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혁의_역사추적

<6·25전쟁 70주년 발굴 추적> 6사단의 군번 없는 소년병

고성혁의_역사추적 작성자: 고성혁

조회: 3686 추천: 2

작성일: 2020-06-25 14:33:00

 

 

6사단 마크가 세겨진 철원읍 소이산 전망대에서 본 철원 평야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즈음해서 6월 13~14일 양일간에 지인들과 함께 중부전선 6·25 격전지 현장을 답사했다. 이틀 만에 용문산지구전투, 춘천지구전투, 파로호전투, 사창리전투, 저격능선전투 현장까지 돌았다. 격전지 현장 답사를 주선한 길도형 장수하늘소 대표의 감회는 남달랐다.

 

화천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앞에 선 길도형 대표는 마치 아버지 산소를 찾은 듯 조용히 둘러봤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는 길도형 대표의 눈에는 17세 ‘소년병’이 그려지고 있었다. 17세 소년병은 1951년 4월 22일 바로 이곳 사창리에 있었다. 그 소년병은 바로 길도형 대표의 선친이다.

 

대한민국 육군 6사단 7연대 3대대 12중대 군번 0742471 길운효. 길도형 대표는 아버지가 겪은 6·25전쟁을 이야기할 때 선친을 소년병이라고 칭한다. 17세의 병사이니 소년병이 딱 맞는 말이기도 하다. 길도형 대표의 선친이다. 소년병은 17세 어린나이에 군대 하우스보이처럼 생활했다. 전쟁이 터지자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다.

 

군번 없는 소년병으로 현지입대를 한 셈이다.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은 춘천에서 북한 인민군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전쟁 초기에 국군 중 유일하게 북한군의 진격을 막은 사단이다. 그 중심에는 7연대가 있었고 그 자리에 역시 소년병이 있었다. 소년병은 6사단 7연대를 따라 압록강 초산까지 올라갔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물을 전했다는 부대가 바로 육군 6사단 7연대다. 그리고 중공군 개입으로 6사단은 후퇴하여 1951년 4월 화천의 사창리에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군번 없는 소년병은 1951년 4월 용문산 전투 승리 후 정식으로 소년병은 대한민국 육군 병사가 되었다. 군번을 받고 난 뒤 사창리전투, 용문산전투, 파로호전투까지 다 치른 소년병은 1955년 3월 25일 만기제대했다.

 

길도형 대표는 선친으로부터 6·25전쟁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 시절에는 그저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하고 대학생 시절에는 한마디로 ‘국방부스러운 이야기’라고 귓전에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선친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니 선친이 겪은 전투는 한국전쟁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길 대표는 선친이 격은 6·25전쟁을 책으로 남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출판사 대표로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 대표는 소년병이 생사를 오간 사창리전투 현장의 전적비를 아버지의 묘비처럼 바라봤다.

 

 

1951년 4월 22일 6사단의 체육대회

 

김종오 장군에 이어 장도영 장군이 6사단을 지휘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6사단은 사창리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1951년 4월 22일 장도영 사단장은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단 체육대회를 열었다.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기 위한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였다. 각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케 하여 씨름과 기마전, 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 정도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3의 소년병은 임부택 중령의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로 나갔다.

 

전투 현장인 만큼 완전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이다. 입대한 지 1년이 지나 18세가 된 소년병은 사창리의 시골길을 몇 바퀴 도는 코스에서 1등으로 골인했다. 소년병에게는 사단장(장도영) 표창장이 수여됐다. 표창장을 받은 기쁨은 너무도 짧았다. 그날 저녁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북쪽 다목리고개와 동쪽 화천천 하류 방면에서 요란한 ‘따콩’ 소리가 들려 왔다. 포탄 폭발음과 화염이 임시로 차려진 군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창리 분지를 감싼 능선들에서는 꽹과리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6사단 전체가 사창리 비좁은 분지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중공군 20군 예하 3개 사단, 40군 예하 1개 사단 등 무려 4개 사단이 한국군 6사단 전면과 측면을 기습공격했다. 중공군의 공격은 6사단 7연대 정면에 들이닥쳤다.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던 6사단은 지휘체계와 통신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 등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에 따라 사단 전체 병력을 사창리에 집결시켜 적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가진 체육대회와 전장에서의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소리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휘를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장도영 사단장은 다급하게 각 부대별 현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개인 장비들을 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 집결지를 화악산 일대로 정하고 삼삼오오 각자 패주했다. 그래도 재집결에 성공해 낙오한 병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재집결해서 사단 해체를 막을 수 있었다. 1951년 4월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 군으로 편성된 영연방 27여단과 미 2사단, 40사단, 213야전포병대대 부대원들의 분전에 힘입어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사창리전투 직전 체육대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전사기록에는 없다. 패배의 기록을 감추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군 전사기록에는 이때 사창리에서 한국군 6사단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묘사한다. 중공군의 1951년 4월 춘계 대공세는 한국군에 씻을 수 없는 패퇴의 기록을 남겼다.

 

1951년 4월 사창리에서 한국군 6사단을 패퇴시킨 중공군 9병단은 한 달 뒤인 5월 16일에는 강원도 동부전선 오마치고개 일대에서 국군 3군단을 집중공략했다. 3군단이 와해되는 국군 최대의 패전지 현리전투다. 사창리전투와 현리전투에서 국군이 무너지자 유엔군사령부는 육군본부의 작전권을 박탈해버렸다.

 

전선 전면에서 한국군을 모두 빼고 전선 뒤로 물렸다. 6사단은 용문산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은 한국군이 약한 고리임을 파악하고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용문산에 6사단을 중공군은 또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사창리 전투 전적비와 당시 전황도. 6사단 2연대와 7연대 정면으로 중공군 군단급 병력이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창리의 패배를 설욕한 용문산전투

 

장도영 장군은 6사단 2연대를 북한강을 관측할 수 있는 용문산 전면에 배치했다. 중공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했다. 용문산 골짜기로 밀고 들어온 중공군 3개 사단을 국군 6사단의 7연대와 19연대가 포위공격했다. 유엔군의 항공지원까지 얻으면서 말이다.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주력부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약 2만 명의 중공군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용문산에서 패한 중공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용문산전투를 고비로 유엔군은 중공군을 북으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6사단 7연대는 사창리전투의 설욕을 보기 좋게 한 것이다. 용문산에서 패주한 중공군은 화천 파로호까지 후퇴했다. 6사단은 중공군을 추격했다.

 

소년병 역시 중공군을 추격했다. 북한강 양안에는 중공군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5월 하순의 땡볕 아래 부패하면서 중공군 시체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소년병은 ‘뻥’하는 소리를 들었다. 중공군 전사자의 몸뚱이가 터지는 소리다.

 

터질 때마다 옷섶을 비집고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살진 쉬파리 떼가 시체와 생사람을 가리지 않고 까맣게 달라붙었다. 6사단 공병부대원들이 중공군 시체를 공터로 옮겼다. 시쳇더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각했다.

 

 

중공군 킬러 육군 6사단

 

용문산전투에서 패주한 중공군은 화천 파로호 인근에 집결했다. 육군 6사단에도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 그리고 평창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 일대에 집결함에 따라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지시였다.

 

용문산전투 승리로 사기충천한 6사단은 1951년 5월 26일 파로호 일대의 중공군을 포위했다. 미 24사단 21연대, 미 7사단 7연대, 국군 6사단 19연대는 화천-춘천-지암리로 이어지는 축선을 완전 장악하고 중공군 3개 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6사단 7연대는 패주하는 중공군 후미를 공략했다. 5월 28일 하룻동안 6사단 7연대는 중공군 3만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파로호 전투에서 6사단은 총 6만2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군사편찬위원회).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화천 대붕호를 파로호라고 명명하면서 6사단을 부대 표창했다.

 

파로호전투는 끝났지만 18세 소년병에게는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 시체처리였다.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중공군 시체였다. 더운 여름철이라 부패도 빨랐다. 6사단 7연대 병력 대부분이 시신 처리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통나무를 이어 붙여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수장시켰다.

 

시신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마다 묵직한 돌덩이를 달았다. 6월이 되자 부패한 시체가 물 위로 또 오르기도 했다. 중공군 시체가 가라앉은 파로호에서 잡은 물고기로 소년병이 속한 소대원들은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비위가 약한 소년병은 그 매운탕을 먹기가 역겨웠다. 배탈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소년병은 파로호전투를 기억했다.

 

인민군 6사단이 충청도 전라도를 휩쓸고 마산 진동리까지 진출해 대한민국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사단이라면 육군 6사단은 중공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구한 사단이다. 육군 6사단 청성부대는 육군 창설의 모체가 되는 부대이기도 하며 한국전 때부터 현재까지 거의 완편사단으로 지금껏 건재하다.

 

국군 6사단은 전쟁 초기 유일하게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한 부대이다. 대한민국 육군 6사단은 중공군 킬러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단이었다.

 

 

 


진정한 숨은 영웅 소년병 길운효 이등중사의 병적확인서. 입대일자는 용문산전투 후 군번을 받은 날짜다.

 


우리 아버지들의 전쟁이야기 6·25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가 끝난 1951년 6월 6일, 7연대 3대대 12중대 주둔지 막사 앞에 모처럼 이발이며 면도를 하고 누추한 군복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대원들이 도열했다. 앞선 전투에서의 승리로 1계급 특진을 명받았던 장병들에게 진급 계급장이 수여됐다. 1950년 4월 우연히 군복을 입고 병영생활을 시작한 소년병에게도 그 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소년은 호명과 함께 중대장 앞으로 나아가 섰다. 중대장이 직접 소년의 가슴에 일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소년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놈, 고생했다. 장하다!”

 

성명; 길운효

 

입대일; 1951. 6. 6.

 

군번; 0742471

 

계급; 일병

 

소속; 7연대 3대대 12중대

 

사창리전투, 용문산전투, 파로호전투를 모두 치른 소년병은 그렇게 대한민국 육군 일병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날짜가 국방부가 정한 소년병의 공식 입대일이 되었다. 길도형 장수하늘소 대표의 선친이야기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의 선친도 6사단 장병으로 사창리전투를 겪었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의 선친인 전상윤 일등중사(원안)의 제대증서. 제대년도는 단기 4288년(1955년)이다. 사진은 사창리전투와 용문산전투를 치르고 난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당시 사창리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대내 병사는 10명 정도였다고 한다.

 


우연찮게 마주앉은 길도형 대표와 전영준 대표는 선친들이 모두 6사단 소속으로 6·25전쟁을 겪은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 대표의 전언에 따르면 사창리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선친은 그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하늘이 도와 두 번째 사는 인생으로 여기고 삶에서 초연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우파는 6·25전쟁 이야기를 할 때 장군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전투나 김종오 장군의 춘천방어전투가 그 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식의 장군 중심의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감흥이 크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백선엽 장군이나 정일권 장군 이야기로 시작하면 좌파는 바로 친일논쟁으로 이야기를 흐린다.

 

그러나 일반 병사의 이야기로 하면 그런 논란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실감 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나쁜지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전쟁에 참여했던 일반 병사들의 이야기, 내 아버지가 겪은 전쟁 이야기, 지인들 선친이 겪은 전투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필자의 부친은 포항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어려서 아버지가 겪은 6·25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 6·25전쟁 글짓기는 늘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가 단골 소재였다. 상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들려준 6·25전쟁 이야기는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재미났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뭉클했던 대목은 포항 중앙국민학교에 실려오는 부상병 이야기다. 손이 부족하던 때라 중학생이던 아버지도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데 거들었다고 한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눈으로 본 6·25는 비명을 지르며 실려 오는 병사로 각인되었다. 중상자는 아무 소리 없이 실려 왔다고 한다. 부상병이 비명과 함께 찾는 이는 ‘엄마’였다고 한다. ‘엄마 엄마’ 하면서 울부짖다가 나중에 조용하다 싶으면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 눈에 비친 6·25전쟁의 단면이다.


우리는 이제 책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겪은 이야기를 더 많이 발굴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기자

 

해인사 폭격명령 거역한 '빨간마후라' 장군의 유물이 국가문화재 된다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20.06.24. 09:00 수정 2020.06.24. 13:06 댓글 23

The copyright belongs to the original writer of the content, and there may be errors in machine translation results. 版权归内容原作者所有。机器翻译结果可能存在错误。 原文の著作権は原著著作者にあり、機械翻訳の結果にエラーが含まれることがあります。 Hak cipta milik penulis asli dari konten, dan mungkin ditemukan kesalahan dalam hasil terjemahan mesin. Bản quyền thuộc về tác giả gốc của nội dung và có thể có lỗi trong kết quả dịch bằng máy.

