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의 도시 여행이 6시간 정도 걸려 끝났다.

호수와 산이 더불어져 루체른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호수에서는 유람선 및 작은 보트, 발로 구르는 배도 즐길 수 있으며, 케이블카, 곤도라를 타고 산에 오를 수 도 있다. 또한 구시가지를 경험 할 수도 있다. 다양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스위스에서 산은 인터라켄을 가야하고, 호수는 취리히가 아름답고, 시가지는 바젤이 아름답다. 하지만 루체른의 매력은 이 모든 것을 갖춘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아간다! 꿈을 꾸며!
글쓴이 : 바젤리안 원글보기
메모 :

 스위스 여행 중 찍은 몇몇 사진을 모아 올립니다. 다른 글 들에 있는 사진도 있고 없는 사진도 있네요!

 융프라우 정상

 

 

 알프스에 봄이?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바젤 마크플라츠 토요일 장

 

 바젤 동물원의 사자 - 사자를 이렇게 가까지 볼 수 있다니?

 바젤의 라인강 전경

 바젤 문스터 대성당

 구시가지

 바젤 근교-라우펜 버그

 

 

 

 루체른 - Chaple bridge

 루체른 호수

 

 

출처 :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아간다! 꿈을 꾸며!
글쓴이 : 바젤리안 원글보기
메모 :

 루체른의 전경이 아름답다.

 

 

 

 

 

 

 

성곽 옆에 육상 트랙이 있고 그 옆에 운동장이 있다. 이런걸 부조화라고 해야 하나?

 

 

 

 

 루체른에는 많은 공사가 진행 되었다. 예산이 남나?

 고거리의 COOP이 눈길을 끌며 그 반대에 조형물이 아름답다. 이 네들 건물에는 조형물이 많다. 만들기도 쉽자 않겠지만 부치기도 쉽지 않았을 듯

 Water spike이다.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1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바로 앞에서 뭘하는줄은 모르겠는데 공사중이다.

 

 

 

 뒤로 Chapel bridge의 Water tower가 들어온다.

 

 

출처 :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아간다! 꿈을 꾸며!
글쓴이 : 바젤리안 원글보기
메모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799번지.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이 계신 감성마을입니다. 올 겨울의 끝자락, 선생님을 다시 한번 뵙고 싶어 찾아간 길입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아티스트 밥장님의 차로 출발. 아티스트 밥장님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라디오에서 북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전방위적 작업을 가열차게 ...
출처 :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
글쓴이 : 김홍기 원글보기
메모 :
순록과 함께 사는 비밀로 가득한 차탄족   차탄족 거주지가 있는 홉스굴 호수. 몽골에서 가장 신성한 호수로 손꼽는 곳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신비로운 종족입니다. 영하 40도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아랑곳없이 잠을 자는 사람들이니까요. 순록을 타고 그들은 순록이 더 이상 가지 않는 곳까지 이...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고비를 건너는 단 하나의 방법

 


몽골의 지프차 운전수 2명이 고비 여행을 앞두고 초원의 모미 앞에 잠시 서 있다.

 

몽골에 가기 전에는 몽골이 지구의 끝자락처럼 아득했다. 몽골에 도착해서는 이제 고비가 몽골의 끝자락처럼 아득하다. 아시아에서 아직도 탐험이나 모험을 해야 할 곳이 있다면, 몽골이 그렇다. 더더욱 고비에 가는 것은 사실 여행보다 고행에 가깝다. 고비를 건너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냥 가는 것이다. 내가 탄 지프는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외곽의 ‘어버’(돌서낭)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 멈춘다. 고비까지의 무사운행을 비는 몽골의 풍습이다. 바퀴로 한 바퀴 돌고 나면 두발로 또 한 바퀴를 돌며 운전수는 무사귀환을 빈다.

 


고비 가는 길에 만난 초원의 야생마.

