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네티즌본부카페연합' 보헤미안의 유토피아:'09. 6. 3. 수'


'기호' 만평/ 김홍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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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신문 [물둘레]만평'/김호상 화백
쌍용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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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만평'/ 김호영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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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일보 '만평'/ 홍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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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일보 미스터 왜가리' '만화'/ 안기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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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만평'/ 이공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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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닷컴 장도리 '만화'/김용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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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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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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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 '만평' / 김일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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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만평'그림창 / 서상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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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문'만평' / 김영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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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만평'/ 권혁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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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아이디' / 양만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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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희평'/ 김경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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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만평'/ 이용호 화백
'미발'주 한 잔?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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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만평'/ 정윤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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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제신문'만평'/ 인터넷한국일보
이게 '남의 일' 같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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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만평'/ 백무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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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매일 '그림세상'/ 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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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일보'만평'/ 설승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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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일보 '물대포' /설승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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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신문'만평'/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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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 '만평'/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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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달팽이'/ 이공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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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만평'/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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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그림판'/ 장봉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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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미와 호보 168화 (0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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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툰] 라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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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n 유사랑 '만평'/ 유사랑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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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노컷뉴스'만평'/ 권범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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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만평'/ 김현철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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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 '세평'/ 조영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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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감자 만화'/조영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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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신문 '만평'/ 권범철의 그림뉴스
<그녀가 ‘노’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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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신문 '만평'/ 권범철의 그림뉴스
<그녀가 ‘노’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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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TooN '만평' 이공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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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일보'카툰'/ 장영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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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S '갤러리'/ 김상택 화백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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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만평' / 배계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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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네티즌본부 카페연합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본 만평과 패러디 기사는 오늘날자로 올라온 대한민국 유명닷컴의 만평 및 패러디를
거의 빠짐 없이 발췌 수록한 것이며, 내용과 정리자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Netizen Photo Column'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 디지털뉴스규칙을 준수합니다.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메모 :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 그 후 마지막회 』인생을 돌아보며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감사 또 감사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66년 전인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여러 가지 의
        미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기 위해 부모와 집 모든 것을 떠난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마르 10, 28-30).
        이 말씀 그대로, 본래는 다른 길을 가려다 주님께서 어머니를 비롯해 이런 
        저런 분들을 통해 일러주신 사제의 길을 살아온 나는 현세적으로도 백배 
        아니 그 이상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미구(未久)에 맞이할 죽음을 거치면-부족하고 자격도 없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그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받아 주실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누리시는 생명,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묵시 21,4)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 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까를로 까레또 수사는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짓이겨서라도 기어이 
        당신 것으로 만드신다고 했다. 내 경우도 어느 정도 그러했다. 신부되는 
        것,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될 수 밖에 없도록 인도하셨고 주교와 
        추기경의 삶은 명령으로 떨어졌고, 여기에 따르는 긴 세월의 삶이 단순하
        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결단의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결국 "뜻대로 하소서"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
        도 들 수 없는 대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죄와 허물을 통해서-사도 바오
        로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리셨다(로마 5,20)고 하신 대로-당신
        의 사랑, 당신의 자비, 당신의 그 풍성한 용서의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셨
        다.
        달리 말하면 나는 죄로 말미암아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믿게 되었다. 아니, 하느님은 죄까지도 당신 은총의 기회로 삼으셨
        다. 나의 하느님은 참으로 돌아온 탕자를 껴안아 주시는 어진 아버지이시
        다.
        오, 펠릭스 꿀빠!(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
        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
        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
        의 이콘(ICON)이 돼야 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걸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편집 : 원 요아킴]






      ☆ 나에게 인연된 모든 이들을 ☆
        감싸 주고 아껴 주며 그들의 아픔까지 헤아릴 수 있는 아량(雅量)을 주소서 행여 나에게 아픔을 주는 이가 있어도 상처 난 가슴 감추고 미소로 대하도록 하소서 내게 주신 부모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 설령 그들이 부족하여, 날 서운케 하여도 그 모든 걸 털어 버리고, 바다같은 이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친구를 대함에 있어 변함없이 대하도록 하시고 친구의 허물까지, 다 덮어 주고 아껴 주며 끝까지 기다려 주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함에 있어 사랑하는 이의 허물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천만번의 사연 속에 맺어진 인연 헛되이 여기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내 목숨 다하는 그 날 까지 그 사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도록 하소서 일을 함에 있어 항상 배움의 자세를 늦추지 않게 하시고 겸손(謙遜) 함으로 자만함을 누르게 하시고 나로 인해, 상처받는 동료가 없도록 하소서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던지 최고가 되도록, 끊임 없이 발전해가는 모습이게 하소서 나 自身을 사랑함에 있어 世上에 하나뿐인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게 하시고 世上을 향해 당당함으로 내어 놀 수 있도록 가꾸는 부지런함으로, 살게 하소서 남은一生동안에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미소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소서 ☆ 좋은 글 中. ☆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메모 :

         



        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1980 년 육군본부의 ‘창군전사(創軍前史)’가 발행된 이 책은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군사연구소,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군사(軍史) 연구 자료로 쓰이고 있다.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1979 년 10 월 26 일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화로 인하여 흉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료에 의해 1980 년 8 월 18 일 창군 전사에 기록 되었다.