[경향신문]

공군 창설과 발전의 중심인물이면서 해인사 폭격명령을 거부해서 해인시와 고려대장경을 구해낸 김영환 장군의 명패. 이 명패는 해안사 폭격명령을 거부했을 당시의 명패이다.|문화재청 제공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6·25전쟁 당시 공군 초대 10전투비행전대장이던 김영환 장군(1920~1957)은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영환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붉은 색으로 도색한 전투기를 타고 80여 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 만프레도 폰 리히토벤을 흠모했다. 그러던 김영환 장군이 형수가 만들어준 자주색 마후라를 두르고 다니면서 ‘빨간 마후라’가 일약 한국 공군에서 유명해졌다.

여기에 1964년 전투조종사를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 영화가 상영됨으로서 영화주제곡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때부터 빨간 마후라가 공군조종사를 지칭하는 상징이 됐다.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에게 조종 흉장과 함께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수여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공군 제10전투비행단의 주요활동을 연원일 사건제목, 출동, 비행훈련 등을 요약한 군사자료.|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김영환 장군에게 ‘빨간 마후라’를 능가하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더 있다. 바로 해인사 폭격작전을 거부함으로써 해인사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문화재청이 엮은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2009년 개정판)에 따르면 1951년 9월18일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다.

이때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을 받는다.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제10전투비행전대의 폭격기 4대는 기관총 뿐 아니라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김영환 대령의 폭격기에는 ‘네이팜탄’도 적재돼 있었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해서 북한군을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6·25 전쟁 당시 임상섭 조종사가 작성한 비행기록 수첩과 지도. 전투기를 비행한 날짜와 기종, 횟수, 출격지점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내 명령 없이는 절대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폭력을 인도한 정찰기가 “편대장은 무엇하는가. 빨리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사찰 상공을 몇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 너머로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

김영환 대령은 귀대후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비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개정판은 “김영환 대령은 사찰을 파괴하는 데는 하루면 족하지만 해인사 같은 사찰을 세우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마무리지었다. 해인사 입구에는 2002년 김영환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건립됐다. 김영환 장군은 1954년 3월 5일 F-51(무스탱)기로 사천기지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기상악화로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됐다. 김 장군은 실종 3년 후 정식으로 사망처리됐다.

해마다 해인사에서 열리는 김영환 장군 추모재.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구한 영웅으로 알려져있다.|해인사 사진자료


물론 김영환 장군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 장군 주변 사람들과 해인사 스님들은 한결같이 ‘김영환 편대장=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위대한 군인’으로 알고 있다. 2009년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공군 차원의 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구성됐다. 6·25 전쟁 때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 등 1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는 ‘김영환=해인사 구한 인물’로 규정했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이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해인사를 공격할 뻔했어’라 했다. 당시엔 무슨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박재호 예비역 장군)

“사천기지에 근무했을 때 김영환 전대장으로부터 ‘야, 오늘 내가 절을 공격할 뻔 했어, 큰 일 날 뻔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배상호 예비역 장군)

국가등록문화재(제787호)로 등록된 ‘군사기록물’. 전투수행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달한 계획·명령·지시 기록과 전투상보와 작전일지 등 총 15종 7521건이다.|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김영환 장군이 이끈 공군 제10전투비행단 관련 군사기록물 등 6·25 전쟁 유산 3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또 ‘인천 팔미도 등대’를 사적으로 지정했으며, ‘6·25전쟁 군사기록물(육군)’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이중 공군 관련 자료는 전쟁 당시 공군 제10전투비행단과 관련된 유물이다. 제10전투비행단 종합보고서와 비행 기록 수첩 및 출격 표시 작전지도, 10비 군사일지, 조종사 출격일지, 김영환 장군 명패 등 총 6건(8점)이다. 이중 ‘제10전투비행단 종합보고서’는 비행단의 작전·정보·교육·기상 등 작전 요소를 망라하여 도면과 문서로 정리한 유물이다. 한국군과 북한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백마고지 전투와 관련해서 제9사단의 이동병력과 무기현황, 작전경과, 요도 등이 담겨있는 ‘백마고지 전투 상보’.|문화재청 제공


‘비행기록 수첩 및 출격 표시 작전지도’는 참전 조종사(임상섭)가 1952~53년 사이 작전을 수행한 지역을 수첩에 기록하고 지도에 표시한 유물이다. 당시 연습 및 출격기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0비 군사일지’는 부대의 주요 활동을 날짜 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종사 출격일지’는 참전 조종사(이배선)가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출격일시·목표지점·임무·작전지도·마음가짐 등을 일자별로 상세히 기록했다. ‘김영환 장군 명패’는 초대 10전투비행전대장 시절(1951년 8~11월 10일)에 조종사 일동이 제작한 것이다. 이 유물들은 해당 유물들은 6·25전쟁 시 공군의 작전수행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희귀하며, 역사적·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작곡가 이상근의 친필악보 ‘보병과 더불어’. 종군작가로 참전한 유치환의 전쟁시집인 ‘보병과 더불어’를 토대로 전쟁 기간 중 관현악과 합창이 함께하는 칸타타형식으로 작곡한 작품이다.|문화재청 제공


이번에 발굴된 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전쟁 군사 기록물(육군)’(등록문화재 제787호)은 전쟁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 군사작전 기록물로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이 담겨있다. 이번에 등록과 함께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전쟁 기간 동안 육군본부·군단·사단·후방부대 등에서 작성한 이 기록물은 전투 수행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달한 계획·명령·지시 기록과,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한 전투상보·작전일지 등 총 15종 7521건이다.

해당 유물은 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피의 능선, 백석산 전투 등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과 작전요도, 적군현황, 전투경과, 병력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물은 25일부터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서 검색 및 활용이 가능하다.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예고된 ‘인천 팔미도 등대’는 1903년에 세워진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근대식 등대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함으로써 6·25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기여했다.

사적으로 지정예고된 ‘인천 팔미도 등대’. 1903년 세워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 연합군 함대의 길을 인도한 역사적인 등대이다.|문화재청 제공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된 ‘근대기 제작 조선왕조 어진’은 태조어진(홍룡포본)·원종어진·순조어진·순종어진 총 4건(4점)이다. 해당 유물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소개된 후 보관창고 화재로 상당부분 훼손됐다. 그러나 여전히 용안의 일부와 곤룡포·신발·용상·채전 등의 색채와 문양 등이 잘 보존되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보병과 더불어 악보’는 전쟁 당시 마산으로 피난했던 작곡가 이상근(1922∼2000)이 칸타타 형식으로 작곡한 작품(친필악보)이다. 해당 유물은 전쟁을 직접 경험하고 그 경험을 작품으로 완성하여 전쟁 당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2020-06-24 07:26

 

김정은,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중앙군사위 예비회의 결정

<출연 :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를 주재하고, 대남 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전문가 연결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나와계십니까?

<질문 1> 먼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이 같은 결정이 나왔다고 하는데요.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가 어떤 것인가요?

<질문 2>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7일 4가지 군사행동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일부는 실행에 옮기며 긴장 강도를 높여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 위원장이 지금 이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 3> 그동안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면에서 대남 강경 조치를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김 부위원장이 악역을 담당하면서 임무를 분담한다는 분석도 있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건가요?

<질문 4> 김 위원장이 일단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만큼, 강경한 대응은 일단 멈출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 어떤 대응으로 나올까요?

<질문 5> 미국은 북한에 미확인 핵시설이 있을 가능성과 추가 핵실험장 건립 가능성까지 거론하면서, 북한의 비핵화 협상테이블 복귀를 촉구했습니다.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질문 6> 최근 북미정상회담 등과 관련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보좌관의 책이 논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내용을 북한도 모르지 않을텐데요. 북한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질문 7> 내일이 6.25 전쟁 70주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어떤 대북메시지를 내놓을지 궁금한데요. 어떨 것이라고 전망하세요?

지금까지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과 함께 했습니다.


연합뉴스TV 기사문의 및 제보 : 카톡/라인 jebo23

고성혁의_역사추적

6·25 북한인민군은 사실상 중공팔로군이었다

고성혁의_역사추적 작성자: 고성혁

조회: 8551 추천: 1

 

작성일: 2020-06-22 10:00:37

부산 코앞까지 왔던 인민군 6사단

 

 

 


김일성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은 방호산 인민군 6사단장.

 


1950년 7월 25일 23시 육군본부는 영남관구 편성사령관 채병덕 소장에게 ‘긴급 작전명령 72호’를 하달했다. 긴급명령 내용은 간단했다.


① 하동 방면으로 남하한 적은 1개 대대 규모이며 약간의 장갑차를 동반하고 있음.


② 영남관구 편성사령관은 지체없이 하동으로 약진하여 동침하는 적을 격퇴하라.

 

③ 행정사항: 장갑차 공격 시에는 휘발유병(휘발유 충전)을 사용할 것.

 

④ 전투지휘소의 위치를 보고하라.

 

그러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이 채병덕 소장에게는 없었다. 수도서울을 빼앗긴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됐다. 영남관구 편성사령관에 다시 임명된 것은 7월 24일이다. 채병덕 소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군 연락장교 역할에 불과했다. 채병덕 소장은 미 24사단 예하 29독립연대 3대대장 헤럴드 무어 중령과 긴급하게 하동지역으로 투입되었다.


섬진강을 건너 하동지역으로 넘어오는 적은 1개 대대 규모가 아니었다. 북한 인민군 최정예사단 중 하나인 6사단 주력이었다. 인민군 6사단은 일명 방호산 사단이라고 불리는 부대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 166사단이 그대로 인민군으로 편입된 부대였다. 1949년 7월 초 방호산이 인솔해 북한으로 들어와 1949년 7월 25일 인민군 6사단으로 재편된 부대였다. 한마디로 유격전에 닳고 닳은 부대가 섬진강을 건너 하동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인민군 6사단 방호산부대의 우회기동 공격에 국군과 미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대구와 왜관 등 낙동강에 치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섬진강 일대는 사실상 방어병력이 없다시피했다. 하동전투에서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국군 1개 대대는 궤멸되었다. 하동이 뚫리자 바로 진주도 인민군 6사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진주 다음은 마산이다. 마산까지 함락되면 부산은 바로 지척이다. 중국 대륙을 누비던 방호산 사단은 유유히 마산의 길목인 진동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워커 사령관은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 예하 27연대를 마산으로 긴급 이동시켰다. 6·25전쟁에서 진동리지구 전투로 불리는 마산 서부지역 전투는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유격전에 특화된 팔로군 출신 인민군 6사단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막강한 포병화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부산 코앞인 마산에서 인민군 6사단의 진격은 차단되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 6사단은 전장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세력은 유격전의 명수답게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미군에게 인민군 6사단은 유령부대로 불릴 정도였다.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마산을 공격했을 때가 6·25전쟁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다고 전사가들은 말한다. 우리로서는 패전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였다.
 

 

김일성이 극찬했던 ‘이중영웅’ 방호산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은 축구로 비유하자면 ‘’라이트 윙’에 해당하는 포지션이었다. 상대방의 좌측방을 깊숙이 침투해 센터링을 날려주는 그런 역할을 방호산의 6사단은 수행했다. 방호산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교과서적인 소련군의 전술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전술을 펼쳤다. 6·25전쟁 발발 당일 개성 점령 시 한국군의 수비대를 기만전술로 묶어놨다.


이미 폐선되었던 철도를 연결해 전투 병력을 손실 없이 개성 시내로 무혈입성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강을 최초로 넘어 김포로 건너온 부대 역시 방호산의 6사단이었다. 이들은 팔로군 시절 항일 유격전과 장개석 군대와 싸운 경험을 그대로 6·25전쟁에서도 발휘했다. 북한 인민군의 ‘라이트 윙’을 담당한 방호산의 6사단은 김포반도를 통해 단숨에 충청도 천안을 점령했다. 특유의 기동 우회전술을 국군과 미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방호산의 6사단은 팔로군의 전술에 맞게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남하했다. 미 24사단은 인민군 주력 3사단과 4사단에 연파당했다. 미군은 북한 인민군 6사단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1950년 7월 11일부터 방호산 6사단은 말 그대로 ‘노마크 찬스’를 누리고 있었다. 방어 병력이라고는 경찰 병력뿐인 호남지역을 무혈입성하다시피했다.


