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SS Pueblo Incident (1968.01.23)
작성자: 군사고문관
조회: 12193 추천: 4
작성일: 2020-06-15 01:34:20
안녕하십니까? 군사고문관입니다.
이번에는 1968년 1월 23일에 일어난 미 해군 소속 정보수집함이었던(정보수집은 NSA, 함선 운영은 미 해군) USS Pueblo 호의 나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소개합니다.
Lloyd Mark Bucher (1927.09.01 Idaho. Pocatello ~ 2004.01.28 California. San Diego)
1927년 9월 1일 아이다호 포카텔로에서 출생한 부처는 유소년기를 모르몬 신앙을 가진 천주교 고아원에서 자라났었고 네브레스카 보이스타운에 정착하여 학업에 열중하였습니다.
학업과 스포츠에서 여러 가운데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고 네브레스카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하여 임관하였습니다.
11년 동안 잠수함에 승함하여 근면하고 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였으며 잠수함 지휘관을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핵 잠수함 함장이 되려면 수학 학위가 있어야 했지만 부처는 수학 학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특수 임무에 이용되고 있는 디젤 스노클형 잠수함의 지휘관이 되기를 희망하였다고 합니다.
Yokosuka in Japan, 1966 (출처 : pinterest)
Yokoska, U.S Naval Base(1970) (출처 : pinterest)
1966년 12월 일본 요코스카의 미 7함대 기지에서 부처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제7잠수함대의 작전장교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AKL(Auxiliary Cargo Light) 44 경함선의 지휘관으로 선발되었습니다.
1968. U.S. Naval Historical Center Photograph.
↑ 미 육군 소속 화물선 FP-344(1944년 건조), 1944 년 7 월 경 위스콘신 주 Kewaunee에 위치한 Kewaunee Shipbuilding & Engineering Corp. 조선소에 건조된 후 미국 연안에서 화물선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에 퇴역하였습니다.
폐선에 가까운 선박 (이와 동급함 2척과 함께) 3척을 미 해군이 인수하여 1966년부터 전자정보 수집함으로 수리, 개조하여 운영하였습니다.
부처(당시 소령)는 이 배의 그간 운영 기간이 25년이나 되었고 정보수집함의 목적에 맞게 위기상황시 사용될 '파괴체계' 장비가 부족한 점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공산권 해군이 출몰하는 적성 해안을 따라서 작전을 해야 하는 목적에 맞추어 작전에 대한 방해공작을 받게 될 상황에 대해 고려하였으나 나포될 가능성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Lt. Stephen Harris
공해상에서 자유권에 관한 브리핑을 너무도 철저히 받았기 때문에 나포에 대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는 정보문서에 대한 파괴 도구를 소방 도끼나 모래 자루를 이용한 태움 정도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보다 훨씬 앞선 첨단 파괴체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는 푸에블로호 함정에 갖가지 정보수집장치들을 설치 완비될 때까지 상부에 건의하기로 해리스 중위와 의논하여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주후에 받은 회신에는 그러한 장비나 체계가 너무 비싸다는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고 합니다.
Lt. Edward R. Murphy Jr. (Executive Officer of USS Pueblo)
부처 함장은 회고록에서 머피 대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훤칠한 키에 말끔한 해군장교 정장을 한 채 함정을 둘러보는 젊은이와 마주쳤다. 약간 창백한 얼굴에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함장이 나타난 것을 눈치채고 순식간에 그의 표정은 더 당황한 채 ..............
내가 불쑥 나타나서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정식으로 나에게 경례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분명히 그도 푸에블로와 같은 작은 배를 탈 것이라고 상상을 못 했을 터인데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게다. 그는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고 부함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
그를 나의 선실로 데리고 가서 나 자신의 문제점들을 이야기 해 주면서 그의 인사명령지와 기록부를 정식으로 접수했다. 당직사관 자격도 갖췄고, 항해기술학교도 다녔고, 구축함의 항해장 보좌관 역할도 경험했지만 가장 최근 보직이 지상 해군 시설에서 차고지를 담당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부함장이 될 사람이 우리의 첩보임무 내용을 완전히 브리핑 받을 비밀취급 인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지시를 내리면 마치 올빼미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열심히 경청했기 때문에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1966년 7월 말부터 8월 내내, 푸에블로호 함정은 하루 운항 뒤에 이틀은 정비창에서 결함을 교정하는 식으로 푸에블로호의 시험 운항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해군검열평가단 보고서는 85쪽 분량의 결함 목록을 푸에블로호 함정의 부록으로 달았으며 이 목록에 담긴 대부분의 항목은 푸에블로호 함정처럼 낡은 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문제나 결함 정도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결함 목록 부록에는 푸에블로호 함정의 조타엔진이 지적되어 있었으며 튼실하게 만들려던 갖은 노력에도 엔진은 시험 운항 중에 180번 정도 고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함장인 부처는 푸에블로호 함정의 수없이 많은 유보와 항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대담하게 배를 접수하였습니다.
USS Pueblo
부처 함장은 이 문제투성이 함선의 운항을 결정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모든 지휘관들이 해군검열평가단이 가지고 있는 결함 목록 때문에 자기 함정의 작전배치를 거부한다면 해군 함대의 절반 이상이 활동을 중지 한 채 모항에 정박해 있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적들에게는 기뿐 소식, 우리 동맹국들에게는 실망과 낙담을 안겨주고 자유세계의 해상강국으로서의 소임을 못 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현재 상황은 해양강국의 해군력 대부분이 폐선장에서 회수해 개조한 푸에블로호와 같은 배를 가지고 점증하는 복잡한 현대 해군 기술력과 겨루는 양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미해군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자'란 철학은 가치 있는 것이다. 자기 부대를 위해 최선의 가용장비를 얻으려 노력한 뒤에, 양심적인 해군장교라면 자신과 군과 나라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항의나 불평은 그만두고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부처 함장은 적성국 근처의 해안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해야 할 푸에블로호 함정에 대한 무장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푸에블로호를 위해 이미 요청해 두었던 파괴장치와 완벽한 보안성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리버티 함은 커서 경무장을 갖추고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 인력도 승함시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 함정에 대한 '치고 빠지는' 적이 아닌, 적의에 찬 적군이 정식으로 공격을 가해왔다면 격침되거나 폐선이 되어 해안으로 표류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때 충분한 파괴장치나 능력이 없다면 함정의 비밀 장비들과 물자들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협적인 전쟁상황에서 6함대가 경계를 펴고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던 해역에서 리버티 함이 어려움을 당했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경종이 될 수 있었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더 조그마한 함정이 더 멀고 비우호적인 해안에서 작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인 데다가, 푸에블로호는 지중해보다 훨씬 넓은 태평양에서 위기를 만나도 6함대와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정을 자폭시킬 능력을 갖추는 것은 그만큼 더 절실한 것이다. ...........................
리버티 함 사관과 관련하여 유일한 긍정적인 반응은 해군총장에게 화가 나 속없이 생각을 내비친 한 제독에게서 나왔다. '모든 해군 함정을 무장하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는 우리 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어서 공격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말은 대부분의 함장과 승조원들에게는 달콤했지만 실제로 푸에블로호 함정과 작전을 수행할 '방아벌레 작전'에 내렸던 그의 명령은 분명히 해군총장이 고려하지 않은 미묘한 뜻을 담고 있었다.
우선 우리는 전통적으로나 국제법상 방해받지 않고 평화롭게 작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공해에서 작전하게 되어 있다.
둘째, 우리 선박들은 표면적 구실이든 아니든 수로학(水路學) 및 해양학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그 정보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푸에블로호 와 같은 선박은 전혀 도발적이 아니며, 적대행위나 공격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the soviet primorye class intelligence(구소련 프리모르이級 정보수집함)
또한 부처 함장은 구 소련의 세계적인 규모를 보유하고 있었던 정보수집정찰함에 대해 푸에블로호 함정의 작전에 대한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환경조사선(AGERs)들이 무장하지 않는 이유는 소련이 비무장 트롤어선들을 거의 20년 동안 우리 해역 근처(때로는 해역 안으로) 보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배들은 고기를 잡지만 전자정보 장비도 장착하고 있다. 우리 쪽의 워싱턴 계획가들은 소련이 자기네가 투자한 정보수집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사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도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여타 공산국가들은 그에 맞춰 정책을 집행할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AGERs(푸에블로호 함정은 GER-2)를 무장한다는 것은 중요한 정책 변화를 의미하며 '방아벌레 작전'의 기본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구 소련 트롤 개조어선 정보수집함, OKean Class
배수량 720ton, 승무원 32명, 미군과 그 동맹국들이 연합 훈련하는 해역에 자주 나타났던 함선입니다. 동해에도 자주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의 기본 임무를 위장하기 위해 적절한 용어는 '해양자료 수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사실상 합법적인 해양조사선이며 예외적으로 원양에서 유용한 과학적인 자료를 얻기 위해 항해하고 있었다는 점이 이유였습니다.