        한동안 박정희가 독립군을 수천명 학살하고, 수백회 토벌에 나섰다는 좌경주의자들의 글을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 다녔으나,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친일의 역사는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져야 하겠다.

        김일성 시절부터 박정희가 죽어야만 적화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주사파들과 386 좌파 세력들은 북한 공산당이 날조 왜곡한 기록들을 가지고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지금도 그들은 박정희를 철천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하였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이승만도 아닌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날조되었던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그렇게 박정희를 씹고 또 씹으면서 부관참시를 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신기남,김희선.이미경 등 진짜 악질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말 그대로 3 대를 떵떵거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0, 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 날 50, 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 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 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 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 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가 넘는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무려 4,3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0, 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 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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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표수집 한답시고 우체국 앞에서 밤새고 그럴 때, 친구들과 우표책을 비교해가며 열을 올리던 때,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우표시트였다.
        한복과 목련이 잘 어울리는 웃는 얼굴이 좋았고, 은은한 4색의 색감이 좋았고,
        뭔가 귀한 대한민국 모성의 캐릭터라는 알듯 말듯한 향수가 있어 끌렸기 때문이다.

         
        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격된 직후 옆으로 쓰러지는 육영수 여사 (74.8.15)
         

         
        다들 슬퍼했다.  꼬마들은 덩달아 슬퍼했다.

         
        故 육영수 여사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 (1939. 1. 1)



        양로원 방문

         
        휴가 장병 급식 봉사장 방문 (1967년 4월 5일, 시민회관앞)


         
        적십자 봉사활동 (1968년 9월 4일, 대한적십자사)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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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시찰하는 박대통령
        조회(1796)
        ◆박정희대통령 | 2005/09/05 (월)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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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유비무환'님이 제보한 사진.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62년 최고회의 의장신분으로 울릉도를 시찰하던 진귀한 사진"이라고 말했다. 울릉도 도동에서 울릉경찰서 및 울릉초등학교 시찰 후 도동의 중앙로를 통하여 부둣가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모습.

        이 사진을 보신 어떤 분의 감상문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군....
        이 사람은 뭘 해도 해낼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만 느끼는 감정인가...
        도데체 이 압도감이란 뭐지?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풍기게 하는걸까..

        17년 후의 박정희 대통령
         

        [강화 들녘에서..모심는 박정희]
        내용 : 퇴임하면 농촌으로 돌아가고자 원했던
        박대통령의 마지막 모내기가 된 강화 들녘에서
         

         
        [포항제철소에서... ]
        내용 : 박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를 위한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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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교장의 편지 / 박정희 대통령
        조회(1427)
        ◆박정희대통령 | 2005/09/05 (월)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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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교장의 편지' 인기 폭발(2004년 2월 7일 조선닷컴 기사내용)

        - ''젊은 세대들 똑똑한데 어른들이 교육 잘못시켰어요''
        김충배(金忠培) 육군사관학교 교장(중장)의 ‘편지’가 인터넷상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기자 조갑제의 세계’(www.chogabje.com) 등 유명 사이트마다 ‘육사 교장의 편지’란 제목으로 띄워져 높은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편지는 지지난해 11월 22일 김 교장이 교내 강당에서 전 학년 생도 1000여명에게 강연한 내용으로, 김 교장이 교수진으로부터 전달받은 외부인사의 글을 강연용으로 보충한 것이라고 육사는 6일 밝혔다.
        편지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인 여러분들은 50·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아는가?”라고 시작한다.
        이어 1960년대 초반 서독에 파견될 광부와 간호사의 봉급을 담보로 1억4000만마르크의 차관을 받게 된 경위 서독에서 시체를 닦은 간호사와 하루 10시간 넘게 지하 1000m에서 땀흘린 광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서독에서 이들을 만나 가난이 서러워 통곡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또 편지는 여인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과 전국 쥐잡기 운동으로 모은 쥐털로 만든 ‘코리안 밍크’의 수출 월남 참전 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건설한 경부고속도로 이야기 등을 실은 뒤 “간호사와 광부, 참전용사와 중동 근로자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편지는 이어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할 자격이 있는가”고 반문한 뒤 “국민소득 4만달러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뭉쳐야 한다”고 끝을 맺는다.
        김 교장이 강연할 당시 생도들의 분위기는 숙연했으며 눈물을 흘리는 생도도 있었다고 육사는 전했다. 육사는 강연 내용이 인터넷상에 올려진 것과 관련, “강연 내용이 좋아 학교 간부들이 띄운 것 같다”며 “육사에서는 메일 등을 이용해 교수와 생도들이 자주 대화를 갖는다”고 말했다.
        (구성재기자 sjkoo@chosun.com)
        ■ 편지 원문   김충배(金忠培)육군사관학교長의 말씀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후손은 팔려나오지 않게 지난 1964년 12월 독일의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간호사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작은 네모 사진은 광부·간호사들이 朴대통령 연설을 듣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모습.
         
