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암을 떠나서 신륵사에 도착을 합니다. 오늘도 먼저 현판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봉미산 신륵사라고 되어 있지요. 봉황이 참 크기도 하네요, 설악산에 봉황의 정수리인 봉정암에서 시작되어 이곳 여주에 이르러서야 봉황의 꼬리가 드리웠으니 말입니다.

 

여강에서 누런색과 검은색의 용마가 나와 날뛰어도 제압을 하지 못하는데, 인당법사가 신묘한 굴레로서 제압하였다는 전설에서 신륵사의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누렇고 검은 용마를 홍수에 불어나 밀려오는 흙탕물로 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부처님의 십호 중 하나인 조어장부와 관련하여, 날뛰는 사람의 욕심을 잘 제어하는 신륵(신묘한 굴레)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문에도 주련을 걸어놓았습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되고, 백년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에 티끌된다라는 말이네요.

 

 

신륵사는 본전이 극락보전입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사찰로 지정이 되어 이름조차도 보은사(報恩寺)가 되었던 적이 있으니, 본전이 극락보전일 수 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극락보전 앞에 있는 누각인 구룡루의 구룡은 아마도 부처님 탄생 때 나타나서 시원한 물과 따뜻한 물로서 씻겨 주었던 구룡토수(九龍吐水)에서 나온 말이겠지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사르 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요사이 답사의 행태를 보면은 법당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문화재만 둘러보고 가는 경우도 눈에 많이 보이는데요. 아무리 답사가 문화재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고 하여도 사찰의 주인인 부처님을 먼저 찾아 뵙고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극락보전의 오른쪽 문 옆에 매달린 이것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민속과 관련되는 물품으로 생각을 했는데 어머님께 여쭈어 보니 문을 열었을 때 문이 벽과 부딛쳐 벽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용도로 이렇게 만들어 쓴다고 하네요.

 

 

신륵사는 참 용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닫집에도 용이 멋진 모습으로 영의주를 희롱하고 있네요. 연꽃도 생생한 것이 보통 정성을 들여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탑이 좀 특이하지요. 우리나라에는 나지 않는 대리석을 구해서 탑을 만들었다고 하니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탑을 하나 가지게 되었지요.

 

 

 화강암보다 표현하기가 조금 쉬워서 그럴까요. 용의 비늘까지 섬세하게 새겨져 잇지요. 전설에 아홉마리의 용을 항복 받고 그 용을 달래기 위하여 구룡루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니 그 용일까요? 아니면 나옹스님의 다비식 때 오색구름이 어리고 용이 나타 호상을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용일까요?

 

스러져 가던 신륵사가 나옹스님을 계기로 하여 다시 살아난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다비식에 나타났던 그 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아주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나옹스님이 심으셨다는 향나무 앞에서 한 컷!! 뒤에 한칸 짜리 조사당에 바로 아래의 진영과 조사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고려말을 대표하는 삼화상으로 지공, 나옹, 무학의 세분 스님들이 십니다.

 

 

보제존자 석종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도는 나옹스님이 회암사에서 떠나 밀양의 형원사로 가시다가 병이 깊어 열반에 드시게 되자, 사리탑을 만들어 모신 것입니다. 마치 금산사나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축소해서 모셔 놓은 것 같지요. 이후로 조선시대 후기에 이보다 더 간략화되어 조성되는 석종형 부도의 초기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신륵사 보제선사 석종비 즉 나옹스님 사리탑비입니다. 사리탑비들이 귀부 위에 비석과 이수가 있는 장엄한 형태에서 고려말에 이렇게 기단과 지붕돌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형태로 변환이 됩니다.

 

형태는 비록 간력화 되었더라도 지붕돌에 기와골 등도 정교히 새겨 졌으며 기단부에도 앙련 등을 정성껏 새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입니다. 이름도 참 그렇지요. 석등은 특별히 따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이름을 정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화사석은 납석으로 만들었는데, 비천상과 모서리에는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창을 보통은 4면에 하나씩 하고 사이에 사천왕 등을 새기는데, 8면으로 다 화창을 낸 것이 특이하지요. 손에 공양물을 올린 접시를 들은 공양비천상이 독특해 보입니다. 서역의 냄새가 좀 나지요. 아마도 나옹스님의 스승이신 지공스님이 인도분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석종 뒤로 해서 산 능선을 타고서 대장각기비 쪽으로 가다보니 문득 소나무에 꽃다발을 붙여 둔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수목장을 한 것 이네요. 그냥 화장을 해서 뿌리면은 조금 서운하고, 묘소를 만들면은 후에 관리나 묘소로 쓸 땅의 소모 등 문제가 있는데 이렇게 수목장을 하면은 두가지를 다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입니다. 고려말 이곡이 대장경을 인출하여 대장각을 짓고 모시기를 발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나옹스님의 제자들과 이곡의 아들인 목은 이색이 합동하여 대장경을 인출하여 모시고 그 내용을 비석으로 세웠는데, 글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서 썼다고 합니다.

 

 

신륵사는 고려 때 벽절로 불리웠는데 바로 이 벽돌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라시대 경주와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전탑이 고려시대 말에 남한강 가에 세워지게 된 연유는 확실치가 않네요.  어찌 되었던 세워진 위치로 보아서 홍수를 감시하고, 강을 통한 뱃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귀의처가 되며 동시에 위험한 지역 임을 알려주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비보탑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전탑은 주기적으로 벽돌을 교환해 주어야 합니다. 신륵사 전탑도 여러차례에 걸쳐서 보수를 받았겠지요. 예전의 별돌들에는 하나 하나에 이렇게 연꽃무늬를 새겨서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후대에 끼워 넣은 벽돌들은 그저 밋밋하니 때깔이 나지 않는군요. 세상을 보는 안목들이 이것 밖에 안되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 탑이 있는 자리가 나옹스님의 화장터가 아닐 까 합니다. 이곳에서 다비를 하여 모셨겠지요. 그리고 후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나옹스님의 호인 강월헌을 따서 누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누각에서 보는 경치가 아주 시원한 것이 그만이지요. 마음을 다스려 고요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면 깨달음의 본체인 달이 삼매의 강물 위에 비친다는 말인것 같습니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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