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되는 요령 사람 좋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들어가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손쉬운 방법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요령을 적어본다. 껌은 휴지에 싸서 버린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껌종이를 버리지 말고 주머니에 잠깐 넣어 놓았다 쓰면 된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추임새를 넣어준다. 뭐라구? 그래서? 응!, 근데? 정말? 와!!! 등이 있다. 여성용으로는 어머,웬일이니? 와 강조용으로 어머 어머 어머머!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된다. 아무 거나 마음대로 골라 써라.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임을 잊지 마시라. 깜박이도 안 키고 끼어 들어도 욕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욕이 나오면 다음 주까지 기다렸다 한다. 생각이 안 나면 잊어버리고 말자. 어차피 우린 깜빡깜빡하는데 전문가들이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은 하지 않는다. 여섯 살 아래 아이들은 장난과 괴롭힘을 구분 못한다. 남의 집 애들한테도 그랬다가는 그 집 부모도 당신 싫어한다. 식품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품은 선반에 올려줘라. 아량을 군주만 베푸는 건 아니다. 군주만이 아량을 베푸는 거 맞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이와 걸을 때는 천천히 걷고, 여자와 걸을 때는 차도 쪽에는 당신이 걸어라. 아이 입장에서 행동하고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옆에 누가 있으면 장소에 상관없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당신은 내가 씹던 껌 주면 씹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당신 목구멍에서 나온 연기를 마시고 싶지 않다. 칭찬 좀 많이 해라. 진지한 칭찬은 어떤 선물보다도 오래 간다. 5년 전 생일엔 무얼 받았는지 기억이 없지만, 20년 전 꼬마 여자애가 내겐 비누냄새가 난다던 칭찬은
    아직도 기억난다. 길을 묻거든 자세히 가르쳐줘라. 모르면 아는 체 좀 하지말고. 노량진에서 봉천동 가는데 시흥으로 안양으로 과천으로 돌아다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방정맞게 다리를 떨지 않는다. 그렇게 떨고 싶으면 이 글을 읽던 것을 멈추고 손을 떨어봐라. 지금 당장 해 보시라. 바보 같지? 다리 떠는 당신 모습을 보는 느낌과 똑같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집에 갈 때도 가끔씩 과일 상자라도 사 가지고 가라. 은근히 효과가 그만이다. 자주하면 실없이 보이니 반드시 가끔씩 해야 된다. 지나간 일은 묻어 버린다. 이미 한 얘기 또 하는 사람보다 초라한 사람은 없다. 너그러운 사람이란 잊을 건 잊는 사람을 말한다. 친구가 말을 할 때는 잠자코 들어줘라. 당신의 충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비싼 차와 비싼 옷을 사려고 욕심내지 않는다. 허풍은 자격지심에서 생긴다. 자존심과 허풍을 구분하지 못하면 늙어서 친구가 없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같은 사람이 또 잘못 걸어와도 웃으며 받아준다. 세 번째까지도 괜찮다고 편히 말해준다. 네 번째 전화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된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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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晩峰精舍[만봉정사]
    글쓴이 : 느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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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간의 사람 중에는 불공평한 것이 많습니다 !! 무제가 또 물었다. “세간의 사람 중에는 불공평한 것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매우 가난하고 부자는 매우 부유하며, 괴로운 사람은 매우 괴롭고 즐거운 사람은 매우 즐겁습니다. 이것은 무슨 인연입니까?” 지공 스님이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연과보는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만약 사람이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행하면 금후에는 반드시 안락하고 부귀하다고 하였습니다. 금생에 가난하고 괴로운 사람은 전생에 선행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괴로워도 선행을 닦을 줄 알고, 어떤 사람은 괴로 움을 받고도 여전히 선행을 닦을 줄 모르니, 괴로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나한게(羅漢偈)에 이르니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하고 빈궁함에는 각각의 원인이 있으며 숙세의 인연으로 정해진 것이니 억지로 구하지 말라. 봄에 종자를 뿌리지 않았으면서 빈손으로 황무지 밭에서 가을의 수확을 바라네. - 지공선사 / 인과법문 -