Dunny Tuck (1969.02.11) Harry Iredale ( 2001.04.06 C-SPAN interview)
푸에블로호 함정에는 두 명의 해양학자가 동승하고 있었는데 더니 터크(Dunny Tuck)는 배너(GER-1, Banner)에 두 번이나 승선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보좌관 격인 해리 아이어데일(Harry Iredale)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 함정은 부처 함장이 자서전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항해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 1968년 1월 2일, 당시 나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사세보로 항진하여 미해군 기지를 방문해 연료를 가득 채운 뒤, 만일 제3지원단 행정사령관인 노벨 G. 워드 소장이 계시면 찾아가 보고를 할 것.
둘째, 대마도 해협을 통해 동해로 진출하되 일본을 껴안으며 항해함으로써 근처 해역에서 작전한다고 알려진 소련 해군 부대와의 조우를 회피할 것.
푸에블로호 작전 해역
셋째, 육지에서 30~40마일 떨어진 곳에 각각 화성, 금성, 명왕성이라고 명명된 우리의 작전 해역을 관통하여 북으로 올라간 후, 거기서 15마일 이내로 해안에 근접해 남진하면서 작전을 할 것이었다.』
Communications Room on the USS Pueblo(URC-32s)
1968년 1월 11일 06:00 푸에블로호는 닻줄을 풀고, 사세보 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습니다. (푸에블로호가 작전 해역으로 떠날 때 부처 함정의 계급은 중령으로 진급하였음.)
정보수집을 위한 푸에블로호 함의 목표 해역은 코드명 명왕성으로 불리는 블리디보스토크 근처의 북한-소련의 접경지에 가까운 바다였습니다.
동해상에서 가장 넓은 해상으로 거의 600마일을 가로질러야 하는 항해였으며, 동절기에는 정말로 기대하기 어려운, 아무리 최적의 상황이라 해도 푸에블로호 함의 순항 속도는 11노트로는 60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하늘을 맑았지만 기온은 쌀쌀하였으며 푸에블로호 함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여 이 근처에서 작전 중인 소련 해군함선의 관측을 피하기 위해 연안을 감싸 안으며 항해하였습니다.
USS Pueblo 함내 정보수신감청실인 "특수작전구역" 배치도(해리스 대위가 지휘)
부처 함장은 푸에블로호 함이 항해 중 선내에서의 임무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 출항 초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온 악천후는 상당히 많은 우리의 행정 및 문서 작업을 중단시키기도 했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고 악조건에 점차 익숙해졌다. 조금만 잔잔해져도 나는 날짜가 지난 보고서를 검토하고, 행정업부가 원활하도록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우선 현재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의 바탕이 되는 작전명령에 관련한 많은 보고서들을 날짜순으로 정리해야 했다.
나는 지시 내용을 상세히 준비해서 업무담당자(항법사, 당직사관, 정훈사관, 전자정보 감시관)들이 자신의 일일업무자료를 작전 장교인 스킵 슈마허(Skip' Schumacher)에게 제출하면, 작전장교는 그 자료들을 편집해서 코드명 '물고기 1'이라는 공식 함정 보고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Skip' Schumacher
이런 식으로 일일 활동이 발생 순서에 따라 날마다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리 배의 보고서 외에도 별도로 스티븐 해리스가 자신의 지휘계통으로 별도 보고하는 완전한 작전보고서도 있었다. 그의 보고서는 정보계통의 많은 단위 부대들이 주의 깊게 분석해야 할 내용들이었다.
함장인 나의 보고서는 주로 작전면에서 가치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작전 해역에서 안 알려졌던 내용을 우리가 관측하거나 사진을 찍어둔다면 그것도 새로운 정보 가치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었다.
정보분야에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런 활동이 없더라도 분석가들에게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의 '물고기1'에 관한 필수 보고사항 외에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분서가들에게 도움이 될 기타 자료들도 포함시켰다.
스티븐의 보고서 내용들은 주로 기술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정보량도 방대해서 내용을 판독하고 해석하는 데만도 몇 주, 몇 달, 아니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푸에블로호의 목적은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하는 일인데, 나중에 그것을 전문가들이 주의 깊게 분석하여 편집해 놓으면, 우리나라(미국)의 군사 및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장차 사용하든가 사용하지 않든가 하게 될 것이었다.』
푸에블로호는 엄격한 전자방사통제 하에서 운항을 하였습니다.
우발적으로다도 무선 송출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주요 부품들을 빼내서 보관했다가 긴급시에만 다시 끼워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방아벌레 작전 특성상 전자방사통제는 필수요건이었는데 그 이유는 푸에블로호 함에서 나가는 여하한 전자 발신도 틀림없이 비우호국 감청 요원들의 귀에 들어가 결국은 푸에블로호 함의 위치가 드러나게 되고, 작전 대상국도 이미 계획된 전자신호활동을 중단하게 되므로 푸에블로호 함의 정보감청요원들이 탐지하려는 상대방을 못 찾게 될 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 함장은 푸에블로호 함이 발각될 때까지는 전자방사통제를 지키라고 함내 승무원들에게 지시를 하였으며, 이는 푸에블로호 함이 미국 해군 함정으로 판명되는 순간까지 침묵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푸에블로호 함은 무선 및 전자방사통제 상황에서 작전 중이었고 해군기동보고체계에서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푸에블로호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상급 부대는 그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USS Pueblo, 50 caliber machine gun
http://www.usspueblo.org/Pueblo_Incident/Hi_jacking.html
푸에블로호 함정에는 50구경의 기관총 2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20mm 기관포를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푸에블로호 함의 수리를 맡겼던 곳의 공창에서는 20mm 기관포 예비 물자가 없었고 주어진 기일 내에 장착할 인력이 없었으며 장착을 하려고 할 경우 출항 일자가 지연되었기 때문에 50구경의 기관총 2정을 전방 이물의 닻 권양기 한 쪽과 배의 중심선을 따라 고물, O-1 레벨에 설치한 것이 푸에블로호 함 무장의 전부였습니다.
푸에블로호 함에서 이 총들의 사격 연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처 함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우리 배에 50구경 기관총을 거치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게 맞는 운영지침을 작성해 선임 사수 웨들리와 그의 부사수 매가드가 작동 가능 상태로 준비하도록 했다. 폭풍 때문에 승조원들이 안전하게 갑판에 나올 수 없는 경우에는 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지만, 오늘 아침에는 해안에 근접하기 전에 총이 적절히 작동하도록 잘 준비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는 두 정의 기관총이 모두 준비상태를 마치고 시험 사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얼어버린 커버를 벗겨내면서 나는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험 사격은 우현 함수에 거치한 총으로 했다. 웨들리와 매가드가 함께 운용하며 첫발을 발사하는데 20분 이상 걸렸고, 그 뒤 12분 이상 걸려서야 뒤에 거치한 총을 작동함으로써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문제는 조정을 계속해야 하는 두간 간격이었다.
나도 총마다 몇 발씩 사격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사격 연습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던 50갤런짜리 드럼통을 뱃전을 넘겨 물에 던져서 표적으로 사용했다. 』
1월 22일에 푸에블로호 함정에게 접근한 북한해군 함정과 구 소련 정보수집 트롤 어선
1968년 1월 22일 오전 10시경, 25노트로 푸에블로호 함으로 접근하는 북한 해군 함정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작전 수역인 코드명 금성에서 남쪽에 위치한 마양도(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시) 근처로 이동하였습니다. 마양도는 북한의 러시아제 잠수함인 위스키급 잠수함들의 기지가 있었던 곳이었음으로 북한 잠수함이 근처에서 활동을 할 경우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 함장은 푸에블로호 함의 항법사에게 함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라고 지시를 하였고 만일 전파항법장치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면 레이다를 작동해서 여러 번 수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푸에블로호 함의 위치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처함장은 판단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마양도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방위각 0.48, 약 8마일 거리에서 푸에블로호 함쪽으로 오는 배 한 척을 발견하였습니다.
부처 함장은 쌍안경으로 북한 군함 한 척을 보았는데 약 12,000야드에서 속도는 약 25노트로 푸에블로호 함 우측으로 신속하게 접근하고 있는 북한 해군 함정을 관찰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USS Pueblo 호 함정 근처를 지나갔던 북한 해군 SO-1 구잠함
1월 22일 점심 즈음에는 함교에서 감시임무를 하고 있던 당직사관인 진(Gene Lacy)이 부처함장에게 멀리서 두 척의 트롤(trawl)선이 푸에블로호 함쪽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부처 함장은 쌍안경으로 관찰하고선 그 배들이
러시아제 Lenrta 級 트롤선이라고 확인하였습니다.