 

이제부터 일주일간 운전수는 덜컹거리는 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어쩔 수 없이 여행자는 운전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고비의 길은 마치 ‘비포장길의 진수를 보여주마’ 하는 표정으로 여름 햇빛 속에 맹렬하게 누워 있다. 끝도 없고, 물도 없고, 그늘도 없는 길. 울란바토르에서 몇 개의 고개를 넘어가면 곧바로 지루한 지평선이 펼쳐진다. 하늘과 맞닿은 초원. 초원을 굴러다니는 구름. 하늘과 초원 사이로 이따금 양떼가 지나가고, 소떼와 염소떼가 지나가며 초원과 하늘의 간극을 간신히 떠받친다.

 

'초원의 100차선 도로'라 불리는 몽골초원의 수십 갈래 길.

 

비로소 사막이 열리고, 적막이 펼쳐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의 길에서는 바퀴가 달려간 자국이 고스란히 차선이 된다. 10차선, 20차선, 갈수록 늘어나는 차선과 갈증. 아침에 출발해 점심 때가 되어서야 작은 마을을 만난다. 10여 채의 건물과 수백마리의 양떼들이 점령한 마을. 여기서 밥 먹지 않으면 저녁까지 굶고 마는 정확히 끼니에 맞춰 나타난 쵸크토부 마을. 여기서 밥 먹고 출발하면 다시 저녁 때쯤에야 마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느닷없이 초원에 소나기가 흩뿌린다. 소나기 너머로 무지개가 걸려 있고, 무지개 사이로 양떼와 야생마 몇 마리가 풀을 뜯는 비현실적인 풍경. 길가에는 내내 야생 파꽃 무리가 일렁인다.

 

고비 가는 길에 만난 무지개.

 

하루종일 달려서 덜컹거리는 지프는 만달고비에 도착한다. 비로소 사막이 열리고, 적막이 펼쳐지는 곳. 여기서부터 초원이 다하고 진정한 모래의 세계가 펼쳐진다. 말이나 양떼 대신 모래벌판에는 이제 낙타가 자주 눈에 띈다. 가도가도 모래땅. 다시 하루를 꼬박 달려서야 공항이 있는 사막도시 달란자드가드에 가 닿는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사막이 펼쳐진 홍고린엘스까지는 또다시 하루를 달려야 한다. 사막으로 가는 길목에는 얼음 계곡으로 알려진 욜링암이 있는데, 사시사철 녹지 않는 빙하가 이곳에 있다. 고비를 지척에 두고 빙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고비 인근의 욜링암. 사막을 지척에 두고 얼음계곡에 빙하가 있다.

 

내내 말이 없던 운전수는 초원의 언덕에 차를 세우고 손가락을 가리킨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로 드디어 모래의 바다, 고비사막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란바토르에서 꼬박 3일을 달려서야 고비사막에 도착한 것이다. 엄격히 말해 이곳은 아직 사막이 아니라 사막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홍고린 엘스다. 때는 저녁이어서 석양 속의 사막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아침에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침 햇살이 사구에 부딪쳐 고비사막은 더없이 눈부신 황금 물결을 이룬다.

 

초원의 한복판에서 만난 유목민의 무리.

 

아침이 되자 게르 한 편의 세면통에서는 눈물겨운 풍경이 연출된다. 기껏해야 2리터쯤 물이 담긴 세면통의 아랫꼭지를 누를 때마다 한방울 한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고, 게르 주인인지 여행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몽골인은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 세수도 하고 목까지 닦는 것이다. 사실 몽골에서는 우리가 먹는 2리터 생수 한 통이면 온가족이 세수하고 남겨서 이튿날까지 세수할 분량이다. 어차피 이 세면통은 여행자를 위한 것이다. 고비의 원주민은 세수하는 것조차 사치에 가깝다. 나도 세면통으로 가 현지인이 하는 모양으로 물방울을 받아 세수를 한다. 겨우 물 한 모금 정도로 세수를 마치고 나자 느닷없는 모래돌풍이 세수한 내 얼굴을 덮치고 간다. 고비의 원주민이 굳이 씻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내가 방금 경험한 것이다.

 

고비사막을 바라보며 서 있는 황혼 무렵의 낙타떼.