7월 12일에는 공주를 그리고 7월 19일에는 금강을 도하하고, 사단을 3개로 나눠 7월 20일 김제, 같은날 전주를 점령했다. 7월 24일에는 인민군 6사단 예하 13연대가 목포항을 점령하고 또 다른 연대는 25일 여수항을 점령했다. 방호산은 각각 1개 대대씩 항구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전 병력을 28일 하동에 집결시켰다. 8월 2일 마산진동리 지구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은 발빠른 ‘라이트 윙’의 역할은 부산 코앞인 마산 진동리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느닷없이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들이닥친 인민군 6사단의 기습에 국군과 미군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미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25사단 일부를 급하게 마산지역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인민군 6사단의 전공을 높게 사서 사단 병력 전체에 1계급 특진과 방호산 소장을 중장으로 특진시키고 영웅 칭호까지 줬다. 아울러 사단 명칭에 ‘근위 서울’이라는 북한군 부대 최고 명칭까지 부여했다.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의 이동 경로(1950.7.10~1950.7.28). 인민군 6사단은 중공 팔로군 166사단이 그대로 북한군으로 개편된 사단이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에 영향을 준 인민군 6사단


인민군 6사단은 한달 간 충청 전라도 전역을 휩쓸었다. 호남지역에서 방호산부대가 보급에 제약 없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토착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이 컸다. 6·25전쟁 기간 중 호남과 지리산 일대의 극심했던 빨치산 활동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인민군 6사단에 부역하던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경찰과 그 가족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이들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진영을 탄압함과 동시에 인민군 6사단에 보급대 역할까지 수행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대부분의 북한군이 와해되었지만 방호산 6사단만큼은 대오를 유지하면서 태백산 줄기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김일성은 이 점을 극찬했다. 중국 연안파 지휘관은 부대를 유지하면서 후퇴했는데 그중에서도 방호산의 6사단은 남한 각지에 파견되었던 북한 관리 8000명과 자생 빨치산까지 수용해 월북한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방호산에게 최고훈장인 ‘이중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전쟁 기간 중 이중영웅 훈장을 받은 이는 5명에 불과하다.


북으로 올라가지 않은 일부 잔존세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암약하면서 유격전을 펼쳤다고 보는 전사가들도 있다. 이들과 연계된 것이 일명 ‘남부군’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방호산의 6사단은 팔로군의 유격전을 그대로 한국전에서도 실행한 부대였다.


후세 전략가들은 대전에서 부산으로의 최단거리인 영동-김천-대구-부산으로 나가는 주공격 축선에 방호산 6사단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백업’을 못했기 때문에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이 와해되었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미군과 한국군이 낙동강을 방패 삼아 재편성의 시간을 줬다는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방호산의 6사단이 김천지구 및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미 공군 B-29의 전략폭격 앞에 뾰족한 수단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워커 장군조차 “북한군 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휴전 후 방호산은 김일성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연안파였던 방호산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당하고 숙청당했다.


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북한군에 편입시킨 조선인 팔로군은 10개 연대 규모였다. 이는 북한군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 규모였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거의 절반인 10개 연대가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팔로군부대였다.


이들 10개 연대가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주력부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6·25전쟁은 사실상 중국 팔로군의 남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6사단장 방호산뿐만 아니라 1군단장인 김웅은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2군단장 김광협, 10사단장 이방남, 4사단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12사단장 최인 등 모두 중국 팔로군 출신이었다.


북한 인민군 1사단은 1946년 1월 11일 철도보안대로부터 시작하는데 구 일본군 19사단 사령부였던 함경도 나남에서 13개 경비중대로 시작했다. 그 중 3독립 혼성여단은 1948년 9월 9일 인민군 3사단으로 재편되는데 그 중심 부대는 모두 조선의용군이라 불리는 중공군 팔로군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6·25전쟁에서 수도 서울을 함락시킨 주력부대였던 인민군 4사단은 1948년 10월 15일 완편 사단이 되는데 그 중 1개 연대는 중공군 팔로군이 그대로 북한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인민군 5사단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공군 164사단이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된 사단이다. 1949년 7월 부사단장 김창덕이 인솔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6·25전쟁 기간 중에는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특히 포항지구 전투에서는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3사단과 학도의용병이에 인민군 5사단의 공격이 저지 당했다.


인민군 7사단 역시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공군 중남군구 독립 15사단이다. 부사단장이던 전우가 인솔해 1950년 4월 북한 원산으로 들어와 북한 인민군 7사단으로 개칭되었다.
 

 

 


 류경수 105땅크여단 소속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자들

 

 

6·25전쟁에서 북한의 선봉 근위부대


6·25전쟁에서 북한의 선봉 근위부대는 서울을 함락시킨 ‘류경수 105 땅크사단’과 인민군 3사단 그리고 4사단이다. 국군에게 북한군 T34탱크라는 충격을 준 부대가 류경수 105 땅크사단이다. 이 사단은 북한 최초의 기계화 사단이었다. 초대 사단장 류경수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1년 전인 1947년부터 전차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20일 정식으로 ‘제15땅크련대’로 명명하고 류경수가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북한 기계화군단인 ‘제820기계화군단(820훈련소)’의 대호가 바로 이 8월 20일에서 따온 명칭이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넘겨받은 T-34 240여 대와 SU-76 자행포(자주포) 170여 대를 주축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제15땅크련대는 1949년 4월 26일 ‘제9 땅크려단’이라는 단대호가 변경되었다.


류경수의 제9땅크려단 예하 4개의 전차연대는 북한군 남침 주력사단인 1, 3, 4, 6사단에 1개 연대식 배속시켜 작전에 투입되었다. 서울을 점령할 당시 북한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선방부대로 107, 109 땅크련대가 국군 방어부대를 돌파했다.


서울 점령 당시 중앙청을 가장 먼저 점령했다는 ‘제9 땅크려단 소속 312호 땅크’는 현재도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근위 류경수 105 땅크 사단’ 소속의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총 9명이다.


북한 인민군 근위 3보병사단은 6·25전쟁 당시 서울 침공의 전과로 ‘서울’ 칭호를 받았다, 인민군 3사단은 금강 도하 전투, 포천 침공, 대전 침공 등의 전과로 1950년 7월 26일 근위 칭호를 수여받고 근위대로 승격되었다. 6·25전쟁에서 인민군 3사단 소속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자는 8명이다.
특히 인민군 3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서 4사단과 협공으로 미 24사단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포로가 되었다. 인민군 3사단은 105 땅크여단의 지원 하에 미 24사단 정면을 공격했다. 인민군 4사단은 공주를 거쳐 1950년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고 19일 유성을 거쳐 대전 외곽 미군 24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인민군 4사단 중 1개 연대는 금산 방향으로 우회 기동해 미 24사단 배후를 공략하면서 미 24사단은 패닉에 빠졌다. 미 24사단 34연대는 철수 도중 북한 인민군 4사단의 매복에 걸려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대전지구 전투에서 미 24사단은 총 115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근위 서울 김책 4보병사단은 6·25전쟁 개전 당시 북한 인민군 1군단 산하의 부대였다. 북한 조선로동당 창당 이후 이북 지역의 당세포들에서 추천된 골수 당원들과 국공내전 이후 중국에서 북한으로 건너온 팔로군 부대로 구성된 북한군 혼성 보병사단이었다.


주력 연대는 팔로군 출신들이었다. 인민군 4사단은 오산지구 전투에서 미 스미스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는 한국으로 급파된 미군과의 최초의 교전이었다.
 

 

 


 중앙청을 가장 먼저 점령하였다는‘ 제9 땅크려단 소속 312호 땅크’는 현재도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공군 본진 투입과 인해전술


이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대전지구 전투에서도 인민군 3사단과 협공으로 미 24사단을 격파했다. 인민군 4사단은 전쟁 발발 이후 서울 침공으로 ‘서울’ 칭호를, 대전 침공과 금강 도하 전투, 낙동강 도하 전투의 전과로 1950년 8월 19일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중공군 팔로군이 주축이 된 북한 인민군 주력은 낙동강 전투에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후속 부대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넘어왔다. 모택동 군대 30만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이 북한군으로 옷을 갈아입은 팔로군의 1진의 남침이었다면 1950년 12월 겨울 인해전술은 중공군 본진의 남침이었다. 흔히 북한과 좌익세력은 민족공조를 외치면서 미군을 외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 대한민국을 친 것은 바로 김일성이었다.


6·25 때나 현재나 중국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민족을 가장 위협하는 군대는 중국군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현 정권의 군사 외교적 스탠스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직도 방호산부대의 후손이 남한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일성이 중시했다는 사상 유격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거의 성공한 듯하다.

 

아름다운 인연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만들며 살라.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앞에 모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서로의 가슴과 가슴이 열릴 때 삶도 열리고 행복도 열리는 것이다.
좋은 인연은 또한 함부로 되어지지도 않으며
인연은 또 함부로 멀어지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만들 때 삶도 아름다운 것이다.
고운 인연을 많이 만들고 살 때 삶은 윤택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가장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

마음을 기쁘게 하고
속삭임이 다정한 사람
마음속에 희망을 주는 사람

내 무지함을 뛰어난
장점으로 승화 시켜주는 사람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미소로 일깨워주는 사람

어떠한 좋은 일을 해 놓고도
미소 지으며 떠나갈 줄 아는 사람

하찮은 일이라도 귀찮아 하지 않는 사람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해와 달의 속삭임 처럼
은은한 미소를 가진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위인.교육.기타 > 세상살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은 나비가 되어  (0) 2020.07.12
내가 당신에게 -좋은글  (0) 2020.06.29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얻어라  (0) 2020.05.25
소만 [小滿]  (0) 2020.05.19
신통한 생활의 지혜   (0) 2020.05.15

용량가득 채워진 PC 를 대청소로 해결 합시다!

 

정다혜. 추천 1 조회 17 20.06.11 17:48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tozisarang/JCfx/1824?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용량가득 채워진 PC 를 대청소로 해결 합시다!

1단계:청소용 프로그램 다운로드
각종 검색 사이트의 자료실에서 PC 청소용 프로그램을 다운받는게 첫 단계다.
물론 비용은 무료다 PC에 내장된 윈도의 프로그램 삭제 기능 뿐만 아니라
청소용 프로그램을 병용해야 불필요한 자료 삭제 및 정리가 완벽하게 가능해진다.
"이지클린" 이나 [이지윈 클리너]등 필요없는 파일과 레지스트리 등을 정리해주는
청소용 소프트웨어와, 자기 PC의 정보를 상대방에게 유출시키는 스파이웨어를
없애주는 "애드 어웨어(Ad Aware)를 다운로드 받으면 일단 준비 작업은 완료된다.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이지클린]을 쓰고 클릭하면 이지 클린 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제부터 PC의 삭제 기능과 다운로드 받은 프로그램을 써서 대청소를 시작해보자.

2단계:불필요한 프로그램 삭제
우선 윈도"시작" 메뉴에서"설정"을 누른 후 제어판→프로그램 추가/제거’를
차례로 실행하는 방식으로 불필요한 프로그램을 지운다.
하지만 초심자의 경우 PC 내부의 중요한 프로그램을 실수로 삭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지 여부가 판단이 안서면 주변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3단계:군식구 쫓아내기
동영상, 음악 파일 등 대용량의 멀티 미디어 파일들을 찾아 삭제한다.
대용량 멀티미디어 파일을 삭제 하다보면 어느새 다이어트에 성공한 하드디스크를
만날 수 있다. 이어 용량은 작지만 잡다한 문서 파일을 찾아내 함께 없앤다.
당장은 필요없지만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는 파일은 CD 등 각종 보조 저장 장치에
백업하면 된다.

4단계:바탕화면 살빼기
바탕 화면만 차지한 채 사용하지 않는 단축 아이콘을 찾아 지우면 메모리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PC를 켰을 때 재빨리 구동하지 않는 것은 십중팔구 단축 아이콘이 너무 많을 경우다.
단축 아이콘들을 일일이 바탕 화면에 띄우느라 시간과 메모리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또 바탕 화면을 장식하는 월페이퍼도 없애자. 역시 PC에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5단계:레지스트리 삭제
이제부터는 PC의 삭제 기능이 아닌 다운받아 둔 청소용 프로그램을 가동시킬 차례다.
단순히 프로그램이 저장된 폴더를 휴지통에 넣어 지우는 방법은 청소의 효과가 적다.
삭제된 프로그램의 정보를 담고 있는 [레지스트리]가 하드디스크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드 디스크에 불필요한 레지스트리가 쌓이는 것은 혈관의 노폐물처럼 PC의 속도를
늦추는 주범으로 꼽힌다.
이지클린의 경우 [자동최적화]기능을 선택하면 삭제된 프로그램의 레지스트리가
별도의 창에 나타난다.
마우스의 오른쪽 단추를 클릭하면 선택된 파일 삭제 항목이 뜬다 .
이 항목을 다시 클릭하면 프로그램을 삭제한 뒤에도 불필요하게 남아있는 파일과
레지스트리가 지워진다.

