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3(월)

“아리랑 불러주던 할아버지… 일제 이야기만 나오면 격노”


 

■ ‘고종 특사’ 故 헐버트 박사 5일 60주기 추도식… 친손자가 기억하는 나의 조부
을사늑약 후 고종친서 들고
美로 건너가 日 침략 고발
1949년 국빈 초청 받고 방한
한국땅에 영원히 잠들어

“1949년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86세의 고령에도 한 달 넘게 군용선을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천까지 오셨으니까요. 선원들이 할아버지를 업고 계단을 오르내릴 정도로 노환이 심했지만 당신께서는 배 안에서 한국에 대한 강의를 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깊었던 분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때 그 부당성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찾았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의 친손자인 브루스 헐버트 씨(70)가 1일 처음 내한했다. 그는 헐버트 박사 60주기 추도식을 맞아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 전 외환은행 부행장)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헐버트 박사는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으나 고령으로 여독을 이기지 못해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다.

헐버트 박사는 슬하에 4남매를 뒀으며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다. 브루스 씨의 아버지는 헐버트 박사의 둘째 아들이다.

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했는데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에 온 것이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날 오전에는 헐버트 박사가 1906년에 세운 노량진교회를 다녀왔다.

“노량진교회는 설립 당시 주변이 무속인 밀집지역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무속인들의 집이 헐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를 세워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나라나 다름없는 이곳에 진작 오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며 “내가 열 살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는데 할아버지가 1910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해 뉴욕에 사실 때 한국의 아리랑과 전래동화를 손자손녀들에게 매일 들려줬지만 일본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매우 격해지셨다”고 전했다.

해군에서 28년 근무한 뒤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자식들에게도 항상 할아버지 이야기와 한국의 문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아이들도 증조할아버지의 자서전(Echoes of the Orient)을 읽으며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제국주의의 부당함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특히 헐버트 씨는 “뉴욕타임스에도 부고기사가 실릴 만큼 할아버지는 당시 미국에서 동아시아 전문가로 유명했다. 이 말(부고기사)을 꼭 기사화해 달라”며 웃었다.

“묘비에 쓰여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대성당보다 한국의 작은 묘지에 묻히는 게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늘에서 웃고 계실 겁니다.”

60주기 추도식은 5일 오전 11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서 열리며 김형오 국회의장,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도 참석할 예정이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왔다. 이후 ‘독립신문’ 창간에 기여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건의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3·1운동을 지지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출처 : 해군 병기사 모임
글쓴이 : 송상교(하128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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