        내맘의 강물 /  테너 - 팽재유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때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마음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 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때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 고,박정희 대통령 장모(이경령 여사)의 팔순잔치 동영상 ★
         
        고,박정희 대통령의 장모이신 이경령 여사의 팔순잔치 동영상을
        처음접한것이 3년전인가 하다.
        나의 사촌 남동생이 8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잘나가던 정치부 기자였었다.
        70년대에는 이후락씨 따라서 이북에도 갔다오고 하였는데,
        정권이 바뀌니까 낙동강 오리알이 되버리고,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엔
        지방 방송국사장으로 밀려나가자 얼마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다.
        그러게 새도 한 철이라고, 있을때 고개숙이지, 박정권 빽믿고 까불더니만...
         
        아찌가, 역사소설을 준비한다고 자료를 모으다가 마침 찾아가서
        간신히 비디오 자료 몇개를 건져왔엇다.
        그나마도 홈페이지 만들어주는 사람이 자료들을 훔쳐가서
        남은것이 별로 없지만, 그때 남은 자료중에 이 비디오도 있었다.
        소포로 부친 이비디오를 보면서 한참을 울고,
        올 1월인가 엠블을 통해서 보면서 울고,
        또 오늘 이 자료를 올리면서 울고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왜 울었는지는 아래글을 마저 읽으시면 이해들 되실겁니다.
         
         
        마우스 오른쪽 클릭해서 확대 누르면 전체 화면으로 감상할수 있습니다.

        ★ 간단한 요약 ★
        ( 뭐가 간단해, 이 자료 찾으면서 ?어보았는데 원더우먼이 올리는것이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다니까)
        제작 - 국립영화 제작소
        제작일 - 1975,1,22,
        촬영 시간 (편집후) - 34분
         
        ★ 내용 ★
        고,육영수 여사가 죽고 (1974, 8,15)  5개월여후인 1975년 1월에 촬영된 것인데,
        육여사의 모친이자,  고,박정희씨의 장모이신 <이 경령 여사>의 팔순 잔치를 하게된다.
        우선 사회자의,(사회자라고 하여도 박정희 측근중에 비서쯤 되는가보다.) 진행으로
        한때 이 나라를 호령했던 최고 책임자의 장모님 팔순잔치치고는 소박한 례(禮)를 시작한다.
        처음 비디오를 보았을때보다는 편집이 많이 된듯하여 자세한 선물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도자기 선물을 빼고는 소박하다.
        음식또한, 소박한듯하여,1부로 양식이 마련되었고,2부로 한식이 차려져 나온다.
        그 당시 <가정의례준칙>이라 하여 국민들에게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간결하게 준비하라는
        법령을  실시하던때라, 아마도 그랬나보다.
        하객또한, 삼부요인과 장관들은   없고, 화면에서 왼쪽으로는 박정희 측근과 오른쪽으로
        이 경령 여사의 자제들이 배치되었다.
        박정희씨 오른쪽에 있는사람은 그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후락씨이다,
        지금은 용산 어딘가에서 살고있다는 이후락씨는 박정희씨가 가장 아끼던 오른팔이었다.
        그 당시 최고로 맛난것만 먹어서 그런지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가지고서는
        (이것도 인신 공격이되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중앙정보부장이란 사람치고는 허약하게 생겼다.
        그리고, 홍정욱(남궁원씨 아들)의 처외조부이자, 한때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였고, 한일협정에 가담했던
        김동조씨도 보인다. --- 이 당시 외무부 장관은 이동원인가 하는 사람일것이다.
        이 경령 여사의 바로 옆에는 이 여사의 장남이자,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ㅇㅇㅇ씨가 자리한다,
        그 옆으로 그의 부인, 자식들이 배치되어 앉아있고, 박 정희씨와 이 경령 여사의 자리인 본좌와
        반대편에는 박 정희씨의 장녀인 박 근혜 (근영) ,차녀인 박 영혜(은영),  아들이자 시대의 불출인
        박 영식(지만)이  이종사촌들과 자리하고 있다.
        자 이제, 잔치하면 빼놓을 수없는 노래판에 대해 말해보자.
        박정희 대통령의 <뱃사공>과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장면도 나오고,
        외가쪽 친지인 젊은이(이 경령 여사의 손주인듯하다)가 노래를 시작하면서 흥을 돋구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노래부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노래를 잘 부르는것 같다.
        여기 자료에서는 빠졌지만  집에서 보았던 비디오에는 박 근혜씨도 노래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박지만이 부르는 노래인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는 전국민적으로 부르게하였던 것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했던 노래인지라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도 줄줄 외웠던 노래이다.
        그런데, 박 지만씨는 일부러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를 부른것 같은데, 노래 중간,중간을 끊어먹고 있다.
        국민들은 강제적으로 외우다시피 하였는데, 그당시 학생이던 박지만씨가 그것도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를 못한다니 그건 어디나라 풍습인가 생각이 든다.
        참 알다가도 모를일이 아니라, 모르다가도 알 일이다.
         