 

낙타를 타고 원초적 우주에 빠지다


정말로 고비고비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는 고비를 인생의 고비에 비유하고, 누군가는 ‘고비의 고비’를 이야기한다. 고비의 비유는 이제껏 너무 많아서 어떤 비유도 참된 고비를 수사하지 못한다. 오로지 여행자의 목적은 ‘시간의 무덤’인 저 사막에 발목을 내리고, 푹푹 빠지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기까지 가는 방법은 낙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여기서는 낙타만이 사구를 견디고, 모래땅을 건널 수 있다. 낙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은 덩달아 기우뚱거린다.

 


고비사막. 사막 위로 펼쳐진 눈부시게 푸른 하늘.

 

사막은 이제 아침의 황금빛을 벗어버리고 흰색에 가까운 모래빛으로 바뀌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구의 곡선무늬와 물결무늬는 다가갈수록 선명하고 분명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사막이다. 난생 처음 나는 낙타의 등에서 내려 사막의 모래를 발목으로 느낀다. 한발한발 디딜 때마다 발목이 잠긴다. 이런 사막에 빠지기 위해 나는 왔다. 누군가는 고비에서 모래알만한 존재감을 안은 채 돌아가고, 누군가는 낙타의 눈에 비친 또다른 고비를 발견한다지만, 사막에서 내가 본 것은 사막의 궁륭에 뜬 낮달과 맹렬한 직사광선과 사막의 무늬를 제압하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사막의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싹을 틔운 갸륵한 새싹들이다.

 


낙타를 타고 사막 깊숙이 들어가는 여행자들.

 

이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며칠의 일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사구의 꼭대기에 올라 말없이 모래의 풍경과 모래의 시간을 본다. 고비는 그 자체로 ‘모래땅’, ‘사막’이란 뜻이다. 그러니 ‘고비사막’이란 말은 의미의 중첩일 뿐이다. 흔히 고비에서 우리가 사막이라고 부르는 모래언덕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황량한 벌판이거나 성긴 풀이 듬성듬성한 모래땅이다.

 


고비사막 사구 위에서 바라본 고비의 풍경.

 

살아 있는 동안, 다시 고비에 올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비가 아니더라도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나는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늘 내 앞의 광경은 나에게 마지막 풍경이다. 굳이 고비를 넘어갈 이유가 내게는 없다. 고비를 만나서 고비를 떠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고비에 대한 예의다. 낙타를 타고 나는 다시 사막을 빠져나간다. 그동안 사막까지 나는 3일간 달려왔고, 3일을 더 달려 울란바토르에 도착할 것이다.


덜커덩, 황무지, 도대체, 으악!


또다시 계속되는 모래땅, 허허벌판, 황무지, 도대체, 으악, 지평선, 적막, 단조로움, 덜커덩을 견디며 나는 또 이 모래벌판을 달려야 한다. 홍고린 엘스에서 2시간을 달려가 만난 오아시스. 사하라의 오아시스처럼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벌판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다. 고작해야 그곳에는 샘이 솟는 우물이 한 채 있을 뿐이었고,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을 가축에게 먹이기 위해 긴 구유통을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곳의 오아시스 우물은 사방 수십 리에 걸쳐 사는 고비의 원주민과 가축들의 생명수이다.

 


고비 인근 벌판에서 만난 오아시스. 이 우물이 주변의 유목민과 가축을 먹여살린다.

 

한 양치기가 우물물을 길어 구유에 붓자 주변에 있던 수많은 염소떼와 양떼가 몰려와 목을 축인다. 누군가는 오아시스의 샘물이 무슨 대단한 구경이냐 하겠지만, 인근의 원주민과 아이들의 상당수는 매일같이 이 우물 주변에 나와 지나가는 여행자를 상대로 장사를 한다. 너무 조악해서 그냥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을 것들을 버젓이 그들은 팔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장사 수단은 조악한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불쌍한 표정에 있다. 아이들의 불쌍한 표정이 배부른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이다.

