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적 지휘부를 참수하는 현대전의 스마트 '도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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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109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출처: 미 해군>


개발의 역사


과거 해군의 힘은 함포에서 나왔다. 초기에는 활강포로 연안의 표적을 공격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강선포가 도입되면서 사거리와 파괴력이 높아졌다. 특히 아이오와급(Iowa class) 전함에 이르면 16인치 함포로 최대 38km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하여 원거리에서 상륙지원사격을 하거나 해안에서 멀지 않은 내륙까지도 공격이 가능했다.

거함거포의 능력으로 해군력은 지상의 목표까지 공격이 가능했지만, 여전히 사거리의 한계가 있었다. <출처: 미 해군>



순항미사일의 필요성


한편 2차대전을 거치면서 V1과 V2 등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의 초기모델이 등장하자, 이를 전투함과 결합하려는 노력이 잇달았다. 미국은 이미 1944년 독일 V-1의 부품을 회수하여 카피한 JB-2 룬(Loon)을 개발하여 시험발사 했고, 1945년 1월부터는 양산을 시작했다. 특히 룬의 해상형인 KGW-1은 일본 본토상륙작전에 사용되기로 계획되어 통상 LST 상륙함이나 CVE 호위항모 등에서 발사하는 개념으로 준비되었다.

1951년 발라오급 잠수함인 SSG-348 쿠스크(USS Cusk)함이 룬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출처: 미 해군>
막상 룬은 전쟁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순항미사일의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룬에서 가능성을 본 미 공군이 MGM-1 마타도어(Matador)를 개발하면서 미국의 순항미사일 개발에 불길을 당겼다. 해군은 2차대전 당시 사실 룬보다도 먼저 레귤러스(Regulus) 순항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했지만 개발이 지연되다가 1951년 3월에서야 초도 시험발사가 가능했다. 특히 해군은 핵탄두의 투발수단으로 SSM-N-8 레귤러스를 선정하여 잠수함 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따라 이미 1953년 미사일발사시험 잠수함 튜니(USS Tunny)가 초도발사에 성공하면서 레귤러스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핵 초계활동을 시작했다.
레귤러스 순항미사일은 겨우 10년간 핵무기로서 기능하다가 SLBM과 자리를 바꾸며 퇴역했다. 사진은 SSM-N-9 레귤러스 II 순항미사일로 SSG-574 그레이백 미사일 잠수함에서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출처: 미 해군>
레귤러스는 잠수 미 해군의 핵억제력의 핵심으로 활약했지만 사거리는 500해리(926km) 정도가 한계였고, SSM-N-9 레귤러스 II에 이르러서야 1,200해리(2,200km)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폴라리스 SLBM이 실전배치되면서 곧바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1964년 레귤러스가 퇴역하면서 미 해군에서는 더 이상 함대지/잠대지 순항미사일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일정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1965년 미 해군은 45km 권역 내에 부상한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하푼(Harpoon)이라는 사업명을 붙였다.
 
스틱스 대함미사일(좌)에 의한 에일라트 구축함(우)의 격침사건은 미군으로 하여금 다시 순항미사일에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그런데 1967년 소련제 스틱스 대함미사일에 이스라엘의 에일라트(INS Eilat) 구축함이 격침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 해군은 비상이 걸렸다. 1970년 해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줌왈트(Elmo Russell Zumwalt Jr., 1920-2000) 제독은 하푼 미사일의 개발을 최우선 사업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공중발사형인 AGM-84A와 함정발사형인 RGM-84A-1의 개발이 진행되어 1971년 맥도널 더글러스가 사업을 수주했다.

하푼 대함미사일은 본질적으로 현대화된 단거리 순항미사일이었다. <출처: jaglavaksoldier 채널>


대함미사일에서 다시 순항미사일로

하푼의 개발으로 미 해군은 최신예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하푼은 대함용으로 상대적으로 짧은 사거리였다는 점이었다. 본격적으로 지상을 공격할 정도로 긴 사거리를 가진 순항미사일을 과연 해군이 필요로 할 것인가, 필요하다면 어떠한 사양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미 해군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당시 해군에서 순항미사일과 관련된 사업은 2가지로, 우선 잠수함에서 하푼을 발사하기 위하여 캡슐화된 하푼을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두번째가 STAWS(Submarine Tactical Antiship Weapons System; 잠수함 전술대함무기체계) 사업으로 300 또는 500마일의 적 함선을 타격하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STAWS가 개발하고자 하는 것은 장거리 순항미사일이었기 때문에, 이 사업은 ACM(Advanced Cruise Missile)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이 사업을 위해 줌왈트 총장은 추후 ULMS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던 카우프만(Robert Kaufman, 1919-2006) 제독에게 개발위원회의 운영을 맡겼다.