Soviet intelligence ship, Lentra Class
1968년 1월 23일 화씨 20도의 냉기에 바람의 세기는 약 4노트 정도 되었으며 푸에블로호의 측심기로 해저 등고선을 체크해보니 육지에서 약 25마일 정도의 거리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진 레이시에게 부처 함장은 거리를 15마일 정도로 당겨서 원산지역에서 모든 전자교신을 효과적으로 감청할 수 있도록 위치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Gene Lacy
점심 즈음에 오찬을 먹는 상황에서 푸에블로호 8마일 남쪽 해상에서 선박 한 척이 접근하고 있다고 견시조가 부처함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부처함장은 견시조에게 계속 감시하다가 5마일 이내로 접근하면 다시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식사는 다시 이루어졌고 당시 부처 함장은 배를 목격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그러나 두 번째 보고가 곧 연락이 오자 배가 5마일 정도로 다가와 신속하게 푸에블로호를 향해 접근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부처 함장은 4분 만에 3마일을 달려왔다는 뜻이니 속도는 약 40노트 정도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구잠정이 속도나 방향을 변경하지 않고 계속 다가오자 부처 함장은 우리 배가 어느 모로 보나 공해상에서 해양자료를 조사하는 선박으로 보이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정하고 그러한 활동을 나타내는 국제일(國際日) 표시 깃발을 게양하고 식사중인 해양학자들을 불러 북한 해군이 보도록 여분의 난센 채수기를 설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부처 함장은 해안에 설정한 푸에블로호 함의 교차 방위 위치는 그때에도 볼 수 있었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아래층 조타실로 내려가 푸에블로호가 정말로 국제 수역 내에 위치했는가를 확인 점검하였습니다.
공개된 1級 기밀이었던 Pueblo 함의 위치 (source : National Security Agency, the Roosevelt Review)
푸에블로호 함의 나포 당시의 위치와 북한 해군의 SO-1 구잠함의 위치
푸에블로호는 흥도로부터 16마일에서 1/10이 모자라는 15.9마일 떨어진 해상에 있었으며 남동쪽으로 약간 표류하는 상태에서 정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푸에블로호에 더 가까이 다가선 북한 해군의 구잠정은 개량된 소련제 SO-1급으로 확인하였으며 길이는 130피트, 폭 21피트, 최대속도 48노트, 승함 인원은 장교 3명에 수병 16명이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부처함장은 북한 해군의 구잠정이 육지 기지간의 통화를 감청할 수 있는지 통신특기병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비번인 승조원들까지 가까이 다가온 북한 해군 구잠정을 보기 위해 갑판으로 몰려나왔습니다.
통상적으로 적법한 해양조사선에는 30명 남짓한 인원들이 탑승한다는 것을 부처 함장은 생각해 내었고 그 이하의 인원만 보여주려고 함내 방송망을 통해서 누구든지 공식적인 갑판 용무가 아니면 배의 아래층에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푸에블로호 엔진실에는 디젤 엔진을 작동시키고 벨 소리에 응답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북한 해군의 SO-1 급은 푸에블로호의 감정을 건드리며 넓지만 조여오는 원을 그리며 '국적이 어딘가?'라는 내용의 국제 신호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부처 함장은 즉시 푸에블로호 함정의 배 신호수에게 미국 깃발을 올리게 했습니다.
그 후 북한 선박의 함교와 갑판에서는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고, 쌍안경을 통해 나타난 모습은 놀람과 혼돈에 휩싸였다고 부처함장은 표현했습니다.
진 레이시 당직사관은 "세 척의 고속 어뢰정, 방위각 160, 함수 쪽으로 거리 10,000야드에서 접근! " 이라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부처함장은 북한 해군 단일부대의 감시활동이 아니라, 전면적 방해작전이 임박한 것 같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USS Pueblo 함에 접근하여 사격한 북한 해군 P-4 어뢰정 모습
SO-1급 구잠정은 푸에블로호 함정을 두 번째 맴돌고 있었고, 거리는 약 500야드 이내로 좁혀왔기 때문에 북한 해군 승조원들의 독특한 보병 복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푸에블로호 함 승무원들 모두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 함정에서는 두 번째로 신호 깃발을 올렸는데 내용은 "정선하지 않으면 사격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푸에블로호 함은 정선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처 함장은 머피 부함장을 호출하여 사전에서 "정선"이라는 뜻을 찾아보고 혹시라도 다른 뜻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부처 함장은 황급히 사다리를 타고 조타실로 내려가서 가장 가까운 육지와의 거리와 방위를 레이더상에서 직접 확인 하였습니다.
15.8 마일이었고 북한이 인정하는 영해 12마일에서 3.8마일이나 밖이었습니다.
부처 함장은 자신만만하게 푸에블로호 무개 함교로 다시 올라가 푸에블로호 신호수에게 국제 규정에 맞는 신호 깃발을 올리도록 지시했습니다 .
'우리는 국제 수역에 위치해 있다'
세 척의 어뢰정이 1마일 이내로 다가왔으며 전속력으로 계속 접근하여 SO-1 구잠정과 합세하려고 하였습니다.
구잠정은 푸에블로호 함 주위를 계속 멤돌고 있었으며, 기관포에 배치된 사수들은 직접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스킵 중위는 푸에블로호 상황보고서에 메시지 등급을 특보에서 위험으로 상향할지를 진지하게 물어왔고 부처 함장은 위험 등급 사용 목적을 알아보고선 위험 등급으로 올리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위험 등급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백악관을 포함한 모든 상급 제대에 즉각 전파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보고하는 신호였습니다.
부처 함장은 진 레이시 사관에게 "필요할 경우 푸에블로호를 신속히 침몰 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신속히는 안됩니다. 함장님, 해수 냉각 흡입 장치의 빗장을 풀고 연결을 끊은 다음에 주 엔진실에 물을 채우는 데 약 2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 다음에 보조엔진실의 칸막이 벽을 해체하지 않으면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처 함장은 배 내부 통신 음향관을 통해 푸에블로호 밑의 수심을 측정해 보라고 지시하였고 올라온 보고에서는
"30 fathom (패덤, 54.9m) 입니다" 라고 하여 놀랐다고 합니다.
수심이 너무 얕아 북한 공산군이 잠수부들을 동원해서 푸에블로호의 내용물들을 몽땅 건져올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부처 함장은 통신 음향관을 통해 "전면! 속도 1/3! 항법사!, 육지를 벗어날 최선의 코스를 선택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해양탐사원들에게도 "모든 해양 탐사활동은 연기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비상벨 소리를 듣고, 엔진실 근무자들이 공회전하던 디젤엔진에 기어를 넣고 스로틀을 높이자 연통에서는 연속적인 끄르렁 소리를 내었고 마침 북한 어뢰정이 갑판에는 무장 병력을 가득 태운 채로 선미에 대려고 하였으나
푸에블로호가 속도를 올려서 항진하자 다시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넓게 원을 그리며 넓은 바다 한 가운데로 계속 나가갔고 그 순간 다른 북한 해군 함정들이 푸에블로호 함수를 가로지르며 차단 기동함으로써 소위 '힘겨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USS Pueblo호 함정이 북한 어뢰정의 사격과 추격을 받으며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린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 북한 MIG-21 두 대의 추격도 받았습니다.
부처 함장은 푸에블로호를 계속 항진시켜 북한 해군 함정들을 따돌리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도 고려했다고 합니다.
함장은 함내 확성기를 통해 모든 비밀 문건을 파괴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 북한 해군 함정을 향해서는 '귀측의 배려에 감사, 우리는 이 수역을 떠날 것임' 이라는 내용의 길다란 신호기를 올려서 북한 해군 함정의 추격을 멈추게 하려 했습니다.
SO-1 구잠함도 '정선하지 않으면 사격하겠다'라는 깃발을 내리고, 푸에블로호가 지나간 자국을 멈칫거리면 따라오고 있는 듯했으나 2,000야드 이상 뒤로 쳐졌습니다.
그러나 P-4 어뢰정들은 푸에블로호 함을 계속 따라왔으며 그 중 두 척은 푸에블로호 함 후미에 가까이 달라붙었고, 다른 두 척은 함수 주위 10야드 정도의 거리에서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며 질주했는데, 부처 함장은 이러한 운항을 보고 분명히 푸에블로호 퇴로를 차단하려는 뜻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나머지 한 척의 SO-1 구잠함도 계속 따라와 이 싸움에 가담함으로써 푸에블로호 함정은 북한 해군 함정 6척과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똑딱거리며 운항하는 12노트의 푸에블로호 함정을 북한 해군 함정들이 따라잡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고 봤으며 저속으로 달리는 표적을 겨냥하는 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부처 함장은 판단하였습니다.
그런와중에도 푸에블로호 함정은 고집스럽게 항진을 계속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는 북한 해군 함정들을 속이고 달아날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SO-1 구잠함은 다시 신호기를 달았는데 '정선 안 하면 사격함!' 이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 함정들이 정말로 사격을 감행할 경우 푸에블로호 함정이 작은 표적으로 보여야 된다는 그간의 해군함정 운영의 경험으르 살려 부처 함장은 북한 해군의 신호기를 무시하며 음향관을 통해 조타수에게 "우측으로 10도!"라고 소리쳤습니다.
USS Pueblo호 항해 모습
그러나 북한 해군의 SO-1 구잠함은 푸에블로호 함정의 회피 기동을 막으며 배의 외곽으로 우회해서 자신들의 사수들이 뱃전에서 일제히 사격하기가 쉽게 위치시켰습니다.
