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이미 예견되었던 물음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부처’님이나 ‘보살’들에게 절을 하지 말라 하십니까?』
이에 ‘달마’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천마(天魔)나 파순(波旬), 아수라(阿修羅) 등이 신통을 나투어서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짓고, 갖가지로 변화했기 때문이니,
이는 외도(外道)인지라, 모두가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란 ‘자기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밖에 있는) ‘부처’에게 잘못 절을 하지 말라.
‘부처’란 ‘신령한 깨달음’(靈覺)이니, 근기 따라 중생을 제접(提接)하고,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박이고, 손발을 움직이고 하는 것 등이 모두가 자기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之性)이니라.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道)요,
‘도’가 곧 ‘부처’이니, 이 ‘부처’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또한 말하되, 「‘본래 성품’(本性)을 보는 것이 이 ‘부처’라」고 하시니,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면 ‘부처’가 아니니라.
설사 천경만론(千經萬論)을 설할 수 있어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일 뿐이요, ‘불법’은 아니니라.
‘지극한 도’(至道)는 깊고도 그윽하여 말로는 이해할 수 없나니,
경전으로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되느니라.
‘성품’을 보면 곧 ‘부처’이니, 이 ‘성스러운 본체’(聖體)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느니라. 모든 말씀이 다 ‘성인의 마음’으로 좇아 일어난 작용인지라,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空)하여서, ‘이름’이나 ‘말’로는 미칠 수 없거늘,
십이부경(十二部經)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고 증득하고’(修證) 할 필요가 없고,
‘도’는 빛깔이나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미묘하여 보기 어렵느니라.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물의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나니,
따라서 남을 향해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라.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으며, 그 밖의 ‘사람과 하늘’(人天) 등의 무리는
도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므로 ‘겉모양’에만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일이나 형상이나 모든 법에 집착하여
외도에 떨어지느니라. 만약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줄 알면 마땅히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근본 성품’을 보면 십이부경이 모두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이 오직 이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契合)하여 알면
교법(敎法)이 무슨 소용이리요?
‘지극한 이치’(至理)는 말을 떠났는데, 교법은 다만 이 말일 뿐이니,
실로 ‘도’가 아니니라. ‘도’는 본래 말이 없나니, ‘말’은 이 허망일 뿐이니라.
만약 꿈속에 누각이나 궁전, 상마(象馬)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깐이라도 즐겨 집착할 생각을 내지 말지니,
― 이 모두가 다 <‘삶’이 의탁하는 곳>(托生之處)인지라, 부디 뜻에 두지 말지어다. ―
임종할 때, 전혀 ‘모습’을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곧 의혹을 제할 수 있겠거니와,
털끝만한 망념이라도 일으키면 곧 마(魔)에 끄달리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느낌’(受)이 없건만, 다만 인연에 미혹하여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이에 망령되이 업보를 받아서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느니라.
지금에라도 만약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으리라.
만약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경지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로 잡된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니, 성인은 역순(逆順)에 자재하여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성인의 지위’를 이룬 지 오래 되면 큰 위덕(威德)이 있나니, 온갖 품류(品類)의
업습(業習)이 다 성인의 운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거늘, 천당과 지옥인들 그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범부는 어두워서 성인의 안팎이 명철(明徹)함과는 같지 못하나니,
― 만약 의심이 있더라도 ‘짓지를 말라’(不作). 지으면 곧 생사에 유전(流轉)하나니,
후회해도 구처(救處)가 없느니라. 빈궁함과 고통이 모두 망상에서 생겼나니,
만약 ‘마음’을 알아서 서로 경책하되, 다만 <지음이 없이 지으면>(無作而作) 곧
‘부처 지견’에 들리라.
초발심의 사람은 신식(神識)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니, 만약 ‘꿈’(여기서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님) 속에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선뜻 의심을 내지 말지니,
이 모두가 다 ‘자기 마음’이 일으킨 것이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니라. 만약 꿈에
광명이 나타나기를 햇빛보다 더한 것을 보면, 곧 ‘남은 습기’(餘習)가 몰록 다하고
‘법계의 성품’(法界性)이 나타나리라.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 ‘성불의 요인’(成佛之因)이 되리니, 이것은
자기만이 알 뿐이요, 남에게 말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하다가 크고 작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결코 남에게 말하지 말며, 집착하지도 말지니, 이것 역시
‘자기 성품의 광명’(自性光明)이니라.
혹시 어두운 밤에 행주좌와하다가 대낮 같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지니, 이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아지려는 징조니라.
혹 꿈에 별과 달이 분명히 보이면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의 모든 반연(攀緣)이
쉬려는 조짐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만약 꿈에 혼혼(昏昏)하여 어둠 속을 다니는 것 같으면 이 역시 자기 마음의
번뇌장(煩惱障)이 무거운 탓이니, 또한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리라.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았거든 독경(讀經),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나니,
많이 배우고 널리 아는 것이 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정신이 어두워지느니라.