하푼 대함미사일의 개발 성공으로 미 해군은 현대적 순항미사일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출처: Boeing>
그러나 STAWS/ACM 사업의 잠재적 역량을 높이 평가한 이가 따로 있었다. 바로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Father of the Nuclear Navy)'로 불리던 하이먼 리코버(Hyman G. Rickover, 1900-1986) 제독이었다. 리코버는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미 의회에 계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면서 ACM이야말로 미 해군이 최우선적으로 집중해야할 전술무기라고 평가하면서  정치권을 압박했다. 그러나 리코버는 해군 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존재로, 오히려 줌왈트 총장은 하푼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어 ACM 사업비용을 4백만불로 줄이고 하푼사업에 1천6백만 불을 할당했다.
핵군축협정인 SALT는 미 해군으로 하여금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개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ACM 사업을 살린 것은 해군이 아니라 바로 소련군이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SALT(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전략무기감축협정)가 1972년 5월 드디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순항미사일은 감축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국방장관인 레어드(Melvin Robert Laird, 1922-2016)는 SALT의 프레임 아래서 소련이 대한 전략적 우위를 추구하기 위하여 13억불의 국방예산을 의회에 요구하면서 전략무기의 확충을 꾀하였다. 예산의 대부분은 B-1 폭격기와 트라이던트 SLBM의 개발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ACM 개발을 위하여 2천만불이 배정되었다. 레어드 장관은 애초에 순항미사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SALT협정에서 SLBM의 보유수를 제한하면서도 순항미사일은 아예 규정에서 빠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봤던 것이다. 게다가 해군도 전략무기이자 전술무기인 순항미사일을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애초에 군축을 위해 시작된 SALT 협정은 오히려 핵전력을 증강시키는 엉뚱한 결과를 낸 셈이다.


순항미사일의 개발


이렇게 조건이 갖춰졌지만, 해군 순항미사일(Ship-Launced Cruise Missile; 이하 SLCM)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애초에 미 해군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정확히 개념조차 확립하지 못했다. 우선 발사방식조차 문제였다. SSBN(전략원잠)을 개조한 수직발사, SSN(공격원잠)의 어뢰관을 통한 수평발사, SSBN 어뢰관에서의 수평발사, 그리고 SSN 신조함을 통한 수직발사 등 4가지 방안이 있었다. 그런데 사업의 핵심주체들마다 입장이 달라, 레어드 장관과 국방장관실(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1번안을, 해참총장은 2번안을, 리코버 제독은 4번안을 선호했다.

  
순항미사일의 방향을 놓고 국방장관(좌)과 해참총장(중간), 원자력 책임자(우) 3인의 의견이 모두 달랐다. <출처: 미 국방부>


결국 어떤 방안을 선호하느냐에 따라서 미사일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1972년 중반경 해군은 5가지 종류의 순항미사일 개발안을 검토중이었다. 그중 3가지가 수직발사형으로 직경은 19~36인치, 중량은 1,850~8,350파운드 사이였다. 한편 수평발사형은 3가지로 모두 직경 19인치로 캡슐화된 형태였다. 1973년 1월에 이르러서는 미사일의 제안형도 늘어났는데, 업체 제안모델 5가지는 포세이돈 SLBM 발사관에 3발을 탑재하는 형이었고, 또 다른 5가지는 별도의 수직발사관에 장착하는 형태였다.