        ★ 마침표 ★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반대 정치적 입장을 보인다고, 목침으로 머리를 맞아
        스무방을 꼬맸다니 그런 풍설도 나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고도의 국민들에게서 점수를 얻기위해 그런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랑을 했던 부인이였나 생각이 든다.

        박 정희 씨에겐 첫 번째 부인이 있었다.
        아들 하나를 낳았던 여인인데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의 여자로 박정희씨가 잠시 독립군 진영에 들어가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통해서 말이다. 아마도 해방을 맞으니까 독립운동을 하였던 상해임시정부가
        나라의 정권을 잡지는 않나해서 들어간 것일것이다.
        그 이후, 그녀와 헤어지고는 미군정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첫번째 부인은 많은 갈등으로 스님이 되었고)
        이 박사(이승만)가 정권을 잡자   다시 미군하의 지금의 육사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걷게된다.
        이때 만난 사람이 육영수 여사다. 육 여사또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가난해서 배우고자해도 제대로 배우기 어려웠던지라 선생님이 가장 부러웠던 모양이다.

        잔치내내 자식들의 재롱에 기분이 좋아 음식 하나 입에 대지못하고 좋아하는 이 경영 여사의 웃는 모습에
        웬지 허탈하기도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정권이 뭐길래,야욕이 뭐길래, 정치비사는 뭐라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것이지만,
        정권을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죽게했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냉혹함에,
        그 스스로도 마음이 굉장히 아팠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자라온 사람이기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던 육여사의 가족들이
        곧 박 정희 그 자신의 가족이기도 하였기에, 그래서 다른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사람이 박 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랑하는 부인을 보내고, 마음이 아팠기에, 마지막으로 육여사에게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죄스러움에  장모이자 어머니인 <이 경령 여사>의 팔순잔치를 벌여준 것같다.

        이 경령 여사의 기분좋아서 손까지 가려가면서 웃는 모습을 보자니,
        자신의 딸이 5개월전 어떻게 비명횡사했는지 알고나 있는건지, 아니면 모르는건지
         
        아마도 이 것이 가족인가 보다. 자식이 죽었다면 염라대왕의 할애비가 온다해도
        잔치가 무엇이겠는가,
        잔치는 고사하고 끼니조차 끊을 지경인데 말이다.
        그런데 비명횡사했던 딸의 남편이자 사위가 차려주는 잔치에,
        자신이 손수 낳아서 옥이야 금이야 길렀던 자손들로부터 재롱을 받는데 아니 기쁘겠는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도, 언제 그랬냐는 둥 돌아섰던 등도 다시 맞보는것이 가족이란 것이다.
         
        박 정희 대통령은, 비명횡사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안타깝고 슬펐으랴.
        장모의 팔순 잔치를 하면서 자손들의 재롱에 기뻐하는 어머님(장모)의 모습에
        일말의 죄책감을 쓸어내렸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있는 부인이 이 자리를 본다면 야속한 지아비를 용서해줄거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육여사또한 모친의 팔순잔치를 보았다면 분명, 야속한 지아비를 용서하고 마음 편히 좋은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추신 --- 정치고 뭐고를 떠나서 가족이란 어떤것인가, 느껴볼 자료인것 같다.
                     2004년,7월달에 KBS를 통해서 처음 공개된 자료라고 한다.
           

         

         
         
        생가 방문한 박정희
        ◆박정희대통령 | 2005/07/05 (화) 09:24












         
         
           
         
         
        1950.12.12 박대통령 결혼

        출처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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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대통령 |




















































































































         
         
        조회(226)
        ◆박정희대통령 | 2005/01/21 (금)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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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제5대 박정희대통령 취임 연설 장면
        1963년 박정희대통령 주재로 첫 국무회의 모습
        1964년 경제 기획원 재무부 초도 순시 장면
        1956년 한 일 회담 비준서에 서명 모습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김영삼 접견 환담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이승만전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접견 환담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가족 기념 촬영
        1966년 박정희대통령 생신 기념 행사에 참석 어린이들이게 절을 받는 모습
        1966년 7개국 마닐라 정상 회담 대표와 기념 촬영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월남 맹호부대 시찰 모습
        1966년 남산 화재로 이재민 수용소 시찰하는 박정희대통령 모습
        1967년 박정희대통령 구로동 수출산업 공업단지 준공식에 참석
        1967년 박정희대통령 대구 유세장 장면
        1968년 박정희대통령 경부선 고속도로 기공식 참석
        1968년 박정희대통령 경부선 고속도로 건설현장 시찰 업무 브리핑 청취 모습
         