6단계:스파이웨어 축출
스파이웨어란 인터넷 등에서 무료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함께 딸려와

PC 사용자의 각종 정보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애드 어웨어는 스파이를 PC에서 청소하는 프로그램이다.
먼저 애드 어웨어를 실행시켜 Start 버튼을 클릭하면 PC에 숨어서

작동하고 있는 스파이웨어를 찾아준다.
찾아낸 파일을 지시에 따라 삭제하면 된다. 부팅할 때마다 자동 실행돼

메모리를 낭비하는 각종 팝업창 등도 없애야 한다.
시작→실행에서 입력창에 ‘msconfig’를 입력해 ‘시스템구성 유틸리티’위쪽
탭 가운데[시작프로그램]을 선택해 진행한다.

7단계:디스크 조각 모으기
마지막으로 하드디스크에 흩어진 파일들을 모아준다.
시작 메뉴에서 프로그램→보조 프로그램→시스템 도구→디스크 조각 모음의

순서대로실행하면 된다

 

 

 

 

'위인.교육.기타 > 컴맹탈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컴퓨터 문제 해결  (0) 2020.06.12
스마트폰 10가지활용하기  (0) 2019.04.11
컴 끝내주게잘하기  (0) 2019.04.11
스마트폰 사용방법  (0) 2019.03.11
[스크랩] 스마트폰 사용방법  (0) 2019.01.23

컴퓨터 문제 해결

 

박소진 추천 1 조회 4 20.06.12 11: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tozisarang/JCfx/1825?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컴퓨터 문제 해결

 

1. 부팅 속도가 점점 느려져요

원인
윈도우즈 시작프로그램 항목에 뜨는 응용프로그램을 많이 등록했기 때문이다.

시작프로그램에 바로가기 아이콘을 등록하면 윈도우즈가 부팅하고 알아서 띄운다.

응용프로그램을 많이 띄우면 윈도우즈 수행속도가 떨어진다. 시작프로그램에 있는

쓸데없는 응용프로그램은 지워서 윈도우즈 속도를 높인다.

 

해결
시작프로그램에 등록한 바로가기 아이콘을 지우면 부팅속도가 빨라진다.

1. 윈도우즈 바탕화면 왼쪽 아래에 있는 '시작'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

→ 시작프로그램을 고른다.
2. 시작프로그램에 등록된 바로가기 아이콘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삭제'를 골라 모두 지운다.

 

2. 윈도우즈가 종료되지 않습니다

원인
윈도우즈 98 SE는 종료 버튼을 누르면 먹통되는 에러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이런 에러를 없애는 패치를 내놓았으니 깔면 된다.

 

해결
윈도우즈 98 SE 종료가 안되는 에러를 잡는 파일을 깔고 다시 부팅한다.

종료 패치 파일은 마이크로소프트사 홈페이지나 PC사랑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3. 바탕화면의 아이콘들이 이상한 그림으로 바뀌거나 깨졌어요

원인
윈도우즈 아이콘 그림을 담은 파일이 깨졌기 때문이다.

 

해결
윈도우즈 아이콘 그림은 c:windows 폴더에 ShellIconCache 파일로 묶어서

담아놓는다. 이 파일은 여기저기 흩어진 아이콘 파일을 하나로 묶어 윈도우즈가

아이콘 그림을 읽는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잠깐 묶음으로 만든 캐시 파일이다.

바탕화면에 보이는 아이콘 그림이 바뀌거나 깨지면 ShellIconCache 파일을 지우고

다시 부팅하면 아이콘이 제대로 보인다. ShellIconCache 파일은 숨김 파일로서

윈도우즈 폴더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윈도우즈 탐색기의 찾기 창을 띄워 찾는다.

 

1. 윈도우즈 탐색기를 띄우고 보기 → 폴더에서 옵션을 고른 다음, '보기' 항목에서

'모든 파일 표시'를 고르면 숨김파일도 탐색기에서 모두 볼 수 있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창을 닫는다.
2. 도구 → 찾기 → 파일 또는 폴더를 누른다. 이름 칸에 ShellIconCache를 쓰고

'지금 찾기' 버튼을 눌러 찾는다. 찾은 ShellIconCache 파일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삭제'를 골라 지운다.


4. 'dll 연산 오류'가 나면서 윈도우즈가 멈춰요

원인
dll 파일은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려고 펼치는 마법책처럼 ?글같은 큰 응용프로

그램이 가져다 쓰는 도서관 파일이다. 하나의 파일에 모든 마법을 담으면 용량도

커지고 수행속도가 떨어진다. 때문에 dll 파일에 나누어 담으면 응용프로그램이

가벼워서 수행속도가 빨라진다.

응용프로그램은 자기가 쓸 dll 파일을 깔 때 윈도우즈 폴더에도 복사합니다.

수많은 응용프로그램을 깔면 dll 파일이 바뀌거나 깨져서 종종 오류가 난다.

 

해결
dll 오류가 나는 프로그램을 지우고 다시 깔면 된다. 그래도 문제가 생긴다면

윈도우즈 시스템 dll 파일이 깨진 것이다. 이때는 '시스템 파일 검사기'를 쓰자.

 

1. 윈도우즈 98 설치 CD가 필요하다. 시작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도구 → 시스템 정보를 누른다. 도구 →시스템 파일 검사기를 띄우고

'시작' 버튼을 누르면 윈도우즈 98을 처음 깔았을 때와 비교해서 바뀐 시스템

파일을 검사한다.


2. 바뀌거나 지워진 파일을 찾으면 '파일 복원'을 고르고 '확인' 버튼을 누른

다음 '파일 복원' 창이 뜨면 백업할 폴더를 골라 '확인' 버튼을 누른다.

 

5.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원인
스피커 연결 잭이 빠지거나 스피커 전원이 꺼졌든가, 소리 볼륨을 '음소거'

(mute)로 체크했든가, 사운드카드 드라이버가 깨져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해결
먼저 바탕화면 오른쪽 아래 시작 작업표시줄에 노란색 스피커 모양의 아이콘을

두 번 눌러 '볼륨 컨트롤 표시' 창을 띄운 다음 '음소거'(mute)에 체크되었는가,

소리를 낮추었는가를 확인한다.

 

1. 스피커 연결 잭이 빠지거나 스피커 전원이 꺼졌는가?
스피커 연결 잭이 정확히 꽂아 있는지 살핀다. 스피커 연결이 헐겁다면 꽉 끼운

다음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한다.


2. 볼륨 조절 메뉴에 '음소거'로 체크되었나?
트레이의 '스피커' 아이콘을 누르고 볼륨조절 메뉴의 '음소거' 에 체크가 되어

있지 않아도 소리가 안 나오면 볼륨조절 높낮이를 조정한다.


3. 사운드카드 드라이버가 깨졌나?
'내 컴퓨터'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등록정보'를 띄우고 장치관리자를

고른다. '사운드, 비디오 및 게임 컨트롤러'에 느낌표나 물음표가 떴는지 확인한다.

아무것도 뜨지 않다면 문제 없지만, 떴다면 드라이버를 다시 깐다. 사운드카드

드라이버를 담은 CD나 플로피디스크를 넣고 setup을 눌러 깐다.

 

6. 부팅할 때 '000.vxd 파일이 없다'는 오류 메시지가 나옵니다

원인
응용프로그램을 언인스톨하지 않고 탐색기에서 바로 지워서다.

 

해결
정확히 어떤 파일이 없는지 알아야 한다.

부팅할 때 오류가 생긴다는 파일을 알아둔다.


1. '시작' 버튼을 눌러 '실행' 칸에 regedit를 쓰고 '확인' 버튼을 눌러 레지스트리

편집기를 띄운다. 내 컴퓨터 항목에서 HKEY_LOCAL_MACHINE를 열고 system

→ currentcontrolset → services → VxD를 연다. 여기서 오류가 생기는 파일을

가진 키를 찾아서 지우면 오류 메시지가 뜨지 않는다.

 

7. 인터넷을 띄울 때마다 고힙 광고 창이 떠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울 때 처음 접속하는 '홈페이지'를 마음대로 바꾸는

골치아픈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처음에 뜨는 '홈페이지'를 이용자가 바꾸어도

배너 광고 창이나 음란 사이트를 마구 띄운다. 대표적인 사이트가 바로 고힙 사이트다.

 

해결
고힙 사이트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윈도우즈 레지스트리를 고치기 때문에

고힙만 뜬다.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을 때 고힙 레지스트리를 바꾸지 못하게 막는

패치 파일을 깔면 된다.

 

1. 고힙 홈페이지(http://www.gohip.com/remove_browser_enhancement.html)나

PC사랑 홈페이지 자료실에 들어가서 remove.exe 파일을 내려받은 다음 인터넷 익스

플러로 창을 모두 없앤다.


2. ADSL처럼 전화접속 네트워킹을 쓰면 전화접속을 끊어야 한다.

remove.exe를 눌러 깔고 다시 부팅하면 고힙이 말썽부리지 않는다.

 

8. 'vxd 파일이 없다'는 오류 메시지가 뜨면서 부팅이 안됩니다

원인
응용프로그램을 지울 때 레지스트리 값은 놔둔 채 폴더만 지웠기 때문이다.

 

해결
지운 응용프로그램 레지스트리 값도 모두 지워야 오류 메시지가 뜨지 않는다.

 

1. 시작 버튼을 눌러 '실행'을 고르고 regedit를 넣은 다음 엔터를 쳐서

레지스트리 편집기 창을 띄운다.


2. F3 키를 눌러 '찾기' 창을 띄우고 에러 메시지를 내는 파일 이름을 쓴다.

에러 메시지를 내는 vxd 파일을 찾으면 Delete 키를 눌러 모두 지운다.

 

9.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볼 때 화면만 나오고 소리가 나지 않아요

원인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 버전이 낮거나 에러가 잘 나는 7.0 버전일 때, 또는

동영상을 돌려보게 하는 코덱이 없어서다.

 

해결
CD사랑 첫째장 media 폴더를 열어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 최신 버전인

wmp71.exe를 눌러 깐다. 최신 동영상 코덱은 CD사랑 첫째장 articledvdcodec

폴더에 담은 umpg4cex.exe 파일을 눌러 깐다.


10. PC가 자주 먹통돼요

원인
PC가 먹통되는 가장 큰 원인은 PC 온도가 높아서 CPU가 에러를 냈기 때문이다.

 

해결
PC 케이스를 열어 CPU 방열판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어 열을 느껴본다.

손가락을 잠시라도 댈수 없을 만큼 뜨겁다면 CPU 온도가 50도를 넘는다는 뜻이다.

이때는 '연산오류'를 내거나 PC가 자주 먹통된다. 더운 여름에 PC를 쓸때는

PC 케이스 뚜껑을 잠시 열어 놓는다든가, 열을 잘식히는 쿨러를 달아 온도를 낮춘다.

 

11. '조각모음/디스크검사'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고 멈춥니다

원인
윈도우즈가 쓸 시스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메모리에 떠서 동작하는

응용프로그램(대표적으로 V3나 노턴과 같은 백신이 있다.)이나 화면 보호기가

시스템 자원을 많이 잡아먹는다.

 

해결
디스크 검사나 조각모음을 수행하기 전에 백신 프로그램을 끄고

화면 보호기가 동작하지 않게 고른다.

 

12. PC 속도가 갑자기 느려집니다

원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거나 바이러스를 잡은 다음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해결
V3나 바이로봇과 같은 백신 프로그램으로 바이러스를 검사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서 깨진 파일이 생겼다면 깨진 파일이 쓰는 응용

프로그램을 다시 깔면 된다.

 

13. 버추얼 드라이브를 까니 CD롬을 알아채지 못해요

원인
가상 CD롬과 CD롬 드라이브가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c:windowssystemrosebays 폴더에 담긴 cdfs.vxd 파일을 바꾸었거나

깨졌을 때 CD롬 드라이브를 알아채지 못한다. 종종 이전의 CD롬

드라이브를 '이동식 디스크'로 잘못 알아채기도 한다.


