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부에 꽃으로 뒤덮인 섬이 있다. 이 섬은 ‘꽃의 섬’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마이나우 섬(Insel Mainau)이다. 4월이면 이곳은 튤립이 한창이다. 섬에는 전시 정원이 있고 식물원이 있다. 그리고 빅토리아풍의 오래된 성과 그 세월만큼 자란 나무들이 섬 가운데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마이나우 섬은 길이 1.1 킬로미터에 폭이 610 미터이며 면적은 대략 45만 제곱미터이니 거의 남이섬 정도의 크기이다. 섬은 수평선이 보일 정도의 아주 큰 보덴 호수(Boden See) 위에 떠있다. 이 호수에서 독일, 스위스 및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이 만나고 있으며 유럽에서 3번째로 큰 호수이다. 그리고 호수의 서쪽 부분에 호반 도시 콘스탄츠가 있다. 이곳에서 9Km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이나우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다.
콘스탄츠는 독일 도시이지만 스위스 쮜리히에서 북쪽으로 85Km 정도 떨어져 있어 스위스에서 접근하는 것이 수월하다. 마이나우 섬으로 가는 길은 콘스탄츠 역에서 4/13번 버스를 타거나 선착장에서 배를 탈 수 있다. 또한 보덴 호수 주변에 있는 살렘(Salem)이나 울딩(Uhlding)에서 페리나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콘스탄츠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마이나우 섬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 배를 타면 15분 정도 걸려서 다시 콘스탄츠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섬의 역사는 튜턴족의 기사가 소유하다가 1732년 성을 축조하였고 1853년 보덴의 프레드릭 1세(Frederick I)가 여름 별장으로 궁전을 지었다. 그는 식물에 관심이 많아 외국여행을 할 때마다 희귀식물들을 수집하여 이 섬으로 가져왔다. 후에 이 섬은 스웨덴 왕족의 소유가 되었고 1932년 윌리암 왕자는 그의 아들 레나르트(Lennart Bernadotte) 백작에게 이 섬을 물려준다. 레나르트는 왕위 계승권이 있었으나 평민인 아내를 맞아 이를 포기하고 이곳 마이나우 섬에서 평생을 보낸다. 그는 정원사이자 원예가로 이 섬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게 된다. 그는 2004년 95세의 나이로 이 섬에서 돌아 가셨으며 이곳에 묻혀있다. 지금은 그의 딸 베티나 베르나도테(Bettina Bernadotte)가 주식회사(the Mainau GmbH)를 만들어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그의 가족들이 이 섬에 살고 있으며 2011년부터 남동생 비욘 베르나도테( Björn Bernadotte)도 함께 섬을 가꾸고 있다.
한 건축가는 마추픽추를 이렇게 노래했다. “깊고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자연의 우주적 광경이다. 의례 같은 우아함, 그 돌들이 토해내는 영원의 표현 속에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중요한 역할이 반영되어 있다. 안데스의 고봉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세계에 보석처럼 꼭 끼워진 잉카인들의 가장 위대한 유물이다.”
12세기 초 만코 카팍(Manco Capac)의 아들 신치 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 쿠라(Mama Cura)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시대로 들어선다. 잉카는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쿠티 유판키(Pachacuti Yupanqui, 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100만 명이나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 해안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제국이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정치와 사회제도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읽고 쓰지를 못했다. 그들은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했는데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으로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다. 그들은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 ·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 농업용수로 ·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했다.
와이나픽추는 ‘젊은 봉우리’라는 뜻과 잘 어울리게 해발 2,700m의 높이로 기세 좋게 솟아 있다. 마추픽추의 북쪽에서 마주하고 있는 와이나픽추에 올라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면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2시간 이상의 트레킹과 아슬아슬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좁은 등산로를 따라 때로는 양옆이 절벽에 가까운 구간도 통과할 수 있는 담력이 필요하다. 와이나픽추는 하루 입산 가능한 인원이 4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오전부터 인원이 차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와이나픽추를 오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한다. 와이나픽추 입구에서 신상 정보를 적은 후 등반을 시작하며 13시를 전후해 입산을 마감하고 16시 전에는 하산을 완료해야 한다.
높이솟은 봉우리는 골짝을건너 있는 페루인들의 자존심이라는 와이나픽추이다.
페루의 쿠스코(Cusco) 전경
쿠스코는 13세기 초에 건설되어 16세기 중반까지 중앙 안데스 일대를 지배했던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해발고도 3400미터로 안데스산맥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피사로와 에스파냐 군대에 의해 16세기에 정복되지만 반듯한 시가지, 아름다운 건물, 거대한 신전으로 정복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쿠스코는 에스파냐풍의 도시로 변모해갔다.
남아메리카 중앙에 위치한 마추픽추
페루,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적지인 마추픽추는 하이램 빙엄(Hiram Bingham)이 1911년에 발견하기 전까지 산세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후 대부분 파괴된 잉카 제국의 유적들과 다르게 원형 가까이 보존된 채로 발견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마추픽추는 ‘잃어 버린 공중 도시’로 불리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왜 먼 옛날 잉카인들은 건축 자재조차 나르기 힘든 첩첩산중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하나의 완벽한 도시를 건설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침략 이후 스페인을 피해 황금을 가지고 건설한 최후의 도시였다는 주장이나 종교적인 목적의 도시였다는 주장 혹은 단순히 잉카 왕족의 여름 피서를 위한 별장이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하나의 건축물 혹은 문화유산이라는 의미를 넘어 스페인 정복 이전의 남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상징인 마추픽추에서 번성했던 잉카 문명을 다시금 되돌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