미 해군은 1972년부터 전략임무와 전술임무에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순항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했다. <출처: 미 해군>
한편 1972년 동안 해군은 STAWS 사업을 종료하고 이를 전략 및 전술 순항미사일 사업으로 통합시켰다. 결국 신형 순항미사일은 수직발사가 아니라 어뢰관을 통한 수평발사 형식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신형 순항미사일은 직경 21인치 이하 중량 4,200파운드(1.9t) 이하로 규격을 확정했다. 신형 미사일은 전략핵과 전술핵을 모두 탑재할 예정으로, 해군은 전략핵 쪽에 중점을 두었다. 발사플랫폼은 기존의 잠수함을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항공기나 수상함에서도 발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해군 SUBROC(SUBmarine ROCket) 사업에서 개발된 부스터, 공군 SCAD(Subsonic Cruise Armed Decoy) 사업으로 개발된 엔진 등 기존 사업의 성과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사업의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며, 1972년 12월경에 설계계약이 진행되어 12개 업체가 참가한 가운데 5개 업체가 선정되었다.
헨리 키신저(좌)는 순항미사일이 SALT 협정의 핵심적인 협상카드로 보고 개발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포드 대통령(중간) 시기에 순항미사일의 개발은 본격화되었으며, 슐레진저(우)와 럼스펠드 국방장관 시기에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출처: 백악관>
이러한 가운데 순항미사일은 이제 해군 뿐만 아니라 공군의 주요사업으로 떠올랐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순항미사일이 SALT 협정의 중요한 협상카드라고 보고 당시 국방장관 대행이던 클레멘츠(William Perry Clements Jr., 1917-2011) 국방차관에게 진행현황을 물었다. 클레멘츠 대행은 해군 뿐만 아니라 공군에도 순항미사일 개발사업이 진행중임을 알렸고, 이때까지만 해도 추력을 받지 못하던 공군의 순항미사일 사업은 ALCM(Air-Launched Cruise Missile, 공중발사 순항미사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고 추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군과 공군의 순항미사일 개발은 이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해군은 이미 1973년 시험발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국방부는 해군과 공군이 순항미사일 개발에서 서로 협력하고 기술을 교환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공군은 터보팬(turbo fan) 엔진과 고효율 연료를, 해군은 TERCOM  유도기술을 제공했다.


해군의 순항미사일 개발


1973년 12월 국방차관은 시제비행경쟁(flyoff)으로 SLCM 계약을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 해군 항공체계사령부(Naval Air Systems Command; NAVAIR)는 챈스 보우트(Chance Bought, 이후 LTV사로 변경, 이하 LTV)사와 콘베어(Convair, 이후 제너럴 다이내믹스로 변경, 이하 GD)의 2개사를 개발사로 지정하여 경쟁을 시작했다. 해군은 SLCM에 1,300~1,400해리의 사거리를 요구했는데, 양사의 제안모델은 확연히 달랐다.

 
LTV(보우트)사의 SLCM 모델 <출처: Bought>


LTV의 SLCM은 전체길이 5.4m에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LTV SLCM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한데, 우선 후방 날개 3개가 곡면식으로 접혀 있다가 발사시 펼쳐진다. 또한 길이 3.2m의 일체형 주익은 파이버글래스 재질로 미사일 본체에 세로로 보관되다가 90도로 펼쳐진다. 엔진은 탈레다인 CAE의 모델 471-11DX 터보팬으로 마하 0.7로 비행할 수 있었다.

GD(콘베어) SLCM의 RCS 테스트용 모크업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이에 반해 GD의 SLCM은 약간 다른 설계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미사일은 1.25인치 두께에 중량 1,000 파운드의 철제 캡슐에 보관되다가 발사되는 방식이었다. 미사일 동체는 알루미늄 재질로 전체 길이는 5.48m에 주익의 전폭은 2.6m였다. GD SLCM의 주익은 가위처럼 수직으로 접혀있다가 펴지는 방식으로 한쪽의 날개면에 다른 쪽보다 살짝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엔진으로는 윌리암스 F-107-WR-100 터보팬이 채용되었다.

