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10 요크타운 항모

미 해군 승리의 견인차

 

1941년 6월말 항행중인 요크타운급 엔터프라이즈 항모의 모습 < 출처 : Public Domain >


운용의 역사

- 반격의 선봉장이 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즉각 보복을 외쳤지만 정작 미군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응징은커녕 일본의 다음 도발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암담한 상황이었다. 만일 이때 일본군이 하와이를 점령하면 미군은 그 넓은 태평양을 포기하고 본토까지 후퇴해서 전략적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그나마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이 자리를 비워 전력을 보존했다는 사실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진주만에 정박 중 일본의 급습을 받고 불타는 전함 BB-48 웨스트버지니아. 이런 와중에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기적적으로 모두 자리를 비워 화를 면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이처럼 전함이 전력에서 대거 이탈한 상황이었기에 향후 항공모함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막중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에 미국은 총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중 훈련용 1척, 경항공모함 2척을 제외하면 (중)항공모함은 5척이었는데, 그중 3척이 요크타운급이었다. 반면 일본은 (중)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로 경항공모함 5척이 추가 배치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진주만 공습의 항공방어전. 제한적이나마 미군 항공기도 일본의 기습에 대항했으며, 이중에는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함재기도 있었다. < 출처 : Public Domain >

태풍을 피하느라 진주만 입항이 하루 늦어지면서 참사를 피한 CV-6 엔터프라이즈는 일본의 재공습을 막기 위해 보급을 마치자마자 12월 9일 출항했고 다음날 초계 중이던 일본 잠수함 I-70을 잡았다. 이는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이 거둔 최초의 격침 전과로 요크타운급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위기에 처한 웨이크섬을 돕기 위해 갔으나 미국이 전략적으로 섬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회항했다.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한 미국은 엄청난 산업 능력을 가동해 각종 물자 생산에 나서고 대대적으로 징병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책 담당자들은 1943년이 되어야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한 기존 전력만으로 일본과 대결해야 했다. 따라서 미국이 전략적 우위에 설 때까지 최대한 현상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1939년 취역 직후의 CV-6 엔터프라이즈. 태평양전쟁 발발 이틀 후 일본의 잠수함을 격침시키면서 미 해군 최초의 전과를 올렸다. < 출처 : Public Domain >

이처럼 어려운 입장이었지만 미군은 국민의 사기를 앙양하고 동남아로 세력을 넓혀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어떻게든 항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고심 끝에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싣고 최대한 멀리 항진한 후 발진시켜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1회성 특공 작전이어서 전술적으로 의미는 없지만 성공하면 양국에 끼칠 심리적인 효과가 대단할 것은 확실했다.

- 항공모함 함대 간 대결이 시작되다

1942년 4월 2일, 요크타운급 2척을 주축으로 구성된 제18기동부대가 출항하면서 작전이 시작되었다. CV-8 호넷에는 16기의 B-25 폭격기가 탑재되었고 엔터프라이즈는 기동부대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약 1,200k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다가간 호넷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은 도쿄, 나고야, 요코하마에 폭탄을 투하하고 대부분 중국, 소련 등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호넷 항모에서 대기 중인 두리틀 부대의 B-25 폭격기들 < 출처 : Public Domain >

투하된 폭탄은 총 64발에 불과했지만 일본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에서 놓친 미국의 항공모함을 제거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려면 미국의 항공모함들과 대결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그런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10,000톤 급 경항공모함 쇼호(祥鳳)가 주축인 소규모 함대의 호위를 받는 상륙군이 파푸아뉴기니의 포트모레스비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CV-8 호넷에서 이함 하는 육군항공대의 B-25 폭격기. 이들의 활약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미국의 사기가 반등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이를 막으려 미국은 산호해(Coral Sea)로 CV-5 요크타운과 CV-2 렉싱턴이 주축인 제17기동부대를 출동시켰다. 미국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은 이를 미국의 항공모함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말라야에서 작전을 마치고 본토로 한창 귀환 중이던 항공모함 쇼카쿠(翔鶴)와 주이카쿠(瑞鶴)가 이끄는 제4항모전단을 산호해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5월 4일부터 역사상 최초의 항공모함 함대 간 대결인 산호해 해전이 시작되었다.

