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가난다 자서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요가난다님의 스승께서 마하사마디(대열반, 죽음)에 들고 난 후 예수님이나, 붓다, 달마대사처럼 다시 부활하여 영계의 실상을 인류에게 전파하는 내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대우주는 물질우주, 영계, 근원계(또는 인과율계)라는 3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불경에서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했습니다. 또한 소우주인 우리의 신체도 동일하게 육체, 영체, 근원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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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19일, 오후 세 시경 봄베이 호텔의 내 방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아름다운 빛에 의하여 명상 상태로부터 깨어나게 되었다. 놀란 내 눈앞에서 그 방 전체가 이상한 세계로 변하더니 햇빛도 천상의 광휘로 바뀌었다.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피와 살을 대하게 된 나는 환희의 파도 속으로 잠겨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아들아!"
천사 같은 미소를 얼굴에 간직한 채, 스승께서는 부드럽게 나를 부르셨다.
생전 처음으로, 그의 발 밑에 엎드려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나는 그대로 스승을 끌어안았다. 순간의 순간! 지금 이처럼 무한히 쏟아지는 축복에 비하면 지난 몇 달간의 고뇌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구루지, 어찌하여 저를 떠나셨습니까?"
나는 너무도 커다란 기쁨에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왜 저를 쿰브하 멜라에 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 스승님 곁을 떠났던 데 대한 자책감이 너무도 쓰라립니다."
"순례지를 보려던 너의 행복한 기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바바지 님을 만났던 장소가 아니었더냐. 나는 다만 잠시 동안 너를 떠난 데 불과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스승님, 지금도 바로 그 잔인한 백사장아래 제가 매장했던 그 육신을 갖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 나의 아들아. 나는 그것과 같다. 이것은 피와 살이 있는 육신이다. 나는 그것을 에테르로 보지만 너의 눈에는 분명히 물질로 보일 것이다. 나는 네가 미망의 세계에서 푸리에 있는 미망의 백사장에 묻어둔 우주적 미망의 육신과 똑같은 것을 우주의 원자들로부터 창조해 낸 것이다. 나는 진실로 부활한 것이다. 지상이 아닌 영계에서 말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지상의 인류보다 훨씬 더 나의 이념과 이상을 훌륭하게 만족시켜줄 수 있다. 너와, 네가 사랑하는 높은 영혼들도 언젠가 거기서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 구루이시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스승께서는 잠시 유쾌한 미소를 지으셨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붙잡고 있는 그 팔을 좀 늦춰 줄 수 없겠느냐?"

나는 그때까지도 문어발처럼 스승을 꽉 껴안고 있었다. 과거에 스승의 육체가 가졌던 특징과 꼭 같은 가냘프고 향긋한 내음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축복받은 시간을 회상할 때마다 내 팔과 손바닥의 주위에는, 그의 신성한 살을 만졌을 당시의 떨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선지자들이 인간을 도와서 업을 소진시켜 주도록 이 땅에 보내졌듯이, 나 역시 구원자로서 영계에서 일하도록 신에 의하여 지시를 받은 것이다." 스리 유크테스와르는 계속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히라냘로카Hiranyaioka, 즉 '깨달은 영계'라고 불린다. 나는 그 곳에서 진보된 존재들을 도와서 그들의 영적인 업이 소멸되고 따라서 영계의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준다. 히라냘로카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볼 때 고도의 진보를 이룩하고 있다. 그들 모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탄생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물리적 육체를 죽음에 내 맡길 수 있는 힘을 명상을 통하여 얻고 있다. 그 누구도 이 지상에서 사비칼파 사마디의 단계를 넘어서 니르비칼파 사마디(=궁극적인 삼매=멸진정)에 든 상태에서 죽지 않는다면 히라냘로카에 들어갈 수 없다.

히라냘로카에 거주하는 자들은 이미 일반적인 영계의 차원을 통과한 다음인데, 그 차원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존재들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지나온 영계에서 스스로 행한 온갖 행위들과 관련된 수많은 업의 씨들을 없애 버리게 된다. 진보된 수행자들만이 영계에서 그와 같은 상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서 이 지원자들은 영계에서의 모든 업의 자취들로부터 자신들의 영혼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영계의 태양 혹은 천상이라 할 히라냘로카에 새로운 영적인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있다. 히라냘로카에는 또한 보다 높은 근원적 세계로부터 오는 거의 완전한 존재들도 있다."

이제 나의 마음은 구루의 마음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림 같은 이런 설명도 일부는 말로, 일부는 생각의 전이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생각이 든 알약들을 즉석에서 받아먹을 수 있었다. 스승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너도 경전에서 읽었을 것이다. 신께서 인간의 영혼을 계속해서 세 종류의 몸, 사념상의 인과율적 신체causal body, 인간의 정신적, 감정적 본성이 자리한 민감한 영적인 신체astral body, 거친 물리적 신체physical body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을 말이다. 지구상의 인간은 육체적 감각을 갖추고 있으며 영적인 인간은 의식과 감정 그리고 생명자(生命子)로 이루어진 신체를 사용한다. 인과율적 인체를 가진 존재들은 기쁨 넘치는 사념의 세계에 남아있게 된다. 내가 하는 역할은 인과율적 세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영계의 존재들에 관련된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님, 영계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부탁에 따라 팔을 약간 늦추기는 했지만 아직도 팔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보배중의 보배인 나의 구루가 죽음을 비웃으시며 내게 접근하신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곳에는 영적인 존재들로 충만한 영계가 여럿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빛의 덩어리인 영계의 비행선을 타고 이쪽 영계에서 저쪽 영계로 전기나 방사선에너지보다도 빠르게 여행을 다닌다. 여러 가지 미묘한 빛과 색으로 이루어진 영계의 우주는 물리적 우주보다 수백 배나 크다. 모든 물리적 창조물을 합해도 그것은 영계라는 빛나는 커다란 풍선 밑에 매달린 딱딱한 작은 바구니와 같다. 물리적 세계의 많은 태양들과 별들이 우주공간을 이리저리 움직이듯이 영계에도 역시 무수한 태양과 별들의 체계가 있다. 그곳의 항성들은 물리적 세계의 해와 달보다 훨씬 아름다운 해와 달을 가지고 있다. 영계의 해와 달들은 북극광과 비슷한데 영계의 햇빛은 부드러운 달빛에 비하면 더 눈부시다. 또 영계의 낮과 밤은 지구에서보다 더 길다.

영계는 무한히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결하며 정돈된 곳이지. 그곳에는 죽은 별이나 황폐한 땅도 없으며, 지구상의 오점들인 잡초나 박테리아나 해충이나 뱀들도 없다. 영계는 지구의 변덕스러운 기후나 계절과 달리 영원한 봄으로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때로 하얗게 빛나는 눈이 오거나 여러 가지 빛깔의 비가 내리기도 한다. 또 영계에는 오팔색 호수와 빛나는 바다, 무지개빛 강들이 많다.

보다 미묘한 영계의 천상인 히라냘로카를 제외한 일반적인 영계에는 비교적 지구에서 온 수백만의 영계인들이 살고 있으며, 또한 수천의 요정, 인어, 물고기, 동물, 요마, 귀신, 영령들도 각각 업보에 따른 자격에 맞춰 서로 다른 영계에 살고 있다. 여러 가지 둥근 집이나 진동하는 지역이 선과 영과 악령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 선한 영들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지만 악한 영들은 제한된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땅위에서 살며 벌레는 땅속에서, 물고기는 물 속에서, 새는 하늘에서 산다. 이렇게 여러 등급의 영계존재들이 적당한 진동지역에 배당되는 것이다.

다른 세계로부터 추방된 타락한 검은 천사들 간에는 생명자 폭탄이나 정신적인 만트라 진동광선을 이용한 전쟁이 일어난다. 이들은 자신들이 악업을 갚으면서 더 낮은 영계의 어둠침침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영계의 어두운 감옥 위에 넓은 지역들은 모두 밝고 아름답다. 영계는 지구보다, 신의 의지와 완성의 계획에 더 자연스럽게 조화된다. 영계의 모든 대상은 우선적으로 신의 의지에 따라 현현(顯現)되고, 다음에 부분적으로 영계인들이 요구하는 의지에 따른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창조한 어떤 형태나 아름다움을 고쳐서 더 고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분은 영계에 있는 자녀들에게 의지대로 영계를 변화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주었다. 지구에서는 고체가 자연적인 혹은 화학적인 절차들을 통해서만 액체나 다른 형태로 변화하지만 영계의 고체는 단지 주민들의 의지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액체, 기체 혹은 에너지 등으로 바뀌는 것이다.

지구는 바다에서, 육지에서, 또 하늘에서 전쟁과 살인으로 검게 얼룩져 있지만, 영계는 행복한 조화와 평등을 지니고 있다. 영계의 존재들은 자신의 형태를 마음대로 나타나게 할 수도있고 또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꽃들과 물고기들, 짐승들이 잠시 영계의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영계의 모든 존재들은 어떤 형태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쉽게 사귈 수 있다. 이렇듯이 절대적이 아니며 유동적인 자연법칙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예를 들어 영계의 어떤 나무는 요구에 따라 영계의 망고나 원하는 다른 과일 또는 꽃, 혹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업보에 따른 제약이 있긴 하지만, 영계에서 여러 형태를 바랄 수 있다는 점에는 구별이 없다. 모든 것이 신의 창조의 빛으로 진동한다.

아무도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또한 영계인들은 우주의지의 도움으로 영적으로 응축된 특별한 형태의 자손들을 구현해낸다. 최근에 육체를 떠난 존재들은 비슷한 정신적, 영적 경향에 이끌린 영계의 한 가족에게로 초대된다.

영계의 신체는 추위나 더위, 혹은 다른 자연조건에 지배되지 않는다. 신체조직은 영적인 뇌, 즉 수천 개의 꽃잎을 가진 빛의 연꽃과 슈숨나에 있는 여섯 개의 각성 중심들, 즉 영적인 뇌척수 축으로 구성된다. 심장은 영적인 뇌로부터 우주에너지와 빛을 받아서, 영적인 신경과 신체세포 혹은 생명자로 펌프질해 보낸다. 영계인들은 생명자의 힘이나 선성한 만트라 진동에 의해서 그들의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영적인 신체는 예전의 물리적 신체와 똑같다. 영계인의 얼굴과 몸매는 지상에 체류했을 때의 젊은 시절 모습과 같다. 때로 어떤 사람은 나같이 노년의 모습을 지니겠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며 바로 젊음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는 스승은 즐겁게 껄껄 웃으셨다.
"오직 오감(五感)에 의해서만 지각하는, 공간적이고 3차원적인 물질세계와 달리 영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육감, 즉 직관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이다. 모든 영계인들은 순전히 직관적인 감각으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진다. 그들은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둘은 부분적으로 감겨져있다. 가장 중요한 영적 눈인 제3의 눈은 이마 위에 수직으로 놓여있고 열려있다.

영계인들도 외적인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피부 등을 모두 갖고 있지만 그들은 직관을 사용해서 신체 어떤 부위에 의해서든지 감각할 수 있다. 즉 그들은 귀를 통해서도 볼 수 있고, 코나 피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또 눈이나 혀에 의해서도 들을 수 있으며 귀나 피부에 의해서도 맛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물리적 신체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쉽게 상처를 입거나 불구가 된다. 그러나 천상의 영적 신체는 때로 잘리거나 흠이 생기기는 해도 의지만으로 곧 치료된다."
"구루지, 영계인들은 아름답습니까?"

"영계에서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형태가 아니라 영혼의 질에 있다. 그러므로 영계인들은 얼굴모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대로 새롭고 다채롭게 영적으로 현현된 신체로 꾸밀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속세의 인간이 축제를 위해 새 옷을 입듯이 영계인들도 특별히 의도한 형태로 자신을 꾸며야 할 때가 있다.

한 인간이 영적인 진전을 얻음으로써 들어갈 준비가 되었을 때는, 히라냘로카같이 높은 영계에서 즐거운 영계의 축제가 벌어진다. 그런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 아버지와, 그 분과 합일된 성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기 몸을 현현시켜 축제에 같이 참가하게 된다. 주님은 당신께 귀의한 사랑스런 이가 원하는 영상을 취한다. 그 귀의자가 헌신을 통해서 경배했다면 그는 신을 성모의 형상으로 보게된다. 예수에게는, 무한자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마음을 끄는 것이었다. 즉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게 준 개성에 따라 다양한 능력을 가진 주님께, 있을법한, 혹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요구를 모두 하는 것이다!"

스리 유크테스와르께서는 계속해서 플루트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른 생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은 영계에서도 서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우정의 영원함을 기뻐하면서 지상에서 슬픈 가짜 이별을 할 때 때로 의심했던 사랑의 불멸성을 깨닫게된다. 영계인의 직관은 장막을 꿰뚫고서 지상의 인간 행동들을 관찰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감이 어느 정도 발달하지 않는 한 영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수천 명의 지구인들은 영계인이나 영계를 순간적으로나마 얼핏 볼 수 있었다.

히라냘로카에 있는 진보한 존재들은 대개 영계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법열상태로 깨어 있으면서, 영계를 관리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거나, 방탕한 아들들, 속세에 매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 한편 히라냘로카의 존재들이 잠 잘 때에는 때로 꿈같은 영계의 환시를 본다. 그들의 마음은 대개 최고의 단계인 니르비칼파의 기쁨을 의식하는 상태에 열중해 있다.

