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6>

기독교의 영생관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영생'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영혼불멸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 하느님과 예수와의 교제로써 주어지는 새 생명임과 동시에 마지막 날에 완성돼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임한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보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14).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영생입니다(요한복음 6:56∼57). 하느님과의 교제 단절을 뜻하는 죽음과 반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영생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해 뚜렷한 영생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는 구세주

신약성서에서는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사후 운명문제는 거의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이에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및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했지만 개인의 사후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초기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 과정을 거쳐 완성된 까닭에 신구약 중간기의 상황적 배경을 알지 않고서는 추론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587-539 B.C.) 이후 유대민족은 자신의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야훼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습니다. 암울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하느님의 주권과 이스라엘 구속의 도래, 그리고 그 계시를 땅이라는 제한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인 것으로 넓혀졌습니다. 그러면서 죄와 저주 아래 낡고 퇴폐하여 무서운 파국으로 돌진하는 이 시대와 의인들이 보게될 영광과 기쁨 가운데 다가오는 새로운 하느님의 시대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가 자리잡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유대교의 신학 가운데 나오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실상 인간을 통전적으로 하나로 봤으며, 영혼불멸에 대한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창조됐으며, 죽음 역시 하느님의 의지 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의로운 자의 죽음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구원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이로인해 부활의 개념이 더욱 발전됐습니다.

◇사후보다는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던 예수의 영생관

신약성서 학자인 캐드브리(Henry Cadbury)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청중들은 사후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새롭게 정립하거나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나 그의 청중들에게 있어 사후문제는 논쟁거리나 물음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후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정의나 범위 등을 알려주는 어떤 암시가 예수에게는 없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캐드브리는 예수와 그 무리들은 당시에 널리 통용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미래의 부활과 죽은 자의 심판 등 유대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존 힉(J. Hick) 역시 이미 죽었던, 그리고 지금은 잠들어 있는 의로운 자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며, 하느님의 왕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B.C.2세기경 묵시문학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부활에 대한 대중적 개념은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 등 복음서에 기록된 죽음과 사후에 관한 기록들은(예수가 말했건 혹은 후대 공동체가 말했건 간에) 대체로 유대종교에 편만했던 죽음에 관한 개념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는 죽음의 문제가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죄'라고 부르는 어떤 결정적 요인 때문에 인간생명 안에 들어온 비정상적 상태로서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롬 5:12, 6:23,고전15:22). 바울에게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적 심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죽음은 죄의 값이며, 죽음이 쏘는 아픈 가시의 힘은 죄가 지닌 힘 때문인 것으로 해석합니다(고전 15:55). 따라서 '죄'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듯이 죽음 또한 멸망받아야 할 원수로서 이해되고 있습니다(고전15:26).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에게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살전 4:14)이라는 믿음 속에서 죽음을 극복합니다.

기독교의 영생관의 기초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나 사도 바울 등의 사생관이 보여주는 중요한 점은 현재적 삶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의 사생관은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며, 때로는 상반된 주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만약 이것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리가 필요했다면 이들은 온통 그것에 관심을 쏟고 이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습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 omkwon@segye.com


<사진>승천하는 예수. 사도 바울은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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