 기나 장착됐으므로 기본적인 연료 소모량도 컸지만 애프터버너 가동 시에는 소모량이 더욱 더 커졌다. 연료는 주익에 설치된 내장 탱크와 엔진 흡입구 아래와 엔진 사이, 수직 미익 앞쪽 공간 등에 마련되어 있었다. 기수에는 공중급유용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자체적으로 탑재하는 연료와 외장 탱크까지 모두 설치하더라도 소련까지 도달했다가 귀환할 양을 탑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공중급유기를 통해 중간 급유를 받거나, 동종의 버디 기체를 통해 급유를 받을 수 있었다.

미라주 IV 조종석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조종석은 탠덤(tandem) 방식으로 조종사와 항법사가 앉게 설계됐으며, 각각 클램쉘(clamshell) 방식으로 제작된 독립 구간의 캐노피 구간으로 나뉘도록 설계되었다. 폭격 및 항법 레이더는 기수 앞 레이돔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레이더나 통신 장비, 항법 체계, 폭격 장비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내 항전장비류는 모두 톰슨-CSF(Thompson-CSF, 現 탈레스)에서 제작했고 소량의 장비만 다쏘와 스페나(SFENA)가 제작했다. 이는 미라주 IV가 전략물자이기 때문에 가급적 해외 업체에 기체 능력이 유출되지 않게 하려던 시도였는데, 도플러 레이더(Doppler Radar) 만큼은 국내 제작 기술이 부족했지만 반드시 장착해야 했으므로 유일하게 해외 업체인 마르코니(Marconi, 現 BAE 시스템즈)에서 제작한 A.D. 2300이 탑재됐다. 자유 낙하식 폭탄의 경우는 항법사 좌석에서 배면에 설치된 잠망경을 통해 위치를 파악해 투하할 수 있었다.

로켓 추진 이륙(RATO: Rocket-Assisted Take-Off) 중인 미라주 IV <출처: Public Domain>

미라주 IV에는 주익 하부에 각각 두 개의 파일런(pylon)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안쪽 파일런은 2,500리터 연료 탱크 장착용이었다. 주로 바깥쪽 파일런에는 전자전 대응체계(ECM: Electronic Countermeasure)나 채프(Chaff)/전광탄 살포 포드(Pod)를 장착해 내장 대응 체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사용했다. 후기 기체는 바락스(Barax) NG 재머(Jammer) 포드를 왼쪽 주익, BOZ 살포기를 오른쪽 주익 하부에 설치했으며, 어차피 근거리 교전은 불가능했으므로 내장 기관총은 설치하지 않았다. 동체 내부에는 60 킬로톤 급 AN-11이나 AN-22 핵폭탄 한 발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주익 플랩 아래에는 12개의 고체연료 방식 로켓을 사선으로 설치해 급한 경우 로켓 추진 이륙(RATO: Rocket-Assisted Take-Off)이 가능했다.

제트 부스터를 활용한 “JATO(Jet-Assisted Take-off)” 방식으로 이륙 중인 미라주 IV. (출처: 유튜브 채널)

한편 미라주 IV는 조종사 뿐 아니라 정비사들에게도 오랫동안 사랑받은 기체인데, 이는 기체 수명이 퇴역 시기가 다가왔을 때에도 정비 소요가 많지 않았을 정도로 손이 많이 가지 않는 항공기였기 때문이다.

https://youtu.be/bA3TXZ1G2tE


운용 현황

미라주 IV는 1964년 실전 배치에 들어갔으며, 순차적으로 인도가 진행되면서 총 9개 비행대대가 창설됐다. 각 대대에는 2대의 미라주 IV가 한 조로 묶인 편대 두 개가 포함됐는데, 이는 한 대가 폭격 임무를, 한 대가 사전 정찰 및 “버디(buddy)” 공중급유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프랑스 공군에 전 기체 인도가 완료됐을 때에는 총 3개 비행단이 구성됐으며, 각 비행단은 3개 폭격대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라주 IV 편대의 임무는 소련까지 도달하여 핵을 투발하는 장거리 핵 폭격이었으므로 프랑스 정부는 1963년 미라주 IV의 임무를 지원할 장거리 공중급유기인 C-135F를 미국에서 14대 가량 도입했으며, 이를 통해 최대 4,000km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모스크바(프랑스에서 약 2,100km)까지 충분히 왕복으로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미라주 IV는 소련에 대한 독자적 핵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한 프랑스 핵전력의 중추 자산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프랑스는 1966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사기구에서 탈퇴함에 따라 샤를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핵 억지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미라주 IV 전력의 확충이 핵심적이라고 판단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폭격기를 이용한 공대지 핵 투발 방식을 프랑스의 핵 투발 방식으로 삼음에 따라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미라주 IV 시리즈를 프랑스 핵 전력의 중추 자산으로 활용했다. 프랑스 정부는 총 50대의 미라주 IV를 주문했으며, 최초 10대는 1963년 말까지 인도가 계획됐다. 1964년에는 22대를 추가 구매해 1965년까지 인도를 마치기로 계획을 잡았었으나, 실제 최종 인도된 기체는 총 62대와 시제기 4대를 포함한 66대였다.

