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중략) 산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 모습이 거슬려 불끈 치밀어 오르는 성미를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졌다가 오히려 집단 구타를 당했다. (중략) 그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꽤 잘한 편이었는데, 더 이상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각도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이른바 ‘비행 청소년’이었다. 2008년 1월 출간한 자서전 『내 인생의 선택』에서 그가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박 후보자는 이후 진학한 서울 관악구의 남강고에서도 ‘갈매기 조나단’이란 음성 서클에 가입했다. 서클 친구가 다른 서클 친구에게 몰매를 맞고 오자 그는 집단 패싸움을 벌였고, 이 일로 자퇴를 선택했다. 이는 최근 박 후보자에 대한 청와대 인사검증 과정에서도 논란이 됐다고 한다.
박 후보자는 자퇴 이후에도 한동안 방황을 이어갔다. 다음은 그가 책에 직접 술회한 내용이다. “그때부터라도 마음을 다잡고 입시공부에 매달려야 했는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네에서 껄렁껄렁 노는 선후배, 친구들 틈에 끼어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내 꿈은 여성가족부 장관”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008년 1월 출간한 자서전 '내 이름의 선택'. 중앙포토
정치인의 자서전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최고의 사료(史料)다. 스스로에 대한 포장을 적당히 걷어내면, 저자의 알맹이가 보인다. 박 후보자의 자서전에도 그의 성장기부터 정치 입문 과정, 여러 인맥과 각종 현안에 대한 후보자의 입장 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박 후보자는 자신이 방황한 근본 원인으로 불우했던 가정환경을 꼽는다. 박 후보자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소아마비를 앓은 후천적 장애인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고 한다.
박 후보자는 “잠시 집에 머무르다 아이를 낳고, 또 훌쩍 나가버리는 것을 반복하는 삶을 계속하셨다”며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고, 어머니와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
대신 박 후보자는 어머니에 대한 각별함을 책 곳곳에 표현했다. 그는 “나의 유년에 우울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명랑하고 천진하게, 그리고 구김살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아버지와는 별개인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랑의 힘이었다”고 적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떤 이는 황당무계한 꿈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는 꼭 그 꿈을 이루고 싶다. 바로 여성가족부 장관이 되는 것”이라고 썼다.
이광범ㆍ이용구와 교분…LKB 인맥
이용구 법무부 차관이 5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 차관은 사법연수원 시절 동기생인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인연을 맺었다. 연합뉴스
학창시절 박 후보자의 혼란스러웠던 자아를 바로 잡아준 것은 아버지나 다름없던 할아버지였다. 그의 자퇴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다 망했다. 자식 농사 다 틀렸다. 모든 희망이 다 무너졌다”며 머리를 벽에다 대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번쩍 눈이 뜨이며 정신을 차리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방위로 파출소에서 근무하며 군 복무를 마친 박 후보자는 1985년 스물네살의 나이로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다. 격동의 80년대, 그는 법대 과대표를 맡으며 여느 학생들과 같이 전두환 정권에 대항해 시위를 했다고 한다. 다만 1주일에 한 번씩 학교를 찾아와 “너는 데모 대열에 끼지 마라”는 할아버지의 당부 탓에 이른바 ‘언더서클’엔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주변인으로 남는 것”이 그가 학창시절 내린 결론이었다.
대학 졸업 뒤 1991년 사법고시에 합격하며 박 후보자는 친여 성향의 인사와 여러 교분을 쌓았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선 23기 동기생이던 이용구 현 법무부 차관과 안면을 텄다.
그는 “이용구라는 연수생이 찾아오더니 내가 이번 (연수원) 편집부에 가입한 연수원생 중 제일 나이가 많다며 편집장이 돼달라고 부탁했다”며 “‘이 친구가 무슨 자격과 권한으로 내게 편집장을 맡아달라고 요구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안팎에서 실천하고 고민했던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의 좌장격이 이용구였다”고 술회했다.
연수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박 후보자는 1994년 판사로 임관한 뒤 진보 성향의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박시환 전 대법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이광범 LKB파트너스 대표 등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민석 탓에 정치” “文ㆍ이광재 충성경쟁”
2002년 현직 판사로 활동하다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법률특보로 참여한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 중앙포토
박 후보자는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 캠프에 합류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판사직을 던진 결정적인 이유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꼽았다. 다음은 그가 책에 쓴 내용이다.
“김민석, 그가 2002년 10월 17일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로 합류했다. (중략) 그는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선택을 했다. 그것은 배신이었고 정통성에 대한 반역이었다. (중략) 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내 진로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민석이 내 가슴속 깊이 이글거리던 정의감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는 청와대 민정2비서관으로 부임했다. “많은 사람이 내 능력을 칭찬했다. 급기야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안희정, 이광재, 이호철에 버금가는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게 스스로 평가다. 하지만 그는 ‘굿모닝시티’ 사건과 관련해서 한 신문사에 여권 인사의 연루 가능성을 흘린 사람으로 지목돼 청와대의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박 후보자는 한 언론의 특종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술김에 전화를 받아 시중 정보지에 나온 정도의 이야기를 서로 나눴는데, 이게 다음 날 한 신문의 1면 톱기사로 보도됐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이호철 비서관과 문재인 수석에게 정보의 제공자가 나라고 말했고, 사건의 전말에 관해서 얘기를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대통령은 매우 화를 내셨다. 나에 대한 믿음이 경솔함과 공명심으로 나타나자 많은 실망을 하셨던 것 같다. 거기엔 나에 대한 많은 음해성 보고들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박 후보자는 그 무렵 청와대 내부에서의 이른바 ‘충성 경쟁’도 책을 통해 공개했다. 그는 “권력 투쟁까진 아니지만, 서로 간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 충성 경쟁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 충성 경쟁의 핵심에 문재인 수석과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이어 “직제상 나는 문재인 수석의 하급자였고, 이광재 실장과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며 “처신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고 그것이 문재인 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으로부터 서운함을 사는 원인이 됐다”고 적었다.
“검찰개혁은 靑ㆍ대통령이 수사 간섭 않는 것”
2003년 1월 9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인수위에서 열린 법무부`검찰청 업무보고에 참석한 당시 정상명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우)과 박범계 정무분과위 박범계 위원이 업무보고에 앞서 얘기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책에선 박 후보자의 검찰에 대한 인식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근무 경험을 토대로 “대한민국은 검찰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검사들은 너무도 많은 영역에서 권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고, 국정운영 전반에 개입돼 있을뿐더러 그들의 의식 하나하나는 그들이 이 나라를 유지하고 지키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조직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검찰개혁 방향에 대해서 그는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개혁은 청와대와 대통령이 검찰의 수사를 지시하거나 간섭ㆍ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그거 하나만이라도, 소신 있는 수사가 가능한 분위기를 만든 것만으로도 검찰 개혁은 이미 80% 달성”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