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6F 전투기

제로 전투기에게 저승사자로 군림하며 전세를 바꾼 주역

 

F6F는 제로 전투기에게 저승사자로 군림하며 태평양의 제공권을 장악한 미국의 함상 전투기다. < Public Domain >


개발의 역사

미 해군은 1934년 CV-4 레인저 건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항공모함 전력 확충에 나섰다. 아직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유지되던 시기여서 보유 가능한 배수량에 맞춰 1938년까지 추가로 3척(CV-5 요크타운, CV-6 엔터프라이즈, CV-7 와스프)을 더 획득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건함과 더불어 탑재할 함재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실시된 함상전투기 도입 사업에서 그루먼의 F4F가 채택되었다.

그루먼에서 최초로 만든 함상 전투기인 FF는 랜딩기어를 동체에 수납할 수 있는 최초의 함재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는 F8F까지 이어진다. < Public Domain >

하지만 정작 배치 시점이 되자 고민이 생겼다. 개발 당시에는 성능이 충분하다고 보았으나 경쟁국의 함재기들과 비교했을 때 복엽기인 F3F를 개량한 F4F로는 우위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분석된 것이다. 특히 태평양을 놓고 경쟁 중인 일본이 문제였다. 중일전쟁에 등장한 일본 전투기들의 성능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1938년 F4F가 배치됨과 동시에 후속기 도입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사업이 개시되자 그루먼은 F4F에 1,600마력의 라이트 R-2600 엔진을 탑재한 G-35를 제출했다. 그루먼 최초의 함재기인 FF부터 이어진 전작을 개량한 방식이어서 기체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는 엄밀히 말해 그루먼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상황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결국 경쟁에서 보우트(Vought)가 제출한 V-166B가 채택되어 F4U라는 제식 부호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F6F가 제로를 압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2,000마력의 R-2800 공랭식 성형 엔진. 유명한 F4U, P-47 전투기의 심장이기도 했다. < Public Domain >

그런데 해군은 F4U의 개발 실패에 대비해 그루먼에게 기회를 한 번 더 부여했다. 당연히 F4U에 못지않은 성능을 발휘해야 역전타를 날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루먼은 미 해군이 지적한 문제점을 파악해 개량형인 G-50 연구에 나섰다. 이때 F4U에 탑재하기로 예정된 2,000마력의 플랫 휘트니 R-2800 엔진에 눈길을 돌렸다. 커다란 R-2800 엔진을 장착하려면 기체의 대대적인 재설계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기종을 개발하기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촉박했기에 G-50은 그루먼의 방식대로 전작을 개량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신예기를 실전에서 처음 마주한 일본 조종사들이 F4F로 착각했을 정도로 외형상으로 비슷했다. 하지만 당연히 내부적으로는 구조가 바뀌고 보강된 부분이 많았다. 그루먼이 제안한 G-50을 검토한 미 해군은 개발을 지시하고 제식 부호 F6F을 부여했다.

XF6F-1 프로토타입. 경쟁을 벌이던 F4U에 성능이 뒤졌으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격 양산이 결정되었다. < Public Domain >

동체 제작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으나 R-2800 엔진의 공급이 지연되어 추후 환장을 염두에 두고 일단 XF6F-1 프로토타입에 R-2600 엔진을 장착해 1941년 6월 30일 비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F4F보다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전반적인 성능은 경쟁자인 F4U에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서 채택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신예기 확보가 시급해진 미 해군이 일단 1,000기를 발주했다. 그렇게 즉시 양산을 전제로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일선에서 일본 해군의 A6M 전투기(이하 제로) 성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제로의 속도, 기동력이 개발 중인 F6F보다도 우세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당국은 물론 그루먼도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미 해군은 우세하다고 판명된 F4U에게 기대를 걸고 개발을 독려했다.

F4U의 개발 지연으로 F6F가 먼저 항공모함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 Public Domain >

초조해진 그루먼은 장점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F6F의 구조를 고려했을 때 제로 정도의 기동력을 발휘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대신 속도, 상승, 하강 능력으로 약점을 보완하기로 했다. 공중전은 살아남으면 최소한 패하는 것이 아니므로 주요 부위의 방어력을 향상시켰고 공격력도 강화했다. 당연히 기체의 추가 개량이 이루어져야 했다. 때마침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고 속도도 향상시킬 수 있는 R-2800 엔진의 양산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F6F는 제로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특화되었다. 그렇게 개량된 XF6F-3 시제기가 1942년 6월 비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양산이 시작되고 성능에서 앞선 F4U가 먼저 데뷔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데 치명적인 문제점이 드러나자 F6F가 먼저 항공모함에 오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만일을 대비해 F6F을 포기하지 않았던 미 해군의 선택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youtu.be/7b9e751i3moGrumman Hellcat F6F

 

1943년 2월 CV-9 에식스(Essex) 배치를 시작으로 F6F은 미 해군의 주력 함상전투기 자리를 차지했다. 기대대로 제로와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며 개전 초에 형인 F4F가 겪었던 수모를 수 배 이상으로 앙갚음해 나갔다. 1944년이 되면서 F4U가 항공모함에 오르게 되지만 이미 전쟁의 흐름이 완전히 미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한마디로 F6F은 태평양 전쟁의 판세를 결정짓는데 앞장선 전투기였다.


특징

R-2800 엔진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힘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프로펠러가 커야 했는데 자칫하면 지면이나 갑판에 블레이드가 닿을 수 있어서 랜딩기어도 길어야 했다. 문제는 너무 길면 이착함 시 균형을 잡기 어렵다. F6F는 랜딩기어의 높이를 줄이고 간격을 넓히기 위해 주익을 저익으로 바꾸고 랜딩기어가 날개에 수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점이 중익에 랜딩기어가 동체에 수납되는 F4F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식별 포인트다.