    출처 : 선재문수
    글쓴이 : 순수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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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운 마음 연습해야 고마운 일이 생긴다 
          마음은 방송국의
          수신 안테나와 같아
          동일한 주파수를
          끌어들인다
          하루는 인근의 젊은 불자 부부가 찾아왔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맞벌이 부부의 애환을 듣게 되었다. 
          특히 아이를 키워주시는 어머니와 아이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얼굴에도 그러한 마음이 나타나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맞벌이를 그만둘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이러한 경우,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미안한 마음은 불편한 마음이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선 스스로가 불편하고, 
          또 그 상대방도 결코 편치가 않다.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 또한 뻔뻔스러워서 좋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음은 방송국의 수신안테나와 같아서 
          동일한 주파수를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다. 
          미안한 마음은 미안해할 일을 끌어당긴다. 
          고마운 마음은 고마워할 일을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미안한 마음을 연습하다보면 
          자꾸만 미안해할 일이 생겨나고, 
          고마운 마음을 연습하다보면 자꾸 고마워할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나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어렵게 대한다면, 
          내 마음인들 편하겠는가.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자꾸 미안해 하는 느낌이 전달되니까, 
          아이도 불편해서 오히려 미안스러운 일을 벌리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짜증스러워진다거나, 
          자꾸 아프거나 하는 등이다.
          그렇지 않고, 
          ‘그래, 엄마가 항상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이렇게 잘 커주어 정말 고맙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아이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전달된다. 
          고마워하는 상대에게는 자꾸 고맙게 생각할 일을 베풀게 되어있다. 
          웬만하면 상대방의 기대심리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이가 더욱 무럭무럭 자라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가족이건 직장상사나 동료건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대하다보면 고마워할 일이 생겨난다.
          특별히 누군가가 나에게 고마운 일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그대로 매사를 고맙게 생각함으로써, 
          실제로 고마워할 일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은 
          주인 노릇 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본사(本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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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내리는 새벽의 상념/ 최정호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이른 새벽부터 깨어 있습니다. 동이 터올 무렵 갑자기 천둥이 치더니 그 뒤를 비와 번개가 따라왔습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창밖의 비와, 비 맞는 나무들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자연의 느낌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마음에 내려오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고 여린 풀부터 시작해서 작은 나무, 큰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이 번개불에 놀라고 천둥에 혼이 나고 있습니다. 비는 쉬지않고 얼굴을 때리고 바람은 가지를 계속 흔듭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허용하는 군요. 허용해야 존재할 수 있군요. 천둥에 귀를 막고, 번개에 눈을 가리고, 넘치는 비는 피하고, 거센 바람은 막아내고... 이러지를 않는군요. 작은 풀에게는 거세게 내려치는 굵은 빗방울이 자신의 얼굴보다도 더 큰 것일텐데. 그들은 그 충격을 잘도 견디는 군요. 허용하니 군말없고, 저항을 안하니 오히려 굳세게 견디는 군요.
                저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한 채 창 안에서 바라보기만 합니다. 거부함으로 그들과 친구의 연이 약해졌습니다. 거부함으로 그들의 힘을 나누어 갖지 못했습니다. 거부함으로 나는 분리되었고 헝클어졌습니다. 내가 그들이 되었으면 모든 것이 되었을텐데 나는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순수함과 생명을 부러워만하고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그들의 예술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비가 그쳤습니다. 하늘도 조용하고 땅도 조용합니다. 사방이 조용합니다. 힘든 것을 잘 참아 낸 풀들이 한 마디 자랑없이 계속 조용합니다. 나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09. 7. 2
            P>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그레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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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사랑하며 지지고 뽁고
               늘 그렇게 분주한  일상에서 
               놓아주고 내려놓고 느림의 법칙을 배우고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의 의미를 찾아가려 노력해본다.
               나이가 가져다주는 여유로움일까 배짱일까?
               아님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삶 고뇌에 찬 내려놓음의 법칙을
               이제사 깨닳음일까?

               흩어지는 커피향에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리움이 녹아내리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선율에 
              그리움도있고 지나간 추억속에도 갖혀본다.

               하교길 책보따라 허리춤에 불끈짜매고
               필통속 친구들이 요리조리 신나게 춤추도록
               숨가쁘게 뛰었던 신작로길....
               집에오면 엄~마 하고 불러보지만 메아리되어돌아온다.  
               책보따리 풀어 휙 집어던져 정확하게 골인하고
               이리저리 집안을 휘휘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나의 주린배를 채워줄 어떤것도 ....
               부엌 실겅에 메달린 얼기 설기 엮어진
               소쿠리를 내려놓고 삶아논 딱딱한 보리쌀 한줌입에넣고
               장독대 항아리를 다 디져본다.
               우리엄마 제사때 쓸 오징어며 이것저것 숨겨놓은것 발견하고
               간이작아 오징어통째로 도둑질못해 제일 긴 다리하나 툭떼어
               입에물고 내 간식창고가 있는 회천강을 유유히 건넌다.