        1968년 박정희대통령 제1회 무역 박람회 시찰
         
        1968년 박정희대통령 주민등록증 수령 모습
         
        1968년 박정희대통령과 미국 존슨 대통령접견 선물 교환 모습
         
        1969년 박정희대통령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정상 환담 기념 촬영
        1971년 박정희대통령 내외 선거유세 중 손을 흔드는 모습
        1971년 박정희대통령 내외 대통령선거 투표 모습
        1971년 박정희대통령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식 참석 연설
        1971년 박정희대통령 농민과 벼 베기 참석
        1971년 박정희대통령 서울 지하철1호 기공식에 참석및 연설
        1971년 박정희대통령이 민주공화당 김종필 부총재 임명장 수여 모습
        1972년 박정희대통령이 김종필 국무총리 접견 임명장 수여
        1973년 박정희대통령 남해대교 준공식 참석
        1974년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영구차 떠난뒤 눈시울 장면
        1974년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 영구차 영구차옆 대통령 모습
               
        1974년 유족들 육영수여사 묘소 참배 모습
        1975년 박정희대통령 개헌안 국민투표에 관한 특별 성명 발표 장면
        1974년 박정희대통령 국회의사당 준공식 참석
        1975년 박정희대통령과 신민당 김영삼 총재 접견환담  
        1978년 박정희대통령 모심기 행사 참석
        1979년 박정희대통령 삽교호 준공식 참석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빈소에서 큰영애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영정을 바라보는 큰영애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빈소에 분향하는 큰영애
        출처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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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박 정 희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1972년 吳源哲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核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 『1980년대 초, 高純度 플루토늄彈을 완성한다』

                     

                     

                    플루토늄彈을 건의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 아래 진행된 한국 정부의 核무기 개발 계획이 최근 문서로 확인됐다. 이 核개발 비밀문서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1972년 9월8일 吳源哲(오원철ㆍ74) 당시 대통령 제2 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보고서는 그간 공공연한 비밀로만 알려져 온 朴대통령의 核개발 계획이 우리 국내 문서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史料的(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지를 포함,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核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吳源哲 수석의 이름, 그리고 職印(직인) 등이 찍혀 있고, 「원자 核연료 사업 계획을 별첨과 같이 작성」, 「별첨 계획의 결론에 의거, 원자핵 연료 사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核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核무기의 비교(도표)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생산과정(그림) ▲우리나라의 核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核연료 사이클(그림) 순으로 돼 있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장부터는 「核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둘째 장부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核무기의 종류로 「核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核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는 문제를 도표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우라늄 235폭탄의 원료는 90% 이상의 高濃縮(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폭탄의 원료물질은 90% 이상의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239, 수소폭탄의 원료도 液化(액화)중수소 및 三重水素(삼중수소) 또는 重水素化(중수소화) 리튬6」인데, 어떤 핵 원료 물질을 이용해 核을 개발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미뤄 청와대에 보고되는 核개발을 위한 최초 보고임을 짐작케 한다.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개발해야 할 核무기는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彈(탄)을 擇(택)함이 타당함」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우라늄彈엔 9억 달러 소요

                     

                     비밀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과 플루토늄 239탄에 대한 비교도 곁들이고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됐던 우라늄 235탄은 한 개의 核무기를 만드는 데 농축 우라늄(원자번호 235) 25kg이 필요하고,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플루토늄 239탄 1개를 만드는 데는 고순도 플루토늄 239가 8kg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라늄 235탄은 천연우라늄→농축→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탄은 천연우라늄→원자로→高純度 플루토늄 239의 과정을 거쳐 제조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은 고농축 시설 건설에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우라늄 235탄 1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간 우라늄 134kg을 생산해야 하고, 그 투자액은 약 9억 달러, 시설 건설기간에 8년이 소요된다고 지적했다. 우라늄彈을 만들기 위한 소요전력만도 200만kW가 들어가는데다 기술의 도입이나 개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라늄탄은, 농축시설을 보유하면 상업발전용 농축 우라늄 연료도 생산할 수 있고, 수소폭탄의 「방아쇠」로 유리하며, 毒性(독성)이 없어 취급이 안전하다는 장점 등도 꼽고 있다.

                     

                     플루토늄彈의 경우,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에 비교적 투자비가 적게 든다는 점을 들었다. 그 예로 연간 8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투자비가 약 4200만 달러, 시설 건설기간은 6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플루토늄은 원자력 발전용 연료로 사용도 가능해 一擧兩得(일거양득)임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플루토늄은 有害(유해)물질이므로 취급하기에 위험이 따른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초 플루토늄 생산」

                     

                     이 비밀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核개발을 위한 플루토늄도 얻고 발전도 할 수 있는 「중수로형 원자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일한 原電인 古里(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非정상 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즉 정상 가동으로 생산되는 플루토늄은 연간 I00kg이지만, 플루토늄의 純度(순도)가 70% 이하이므로, 군사용(90% 이상의 純度 요구)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고서는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두 가지 案(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고순도 플루토늄의 생산 및 발전이 가능한 「겸용爐(로)」에 의하는 방법이다. 건설될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 제2호기를 50만kW급 「천연 우라늄, 중수형 발전로」로 해 연간 高純度 플루토늄을 200kg 정도 추출하는 방법으로, 日本ㆍ印度(인도)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商用(상용)발전과는 별도로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도입하는 방법이다. 연간 8kg의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4만kW의 「천연 우라늄, 중수형 연구로」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자유중국(대만)이 그 예라고 밝혔다.