이에 부처 함장은 조타수에게 "10도를 더 틀어라!"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몇 초 동안 또 다시 북한 해군 함정은 푸에블로호 함정의 회피 기동에 맞춰 조정을 했고, 부처 함장은 푸에블로호 함정을 계속 우측으로 틀다가는 불가피하게 배의 함수를 북한 영해 쪽으로 돌리는 결과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북한 해군 함정들은 57mm 자동기관포 사격을 가해왔습니다.
푸에블로호 함에 북한 해군의 포 사격으로 손상된 선체부분
푸에블로호 선체 내부 총탄흔 (Source : Flickr)
북한 해군 함정들이 사격을 가해온 탄환들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레이다 전파탑에서 특이한 "탁! 탁!" 소리를 내며 터지었고, 파편 조각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무개 갑판의 루사이트 방풍 스크린을 뚫고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철판과 플라스틱 조각들을 피하려고 갑판에 바짝 엎드렸지만, 부처 함장은 그 중 몇 조각들이 다리와 엉덩이를 때렸으며 길쭉한 산탄 조각 하나가 정면으로 부처 함장의 직장(直腸)을 지지듯 뚫고 들어와 무척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SO-1 구잠정에서 쏘는 폭발식 기관포 사격은 한발씩 더디게 일련의 둔탁한 파열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기관총탄과 섞여서 푸에블로호 함정의 상부와 연통 등의 금속을 두들기는 바람에 P-4 북한 어뢰정도 사격을 개시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북한 해군 함정들의 일제사격은 5~6초 동안 계속된 듯 하였다고 했으며, 결과는 그 사격으로 인해 푸에블로호 함의 함교가 부서져 버렸으며, 이번 임무 수행을 위한 지침으로 부처 함장이 받았던 고위층의 브리핑 내용들까지 산산이 부숴버리고 말았습니다.
푸에블로호의 북한 해군 SO-1 구잠함과 P-4 어뢰정 4척들의 공격모습을 그린 그림.
북한 해군 소속 P-4 어뢰정들의 최초 공격들이 멈춘 뒤에, 체면을 구긴 상황이었지만 부처 함장은 성질을 참고 가급적 이성적으로 처신하려고 하였습니다.
"모든 비밀 문건과 장비에 대한 비상시 파괴를 실시하라!! 특수작전구역에 있는 해리스 대위에게도 이 말을 반드시 전하라!!"
"현재 다친 사람은 없나?"
북한 해군의 사격을 개시하기 조금 전에 진과 팀은 조타실을 떠났었고, 신호수인 리치와 전화기를 지키던 로빈만이 부처 함장과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부처 함장이 던진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저으며 응답했지만 부처 함장은 신호수인 리치와 전화기를 지키던 로빈 모두 파편에 맞은 것을 보았고, 로빈은 목 부위 상처에서 피가 흘렀고, 리치는 한쪽 다리에 파편을 맞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부처 함장은 대응 사격으로 북한 해군의 P-4 어뢰정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푸에블루호에 승원한 전원에게 전투배치 상황으로 몰고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고, 혀끝까지 나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고 합니다.
사실 푸에블로호에는 전투배치를 할 곳도 없었고, 전투준비에 돌입한다고 해도 피해 통제 정도밖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푸에블로호가 지닌 50 Calibar 기관총 2 정으로는 북한 해군의 50mm 자동기관포를 대적할 수가 없었으며 노출된 푸에블로호 갑판으로 북한 해군의 기관총 소사만 당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설혹 푸에블로호 사수들이 꽁꽁 언 타폴린 커버를 벗기고 탄약 상자를 열고 이미 노출되어 있는 기관총을 작동시키려고 하면 북한 해군은 우리 배의 양 측면 30야드 정도의 사거리에서 여러 대의 기관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다고 합니다.
부처 함장은 내부 음향관을 통해 아래층에 소리쳤습니다.
" 변형된 전투준비를 갖춰라!! 누구든지 상부갑판에 올라오지 말라!! 조타 지휘는 물론 갑판은 내가 책임진다!! 방향타는 완전 좌로, 전속력 전방으로 항진!!"
부처 함장은 신호수 리치에게 지시해 항의성 신호 깃발을 푸에블로호의 활대에 올리도록 했고, 더 넓은 바다로 속도를 올려 항진하였습니다.
머리 위헤서 MIG기가 굉음을 내며 또 한 번 위협 비행을 했는데, 쳐다보니 선두 항공기가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MIG 기 조종사가 경고 사격을 했는지, 아니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겼는지 알 수 없으나 미사일은 푸에블로호 보다 높이, 멀리 날아가 푸에블로호 앞 8마일 거리의 바다에서 폭발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 함정들에 애워싸여 공격 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푸에블로호 하늘 위에는 북한 공군 MIG-21 두 대가 위협 비행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함교는 그 좁은 장소에 엄청난 양의 물건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치우느라 모두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부산했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은 푸에블로호에 속도를 올려서 따라오라고 지시를 했었지만 북한 영해쪽으로 따라 가되 속도는 올리지 않고 최대한 느리게 운항하는 것으로 하였고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이에 푸에블로호를 지원하려는 다른 누군가가 온다면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배 안에 있던 기밀 사항 문건들을 다 소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문건들이 북한 해군에게 넘어가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푸에블로호 함내 기밀 문서들을 소각하는 모습을 회상하여 그린 모습 (drawing by Ron Samuelson)
부처 함장은 기밀로 분류 된 문서와 기록장치들의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신속하게 달성 할 수 있는 수단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수행되는 명령이었습니다. 기밀 자료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황급히 시행되었고 호지스 승무원(Hodges)과 두 명의 다른 사람들이 배를 타고 있었지만이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습니다. 심하게 다친 그는 병실 테이블로 옮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지스는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과 쇼크로 사망하였습니다. 푸에블로호 함내 승선한 사람들중에서 목숨을 잃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북한 해군의 공격을 당하는 동안 일본의 카미 세야에 있는 해군 보안 그룹과 무선으로 접촉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몇몇 새들이 당신의 길을 날고있다”는 무선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북한 공군의 MIG기들을 의미) 그러나 아군의 항공 지원이나 다른 해상 지원은 도움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북한 해군의 P-4 어뢰 보트들 중 한 척에서 올라온 북한군 병력이 탑승하여 푸에블로호를 장악하고 승무원의 눈을 가리고 갑판과 판 테일에 앉게 하였습니다. 북한 해군들은 총검으로 위협하고, 차고, 찔렀습니다. 영해에 들어가면서 더 많은 북한 해군들이 탑승했으며 북한 해군 조타수는 북한 원산항까지 최대 속도로 푸에블로호를 항해 하게 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원산항에 도착했을 때 모여든 북한 주민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USS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악몽같았던 11개월 간의 북한 포로 수용소에서의 감금, 구타, 심문
푸에블로호에서 북한 영토로 걸어가는 승무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drawing by Ron Samuelson)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그들의 손을 앞으로 묶여져 있게 하였고, 각 손목에 줄을 등으로 한바퀴 돌려 이어지게 묶어 꼼짝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푸에블로호 함선에서 떠나기 위해 널빤지로 걸어가서 차례로 인도 다른 북한 병사들에게 인계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창문이 덮혀있는 버스를 타고 기차로 데려갔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북한 내부의 목적지는 나중에 알게하려고 눈을 가린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버스에서 나와 눈을 가린 채 작은 오두막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버스 한 차량으로 옮겨져 타기 위해 북한 군인들 사이 사이에 앉혀졌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앉혀질 때 쫓겨 나듯이 밀쳐지면서 구타를 당했습니다. Jim Kell 원사(Master Chief Petty Officer)는 얼굴을 기둥에 부딪쳐 넘어져서 기절했습니다. 쓰러진 Jim Kell 원사는 강제로 붙잡혀 옮겨졌습니다.