해결
평가판 가상 CD롬을 지우고 정품(retail) 가상 CD롬 프로그램을 깔면 된다.

가상 CD롬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다면 다른 PC에 담긴 cdfs.vxd 파일을

복사해와서 덮어쓰고 다시 부팅하면 CD롬 드라이브를 제대로 알아차린다.


14. 바이러스에 걸렸는데 치료가 안됩니다

원인
윈도우즈가 쓰고 있는 파일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고칠 수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도 마찬가지다.

 

해결
도스로 부팅해서 도스용 백신 프로그램으로 치료한다.

1.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삭제 → 윈도우즈 설치에서 '시동 디스크'를

만들고 다른 플로피디스크에 도스용 백신 프로그램인 '네오 V3'나

'바이로봇'을 복사한다.


2. PC를 시동디스크로 부팅한 다음 백신을 담은 플로피디스크르

넣어 도스에서 바이러스를 잡아낸다.

 

15. 윈도우즈 오른쪽 위에 있는 (그림20) 버튼이 깨졌어요

원인
끝내기나 최소화 아이콘이 숫자로 변하는 이유는 '글꼴 파일 캐시'

(TTFcache)가 깨졌기 때문이다.

 

해결
윈도우즈 폴더에 담긴 글꼴파일 캐시를 되살리면 고칠 수 있다.
글꼴파일 캐시는 숨김파일이다. 내 컴퓨터를 열어 보기 → 폴더 옵션을 띄워

'보기' 항목에서 '모든 파일 표시'를 고르고 '알려진 파일 형식의 파일 확장명

숨김'에 체크는 뺀 다음 '확인' 버튼을 누른다.

 

16. 윈도우즈에서 '치명적인 오류'래요

원인
윈도우즈 시스템 파일이 깨졌거나 쓸데없는 시작프로그램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과 충돌이 났을 때, 시스템 자원이 부족할 때다.

 

해결
치명적인 오류는 윈도우즈의 고질적인 오류다. 중요한 자료는

백업을 해놓고 윈도우즈를 처음부터 다시 설치해야 한다.

 

17. 인터넷 속도가 점점 느려집니다

원인
인터넷을 쓰면서 윈도우즈가 만드는 임시파일 때문에 느려진다.

 

해결
윈도우즈가 만드는 임시파일을 모두 지운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옵션 → 일반 → 임시인터넷파일을 고른다.
2. 파일 '삭제'을 버튼을 누른 다음 '오프라인 항목을 모두 삭제'에 체크하고

확인 버튼을 눌러 임시 파일을 모두 지운다.

 

18. 'kernel32.dll에서 잘못된 페이지 오류 발생'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띄울 때 자주 이 메시지가 뜬다.

이것은 메인보드에 얹은 메모리가 헐겁게 끼워졌든가, 무리한 작업으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해결
메모리가 헐겁게 끼워지지 않았는지 다시 꾹 눌러 끼운다.

PC가 부팅이나 종료를 할 때 메모리가 망가져서 먹통될 수 있다.

\ PC를 산 곳에서 메모리를 교환받는다. 또 무리한 CPU 오버클럭에도

오류 메시지를 띄울 수 있다. 이때는 다시 이전의 클럭으로 낮춘다.

 

19. 게임이 깔리지 않고 깔아도 뜨지 않습니다

원인
게임이 돌아가지 않거나, 깔 때 에러가 나는 것은 대부분 시스템 장치나

그래픽카드 드라이버 파일에서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결
제어판 → 시스템에서 장치관리자를 열고 충돌이 일어나는 장치가

있는지 확인한다. 느낌표가 떴다면 장치끼리 충돌했다는 뜻이다.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는 인터넷이나 PC통신에서 항상 최신 버전을

내려받아 업데이트한다.
내 컴퓨터 → 제어판 → 시스템을 띄워 '장치관리자'를 열고 느낌표가

뜬 장치를 Delete 키를 눌러 지운다.

다시 부팅해서 윈도우즈가 새로운 드라이버를 찾으면 삭제한 장치

드라이버가 담긴 CD나 플로피디스크를 넣어 드라이버를 깐다.

 

20. 인터넷을 하면 PC가 자꾸 먹통됩니다

원인
대부분 ADSL 외장형 모뎀을 쓸 때 생기는 문제다.

원인은 ADSL PPPO 가상네트웍 드라이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충돌해서다. ADSL의 PPPO 가상 네트워크 드라이버는 고정 IRQ를

쓰기 때문에 다른 응용프로그램과 부딪혀서 먹통되곤 한다.

 

해결
랜카드를 다른 PCI 슬롯에 꽂은 다음 ADSL 접속 프로그램을 다시 깔면 된다.

랜카드를 비어있는 다른 PCI 슬롯에 꽂고 PC를 켠다. ADSL 접속 프로그램

설치 CD를 넣고 제어판 → 시스템 → 장치관리자에서 느낌표가 뜬 네트워크를

두 번 누른 다음 '드라이버 다시 설치' 버튼을 눌러 깐다.

이때 윈도우즈 98 설치 CD를 찾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두자.

 

21. 접속할 수 없는 홈페이지가 있어요. 왜 그런가요?

원인
몇몇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는 이유는 사이트 웹서버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
대형 사이트는 웹서버 점검 시간을 따로 두어 이용자가 홈페이지를

열어도 동작하지 않을 때가 있다. 대부분 e-메일이나 홈페이지 공지로

서비스를 잠깐 멈춘다는 내용을 알린다. 이때는 웹서버가 제대로

동작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22. 윈도우즈에서 e-메일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원인
윈도우즈가 기본으로 지니고 있는 e-메일 프로그램(e-mail client)에

이용자의 e-메일 계정을 넣지 않았거나, 잘못 넣었을 때다.

 

해결
최근 e-메일은 웹메일과 e-메일 클라이언트로 나눌 수 있다.

웹메일은 한메일, 한미르, 엠파스 등 웹브라우저로 e-메일을 주고받는

형식을 말하고, e-메일 클라이언트는 아웃룩 익스프레스나 유도라처럼

윈도우즈 응용프로그램처럼 쓰는 형식을 말한다.

e-메일 클라이언트는 웹메일처럼 5MB 용량제한이나 한번에 주고받을

수 있는 파일 크기제한 등이 없지만 e-메일 서버의 이름인 POP3와

SMTP 서버를 알아내서 넣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나우누리는

mail.nownuri.net이고 네츠고는 netsgo.com이다. POP3와 SMTP

서버를 모른다면 인터넷 회선제공 업체에 전화를 걸어 알아낸다.

 

1.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띄운 다음 도구 → 계정을 누른다.
2. '추가' 버튼을 눌러 '메일'을 고르고 이용자 이름을 적는다.
3. 쓰고 있는 e-메일 주소를 넣는다.
4. 받는 메일서버인 POP3와 보내는 메일서버인 SMTP를 적는다.

POP3와 SMTP 서버 이름은 하나로통신은 mail.hananet.net이고

네츠고는 netsgo.com 등이다.

 

23. 인터넷에서 파일을 내려받을 수 없습니다

원인
인터넷 이어받기 프로그램 때문에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제대로

내려받기할 수 없는 경우다.

 

해결
플래시겟, 겟라이트, 다운로드 엑셀레이터, 다운로드 메이지 등

내려받기 프로그램은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삭제에서 '제거' 버튼을

눌러 언인스톨한다.

 

24. 모니터 해상도가 바뀌지 않아요

원인
그래픽카드 드라이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해결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는 응용프로그램을 깔 때 깨질 수 있다.

이때는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다시 깐다.

 

1. 그래픽카드 드라이버 CD를 넣는다. 드라이버 CD는 PC를 샀을 때

같이 온다. 없다면 인터넷이나 PC통신 자료실에서 내려받는다.
2. 제어판 → 디스플레이 창을 띄워 '설정' 항목을 고른 다음 '고급'

버튼을 누른다. '어댑터' 항목에서 '변경' 버튼을 누른다.
3. '다음' 버튼을 누른 다음 '드라이버의 목록을 만든 후 원하는

드라이버 선택'을 고르고 '다음' 버튼을 누른다.
4. '검색할 위치 지정'을 체크하고 '찾아보기' 버튼을 누른다.

'폴더 찾아보기' 창이 뜨면 드라이버가 담긴 CD를 고르고 '확인'

버튼을 눌러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깐다.

 

25. 홈페이지에 링크한 주소를 누르면 엉뚱하게 탐색기가 떠요

원인
아웃룩이나 웹메일에서 링크한 주소를 누르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뜨지 않고 엉뚱하게 탐색기가 뜬다. 이것은 윈도우즈에서 인터넷 익스

플로러가 기본 웹브라우저로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웹브라우저로 등록한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눌러 '인터넷 등록정보' 창을 띄운다.
2. '프로그램' 항목을 열어 '시작할 때 기본 브라우저 확인'을 체크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다.

 

26. 장치 관리자에 알 수 없는 장치가 충돌했대요

원인
알 수 없는 장치는 하드웨어를 추가할 때나 윈도우즈를 새로 깔았을

때 하드웨어 드라이버를 깔지 않아서다.

 

해결
'알 수 없는 장치'는 지우고 하드웨어 드라이버를 다시 깐다.

알 수 없는 장치가 무엇인지 이용자도 알 수 없다면 PC를 구입한 업체에

문의를 하든가, PC에 단 부품을 보고 드라이버를 잡지 않은 장치를 알아낸다.

 

1. 제어판 → 시스템 → 장치관리자를 열어 '알 수 없는 장치'를 '제거'

버튼을 눌러 없앤다.
2. 제어판에서 하드웨어 추가/삭제 아이콘을 눌러 '자동으로 하드웨어를

찾기'를 수행한 다음 그래픽카드와 사운드카드, TV카드 등의

드라이버를 깐다.

 

27. '윈도우즈 파일이 손상되었습니다'는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응용프로그램이나 윈도우즈가 지닌 프로그램을 쓸 때 시스템 파일을

열거나 닫는 도중에 깨지기 때문이다.

 

해결
망가진 윈도우즈 시스템 파일을 되살린다.

1. 시작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 시스템 정보를 띄운다.
2. '도구' 메뉴를 열어 '시스템 파일 검사기'를 골라 망가진

파일을 검사한다.
3. 망가진 파일을 찾으면 '설치 디스크에서 한 파일의 압축해제'를

골라 시스템 파일을 되살린다.

 

28. 이유없이 PC가 멈춰요

원인
1998년에 나온 윈도우즈는 그 이후에 나온 메인보드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 최신형 메인보드가 부리는 재주를 알아차리지 못해

윈도우즈가 에러를 내는 것이다.

 

해결
최신형 메인보드를 제대로 알아채게하는 메인보드 드라이버를 깔면

에러를 막을 수 있다. CD사랑 첫째장 patchintel 폴더에 담은 인텔 inf

패치는 인텔 칩셋을 얹은 메인보드일 때 깐다.

비아칩셋을 얹은 메인보드를 쓰는 이용자는 PC사랑 5월호 CD사랑

첫째장 patchvia 폴더에 담은 setup 파일을 눌러 '비아 서비스팩'을

깔든가, PC사랑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아 깔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9. 인터넷 익스플로러 내용관리자에 넣은 비밀번호를 잊었어요

원인
내용 관리자는 음란, 폭력 사이트를 접속하지 못하게 비밀번호를 넣어 막는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그나 에러 때문에 인터넷을 쓸 수 없을 때가 생긴다.

이것은 ratings.pol 파일이 깨졌기 때문이다.

 

해결
내용관리자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 '등급 사용'을 푼다.

암호를 잊었다면 windowssystem 폴더에 담긴 ratings.pol 파일을 지운다.

 

30. 프로그램 추가/삭제에서 프로그램을 삭제했는데 목록에 남아있습니다

원인
응용프로그램이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서다. 응용프로그램 가운데 깨진 파일이 있거나,

레지스트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때 프로그램 추가/삭제 목록에 그대로 남는다.

 

해결

1. 시작 버튼을 눌러 '실행'을 열고 regedit를 넣어 레지스트리 편집기 창을 띄운다.
2. HKEY_LOCAL_MACHINESOFTWAREMicrosoftWindowsCurrentVersionUninstall을

열어 이용자가 지웠지만 프로그램 추가/삭제 목록에 남아 있는 프로그램 이름을 고르고

Delete 키를 눌러 지운다.