 


초원에 외떨어진 유목민의 게르.

 

가도가도 초원이고 지평선인 풍경은 지루하도록 계속된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되었을 때, 고비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마지막 밤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게르 밖으로 나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의 물결을 구경했다. 툭하면 초원으로 떨어지는 별똥별과 지평선 위로 곧바로 뜨는 월출도. 초원의 별똥별은 내가 별똥별의 추억을 새기던 어린시절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세계로 나를 몰입시켰다. 지구에는 아직도 이렇게 별똥별이 수없이 쏟아지는 곳이 있고, 은하의 물결이 다 보이는 곳이 있구나, 라고 나는 막 감격했다. 원초적이고,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풍경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몽골이고, 몽골의 진면목이다.

 


게르에서 만난 몽골 청년이 올가(올가미)를 이용해 야생마를 낚아채고 있다.

 

고비를 떠나 울란바토르를 향해 갈 때, 난데없이 소나기가 퍼부어댔다. 고비로 오는 날에도 소나기를 만났는데, 가는 날에도 똑같이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나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돌풍과 함께 바람이 차서 여름인데도 날씨는 초겨울과 같았다. 내가 탄 차도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는지 연달아 두 번이나 펑크가 났다. 그런데도 운전사는 느긋하게 우리의 70년대식 펌프기를 꺼내 설렁설렁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있다. 계속되는 비와 돌풍. 바람을 넣은 차가 거의 울란바토르 인근까지 와서야 하늘은 잠잠해졌다. 익숙한 초원의 언덕을 넘어서자 불 켜진 도시의 풍경이 눈앞에 주욱 펼쳐진다. 저녁 7시 30분. 다시 나는 울란바토르에 입성한 것이다.

 


유목민의 게르 내부 풍경. 이 대가족이 모두 게르에서 먹고 잔다.

 

<여행정보>

몽골을 여행하려면 우선 몽골 몽골 대사관(02-794-1951)에서 비자(3일 소요, 38,000원)를 받아야 한다. 인천-울란바토르 간 항공편은 몽골항공과 대한항공이 1일 1회(여름 기준) 운항하며, 항공료는 60~75만원선(왕복, 5시간 소요). 울란바토르에서 지프차를 렌트할 경우 왕복 520달러. 기름값 별도 지불. 숙소는 울란바토르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 기준 1일 5달러, 트윈 14달러, 고비 게르 숙박 15~30달러. 식사 3000~5000투그릭(3천원~5천원). 울란바토르 MK마트에서 라면, 김치 등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 울란바토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신용카드 사용 불가. 고비에 갈 때는 지프가 실을 수 있을 만큼의 생수를 싣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 이 기사는 2008.01.23일자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에 실었던 <이용한의 몽골기행 2> 기사에서 내용과 사진을 더 첨부한 것이며, 기사의 저작권은 이용한(dall-lee)과 한겨레신문에 있습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몽골의 한류는 어떤 모습

 

 

몇 년 전 몽골에서는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울란바토르의 뒷골목은 지금까지도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한을 흉내내는 사내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이들은 복장조차도 <야인시대>에서 나온 옛날식 양복에 흰색 중절모를 쓴다는 것이다. 울란바토르 UB 게스트하우스 인근에는 <야인시대>에 나온 안재모 사진을 그대로 갖다 쓴 <야인시대> 레스토랑까지 있다.

 

몽골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야인시대>의 후광으로 울란바토르 시내 한국식당 <야인시대>도 인기다. 

 

몽골에서는 TV를 틀면 언제든 한국의 드라마를 볼 수가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고비사막 인근 달란자드가드에서 나는 몽골의 한 가정집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데, 온 가족이 모여 밤 늦게까지 TV를 시청하고 있는 거였다. 바로 90년대 한국에서 방영된 되게 오래된 한국의 드라마였다. 내가 손짓을 하며 TV를 가리키자 드라마를 보던 몽골 부부는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다는듯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울란바토르의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한국영화 비디오테잎과 한국에서 수입한 영화를 그대로 복제해온 영화가 인기다.