착검한 총으로 북한군 병사들이 경계를 취하는 가운데 평양 인근 수용시설로 옮겨지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drawing by Ron Samuelson)
포로가 된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1968 년 1 월 24 일, 북한의 겨울 때 일출 전인 오전 6시에 한 시간 정도 거리인 평양 인근에 있는 복합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동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Jim Kell 원사는 미해병 상사인 치카( Chica, 필리핀인)가 자신의 등 뒤로 엎혔습니다. 북한 경비병들은 긴장했고 총검을 착검하였습니다. 대부분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북한 병사들의 손에 잡혀서 움직였고, 갔고 몇 명은 손으로 허우적되면서 걸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다음 목적지로 운송되기 전에 약 6 주 동안 외양간과 같았던 그곳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복도가 희미하고 거무스름한 벽돌과 목재 건물인 외양간같은 건물은 따뜻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추위 외에도 건물은 소변, 대변 및 건초 냄새가 났습니다. 승무원들은 방마다 4~5명씩 나뉘었 수용되었습니다. 각 객실의 천장 높이는 12 피트, 12 피트 였습니다. 침대는 쌀겨 베개와 매트리스가 깔린 땅에서 불과 2인치 떨어진 나무로 만든 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담요가 없었고 대부분의 침대는 승무원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포로 전체에 걸쳐 건물 내에서는 북한 군인들로 인한 구타로 인한 소리, 비명, 두드리고 쿵쾅 거리는 소리로 끊임없이 울렸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있었던 북한의 포로 수용소 방의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방의 천장 한복판에 밤낮으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 한개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4 개의 낮은 나무 침대, 테이블 및 4 개의 의자가 있었습니다. 벽은 총탄으로 구멍이 나서 이를 흙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푸에블로호의 많은 승무원들은 이전에 이곳을 거쳐간 포로들이 이곳에서 그들의 죽음을 만났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대로 건축되지 않은 외양간같은 건물에서 각 나무 바닥 보드 사이에는 약 0.5 인치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창문은 신문으로 접착되어 덮여있었습니다. 추위에 열을 거의 제공하지 않아 라디에이터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담요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외양간같은 포로수용 건물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 배가 북한 해군에게 총격을 받아 나포되어 압류된 상황 동안 입은 상처에 대해 지혈이나 기본적인 치료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승무원들은 일상적으로 심문 또는 고문으로 인해 부상을 당했습니다. 상처가 감염되어 마취제없이 수술이 시행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끔찍한 음식과 더러운 식수는 이질과 체중 감량을 유발하여 승무원 모두에게 건강상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승무원들이 "하수구 송어", 물기가 많은 돼지 고기 수프, 털이 뽑히지 않은 지방질 피부를 포함한 돼지의 일부, 때로는 도살당한 돼지의 안구 또는 치아, 쌀, 빵, 구더기, 죽은 파리 등이 썩은 고기를 포함되어 있었고 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나빴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화장실을 하루에 두 번만 사용할 수있었습니다. 그들이 입었던 옷은 그들이 포로로 잡혔을 때 입었던 옷과 같았습니다. 여전히 승무원 일부는 피와 파편 조각에서 생긴 구멍이 뚫린 부분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 포로들에게 주어진 사치품은 담배와 성냥이었습니다.
목욕도구를 가진 채 목욕탕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drawing by Ron Samuelson)
외양간 건물에 수용된 지 약 일주일 후, 푸에블로호 승무원은 처음으로 목욕을 할 수있었습니다. 한밤 중에 깨어 났을 때, 그들은 외양간 건물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목욕탕으로 향하는 지붕이 허술한 작은 버스로 승무원들을 태우고 갔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외양간 건물 뒷문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머리는 아래로 향하고 새로 지급된 세면 도구와 용품은 한 손에 들고, 작은 비누, 비누 접시, 수건을 들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는 도중에 경비병이 AK-47 돌격 소총의 조종간을 안전에서 사격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경비병은 안전으로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몰랐음을 깨달았습니다. 경비병은 방아쇠를 당겨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운 좋게도 버스의 지붕은 쓰러지지 않아 안전이 유지되었고 경비병은 안심 해 보였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고 있어야한다는 요구는 승무원들 모두에게 걸쳐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이 북한 민간인 이발사에게 면도를 하는 모습의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수용된지 12 일째 되는 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첫 면도를 받았습니다. 북한의 민간인 이발사는 얼굴이 칙칙하고 날이 예리하지 않은 면도칼로 며칠 동안 면도를 하면서 승무원들에게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상처를 냈습니다. 사세보를 떠난 후 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승무원은 긴 수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러한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외양간 수용소 건물에서 청소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외양간 건물 청소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청소 용품은 걸레, 차가운 물통, 쓸모없는 빗자루였습니다. 빗자루는 길이가 약 3 피트이며 얇은 정사각형 손잡이와 브러쉬용 빨대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흙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미는 정도로 청소를 하였습니다. 나무 바닥은 각 나무 사이에 0.5 인치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성냥을 사용하여 보드 사이의 흙을 파 내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빗자루는 역경 속에서 유머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오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외양간 수용소 건물에서 6주 후 옮겨진 일명 컨트리 클럽으로 푸에블루호 승무원들로부터 불려진 평양과 몇 마일 떨어진 수용소 시설 건물 (drawing by Ron Samuelson)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약 6 주 후에 외양간 수용소 건물에서 "Country Club” 이라고 하는 새 장소로 이사했습니다. 원래 북한군 건물이었던 2 개의 주요 건물은 푸에블로호 승무원을 수용하기 위해 3 층 구조와 승무원이 머무는 동안 2 개의 기자 회견이 개최 되었던 복층 구조였습니다.
또한 육상 트랙 옆에 창고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감시할 경비대 건물이 있었습니다. 선로에는 빗물을 모으는 데 사용 된 약 3 피트 깊이의 몇 개의 깃대와 2 개의 시멘트 구조의 사각형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저장고 뒤에는 들판 끝에있는 작은 과수원과 선전 광고판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구조물들에는 옆에 작은 연단이 있는 배구 및 농구 코트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8 피트 높이의 나무 벽과 짧은 터널이 장애물 코스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체 구조물들을 둘러싸는 것은 15 피트 높이의 흙 담벼락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을 때리는 북한군 경비원 "곰"의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예외적으로 가학적이고 강한 군인 중 한 명인 북한 경비원은 별명이 "곰"이었습니다. 그 곰이 방에 들어가서 시간을 재기 시작하고 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푸에블로호 승무원을 때렸습니다. 구타를 똑같이 나누서 맞기 위한 의리를 발휘하기 위해 승무원들은 “곰”이 근무했을 때 문 옆 의자에서 교대로 차례를 바꾸어 앉았습니다. “곰”은 약 5 피트 11인치(165cm) 이고 무게는 약 180파운드(81kg)였습니다.
북한군 경비원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 대한 분노가 발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경비대원 측에서 무시 무시한 행동에 대한 명백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양손으로 의자를 높이든 푸에블로호 승무원을 북한군 경비대원이 발로 차는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일주일 이상 지속 되어진 오해로 이루어 진 “지난 주” 동안 학대는 극심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오줌을 밤새 참아 방광이 터지기 직전의 고통을 겪었고 이를 해소하려면 맨 땅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변소 사용을 요구하고 협박하는 북한군 경비원을 지나 복도를 혼자 걸어 다녀야만 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에게 총알이 빈 탄창을 끼고 장전하여 총구를 들이대는 북한군 경비대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한 형태의 처벌은 경비원들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때리고 타박상을 입히게 하고 학대 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의자를 고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군 경비원의 또 다른 승무원들의 괴롭힘에 대한 즐거움은 AK-47 총구를 죄수의 얼굴에 올려 놓고 잠시 후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일종의 러시안룰렛같은 고문게임) 딸깍 하는 소리가 나면 총알도 없고, 북한군 경비원에게는 그 상황이 재미(스릴)있고, 고문을 당하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는 긴장이 최고조로 올라갔다가 풀리게 되는 정신적 괴롭힘이었습니다.
당시 '슈퍼 C'라는 별명의 수석 대좌은 키가 약 5 피트 9 인치(175cm) 였습니다. 그는 눈이 둥글고 정상적인 뺨부근에 뼈가 많이 보였으며 값 비싼 옥스포드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 색으로 칠해졌으며 아마도 구두약을 사용하여 중간 부분을 갈라 놓고 곧은 빗질을 하였던 같았고 이마의 양쪽에 약간의 주름이 졌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을 때 그의 약간 돌출 된 앞니가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바람직한 사람은 아니었고 북한군인들에게는 훌륭한 리더 인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몸무게가 약 175 파운드(79kg)였으며 허리가 잘록했습니다.
청소하는 북한 소녀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 북한산 담배를 나눠주는 모습을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푸에블로호 승무원이 수감된 방은 하루에 담배 한 갑으로 제한 되었지만 “청소”하는 소녀는 Jim Kell 원사가 구겨진 담배를 재떨이에 넣은 것에 반응하였습니다. 평범하지만 젊고 상당히 매력적인 소녀는 떠났고 이윽고 약 15 분 후에 그녀는 새로운 담배 패키지를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갈매기(Calmagi)”라고 불리는 북한 담배 브랜드는 무리에 있는 갈매기 그림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에게 일본 뇌염 백신 주사를 놓는 모습, 바늘을 교체하지 않고 소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사하였음.
(drawing by Ron Samuelson)
여름에는 “일본 뇌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실시했습니다. Jim Kell 원사등 8 명 모두가 일명"Flo"(Florence Nightingale, 간호사 별명)에게 주사를 맞기 위한 병실로 향했습니다. 주사하기 전에 의료 보조원은 보편적인 의료 표준법 책을 관찰하면서 주사 부위를 알코올로 정성스럽게 닦았습니다. 그러나 Flo는 8 명의 남성 모두에게 동일한 바늘을 사용했으며 주사 사이에 바늘을 닦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8번의 주사로 접종하는 사이에 리필(교환)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각 승무원들에게 주사기의 병의 일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2주 후 헤이즈는 병에 걸렸고 이후 황달 또는 간염으로 검사되었습니다. “동일한 바늘을 사용하면 ” 그 바늘을 사용하여 접종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그 방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제작한 선전 광고판을 보고 야유를 보내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drawing by Ron Samuelson)
어느 날 오후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잔디를 자르고 난 후,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달리기 트랙 끝에서 조잡한 승무원 엉클 샘(미국인들의 별명) 삼촌을 향한 총검을 가리키는 북한 군인을 묘사하는 조잡한 선전 광고판을 보았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박수치며 환호하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광고판의 조잡함은 스트레스 방출을 위한 역할을 했습니다. 선전 광고판은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기간 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연단 뒤에서 숨어서 이야기를 하는 북한군 장교 (drawing by Ron Samuelson)
당시 나이 27 세로 신임 중위로 보였던 북한군 장교 중 한 명이 때때로 한 푸에블로호 승무원에게 미국에 대해 질문했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운동이나 농구를 하던 중에 야외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다른 북한군인들에게 보여지기를 원하지 않는 그는 농구장 옆에 있는 작은 연단 뒤에 웅크리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중 한 명을 불렀습니다.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와이키키 해변의 슈퍼마켓과 비키니 입은 소녀였습니다. 그는 하와이의 한 젊은이가 직면한 유일한 문제는 유혹보다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듣고 즐거워했습니다.