GD의 SLBM은 1976년 2번의 시험발사를 모두 성공하면서 사업의 승자가 되었다.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시제 경쟁비행에서 해군이 요구한 기준은 2번의 발사에서 최소한 1번은 수중발사후 비행전환에 성공할 것이었다. GD SLCM은 1976년 2월 13일과 15일 발사에 모두 성공했다. 그러나 LTV의 경우는 운이 나빴다. 최초의 시험발사에서 유압식 어뢰관 발사가 실패하였고, 일단 이 실패는 시험발사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2월 24일 발사에서 미사일은 수면을 뚫고 나와 상승했으나 날개가 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한 달 후인 3월 24일 또다시 시험발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해군은 3월 8일 돌연 LTV 모델의 개발을 취소했다. LTV 미사일은 기술적으로 숙성되지 못한데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추가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이미 시험발사를 통과한 GD의 SLCM을 선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1976년 3월 17일 해군은 제너럴 다이내믹스를 SLCM 사업자로 선정했다. 그리고 약 2개월 뒤 해군은 윌리엄스사를 엔진제작사로 선정하면서 사업의 진용을 갖췄다.
유도장치는 SLCM의 핵심기술로 경쟁에서 맥도널 더글라스가 승리했다.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발사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도방식이었다. 해군은 1950년대부터 TERCOM(Terrain Contour Matchin, 지형대조항법) 유도방식을 개발하면서 정밀유도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1958년까지만 해도 TERCOM의 오차율은 시간당 0.03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0년에 이르러서는 오차는 시간당 0.005도(즉 1/3 해리)로 줄어들었다. 또한 유도장치의 크기와 중량, 전력소모량도 급격히 줄어들어, 1960년에 전체중량이 300파운드(136㎏)였던 유도장치는 10년 후에는 29파운드(13㎏)까지 줄어들었다. 내장컴퓨터, 레이더고도계 및 관성항법까지 모두 합치면 크기는 1/3 입방피트(약 9.4㎤)에 중량은 115파운드(52㎏)에 불과했다. 1950년대에는 진공관에 바탕하던 컴퓨터는 1960년대 중반에는 솔리드 스테이트 메모리(solid state memory)로 바뀌었고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세미 컨덕터 메모리가 탑재될 수 있었다.
해군의 SLCM은 BGM-109 토마호크로 명명되었다.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해군은 2개 업체를 선정하여 유도장치 개발사업을 진행시켰다. TERCOM의 원조 개발업체인 E시스템즈사와 맥도널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가 경쟁을 벌였다. 공군의 C-141 수송기에 유도장치를 장착하고 시험한 결과, 맥도널 더글라스는 5차례의 시험비행을 모두 성공한 반면 E시스템즈는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해군은 1975년 10월 맥도널 더글라스를 유도장치개발업체로 선정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SLCM은 기술적인 성숙을 바탕으로 완성되었으며, BGM-109 토마호크(Tomahawk)로 명명되었다.
토마호크 미사일의 소개영상 <출처: 유튜브 San Diego Air & Space Museum 채널>


공중발사형과 지상발사형의 개발


SLCM이 성숙해나감에 따라 국방부는 공군의 ALCM 사업에 SLCM의 성과를 적용하고자 했다. 국방부는 토마호크 SLCM을 ALCM으로 전환하여 순항미사일을 표준화하는 방향을 선호했다. 특히 미 공군이 ALCM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공군은 B-52 전력의 부족을 ALCM이 보충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공군사업의 최우선은 B-1 신형폭격기의 개발에 두었으며 차순위는 신형 ICBM인 MX 피스키퍼(Peacekeeper)였다.

미 공군 ALCM 사업을 위하여 보잉이 개발한 AGM-86A <출처: 미 공군>
그러나 해군의 SLCM이 점차 완성되어가자 공군도 입장을 바꾸어 ALCM의 개발을 서둘렀다. 공군은 보잉을 ALCM 개발사로 선정하여 B-52의 SRAM발사기에 장착할 수 있는 AGM-86A를 개발했다. 이 사이 해군은 토마호크의 ALCM 버전인 AGM-109을 개발하여 상당부분 진척시켰다. 1976년 3월 보잉과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ALCM은 모두 시험비행을 마치고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1977년 국방부는 보잉의 ALCM에 바탕하여 사거리를 증가시킨 AGM-86B를 개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토마호크 ALCM 계획은 무산되었다.
토마호크 ALCM은 결국 공군에 채용되지 못했다.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한편 1977년 국방부는 토마호크와 관련하여 또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소련이 RSD-10 파이오니어(NATO 분류명 SS-22 세이버 Saber) 중거리탄도탄(IRBM)을 실전배치 함에 따라 미국은 NATO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핵무기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국방부는 SS-22에 대항하는 무기체계로 GLCM(Ground-Launched Cruise Missile, 지상발사 순항미사일)을  선정하고 미 공군이 운용하도록 했다. GLCM은 곧바로 실전배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까지 가장 기술적으로 진전했던 토마호크를 바탕으로 개발이 결정되었다.
소련의 신형 IRBM에 대항하여 토마호크를 지상형으로 개조한 '그리폰 GLCM'이 선정되어 미 공군의 자산으로 유럽에 전진배치되었다. <출처: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
BGM-109G 그리폰(Gryphon)으로 명명된 GLCM은 1983년부터 실전배치가 시작되어 퍼싱II 중거리미사일 108발과 함께 464발이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서독 등 유럽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GLCM은 INF(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중거리핵전력 폐기조약) 조약이 1987년 체결됨에 따라 1988년부터 폐기가 시작되어 1991년 퇴역과 동시에 전량 폐기되었다.
BGM-109G 그리폰 순항미사일의 소개영상 <출처: 유튜브 jaglavaksoldier 채널>