영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히라냘로카 같은 영계에 사는 높은 단계의 존재들은 예민한 마음으로 인해 행동이나 진리의 인식에 있어서 잘못이 있으면 날카로운 고통을 겪는다. 이 진보한 존재들은 모든 행동과 생각을 완전히 영적 법칙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영계의 주민들 간의 대화는 완전히 영적인 텔레파시와 초시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지상인들이 겪어야하는 글과 말의 혼동이나 오해는 없다. 영화 장면 속의 사람들이 일련의 광선 사진들을 통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영계인들도 산소에서 힘을 얻을 필요 없이 지혜롭게 이끌어지고 종합되는 빛의 영상들처럼 걷고 일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고체, 액체, 기체, 에너지 등에 의존하지만 영계인은 주로 우주의 빛으로 산다."

"구루이시여, 영계인들도 음식을 먹습니까?"
나는 모든 감수성, 즉 정신, 마음, 영혼을 총동원해서 이 놀라운 설명을 흡수하고 있었다. 인식을 초월한 진리의 지각을 영원히 진실하며 변함없지만, 스쳐 가는 감각적 경험이나 인상은 일시적인 혹은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라서 곧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게 된다. 구루의 말은 내 존재의 양피지 위에 너무 강력하게 기록되어서, 언제든지 내 마음을 초의식적 상태로 바꿈으로서 성스러운 경험을 명확히 다시 체험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빛나는 광선 같은 채소들이 영계에는 많다. 그래서 영계인들은 채소를 먹고, 찬란한 빛의 샘과 영계의 실개천이나 강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수를 마시고 산다. 마치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들의 영상이 창공을 뚫고 가서 테레비젼 수상기에 보이게 되고 나중에는 다시 공중으로 송신되듯이 신이 창조한 영계의 보이지 않는 채소와 식물들은 하늘에 떠 있다가 그곳의 주민이 원하면 영계로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무모한 공상에서 향기로운 꽃들이 있는 정원전체가 실현되고 나중에 다시 하늘로 보이지 않게 돌아간다. 그러나 히라냘로카와 같은 신성한 영계의 주민들은 먹는 욕구에서 거의 해방되어 있지만, (지복의 만나 만을 먹는)거의 완전하게 모든 조건을 벗어 던진 '인과율적 세계'(=무색계)의 영혼들이 더 높은 단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서 해방된 영계의 존재들은 시간에 따라 지상에서 여러 번 태어나는 동안 수많은 친척, 부모, 아내. 남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특별히 사랑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모두가 신의자녀이며 개별적 표상이라고 여기게 되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신성한 사랑을 베풀 줄 알게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외모가 그 영혼의 최근 생애에서 계발된 새로운 자질 때문에 다소 변했을지라도, 영계의 존재들은 실수하지 않는 직관으로 그들 모두가 한번은 다른 존재세계에서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새로운 영계의 집으로 온 것을 환영한다. 모든 원자는 창조될 때 어쩔 수 없이 개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영계의 친구는 그가 무슨 옷을 입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지상에서 한 배우의 개성이 어떤 가면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계에서의 일생은 지상에서보다 훨씬 길다. 보통수준의 영계인이 갖는 평균 수명은 지상의 시간수준으로 쳐서 500-1000년 정도이다. 어떤 삼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수천 년이나 더 살고, 어떤 요기들이 60- 70세 경에 죽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수백 년이나 사는 것처럼, 어떤 영계인들은 다른 이들의 평균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산다. 영계의 방문자들은 그 육체적 업보의 과중에 따라 오래 혹은 짧게 산 후에, 업보에 따라 명시된 시간 안에 지상으로 다시 쫓겨간다.

영계인은 그 빛나는 몸을 벗을 때 고통스럽게 죽음과 겨루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영적인 형체를 벗고 미묘한 근원적 형체를 입으려는 생각에 약간 초조해 한다. 영계는 원하지 않는 죽음이나 병, 노화로부터 자유스럽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공포는 지상의 저주여서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항상 공기, 음식, 수면 등으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육체와 자신의 의식을 거의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육체적 죽음에는 숨이 멈추는 것과 신체세포의 분해가 동반된다. 영계의 죽음은 생명자. 즉 영계인의 생명을 이루는 명백한 에너지단위의 분산으로 이루어진다. 육체적으로 죽은 존재는 육체의 의식을 잃은 후 영계에 있는 자신의 미묘한 형태를 깨닫게 된다. 또 정해진 시간에 영계의 죽음을 겪음으로써 영계의 생과 사에 대한 의식으로 넘어간다.

영적인 현현과 육체적 현현의 계속적인 이런 순환은, 깨우치지 못한 인간들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경전에 쓰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정의들은 때로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일련의 오랜 기간동안 즐거운 영계와 실망스런 지상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무의식보다도 더 깊은 기억 속에서 생각나게 한다."

내가 요청했다. "사랑하는 스승님, 지상에 재생하는 것과 영계나 인과율적 세계에 재생하는 것과의 차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개체화된 영혼으로서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과율적 신체를 지니고 있다.
구루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시작 하셨다.

"그 몸은 신이 근본적 사고력으로 요구하는 서른다섯가지 상념들의 총체인데, 신은 이것들 중에서 열아홉 개 요소로 예민한 영적인 신체를 만들고, 열여섯개 요소로 거친 물리적 신체를 만들었다.

영적인 신체를 이루는 열아홉 가지 요소들은 정신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 그리고 생명자에 관계된 것들이다. 이 열아홉 개의 성분들은 지성intelligence, 자아ego, 감정feeling, 정신mind과 '지식'의 다섯 가지 도구(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해당하는 예민한 도구), 그리고 '행위'의 다섯가지도구( 즉 출산하고, 배설하고, 말하고, 걷고, 수공기술을 발휘하는 일등에 해당하는 정신적 도구), 그리고 '생명력'의 다섯 가지 도구(즉 고정시키고, 동화시키고, 제거하고, 변형시키고, 순환시키는 신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등이다. 이런 열아홉가지 요소를 지닌 예민한 영적 신체는, 거친 열여섯 가지의 화학적 성분들로 이루어진 물리적 신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 남는다.

신은 자신의 내부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내서 그것들을 꿈으로 투영해 낸다. 이렇게 우주적 꿈의 여신(女神)은 상대성이라는 끝없이 커다란 장식으로 꾸미고 나타나는 것이다.
신은 인과율적 신체의 서른다섯가지 사고 범주 속에서, 인간의 열아홉 가지 영적 요소와 열여섯 가지 물리적 요소로 이루어진 모든 복합체를 만들어 냈다.

즉 처음에는 예민했다가 나중에는 거칠어지는 진동력의 응축을 통해 신은 인간의 영적인 신체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극도의 단순성이 놀랄 만큼 복잡해지는 상대성의 법칙에 따라, 인과율적 우주나 신체는 영적인 우주나 영적인 신체와 다르고, 마찬가지로 물리적 우주나 물리적 신체는 다른 형태의 창조물과는 특징을 지닌다.

살로 된 육체는 창조주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꿈들로 만들어진다. 지상에는 이중성이 항상 존재한다. 즉 질병과 건강, 고통과 기쁨, 잃음과 얻음 등이다. 인간은 3차원적인 것에서 한계와 저항이 심한 위협을 받으면 죽음이 다가와서 육신이라는 무거운 옷을 일시적으로 벗게된다. 그러나 영혼은 아직도 영적인 신체와 인과율적 신체 속에 들어있다. 세가지의 몸이 모두 함께 모일 수 있게 하는 결합력은 욕구이다. 인간은 모든 속박상태는 성취되지 않은 욕구에 기인한다.

육체적 욕구는 이기주의 와 감각적 즐거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각적 경험의 충동이나 유혹이 영적인 애착이나 근원적 인식과 관련된 욕구보다 더 강하다

영적인 욕구는 진동에 의한 즐거움을 중심으로 한다. 영계인들은 영계의 천상의 음악을 즐기며, 변화하는 빛이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모습을 보고 황홀해 한다.
또 영계인들은 빛을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욕구는 모든 대상과 경험들을 빛의 형태 혹은 응축된 생각이나 꿈으로 만들어버리는 영계인들의 능력과 관계가 있다.

인과율적 욕구는 오직 인식에 의해서만 성취된다. 오직 인과율적 신체만을 입고 있으며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이 존재들은 전 우주를 신의 생각과 꿈이 실현된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모두 순수한 생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근원적 인간들은 물리적 감각이나 영적 기쁨의 즐거움을, 인간의 훌륭한 감성에 있어서는 천하고 답답한 것이라고 여긴다. 인과율적 인간들은 자신의 욕구를 즉각 실현시킴으로써 그 욕구를 해결한다. 자신이 얇은 베일 같은 인과율의 몸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존재들은 창조주와 같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모든 피조물은 우주적 꿈으로 짜여진 것이기 때문에 얇은 인과율적 신체만을 갖고 있는 영혼은 막강한 실현 능력을 갖는 것이다.

영혼은 본질상 볼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신체에 의해서만 구별될 수 있다. 어떤 한 종류의 신체가 있다는 것은, 성취되지 않은 욕구들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혼이 무지와 욕망이라는 마개로 단단히 밀봉된 하나, 둘, 혹은 세 개의 신체용기 속에 들어가 있는 한 그는 성령의 바다에 합일될 수 없다. 천한 물리적 그릇이 죽음이라는 망치로 깨어져도 다른 두 개의 그릇, 즉 영적인 그릇과 인과율적인 그릇은 그대로 남아, 영혼이 의식적으로 편재하는 삶과 결합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지혜로써 무욕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그 힘이 남아 있는 두 개의 그릇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면 마침내 자그마한 인간의 영혼이 빠져 나와서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확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성스러운 구루께 고귀하고 신비로운 근원적 세계에 대해 좀더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승께서는 대답하셨다.

"인과율적 세계는 설명할 수 없을만큼 미묘한 곳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대하며 마치 딱딱한 바구니를 매달은 빛나는 풍선같은 영계와 물리적 세계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굉장한 집중력을 갖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초인적 집중력으로 아주 복잡한 그 두 세계를 순수한 사고(思考)로 변화 또는 환원시킬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인과율적 세계에 도달하여 정신과 물질이 용해되는 경계선에 서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는 창조된 물체, 고체, 기체, 액체, 전기, 에너지, 모든 존재들, 인간, 짐승, 식물, 박테리아, 들을 순수한 의식의 형태로 인식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눈을 감았을 때 육체적 눈에는 그의 육체가 보이지 않고 단지 생각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과율적 존재는 인간이 공상 속에서 하는 일을 무엇이나 실제로 할 수 있다. 가장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인간의 지성은 오직 정신력으로 극단에서 극단에 이르는 생각을 전개할 수 있으며 또 정신력으로 한 항성에서 다른 항성으로 건너뛰거나 영원한 구렁으로 끝없이 빠져들 수 있으며, 로켓처럼 은하계를 날아 오를 수 있으며, 탐조등처럼 우유 빛 자국을 남기며 별이 총총 한 하늘에서 불꽃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과율적 세계의 존재들은 이보다 훨씬 큰 자유를 지니고 있어서 애쓰지 않고도 어떤 물질적. 영적 방해나 업보에 따른 한계를 받지않고 자신의 생각을 즉시 객관적인 대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

인과율적 존재들은, 물리적 세계가 주로 전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영계도 근본적으로 생명자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안다. 실제로 이 둘은, 피조물을 창조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방해하는 상대성의 법칙, 즉 마야에 의해 잘리고 나누어져서 아주 작은 부스러기가 된 신의 사고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인과율적 세계의 영혼들은 서로를 기쁨의 성령이 개체화된 각각의 점들이라고 생각한다. 사고만이 그들 주위에 있는 대상이다.
그들은 몸과 사고의 차이가 단지 관념임을 알고 있다. 인간이 눈을 감으면 눈부신 하얀빛이나 희미한 푸른색 아지랑이를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사고에 의해서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 정신의 힘으로 어떤 것을 창조하거나 분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과율적 세계에서의 죽음과 재생은 생각 안에 있다. 인과율적 시체를 지닌 인간들은 오직 영원히 새로운 지혜의 음식으로 잔치를 즐긴다. 그들은 평화의 샘물에서 물을 마시며,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는 인식의 땅을 밟고 다니며, 끝없는 기쁨의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보라! 그들의 빛나는 생각의 몸체가 성령이 창조한 수많은 항성을 지나고, 새로 생긴 세계들의 신선한 거품들과 지혜의 별들을 지나서, 무한한 하늘의 가슴에 그려진 황금빛 성운의 신기한 환상을 넘어 날아가는 광경을!

많은 존재들이 인과율의 세계에 수 천년 동안 남아있게 된다. 보다 심오한 법열의 경지에 의해 자유로워진 영혼은 이제 조그마한 신체로부터 자신을 끌어내서 우주의 광대함을 지니게된다.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 사랑, 의지, 기쁨, 평화, 직관, 평온, 자기통제, 집중력등의 물결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가 영원히 즐거운 지복의 바다로 함께 녹아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영혼은 따로따로 흘러드는 의식의 물결로 기쁨을 느낄 필요가 없이 그 모든 물결들을 포용한 하나의 우주 대양으로 몰입된다. 영원한 웃음을 지닌 그 바다로!
한 영혼이 세 개의 몸으로 된 덮개에서 벗어나면, 그는 영원한 상대성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불멸의 존재가 된다.

별과 달과 해로 꾸며진 날개를 가진 나비 같은 편재의 전능자를 보라! 성령으로 발전된 그 영혼은 어두운 빛, 어둡지 않은 어둠, 생각이 아닌 생각이 존재하는 곳에 홀로 우주창조의 꿈속에 법열의 기쁨으로 젖어들어 있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이여!"
나는 경외의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스승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한 영혼이 마침내 세 가지 신체적 미혹의 항아리들을 제거하면, 개성을 잃지 않고 무한자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는 예수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 마지막 자유를 얻었다. 지상에서 겪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사흘로 상징되는 과거의 세 단계들을 통해 그는 완전히 성령으로 승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던 것이다.