 

31. 인터넷 익스플로러 화면에서 글자가 커졌어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 버그 때문에 글자 크기가 바뀌었다

 

해결
글자가 커졌을 때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고 '보기' 메뉴를 눌러 '텍스트크기'를

'보통'으로 체크한 뒤 인터넷 익스플로러 다시 수행한다.

 

32. 내 홈페이지 글자가 깨졌어요

원인
우리 말로 만든 홈페이지라도 홈페이지를 만든이가 HTML 문서에 기본 언어를

영어로 적었을 때 생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고 보기 → 인코딩을 고른 다음 언어를

'한국어'로 바꾼다.

 

33. '인터넷 익스플로러 스크립트 오류'래요

원인
스크립트란 만든이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게 내리는 명령서와 같다.

홈페이지 만든이가 잘못된 스크립트 명령어를 썼기 때문이다.

 

해결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에서 '고급' 항목을 열고 '스크립트

디버킹 사용 안함'을 체크한다.

 

34. 윈도우즈가 시작할 때 묻는 아이디와 비밀번호 창을 없애고 싶습니다

원인
이용자가 비밀번호를 넣었든가, 네트워크 환경에서 윈도우즈를 네트워크

클라이언트로 골랐기 때문이다.

 

해결
비밀번호를 묻는 창을 없애려면 암호를 담는 pwl 파일을 지우면 된다.

 

1. 윈도우즈 폴더에서 '이용자이름.pwl'을 찾아 지운다.
2. 네트워크 환경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등록정보'를 연다.
3. 'Windows 로그온'을 골라 '확인' 버튼을 눌러 윈도우즈를 다시 시작한다.

 

35. 윈도우즈 보조프로그램을 쓸 때 '파일 손상 오류'가 떠요

원인
보조프로그램 또는 시스템 도구 프로그램 파일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해결
보조프로그램과 시스템 도구를 다시 깐다.

1. 윈도우즈 98 설치 CD를 넣고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제거를 띄워

윈도우즈 설치 탭을 고른다.
2. '구성요소'에 보조프로그램과 시스템도구를 체크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 다음 윈도우즈를 다시 시작한다.

 

36. 윈도우즈 시작할 때 엉뚱한 프로그램이 뜹니다

원인
시작프로그램에 응용프로그램이 등록이 되어 있다.

 

해결
시작프로그램에 등록된 응용프로그램 바로가기 아이콘을 지운다.

1. '시작'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 → 시작프로그램을 띄운다.

2. 쓸데없는 바로가기 아이콘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삭제'를 골라 지운다.

 

37. 아웃룩이 동작하지 않거나 속도가 느립니다

원인
Win32/FunLove.4099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 옮겨다니면서 윈도우즈를 감염시켜 프로그램을

망가트린다. 이 때 인터넷 속도가 느려진다.

 

해결
V3나 바이로봇과 같은 백신 프로그램을 써서 바이러스를 잡는다.

 

38.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면 하드디스크 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인터넷 임시폴더와 시스템 임시폴더에 쓸데없는 임시 파일이 많기 때문에

뜨는 경고 메시지다.

 

해결
하드디스크 용량을 절약하려면 인터넷 임시폴더와 시스템 임시폴더에 담긴

필요없는 파일을 모두 지운다.

 

1. windowstemp 폴더에 담긴 파일을 모두 지운다.


2.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워 '임시 인터넷 파일' 항목의

'파일 삭제' 버튼을 누른다.

 

39. 동영상과 음악 파일을 누르면 리얼플레이어만 떠요

원인
동영상과 음악 파일이 리얼플레이어로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해결
동영상과 음악 파일 연결프로그램을 다른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으로 고친다.

1. 동영상 파일에 대고 Shift 키와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른 다음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와 같은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을 고른다.
2. '이 파일을 열 때 항상 이 프로그램을 사용'에 체크한다. '확인' 버튼을 누르면

다음부터 이용자가 고른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이 뜬다.

 

40.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중국어나 일본어 글자가 깨져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 언어설정이 잘못되었거나 언어 팩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중국어나 일본어와 같은 다른 나라 글자를 표시할 때

언어팩이 깔려 있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업데이트 사이트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언어팩을 깔았어도 글자가 깨지는 것은 도구 메뉴를 열어 원하는

나라의 언어를 고르면 해결된다.

 

41. 윈도우즈 배경화면이나 색상수를 바꿀 수 없어요

원인
배경화면을 골라도 깔리지 않고 16비트, 32비트 컬러가 바뀌지 않는 것은

그래픽카드 드라이버가 제대로 깔려있지 않거나 깨져서다.

 

해결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다시 깔면 배경화면이나 색상수를 바꿀 수 있다.

1. 그래픽카드 드라이버 CD를 넣는다. 드라이버 CD는 PC를 샀을 때 같이 온다.

없다면 인터넷이나 PC통신 자료실에서 내려받는다.
2. 제어판 → 디스플레이 창을 띄워 '설정' 항목을 고른 다음 '고급' 버튼을

누른다. '어댑터' 항목에서 '변경' 버튼을 누른다.
3. '다음' 버튼을 누른 다음 '기존의 드라이버보다 나은 드라이버 검색'을

고르고 '다음' 버튼을 누른다.
4. '검색할 위치 지정'을 체크하고 '찾아보기' 버튼을 누른다. '폴더 찾아보기'

창이 뜨면 드라이버가 담긴 CD를 고르고 '확인' 버튼을 눌러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깐다.

 

42.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접속하면 페이지 오류나요

원인
내 PC의 보안 설정이 '아주 높음'이기 때문이다.

 

해결
보안 설정을 '아주 높음'에서 '보통'으로 낮춘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워 '보안' 항목을 연다.
2. '이 영역에 적용할 보안 수준'을 '보통'으로 맞춘 다음 '확인' 버튼을

눌러 닫는다.

 

43. 인터넷에서 채팅 창이 나오지 않아요

원인
대부분 인터넷 채팅 사이트는 자바 스크립트를 써서 채팅 창을 띄운다.

윈도우즈에 자바 스크립트 명령을 알아채는 자바를 깔아야 한다.

 

해결
자바를 깔려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업데이트 사이트에서 내려받아야 한다.

업데이트 항목에서 자바를 골라 윈도우즈를 업데이트한다.

1.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고 도구 → windows update를 눌러 마이크로

소프트 업데이트 사이트에 접속한다.
2. 왼쪽 '제품 업데이트'를 누른 다음, 권장 업데이트에서 microsoft virtual

machine를 체크한다.
3. 다운로드 버튼을 눌러 내려받은 다음 다시 부팅한다.

 

44. 인터넷 익스플로러 5.5 버전에서 한글이 깨져 보여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우리 말을 알아채게 하는 유니코드를 써서 한글을

표시한다. 유니코드를 쓸 때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해결
UTF(universal transformation format)란 16비트 유니코드 문자들을

7비트나 8비트 문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동작하지 않게 막아

유니코드 문자인 한글이 제대로 뜨게하자.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워 '고급' 항목을 연다.
2. 'URL을 항상 UTF-8으로 보냄'에 체크한 표시를 빼면 한글이 제대로 보인다.

 

45. 윈도우즈 2000에서 응용프로그램이 깔리지 않고

관리자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나요

원인
몇몇 응용프로그램은 관리자(administrator)로 로그인해서 깔아야 제대로 돌아간다.

 

해결
윈도우즈 2000에서 이용자 계정으로 로그인하지말고 administrator로 로그인하면

깔리지 않던 응용프로그램을 깔 수 있다.

 

46. 부팅할때 이상한 오류메시지가 많이 나옵니다

원인
윈도우즈가 시작하고나서 뜨는 오류 메시지는 시작프로그램 가운데

깨지거나 망가진 응용프로그램 때문이다.

 

해결
시작프로그램에 등록한 프로그램을 없애 오류메시지가 나오지 않게 한다.

1. '시작' 버튼을 누르고 '실행'을 띄운 다음 msconfig를 넣고 엔터를 친다.
2. 시스템 구성 유틸리티가 뜨면 '시작프로그램' 항목에서 레지스트리

검사, TaskMonitor, SystemTray, LoadPowerProfile만 놔두고

나머지는 체크를 뺀다.

 

47.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주소 창이 없어졌습니다

원인
키를 잘못 넣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설정 옵션이 전체화면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고 F11 키를 누르면 다시 주소 창이 뜬다.

 

48.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면 '프록시 서버를 찾는 중...'

메시지가 계속 나요

원인
인터넷 환경설정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프록시 서버를 체크하게 했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설정된 프록시을 뺀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운다.
2. '연결' 항목에서 'LAN 설정' 버튼을 누른 다음 '자동으로 설정 검색' 체크를

빼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다시 띄우면 된다.

 

49. 다이얼 패드를 쓸 때 상대방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대요

원인
마이크를 설정하지 않았거나 사운드카드가 양방향 사운드를 내지 못해

생기는 문제다.

 

해결
양방향 사운드란 녹음과 동시에 스피커로 재생한다는 뜻이다.

최근에 나온 사운드카드는 기본적으로 양방향 사운드를 낼 수 있지만 ISA 슬롯에

꽂는 구형 사운드카드는 낼 수 없기 때문에 양방향 사운드를 내는 사운드카드를

새로 사야한다.

1. 작업 표시줄 오른쪽 스피커 아이콘인 '볼륨 조절'을 두 번 눌러 띄운 다음

옵션 메뉴에서 등록정보를 띄운다.
2. 녹음을 체크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 다음 마이크 볼륨을 가운데로 맞춘다.

상대방이 소리가 작게 들린다면 마이크 볼륨을 조금씩 키운다.

 

50. 응용프로그램을 깔 때 '디스크 공간이 부족' 하대요

원인
하드디스크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고다.

 

해결
필요없는 mp3나 동영상 파일, 응용프로그램을 지운다.

c:windowstemp 폴더에 담은 임시파일도 모두 지워 용량을 확보한다.

 

51. 윈도우즈 98 제품번호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알 수 없을까요?

원인
윈도우즈 98 제품번호는 설치 CD와 따로 두기 때문에 종종 잃어버리곤 한다.

 

해결
윈도우즈 레지스트리에 몰래 저장된 윈도우즈 98 제품번호를 알아내자.

1. 시작 버튼을 눌러 '실행'을 띄운 뒤, regedit를 넣어 레지스트리 편집기를 연다.
2. HKEY_LOCAL_MACHINESOFTWAREMicrosoftWindowsCurrentVersion를

눌러 Productid를 고르면 윈도우즈 98 제품번호를 알 수 있다.

 

52. 윈도우즈 바탕화면에 웹사이트를 띄우고 싶습니다

원인
윈도우즈 바탕화면에 웹사이트를 띄우려면 바탕화면을 액티브데스크탑으로

바꿔야 한다.

 

해결
바탕화면을 액티브데스크탑으로 바꾸어 바탕화면에 웹사이트를 띄워보자.

1. 내 컴퓨터 → 제어판 → 디스플레이를 열어서 '웹' 항목을 고른다.
2. '액티브 데스크탑을 웹 페이지 형식으로 보기'를 체크하고 '새로 만들기'

버튼을 누른다.
3. '위치' 칸에, 띄우려는 웹사이트 주소를 넣는다.
4. '확인' 버튼을 누르면 바탕화면에 웹사이트가 뜬다.

 

53. 윈도우즈가 시작하거나 끝낼 때 나는 소리를 없애고 싶습니다

원인
윈도우즈는 기본으로 시작하거나 종료할 때 소리가 난다.

 

해결
내 컴퓨터 → 제어판 → 사운드를 두 번 눌러 '구성표'에서 '소리없음'을 골라

'확인' 버튼을 누르면 윈도우즈가 시작하거나 종료할 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

 

54. 마우스를 누르면 윈도우즈가 소리를 냈는데 지금은 나지 않아요

원인
윈도우즈 소리 설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결
윈도우즈 소리를 넣어보자.

1. 내 컴퓨터 → 제어판 → 사운드를 두 번 눌러 '상황'에서 '탐색을 시작할 때'를

고르고 '찾아보기' 버튼을 누른다.
2. start.wav 파일을 고른 뒤, '확인' 버튼을 눌러 마치면 마우스를 누를 때

윈도우즈가 소리를 낸다.

 

55. 바탕화면 글꼴이 바뀌었습니다

원인
윈도우즈 바탕화면 글꼴 설정에 문제가 생겼다.

