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 소묘 - 1951년 4월 25일


벚꽂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수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복숭아꽂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리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날에 때가는 줄 모르도다.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우리도 노를저어 누벼 볼까나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1952년 7월 2일 밤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와라.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1976년 8월 5일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멀리 수평선에 휜구름이 뭉개뭉개
불현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속에서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건너 섬쪽으로 날아간다

비몽(比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한송이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1974년 8월 20일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아래
붉게 물들인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흰 송이 흰 목력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비오는 저도의 오후 ―1976년 8월 6일

비가 내린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단비가
바람도 거칠어졌다
매미소리도 멎어지고
청개구리소리 요란하다
검푸른 저 바다에는
고깃배들이 귀로를 재촉하고
갈매기들도 제집을 찾아 날아간다

객사 창가에 홀로 앉아
저멀리 섬들을 바라보며
음반을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명상속에
지난날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이 정처없이 비오는 저바다 저하늘을
언제까지나 헤매어 보았도다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당신이 그리우면 ―1974년 9월 30일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는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애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왔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 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 1974년 8월 31일 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 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조국은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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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께서 한창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시던시절. 저녁식사때 육영수여사께서  박대통령의 안색을 살피시더니 <세상에는 은혜와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모양> 이라시며 민원편지 한장을 내놓으셨다.

 

박대통령께서 무심히 편지를 읽어내려 가시다가 얼굴이 점점굳어졌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공장에다니면서 미래의신랑이될 고시생의 뒷바라지를하던 순박한처녀의 한맺힌 배신감을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당시에도 출세의 지름길은 고시패스라고 생각한 이파렴치한 고시생은 눈이맞은 처녀와 동거생활을하며 법관의 꿈을키우고 있었다.
공장을 다니며 뒷바라지를하는 동거녀에게 얹혀살며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고시공부에만 전념할수가 있었고 젊은이로서의 욕망을 해소(?)도 할수있어 꿩먹고알먹기의 생활이었다.
순박한 동거녀역시 미래의 낭군을믿고 한치의 서운함도없이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렇게도 기대를하던 낭군께서 고시패스를 하던날!!!
동거녀는 온세상을 다 가진것처럼  부러울게 없이 행복해 했었다. 그러나 그행복도잠시뿐. 그렇게 믿고 정성을 다해 봉사하던 낭군님께서 예전의 그낭군이 아니란것을 서서히 느끼고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배신감에 치를떨었다..고시생의 행동은 완전히 돌변을하여 동거녀에게 완전 등을 돌리고 만것이었다.

 

탄탄한미래와 부유한집안의 규수가 줄을설것인데 궂이 후줄그레한 동거녀에게 미련을둘 이유가없었던 파렴치한은 노골적으로 동거녀에게 결별을 선언하였던것이었다.
이파렴치한 인간에게 그동안 이용만당하고 배신감을 하소연할데가 없었던 동거녀는 결국 청와대에 억울함을 호소를 하게된 것이었다.

식사를 하시던 박대통령께서 숟가락을 놓으시고 편지를 읽으시던 손이 파르르 떨리는가싶더니법무부 장관에게 지금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는자중에 xxx란 者가있는지 파악하여 보고를 하라고 하명을하였다.

그런사람이 교육을받고있다고 보고를하는 법무부장관앞에 순박한처녀가 보내온 민원편지를 내밀은 박대통령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법관으로 임용이 된다고 하면 법의正義를 바르게 세울수가 있겠는가? >  하는 언질을 주셨고 그는 결국 판.검사에 임용이 되지못하는 인과응보의 댓가를 받게되었던것이다.

원래 파렴치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 보다는 남의탓을 하는법.
1979.10.26일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던 비극의 역사 10.26사건.....
만고의역적 김재규를 변론하는 변호인단중 그의이름석자가 올라있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 보다는 정의에 대항하여 불의의 대변자가 되어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준 박대통령에게 저주와 앙갚음을 하였던것이다.

正義의化神  박정희가 사라진 지금의세상에는 정의라는 단어는 먼세상의 이야기가 되었고
파렴치한 고시생과같이 간에붙고 쓸개에붙는 박쥐와도 같이 각종비리와 오명을 뒤집어쓴자들이  완장을 하나씩 찬채 행세를 하고있다.

지금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자.
바로 우리 주위에도 그런 인간말종들이 각종 감투를 뒤집어쓰고 설쳐대고 있지는 않은지?
이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한다.

출처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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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에 대한 기성세대의 향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정치드라마, 영화, 대중매체들을 통해 여러 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요즘 들어 부쩍 기성세대들이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 분에 관한 책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매력과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유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 청렴결백 등 여러 면에서 지금의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숙명처럼 희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은 싸움뿐이다.
 
  언젠가 국회의사당에서 멱살을 잡고 명패를 던지며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한 나라가 망하기 전에 고위 관료층, 권력자들은 서로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에 정신이 팔리고 백성들은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서로 경계하며 도적이 되고 그러다 나라는 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 뉴스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절도를 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을 허다하게 볼 수 있다.
 
  겉보기엔 그럴싸하겠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먼 것만 같다.
 