발달하지 못한 인간은 자신의 세 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지상과 영계와 인과율계의 윤회를 겪어야만 한다. 이 궁극적 자유를 얻은 초인은 다른 인간들을 신께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 예언자로 지상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할 수도 있고, 나처럼 영계에 남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구원자는 지상에서 사람들의 업보의 짐을 얼마만큼 떠맡아서 영계에서 윤회의 순환을 마치고 영원히 인과율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곳의 존재들이 몸을 입고 있는 기간을 단축하고 그럼으로써 절대적 자유를 획득하도록 돕는다."

"부활한 자이시여, 영혼으로 하여금 다시 세 가지 세계로 돌아오도록 하는 업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전능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영원히 귀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상에 계실 때는 결코 한번에 이처럼 많은 그 분의 지혜를 소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생과 사라는 장기판 위에 있는 불가사의한 공간들에 대해서 명확하고 정확한 통찰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하셨다.
"인간이 영계에 계속 머루르려면 그 전에 물리적 업보 내지 욕망이 완전히 해결되어야만
한다. 영계에서는 두 종류의 존재들이 있다. 즉 아직 해결해야 할 지상의 업보를 갖고 있으므로 그 업보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다시 천한 물리적 신체를 입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 고정적인 거주자들과는 달리 일시적인 영계의 방문자로 분류된다.

지상의 업을 속죄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계의 죽음 이후에 우주사고의 근원세계로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열 여섯 가지의 거친 요소들로 이루어진 영적인 신체를 의식하면서 물리적 세계와 영계만을 왔다 갔다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발달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매번 육체적 죽음을 당할 때마다 죽음의 혼수 상태에 빠져서 아름다운 영계의 모습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영계에서 머문 후 다시 교육받기 위해 물질세계로 돌아가는데, 이처럼 반복된 여행을 통해서 미묘한 영적 구조를 가진 그 세계에 점점 익숙해진다.

반면에 영계에 오래 거주하는 보통 거주자들은 모든 물질적 욕구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서 더 이상 거칠게 진동하는 지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들은 영계의 업과 근원계의 업만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적으로 죽은 후에 무한히 섬세하고 정교한 근원계로 간다. 우주법칙에 의해 결정된 기간이 끝난 후에 이들 진보된 존재들은 히라냘로카나 비슷한 단계의 다른 영계에 돌아와서 아직 속죄하지 못한 영적 업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영적 몸으로 태어난다."

스리유크테스와르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 아들아 이제 내가 신성한 신의 섭리에 의해서 지상으로부터 오는 자 들보다 특별히 근운계에서 다시 영계로 윤회해 오는 자들을 위해서 구원자역할을 하려고 부활했다는 것을 좀더 잘 이해하겠지. 지상에서 오는 자들이 아직도 물질적 업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면 히라냘로카같이 고귀한 영계로 오르지 못한다.

지상의 사람들이 대부분 명상으로 얻는 환시를 통하여 고상한 기쁨을 즐기고 영계생활의 이점을 상상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죽은 뒤에도 다시 제한되고 불완전한 지상의 즐거움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듯이 많은 영계인들도 자신의 영적인 몸이 분해되는 동안 인과율세계의 진보된 기쁨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조잡하고 저속한 영계의 행복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영계의 천국을 방문하기를 갈망한다. 그런 자들은 무거운 영적 업을 속죄해야만, 영적인 죽음을 겪은 후에 창조주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근원적 사고의 세계에 완전히 머물 수 있다.

눈에만 즐거운 영계의 경험을 더 원하지 않아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근원계에 머무르게 된다. 근원계에서 모든 근원적 업과 과거 욕망의 씨앗들을 속죄하는 일이 끝나면, 갇혔던 그 영혼은 세 개의 무지의 마개 중에서 마지막 것을 던져버리고 근원적 신체라는 마지막 병에서 빠져 나와 영생의 신과 합일을 이룬다. 이제 이해하겠느냐?"

그때 스승의 미소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네! 이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과연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노래나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영적으로 깨우쳐 주는 지식을 얻은 적이 없었다. 힌두교 경전들이 인과율 세계와 영계 그리고 인간의 세 가지 신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 글들은 부활하신 우리 스승님의 말씀에 나타난 따뜻한 확실성과 비교해서 얼마나 궁벽하고 의미없는 것들인가! 그 말씀에는 '어떤 여행자도 그곳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발견되지 않는 곳'이 정말로 전혀 없었다.

스승은 말씀을 계속 이어졌다.
"인간의 세 가지신체들이 침투해 있다는 것은 그의 3중적 성격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지상에서 방심하지 않고 있을 때는 세 가지신체를 어느 정도 의식한다.
그가 감각적으로 맛보고, 냄새맡고, 만지고, 듣고, 보는 일에 열중할 때는 주로 물리적 신체를 통해서 일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려보거나 의지력을 행사하는 것은 주로 영적인 신체를 통해 일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거나 깊은 내성 내지 명상으로 빠져들 때는 근원적 신체가 표현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근원적 신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주적 사고정신이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한 개인은 넓게 '물질적 인간' 이나 '에너지적 인간' 그리고 '지성적 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인간은 매일 열여섯 시간 가량 자신이 물리적 신체와 같음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잠이 들어서 꿈을 꾸면, 영계인 들처럼 어려움 없이 어떤 대상을 창조할 수 있는 영적 신체로 있게된다. 그러나 잠이 깊이 들어서 꿈도 꾸지 않으면, 그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의식 내지는 '나'라는 감각을 근원적 신체로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잠을 원기를 돋우는 것이다. 꿈을 꾸면 그의 근원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과 접촉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잠은 완전히 유쾌한 것은 아니다."

스리유크테스와르가 놀라운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와 같은 스승님, 당신의 몸은 제가 푸리 암자에서 엎드려서 울던 그 때의 모습과 완전히 똑 같군요."

"그렇다, 새로운 내 몸은 노년의 내 모습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나는 지상에서 그랬던 것보다 훨씬 자주, 언제든지 마음대로 이 모습을 형상화시키거나 없애거나 한다. 또 이제 재 빨리 몸의 형상을 분해함으로써 빛의 기차를 타고 한 항성에서 다른 항성으로 혹은 더 나아가서 영계에서 인과율의 세계나 물리 세계로 즉시 여행할 수 있다."

성스러운 나의 구루는 미소를 지으셨다.
"오 이제 보니 저는 스승님의 죽음에 대해 쓸데없는 슬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내가 죽었단 말이냐?"

스리 유크테스와를의 두 눈은 애정과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는 지상에서 단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고, 지상에서 네가 보았던 내 몸도 꿈일 뿐이다. 너는 그 꿈의 영상을 매장한 것일 뿐이다. 이제 더 훌륭한 나의 육신이 신의 더 훌륭한 꿈의 세계에 부활한 것이다. 지금 네가 그것을 보고 있고 또 이렇게 꼭 껴안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언젠가는 이 훌륭한 환상의 육신과 환상의 세계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들 모두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환상의 거품들은 결국 꿈을 깨는 마지막 손길에 의해 꺼지고 만다. 나의 아들 요가난다야, 꿈과 현실을 구별해야 한다!"

<베다>에 나타나는, 부활에 대한 이런 생각 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푸리에서 생명이 없는 그 육신을 보았을 때 연민을 느꼈던 것이 부끄러웠다. 마침내 나는, 구루가 항상 완전하게 신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지상에서의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지금의 부활까지도 모두 우주의 꿈속에 있는 신성한 생각들의 상대적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이해하였다.

"요가난다여, 이제 너에게 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진실들을 모두 다 말해 주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인간들의 지상세계로부터 또 다른 신의 꿈의 세계인 영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나의 부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불행으로 고통받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이 스며들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의 부활을 목격한 기쁨을 왜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겠는가!

"지상에서 내가 제시한 기준들은 곤란할 정도로 높아서 대개 사람들의 성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때로 내가 해야 할 정도보다 더 심하게 너를 꾸짖기도 했었다. 그러나 너는 나의 시험을 통과했다. 너의 사랑이 모든 꾸짖음의 구름을 뚫고 해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럽게 덧 붙였다.

"오늘 또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결코 다시 책망하는 무서운 눈초리로 너를 보지 않겠다. 이제는 더 이상 너를 꾸짖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스승의 꾸중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모든 꾸중들이 나를 보호해 주는 수호 천사였는데!
"다정하신 스승님! 천만번이라도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지금 당장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꾸짖지 않겠다."
스승의 성스러운 목소리는 엄숙했지만 웃음을 깔고 있었다.

"우리의 두 형태가 신의 환상(마야) 속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한, 너와 나는 함께 미소 지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는 우주의 신과 합일되면 우리의 미소는 그 분의 미소가 될 것이며 합치된 기쁨의 노래는 영원히 진동하며 신과 조화를 이룬 영혼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스리 유크테스와르께서는 여기서는 밝힐 수 없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도 암시를 해 주셨다. 봄베이 호텔 방에서 함께 보낸 두 시간 동안 스승께서는 나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셨다. 1936년 6월의 그날에 그가 세상에 대해 예언했던 수많은 사실들이 이미 사실로 실현되어 지나갔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나는 너를 떠난다!"
이 말에 나는 껴안고 있는 내 팔에서 스승의 육신이 녹아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며 내 영혼의 하늘로 진동해 왔다.

"내 아들아, 네가 니르비칼파 사마디의 문을 들어서서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오늘처럼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으로 너에게 올 것이다."
이 거룩한 약속을 남기고 스리 유크테스와르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름같은 목소리가 천둥의 음악이 되어 되풀이되었다.

"모두에게 말하라! 니르비칼파의 깨달음에 의해, 지상이 한갓 신의 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히라냘로카라는 정교한 꿈의 세계로 올 수 있으며, 그곳에서 지상의 육체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 나를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요가난다여.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라!"

이별의 슬픔은 사라졌다. 오랫동안 평온을 빼앗았던 스승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도 이제는 부끄러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복의 기쁨이 새로 열린 무한한 영혼의 숨구멍들을 통해 샘처럼 솟아났다. 과거에는 쓰지 않았던 막혔던 구멍들이 이제는 밀려오는 법열의 물결로 깨끗하게 넓혀 졌다. 내 전생들이 활동 사진의 장면들처럼 내면의 시야에 나타났다. 과거의 선한 업과 악한 업이 스승의 방문에 의해 내 주위를 비추는 우주의 빛으로 스러졌다.

내 자서전의 이 장에, 나는 구루의 명령을 따라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것이 호기심 없는 세대를 다시 한번 혼란에 빠뜨리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비굴함도 있고 절망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운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모습에 불과하다. 인간이 의지력을 행사하는 날, 그는 자유로 이르는 노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정복되지 않는 영혼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만을 외치는 우울한 비관주의만을 너무 오랫동안 들어온 것이다.

***
출처 : 인도 명상
글쓴이 : 단다 원글보기
메모 :
◈임종시 염불의 중요성과 천도◈



살생의 업을 많이 지은 사람,
파계를 한 사람, 병으로 신음하며 죽어 가는 사람,
원한 맺힌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 등등,

업보 때문에 불행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게 되면 능히 평안을 얻고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으며 극락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럼 평소에 염불정진을 잘 한 사람과
임종시에만 염불한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임종의 순간에만 염불하는 사람은
구품연화대 중 가장 못한 하품하생의 연화대 속에 태어나
12대겁 동안 더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
평소에 염불하며 도를 닦은 이의 왕생과 다른 점입니다.

곧 평소에 염불정진을 꾸준히 한 사람은
무려 12대겁이라는 시간을 단축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종할 때의 십념염불 공덕으로 태어나는
이 하품 하생의 연화대 또한 극락세계입니다.

여기에만 태어나도 더 이상의 퇴보도 타락도 불행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께서 설하시는 참회법문을 듣고
차츰 깨달음을 이루어 상품상생의 연화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임종 때의 염불은 꼭 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어떻게 단 십념만으로 극락왕생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덕을 갖춘 아미타부처님의 근본서원력 때문입니다.
무량한 빛과 무량한 수명 그 자체인
아미타불께서 스스로 대자비의 서원을 발하여
그 서원의 힘으로 임종 전에
십념염불을 행하는 중생을 극락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임종직전의 중생이 스스로 갖게 되는 전심 회향의 덕분입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온 마음을 기울여 극락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숨이 다한 후의 영혼은 마지막 결심을 따라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녕 아미타불의 근본서원력과 "나"의 전심회향이 일치하게 되면
틀림없이 극락왕생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 쏟는 전심회향염불이 되지 못하면
업을 따라 극락이 아닌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집안에서는 임종 전의 사람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것을 권하고,
숨이 끊어진 뒤에도 남은 사람들이 계속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주고 있습니다.

이때의 염불은 발원이요 축원입니다.
다시 태어나되 극락에 태어나겠다는 발원이요,
떠나되 행복의 나라인 극락으로 가라는.축원입니다.

이제 우리 불자들 이 세상을 하직하는 이를 앞에 두고 구체적으로 행하여야 할
염불천도의식에 대해 함께 살펴 보도록 합시다.



◈ 왕생과 천도 ◈



세상을 하직하는 이를 위한 천도의식은 망인으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 행복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으로 떠나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거나,
보내는 사람이 이별의 슬픔에 빠져 망령되이 행동 하게 되면
올바른 천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발원과 축원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떠나는 사람을 가장 좋은 세상인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로부터 불교집안에서 행하였던 방법을 종합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는 죽음에 다다른 사람을 떠나는 이,
옆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 등을 "보내는 이"로 통일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 떠나는 이의 방에
아미타삼존불 또는 아미타불의 그림이나 사진 등을 서쪽 벽에 모시고
그 앞에 향을 피웁니다.
만약 그림이나 사진을 구할 수 없으면 크게
"나무아미타불" 글씨를 써서 모셔도 좋고,
그것마저 할 수 없으면 그냥 서쪽을 향해 염불을 하면 됩니다.