 

울란바토르 국립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중심가에는 한국식 미용실이 꽤 많이 들어서 있다.

 

몽골에서 한류 바람이 분 것은 꽤 오래되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창 한류 붐이 일어날 때 몽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몽골이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것은 드라마나 가수 등 특정 연예인을 중심으로 한류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0년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몽골은 한국을 경제모델로 삼았고, 몽골의 젊은이들도 한국을 ‘동경의 나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화장품 가게 <미샤>와 한국 문구점 <모닝글로리>.

 

지금도 울란바토르 국립백화점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에서 건너온 화장품 가게 ‘미샤’와 한국의 문구점 ‘모닝글로리’, 한국식 이름의 간판을 내건 미용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미용실의 창문에는 김희선을 모델로 한 화장품 광고가 몽골어 카피로 걸린 풍경도 볼 수 있다. 휴대폰도 울란바토르에서는 SK텔레콤이 인기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연예인과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젊은이도 많다. 몽골을 대표하는 울란바토르대학에서는 한국어를 아예 제2외국어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울란바토르에서 만나는 대학생들과는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울란바토르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서울정>과 <서울의 거리>.

 

몽골에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중고차가 울란바토르에 다 있다. 어떤 버스는 강남학원 간판을 달고 혹은 서울의 노선과 번호판을 버젓이 붙이고 시내를 질주한다. 어떤 승합차는 아직도 무슨무슨 태권도학원이거나 유치원 이름을 그대로 붙여놓고 있다. 중고차일지언정 차가 한국산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1990년 한몽수교 이후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따로 ‘서울의 거리’가 한복판에 생겼고, 한국식 정자인 ‘서울정’도 국립백화점 건너편에 생겼다.

 

울란바토르 자이산 남쪽에 자리한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사회주의 혁명기념 승전탑이 있는 울란바토르의 자이산에는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이태준 선생(1883~1921)의 기념공원도 남쪽 기슭에 자리해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전쟁고아를 받아 보살펴준 나라도 몽골이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한 이후 민간교류가 꾸준히 늘어난 것도 한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울란바토르에는 한인수퍼 를 비롯해 꽤 많은 한국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한국 음식점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도 꽤 많은 편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인슈퍼마켓 ‘MK마트’는 울란바토르를 여행하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슈퍼마켓이다. 이곳에는 한국의 김치를 비롯해 컵라면과 라면, 밑반찬 류가 대대수 구비돼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유명한, 론리 플래닛에도 등장하는 UB 게스트하우스도 운영자가 한국인이다. 그러나 최근 UB 게스트하우스는 한국인 푸대접과 바가지 요금으로 여행자들 사이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울란바토르 대학의 학생들은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므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사실 울란바토르에서 소매치기보다 무서운 게 한국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행사 대표는 말이 통한다는 것과 한국인이라는 인연을 강조하며 오히려 한국인 등쳐먹는 짓거리를 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나 또한 피해를 당한 당사자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처럼 당한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행사나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홉스골이나 고비를 간다고 했을 때, 이들은 통상적인 경비의 2~3배쯤 바가지를 씌우곤 한다.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예약을 해지하면 위약금을 왕창 떼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일행은 예약을 취소해 위약금을 물고도 여행사에서 제시한 금액의 절반 정도로 홉스굴을 여행하고 왔다. 어디를 가나 한국인이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등쳐먹는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울란바토르에서는 정도가 더 심한 편이니 주의해야 한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최후의 유목민 차탄족의 고향, 홉스굴


홉스굴의 유목민이 야크 수레를 끌고 간다.

 

몽골은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원초적인 느낌에서 온다. 이를테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초원과 사막. 길 없는 길과 원시적인 구름들. 1년에 260일은 맑고, 1년에 7개월은 겨울이며, 두달 여의 봄날은 모래폭풍이 휩쓸고 가는, 몽골은 혹독하고 혹독해서 더욱 아름답다. 그렇다면 몽골에서 가장 신성한 곳은 어디인가? 몽골인들은 주저없이 말한다. 홉스굴이라고. 홉스굴은 중앙아시아의 호수 가운데 가장 깊고, 세계에서 14번째로 크며, 세계 담수량의 2%를 차지하는 곳으로 경탄할만한 96개의 강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 단 한개의 강(에진 강)만이 러시아의 바이칼로 흘러간다.