미라주 IVP의 모습. 영국 RIAT 에어쇼에서 촬영된 것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랑스 공군은 항시 36대의 미라주 IV를 즉각 출동 가능 상태로 유지했으며, 12대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다른 12대는 4분 내에 출격이 가능하도록 대기하여 냉전 시대의 핵 억지 능력을 발휘했으며, 통상 이 36대의 핵 대기 전력에는 26대의 예비 항공기를 포함해 순환 방식으로 전개와 정비를 실시했다. 미라주 IV 전력은 12대의 항공기가 24시간 하늘에 떠 있는 만큼 유지 정비 소요도 엄청나게 발생해 한때 프랑스 공군의 예비 부품 구매 예산의 44%를 미라주 IV 혼자서 소비했을 정도였다.

미라주 IV는 KC-135F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고서도 버디급유가 있어야 공격이 가능했다. <출처: Public Domain>

기본적으로 프랑스 공군이 수립한 미라주 IV의 장거리 폭격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우선 2대의 미라주 IVA가 동시 이륙하며, 한 대에는 외장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내부 창에도 연료를 가득 채우고, 다른 한 대에는 핵폭탄 한 발과 외장 연료 탱크를 장착하여 이륙한다. 특정 거리까지 도달하면 KC-135F 공중급유기가 두 대 모두에 공중급유를 실시해 항속 거리를 연장한다. 다시 계산된 거리까지 비행하면 핵폭탄을 장비한 미라주 IV는 함께 편대 비행 중이던 다른 미라주 IV로부터 버디(buddy) 공중 급유를 받은 뒤 목표까지 홀로 비행하여 적지 종심에 핵을 투하하고 귀환한다는 것이 핵 폭격 시나리오의 요지였다. 모든 미라주 IV는 명령을 받은 후 이륙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항상 고체연료 방식의 가속 장비인 5EPR 841 가속 엔진을 주익 중앙에 설치하고 있었다. 미라주 IV는 운용 기간 중 안정적인 성능을 자랑했으며, 최초 7년을 운용하면서 단 여섯 건의 사고만 발생했다.

프랑스는 미라주 IV의 생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ASMP 핵 미사일을 통합하였다. <출처: Public Domain>

미라주 IV는 기본적으로 소련을 주요 적국으로 설정하여 개발했기 때문에 공중 급유 능력이 필수였으며, 중간 급유를 할 경우 모스크바, 무르만스크나 우크라이나 내 도시들을 포함한 주요 소련 도시들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절차상으로는 귀환할 거리까지 계산하여 중간에 공중 급유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사실 미라주 IV의 능력으로 핵 투발 후 성공적으로 모 기지까지 귀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프랑스 공군조차 회의적으로 보았다. 프랑스 국방부 역시 핵 전쟁이 발발하면 미라주 IV가 편도로 적국까지 도달해 핵을 투발한 뒤 모(母) 기지로 귀환하는 상황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는 핵전쟁 상황이 된다면 이미 미라주 IV가 이륙한 기지는 이미 적국에 의해 핵으로 초토화됐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무 수행 후 살아남은 미라주 IV는 중립국으로 가 착륙하는 것으로 방침을 잡았다.

미라주 IVP는 미라주 2000N에 핵투발 임무를 인계하고 1996년 6월부로 핵폭격기로서 임무를 마쳤다.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미라주 IV의 생존성 문제는 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핵 전쟁 중에 미라주 IV가 적 방공망을 돌파해 AN-11 같은 무(無) 유도 핵탄두를 적지 종심에 투하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1970년대부터 핵 투발 자산을 항공기에서 핵 잠수함으로 서서히 옮겼으며, 그 결과 1976년에 일단 1개 미라주 IV 비행단이 해체됐다. 프랑스 정부는 당초 1980년대까지 미라주 IV를 계속 항공 핵 투발 자산으로 운용하기로 했으나 항공기로 무 유도식 핵폭탄을 적지 한가운데에 투하한다는 개념은 갈수록 현실성이 낮아졌기 때문에 400km 가까이 비행이 가능한 ASMP(Air-Sol Moyenne Portée) 미사일을 통합시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운용했다. 1984년에는 18대의 미라주 IV가 ASMP 미사일 운용을 위해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기체에 대량 업그레이드가 가해짐에 따라 제식 명칭도 미라주 IVP(Penetration: 돌파)로 명명됐다. 미라주 IVP는 동체에 파일런이 하나가 추가되어 ASMP 미사일이나 CT52 정찰포드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레이더와 전자전 세트도 신형으로 교체되었을 뿐 아니라 항법 및 비행 통제 시스템도 개선됐다. IVP형은 1982년 10월 12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으며, 1986년 5월 1일부터 다시 실전에 투입되어 운용됐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 군 목표물에 폭격 중인 미라주 IV. (출처: USAF)