◈ 떠나는 이는 모름지기 염불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못다한 일이나 집안 일에 대한 생각을 모두 놓아버리고,
오직 극락왕생만을 발원하며 일심으로 염불해야 합니다.
중병에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십시오.

이 법계에 가득한 모든 존재는 생명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의 기운으로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도 생명의 한 흐름일 뿐입니다.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위한 한 과정으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더욱이 염불은 생명의 기운을 충족시켜 주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하면

그 죽음은 어둠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력과 빛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정성을 다해 염불을 하면 됩니다.

정성껏 염불을 하다가 떠나게 되면 반드시 극락왕생할 것이요,
죽을 때가 이르지 않았으면 업장이 소멸되어 오히려 병이 나을 것입니다.
그냥 모든 것을 아미타불께 맡기고 온 마음을 기울여 염불을 하게 되면,
살아남으나 죽으나 행복과 광명 속에 있게 됩니다.

◈ 떠나는 이의 염불할 때의 몸가짐은 몸의 상태에 따라 하면 됩니다.
마지막 기운이 동하여 앉아서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기를 원하는 분은
서쪽을 향해 앉아도 좋고, 기력이 미치지 못하면 누운 채 염불을 하면 됩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 기력조차 없다면
아미타불의 모습을 떠올리는 관상만 하여도 됩니다.

◈ 떠나는 이를 보내는 가족 , 친족 등은
떠나는 이가 편안히 마음을 잘 모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 인간적인 애착에 휩싸이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만약 떠날 때 한을 지녀 잘 떠나지 못하면
그야말로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보내는 이들은 애정에 못이겨 슬픈 기색 을 보이거나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세속의 잡된 일을 논하여서도 안됩니다.
떠나는 이가 오로지 정념속에 있을 수 있도록,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정성껏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것을 권하고,
나무아미타불을 함께 불러주거나 염불 테이프 등을 들려주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주의할 것은 떠나는 이의 의식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통곡을 하거나 손발을 거두거나 자리를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가량 그대로 모셔두고 염불을 해 드려야 합니다.

이는 신식(神識)이 완전히 몸을 빠져나가
몸이 차가워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보내는 이가 떠나는 이의 뒤를 이어 정성껏 염불을 하면서 명복을 빌면,
부처님의 근본서원력으로 망인 극락세계로 직행을 할 수 있습니다.

정녕 사후에 거창한 재를 지내면서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종의 순간에 잘 하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슬픔에 빠지거나 당황하지 말고 잘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 또 한가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 말고
임종의 순간에 외우면 좋은 것으로 광명진언이 있습니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

29글자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힘으로
새로운 태어남을 얻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죄업과 짙은 어두움 이 마음을 덮고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광명 속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맑아지고 깨어나게 된다는 것이
이 진언을 외워 영험을 얻는 원리입니다

신라의 원효스님께서는 앞에서 잠간 살펴본
《유심안락도》를 통하여 이 진언의 공덕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만일 중생이 이 진언을 두 번이나 세 번,
또는 일곱 번을 귀로 듣기만 하여도
모든 죄업이 없어지게 된다.

또 중생이 십악과 오역죄와 사중죄를 지어 죽은 다음 악도에 떨어지더라도
이 진언을 외우면 능히 해탈을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광명이 망인에게 이르러 모든 죄업을 소멸시켜 줄뿐만 아니라
서방극락세계의 연화대로 인도하여 주신다.

나는 불치의 암 등에 걸려 고통 속에서 떠나게 된 이의 유족들에게
임종시에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거나
광명진언을 외울 것을 자주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족들로부터 하나같이 떠나는 이가
고통 없이 편안하고 안온한 모습으로 가셨다는 말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결코 거짓을 모르시니, 믿음을 가지고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 망인이 떠난 후 상례를 치를 때에도
가족들은 나무아미타불 또는 광명진언을 염하며 지내야 합니다.
스님의 독경이나 염불에만 의존하지 말고,
마음속으로라도 망인이 아미타불의 자비광명 속에서
극락에 왕생하는 모습을 그리며 지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례를 치를 때 절대로 주의할 점은 생명,
특히 가축 등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득이 조문객에게 육류를 대접하는 경우에도 가게에서 사서 써야지,
집 또는 집 주위에서 소, 돼지, 닭 등을 잡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가축들의 원한에 찬 혼이 망인의 혼에 달라붙어
갈 길을 가로막는 경우가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실로 망인만 잘 천도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가축의 원한에 찬 혼까지 천도시키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실제로 어느 큰스님께서도 모친상을 당했을 때
이러한 경우를 겪어 모친을 천도시키는데 무진 애를 먹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는 더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도시와는 달리 시골의 경우에는 상을 당했을 때
가축을 잡는 일이 많습니다.
제발 상을 당했을 때만이라도 가축을 잡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상례를 치른 후 불자가족들은 49재를 지내줍니다.
재를 지내는 49일 동안,
망인이 살아생전의 업에 대한 심판을 받아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 하여
7일 마다 한번씩 사찰을 찾아가서 일곱 번의 재를 지내주는 것입니다.

재를 지낼 때
유족들은 망인의 이름으로 능력껏 기꺼이 보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보전에 공양을 올리는 재물보시는 물론이요,
불서를 나누어주는 법보시, 불쌍한 이를 돕는 보시에도 적극 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공덕이 그대로 망인과 "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편 이상으로 지나쳐서도 안되겠지만,
아끼고 탐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망설여서는 안됩니다.
스님과 상의하여 여법(如法) 하게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49재 기간동안,
유족은 집에서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나무아미타불"을 3천 번 또는 만 번씩 외우거나,
광명진언을 천 번씩 외우며 망인을 천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때는 1,080개의 알을 꿰어 만든 염주를 돌리면서 외우는 것이 좋음)

염불이나 진언을 외울 때는 그냥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마음속으로 망인이 극락회상에서
아미타불의 광명을 받으며 설법을 듣고 있는 모습을
관(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천도의 기도를 하고,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사찰에서 재를 지내며 탈상을 하면,
떠나가신 님은 극락의 새로운 생을 누릴 수 있고
남아 있는 이는 큰복을 이루게 됩니다.

더욱이 《시방정토경》이나
《지장보살본원경》에서는 망인을 위해 복을 닦으면
그 복의 칠 분의 일은 망인이 얻고
칠 분의 육은 산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까지 하였으니......

실로 불가에서는 상식을 넘어선 불가사의가 자주 일어납니다.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능력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믿고 실천해 보십시오.
망인의 은혜를 갚는다는 자세로 천도의 의식을 행하여 보십시오.
망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큰 공덕이 미칠 것입니다.



◈발원하고 회향하라



아미타불.석가모니불.약사여래.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
어떠한 불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신행생활 을 하든,
염불.참선.경전공부.주력 등 그 어떠한 공부를 하든,
아미타경. 법화경.금강경.반야심경 등 어떠한 경전을 독송하든,
꼭 발원(發願)을 하고 회향(廻向)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와 공부는 발원을 함으로써 시작되고 회향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발원이 씨를 심는 것이라면 회향은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발원이 없으면 어떠한 기도도 공부도 나아갈 바를 잃고 맙니다.
염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불을 염한다고 하여 꼭 극락에 왕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락왕생을 발원하지 않는 이는 극락왕생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생에서의 행복을 발원하며
극락교주인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면,
관세음보살을 외워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이루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어떻게 발원하느냐?
어떠한 씨를 심느냐에 따라 거두어들이는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미타불이 아닌 관세음 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외우며
극락왕생의 발원을 하면 극락에 태어날 수 있게 되고,
법화경.금강경을 외우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면 능히 극락에 태어납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그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발원에 따라 성취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현재 한 가지 수행이라도 올바로 하고 있으면
다른 이들이 "좋다"고 권하는 것을 굳이 하려 하거나 지조를 바꾸려 하지 말고
현재의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공부방법을 자꾸 바꾸게 되면 힘이 모이지 않아
좋은 결실을 보기가 힘듭니다.
정녕 원을 잘 세워
그 원을 핵으로 삼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차츰 힘이 모이게 되고,

힘이 모여 삼매(三昧)를 이루게 되면
능히 그 자체만으로도 신통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다른 모든 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며 깨달음을 이를 수 있게 됩니다.
부디 원을 잘 세우고 지조있게 공부하십시오. 결과는 자연성취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무심(無心)을 강조해서인지,
염불을 하는 이들 중에는 흔히 말하는 무심염불(無心念佛)을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하는 염불”로 풀이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무심■은 번뇌가 없다 는 뜻이지,
발원도 부처님에 대한 생각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를 잘 명심하고 염불을 하거나
참선.경전공부.주력 등을 할 때 꼭 발원을 하십시오.

이 발원은 곧 회향합니다.
회향은 공덕을 돌려서 어느 곳으로 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으로 향하게 하는가?

물론 나의 행복과 성불,
중생의 행복과 성불을 위해 공덕을 들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회향을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의식 뒤에는 다음과 같은 회향축원문을 곁들입니다.

원컨대 이 공덕이 일체에 두루 미쳐
우리 모든 중생들이 극락세계 태어나
무량수불 친견하고 함께 성불할지어다

"나"만의 행복과 성불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행복 과 성불을 바라는 한 마디의 회향축원이
우리가 머물 어 있는 자리를 극락으로 바꾸고
우리를 무한한 생명력과 빛의 몸으로 바꾸어 준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게으름 없이 잘 정진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
나무무량수불 !
나무무량광불 !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향훈 원글보기
메모 :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 2,000건을 수집 연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上 下』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제1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 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무세살의 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 "비야"로서의 전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살 반쯤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 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 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8년, 그녀가 열살 때,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아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 가(家)의 비야에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는 스완라타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 때 화장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 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 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 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바브랫드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 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 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 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 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 가를 방문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 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 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 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프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 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 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때에는 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 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가?"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챠타파푸울의 미슈러 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기 직전에 있던 곳인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 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 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다.(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 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 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 주에 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아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 때에 부르는 노래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 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수 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 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 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 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의 카무렛슈라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 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스완라타가 열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 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이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조건인 것입니다."







제2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틀거린 것이다. 그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 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 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 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시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고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급제가 엄연히 지켜지고 있는 인도에서는 최상급인 바라문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 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 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의 배수로가 잇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 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 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 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

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의 차기 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 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 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 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낙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 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 구획이 많이 나 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 라르 가(家)에서 데리러 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에 숨으라고 말했다






제3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에서 남쪽으로 약 150㎞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 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 데에 대해 부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브[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의 세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 프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 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 했는지도 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 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 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아마넌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 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 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 것 등도 전인격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쯤 떨어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 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하나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 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 말하였다. 그는 방 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 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4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가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가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 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 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프라카슈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 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 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 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 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 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 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5년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 가르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로 그 광경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의 손을 잡았다. "비르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 향해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르마는 실은 니르말의 또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 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이 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그리고 열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 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코시카란으로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의 거리로 복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 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 만난 코시카란은 여러 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 중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 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 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알아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 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5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세살 때부터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할 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 싶다"고 하며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으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 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 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 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 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 샹카는 첫대면인 프라셔드 씨를 자기의 아버지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 믄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프라셔드 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수사를 청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다가 거기에서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 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 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제6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 떨어져서 캄바라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누"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 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 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 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N.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가 하는 말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 바트리 가에도 알렸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 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집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전생의 남편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 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 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 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 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 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운 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 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도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 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 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 전생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7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 집의 아래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위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 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우로가시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 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 같은 것도 닮았으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 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 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 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 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제8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 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 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 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던 것이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 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 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 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웃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 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 위지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 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라네느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 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 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 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재의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 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 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 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 "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이 조여드는 느낌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 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제9화. 불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인 조종사 란지스.

란지스는 스리랑카의 콧테에서 1942년 순수한 스리랑카인 가정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실버는 란지스가 확실한 전생기억 같은 것을 상당히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그의 행동은 스리랑카인의 아리라기보다 영국 아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곤 하였다. 그가 두살 무렵에 구토증을 느끼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구토증이 나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식의 구토촉진술이다. 또 음식에 대한 취향도 마치 서양 사람 같아서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먹을 때에도 서양식으로 먹었다. 빵에는 서양인처럼 두텁게 버터를 발라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용한 적이 없는 포오크와 나이프를 호텔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른 형제와는 달리 서양식이었다.

그가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놀랄 정도로 빨리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는 15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들을 기회가 많고 또 실버의 가정에서도 영어와 실론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놀라운 영어 습득 능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카메라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면서 도망을 쳤다. 부모를 부를 때에도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그는 "부모"라고 불렀다. 실론의 어느 아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족내에서 뚜렷하게 고립적인 태도를 나타내보인 것은 서너살 무렵이었다. 그는 엄마와 형제들을 보고 "모두 나의 엄마나 형제가 아니다"고 하며, "나의 부모, 나의 가족은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그의 전생기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였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영국인이다.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형제 중에 톰, 짐, 마가렛이 있다. 아버지는 큰 기선을 타며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왔다. 기선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언덕 위의 외딴 집이다. 저어지나 오버코트를 입는 일도 있었다. 마당이나 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 아침에는 불 옆에서 몸을 녹였다. 길의 얼음을 치우러 차가 온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지 불교인이 아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그 때에는 내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형제들을 태우고 갔다."

얼음을 치우러 오는 차가 모터가 달린 차인지 아니면 말이 끄는 것인지를 묻자 그는 마차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었는가라는 물음에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가 하고 물으니 포도와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란지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얼음이나 마차는 실론에는 없는 것들이다.