                     

                     高純度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겸용로」를 건설하는 데는 총 2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분석했다. 발전로는 1억5500만 달러(경수로는 1억1000만 달러), 再처리 비용 4200만 달러, 가공비용 300만 달러가 든다.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의 투자비용은 총 4200만 달러가 소요되는데, 발전로 가격이 2900만 달러, 再처리 비용이 1100만 달러, 가공비용이 2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겸용로」를 채택하면, 商用 발전을 겸할 수 있는 데다가 플루토늄 量産(양산)이 가능하고, 核彈(핵탄) 수요가 없을 때는 발전로 및 재처리 공장을 商用으로 전환할 수 있으나, 비교적 투자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연구로」를 채택하면, 투자비가 적은 장점이 있으나 商用발전을 겸할 수 없고,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어 核彈 수요가 없을 경우에는 연구목적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1案인 「겸용로」를 택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에 따라 古里발전소 2호기를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重水爐(중수로)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核연료인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시기를 1980년대 초로 잡았다.

                     

                     

                    「해외 한국인 기술자를 불러오라」

                     

                     비밀 보고서는 核무기 비밀 개발계획을 다음과 같이 종합,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核개발 주무 부서와 인력확보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摘示(적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술수준,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철저한 기초작업을 수행한다. 1974년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원자력연구소는 상기 목적에 맞도록 개편ㆍ보강한다.

                     

                     가.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함.

                     

                     나. 기술자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되 반드시 특정 임무를 부여하여 전문훈련을 받도록 함.

                     

                     다. 현재의 실험 원자로 및 기타 시설은 원자력 전공 대학생의 교육훈련용으로 50% 이상을 할애함.

                     

                     라. 원자력을 전공하고자 하는 대학생 전원에 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여 원자력연구소에서 실기교육을 받고, 졸업 후 원자 核연료 사업에 종사토록 함>

                     

                     보고서의 마지막 章 상단에는 캐나다産 원자로인 「캔두(CANDU)」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한국은 1974년부터 캐나다와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는 CANDU型 중수형 원자로의 교섭에 나섰다.

                     

                     한국이 再처리 시설 도입을 프랑스와 교섭하고, CANDU형 원자로까지 도입키로 하자 포드 행정부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核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고 갖가지 외교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5년 5월, 印度에서 原爆(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사용한 원자로가 바로 한국에서 도입하기로 한 CANDU型 원자로였던 것이다.

                     

                     기자는 지난 7월8일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청평호반으로 차를 몰았다. 문건을 작성한 吳源哲 당시 경제 제2수석을 만나 核무기 개발 계획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묻기 위해서였다. 吳 前 수석은 『내가 작성한 문서가 틀림없다. 이 보고를 한 얼마 후 다시 유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그 이상은 답변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보고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核연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지 核개발과는 무관하다』면서, 기자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당시에 (미국 정부에) 당한 것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는 『金正日이 核을 갖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도 核개발을 했었다고 하면 똑같은 「망나니」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비밀 보고서를 朴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작성했는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튿날 오후 기자는 金正廉(김정렴ㆍ79)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를 찾아가 문서를 보여 주었다. 그는 결재란에 자신과 대통령의 「서명」이 없다면서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吳수석이 朴대통령에게 直報(직보)했다는 뜻인가요.

                     

                     『그건 불가능해요. 朴대통령은 외부인을 접견할 때 비서실장을 꼭 배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참모장(비서실장)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요. 참모(수석)가 참모장을 제치고 총사령관(대통령)에게 불쑥 이야기한다는 것은 군인 출신이었던 그분이 용납을 안 했을 겁니다』

                     

                     ─보고서는 청와대 보고 양식인가요.

                     

                     『그렇습니다. 보고번호 제48호는 경제수석실 자체 문서 분류 번호일 겁니다』

                     

                     그는 核개발에 관한 문서가 2급으로 분류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문서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일반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아요』

                     

                     ─대통령이 核개발을 지시했을까요.

                     

                     『朴대통령이 직접 「核무기 개발」이란 말을 입에 담으신 적은 없습니다. 만약 吳源哲 수석이 문서를 작성했다면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했으니까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챙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최근 비밀 해제된 美 외교문서에 나타난 한국의 核개발

                     