  ‘돈의 결핍은 범죄이다’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우리의 서민들의 생활은 아직 여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인들은 온갖 제도를 만들어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금까지 인상하고 심지어 담배값까지 인상하며 세금을 거두려고 안달이 나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해 가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일반 서민들과 비교가 안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세를 하고 부동산 투기에 눈이 멀어 있다.
 
  “가진 자들이 더하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 욕하던 386운동권 세대들은 지금 정치권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다.
 
  그러기에 기성세대들이 더욱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지는 않나 싶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무슨 정책만 한 가지 내놓으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특징일지도 모르고 이러한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강력한 힘으로 독재를 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할 방법이 있을까 싶다. 그러한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그 강한 리더십을 본받아야 하진 않을까 한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나라, 국민만을 생각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되고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위한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정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세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크게 보고 느낄 수는 있다. 이 시점에서 한반도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로 건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듯 느껴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 어려운 시절에 실천가능한 구상이었을까?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에 또 한번 놀랐다.
 
  ‘하면 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철저한 계획과 탁월한 인재등용, 말로만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직접 나가 이런저런 실무를 관리 감독하곤 했던 대통령. 그러한 모습이 국민들로 하여금 대통령을 향한 충성심과, 가난한 한국을 부강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불굴의 의지마저 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사로잡은 매력, 추진력
뜬금없는 소리지만 우리나라를 건너 미국으로까지 가서 활동하는 가수 비를 보면 관객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비가 관중을 사로잡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박정희 대통령의 통솔력과 가난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생각과 추진력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인재등용에 대해 개개인의 세세한 정보를 기입하여 만든 리스트 수첩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꼼꼼한 면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외에도 모든 사업이 끝난 후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지적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짚고 해결책을 세워주는 면 등에서는 날카로운 모습 외에 따뜻한 부모의 정마저 느끼게 해주는 자상한 모습도 보여진다.
 
  이러한 면모들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한강의 기적, 새마을운동 등 매번 큰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시작한 우리나라의 기초 기반을 박정희 대통령이 다져 놓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말에 부정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와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김충배 육사교장의 편지글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워보겠다는 굳은 의지와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확신으로, 서독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나라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일화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와 명예, 권력을 다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일국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 가서 눈물을 보이며 간절한 애원과 부탁을 할 수 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기에 서독도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라 믿는다.
 
  이곳저곳에 많은 부를 축적해둔 몇몇 대통령들과는 다르게 ‘자식을 위해서도 미전을 남기지 않겠다’고 스스로 말한 박정희 대통령은 사후에 재산문제로 세간을 시끄럽게 한 적이 없었다. 과연 나였으면 그토록 청렴결백할 수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운 생각을 잠시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의사들은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했다. 워낙 싸구려 손목시계와 낡은 벨트의 허름한 옷차림이었기 때문이다.
 
  후진국 중에도 후진국으로 들어설 뻔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를 급신장시켜놓았으나 박정희 대통령 본인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검소하였다.
 