란지스가 네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지방 방송국에 부탁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영어로 방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이가 미리 그에게 "오늘 오후 5시 영국에서 엄마가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을 방송해 온다"고 일러두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가족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았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 앉았다. 잠시 후 여자 아나운서가 영어로 "란지스의 생일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나팔같이 만들어서 라디오에 대고 "엄마, 나 실론 사람의 집에 있어. 그리고 데려가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생일축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엄마는 나를 "다아링"이라 하고 가끔 "스위트 하트"라고 했어."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떻게 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지?" 하고 묻자, 그는 "엄마는 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천천히(softly) 얘기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나 실론 사람이 영어로 "천천히" 말할 때는 slowly라고 하지 softly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송 사건은 란지스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란지스가 전생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란지스도 전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란지스가 십대가 된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 두고 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그의 소원을 허락했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운전에 숙달되었다. 이리하여 그가 열여덟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그가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었으면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영국에 머물었는데, 영국인과 친숙하게 사귀었으며 런던이나 그 근교의 거리가 옛날부터 익숙한 장소인 듯이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귀국하여 자동차 관계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1970년 11월 스물 다섯살 때에 이안 스티븐슨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 조종사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비행기가 내가 태어난 콧테 근방에 추락해서 죽었고 거기에서 환생한 것 같아요." 2차대전 중 콧테에는 영국 공군기지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 죽은 영국인 조종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전생 이야기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전생을 조사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구체적 자료가 불충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란지스의 경우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하겠다.





제10화. 전생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이맷드.

이맷드 에라와르는 1958년 12월 22일 라일 레바논의 코오나엘에서 모하멧드 메라와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나엘은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24㎞정도 떨어진 곳으로, 도루스교도들의 유일한 거주지이다. 이맷드가 자라면서 처음 걷기를 배우고 또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해."

그의 이런 말은 그의 어머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살 반에서 두살이 될 무렵 '쟈이레'와 '마하모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하였다. 전생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보우햄지 가(家)의 가족과 함께 크리비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도 말했다. 크리비이 마을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손짓까지 해가면서 "아주 먼곳에 잇다"고 하였다. 실은 코오나엘 근처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었지만 그가 손짓까지 하는 그 '먼곳'의 마을은 아닌 듯 싶었다. 또 손가락을 두개 가지런히 해보이면서 쌍동(雙胴)의 총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맷드가 두살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남자쪽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의아해했다.

"아가야, 이 아저씨를 아니?"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인 걸요."

그는 사림 아슈라고 하며 이맷드가 말하던 '먼곳', 곧, 크리비이 마을 사람이다. 사림은 코오나엘에 있는 처가집에 왔던 것이다.

이멧드가 네살이 되던 해 가을, 이맷드의 집을 방문한 마셀쇼프 마을의 여자가 있었다. 쇼프 마을은 크리비이에 가까운 곳인데 그녀는 이맷드가 말한 이름의 사람들이 실제로 크리비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코오나엘로 시집온 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맷드와 함께 그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가 말했다. "아가야, 네가 말하는 케말 조움브랫드 씨는 벌써 죽었어." 케말은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 따르면 그의 전생의 친구였다. 이 말을 듣고 이맷드가 하도 슬픈 표정을 짓기에 그 여자는 이맷드에게 자기가 거짓말로 그렇게 해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성난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 이 거짓말쟁이야." 이것은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본, 전생에 대한 아주 강한 감정의 반응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맷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추정하였다. "이맷드의 전생은 크리비이 마을의 마하모드 보우햄지이고 쟈미레라는 아내를 갖고 있었다."

1963년 12월 이맷드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리비이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코오나엘에서 24㎞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우햄지 가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고 이내 돌아왔다.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였다. 그는 버스 사고와 트럭 사고를 생생하게 말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대형 자동차를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무서워하였다. 이맷드의 아버지가 장례식 때문에 크리비이에 갔을 때, 그 장례를 치르는 셋드 보우햄지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맷드는 '셋드라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이어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들이 친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셋드가 사실은 이맷드 본인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맷드가 다섯살 하고 삼개월이 되었을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연하고도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이 사건의 조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크리비이 마을에 처음 와서는 이맷드의 전인격은 트럭 사고로 죽은 셋트 보우햄지라고 한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셋드는 1943년에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작년에 죽은 셋드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전생의 친구라고 한 '유셀프 하리비'를 만나서 그가 셋드와 친구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셋드의 아내는 쟈이레가 아니라는 것과 마하모드 보우햄지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셋드의 아들 하페츠를 만났을 때 그의 부친이 환생한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시리아의 같은 도루스 교인에게 시집 간 셋드의 여동생의 아들로서 스레이만이라는 사람이다. 셋드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스레이만은 그 반년 후에 출생하여 지금은 스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스레이만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맷드의 전인격(前人格)은 공중무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페츠는 말했다.
"그 아이가 말한 것 중에서 부친의 생애와 꼭 부합되는 것은 트럭 사고 뿐입니다. 그 아이는 사냥도 좋아하고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집앞의 도로는 가파른 고갯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전혀 틀립니다. 또 부친은 쟈미레라는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사실 그랬다. 하페츠가 지금 사는 집은 셋드가 살고 있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맷드가 말하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셋드가 사고로 인해서 부상을 입고 그 후에 치료 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맷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페츠로 하여금 보우햄지 가(家)의 인물 중에서 이맷드의 전인격을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셋드의 사촌 이브라힘을 생각해내었다.

"이브라힘이라는 사람도 트럭 사고로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폐병으로 죽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다른 점에서는 모두 합당해요." 하페츠는 즉시 우리를 창가로 안내하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기 벚꽃나무가 보이지요?"

분명히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서는 집에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 근방은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또 셋드와 친구인 하리비가 이브라힘과도 친구 사이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맷드의 전인격을 이브라힘이라고 본다면 그의 전생 발언은 맞는 셈이다.

이브라힘은, 1949년 9월 18일에, 그전에 일년 정도 요양원에서 치료하다가 스물다섯살에 사망했고 그것은 이맷드가 출생하기 9년쯤 전의 일이다. 셋드의 아들 하페츠의 증언으로 일단 이맷드의 전인격은 이브라힘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큰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맷드가 보여준 자동차 공포증이며 또 걸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 일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문으로, 이맷드는 "트럭 사고는 운전수와의 싸움 뒤에 일어났는데 운전수는 일부러 치어죽이려 했다"고 말했지만, 하페츠는 싸움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재판 기록에서도 운전사의 단순과실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점에서는 모두 정확한 이맷드의 전생 발언이 왜 여기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이브라힘의 임종에 대한 하페츠의 설명에 의하면 이브라힘은 일년 정도 결핵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스물다섯살에 죽었다. 마지막 반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임종은 자택에서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하여튼 젊고 원기왕성하던 그가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강요당했으니 걷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희망했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자동차 사고는 어떻게 된 일인가? 트럭 사고와 버스 사고에 대한 이맷드의 발언에 대해 많은 증언을 모은 결과 그의 발언에는 틀린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입증하기 곤란한 것은, 트럭 운전수와 싸웠는데 그 운전수가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기록에는 충돌사고는 단순과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게서 셋드가 죽을 때의 상황을 전생기억으로 확인했다. 그는 셋드로서의 자신이 사고가 나기 전에 싸웠다는 것은 현재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이맷드의 전생기억이 틀린 것이다.

셋드는 사고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셋드의 자동차 사고는 이브라힘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자기 집안에서도 버스와 트럭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버스 사고 후에는 운전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브라힘의 대형 자동차 공포증은 스티븐슨 교수가 만난 다섯살 무렵에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스레이만도 모든 차에 대해서 심한 자동차 공포증을 보였는데 그것은 열한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브라힘은 트럭과 자동차의 두가지 차 사고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맷드의 전생기억 중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전생에 '후다'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어릴 때 태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후다'라고 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또 그는 '셋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형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브라힘의 사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케말 조움브랫드는 쇼트 마을의 여자가 거짓으로 죽었다고 말해서 이맷드가 화를 내었던 그 사람이다. 그는 이브라힘과 셋드와 공통의 친구로 도루스 교도 중에서는 유명한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다.

이맷드의 전생이 셋드가 아니고 이브라힘이라고 추정한 후에 스티븐슨 교수는 그를 크리비이로 데리고 왔다. 우선 처음에 셋드의 전생집(지금은 하페츠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 사진첩을 보여주며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페츠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셋드의 집을 나와 이브라힘의 생전 집으로 갔다. 이브라힘이 죽은 뒤에 그 집은 폐쇄되어 있었다. 이맷드의 전생 발언대로 마당에는 벚나무가 있고 집 앞은 가파른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여동생 '후다'는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진의 인물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브라힘의 사진이었다. 그의 전인격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발언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는 남동생인 '파우드'라고 하였다. 자기가 마지막 이틀 동안 누워 있던 침대를 알아보았다. "아가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어?" 하고 후다가 물었다. "후다, 파우드를 불러줘"라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락은 두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의 칸막이를 가리키며 거기에 종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이브라힘은 사냥을 무척 좋아하며 법으로 금지된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 벽 칸막이에 총을 숨겨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다. 이맷드는 이전부터 "총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쇠사슬에 매어주지 밧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맷드가 집에 대해 말한 것도 거의 맞았다.
"집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
"내가 죽을 무렵 정원을 고쳤다. 벚나무와 능금나무를 새로 심었다."
"차고가 둘 있었다."
"기름난로가 있었다."

한편 이맷드가 어릴 때부터 항상 말해오던 쟈이레라는 미인이 있는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개 이런 여자이다.
"나에게는 쟈이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다. 옷 입은 맵시가 예쁘고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색의 옷을 잘 입었고 또 자주 사주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하이힐을 신는 여자는 도루스 교도 중에는 퍽 드물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하페츠로부터 쟈이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다. 그녀는 이브라힘이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그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이웃 동네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맷드가 크리비이에 왔을 때 스티븐슨 교수는 쟈이레가 어느 마을에 사는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맷드는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쟈이레가 살던 마셀 쇼프 마을 방향을 정확히 지적해보였다. 그러나 이맷드가 코오나엘에서는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쇼프마을에 좀더 가까운 크리비이에 와서는 그녀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연애사건을 가족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심리적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쟈이레가 결혼하여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맷드는 열살이 되었을 때 엉뚱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쟈이레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된 그녀와는 결혼할 수 없으니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에서 죽음의 단층(斷層)을 넘어서는 참으로 기구한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맷드는 열살이 지나서도 상당한 전생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살 때에 처음으로 마하모드 씨를 만났다. 이브라힘의 삼촌으로 그의 전생기억에서 맨 처음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때 마하모드 씨는 수염이 없었지만 수염이 있는 사진을 보여주니 금방 알아보았다. 또 마하모드 씨와 함께 크리비이 마을의 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군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프랑스 군대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맷드도 학교 공부 중에서 특히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한편 이맷드는 한때 다하르엘아하르에서 산 일이 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이브라힘과는 다른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적 전생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증명하거나 조사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1973년에 열다섯살이 되어 정상적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에서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셋드 보우햄지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그의 환생인 스레이만은 같은 해 12월 3일에 시리아의 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셋드의 여동생으로, 같은 도루스교도의 집안에 시집온 것이다. 스레이만은 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은 셋드의 환생이라고 하였다. 서너살 무렵에 처음 크리비이 마을에 왔다. 당시 열한살쯤 되었던 하페츠의 말에 의하면 스레이만은 혼자서 셋드의 집을 정확하게 찾았다. 셋드의 사고와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하페츠 등 아이들을 알아보며 이름을 말했다. 또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부친다운 태도를 보이며, 자기의 어머니를 '여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페츠 자신도 어린 시절 크리비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분간했던 것, 마을의 밭이나 포도밭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했던 일, 셋드의 소유인 권총과 웃옷 등을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제11화. 전생에서 환생을 약속한 마르따.

1917년 10월에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는 브라질의 돈 페리시아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번이나 연애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폐병으로 죽었다. 특히 그녀의 두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주위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마리아가 죽고 열달이 지난 1918년 8월 14일, 이 지방의 학교 교사인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두번째의 아이인 마르따가 태어났다. 그녀가 두살 반이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부모는 즉시 이 아이는 마리아 준아리아의 환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따가 한살이 되기 조금 전에 그녀의 전생의 아버지인 오리베이로가 로렌쯔 씨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오리베이로 씨에게 안기려 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듯 하였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의 전생이름을 '마리아'라고도 하고 또 '싱하'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준아리아'라고 하느냐고 그의 아버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전생 이야기는 사망한 싱하의 아버지 오리베이로 씨의 농장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와 양들이 많이 있고 오렌지가 많이 열렸다고 하며, 우물물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머니의 말안장을 보면서 자기와 함께 산 것이라고 했다. 싱하와 이다는 사이가 좋아서 사실 그랬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가 싱하였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 축제에 구경갔다가 심한 비를 맞은 이후부터였다고 했다. 싱하는 폐병으로 죽었다. 싱하의 임종 직전에 문병을 갔었던 마르따의 어머니 이다는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다 곁으로 다가와서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난 꼭 환생할 거야, 당신의 딸이 되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애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거에요."

그러나 그때 싱하가 겨우 한 말은 "난, 난 약속해...." 하는 말이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마르따가 전생 발언을 시작하기까지는 로렌쯔 부부만이 알고 있었다. 싱하의 장례식은 폐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겨우 몇 사람만 참석했는데 마르따는 그때 참석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질렀다. 세리카가 "싱하, 싱하"하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리카의 환상(幻想)을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카의 죽음이 전해졌다. 세리카가 죽은 시각은 마르따가 환상을 본 시각과 꼭 맞았다. 세리카는 싱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다는 싱하에게 물어보았다.
"싱하는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어떻게 나를 대해주었지?"
"커피를 준비하고 집앞의 돌 위에 축음기를 장치하고서 집 밖에 나가 기다렸지요."