               수박에 꿀밤한대 멕이고
               탕탕 맑은 소리나는 녀석을 하나 툭 따다가
               원두막에 올라앉아 유유히 흐른는 회천강줄기를 바라보며
               수박을 쪼개 먹던 그맛을 나는 추억한다.
               먹고난 수박껍데기는 강을향해 팔매질하고
               내가 그러고보면 낙동강을 많이 오염시켰나.
               그때 팔매실력인지 체력장할때 던지기는 만점받았네 ....후후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지고지순한 사랑얘기 
               그런 사랑얘기가 있네 나두 ..그게 사랑이었나
               그아이 철이의 일기장속에 등장하던 숙이도 이제는
               세월을 이길수없다네...

               어느새 내몸이 기상대보다 더 정확하고
               찌푸둥한 몸둥아리가 하늘에서 한줄기 비라도 선물하면
               금방 저 나무들처럼 내 몸도 물을 만난듯 살아난다.
               
               철이는 고향땅에서 고향지킴이를한다.
               고향어르신들을 섬기며 트렉타에 몸을싣고
               파아란 들판을 누비며 검게탄 얼굴을 자랑한다.
               언제 친구랑 탁배기한잔을 부딪치며
               알록 달록 자식들 이야기 안주삼아
               진한 우정을 나눠봐야겠다.
               그때 그게 사랑이었냐고 물어도 봐야겠다.

               산에가면 깨똥이있었고
               한손에 삐삐가 또 한손엔 찔레가 있었다.
               얼마전 뒷산에올라 찔레를 꺽어 먹어보니 맛은 그대로다.
               산대놀이는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아카시아 잎 콧김으로 날리기도하고
               남은 줄기로 서로 서로 머리를 돌돌말아 파마를하고
               도랑물에 발 담그고 밀살이하던 그때 그시절 그친구들이
               오늘 보고싶다고 전화가왔다.

               친구야 너는 기억력도좋타 나는 도대체 기억이없네
               고향떠난지 오래라 그렇겠지 .....
               생각은 자꾸 무디어가고 신호등은 자꾸 깜박거리고
               이제 정신차려야지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지
               메모는 지대로 했건만 메모한 종이를 찾을수없네
               오전 내내 쓰레기통을뒤져 찾아냈다.
               내 건망증 어찌하오리이까 ~~~

               흐린 장마철 잠깐만이라도
               알록 달록 일곱색깔 무지개를 볼수있음 좋겠다.
               오늘 이러 저러한 사연들이 또 하나의 추억으로
               아름답게 자리매김하기를 ....
               삶의 언저리에서 묻어나는 소소한 것들에게도
               의미부여를하며 나의 삶에  풍요를 선물하고싶다.



            꿈의 요정 / T.S.Nam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고향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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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친구는 마음의 그림자처럼




            친구사이의 만남에는 서로의 메아리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 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시구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 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좋은생각 中에서 -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자유n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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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천불사 태산스님 (빙의,무병치료)
            글쓴이 : 송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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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신적인 사랑의 열매

            감동적인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세요.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감동 글]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고백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 스카우트를 방문한 그 때,
            나는 걸 스카우트 신입 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나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 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 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 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 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 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
            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 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 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 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 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 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출처 : 고덕 참사랑모임
            글쓴이 : 심 정 원글보기
            메모 :

             

             

             

             

             

             

             

             

            사랑을 지켜주는 마음


             
             
             
            참된 사랑이란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얻고 난 이후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은 혼자서 생각해보곤 합니다.
            사람들이 처음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정성,
            그 정성을 사랑하는 동안 내내 잊지 않고 살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별은 별로 없을거라고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마음먹는 것은
            어쩌면 큰 어려움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맹세를 지켜 나가는 것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처음의 결정을 내리는 문제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이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마음과 행동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나의 감정 나의 상황을 우선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이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우리는
            변함 없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것
            그것은 당신의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마음이 되어 줄 것입니다. 

             
             

             

             

              

              

             

             A Spirit  

             of Alpus

               슈만, 헌정(Widmung)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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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왕자의들꽃사랑마을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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