미라주 IVP는 1996년 6월에 폭격기 임무를 끝으로 퇴역했으며, 프랑스의 항공 핵 투발 임무는 후계 기체인 미라주 2000N에게 승계했다. 일부 미라주 IVP 기체는 보스니아, 이라크,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정찰기로 운용되기도 했다. 1972년, 약 12대의 미라주 IVA의 동체 후방 파일런에 CT52 정찰포드를 설치해 정찰기로 운용했으며, 제식 명칭도 정찰기를 의미하는 미라주 IVR(Reconnaissance)로 변경했다. 1980년대에는 18대의 미라주 IV를 개조해 사거리 300km 급 중거리 공대지 핵미사일인 ASMP 핵 미사일을 통합했다. 이론상으로 이 기체는 외장 탱크와 ECM 포드를 포기한다면 6대까지 재래식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지만 실제 이 사양으로 운용된 적은 거의 없다. 미라주는 공식적으로 2000년대 초반에 대부분의 기체가 퇴역했으며, IVP형 최종 기체 역시 2005년에 퇴역했다.

미라주 IV는 1996년 9월부로 핵폭격기로 임무를 종료했지만, 정찰기로서 2000년대까지 활약했다. <출처: Public Domain>

기본적으로 미라주 IV는 전략물자로 지정됐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 수출 허가를 내지 않았으나, 1965년 영국이 미제 F-111을 구매하려 하자 프랑스 정부에서 미라주 IV 판매 여부를 타진했다. 당시 영국이 미라주를 구입한다면 대당 1백만 파운드 가까이 획득 비용을 아낄 수 있었으며, 연료 효율성 면에서도 미라주 IV가 F-111보다 훨씬 우수했다. 하지만 미라주 IV는 영국이 원하던 운용 방식과 맞지 않아 대규모 업그레이드가 불가피했으므로 쉽게 선택을 하지 못했으며, 결국 1968년 1월 영국이 화폐 평가절하를 단행하면서 구매 비용 부담이 커지자 전술 핵 폭격기 도입 사업 자체를 취소해버렸다.

영국은 핵폭격기 도입을 추진하면서 F-111과 함께 미라주 IV를 검토하기도 했었다. <출처: Public Domain>

다쏘는 파생형인 미라주 IV-106 형상을 1963년 12월에 제안하면서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사의 엔진을 스네크마 사가 면허 생산한 TF-106 엔진 두 기를 채택했으며, 총 중량을 105,000kg로 늘리고, 지형 회피 레이더 및 미국 더글러스(Douglas) 항공의 GAM-87 스카이볼트(Skybolt) 항공기 투발식 탄도 미사일(ALBM: Air-launched Ballistic Missile)을 장착했다. 최고의 전술 공격기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고성능 장비를 아낌없이 선택한 이 형상은 안타깝게도 비용이 지나치게 비싸 프랑스 공군에서 구매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미라주 IV 시리즈의 수명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파생형

미라주 IVA: 시제기에 개선을 가해 양산형으로 전환한 미라주 IV 형상.

미라주 IV. (출처: Dassault Aviation)

미라주 IVB: 미라주 IVA의 항속 거리와 탑재 중량을 향상시킨 형상. 프랑스 공군의 요청으로 개발이 진행됐으나 개발비가 지나치게 상승하자 프랑스 공군 쪽에서 사업을 취소했다.

미라주 IVP: ASMP 미사일을 통합하기 위해 IVA형을 개조한 형상.

미라주 IVP <출처: Public Domain>

미라주 IVR: 미라주 IVA에 CT52 정찰 포드를 설치한 정찰기 형상. 총 12대가 개조됐다.

CT52 정찰포드를 장착한 미라주 IVR <출처: Public Domain>

미라주 IV-106: TF-106 엔진 두 기를 장착하고 탑재 중량을 확장시켰으며, 스카이볼트 ALBM을 통합하려 한 형상. 프랑스 공군에서 채택하지 않아 실제 제작된 기체는 없다.


제원

제조사: 다쏘 항공(Dassault Aviation)
용도: 초음속 폭격기
탑승 인원: 2명(조종사/항법사 및 폭격수)
전장: 23.49m
전고: 5.4m
날개 길이: 11.85m
날개 면적: 78㎡
자체 중량: 14,500kg
총 중량: 31,600kg
최대 이륙 중량: 33,475kg
추진체계: 11,020파운드 급 스네크마 아타르 9K-50 애프터버너 터보제트 엔진 x 2
최고 속도: 마하 2.2(2,340km/h)
실용 상승 한도: 20,000m
고도 도달 시간: 11,000m까지 4분 15초
에어포일: 루트 3.8%, 팁 3.2%
추력 대비 중량: 0.62
전투 범위: 1,240km
페리 비행 범위: 4,000km
랜딩기어 접지압: 8kg/㎠
무장: AN-11 자유낙하 핵폭탄 x 1
AN-22 자유낙하 핵폭탄 x 1
ASMP(Air-Sol Moyenne Portée) 핵미사일 x 1(미라주 IVP 한정)
454kg 자유낙하형 재래식 폭탄 x 16
항전장비: 톰슨-CSF(現 탈레스) 항법 레이더/도플러 항법/CT-52 정찰용 센서포드
대당 가격: 약 630만 달러(1964년 기준, 2020년 화폐가치 5,250만 달러)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 『이런 전쟁』(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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