 

해결
바뀐 글꼴을 원래대로 찾으려면 바탕화면을 윈도우즈 기본값으로 되돌린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디스플레이를 띄워 '화면 배색'을 고른다
2. 구성표에서 'windows 표준'을 누르고 '확인' 버튼을 누르면 글꼴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56. 아이콘 색이 흐릿하고 바탕화면 그림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원인
윈도우즈 컬러가 256색깔보다 낮으면 아이콘 색이 흐리고 그림색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해결
윈도우즈 컬러를 16비트로 바꾸어 제 바탕화면 색깔을 되찾자.

1. 내 컴퓨터 → 제어판 → 디스플레이를 띄워 '설정' 항목을 연다.
2. 하이컬러(16bit)를 고른 다음 '확인' 버튼을 누르면 윈도우즈가

제 색깔을 찾는다.

 

57. '디아블로'를 띄우고 베틀넷에 접속하면 버전이 다르다면서 튕겨요

원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배틀넷에 접속되지 않는다.

 

해결
'V3'나 '바이로봇'과 같은 백신 프로그램으로 하드디스크 모두 검사해서

바이러스를 잡는다.

 

58. '한게임'을 지우고 다시 깔려는데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인
'한게임'은 제어판의 프로그램 추가/제거에서 지울 수 없다.

한게임 제거 프로그램으로 삭제해야 한다.

 

해결
한게임 제거 프로그램으로 한게임을 지운다.

1. 한게임(hangame.naver.com)에 접속해서 도움방 메뉴를 띄워 '시스템오류'

항목을 고른 다음 '한게임 제거하기'를 누르면 DelHangame11.exe를 내려받는다.
2. 이 파일을 두 번 누르면 한게임을 지운 다음 '컴퓨터에서 한게임을 제거하였

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확인' 버튼을 눌러 다시 한게임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한게임을 깐다.

 

59. '포트리스'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요

원인
포트리스 게임에서 소리설정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해결
포트리스를 띄우고 '게임서버'를 고른 다음 로그인을 한다.
아래 메뉴에서 option을 골라 nusic을 체크하고 exit 버튼을 눌러 마치면

포트리스에서 소리가 난다.

 

60. 윈도우즈 2000이 계속 부팅해서 PC를 쓸 수 없어요

원인
윈도우즈 2000은 부팅을 실패하면 스스로 다시 부팅한다.

 

해결
윈도우즈 2000 시작 화면이 나타나기 전에 F8 키를 눌러 '안전모드,

마지막으로 성공한 구성'을 골라 윈도우즈를 시작한 다음 제어판

→ 시스템을 띄워 '시작 및 복구'에서 '자동으로 다시 부팅'에 체크되어

있는 것을 뺀다. 이렇게 하면 계속해서 다시 부팅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61. 한글97에서 미리보기나 인쇄가 안돼요

원인
프린터 설정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
프린터 모양을 띤 '인쇄' 버튼을 눌러 '인쇄 설정' 창을 띄우고 '수정' 버튼을

눌러 PC에 연결한 프린터를 골라 ?글이 프린터를 알아차리게 한다.

 

62. 어떤 홈페이지 접속하면 '404오류' 메시지가 납니다

원인
인터넷에서 파일을 내려받을 때 '500이나 404 에러' 메시지가 뜨는 것은

홈페이지를 띄우는 웹서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해결
일반 이용자가 쓰는 PC가 에러나고 먹통되듯 서버 컴퓨터도 가끔

말썽을 부릴 때가 있다. 이용자는 관리자가 서버 컴퓨터를 손볼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대형 웹사이트는 '500이나 404 에러'

메시지를 내면 바로 고치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63. 인터넷 익스플로러 도구 바가 커졌어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 도구 바 설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 도구 바 설정을 원래대로 돌려놓자.

1. 인터넷 익스플로러 띄워 메뉴에서 보기 → 도구모음 → 사용자 정의를 연다.
2. 텍스트 옵션에서 '도구이름표시 안함'과, 아이콘 옵션에서 '작은아이콘으로

설정'을 골라 '닫기' 버튼을 누르면 인터넷 익스플로러 도구 바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64. 윈도우즈 Me를 쓰거나 종료할 때 '윈도우즈 보호 오류'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윈도우즈 Me는 '복원 기능' 모드가 있다. 이것을 켜놓으면 종종 오류 메시지를 낸다.

 

해결
윈도우즈 Me의 '복원 기능'을 쓰지 않게 손본다. 윈도우즈 Me를 쓰던 중이거나

종료할 때 '윈도우즈 보호 오류' 메시지를 내면 내 컴퓨터 → 제어판 → 시스템

→ 장치관리자를 띄워 '성능' 항목을 연다. 파일시스템에서 문제해결을 골라 '복원

기능 사용하지 않음'에 체크한다. 다음부터는 윈도우즈를 끌 때 '보호 오류'

메시지가 뜨지 않는다.

 

65.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면 '오프라인' 메시지가 나요

원인
인터넷 연결을 제대로 해도 '오프라인으로 작업' 메시지가 뜨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망가진 것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최신 버전인 5.5로 업데이트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업데이트 사이트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업데이트할 수 있다.

 

66. 한글97을 깔 때 '메모리부족'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하드용량이 부족하거나 너무 많은 응용프로그램을 띄워 놓아서

메모리를 낭비하기 때문이다.

 

해결
휴지통을 비우거나 임시 파일과 임시 인터넷 파일을 모두 지운다.

1. 휴지통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휴지통 비우기'를

골라 휴지통에 담아놓은 파일을 모두 지운다.
2.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우고 '일반' 항목을

고른 뒤, 임시 인터넷 파일 항목에 있는 '파일 삭제' 버튼을 눌러

임시 인터넷 파일을 지운다.
3. c:windowstemp 폴더에 담긴 파일을 모두 지운다.
4. 윈도우즈에 띄운 쓰지 않는 응용프로그램을 모두 종료시킨

다음 한글97을 깐다.

 

67. 부팅 할 때 'cabinet.dll 오류' 메시지가 납니다

원인
cabinet.dll 파일이 깨졌거나 망가졌을 때다.

 

해결
다른 PC c:windowssystem 폴더에 담긴 cabinet.dll 파일을 복사해서

오류 메시지가 뜨는 PC의 c:windowssystem 폴더에 덮어쓰고 다시

부팅하면 오류 메시지가 나지 않는다.

 

68. 한국통신 ADSL을 설치하고 나서 부팅이 오래 걸립니다

원인
랜카드를 꽂으면 부팅속도가 느려진다. 윈도우즈는 랜카드를 통해 서버

컴퓨터에서 IP 주소를 할당받는다. 이것 때문에 부팅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해결
IP 주소를 적어 넣으면 쓸데없이 IP 주소를 받으려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1. 내 컴퓨터 → 제어판 → 네트워크 환경을 띄우고 tcp/ip를 고른 다음

'등록정보'를 연다.
2. 'IP 주소 사용'을 고르고 IP 주소에 192.168.0.1을 넣은 다음 '확인'

버튼을 눌러 마치면 부팅 속도가 랜카드 때문에 느려지지 않는다.

 

69. 하이텔 2000 프로그램을 띄우면 먹통돼요

원인
'하이텔 2000'은 메모리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제원이 낮은 PC에서

더욱 에러가 잦다.

 

해결
윈도우즈 컬러가 32비트라면 16비트 컬러로 낮추고, 내 컴퓨터

→ 제어판 → 소리를 띄워 '소리 없음'을 고른 뒤 '확인' 버튼을 누르는 등

윈도우즈 자원을 아껴서 쓴다.

 

70.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우면 'urlmon.dll 파일 오류'가 납니다

원인
한글 인터넷 익스플로러 5를 깔고 네트워크에 물린 PC 이름이 한글일 때

urlmon.dll 에러를 내면서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는다.

 

해결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사이트 '파일 다운로드'에서 고친 urlmon.dll 파일을

내려받아 깐다. 내려받은 파일 이름은 3721.exe이다. '파일 다운로드' 인터넷 주소는

www.microsoft.com/korea/support/download/default.htm다.

 

71. '버디버디'에서 글자 입력이 안됩니다

원인
윈도우즈 시스템 폴더에 있던 richied32.dll 파일이 한국어에서 영문으로

바뀌면 버디버디에서 글자 입력이 되지 않는다.

 

해결
버디버디 홈페이지에서 한글 riched32.dll 파일을 내려받은 다음

windowssystem 폴더에 덮어쓴다. '윈도우즈 사용중' 메시지가 뜨면 다시

부팅한 뒤 붙여넣는다. 한글 riched32.dll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는 홈페이지

주소는 buddybuddy.co.kr/center/down/download.asp다.

 

72. 윈도우즈에서 ATL.DLL 에러가 납니다

원인
압축프로그램인 '알집'에서 에러가 난 것이다.

 

해결
알집을 지우고 다시 깔아야 한다. 내 컴퓨터 →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삭제를 띄워 '알집'을 고른 다음 '제거' 버튼을 눌러 삭제하고 알집을

다시 깐다.

 

73. 어떤 홈페이지에서는 'shdocvw.dll 오류'가 뜹니다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파일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해결
shdocvw.dll 파일을 되살리면 오류가 나지 않는다.

시작 버튼을 눌러 '실행'을 고른 뒤 sfc를 넣고 엔터를 친다. '설치 디스크에서

한 파일의 압축해제'를 고르고 shdocvw.dll을 쓴 다음 '시작' 버튼을 눌러

복구 한다. 이때 윈도우즈 98 설치 CD가 필요하다.

 

74. CD를 넣으면 바로 뜨지 않습니다

원인

윈도우즈 98은 CD를 넣으면 CD가 스스로 수행 창을 띄운다.

하지만 CD를 굽는 프로그램은 윈도우즈가 스스로 수행 창을 띄우면 CD를

굽다가 에러를 낼 수 있으므로 윈도우즈에서 스스로 뜨는 수행 창을 막는다.

 

해결
스스로 수행 창을 띄우려면 내 컴퓨터 → 제어판 → 시스템 → 장치관리자

에서 CD롬 드라이브를 연다. '자동삽입통지'를 체크해서 CD를 넣으면 스스로

수행 창을 띄우게 할 수 있다.

 

75. 스타크래프트가 뜨지 않고 PC가 느려졌어요

원인
CIH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해결
V3나 바이로봇으로 바이러스 검사를 한다. CIH 바이러스를 찾아서

치료한 파일은 깨졌으므로 스타크래프트를 다시 깔아야 한다.

 

76. 윈엠프로 음악을 들으면 소리가 울리거나 잡음이 납니다

원인
사운드카드 드라이버가 깨졌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이나 PC통신, 사운드카드 제조업체 홈페이지에서 사운드카드

최신 드라이버를 내려받아 깐다.
내 컴퓨터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등록정보'를 고른 다음

'장치관리자' 항목에서 '사운드, 비디오 및 게임 컨트롤러'를 두 번 누른다.

사운드카드 이름이 뜨면 '등록정보' 버튼을 누르고 '드라이버' 항목에서

'드라이버 업데이트' 버튼을 눌러 사운드카드 드라이버를 업데이트한다.

 

77. 인터넷에서 음악 파일을 열면 심한 잡음이 나요

원인
임시폴더에 여러 사이트의 동일한 음악 쿠키(Cookie)가 많아 잡음이 생긴다.

 

해결
쿠키 파일을 지운다. 내 컴퓨터 → 제어판 → 인터넷 옵션을 띄운 다음,

'임시 인터넷 파일'에서 '파일 삭제' 버튼을 눌러 임시폴더에 담긴 쿠키를

모두 지운다.

 

78. 컴퓨터가 시작될 때 사각형 박스가 화면 중앙에 나오면서

'out of frequency' 메시지가 뜹니다

원인
윈도우즈에서 그래픽카드나 모니터로 보내는 해상도와 주사율을

모니터가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결
안전모드로 부팅한 다음 해상도를 낮추어 해상도를 바꾼다.

1. 부팅할 때 F8 키를 눌러 '안전모드'를 고른 뒤 윈도우즈를 안전모드로

시작한다. 내 컴퓨터 → 제어판 → 디스플레이를 띄워 '설정'을 연다.
2. 해상도는 640×480화소, 주사율은 60Hz를 고르고 '확인' 버튼을 누른 다음

다시 부팅한다.
3. 윈도우즈를 부팅하면 화면이 제대로 나온다. 다시 디스플레이를 띄워

1,024×768화소나 높은 해상도를 고른다.