(하에서 상으로) 합동 비행 중인 F4F, F6F, F8F. 전작을 개량하는 방식이어서 외형상으로 상당히 유사하나 랜딩기어의 수납 부위, 주익의 위치 등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Public Domain >

개발 의도대로 제로에 비해 저속 선회력 정도를 제외하고 모든 능력에서 앞섰기에 근접전만 피하면 공중전에서 손쉽게 우위를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본격 배치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제로의 약점까지 간파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일본의 경험 많은 조종사들도 비슷한 외형 때문에 F4F로 오인하고 예전 방식대로 전투를 벌이다 속절없이 당하고는 했다. 한마디로 F6F는 제로에게 넘을 수 없는 저승사자였다.

F6F는 PW의 R-2800 엔진을 장착하여 뛰어난 추력을 갖췄지만 같은 엔진을 장착한 F4U나 P-47보다 부족했다. < Public Domain >

그러나 객관적으로 F6F가 동시대에 활약한 전투기 중에서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 같은 엔진을 장착한 F4U, P-47과 비교했을 때 성능이 떨어졌다. 기체가 F4F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더 이상 성능을 향상시키기에는 제약이 많았던 것이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후기에 등장한 일본 육군의 Ki-84 하야테에 비해 열세였다. 결국 급한 시기에 제 역할을 다했지만 F4U가 본격 배치되면서 2선 급으로 물러나야 했다.

지상 공격용 5인치 로켓을 장착한 F6F-5. 제공 임무를 F4U에게 넘겨주고 공격기 등으로 활약했다. < Public Domain >

 


운용 현황

F6F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총 12,275기가 생산되었는데 이중 11,000여 기가 2년 만에 만들어져 F4U가 본격적으로 항공모함에 오른 1944년 초까지 미 해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질적으로 제로기를 앞섰으나 1942년 말에 있었던 산타쿠르즈 해전 이후 일본은 경험 많은 조종사들이 대부분 소모되었기에 전투력 차이는 성능 차이보다 훨씬 컸다. 더군다나 양적으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착함 중 사고가 발생한 F6F. 이처럼 전쟁 중 공중전보다 비전투 손실 등에 의한 피해가 오히려 더 많았다. < Public Domain >

F6F는 5,000여 기의 일본기를 잡았던 반면 2,400여 기를 상실했다. 그런데 그중 1,600여 기가 비전투 손실, 대공포 격추, 수리 불가 판정 등에 의한 것이고 공중전으로 인한 손실은 270기에 불과했다. 특히 1944년 6월 필리핀 해전 당시에 괌과 마리아나 제도상에서 연이어 벌어진 공중전에서 ‘칠면조 사냥’이라고 불리는 학살과 같은 대승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F6F는 일본의 조종사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1953년 몬트레이 항모에서 발진하는 F6F-5. 몬트레이 항모는 훈련항모로 해군조종사 양성에 투입되었다. < Public Domain >

F4U에게 제공 임무를 넘겨준 후에는 풍부한 폭장 능력을 발판으로 공격기로 활약했다. 하지만 종전 후에 대부분은 급속히 도태되어 훈련용 표적기나 무인 유도 폭탄으로 사용되었다. 1,263기를 공여 받은 영국도 주요 사용자다. 이들 물량은 대서양, 지중해 작전에 투입되었다. 프랑스에도 일부 물량이 공여되어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했고 우루과이도 1960년까지 12기를 운용했다.

영국 해군에서 헬켓(Hellcat) F. Mk. I이라는 제식명으로 활약했던 F6F-3 < Public Domain >

 


변형 및 파생형

XF6F-1: R-2600-10 엔진 탑재 프로토타입.

XF6F-1 < Public Domain >

XF6F-2: R-2600-16 엔진 탑재 프로토타입.

XF6F-2 < Public Domain >

XF6F-3: XF6F-1, XF6F-2에 R-2800-10 엔진을 탑재해 개량한 프로토타입.

F6F-3: 초기 양산형.

F6F-3 < Public Domain >

F6F-3E: 우측 주익에 AN/APS-4 레이더를 탑재한 야간 전투기형.

F6F-3N: 우측 주익에 AN/APS-6 레이더를 탑재한 야간 전투기형.

F6F-3N < Public Domain >

F6F-3P: 사진 정찰기형.

F6F-3P < Public Domain >

XF6F-4: R-2800-27 엔진 탑재 프로토타입.

XF6F-4 < Public Domain >

F6F-5: R-2800-10W 엔진 탑재 후기 양산형.

F6F-5 < Public Domain >

F6F-5E: 우측 주익에 AN/APS-4 레이더를 탑재한 야간 전투기형.

F6F-5K: F6F-5, F6F-5N 개조 표적기.

F6F-5K < Public Domain >

F6F-5N: 우측 주익에 AN/APS-6 레이더를 탑재한 야간 전투기형.

F6F-5P: 사진 정찰기형.

XF6F-6: R-2800-18W 진 탑재 프로토타입.

XF6F-6 < Public Domain >


제원(F6F-5)

전폭: 13.06m
전장: 10.24m
전고: 3.99m
주익 면적: 31㎡
최대 이륙 중량: 6,992kg
엔진: 플랫 휘트니 R-2800-18W 성형엔진, 2,200hp(1,600kW)×1
최고 속도: 629km/h
실용 상승 한도: 11,400m
전투 행동 반경: 1,521km
무장: 12.7mm M2 기관총×6 또는 20mm AN/M3 기관포×2
5인치 로켓×6 또는 Tiny Tim 로켓×2
1,800kg 폭장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