산호해 해전에 참가한 요크타운. 항모에서 출격한 TBD-1 뇌격기에서 찍은 장면이다. < 출처 : Public Domain >

5월 8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은 쇼호가 태평양전쟁에서 최초로 격침된 항공모함이라는 불명예를 얻었지만 쇼카쿠, 주이카쿠는 약간의 보수만 하면 될 정도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미국은 분투를 펼쳤으나 렉싱턴을 상실하고 요크타운도 수개월 정도 수리를 요하는 커다란 피해를 당하고 패했다. 다만 일본군이 상륙을 포기하는 오판을 내리면서 미국은 전략적으로 일본의 팽창을 저지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의 집중타를 맞고 불타는 CV-2 렉싱턴. 결국 자침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미 해군 최초로 격침된 항공모함이 되었다. 이때 CV-5 요크타운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출처 : Public Domain >

일본은 이제 태평양에서 미국이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만 남았다고 판단했다. 미국도 그렇게 생각했을 만큼 요크타운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일본은 미국의 잔존 항공모함을 모두 끌어들여 격멸시킬 커다란 작전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4척의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대규모 함대를 5월 26일 출동시켰다. 그들이 미군을 유인할 미끼로 선정한 장소는 하와이 서북쪽 1,600km에 위치한 작은 제도였다.

1942년 5월말 진주만의 제1번 드라이독에서 정비중인 요크타운 항모의 모습. < 출처 : Public Domain >

그런데 감청을 통해 일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미국은 이를 전세를 바꿀 기회로 보고 정면 대결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항공모함 전력이 절대 열세였기에 산호해 전투에서 퇴각한 요크타운이 5월 27일, 진주만에 도착하자마자 수리에 들어가 불과 3일 만에 함재기 이착함 가능할 수준까지 응급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요크타운까지 재출동하면서 3형제 모두가 역사적인 해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 여전히 계속된 주도권 다툼

이후 6월 4일부터 3일간 벌어진 항공모함 함대 간의 격돌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미국은 격렬한 힘겨루기 끝에 4척의 항공모함을 모두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전함 같은 전투함 부분은 여전히 열세였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항공모함 전력이 극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 앞으로 3년을 더 싸워야 했지만 이처럼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폭주를 정지시킨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응급 수리를 받고 서둘러 참전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적 함대를 격멸하는 무공을 세웠지만 요크타운이 적의 집중 공격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하지만 이를 위해 커다란 희생도 있었다. 만신창이임에도 긴급 수리를 받고 다시 전투에 뛰어든 요크타운이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일본군의 집중타와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자신들이 잡은 항공모함이 산호해 해전에서 망가진 요크타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이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크타운의 참전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패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요크타운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에도 버텨냈지만 결국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했지만 아직은 공세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가면 불리해질 것을 잘 알기에 1942년 내에 결정적인 승리, 즉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잡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초기처럼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 전략적 가치가 큰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과 그 주변 도서를 장악해 좋은 위치를 선점한 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곧바로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동부 솔로몬 해전 당시 전투공역으로 향하는 CV-7 와스프에서 촬영된 엔터프라이즈와 CV-3 새러토가 < 출처 : Public Domain >

8월 7일, 미국 해병대는 과달카날, 툴라기 등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으나 해군이 곧이어 시작된 사보섬(Savo Island) 해전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하면서 순식간 오지에 고립되어 버렸다. 이들을 구원하려고 엔터프라이즈, CV-3 새러토가, CV-7 와스프를 주축으로 구성된 제61기동부대가 출동했다. 그러자 미드웨이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쇼카쿠, 주이카쿠와 경항공모함 류조(龍驤)를 급파했다.

엔터프라이즈 항모의 비행갑판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다. < 출처 : Public Domain >

그렇게 해서 8월 24일부터 이틀간 벌어진 세 번째 항공모함 함대 간 대결이 동부 솔로몬(Eastern Solomons) 해전이다. 새러토가에서 출격한 비행대가 류조를 격침시키는 등의 활약 끝에 미군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며 승리했으나 엔터프라이즈가 세 발의 폭탄을 직격당하며 몇 개월간의 수리를 요하는 중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렇게 요크타운급은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승리를 이끌었다.