                     朴正熙 대통령은 왜 核무기를 가지려 한 것일까. 朴대통령은, 1969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주한 美 7사단의 일방적인 철수로 自主國防(자주국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不信에서 출발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의 목표는 카터(1977~1980년)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철회시키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核무기 개발문제를 놓고 韓·美 양국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朴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 1971년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을 1972년 초까지 개발하는 「번개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극비리에 核무기와 이를 운반하기 위한 장거리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개발도 진행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장비를 제조하려는 것이 아닐까, 「색안경」을 끼고 주시했다. 첨단 미사일 생산능력을 갖추고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다면 한반도 정세에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朴대통령의 지시로 비밀 核개발이 추진되면서 원자력 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再처리 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1972년 崔亨燮(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프랑스와 再처리 기술 및 시설도입 교섭에 나섰다. 연구용 원자로는 核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배출할 수 있는 高순도의 사용 후 核연료를 만들어 내며, 재처리 시설은 이 사용 후 核연료로부터 플루토늄을 뽑아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吳源哲 청와대 수석을 사령탑으로 한 核개발팀은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의 NRX형을,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1973~1974년 이를 적극 추진했다. 캐나다의 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원자력 연구소는 파키스탄 등 核개발을 꾀하는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社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키로 하고 1973년 9월 고위관계자가 SGN사를 방문,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社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캐나다로부터 CANDU(캔두)형 중수로의 도입을 추진했는데, 이는 평화적인 원자력 발전소 확보 외에 중수로가 수시로 사용 후 核연료를 꺼낼 수 있어 비밀 핵개발에 유리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발전소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교체한다. 미국은 이 점에 착안, CANDU型 원자로의 획득이 재처리 기술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한국 측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주기로 돼 있던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등에 압력을 가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던 NRX 연구로의 판매협상을 중단했다.

                     

                     1977년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社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핵연료 가공사업도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은 再처리 연구에 필수적인 것으로, 再처리 사업이 싹도 틔워 보지 못하고 사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간 미국 정부가 공개를 거부해 온 96건의 비밀 외교문서 중 朴대통령 시절의 核 관련 문건 15건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당시 공개된 비밀 문서들은 제럴드 포드(1974~ 1977년) 美 행정부에서 작성, 보고된 것들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국 정부의 핵개발 계획과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의 총력 외교전을 담고 있다.

                     

                     미국의 온갖 압박으로 한국은 1975년 12월경부터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정부는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협력이라는 대가를 선택한 것이었다.

                     

                     

                    주한 미군 철수 포기를 이끌어 내다

                     

                     CANDU형 원자로를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데 대해 미국은 核무기 개발에 대한 의구심뿐만 아니라 利害(이해)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농축 우라늄 공급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상업적 시장이었다. 한국이 원자력 수입선을 다변화한다면 미국은 이 시장을 잠식당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한 基의 건설비가 20억 달러씩 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각국은 대통령 자신이 원자력 발전소 판매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로부터 구입하기로 했으니 미국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원자로 판매를 하지 말라고 캐나다에도 압력을 가했고,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라고 프랑스에도 압력을 가했다. 한국은 美 국무부와 의회의 압력으로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비준했다. 그러나 1977년에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美 의회는 수출입은행에 대해 古里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를 결의하기도 했다.

                     

                     1979년 6월, 카터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1978년에 철수한 병력 3400명을 제외하고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사실상 철회했다. 朴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은 미사일을 비롯한 核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카터 행정부에 전달한 결과였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前 주한 美 대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의 核개발은 核 확산 방지체제에 대한 중대 도전일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에 위험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1975년 초 포드 행정부는 한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해 직접적 행동에 나서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정이 있기 전 수 개월에 걸쳐 미국은 한국이 核 재처리 장비 및 기술과 플루토늄 생산 중수로를 프랑스 및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협의와 노력을 계속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의 기본적인 안보관계가 위험에 빠졌다고 인식하자 核 노력을 포기하겠다고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미국은 그 문제를 비밀로 하기로 하고 체면을 세워 주는 보상조치에 합의했다>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지 않게 할 것』

                     

                     미국의 방해로 재처리 시설 도입과 CANDU형 원자로 도입이 좌절된 1976년 무렵,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과 吳源哲 수석을 청와대 내에 있는 서재로 조용히 불렀다. 朴대통령은 『원자력 산업을 종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金실장의 말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일본式으로 원자력 산업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은 원자력 발전소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 일본은 필요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核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公知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核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원자력 산업정책에 대해 일본은 미국을 위시한 어떤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지 않다. 문제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원자력 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

                     

                     吳源哲 수석은 원자력 산업의 종합계획을 작성해서 裁可(재가)를 받고 재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金실장은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는 대통령 지시를 극비로 추진하라는 말로 해석했다고 한다. 우선 착수한 사업이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할 核 연료봉을 만드는 공장의 추진이었다.

                     

                     연료봉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경수로용 연료봉과 중수로용 연료봉이다. 경수로용 연료봉을 제조하려면 미국에서 농축 우라늄을 구입해서 제조해야 한다. 그런데 중수로용 연료봉은 천연 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제조가 용이하다. 그래서 정부는 우선 중수로용 연료봉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를 위해 1976년 12월1일 핵연료개발공단이 발족했다. 이것이 바로 원자로용 연료봉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核연료개발공단에서는 「화학처리 대체 사업」을 했다. 하도 미국 정부에 시달리다보니 「再처리」는 금지된 언어가 돼 버렸고 대신 「화학처리」로 둔갑해서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이었다. 재처리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익혀 놓은 뒤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다.