사실이었다. 이다의 집과 싱하의 농장과는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싱하는 이다가 오는 날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싱하도 마르따와 같이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르따는 자기 집에 온 싱하의 첫번째 애인을 알아보았다. 또 사촌도 알아보았다. 어느날 부친의 상(喪)을 당한 마을 여인이 마르따의 집에 왔을 때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예요. 나를 보세요. 나도 죽었었지만 이렇게 아직 살아있잖아요."

마르따가 열두살 때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갔다. 가면서 농장으로 가는 도중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전생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시계 뒤에 금색으로 자기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벽에서 떼내어 보니 과연 금색으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는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이야기, 집에 있던 고양이 따위에 대한 전생기억은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싱하는 일부러 병사(病死)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최후는 목과 폐를 앓아서 거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마르따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잘 앓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겼다고 한다. 또 마르따는 피와 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쉰살이 더 지나도록 싱하의 자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12화. 언니가 죽어서 남동생으로 환생한 파우로.

파우로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따의 남동생이다. 그는 마흔세살에 피해망상증으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자살하였다. 파우로 역시 어느 인물의 환생이었다. 곧 로렌쯔 집안에는 형제들 중에 환생한 아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렌쯔 씨에게는 파우로 위로 열두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맨 위의 누이가 '에미리아'라고 했다. 그녀는 열아홉살이던 1921년 10월 12일에 약물자살을 하였다. 로렌쯔 씨가 심령문제를 연구하였듯이 그의 아내도 심령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하여 영혼과 직접 교신을 하기도 했다. 에미리아가 자살한 얼마 후에 모친은 에미리아의 영혼에게서 통신을 받았다. 그녀는 자살한 것을 후회하며 남자아이로 환생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예언이 있은 뒤에 에미리아가 자살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1923년 8월 3일에 파우로가 태어났다.

파우로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하고만 놀고 남자와는 놀지 않았으며, 또 인형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옷도 바지를 입지 않고 스커트만을 입으려고 하였다. 음식 먹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흥미로운 버릇이 있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새로 만든 부드러운 빵이라도 가장자리를 뜯어내고 먹었다. 이것은 에미리아와 같은 버릇이었다. 네살 때에는 배운 적도 없는 재봉틀을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였는데, 집에 있는 재봉틀을 보고 자기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재봉하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것은 에미리아으 재봉 수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에미리아가 동생들 중에서 로오라를 가장 귀여워했듯이 파우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였다.

에미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20세기 초의 브라질에서는 여자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고, 특히 미혼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미리아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동생들에게 자주 말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파우로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서른아홉살이었을 때인데 그는 그때가지도 여성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교수는 그에게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동성애의 남자와 여자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파우로는 여성경향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독신이었고 결혼할 뜻도 없는 듯 하였다. 그는 여행 등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여성적인 경향의 두 가지 이유로 독신으로 지내다가 마흔세 살 때 자살하였다.






제13화. 손자가 되어 환생한 윌리엄.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알래스카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는 트란짓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명을 썼는데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자들의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훌륭한 어부였다. 그는 다른 트란짓트인과 마찬가지로 환생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환생하고 싶은 소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자기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셋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기가 만일 환생한다면 그들의 아들로 환생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두개의 반점을 가리키면서 그 아이는 이와 똑같은 모반(母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니 이 표시로써 자기가 환생한 것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 두개의 반점은 하나는 왼쪽 어깨에, 또 하나는 왼쪽 팔꿈치 옆에 있었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아들에게 주면서 그 시계를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훗날 환생할 것임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몇 주일 후인 1949년 8월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어선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셋째 며느리는 임신을 하여 1950년 5월 5일에 아기를 낳았다. 이 아이는 아홉번째 아이였다. 윌리엄 죠오지 1세의 실종이 있은 지 9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며느리는 출산시의 진통 중에 꿈을 꾸었다.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자기 아들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 뒤, 마치 시아버지가 있는 것 같은 환각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죽기 전의 어른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왼쪽 어깨와 왼쪽 팔에 검은색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에게는 윌리엄 죠오지 2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죠오지 1세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도록 하였다. 1세와 얼굴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성격까지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고기잡이나 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느 만(灣) 부근이 제일 좋은 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선의 그물 사용법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아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보석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방에 우연히 들어왔다가 금시계를 보더니 "이건 내것이야"하면서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열살쯤 되면서부터는 전생기억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14화. 부족 전쟁에서 전사 후 환생한 찰스.

이 사례에서는 어린 시절에 전생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당사자가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였다. 1961년 스티븐슨 교수가 조사할 당시에 찰스 포터 씨는 쉰살이 넘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써 자기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사례는 다른 것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린 시절에, 그는, 트란짓트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싸우다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해당한 장소와 죽인 상대방의 이름, 또 자기의 전생의 이름 등도 말했다는데, 전생에 자기를 죽였다는 사람은 그의 외숙부였으며 당시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찰스가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오른쪽 배를 가리키며 창에 찔려 죽었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을 안 것은 성장한 뒤에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배의 늑골 바로 밑에 검은색 반점이있는 것을 스티븐슨 교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창으로 찔린다면 간장을 상해서 즉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찰스 포터는 1907년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살 위인 누이의 말에 의하면, 찰스가 부족 전쟁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 시기는 1909년에서 1915년 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한 노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가령 이 노인이 1910년에 적어도 예순다섯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1845년에 출생한 셈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트란짓트인이 부족 전쟁에서 점차로 창을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는 1852년에서 1882년 사이일 것이라고 한다. 18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장성하여 창을 쓰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부족 전쟁 중에 창으로 살해되었다는 찰스의 말은 이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미 아흔살이 넘은 찰스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전인격(前人格)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참가 인물 등의 일을 이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그 뒤에도 62년, 63년, 65년, 72년에 각각 앨러스카의 그를 방문하였고, 때로는 편지연락도 했다. 1972년 예순다섯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제15화. 창검에 대한 공포를 가진 데레크.

1852년(또는 1853년)에 알래스카의 시트카와 랑겔 두 지역의 트란짓트인들 사이에는 화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시트카 측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랑겔의 대표자 사십여 명을 살해했으며 그 중 몇 명만이 겨우 랑겔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 일이 있는 뒤로 1918년에 새로이 화평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양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데레크가 출생한 것은 1918년으로, 그 참극이 있은 지 60여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에 모반(母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조상 중 어떤 한 사람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서른여덟살이 된 1955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웬 할머니가 그 모반을 보더니 랑겔의 토착민인 '쿠'라는 사람이 입은 치명상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 것이다.

데레크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쿠'라는 사람은 앞서 말한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자기 부족인들을 죽이려거든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며 맨손으로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데레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쿠에 대한 전생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쿠와의 사이에서 깊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어린 시절부터 칼, 총, 창 등에 특별한 공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년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군대에 입대했으나 총검의 훈련을 아주 싫어했다. 또 자신의 아이들도 칼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그의 병적인 공포증은 총과 같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칼날이 달린 무기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랑겔 태생인데 시트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시트카에 거주하면서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의 조직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두 지역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좌절과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화평 교섭을 위해 시트카에까지 원정을 가서 생명을 잃은 쿠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도록 칼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식사 때에 나이프를 쓴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 데레크 자신은 긴장했을 때 가끔씩 배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생과 질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16화. 조카딸의 아들로 환생한 콜리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제17화. 데자 뷰에 의해 전생을 기억한 노먼.

노먼은 194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서너살쯤 되던 어느 날 부모와 함께 고향에서 50㎞쯤 떨어진 외딴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노먼은 갑자기 흥분하여 자기는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의 이 말은 그의 할아버지인 헨리 데스피스 1세의 생애와 두가지 사실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하며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갖고 있었다. 1935년에 여든다섯살로 죽었는데 마지막 4년 동안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에 이 훈제소를 버렸고, 노먼이 그곳에 간 1947년에는 말뚝 몇 개가 남아 있을 뿐 훈제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것으로써 노먼은 할아버지가 환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노먼은 시력이 약해서 열네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한 근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또 그의 네 형제들은 시력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처음보는 상황이 과거 어느 때에 체험한 것 같다는, 일종의 착각 현상인 데자 뷰(Deja-Vu) 경험에 의해 환생을 말하는 사례는, 구체적인 자료는 적으나, 세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환생 사례이다.











제18화. 누님의 아들로 환생한 지미.

지미 스벤손은 1952년 11월 22일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두살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생에 현세의 엄마의 동생이었으며 크러쾅 마을에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트카에서 약160㎞쯤 떨어진 크러쾅에는 엄마의 동생인 존 시스코가 이전에 살았었다. 지미는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이삼년 동안 전생 이야기를 하다가 그 뒤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에 이 사례를 조사했는데 그때 아홉살이던 지미는 이미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간접증언에 의한 것이다.

지미의 외삼촌 존 시스코가 죽은 것은 1950년 여름으로 스물다섯살 때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몇 시간 뒤에 보트만 발견되었다. 그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두 여인의 질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지미는 자기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배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네개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개의 환생기억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존이지 지미가 아니라 하면서 크러쾅에 가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뒷날 크러쾅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나 장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였으며, 시스코의 친구였던 이를 만나서는 고기잡이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외삼촌 한스 시스코에게 "나는 조카가 아니고 동생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생기억은 네살 때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19화. 전생의 총탄 흉터를 가진 헨리.

헨리 엘킨은 1899년 앙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가슴과 등에는 모반이 있었는데, 서로의 위치로 볼 때에 총탄이 앞뒤로 관통한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생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앙군의 공회당에 갔을 때에, 건물 안의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예전에 외할머니를 자주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80년 이전에는 여자들이 이 공회당에 모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헨리는 여덟살 때에 전생에 대한 일을 문득 기억해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구해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건은 있었지만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헨리의 이런 기억들을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그의 진술에 의거할 뿐이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바다에서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 곧 부모에게서 "그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무렵에는 아직 너의 누이가 살아 있었고 누이는 그때 아버지의 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누이란 아직 헨리가 어렸을 때 열두어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볼 때 이 누이가 죽었을 때 그는 대여섯살쯤 되었으리라고 보면, 헨리는 1899년에 태어났으니, 누이의 죽음은 대략 19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때가 열두어살 때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1892년에 출생한 셈이다. 이 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은 대여섯살 이후였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문제의 인명구조 사건은 1897년 쯤의 일이다. 헨리가 태어난 1899년에서 불과 2년 앞선 일이다.

헨리의 전생기억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전생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런 기억들을 그가 환생하기 이전의 중간적 생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례는 트란짓트인의 사례 조사에서 중간적 생애에 대한 전생기억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0화. 여자로 환생한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 떨어진 탈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 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 긴 터널을 지나간다. 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 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켈레에 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불제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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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분 동안 사후세계를 갔다온 대니언이 들려주는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

 

 

 

 

Dannion Brinkley의 NDE


데니언은 이태까지 기록된 시간 중 가장 긴 28분 동안의 NDE를 체험 했습니다. 그의 28분 간의 체험은 그의 감동 적인 베스트 셀러

 “Saved by the Light”에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데니언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상처주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10대 후반에 그는 해병대에 입대합니다.

이제 그는 그의 화와 폭력성을 사람을 죽이므로서 풀 수 있게 됬습니다. 데니언은 이 일을 너무 잘하여서

 기밀 부대의 신임이 되었고 정치과 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정부의 암살자가 됩니다. 그는 그 시절 이 일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1975년에 전화를 하고 있던 도중, 데니언은 번개를 맞았습니다. 의학적인 죽음을 겪는 동안 데니언은 NDE의 모든 면모를 보게 됩니다.


데니언은 응급 요원들이 그를 소생 시킬려고 하고 있을 때 자신이 허공 위에 떠있는 자신을 발견 하게 됩니다. 응급 요원과

의사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를 다시 살릴려고

했지만 실패 했습니다.


허공 위를 떠도는 도중, 데니언은 터널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데니언이 터널 쪽으로 걸어가자,

터널이 그의 주위를 나선형으로 소용돌이 쳤고 그 순간 그는 일곱

개의 종 소리가 끊임없는 리듬을 들었습니다. 그가 어둠속으로 급히 다가가자 그는 자신이 빛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빛은 점차 밝아져 그가 생애 보던 빛들 보다 더 밝은 빛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개의 실루엣 같은 은색 빛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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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언은 빛에게서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빛이 다가가자, 저항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과 그 빛이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 챘습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는 그의 아래쪽에 그와 같이 생긴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길을 잃은 듯 보였지만

그 만큼 짧은 주기로 반짝거리진 않았습니다. 이 것들을 보고 있던 중 그는 그 자신의 주기도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 변화는 그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가 위를 올려다 보자 그는 그보다 밝고 주기도 짧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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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그를 삼켰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가 생애 겪었던 일들, 감정들을 다시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도 다시 보았습니다. 데니언의 인생의 회고는 불쾌했습니다.

 그는 그가 자기 중심적이고 비열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고통과 폭력, 그리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가 사람들을 죽일 때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혼란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사람들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과 공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의 인생에서 느꼈던 큰 행복감도 느꼈습니다.

이 시간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거나 의미 있게 도왔던 순간들 이었습니다.

데니언은 이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는 동안 아무도 그를 판단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사람을 가장 호되게 평가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회고가 끝나자, 데니언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가 빛을 보자 그는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빛은 그에게 가슴으로 “Who you are is the difference that God makes, and that difference is love.

”라고 전했습니다. (정확한건 모르겠지만, 사랑으로써 인간이 특별하다는 뜻 아닐까요^^??)


빛이 떠나자 그는 그의 의심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빛은 또한 그에게 “인간은 지구에서 선량한 것들을 만드는 영적으로 강력한 존재이다. 이 것은

대담한 행동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것은 두 인간 사이의 인정 사이에서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작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발적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서 데니안은 자신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번개에 맞았고, 이제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이 인생의 비밀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입니다.