주사율은 75, 82Hz를 골라야 화면떨림이 적다.

 

79. 다른 소리는 나오는데 마이크만 나오지 않습니다

원인
마이크 볼륨이 음소거(mute)되었거나 가장 낮은 볼륨으로 맞추어졌을 때다

 

해결
마이크 볼륨에서 음소거를 없애거나 소리를 키운다.

1. 작업표시줄 왼쪽 스피커 모양인 '볼륨 조절'을 두 번 눌러 띄우고 '옵션'

메뉴에서 등록정보를 눌러 '녹음'을 고른다.
2. '다음의 볼륨 조절 보기'에서 '마이크'를 체크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

다음 음소거가 되었는지, 소리는 작게 되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80. 영화사이트에서 영화를 보려고 하면 로딩 중이라면서

오랫동안 기다려도 화면이 나오지 않아요

원인
영화사이트에 많은 이들이 몰려 서버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렸거나

인터넷 전용선의 속도가 떨어지거나 끊김이 잦아서다

 

해결
영화사이트에 다른 이들이 몰리는 시간대는 피한다.

인터넷 전용선이 ADSL이나 케이블 모뎀일 때 인터넷에서 파일을 내려받는

속도가 1Mbps가 나오지 않으면 회선 제공업체에 문의해서 점검을 받는다.

 

81. 홈페이지 만들 때 쓴 색깔과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보이는 색깔이 달라요

원인
인터넷 익스플로러 환경설정에서 '홈페이지 색깔을 무시'하는

값으로 골랐기 때문이다.

 

해결
인터넷 익스플로러 환경설정에서 '무시'하는 모든 값을 없앤다.

1.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띄워 '도구' 메뉴를 눌러 '인터넷 옵션'을 고른

다음 '일반' 항목에서 '사용자 서식'을 띄운다.
2. 웹 페이지에 지정된 색 무시, 글꼴 스타일 무시, 글꼴 크기 무시 항목에

체크한 표시를 모두 없애고 '사용자

스타일시트' 항목도 체크 표시를 뺀다

 

 

 

 

'위인.교육.기타 > 컴맹탈출' 카테고리의 다른 글

PC 를 대청소로 해결 합시다!  (0) 2020.06.12
스마트폰 10가지활용하기  (0) 2019.04.11
컴 끝내주게잘하기  (0) 2019.04.11
스마트폰 사용방법  (0) 2019.03.11
[스크랩] 스마트폰 사용방법  (0) 2019.01.23

'북 공기부양정 킬러' 국산 유도로켓 '비궁', 미 수출길 성큼

글자크기 글자크기크게 글자크기작게

0 0

입력 : 2020.06.7. 10:43

미 국방부 주관 시험평가에 10발 모두 명중, 성공적 통과

'북 공기부양정 킬러'로 백령도 등 서북도서 해병대에 배치중인 국산 유도로켓 '비궁'/방위사업청


‘북 공기부양정 킬러’로 알려진 국산 유도로켓(2.75인치) ‘비궁’이 국내 개발 유도무기로는 처음으로 미국이 주관한 시험평가에서 성능을 공식 인정받았다. 이는 국산 유도무기로는 처음으로 미국 방산시장 수출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미국 방산시장은 유럽·중동 등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위사업청은 7일 “유도로켓 ‘비궁’이 국내 개발 유도무기 최초로 미국 국방부가 주관한 해외비교시험(FCT·Foreign Comparative Testing)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고 밝혔다.
FCT는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동맹국의 우수 장비 및 기술을 시험·평가하는 미 국방부의 시험평가 프로그램을 말한다. 미군 무기체계 조달 시장에 진출하려면 FCT를 통과해야 한다. 유럽 등 방산 선진국들의 무기체계도 FCT에 다수 참여하고 있다.

국산 유도로켓 '비궁' 발사 장면. 최대 사거리 8km로, 이동식 발사차량에 40발이 탑재된다./방위사업청


비궁의 FCT 비행시험은 작년 10월 국방과학연구소 종합시험장에서 미 국방부 평가단의 참관 아래 이뤄졌다. 당시 시험에서 비궁은 미국 측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한 상태에서 1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군 소식통은 “당시 미국측이 비궁의 우수성을 격찬했다”며 “미군이 비궁을 도입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비궁은 로켓에 적외선 유도장치를 달아 미사일처럼 정확도가 높은 정밀유도 무기로, 최대 사거리는 8㎞다. 이동식 발사차량에 40발이 탑재돼 있다. 북 특수부대가 공기부양정에 탑승해 침투하는 것에 대비해 백령도 등 서북 도서에 배치중이다. 기존의 노후화한 해안포를 대체하고 있으며, 2024년까지 단계적으로 추가 배치될 예정이다.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은 “비궁은 체계개발 착수 이전 핵심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 LIG넥스원 등이 유기적으로 공조해 개발한 무기체계”라며 “이번 FCT 시험 성공은 국산 무기체계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성과이며 미국을 포함한 세계시장에 비궁의 수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과자 100명, 군미필 47명 21대 국회 입성한다

오지마을매니저 추천 0 조회 3 20.05.30 09:20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wb2213b/3dvU/2163?svc=cafeapiURL복사

글 본문내용

21대 총선 당선자 분석
21대 300명 중 전과자·군미필 몇명?

∇ 의원 3명 중 1명 전과…총 100명
∇ 전과 3범 이상 13명 전원 민주당
∇ 집시법 > 폭력 > 음주운전 순
∇ 민주화 운동 등 여파 민주당 다수
∇ 5명 중 1명 꼴 군미필…총 47명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에서 당선된 300명이 2020년 5월 30일부터 국회 활동을 시작합니다.

지역구 의원 253명과 비례대표 47명, 총 300명 21대 의원은 2024년 5월 29일까지 4년 간

대한민국 입법 활동을 책임지게 됩니다.

글로벌 경기가 악화되던 와중에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까지 터지면서, 국민들 경제 사정이 이만저만 아닌데요. 상황이 이런 만큼 국회에 입성할 당선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국민이 한 표 한 표로 손수 뽑은 국회의원들입니다.


전과 기록은 후보자의 준법 정신을 가늠해보는 데 매우 유용한 지표입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리인으로써 법을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병역 의무 이행 또한 헌법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해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지표로 매우 중요합니다.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은 법을 잘 지켜왔을까요. 뉴스래빗 팩트체크와 함께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의 전과·병역 기록을 함께 살펴보시죠.

3명 중 1명은 전과자…총 100명
3범 이상 13명 전원 민주당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중 전과기록이 있는 예비 국회의원은 총 100명입니다.

3명 중 1명은 전과자인 셈이죠.


이중 전과자가 가장 많은 당은 민주당으로 총 67명이 전과 기록을 가집니다.

민주당에 이어 통합당에서는 20명, 시민당 6명, 정의당 3명, 미래한국당 2명, 열린민주당 1명,

무소속 1명 순으로 전과자가 많았습니다.

민주당과 시민당은 합당했기 때문에 전과기록 보유자가 민주당은

총 73명이 됩니다. 5월 29일 합당 예정인 통합당과 한국당을 합치면 총 22명입니다.


건수별로 살펴보면, 신정훈 민주당(나주시화순군) 당선자가 전과 5범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신 당선자는 공무집행방해, 농지법위반, 음주운전 등으로 1986년부터 2009년까지 5건의 전과를

기록했습니다.

이밖에 전과기록 3건과 4건을 가진 당선자는 각각 6명, 2건 28명, 1건 59명 등입니다.

전과 3범 이상은 모두 민주당 소속입니다.

 

 

집시법 > 폭력 > 음주운전 순
강력범죄자 7명 모두 민주당


당선자들은 어떤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렀을까요?


당선자들이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범죄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집시법)으로

총 41명이 이 전과 기록을 가졌습니다. 폭력행위 등 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 26명,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이 23명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강도, 방화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후보는 총 7명으로 모두 민주당 소속입니다.

이학영 민주당(군포시) 당선자는 강도상해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살았습니다.

민주당 소속의 김한정(남양주시을), 박영순(대전 대덕구), 이원욱(화성시을), 이원택(김제시

부안군), 정청래(마포구을), 진성준(강서구을) 등 당선자 6명은 방화 관련 범죄 기록을 가졌습니다.

이학영 당선자를 제외하고 유독 민주당에 방화 관련 전과자가 많은 이유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시국사범으로 처벌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특별복권됐습니다.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을 위반해 폭행 전과가 있는 당선자는 총 26명인데요.

이중 민주당이 22명, 통합당 2명, 정의당 1명, 시민당 1명으로 민주당이 가장 많았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는 집시법·방화·폭행 등 전과 기록이 있는 민주당 당선자들에 대해

"개별 당선자들에 대한 범죄 혐의 등은 언론을 통해 지적하면 환기하는 정도"라며 "

이러한 범죄들은 시민운동, 학생 운동 등을 통해 처벌 받는 게 대부분이지만,

범죄 경력 조회에도 상세내역이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확인해서

인지하고 있는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경범죄로 취급되었으나 최근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는 음주운전 위반자도

23명에 달했는데요. 이중 이용선 민주당(양천구을), 김철민 민주당(안산시상록구을),

허은아 한국당(비례대표) 등 3명은 음주운전 2회 위반으로 드러났습니다.

음주운전자는 총 23명이었는데, 이중 민주당이 12명, 통합당 10명, 한국당 1명 순입니다.

5명 중 1명 군 미필…총 47명
수형 > 질병 사유


당선자들의 국방의 의무 이행은 어떨까요. 헌법 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방의 의무를 지고, 누구든지 병역의무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군 복무 여부는 국민의 의무를 잘 지켰는지 살펴볼 수 있는 척도 중 하나입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병적 기록이 없는 태구민 통합당(강남구갑) 당선자와 같은 이유로 병역 면제자인

지성호 한국당(비례대표)을 제외하면 군 복무 대상 남성 당선자는 총 241명입니다.

이중 19.5%에 해당하는 47명이 군복무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남성 당선자 5명 중 1명은 군 미필자인 것입니다.

민주당이 33명으로 군 미필자가 가장 많았고, 통합당 10명, 한국당 2명, 정의당 1명,

시민당 1명 순입니다.

군 복무를 마치지 못한 이유로 감옥살이인 '수형'이 28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중 민주당은 총 23명으로 가장 많은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밖에 군 미필 사유는 질병 16명,

무종 1명, 2회귀가 1명입니다.

추경호 통합당(달성군) 당선자는 폐결핵으로 재검대상을 뜻하는 무종 판정을 받았다가

소집면제됐습니다. 허종식 민주당(동구미추홀구갑) 당선자도 건강상 문제로 2회 귀가조치 후

소집면제됐습니다.

3명 중 1명 전과자
5명 중 1명 군 미필자

 

 

뉴스래빗이 당선자 300명의 전과 기록과 병역 기록을 살펴보니, 전과자 수는 3명 중 1명이고

군 미필자는 5명 중 1명이었습니다.

예비 후보자 분석 당시에도 전과자 비중은 전체 후보자 중 35.7%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후보자 명단과 비교해 전과자 비중은 5%뿐 줄지 않은 셈입니다. 국민을 대표해 법을 만들어야할

국회의원들이 그동안 법을 지키는데 소홀했다니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군 미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비 후보자 명단을 분석할 때는 군 미필자는 17.3%였습니다.

당선자 중 군 미필자 비중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게

될 국회의원 중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이 다소 많다는 점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입니다.

법을 지키는 데 소홀했던 국회의원이 국민이 지켜야할 법을 잘 만들 수 있을까요.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국회의원이 국가 방위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까요.

뉴스래빗은 출범하는 21대 국회가 솔선수범해 준법 정신을 발휘하고 국가 안보를 튼튼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합니다!.!


책임=김민성, 연구=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greaterfool@hankyung.com
뉴스래빗 페이스북 facebook.com/newslabit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lab@hankyung.com

 

더 많은 정보 공유는 ~ ♡내린천 오지마을 클릭 하세요 ..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

양인자 추천 0 조회 16 20.05.30 23:52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kfb67/pQy/35804?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

이글을 읽고 넘 감명받아서 옮겨 봤습니다
정치적인 어떤 의도 같은 것이 아니라...정치인들 글구 현대통령 모두 비난할 것은 하더라도
배울 점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
때는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떄였다. 월남전참전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국가가 있었으니 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 (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이 보였다

 

다음검색

출처: 제일멋진 인생둥지 원문보기 글쓴이: 양인동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