토마호크의 활약과 꾸준한 개량


토마호크 SLCM은 1980년에는 개발이 완료되어 동년 3월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DD-976 메릴(USS Merrill)함에서 첫 수상함 발사가 실시되었다. 이후 6월에는 스터전급 공격원잠 SSN-655 기타로 (USS Guitarro)에서 수중발사가 성공리에 실시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적인 시험발사로 성능을 철저히 검증했다. 토마호크의 수상함 장착은 1982년부터 시작되어 최초의 시험함인 구축함 메릴이 최초의 장착함이었고, 아이오와급 전함인 BB-62 뉴저지(USS New Jersey)가 두번째의 토마호크 장착함이 되었다. 잠수함 장착은 이듬해인 1983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83년 3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은 실전배치가 시작되었다.

토마호크 SLCM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메릴에서 최초로 실전배치되었다. <출처: 미 해군>

초기의 버전은 토마호크 블록I(Block I)으로 불리며, BGM-109A 지상 핵공격용(TLAM-N)과 RGM/UGM-109B 함정공격용(TASM) 핵탄두 탑재 순항미사일이 실전배치를 시작했다. 1986년부터는 재래식 탄두를 장착한 토마호크 블록II가 실전배치를 시작했는데, 우선 BGM-109C 재래탄두 공격형(TLAM-C)이 먼저 배치되고 1988년에는 BGM-109D 자탄공격형(TLAM-D)이 그 뒤를 이어 실전배치되었다. 1991년 걸프전 발발시 미국은 최초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실전에 사용했는데, 이때 사용된 것이 바로 토마호크 블록II 였다. 토마호크 블록II는 사정거리가 무려 1,700km에 이르렀다.

토마호크 SLCM은 구형 전함이 아이오와급에도 장착되어 걸프전에서 활용되기도 했다. <출처: 미 해군>
걸프전으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의 위력을 확인한 미군은 GPS 유도기술을 결합한 토마호크 블록III를 1994년부터 배치하기 시작했다. 블록III는 알레이버크(Arleigh Burke)급 이지스구축함 및 VLS(Vertical Launching System)의 보급과 함께 냉전 후 미 해군 순항미사일의 핵심전력으로 발칸반도 분쟁은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의 테러근거지에 대한 보복공격 등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활약은 9.11테러 이후 대테러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초기에 활용되어, 배치 이후 약 800여발이 발사되었다. 이렇듯 아군의 피해없이 정밀타격이 가능한 토마호크는 냉전 후 안보상황에서 미국의 핵심적인 전쟁수단으로 자리잡았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대테러 전쟁에서 토마호크 블록III를 발사하는 DDG-53 이지스구축함 <출처: 미 해군>
한편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토마호크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단순히 저공침투비행으로 목표를 타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전 지역 상공에서 대기하다가 최적의 시기와 목표에 공격이 가능하도록 기능을 추가했으며, 발사도중에도 사전지정된 여러개의 목표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하여 마치 무인기처럼 좀더 자율적이고 정밀한 공격을 가능하도록 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이 모델은 BGM-109E 토마호크 블록IV 또는  택티컬 토마호크(Tactical Tomahawk)로 불린다. 토마호크 블록IV는 2003년부터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미 해군 토마호크 전력의 중심이다.
블록IV 개량형인 '택티컬 토마호크'는 현재 미 해군 SLCM의 주력이다. <출처: 미 해군>
한편 이후에도 성능개량이 계속되어 현재는 블록5가 생산되고 있다. 블록5는 2단계로 개량이 진행되어, 우선 블록 5A는 다기능 시커를 장착하고 해상과 지상 목표를 모두 교전할 수 있는 해상타격 토마호크(Maritime Strike Tomahawk; MST)로 2020년부터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다음 단계로 개발되는 블록 5B는 합동 다중효과탄두(Joint Multiple Effects Warhead)를 장착한 모델로, 2024년부터 실전배치될 예정이다.
BGM-109E 블록IV 택티컬 토마호크의 시험비행 영상 <출처: 유튜브 jaglavaksoldier 채널>



※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의 특징과 운용현황, 파생형은 별도의 항목으로 게재됩니다.


저자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본 연재인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다. 현재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신안산대 경호경찰행정학과의 겸임교수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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