데니언은 그 당시 빛이 관대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가혹한 평가는 없었고 빛은 오히려 친한 충고자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데니언과 빛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Pietro Antonio Locatelli 
Concerto for violin op.3, no.9 
Giuliano Carmignola, violin 
Andrea Marcon, cond
Venice Baroque Orchestra

 

1. Allegro-Capriccio-Cadenza-Allegro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53·끝>br>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지상에서 생활 중 올바른 영혼성장에 힘써라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천국과 지옥’.
인간이 죽어서 가게 된다는 천당과 지옥은 우리에겐 아직도 영원한 미스터리인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의문,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질 수밖에 없는가. 영계(靈界)를 볼 수도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각자 종교적 신념이나 세계관에 따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종교인은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생물학적인 사망 이후에도 의식이나 생명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등 중동의 종교 전통과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의 종교 전통이 이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유교를 비롯한 중국 문화권의 종교 전통은 죽음이란 말 그대로 ‘존재의 소멸’로 간주합니다.

영계는 아직 우리에겐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계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지상인들에게는 혁명적 변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우선 교리적 차이나 이해타산에 따라 분열을 거듭해온 종교의 혼란을 수습할 뿐만 아니라 인간 각자의 생활태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이 증거하듯이 지상생활이 영계의 삶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세상에 이만한 구속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과 사,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물론 아직 지상의 삶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까지도 모두 사후에 전개될 세계에 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사후세계에 대한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증거를 통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통인(靈通人)이나 ‘사후 보고서’와 같은 영계 관련 서적들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계에서 수많은 영통인들을 통해 계시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각고의 어려움,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허물을 벗고 대자연의 품속에 안기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육신의 탈을 벗어던지고 시공을 초월하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식, 영계의 삶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계에 대한 증언의 공통점=사후세계에 대한 증언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영계는 천리법도, 원리원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나 정직과 같은 원리원칙이 인격의 잣대가 된다는 것은 영계나 지상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가난과 병마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된 것은 천리법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주나 인간의 육신에서 원리원칙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만일 영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는 이보다 더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많은 영통인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일탈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인간생활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부나 이웃 간의 사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지 간에 사랑은 늘 강조돼 왔습니다. 성인들도 물론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영계에서는 어떨까요. 영계에서도 사랑은 영인들의 인격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을 테고, 나라와 세계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만한 수준의 세계에 살 수 있습니다. 역시 남을 괴롭혔던 사람,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은 사랑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넘치는 곳, 살맛나는 세상이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계는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지상인이 임종 후 자기 스스로 심판하고 자신의 영적 기준에 맞춰 거처를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영계가 원리원칙이 강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영계에서도 좋은 곳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지상생활에서 영혼을 성장시킨 후에 영계에 가도록 돼 있습니다. 결국 육신의 허물을 벗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세계, 영혼의 세상에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육신생활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은 지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잘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욕심에 찌들려 살았거나 늘 의심의 눈초리로 타인을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영계라는 별천지 세계에서도 그 습관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비뚤어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잘못 형성된 영혼으로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 영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거나 인간을 그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스스로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영인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영계는 판사들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대심판관도 없다. 누구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처리한다. 자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 된다. 그러한 심판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상에서 한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기간 우리는 인격의 성숙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성장은 육체와 정신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즉 지상생활은 참인간으로 성숙되기 위한 훈련기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참인간으로 성숙될 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삶의 목표와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교육이나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왔고 성인이나 위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내용입니다. 종교인이나 영계 연구자들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지상생활의 최대 목표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분명히 그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각 종교단체는 영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영계에 대한 교육에 나설 때입니다. 각자는 지상에서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면서 영계의 삶을 준비할 때가 지금입니다.

◇영계에 대한 준비, 올바른 영혼 성장법=영계는 지상생활을 통해 성장된 영혼이 생활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이 행복하려면 지상생활에서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영계의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원칙을 특별히 지켜야 합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 즉 자연 순응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세상의 존재 목표가 있다면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순응적 삶, 다시 말하면 자연의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요즘 이야기하는 생태주의적 삶을 말합니다. 생태주의는 천지법도적 삶이요 도덕·진리적 삶입니다. 최근 각 분야에서 생태주의가 크게 부각되는 것은 마구잡이식 개발경쟁으로 자연환경의 훼손상태가 심각해진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은 바 그대로’, 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 없이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친화적 삶은 본래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살게 돼 있는 천리법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즉 상대방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체적, 공생체적 관계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로 돕지 않을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처럼 인간 서로 간에도 적용됩니다. 성인들이 부르짖은 사랑이나 자비, 인(仁), 희생적 삶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이기심이나 타락적 근성과 같은 것은 인간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경쟁논리도 따지고 보면 장점도 있지만 인간성을 말살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기독교의 주장대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목적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본연의 행복된 삶을 통해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한번도 창조본연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창조본연의 삶은 자연순응적 삶이요, 남과 어울려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행복의 극치를 지상에서 맛볼 때만이 영계에서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영계를 아는 이들의 증언입니다.

영계에 대한 실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에게는 신비스럽고 복잡하기만 한 영계의 내용을 체계화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영계의 신비를 밝혀줄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만 갖는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안타깝게도 지상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영계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에서 전개되는 모든 생활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영계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타락성을 벗어버리는 교육,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천국생활을 위해 영계의 구조와 규범, 영인들의 자세 등을 담은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개인을 위한 삶은 생존 중심의 1차원적 삶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한 터전 위에서 2차원적 삶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적 삶, 공생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3차원의 삶인 영적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여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말 인간다운 삶, 영원한 세계를 위해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omkwon@segye.com

                                                                                                                             

 

Greenfe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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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불교 집안의 상가집에 가면 간혹 ‘생야일편 부운기 사야일편 부운멸(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즉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는 법문이 쓰여져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음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직접 경험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이러한 ‘오래된 질문’을 던져온 것이 인류사 특히, 종교사에서는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찾고 신(神)을 믿으며 영생을 갈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불교에서도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부처님의 출가동기가 생로병사의 해탈 추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도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인생고의 근본원인 중의 하나로 본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생과 사, 죽음과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상반된 고정된 실체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생로병사를 있게 한 요인은 마음속의 번뇌 망상이고 나를 위주로 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기준해서 지나치게 세운 기대가 어긋난다고 할 때 괴로운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뜰 앞의 단풍잎 하나 떨어지는 걸 보는 거나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보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체험을 하신 게 부처님의 생사관의 특징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일생의 대사는 생사’라는 이야기가 하나의 화두로 전해져 오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79년간을 사시다가 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내가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그 전에 의심나는 게 있으면 모두 물어라"하셨다. 그 때 많은 대중들이 무척 섭섭해하고 애통해했다. 부처님을 신앙의 의지처로 삼고 살았는데 부모를 잃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그런 슬픔이었다.

  그 때 아난 존자가 대중을 대표해서 질문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첫 날 첫 말씀이 뭡니까? 나의 생사는 이제 끝났다. 나는 열반을 증득했다. 감로의 물이 흘렀으니 모두 와서 마셔라.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셨는데 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까? 그 날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열반에 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열반에 드셔야 한다면 그 날 하신 말씀이 거짓이었다고 수정 발표를 하셔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제자들아, 여래가 열반에 든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요, 여래가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얼른 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마지막 말씀을 남겨 두셨다. 여래 또는 개개인의 인격체에는 열반에 든 부분과 아닌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열반에 든다고 하면 열반에 안 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든다고 하게 되고, 열반에 안 든다고 하면 열반에 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안 들었다고 하게 돼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법칙에서 어긋난다.

  육체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정신세계에 이르면 내가 지금 죽는구나 하더라도 이것은 뜬구름이 피어올랐다가 바람 따라 지나가는 걸로 무심히 볼 수가 있다. 이것을 일러 생사의 고통을 뛰어넘었다고 하는 이른바 초월한 경지이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를 ‘죽음 앞에 떳떳하기 위한 공부’라고 말한다. 올 바른 생사관은 삶을 즐겁게 누리고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는 길이 될 것이다.

 

 

 

하 늘 소 리
 

삶이란 하나의 커다란 도화지와 같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색으로 삶의 도화지를 채워라
(데니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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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 가는길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를 살아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혼(anima)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혼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해 주는 기준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신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단계가 높아지면서 영계, 즉 영혼은 어디에 가서 거처할까 하고 궁금해 한다. 불교에서는 그곳을 극락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천당이라고 한다. 둘 다 같은 개념이다.

아미타경에 따르면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관장하는 영역으로 10억 부처를 지나서 있다고 한다. 거기서 거듭 태어나는 자는 심신의 괴로움이 없고, 다만 즐거움만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간적인 거리와 사람이 사후에 간다는 시간적인 거리는 물질적인 낙토관(樂土觀)을 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중생구제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10억 부처 너머에 아미타부처가 있다면, 은하계로 말하면 10억개의 은하계 저 너머에 극락이 있다는 이야기일까 하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사람의 머리로는 영혼이 거처하는 곳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저기가 아니다. 영혼은 그냥 우주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공간을 생각하는 인간들의 상상일 뿐이다.

우주 본체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하여 만든 개념이다. 시간이란 원래 없는 것이다. 현재 이 순간이 태초이자, 과거 현재 미래이다. 지금은 무한히 계속되며 시작도 끝도 없다.

극락이나 천당이라는 것은 어떤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마음 가운데 근심걱정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 즉 해탈의 상태에서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 그런 상태를 극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완전히 안정된 상태에 진입한 영혼을 불교에서는 부처, 기독교에서는 성인(Saint)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천당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영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영적 세계인 것이다.


 

춘목(春牧) 칼럼니스트

 

 

 

  

마음이 청정하며/명상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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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론은 심리학, 사회학, 물리학, 생명과학이다
 
20년 전 여름, 나는 지방의 어느 암자에서 귀한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만난지 얼마 안되어 마음이 통한,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 분의 문학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한 원로시인의 주선에 따라 만난 손님은 주교 한 분과 대여섯 분의 신부 수녀들로서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겸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시작한 이런 저런 환담은 그 분들이 참여한 저녁예불에까지 계속되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다. 음주가 절집 안에서는 금기가 되어 있지만 그 때는 예외로 했다. 예수의 성찬의식의 전통에 따라 포도주를 신성히 여기고 즐겨 마시는 그 분들의 뜻을 존중해 마주앙 몇병도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쨌던 아름다운 산세와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산사의 청정한 분위기에서 가톨릭 신학자와 불교 승려가 마주앉아 공양을 같이 나누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흔치않은 일일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차와 과일을 들면서는 본격적으로 대화가 이어졌는데, 어느 지방의 대학장을 맡고 있는 신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개도 되고 소도 되고 또 짐승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데 그 것을 윤회라고 한다지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의 표정을 보니 마주앙을 몇잔 마신데다가 약간 열이 올라 상기한 상태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때만해도 나는 불교학이나 사회학문을 충분히 체득 못했던 터라 쉽게 설명을 못했으나, 내 기억으로는 당시 윤회설을 인간과 만물의 순환원리로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 것 같다. 쉽게 말할 수 없는 형이상적 문제를 두고 한 이런 직접적인 질문을 직설로 바로 대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지금도 다만 원리나 간접적인 비유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 때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으나 지인인 원로시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정하는 뜻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범신론으로 자연의 순환원리라고 본다며 나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의외였다. 그 분의 젊은 시절, 한분의 문단 대표시인과 승려시인 셋의 지상토론에서 본 그 분의 견해인즉 범신론은 혹세무민의 미신이요 유일신 하나님만이 우주와 자연의 주체라고 하신 분이 어떻게 지금은 180도로 달라졌을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돌아가시기 몇해 전 그 분의 대표작품은 <하나의 물방울과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흘러 흘러 강과 바다가 된다>는 범신론적인 작품을 남겼다. 생명 하나 하나가 신의 창조물이라 여기는 극히 단순한 논리의 기독교인에게는 이단같은 말이지만 모든 생명의 상생과 조화가 화엄의 세계, 즉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범신론적 사유인 것이다.
 
<윤회는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불교적 사후관인 윤회의 문제를 좀 더 쉽게 접근해 보자.
 
인간은 죽으면 끝이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 인간과 생명은 단지 물질로 이뤄졌을 뿐 사후엔 영혼도 사라진다는 유물론적 이론이 있고, 영혼은 있으되 죽으면 신의 의지와 심판의 타력에 의해 천당과 지옥에 갈 뿐이라는 유일신적 흑백론.양극론 등의 유신론,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는 윤회론이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종교이자 정치철학인 유교에서 공자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라며 내세를 모르거나 부정했다. 그래서인지 불교국 고려를 쿠데타로 뒤엎고 조선왕조를 세운 성리학 이론가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서 부처의 기도나 윤회인과설은 혹세무민이다"라며 부녀자들의 사찰출입도 금지한 불교의 탄압을 합법화시킨, 500년 불교말살의 일등공신이자 사대주의적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의 일등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피나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인과법칙과 윤회가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집 앞 공원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심호흡을 해 본다. 그 시간만큼은 무념무상, 곧 뇌와 마음이 빈 상태로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 아니면 명상의 시간도 좋다.
 
그 때가 바로 천상이요 천국이 아닐까.(천국의 시간이 너무 많은 게 탈이다)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뉴스와 신문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겹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바로 인간으로서 누리는 인간세상이다.
 
옷을 갈아입고 회사에 출근하거나 일을 위해서 문 밖을 나서면서부터는 많은 사물과 부딛히고 경쟁하며 가족들과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야말로 아수라같은 치열함과 사나움으로 세상과 대적하니 바로 아수라 세상이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어 범죄를 저지르고 평생의 위업인 재산을 탕진한다.
 