부처 함장에 대한 수용소 내 북한군 감시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그의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조원 중에 한 두 명은 자신의 과오나 동료의 전우들의 잘못을 울면서 토로하거나 불어댔다. 나의 거짓 개구장애(lockjaw : 턱이 벌어지지 않는 증상) 증세나 내 자백서에 써 넣었던 만화같은 인물들, 불성실한 말장난 성향이라든지, 내가 퇴폐적인 하와이식 행운표시의 원흉이라는 등까지 발설했다. 그 당시에 나는 고문을 당해도 각자 자신에 관한 사항만을 말하고 타인에 관해서는 발설하거나 연루시키지 말도록 지시했던 사항을 누가 위반했는지 몰랐다. 앞으로도 나는 누가 위반을 했는지 알아내 그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부하들이 초인적으로 놈들의 압박을 이겨낸 데 동정심을 발휘해야 하며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승조원들의 노력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이 나에게 보여준 충성심이 대단히 컸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말해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공산당놈들을 깔보고 괴롭혔던 나의 리더십을 발설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는데 어쩔 것인가.
감옥에 감금되었던 최초 시기처럼 지금 나는 또다시 철저히 독방에 갇혀 있게 되었다. 식판에 담겨 온 식사는 덮개도 없이 문지방에 밀쳐진 채로 감시당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변소에 갈 때만 호위를 받으며 방을 나설 수 있었으며 하루 종일 테이블에 앉아 GG가 요구한 자백서를 작성해야 했다. 자백서를 써 내려가던 연필이 잠시 멈추거나 내 머리가 위, 아래로 끄덕여질 때에는 어김없이 감시병이 뛰어들어와 정강이를 세차게 걷어차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매를 피하려면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써 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을 구타하는 북한군 감시병들의 행위를 그린 그림. (drawing by Ron Samuelson)
예상했던대로 달변과 감시병이 두 명의 군관을 대동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놈이 늘 신던 슬리퍼 대신에 육중한 보병 군화를 신고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곧 닥칠 일을 대비해야 했다. 내가 '하와이식 행운 표시'를 부추겼다는 걸 놈에게 시인하고, 내 부하들은 함장인 나의 지시를 따른 죄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 다른 음모도 획책했다는 놈들의 말은 일절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감시병이 구둣발로 나를 차며, 혁대로 내 턱을 때리더니 드롭킥으로 나를 가격했고, 다른 두 명의 군관들도 합세하여 계속 매질을 했기 때문에 나는 반쯤 의식을 잃고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와같은 방문 매질을 낮에 두 번, 밤중에 한 번씩, 며칠을 두고 반복했기 때문에 나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도 파열된 느낌에 고환이 터질 지경에 이르고, 앞니가 흔들리며 얼굴이 퉁퉁 부었다. 놈들은 내 얼굴이 망가지고 몸이 불구가 되는 것도 더 이상은 개의치 않은 듯 끝없는 고통을 안겨 내가 무감각했다가 기절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같았다. 놈들이 나를 침대에 눕혀, 잠시 회복하도록 놓아둔 사이에 나는 다른 방에서도 나오는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 해 1월과 지금까지의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내가 당했던 그 무시무시한 악목 같은 공포심이 다시 찾아왔다. 그 당시처럼 나는 고통을 당하느니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으며, 나의 극적인 죽음으로 공산당놈들을 만족시킴으로써 내 부하들에 대한 놈들의 폭력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감각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다가도 다시 일어나 매를 맞을 때에는 간절한 기도와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의지로 이 야수놈들을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용케 견뎌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골치거리가 생겼으니, 내가 매질을 당할 때 놈들은 내 부하 중의 한명을 데려와 내가 매 맞는 꼴을 지켜보도록 한 것이었다. 한 번은 로우를 데려왔는데, 그도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시퍼렇게 멍이 든 상태였으며, 그런 그를 내 방 문간에 세워놓고 달변과 감시병 두 놈이 나를 매질했다. 또 진 레이시를 데려왔을 때는 통역관이라는 놈이 내가 북한 공산당에게 해악을 끼치는 간악한 CIA 요원인데 어째서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았냐고 레이시에게 물었던 게 기억나는데, 그 때 레이시는 무뚝뚝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함장인 그는 몇 가지 실수는 했지만 그게 다요."
이 말 때문에 그의 얼굴에 야비한 펀치 세례를 받았으나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 장면에서 내 부하들이 대담하고, 충성스럽게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을 보고 나도 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부하들에게 희망도 못 주고, 도와줄수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찢어졌다.
12월 7일, 나는 GG가 관용차를 타고 수용소 마등에 도착해 우리 건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몇 분 지나서 달변과 코흘리개가 공산당놈들이 작성한 새로운 자백서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이번 도발으치 원흉인 내가 CIA 요원이었음을 자백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 자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놈들은 늘 해오던 대로 나를 발로 차고 난폭하게 내동댕이를 치더니 곧 재판을 받고 처형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떠났다. 나는 다시 자결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내 삶에 자부심을 느껴오던 나는 스스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스스로 죽어서 하늘나라로 간대도 놈들은 나를 용서치 않고 때려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살 충동이 계속될 만큼 심했던 그들의 구타가 마치 물흐르던 수도꼭지가 잠긴 것처럼 갑자기 멈췄다. 열흘 동안 매질하는 소리, 신음들로 꽉 찾던 감옥이 갑자기 조용해진까 바람 소리만 슬프레 윙윙거렸다.
12월 19일 아침, GG가 총원 소집을 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중범죄자들을 재판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GG가 다시 한 번 악마의 탈을 벗고 아주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통역관인 달변을 통해 놈이 우리가 겪어온 고통에 관해 사과성 발언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을 미국으로 되돌아 오게 하기 위한 미북 판문점 회담 모습, 미국측 대표는 Major General Gilbert H. Woodward
(source : Sarasota Herald Tribune)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을 미국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협의를 하고자 판문점에서 협상장 테이블에 앉은 북한측 박청국 대표
"여러분들이 잘못을 후회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고치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니 지난일은 모두 잊고, 우리가 서로 인간적인 관계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식사와 운동, 여가 활동 등을 이전 상태로 되돌려주기로 했다. 성탄절에는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가족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제국주의 호전광인 상관들과의 협상을 계속하고 있음을 통보한다."
놈은 그 말을 끝으로 박수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리둥절 하며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슈마허의 왼쪽 귀 밑이 밤송이만큼 부어오른 모습을 의심쩍게 쳐다보면서, 다른 승조원들도 놈들에게 당한 상처 부윌르 조금이라도 안 아프게 해보려고 앉은 의자에 몸을 비툴어대는 모습과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 안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부어오른 턱을 들고 놀란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바로 하루 전만 해도 우리를 야만적으로 두둘겨 패며 욕설을 퍼부었던 그 놈들이 지금은 우리더러 그것을 다 잊으라며 아양을 떤다. 나는 아니꼽게 웃음을 던지는 GG에게 한 방 날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놈들이 부드럽게 나오니, 우리도 이 기회를 최대로 이용하면서 또 다가올 지도 모를 '최악의 숙청기'를 대비해 힘을 길러 둘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유엔 측을 향한 “자유 다리” 를 가로 질러 몇 야드 떨어진 단일다리로 걸을 때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6.25때 폭격을 당한 북한군 장교는 승무원 각자가 버스에서 내릴 때 다리의 북쪽으로 내릴 때마다 성명을 외치면서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눈을 똑바로 바라 보면서 걸었고,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총에 맞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미국 측에서는 미국 장교들이 마중 나왔습니다. 미국 해군이 해군 장교 유니폼의 파란색과 금색으로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보이게 현수막을 걸고 LCDR(Lieutenant commander) Paul Brooks는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외투를 입지 않았습니다. LCDR Paul Brooks는 UN 협상 팀에서 최고 순위의 해군 장교였습니다. 고위급 장교들도 참석했지만 다리에 마중나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부처 함장의 북한쪽에서 판문점 다리를 건너오는 모습.