 


저녁 무렵의 홉스굴과 타이가 숲.

 

누군가는 홉스굴을 일러 ‘몽골의 푸른 보석’이라거나 ‘몽골의 알프스’로 부른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몽골에서 가장 몽골답지 않은 곳. 홉스굴의 관문인 무릉에서부터 홉스굴까지는 몽골 특유의 완만한 초원지대가 펼쳐지지만, 홉스굴에 가까워질수록 타이가 삼림지대가 빽빽한 원시림을 이룬다. 북쪽은 해발 3500여 m의 산맥지대이며 러시아와의 국경이고, 불가사의한 종족으로 손꼽히는 차탄족이 여기에 살고 있다. 수심은 속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지만, 물은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다. 이 곳에 민물연어가 살고, 주변에는 순록과 사향노루, 무스와 큰곰이 산다.

몽골에서 가장 뛰어난 동식물의 보고 역시 홉스굴이다.

 


홉스굴 가는 길에 만난 어버(돌서낭).

 

홉스굴을 가자면 무릉을 거쳐야 한다. 울란바토르에서 무릉까지는 무려 692km. 비행기를 타면 두어 시간이 걸리지만, 차를 타면 며칠이 걸린다. 홉스굴에 가는 사람들은 무슨 통과의례처럼 무릉을 거쳐가지만, 아무도 무릉을 기억하지 않는다. 꿈 속에 스쳐간 마을이거나 기시감 속에나 존재하는 마을처럼 무릉은 그렇게 기억되고, 그렇게 존재한다. 여기에는 어떤 도시의 느낌도, 훌륭한 숙소와 유흥시설도, 구경할만한 시장도 없다. 여기를 벗어나면 홉스굴까지 내내 지루한 초원만이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유목민에게 초원은 ‘모든 것’이다. 가축과 우유와 집과 길이 다 거기에 있다. 그들에겐 초원만이 무궁하고, 초원만이 무진하다. 야크나 염소에게도, 독수리나 두루미에게도 초원은 곳간이고 둥지다.

 


타이가숲이 시작되는 초원과 하늘의 천사구름.

 

오로라처럼 번지는 북방의 무지개


아침 먹고 초원, 점심 먹고 초원. 이 곳에서 유목민의 삶이란, 초원에서 나서 초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심심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설령 힘들다고 해서 이들은 초원을 떠날 생각이 없다. 길고 지루한 초원을 건너면 이제 지금까지의 몽골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웅장한 호수와 울창한 타이가숲. 바로 홉스굴이다. 호수는 하트갈 마을에서부터 장카이, 타일럭트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러시아의 국경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저녁 무렵 홉스굴 호숫가의 야크떼.

 

홉스굴은 평화롭다 못해 이런 풍경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는 심심함을 느낄 지경이다. 아침에 게르에서 일어나 문을 열면 호수의 맑은 바람이 곧바로 들이닥치는 곳. 앞에는 눈 시린 호수가 초원처럼 펼쳐지고, 뒤로는 타이가숲이 원시림을 이룬 곳. 말을 타도 호수, 보트를 타도 호수, 트레킹을 해도 호수와 만나야 하는 곳. 여름 밤에도 날씨가 쌀쌀해서 밤새 난로를 피워놓고 잠들어야 하는 곳. 밤에는 달과 별밖에는 보이지 않고, 호숫가를 지나는 말 탄 유목민의 노랫소리만이 애잔하게 들려오는 곳. 지극히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생각들이 교차하는 곳.

 


오로라처럼 번진 신비한 북방의 무지개.