예컨데 사소한 말다툼으로, 또는 견물생심으로, 사람보다 돈이 더 탐나서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다. 매일같이 매순간 일어나는 짐승세계가 아닌가. 바로 축생세상이다.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에서 어떤 이는 배가 너무 불러서 태평천국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너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럽다. 밥을 굶은 사람이 날로 늘어가고(특히 배고픈 북한인), 상류층이나 비만환자는 살을 빼느라 고생하고 온통 다이어트 붐이다. 더 배를 채우고 새 곳간을 짓느라고 난리를 친다. 옛말에 만석꾼 부자가 한 섬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곳간을 넘본다는 말이 있고, 돈 많은 부자가 구멍가게의 푼돈을 보고 탐낸다.
 
(태산같은 산림과 자연, 관광객의 푼돈밖에 없는 불교재산을 엄청난 갑부인양 여긴다. 돈 많은 개신교는 불교가 부자거지라고 손가락질하고, 돈 많은 가톨릭은 불교가 알부자라고 한다. 어떤 것이 맞는가 물으면 이유도 모른다. 연관성이 떠올라 옆길로 갔다.)
 
무지하고 사납고 탐욕스러운 양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아귀세상다.
 
매일같이 교통사고로, 불치병으로, 자살 타살로, 독재시절때는 인권탄압과 고문 지명수배로 사람들이 죽고 지독한 고통을 받으니 바로 지옥세상이다.
 
매시간마다 자신을 관찰해 보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국이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마음 속에 시시각각으로 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도윤회는 사후세계에서 찾지말고 바로 현재 여기에서 자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회는 과거며 현재요 미래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전쟁, 병, 사고, 자살, 타살, 고문 등으로 죽은 생명들.... 특히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태아형의 죽음을 두고 <죽으면 끝>이라면.... 너무 허무한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일회용 소모품이요 시계의 부속품으로 생명의 가치와 고귀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유신론, 무신론을 내세우면 신이 만물의 중심으로 삼는 중세시대와 마르크스 이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단지 신을 믿는 신본주의시대의 개념으로서 근세 이전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본주의시대를 지나 생명과학과 우주시대를 맞고 있지만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뇌의 구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 수구보수주의에 머물고 있다.
 
한국에 몇번 다녀간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베르(파피용 등)의 작품세계는 17세에 접한 티베트불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개미, 뇌 등에서 인간의 업은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면서 기록된다고 한다. 뇌는 필름창고같이 무한한 시간, 즉 전세, 현세, 미래세를 기록하는 것으로 불성을 상징하며 작은 우주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인간의 운명 내지 삶은 어떤 절대자가 정해주는 숙명이 아니라 업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범신론의 만물평등, 유신론의 만물차별>
 
불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연기, 인과,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왜곡될 수 있다.
 
선불교에서는 유심론을, 밀교에서는 범신론을, 화엄학은 우주론과 생명과학이 되고, 법화경에서는 세상의 구원사상, 금강경에서는 교만을 없애는 예지를, 능엄경은 우주의 기원을, 아함경에서는 도덕율이 핵심이다. 원각경은 인간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용수, 마명, 원효는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공존해서 평화를 이룰지 철저히 분석한 대승불교의 대사상가이며 따라서 대승불교는 인류공존의 원리를 밝히는 인류평화학이라 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초심리학을 다루고, 인류역사의 오래된 윤회, 만물유전론은 일찌기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인도 전역에 퍼졌던 학설이요 신앙이었으나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금기로 굳어진 것이다.
 
나는 윤회, 인과, 공사상, 범신론, 무아론을 체득하기까지 평생의 시간이 걸렸다.
 
동서양 철학서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 사상서,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의 과학, 유불선의 서적과 스승을 찾았고, 그것도 모자라 인도, 티벳,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외 넓은 땅을 헤메면서 얻은 깨달음은 <문화인류학의 총체는 불교>라는 것이다.
 
윤회, 공사상은 심리학, 생명과학, 종교, 철학, 정신의학, 사회학, 천문학, 지리학같은 고도의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을 단지 특정종교의 교리, 신앙차원에서 보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으로 본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밀교)에서 윤회는 실상을 말한 것 뿐이다. 윤회가 목적이 아니다. 끝없이 죽고 태어나는 생사윤회의 삶을 벗어나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얻으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와 고통, 상극과 대립, 허무의 불행한 삶에서 해탈과 열반(자유(해방), 평화, 행복)으로 인도하고저 한다.
 
도올 김용옥의 친형인 한국기독교과학협회장 김용준 박사는 몇해 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인간과 벌레는 유전자가 98% 일치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인간과 짐승, 동물과 곤충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차별적으로 보 지만, 생명과학에서는 불과 2% 차이라고 하니 충격적이 아닐까.
 
500만년 진화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1%, 즉 99%의 유전자가 동일하다고 보면 인간은 원숭이와 사촌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억겁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아닌 우주와 생명의 시간, 곧 윤회를 반복해서 오늘을 만든 것이니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만물을, 강자가 약자를, 동물이 식물을 지배한다는 만물지배론이나 약육강식론은 강자에게 축복을, 약자에게 저주와 죽음을 합리화시키는 권력도구였다.
 
반대로 풀을 먹는 동물과 약한 동물이 있기에 강한 동물이 있는 것이며, 육식보단 채식이 장려되고, 모든 동식물 때문에 인간의 삶이 유지된다는 상생화합의 겸손한 철학과 평화주의는 어떨까.
 
이미 서구의 육식성 정복주의는 스스로의 미망을 깨닫고 동양의 자연환경주의, 채식주의, 평화공존주의, 신과 인간의 이원론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말하는 범신론, 생명과학주의의 윤회, 인과, 무아, 공을 인식하고 폭넓게 실천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뗏목이나 병을 고치는 약이 방편이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윤회론은 중요하다. 방편, 혹세무민으로 윤회를 보는 사람은 단순논리에 집착하거나 심안(心眼)이 열리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윤회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큰 '지구생명'이란 나무에서 나온 공존, 평등,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윤소암 (시인·시사평론가)

출처 :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글쓴이 : ♣영원한 기다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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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능력이 생기게 만드는 요소들

영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별 관심대상이 아니지만 때때로 영적                   

 

능력이 생기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충격, 의문, 명상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영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길에 서서 꾸준히 갈고 닦으면 반드시 영 능력이

 

생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치신 분이다.

 

 처음에 카피라 성문 밖을 돌아보고 중생들이 생노병사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그들의 아픈 생활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 왕자로서 편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

 

이게 사는 것이란 말인가 ?

 

 영원히 사는 법이 과연 무엇일까 ? 여러모로 고민한다.

 

이 과정이 바로 의문을 가지고대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서 성을 떠나 스승들을 구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기 혼이 스승임을 깨우치고 설산으로 향한다. 이 부분이 바로 명상이다.


충격 >  의문 > 명상 이 3단계는 누구나 수행자에게 반드시 요청되는 중요과정이다.


그럴듯한 직책 맡아서 위세나 부리고 힘주려 하는 이들은 평생 이 과정이 다가올 까닭도도 없을 것이며

 

큰 그릇으로 커지지도 않는다.


충격이란 문자 그대로 충격이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아니면 인생길에서 큰 상처를 입고 도저히

 

일어서지 못할 상황에서 영능력이 생기는 일이 흔하다.


그 예로서 무당 들 중에서 애인에게 버림을 받고 그 날부터 울고불고  몇 십일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방에

 

칩거하다가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뛰쳐나오는 경우가 바로 이런 현상이다. 내면을 살펴보면 신이 온 것

 

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다시 재가동되기 시작한 일일 뿐이다. 쉽게 말해서

 

그 동안은 인간적으로 뇌에 의지하여 살다가 비로소 영혼의 존재가 충격으로 인하여 겉으로 드러나서

 

활동하기 시작한 일이다. 오직하면 , 경희대 명예교수님이신 서정범 교수님이 이런 내용의 말을 하셨겠는가.


“ 무당들은 정신적으로 무척 외로운 사람들이예요. 사랑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증환자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실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이 많지요. 저는 신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기를 가지고

 

신이라고 말합니다.”우리나라 사람이 많거나 적은 신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유도 이런 한 맺힌 과정이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병석에 누워서 죽을 날 만 기다리던 환자가 갑자기 일어나서

 

 병이 다 나았다고 외치며, 그날부터 영 능력이 생겨 타인 점을 보는 일도 있다. 그런 경우는 병고라고 하는

 

고통이 그에게 충격을 주어 “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하는 사생결단의 의지가 발동한다.


그 의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드디어 살아 있는 영혼의 커튼이 서서히 열려 젖혀지는 일이 바로 영 능력의

 

 발현이다.그 다음 과정이 명상이다.불가에서는 이를 가리켜 참선이라고도 말한다


영 능력은 글자 그대로 자기 영혼의 능력이다.


영혼의 능력은 명상을 통하여 뇌기능을 쉬게 해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뇌라고 하는 신체부분은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시적, 통관적인 감각을 무시하고 오로지 육신으로 전달된 정보만을

 

 가지고서 일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 차이가 들어나는 경우에 머리가 좋으니 요령이 좋으니 통찰력이

 

있느니 어쩌니 하는 얄팍한 부분적인 능력 차이로 말을 하게 된다.


명상은 충격을 받은 자가 그 의문을 깊이 새겨서 뇌의 기능을 쉬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부처님이 되기도 하지만, 최소한 자기의 영적 능력을 틔우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불가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이 현명해지게 만드는 결정적 성과를 내어준다.


수행과정에서 아나함. 사다함. 아라한의 과정이란 이런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야식이니 말라 식이니 하는 용어도 뇌 의식 구분이 아니라 영혼의식의 구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충격을 받기 싫어하고 곱게 자란 사람들이 그저 쉽사리 영 능력을 얻겠다고 힘쓰는 일이다. 더구나

 

신을 받으면 그날부터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란 정말 눈뜨고 못 볼 일이다.  그들이 신을 받아

 

보았댔자  소용이 없다. 신은 자기의 영혼을 통하여 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천시하는 무당들이 무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쓰라린 신고를 겪었는지를 안다면 그런 가증스러운 말이

 

 안 나올 것이다.그래서“무당도 못 되는 것이 무슨 수행자냐 ?”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처 : 비비디바비디부
글쓴이 : 리치본 Bizlin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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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침몰 예언과 그 외 지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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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는 1934년에 일본, 유럽, 극지방의 지각변동 등에 대해서도 중요한 예언을 했다.

① 일본의 침몰: “일본의 대부분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The greater portion of Japan must go into the sea.)

② 유럽 지역의 변화: “유럽의 북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될 것입니다.”

③ “북극과 남극지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열대지역에서는 화산폭발이 있을 것입니다.”

④ 소련의 미래: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에
각자가 자기 민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원칙
이 그 곳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⑤ 중국의 미래: “중국은 여러 계급과 교파를 통합하게 되고
이들은 민주주의의 길을 향해서 단합할 것입니다.”

 

일본 침몰에 대한 케이시의 리이딩은 그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위의 영어 원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유독 일본에 관해서만은 일반 예언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머스트(must)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케이시는 일본열도가 운명적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

극이동에 의한 대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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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케이시의 극이동에 대한 예언에서 중요한 것은, 천지의 대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우주 변화의 어떤 순환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이 이동합니다. 극의 이동이 생길 때 ‘새로운 사이클’이 생깁니다.

이는 곧 ‘재조정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케이시가 말한 이 내용은 분명 지구 최대의 신비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지구의 극은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 것일까?

또한 극이동 후에는 지구의 사이클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일까?

즉, 그가 말한 새로운 사이클의 대진전이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개벽의 핵심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시원스런 해답을 주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이 때에 일어나는 변화의 현상에 대해서만 약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케이시는 지구 기후의 현저한 역행을 가져올 극점 이동의 서곡으로

‘북극 및 남극지방의 대변동’과 열대지역의 화산 폭발에 대해서 말했다.

출처 : 이것이 개벽이다. 상 / 안경전 저/ 대원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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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열(熱) 받고 있다
 
남극서 떨어져 나가는 빙산 급증

미국의 국가빙하센터(NIC)는 지난 11일 남극대륙을 덮고 있는

빙붕(氷棚)에서 거대한 빙산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고 발표했다.

C-19로 명명된 이 빙산의 크기는 길이 196.4㎞, 폭 30.6㎞에 이르러,

면적만 놓고 볼 때 5948.64㎢로 여의도 면적의 무려 71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올 들어 분리된 빙산은 모두 4건에 달하며, 현재까지 빙산 44개가

남극 대륙 근방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으로 추적되었다.

만일 남극 얼음이 다 녹을 경우 지구 해수면은 5m 가량이나

상승할 것으로 추정된다. (2002. 5.17 기사)

 

  가장 필요한 일 : 대개벽의 소식을 널리 전하는 것

 

제스 스턴이 말한 바와 같이 대격변의 시간표가 이미 예정되어 있어서 그 운명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경건주의자였던 케이시의 다음과 같은 도덕적인 진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에게 신의 찬란한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현상을 알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는, 지구의 내부와 외부의 변화 요인 가운데에서

특히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생기는 파괴가 지구에 밀어 닥치게 됨으로써 시작된다고 하였다.
에드가 케이시는 마지막에 일어날 변국의 종합적인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전쟁, 지구 내부의 변동 및 극점을 연결하는 축(軸)의 변화에 의한 지구의 전이(轉移)입니다.

대적인 예언을 부정했던 그도 전쟁이나 대파괴의 시기에는

각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거의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아마 이는 그의 수준 높은 지성의 예지력으로 가슴 깊이 느꼈을 우주의 숙명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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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글쓴이 : 맒은 영혼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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