CDR(Commander) 로이드 부처는 다리를 먼저 건넜습니다. 다리를 넘어온 후 그에게 권유한 담배를 거절 한 후, 그는 발이 차가워진 상태에서 서서 담요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모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북한 운동화를 신으면 발이 금새 차가워졌습니다. 82 쌍 모두가 같은 크기이므로 제대로 맞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미국 협상가 중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널 때의 모습을 상정하여 아티스트가 그린 것입니다. (drawing by Ron Samuelson)
모든 사진이 금지되고 취재 언론이 다리 위의 높이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일한 취재진이었습니다.짐 켈 (Kim Kell) 원사는 작가의 그림을 보고 체크리스트가있는 북한 장교가 그림과 같이 오른쪽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더 뚱뚱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중 유일한 사망자 Duane D. Hodges
Fireman(Fireman (Engine/Mechanical Apprentice) (FN)) Duane Hodges의 유골이 들어있는 표면이 거친 시신함은 다리에 도착하자마자 북한군이 무의식적으로 던져졌습니다. 환영나온 미국 군인들은 사망한 호지스의 시신을 꺼내서 다른 관으로 옮긴 후 성조기로 덮고 북한에서 가지고 온 시신함은 파기시켰습니다.
1968. 12. 23.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판문점 다리에서 UN측에 인계 중인 모습( 한 명씩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source : getty images
미 육군 판문점 운행 버스를 타고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얼굴에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주한미군 헬리콥터에 옮겨타는 모습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북한에서 판문점으로 돌아와 준비된 주한미군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모습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판문점에서 타고온 헬기에서 내려 주한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모습
푸에블로호 부처 함장이 헬기에서 내려 주한미군 기지내로 안내되는 모습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주한미군 기지에 도착해 임시 숙소로 옮겨지는 모습(아직까지 북한측에서 넘어올 때 제공받은 수감복과 운동화를 벗지 않은 상태)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주한미군 기지 내 Barrack(병영) 숙소 안에 들어선 모습
푸에블로호 부처 함장과 승조원들이 수송기를 타고 미 본토에 내린 모습. (부처 함장과 숭조원들이 입고 있는 옷은 Polaris 잠수함 승조원 복)
본국 기지에 도착한 푸에블로호 사망 승조원 Duane D. Hodges에 대한 묵념 모습
푸에블로호 사망자 Fire man, Duane D. Hodges 관을 운구차에 넣는 모습
국립묘지 내 안장된 Duane Daniel Hodges 비석
Duane Daniel Hodges에게 사후 수여된 은성훈장(Silver Star)을 Duane D. Hodges 부모에게 전하는 신문기사
USS Pueblo 의 Operation Click-beetle(방아깨비 작전) 에 대한 National Security Agency 의 일부 해제된 극비작전문서(여전히 중요한 부분은 비어 있음.)
* USS Pueblo Operation Click-beetle(방아깨비 작전)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평가
Lloyd M. Bucher 중령은 푸에블로호 함선의 운영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푸에브로호 함선의 운영을 NSA 및 해군보안국의 신호정보 부서와 지휘권을 공유해야 했었습니다.
게다가 부함장 격인 Edward R. Murphy Jr. 대위는 첩보내용을 브리핑 받을 만한 비밀취급인가가 없이 이 배에 배속되었다는 것이 부처 함장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배의 신호정보실에서 부처 함장보다 계급이 낮은 해리스 대위에게 자신의 배가 보유한 비밀을 일부 알게 되기 전에 부처 함장 자신이 이를 알아햐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만 했습니다.
1967년 10월, 해리스 대위는 워싱턴에 날아가 NSA와 해군보안국 소속 함선인 푸에블로호에 대해 보고를 하였습니다.
"첫 임무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첩보 대상국들의 목록을 작성해 NSA 소속의 여러 부서를 다니며 논의했다. 내가 작성한 목록에는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때 '그래, 거기에 가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Gene Sheck
해군과 NSA의 협약을 통해 배너(Banner, GER-1)와 푸에블로(Pueblo, GER-2)는 '해군의 활동에 부응하는 정찰 임무를 수행한 후 NSA의 목적에 따라 정찰을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K그룹의 진 세크(Gene Sheck)는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 결정은 배너가 소련의 근해 정찰을 완수했으니, 미 해군이 푸에블로호로 첫 정찰 활동을 수행하고 원하는 대상국을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967년 해군은 푸에블로호의 작전지역으로 북한을 택했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 NSA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없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맡은 임무의 암호명은 어류라는 뜻의 '이크시크(Ichthyic)' 였습니다.
USS Banner (AGER-1) 항해 모습, 배너호는 푸에블로호 보다 먼저 북한 해역에 들어가서 작전을 한 전적이 있는 함이었습니다.
몇 주 후, 푸에블로호는 West Coast를 출발해 일본으로의 첫 항해에 나섰습니다. 이 배는 극동 지역에서의 신호정보 정찰을 위해 일본에서 Banner 신호정보수집함과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요코스카 해협으로 서서히 들어가던 날 오후에는 이 함선의 축축한 이물만큼이나 회색빛으로 가득 찬 흐린 날씨였다고 합니다.
군청색 코트를 입고 흰색 종이컵 같은 수병 모자를 쓴 푸에블로호 수병들은 얼어붙는 듯한 12월의 바람 속의 굵은 갈색 밧줄을 풀어 푸에블로호를 도쿄 남쪽, 요코스카 해군기지의 8번 선창으로 밀어넣으면서 지시 사항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거의 1년간의 준비 끝에 푸에블로호는 첫 임무를 위해 이곳에 정박한 것입니다.
동해 건너에는 작전 대상국인 북한이 있었고 그해 5월 부터 중무장한 간첩단이 게릴라전을 목적으로 한국의 후방에 침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9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기차가 파괴되었으며 10월과 11월에는 비무장지대 주변과 안에서 미군과 한국군 장교를 사로잡거나 살해하려는 시도가 일곱 차례나 발생하였습니다.
북한의 몇 차례에 걸친 매복공격의 결과로 미군 6명과 한국군 7명이 사망하였습니다. 1967년도에는 총 42건의 북한에 의한 군사적 도발이 발생한 데 비해, 1967년 1월 1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발생한 총 사건의 수만도 360건에 달했으며, 그 형태도 다양했습니다.
푸에블로호의 첫 임무에 대한 승인 과정은 마치 행운의 편지처럼 계속 진행중이었는데 작전의 전체적 윤곽은 1968년 월별 정찰일정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서류철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분류 표시와 암호들이 빽빽하게 적힌 이 서류철은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정찰본부에서 작성된 문건들이었습니다.
Black Note 속에는 중국에 대한 U-2기 정찰 부터 USNS 멀러호의 쿠바 근해 정찰활동, 공격용 잠수함인 USS 스콜피언의 러시아 백해 침투 작전까지, 다음 달의 기술적 첩보작전에 관한 모든 사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해군은 푸에블로호가 북한으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을 정찰 하는 것을 가장 위험성이 적은 일로 보았습니다.
12월 27일 오전 11시, 각 첩보 기관들의 중간급 장교들이 펜타곤 'TANK'의 2E924 호실(여기서 'E'는 펜타곤의 여러겹으로 둘러쌓인 건물의 바깥 부분을 의미, E링의 2층을 의미)에 모여 다양한 첩보 수단과 이들의 표적에 관한 이견을 조율하였습니다.
왼쪽부터 린든 존슨 대통령,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장관, 폴 H. 니체(Paul H. Nitze) 국방부 부장관
Sears, Roebuck and Co. catalog 1960 (시어스 로벅 백화점 카달로그)
CIA, NSA, DIA(국방 정보국), JCS(합동참모본부) 및 기타 기관들 소속의 작전 간부들은 의례적으로 동의를 표했으며, 한 전직 관리가 언급했듯이 '시어스 로벅 백화점 카탈로그(Sears, Roebuck catalog and Co.) 크기의' 서류철을 담당 기관에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이 서류철들은 최종 승인을 위해 여러 기관들에 일일이 전단되었습니다. 한편 펜타곤에서는 국방부 부장관인 폴 H.니체가 여기에 서명을 했습니다. 또한 비밀 작전을 담당하는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소속의 극비 303 위원회(The 303 Committee oversaw highly sensitive intelligence collection worldwide)도 푸에블로호의 임무를 승인했습니다. 당시 이러한 작전 승인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반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NSA 소속의 분석가 한 명이 푸에블로호의 임무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아시아 공산권의 신호정보 분석을 담당하는 B 그룹 소속의 퇴역 해군하사관은 북한이 전자도청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RB-47 정찰기가 북한 MIG-17s, 2대에 의해 위협받았던 사실을 기사화한 신문, 1965년 4월 28일
3년 전 북한은 원산항에서 동쪽으로 약 128 Km 떨어진 공해 상공을 비행하는 RB-47 Stratojet 정찰기를 격추시키려 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푸에블로호 함선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로 해안에서 불과 20 Km 떨어졌으므로 사건 발생 지역보다도 북한에 훨씬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당시 RB-47의 레이븐(Raven, 전자정찰 첩보를 담당하는 공군장교) 중 한 명이었던 조지 V. 백 중위는 " 원산항을 향해 약 6시간의 따분한 임무를 수행중이었으며, 해안으로부터 대략 128km 밖에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조종사나 부조종사도 비행기를 전혀 보지 못했으므로 계속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갑자기 비행기가 아래쪽으로 급강하하더니 고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도계는 약 2만7천 피트 상공에서 점점 떨어졌습니다. 북한 공군 미그기가 RB-47을 향해 발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종사는 급추락하는 RB-47기를 조종하느라 안간힘을 썼고, 부조종사는 육안으로 보이는 북한 공군 MIG기들을 쏘아 격추시키려 했습니다. 항법사는 조종사에게 방향을 지시했습니다. 레이븐역활의 공군장교가 교란용 금속조각을 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경고도, 신원확인도, 위협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기관포를 발사했다"고 하였으며 북한 공군기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RB-47이 발포 통제 레이더를 조준할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RB-47은 심각한 기체 손상을 입었습니다. 유압 시스템이 망가졌고 선미의 주연료 탱크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엔진 2대가 북한 MIG기의 기관포에 맞아 3번 엔진에 박혔던 유산탄이 폭발해 동체까지 부서졌습니다.