 

홉스굴에서 나는 오로라처럼 번지는 북방의 무지개를 보았고, 호숫가를 느릿느릿 배회하는 야크떼를 만났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꽃들과 차탄족의 순박함과 길 없는 적막과 외로움을 경험했다. 특히 순록과 함께 사는 종족인 차탄족과의 만남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신비로운 종족이다. 영하 40도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아랑곳없이 잠을 자는 사람들. 순록을 타고 그들은 순록이 더 이상 가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서는 순록이 머물 때까지 그 곳에 머문다. 그러다 다시 순록이 이동하는 시기가 되면, 순록이 가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관광객에서 말을 태워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홉스굴의 신종 마부.

 

최후의 유목민, 차탄족의 고향


애당초 그들에게는 ‘고향’이나 ‘정착’이라는 말이 없으며, 지금도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을 오고 가며 진정한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전세계에 남은 순수한 차탄족(Tsaatan)은 겨우 200여 명 정도(또 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80여 명)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차탄족을 일러 전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족이자 믿을 수 없는 부족이며, 원시적인 인류의 원형을 간직한 부족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그들은 몽골계 인종 가운데서도 가장 희박하고, 가장 알 수 없는 소수민족임에는 분명하다.

 


몽골의 할흐족 게르와 다르게 생긴 차탄족의 전통 천막, 오르츠와 차탄족 아버지와 딸.

 

내가 홉스굴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다 차탄족 천막인 오르츠를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여긴 건, 오래 전 동화책처럼 읽었던 차탄족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던 것같다. "그들은 아마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원주민일지도 모릅니다. 무속과 양육, 생김새까지도 인디언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었던 것같다. "그들은 순록을 가축으로 길들여 그것을 말처럼 타고 다닐뿐만 아니라 그것의 젖을 짜 먹고, 고기도 먹고, 사냥도 합니다.” 뭐 이런 내용인 듯하다. 실제로 내가 만난 차탄족도 순록이 말보다 훨씬 온순하고, 길들이기도 쉽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차탄’이란 말도 몽골어로 ‘순록 유목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본래 야생동물인 순록은 길이 들면 순하지만, 몇 개월만 그냥 두면 도로 야생으로 되돌아간다.

 


차탄족과 함께 살아가는 순록.

 

몽골 정부에서는 지난 1960년대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차탄족을 위한 집을 지어주고 땅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록과 천막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는데, 답답하게 한 곳에 머물러 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 인종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할흐족이 유목민에서 점차 정착민이 되어가는 현실도 이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차탄족이 말을 듣지 않자 몽골 정부에서는 차탄족에게 모든 사냥을 전면 금지시켰다. 평생을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온 그들의 앞날에 빨간 불이 켜졌고, 점차 이들은 믿을 수 없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차탄족은 야생의 순록을 가축으로 길들여 타고 다닌다.

 

차탄족은 현재 몽골 최북단 홉스굴 인근에 살고 있다. 홉스굴 인근의 차탄족은 호수 주변의 타이가숲이 삶의 근거지인데, 여름이면 관광객을 상대로 호숫가까지 내려와 차탄족의 전통 천막인 오르츠를 세워놓고 장사를 한다. 차탄족의 전통 장신구와 생활용품을 팔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대가로 돈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차탄족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전시용 박물관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점점 더 세상이 순록을 타고 이동해 살기에는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이들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차탄족 오르츠의 내부 모습. 온 가족이 이 작은 천막 안에 산다.

 

헬기를 타고 오는 침략자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원시적인 유목의 삶을 보기 위해 어떤 서구의 관광객들은 수십 명씩 헬기를 빌려타고 차탄족의 거주지까지 여행을 오는 경우도 요즘엔 늘고 있다. 차탄족들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천막촌을 일방적으로 침략해서는 우리 손에 돈 몇 푼 쥐어주고 갑니다.” 서구인들의 차탄족 관광은 차탄족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뤄지고 있다. 물론 그 돈을 벌기 위해 손을 내미는 차탄족이 이제는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호숫가를 말 타고 지나가는 여행자들.