                     

                     한국 정부가 연료봉 공장 건설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한국이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에서 도입하려고 했을 때, 미국 측이 『한국에서 再처리 시설을 건설하겠다고 하는데, 再처리 시설에서 타고 남은 우라늄을 분리해 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는 이 우라늄을 써서 연료봉을 만드는 시설도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데 대해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은 꾸준히 원자기술의 自立을 추구해 왔다. ▲원자로 설계 기술 ▲核연료 설계 및 제작 기술 ▲농축ㆍ재처리 등 민감 기술 확보 및 原鑛(원광)에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까지의 核연료 공급 주기의 완성 ▲운전 기술 등 원자력 기술의 자립항목 중에서 한국은 「농축ㆍ재처리」만 제외하고는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뤘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가동하고 있는 原電은 18基로 발전용량(40%)으로 따지면 세계 4~6위권의 원자력 대국이다. 月城1호기의 경우, 세계 최고의 운전효율을 기록하고 있는 원자로로 손꼽힌다고 한다. 아무튼 1979년 10월 朴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은 후견인을 잃었다. 核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 1980년대 全斗煥 정권 출범 초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자라는 싹마저 잘라 버렸다. 核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의 이름마저도 「원자력」이란 말을 떼어 버린 것이다.

                     

                     

                    남북한의 核개발 경쟁

                     

                     우리나라의 원자력 역사는 1956년 2월3일 韓美 간에 체결된 「원자력의 非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연구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한국은 1957년 8월18일 IAEA(국제원자력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58년 3월11일에는 원자력법이 공표됐다. 이 法은 우리나라의 法 중 483번째로 제정, 공포됐으니 꽤 일찍 제정된 법이다. 1959년 1월21일에는 원자력원이 창설되고, 1959년 3월1일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개소됐으며, 1962년 3월30일에는 비록 250kW의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가 가동을 개시했다. 미국 원조 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73만 달러가 투자된 이 원자로는 교육 및 기초 연구용이었다.

                     

                     우리나라는 1968년 7월1일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서명했으나 인준만은 보류해 왔었다. 남북이 함께 NPT에 가입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력 기술은 李承晩 대통령을 거쳐 朴正熙 대통령 연간에 이룩된 것들이다. 이후 대통령들은 원자력 발전에 획기전인 轉機(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원자력 개발도 우리와 시기는 비슷하다. 金日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무기를 위협수단으로 휴전협정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보고 핵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의 원자력연구개발은 1950년대 중반 舊소련의 드브나(Dubna) 연합 核연구소에 최학근을 대표로 하는 약 250여 명의 과학자들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舊소련 과학자들 또한 북한을 방문해 원자력기술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金日成 종합대학과 김책공대에 원자물리학부를 개설했고, 과학원 산하의 연구소에서 원자력 분야 훈련을 주관하였다. 1959년 북한과 소련은 북한에 의해서 「가구 공장」으로 명명된 북한 원자력연구단지 건립을 지원하는 상호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연구용 원자로 건설, 지질조사, 전문가 훈련 등을 소련이 지원하였다.

                     

                     이때 영변 구룡강 기슭에 현재의 영변 원자력연구단지가 결정되었고, 30여 명의 소련 核과학자들이 단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는 1967년에 조성이 완료돼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李升基(이승기) 박사가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內에 건설된 방사화학연구소는 그 후 1975년에서 1987년까지 再처리 공정을 개발 완료하였고, 이 일이 현재 북한 核문제를 유발시킨 근원이 되었다.

                     

                     북한의 核개발 시스템은 북한산 천연 우라늄→연구로→再처리 공장으로 이어지는 核연료 순환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외국에서 간섭할 방법이 없어 외교적 압력이 잘 먹히지 않는다. 사회시스템도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데 유리하다.

                     

                     

                    核보유는 失이 더 크다

                     

                     核물리학자인 鄭根謨(정근모ㆍ63) 박사는 한국의 초기 核개발과 관련,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核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등 核 관련 조약이나 기구에는 모두 가입한 상태여서 국제적인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核개발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의지」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북한 등 저개발 국가가 국제적인 감시망을 뚫고 核개발에 성공하려면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核개발을 강행할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核개발 자체는 1940년대의 기술로서,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核무기를 만들 수 있는 「비밀 자료」들이 수두룩하게 널려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核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폐쇄된 북한과는 엄연히 달라요. 우리는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을 무시한다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옵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고, 핵우산下에 있는 상황에서 핵을 보유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스위스, 스웨덴 등 核개발 능력이 있는 나라들도 왜 核을 갖지 않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核보유 필요에 대한 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南阿共(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核무기를 폐기했고, 우크라이나ㆍ카자흐스탄도 核무기를 러시아에 반납한 사례를 들면서 『요즘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得(득)보다는 失(실)이 많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核 전문가들은 『한국은 평화적 再처리 기술 개발을 全세계에 선언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核개발은 남한의 강력한 대응개발을 초래하고, 북한이 자진해서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北核 해결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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