당시 RB-47 정찰기에 탑승하여 북한 MIG-17s 2기와 접촉했었던 승무원들
나머지 엔진 2대가 여전히 작동했지만 3번 엔진은 자재 연결기가 부서진 낡은 차처럼 덜덜거렸습니다. 북한 MIG 공군기들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갑자기 급상승해 RB-47 의 밑바닥을 기관포로 공격했습니다. 미그기 한 대가 갑자기 수직 자세를 취하더니 바다를 향해 급추락하였고 다른 미그기는 원산을 향해 기수를 돌렸습니다.
조종사는 비행기 상태를 완전히 파악하였고 다른 승무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RB-47 정찰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요코타 기지까지 돌아와 활주로에 힘겹게 착륙하였습니다.
당시 이 사건과 기타 다른 사건들을 염두에 둔 B 그룹의 해군 담당자는 K 그룹의 작전 담당자들에게 갔습니다. K-12, Gene Sheck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작성했다. '이런 귀관들은 그 배를 북한 근해에 배치한 형편 없는 바보들이 분명하군. 그 곳에는 온갖 종류의 불상사가 일어난다네. 그러니 작전을 취소하게.' 이는 매우 거친 표현으로 공문서에 쓰는 정치적 어조의 메시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K 그룹 소속의 관리 한명은 이를 다시 고쳐 써야 했다고 합니다. Gene Sheck가 보낸 첫 번째 경고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정보는 CINCPAC(Commander-in-chief, Pacific Fleet : 태평양 총사령관)의 위험 평가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제공한다.
1. 북한 공군은 1965년 초부터 자국 영공에 대한 정찰 비행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이 같은 민감한 태도는 1965년 4월 28일 재확인되었으며, 당시 미 공군 RB-47기가 해안으로부터 55~65km 지점에서 북한 전투기의 발포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2. 북한 공군은 1966년 말부터 해군을 지원하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북한의 해군은 북한 해안에 접근하는 한국 해군선박 및 어선을 포함하여 모든 선박에 대해 반격을 하고 있다.
4. 북한은 동해안에서의 항공 활동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경계선을 대체로 준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안으로부터 12해리 밖의 지역에서 북한 군함들이 도발적 공격 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위의 내용은 선박 보호조치를 위한 필수요건의 평가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며, CINCPAC(Commander-in-chief, Pacific Fleet: 태평양 총사령관)의 배치 목적에 반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
Marshall S. Carter Ralph Stickley
마셜 S. 카터(Marshall S. Carter)는 이 메시지의 송신을 승인했고, 같은 날인 금요일 밤 10시 28분, 이 메시지는 펜타곤의 국방정보국 소속 암호 부서의 암호 기계로 전송되었습니다.
그 곳의 담당 직원은 이 메시지를 전쟁상황실로 보냈고, 전쟁상황실에서 당직 장교가 사본을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정찰본부 대장이었던
랠프 스티클리(Ralph Stickley) 준장에게 보냈습니다.
1968년 1월 2일, 신년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스티클리 준장은 책상 위에 놓인 NSA의 경고 메시지 사본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스티클리 준장은 이 보고서를 며칠 전 푸에블로의 임모를 승인했던 합동참모본부, 국방정보국 및 303 위원회에 즉시 알라지 않고 묻어두었습니다. 우선 그는 NSA가 이 보고서에 붙인 분류표를, 실질적 조치를 요구하는 「실행」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의미하는 「정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작전을 승인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신 하와이에 위치한 태평양 총사령관 사무실로 가는 일상 서류에 포함시켰습니다.
태평양 총사령관에게 도착한 메시지는 처음에는 푸에블로의 작전 승인 메시지와 혼동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메시지들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정보」라는 분류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무시되었습니다.
Thomas H. Moorer (1967 년부터 1970 년까지 해군 작전 참모와 1970 년부터 1974 년까지 합동 참모장을 역임 하였던 미 해군의 제독)
처음 제출되었던 「실행」 사본은 해군작전본부의 토머스 H. 무어러 장군에게도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국방정보국 암호국이 실수로 잘못된 분류표를 붙이는 바람에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다음 한 달 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NSA의 경고 메시지가 작전 취소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아직 한 번 더 남아 있었습니다.
Ralph E. Cook
한 부는 비공식 경로를 통해 워싱턴의 해군보안국 국장에게 전해졌습니다. 랠프 E. 쿡 대령은 「실행」 분류표를 보고, 이 문제를 하와이의 고위 간부들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파견한 에버렛 B. 피트 글래딩(Everett B. (Pete) Gladding )해군대령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쿡 대령은 이 메시지를 글래딩에게 넘겨 민첩하게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글래딩은 전자정보 요원으로 해군 보안국의 태평양 지부장으로서 Banner와 Pueblo를 포함해 광범위한 암호첩보임무를 담당했습니다.
U.S. Pacific Fleet Headquaters at Pearl Harbor (미국 태평양 함대 본부)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 태평양 함대의 낡은 본부 건물 꼭대기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암호해독 센터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진주만 폭격을 불러왔던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을 통해서도 보았듯이, 또다시 경고 메시지가 분실되거나 무시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으려던 상황이었습니다.
글래딩은 훗날 이 메시지를 받았음을 부인했으나 다른 장교들은 그가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NSA의 경고 대신 「최소한의 위험」이라는 경고문을 단 승인서는 하와이에서 일본으로 전해졌고, 푸에블로호 함의 임무 착수 준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푸에블로에 내려진 극비 작전 명령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북한의 청진항, 성진항, 마양도항 및 원산항 근방에서의 해군 활동범위 및 특징을 규정한다.
●. 해안에 설치된 레이더의 도청 및 설치에 중점을 두어 북한 동해안 지역의 전자 환경을 시험한다.
●. 소련 해군부대에 대한 정찰과 도청을 수행한다.
●. 북한 근방에서 공공연한 첩보 수집활동을 함으르써 소련 해군기지를 대상으로 하는 정찰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반응을 각각 파악한다.
●. 미군에 대항한 공격적 행위나 적대적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 북한 및 소련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보고한다.
마지막으로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부되었습니다. "위험 추정 : 최소"
푸에블로호의 신호정보 작전을 담당했던 스티븐 해리스 대위( LCDR Stephen R. Harris)는 출발 몇 주 전에 푸에블로호의 작전 명령서를 받고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가야 한다는 명령서를 받은 나는 매우 화가 났다. 우리는 (소련의) 캄차카 반도로 향하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작전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고, 그 다음이 페트로파블로프스크였다. 우리 요원들은 그 곳으로 갈 것으로 믿었으므로 이에 대비한 훈련을 해왔다. 그러므로 북한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첩보 자료는 최근 정보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이번이 정보를 갱신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문젯거리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배에는 러시아 어 요원들이 잔뜩 승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미세야(上世屋) 해군 도청기지(FAC 3096)에서 해병을 2명 더 데려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어를 열 단어 남짓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국어나 이런 종류의 정보 수집에 대해서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1968년 1월 5일 푸에블로호 조타실의 2등 갑판장 로널드 L. 베런스가 배의 타륜을 움켜쥐고 항만을 부드럽게 빠져나가고 있을 때
배의 내부 스피커에서는 부처 함장이 푸에블로호 함선의 지정곡인 「Herb Alpert and The Tijuana Brass - Lonely Bull」을 틀어서 나오게 하였습니다.
당시 수 개월 간 평양의 국제 조선중앙통신(KCNA ; Korean Central News Agency)은 북한 영해로 침투하는 미국의 '간첩선'에 대해 종종 영어로 경고 방송을 해왔다고 합니다. 이 방송은 CIA 소속의 해외 방송정보 서비스(FBIS)에서 입수했고, 11월 27일 북한의 방송은 "미국의 수십 대의 무장 선박을 청진항 동쪽의 우리 영해에 침투시켜 사악한 정찰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청진항은 푸에블로호의 주요 정찰 표적중 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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