  감히 이런 말을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은 언제나 심사숙고 했고, 충동적이지 않았으며, 허세에 익숙한 양반식 관리인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신념과 열정을 지닌 꾸며지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 분은 대한민국 최고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탁월한 지도력의 소유자였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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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1.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제작하던 주식회사 태흥 사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이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 코트 제작을 의뢰받은 주식회사 태흥의 權泰興(권태흥) 사장은 방한 바지를 함께 제작, 무료로 납품 했다. 이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감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朴(박)대통령은 버스 안내양들을 어린 나이에 가정형편이 불행하여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라고 썼다. 버스 안내양들의 입장을 이보다 더 가슴깊이 사무치게 대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급 노동자의 삶을 대통령이 챙기는 이런 모습이 當代(당대)엔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 지지 않았다. 홀아비가 된 朴(박)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권력의 장막이 이를 막고 있었고 밖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는 야당과 재야 인사 들의 외침에 가려져 있었다. 朴대통령이 權泰興 사장에게 버스 안내양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시하는 문장들마다 마치 대통령이 안내양을 친딸처럼 여기는 마음씨가 곳곳에 배어있다. (편지 원문) 時下酷寒之節(시하혹한지절) 貴體健安(귀체건안)하심을 仰賀且祝(앙하차축)하나이다. 昨年(작년) 年末(년말)과 今般(금반) 舊正(구정)에 際(제)하여 서울과 全國(전국) 에서 勤務(근무) 하는 뻐쓰 案內孃(안내양)들을 위하여 따뜻하고 品位(품위)있는 防寒(방한)코드와 바지를 製造(제조)하여주시고 特(특)히 바지는 貴社(귀사)에서 無料(무료)로 膳賜(선사)까지 하여 주셔서 感謝不已(감사불이)하는 바입니다. 어린 나이에 家庭形便(가정형편)이 不許(불허)하여 上級學校(상급학교)에 進學(진학)도 못하고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國民(국민)들에게 奉仕(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들에게 조고마한 선물 하나씩을 보내어 그들의 勞苦(로고)를 慰勞(위로)하고 激勵(격려) 할까 하는 뜻에서 貴社(귀사)에게 付託(부탁)을 하였든 것인데 貴下(귀하)께서 그 趣旨(취지)를 忖度(촌탁)하시고 誠心(성심)껏 協調(협조)하여 주신 데 대하여 眞心 (진심)으로 感謝(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 物品(물품)을 받는 案內孃(안내양)들도 이것을 알게 되면 眞心(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보다 더 誠實(성실)한 마음가짐으로 自己(자기)들이 맡은 일에 誠心誠意(성심성의) 熱心(열심)히 일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感謝(감사)를 드리며 貴社(귀사)의 더욱 隆昌(융창)과 發展(발전)이 있기를 祈願(기원)합 니다.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敬具(경구) 글쓴이 신은숙(sys6602) [퍼온글임]
      2. 아랫사람에게 담뱃불 켜 줘, 침실에는 효자손 두고 등긁어 박대통령은 가끔 청와대 식구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를 마실 때 옆자리 사람이 잔을 오래 놓아 두면 손수 젓가락을 저어 주면서 마시라고 권유했다. 박대통령은 담배를 권하고 손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준 대통령으로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박대통령의 침실에는 검도용 목도, 헬스용 자전거, 철봉, 칼빈총 등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등을 긁을 수 있는 '효자손'이 있었다.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의 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할을 할 육영수 여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근혜씨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했지만 잠자리에서 등을 긁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나무로 된 효자 손이 침대를 지켰던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가 있었다.
      만년의 벗 “방울이” 박대통령의 말년, 특히 부인 육영수 여사의 돌연한 죽음 이후는 쓸쓸함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대통령은 늦은 밤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의 곁에서 쓸쓸함을 지켜 준 것은 '방울이'라는 강아지였다. 이런 쓸쓸함을 떨치기 위해 배드민턴, 줄넘기, 턱걸이, 철봉, 물구나무서기 등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도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측근들의 눈에 비친 박대통령은 소탈하고, 정감이 넘치는 할아버지였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영도자였다. 혁명 이후 20년간 자신의 혁명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제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고, 독재자로 불리면서 지켜온 권좌에서 물러설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역사는 10월 26일에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 집무실을 정리하러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달력은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 장씩 뜯겨지던 달력이 그렇게 멈춰 있는 것을 보고, 청와대 식구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달력을 아주 소중한 유품중에 하나로 보관하고 있다. 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는 그 날 그렇게 멈추었지만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까닭에서다.
      3. 박정희와 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술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朴(박)대통령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85년 4월호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기사에서 朴(박)대통령의 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 수록해본다. ...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 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박대통령 주량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74년 이후부터는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
      4. 박정희의 헤진 혁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 1979년10월26일 저녁 경복궁 앞 국군병원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지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에서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헤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5. 박정희와 정조(正祖) 개인의 응어리 민족차원서 푼 초인(超人) "책을 놓지 않았던 유교적 교양인.." 추진력은 골돌한 사색에서... 1979년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칠 때 국립 교향악단이 연주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낮은 음에서 시작되어 고음으로 치다른 뒤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사라지는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곡처럼 박정희는 토종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초인(짜라투스트라)처럼 살다가 영웅에 어울리는 최후를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이 니체의 책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영웅이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새로운 시대를 빚어내는 용광로이다. 그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살 순간에도 "난 괜찮아". 니체가 말한대로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청탁을 함께 쓸어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부패했으나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도 끝까지 맑은 혼을 유지하였다.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그가 인용하여 실은 시의 한 구절은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였다. 그는 이 시를 인용한 뒤에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고 덧붙였다. 이 책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고 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는 곁에 있었던 두여인의 일치된 증언이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 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육영수는 선을 볼 때 박정희가 구두 끈을 푸는 뒷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은 앞 모습은 꾸밀 수가 있지만 뒷모습은 꾸밀 수가 없다. 뒷모습이야말로 그 인간의 참 얼굴일 것이다. 총알이 허파를 꿰뚫고 지나간 뒤에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 그의 뒷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 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 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 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 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 될 생명'이 태어났고 이 인물에 의하여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으니 운명적이란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까지, 그리고 인생의 골짜기까지 떨어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탄로가 나서 전기고문을 받는 가혹한 수사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아낀 많은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생환했다. 그때 동거하던 이 모 여인은 가출하여 그를 버렸고 피난 중 부산의 어느 술집에서 이상한 관계로 재회했다.
      마음은 여리지만 간은 컸던 사람. 박정희는 실연과 가난과 그에 따른 인간적 수모, 식민지 생활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이 응어리로 해서 그는 미국에 도전하는 엄청난 오기를 부릴 수 있었다. 타고난 반골인 그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한 다음,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소심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타며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와 선을 보러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총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그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렸다. 그는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유교적 교양인이기도 했다. 정확한 용어 선택과 늘 핵심을 찌르는 그의 말은 박정희가 1급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추진력은 골똘한 사색에서 나왔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인 성취의 바탕이 되었던 이 정신력을 간과하고는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 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영웅으로 죽게 만든 김재규는 저승에서 박정희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지 누가 아는가.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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