수리를 위해 전선에서 이탈하는 엔터프라이즈 항모 < 출처 : Public Domain >

이후 두 달 가까이 과달카날 일대에서 공방을 이어가던 일본은 미국의 항공모함을 잡기 위해 다시 한번 도박에 나섰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을 역임했기에 일본에서 누구보다 미국의 능력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1943년 전에 반드시 결정적인 승리를 낚아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었다. 이번에는 쇼카쿠, 즈이카쿠 외에 경항공모함 준요(隼鷹), 즈이호(瑞鳳)가 투입되었다.

- 신화를 쓴 3형제

이에 맞서 미국은 호네트와 엔터프라이즈 형제가 출동했는데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요크타운처럼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의 의지도 대단했지만 일본은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여타 전투함도 미군보다 2배나 많이 투입했을 정도로 이번 해전에 거는 기대가 컸다. 마침내 10월 26일 산타크루즈 제도(Santa Cruz Islands) 일대에서 4번째 항공모함 함대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일본군의 맹폭을 받는 호넷. 결국 자침으로 취역한 지 1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 Public Domain >

이번에는 일본이 먼저 미국 함대를 발견했다. 일본 함재기들이 정찰기가 타전한 공역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엔터프라이즈는 소나기구름 아래로 진입한 상태였다. 결국 노출된 호넷이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의 함재기들도 쇼카쿠와 즈이호를 맹폭해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한 호넷은 자침이 결정되었고 결국 두 번째로 생을 마감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구름이 물러가면서 엔터프라이즈가 일본군에 노출되었고 또다시 집중 공격을 당했다. 고군분투했지만 미국은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10월 27일, 눈물을 머금고 전투 공역에서 퇴각하면서 격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은 호넷을 잃고 엔터프라이즈가 또다시 대파되면서 태평양에서 당장 가동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없게 되었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일본이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쇼카쿠가 대파되면서 작전 투입이 가능한 (중)항공모함이 주이카쿠 한 척만 남았다. 아직은 경항공모함이 미국보다 많지만 문제는 머지않아 미국이 한창 건조 중이던 에식스(Essex)급 (중)항공모함들을 속속 데뷔시킬 예정이었던 반면 일본은 피해를 보충할 신조함 획득이 난망했다. 더구나 산타크루즈 해전을 끝으로 정예 조종사, 항공모함 운용 요원을 모두 상실해 버렸다.

퇴역 후 뉴욕 해군 조선소에 보관 중인 엔터프라이즈는 미 해군의 자부심이었다. 이후 해체되었지만 함명은 최초의 핵추진항공모함 CV-65에 승계되었다. < 출처 : Public Domain >

결국 일본은 전력 보존을 위해 모든 항공모함을 본토로 철수시키고 항공모함 함대 간 대결을 회피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난 진주만 급습 이후부터 미국을 거세게 몰아붙였던 일본 항공모함들이 더 이상 주인공으로 활약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의미였다. 반면 1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대파된 엔터프라이즈는 곧바로 수리를 마치고 11월에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후 과달카날 해전,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만 해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처럼 역사적 전투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며 활약했다. 1945년 5월 14일에 있었던 가미카제 공격으로 81명이 사상당하며 대대적인 수리를 요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종전 때까지 불침의 명성을 유지했다. 알아본 것처럼 요크타운급 3형제는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이는 신화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변형 및 파생형

CV-5 요크타운(Yorktown)

< 출처 : Public Domain >

기공 1934년 5월 21일
진수 1936년 4월 4일
취역 1937년 9월 30일
격침 1942년 6월 6일

 

CV-6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 출처 : Public Domain >

기공 1934년 7월 16일
진수 1936년 10월 3일
취역 1938년 5월 12일
퇴역 1947년 2월 17일

 

CV-8 호네트(Hornet)

< 출처 : Public Domain >

기공 1939년 9월 25일
진수 1940년 12월 14일
취역 1941년 10월 20일
격침 1942년 10월 26일


제원(CV-5 요크타운)

경하 배수량: 19,800톤
만재 배수량: 25,500톤
전장: 230m
선폭: 33.38m
흘수: 7.9m
추진기관: 밥콕 윌콕스 보일러 4축 파슨스 터빈(89MW)
속력: 32노트
무장: 8 × 5인치(38구경장) 함포
4 × 4연장 1.1인치(75구경장) 대공포
24 × M2 기관총
함재기: SDB, TBF 등 90기 탑재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上] 남도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