교법(敎法)을 시설해 놓은 뜻은 오직 ‘마음’을 표방(標榜)하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알면 ‘교법’을 볼 필요가 없느니라.
만약 범부가 성인의 경지에 들려고 하거든 마땅히 그 업(業)을 쉬고 정신을
기르면서 분수 따라 세월을 보낼지어다. 만약 성내거나 기뻐하는 일이 많으면
도(道)와 더불어 어긋나나니, 스스로를 속일 뿐, 조금도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가운데 자재하게 드나들며, ‘숨고 드러남’(隱顯)이 일정치 않나니,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며, 능히 ‘삿된 마군이’(邪魔)를 무찌르느니라.
중생이 ‘근본 성품’을 보기만 하면 곧 여습(餘習)이 몽땅 다하고, 정신이 어둡지
않느니라. 참으로 ‘도’를 알고자 원한다면 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어서 정신을 기를지니, 여습이 다하면 스스로 밝아져서 공력(功力)을
빌릴 필요가 없느니라.
외도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력은 가장 많이 들이나,
‘거룩한 뜻’(聖旨)을 거슬리므로, 종일토록 서둘러 염불하고, 경을 읽어도 정신이
어두워서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지라, 어찌 분주히 뛰어다닐 필요가 있겠으며, 명리(名利)를
널리 구한들 후일 무엇에 쓰리요? 그런데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을 읽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정진하고, 하루에 여섯 차례 예불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널리 배워서 많이 아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으려 하니, 이와 같은 중생은 모두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니라.
앞의 부처, 뒤의 부처가 오직 「‘성품’을 보라」는 말씀만 하셨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되, 「내가 ‘위없는 도’를 이루었노라」 한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사람이니라.
십대 제자 가운데서 경희(慶喜; 阿難)가 많이 알고 널리 배워서 그 식견이
으뜸이었으나, 부처님께서 늘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문(聲聞), 외도(外道)로 하여금 오직 알음알이가 없게 하라」 하셨으니,
‘알음알이나 수효’(識數)를 아는 것으로써 ‘닦아 증득한다’(修證)고 하면
인과법 가운데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이는 중생의 업보여서 생사를 면치 못하며,
부처님의 뜻에 어기는 것이니,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인지라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천제(闡提)는 ‘믿는 마음’(信心)을 내지 않으므로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殺却無罪)」 하시니, 만약 진정한 신심이 있으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 지위의 사람’(佛位人)이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했거든
결코 어진 이를 비방하지 말지니라.
스스로 속여서는 이로울 것이 없느니라.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 과가 분명한지라,
천당과 지옥이 오직 눈앞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는 까닭에
흑암지옥(黑暗地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나니,
오직 업장(業障)이 무거우므로 믿지 않느니라. 마치 소경이 「햇빛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설사 그에게 말해 주어도 역시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눈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분별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들도 이와 같아서, 방금 축생 등 잡된 무리에 떨어졌거나 빈궁(貧窮)
하천(下賤)한 무리에 태어나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느니라.
비록 이와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직접 물어보면 도리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쾌락하기를 천당과 다르지 않다」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태어난 곳’으로써 낙을 삼아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겠도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오직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니라.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치 않나니,
백의(白衣; 俗人)도 역시 ‘부처’니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더라도 역시 외도(外道)니라.』 하였습니다.
이 법문(法門)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부처 자리’에 안치하는, 가히 불세출(不世出)의
법고(法鼓)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불제자들은 새삼 옷깃을 여미고, 이 위대한
가르침을 오늘에 우뚝하게 붙들어 일으키는 데 심기일전의 용맹심을 발휘해
주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이제 이 법회를 마감하면서, 현대에 정법(正法)을 현양(顯揚)하기 위한 초석으로
‘일승법’(一乘法)을 고여놓고, 이에 현대과학의 정수인 양자이론(量子理論)을
곁들여서, ‘불법’이 안고 있는 종교적 한계성의 탈피를 기하고, 나아가 그 마무리를
‘달마 혈맥론’(達磨血脈論)과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으로 회향하여, 모든 속세적
올가미(羈絆)를 일거에 좌단(坐斷)하게 함으로써 모든 도반들로 하여금 당대에 기필코
성불하여지기를 기약했던 당초의 비원(悲願)이 헛되지 않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의 이 조그마한 불씨가 여러 도반들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만 회향합니다.
여러분의 배전의 정진을 빕니다.
- 대우거사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 마치면서
그간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를
애독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저가 2000년경에 이책을 접하고 그간 풀리지 않았던
진리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강동적이어습니다
초보 입문하는 사람들은 직접 법문을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지만 반복 정독하신다면
견성 해탈을 위하여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료를 공유하신 현정선원에게 감사드립니다
- 유당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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