 

홉스굴에서 만난 차탄족은 때마침 내가 도착했을 때, 천막 앞에 장신구와 생활용품을 잔뜩 펼쳐놓고 있었다. 이들의 천막은 할흐족의 게르와는 그 모양새부터가 다르다. 게르가 지붕이 둥그런 천막이라면, 차탄족의 오르츠는 우리나라의 김치움막처럼 뾰족한 원추형이다. 천막 가운데는 난로가 있고, 바닥에는 동물 가죽을 깔아놓았는데, 천막 구석에는 젖먹이 아기가 이불에 싸여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원래 이 가족도 여기서 좀더 떨어진 침엽수숲에 살고 있으나, 관광객을 위해 잠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홉스굴 입구 하트갈에서 만난, 전통 의상 '델'을 입은 여인.

 

몽골의 할흐족이 말이나 양, 소젖으로 우유와 치즈를 생산한다면, 이들은 순전히 순록의 젖으로 모든 유제품을 만들어낸다. 순록의 가죽으로는 옷과 천막을 만들고, 밧줄도 꼰다. 이들의 생활은 순록과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차탄족의 천막 주위에는 언제나 순록이 있다. 차탄족끼리는 얼마나 많은 순록을 가졌느냐가 부의 척도나 다름없다. 내가 찾아간 차탄족은 약 20여 마리의 순록을 가축으로 키우고 있었는데, 많을 경우 50마리 이상의 순록을 거느린 차탄족도 있다고 한다.

 


몽골의 가장 신성한 호수인 홉스굴 풍경.

 

지금도 홉스굴 인근의 차탄족은 순록과 함께 여름이면 좀더 북쪽으로 올라가고, 겨울이면 좀더 남쪽으로 내려와 생활하는 오랜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다만 옛날과 달라진 것이라면 그들의 행동 반경이 정치적 목적과 환경적 제약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냥도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목과 사냥을 동시에 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부족에서 이제는 유목만을 하며 제한적으로 이동하는 부족이 된 것이다. 현재 이들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다. 겨우 200여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의 핏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홉스굴이 있는 한, 이들은 결코 홉스굴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홉스굴의 게르 숙소.

 

<홉스굴에 가려면>

몽골을 여행하려면 우선 몽골 몽골 대사관(02-794-1951)에서 비자(3일 소요, 38,000원)를 받아야 한다. 인천-울란바토르 간 항공편은 몽골항공과 대한항공이 1일 1회(여름 기준) 운항하며, 항공료는 60~75만원선(왕복, 5시간 소요). 울란-무릉간 항공료 250달러 정도(1시간 30분~2시간). 숙소는 울란바토르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 기준 1일 5달러, 트윈 14달러, 홉스굴 게르 숙박 15~30달러. 차량 렌트 1일 1대 기준 80달러. 식사 3000~5000투그릭(3천원~5천원). 울란바토르 MK마트에서 라면, 김치 등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 울란바토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신용카드 사용 불가.


* 이 기사는 지난 2008.01.16일자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이용한의 몽골기행 1> 기사에서 사진을 더 추가한 기사입니다. 이 기사의 저작권은 저작자 이용한(dall-lee)과 <한겨레신문>에 있습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고비5: 웅깃사원, 폐허를 보다   초원, 지평선, 하늘, 구름, 그리고 감탄.   이른 아침부터 차는 다시 게르를 벗어나 초원을 달린다. 초원과 지평선, 느긋한 구름과 하늘. 낙타 무리와 염소떼. 적막, 단조로움, 열기, 덜커덩, 으악! 또다시 초원.   웅깃사원의 소박하고 초라한 일주문....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고비4: 몽골의 그랜드캐년, 바얀작   바얀작 언덕, 하늘, 그리고 구름.   고비는 그 자체로 ‘모래땅’, ‘사막’이란 뜻이다. 그러니 ‘고비사막’이란 말은 의미의 중첩일 뿐이다. 흔히 고비에서 우리가 사막이라고 부르는 모래언덕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황량한 벌판이거나 성긴 풀이 듬성듬...
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