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게 사는 길 - 독송 : 성수스님 오늘 내가 빈천하거든 베풀지 않았음을 알며 자식이 나를 돌보지 않거든 내 부모를 내가 편히 모시지 않았음을 알라 남의 고통 외면하고 악착스레 재물을 모아 자식줄려 하였거든 일시에 재가 되어 허망할 때 있을 것을 각오하라 상대는 내 거울이니 그를 통해 나를 봐라 빈천자 보이거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을 알고 보시하며 부자를 만났거든 베풀어야 그같이 될것을 알아라 가진 자 보고 질투하지 마라 베풀어서 그렇고 없는 자 비웃지 말라 베풀지 않으면 너 또한 그러리라 현세의 고통을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 뿌리지 않고 어찌 거두랴 뿌리는 부모, 줄기는 남편, 열매는 자식, 부모에게 거름하면 남편자식 절로되고 뿌리가 썩어지면 남편자식 함께 없다 단촐하다 좋다마라 다음 생에 어디가나? 첩첩산골 외딴곳에 외로와서 어찌살며 오손도손 화목한 집 서로 도와 만났느니라 오래살며 고통보면 부모지천 원인이고 불구자식 안았거든 부모불효 과보니라 내 몸이다 내 입이다 마음대로 하였는냐? 네몸이 도끼되고 네말이 비수되어 한 맺고 원수 맺어 죽어 다시 만난 곳이 이세상 너의 부부 너의 자식 알겠느냐?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느냐? 지은 자도 너였었고 받은 자도 너이니라 오는 고통 달게 받고 좋은 종자 다시 심어 이 몸 받았을 때 즐겁게 가꾸어라 짜증내고 원망하면 그게 바로 지옥이고 감사하게 받아 내면 서방정토 예 있으니 마음두고 어디가서 무얼 찾아 헤메는가? 열심히 정진하여 우리 모두 성불하세
출처 : 晩峰精舍[만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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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공한 것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사리자여, 색(色)이 공한 까닭에 괴롭다거나 무너진다는 상이없으며, 수(受)가 공한 까닭에 느낀다는 상이 없으며, 상(想)이 공한 까닭에 안다는 상이 없고, 행(行)이 공한 까닭에 짓는다는 상이 없으며, 식(識)이 공한 까닭에 깨닫는다는 상이 없느니라. 삼라만상은 공한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삼라만상이니, 감정이나 생각 욕망 의식 등 마음의 작용도 또한 공한 것이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공한 모습에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웁거나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듬도 없나니라.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는 이렇다 할 실체도 없고 감정도 생각도 욕망도 의식도 없고 감각의 주체도 없으며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의 관념도 없으며 그러한 것들의 모든 상대 또한 없느니라. 고로 미혹된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도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으며 끝내 늙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나니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일도 없으며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으며, 지혜가 따로이 있을수없으며 아무런 얻음과 잃을것이 없으므로 모든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닦아가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잘못된 망상을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나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진언이고 가장 밝은 진언이며 위없는 진언이며 비길데 없는 진언이니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느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출처 : 晩峰精舍[만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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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마음

    빈 마 음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윘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 거린다
    가득한것은 덜한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빈마음
    그것은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의 본 마음이다
    무엇이 채위서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덩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법 정  스님 글
    이글은 원만성님이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 입니다.
     
    

    출처 : 晩峰精舍[만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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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암을 떠나서 신륵사에 도착을 합니다. 오늘도 먼저 현판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봉미산 신륵사라고 되어 있지요. 봉황이 참 크기도 하네요, 설악산에 봉황의 정수리인 봉정암에서 시작되어 이곳 여주에 이르러서야 봉황의 꼬리가 드리웠으니 말입니다.

     

    여강에서 누런색과 검은색의 용마가 나와 날뛰어도 제압을 하지 못하는데, 인당법사가 신묘한 굴레로서 제압하였다는 전설에서 신륵사의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누렇고 검은 용마를 홍수에 불어나 밀려오는 흙탕물로 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부처님의 십호 중 하나인 조어장부와 관련하여, 날뛰는 사람의 욕심을 잘 제어하는 신륵(신묘한 굴레)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문에도 주련을 걸어놓았습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되고, 백년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에 티끌된다라는 말이네요.

     

     

    신륵사는 본전이 극락보전입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사찰로 지정이 되어 이름조차도 보은사(報恩寺)가 되었던 적이 있으니, 본전이 극락보전일 수 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극락보전 앞에 있는 누각인 구룡루의 구룡은 아마도 부처님 탄생 때 나타나서 시원한 물과 따뜻한 물로서 씻겨 주었던 구룡토수(九龍吐水)에서 나온 말이겠지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사르 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요사이 답사의 행태를 보면은 법당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문화재만 둘러보고 가는 경우도 눈에 많이 보이는데요. 아무리 답사가 문화재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고 하여도 사찰의 주인인 부처님을 먼저 찾아 뵙고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극락보전의 오른쪽 문 옆에 매달린 이것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민속과 관련되는 물품으로 생각을 했는데 어머님께 여쭈어 보니 문을 열었을 때 문이 벽과 부딛쳐 벽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용도로 이렇게 만들어 쓴다고 하네요.

     

     

    신륵사는 참 용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닫집에도 용이 멋진 모습으로 영의주를 희롱하고 있네요. 연꽃도 생생한 것이 보통 정성을 들여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탑이 좀 특이하지요. 우리나라에는 나지 않는 대리석을 구해서 탑을 만들었다고 하니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탑을 하나 가지게 되었지요.

     

     

     화강암보다 표현하기가 조금 쉬워서 그럴까요. 용의 비늘까지 섬세하게 새겨져 잇지요. 전설에 아홉마리의 용을 항복 받고 그 용을 달래기 위하여 구룡루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니 그 용일까요? 아니면 나옹스님의 다비식 때 오색구름이 어리고 용이 나타 호상을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용일까요?

     

    스러져 가던 신륵사가 나옹스님을 계기로 하여 다시 살아난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다비식에 나타났던 그 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아주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나옹스님이 심으셨다는 향나무 앞에서 한 컷!! 뒤에 한칸 짜리 조사당에 바로 아래의 진영과 조사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고려말을 대표하는 삼화상으로 지공, 나옹, 무학의 세분 스님들이 십니다.

     

     

    보제존자 석종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도는 나옹스님이 회암사에서 떠나 밀양의 형원사로 가시다가 병이 깊어 열반에 드시게 되자, 사리탑을 만들어 모신 것입니다. 마치 금산사나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축소해서 모셔 놓은 것 같지요. 이후로 조선시대 후기에 이보다 더 간략화되어 조성되는 석종형 부도의 초기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신륵사 보제선사 석종비 즉 나옹스님 사리탑비입니다. 사리탑비들이 귀부 위에 비석과 이수가 있는 장엄한 형태에서 고려말에 이렇게 기단과 지붕돌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형태로 변환이 됩니다.

     

    형태는 비록 간력화 되었더라도 지붕돌에 기와골 등도 정교히 새겨 졌으며 기단부에도 앙련 등을 정성껏 새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입니다. 이름도 참 그렇지요. 석등은 특별히 따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이름을 정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화사석은 납석으로 만들었는데, 비천상과 모서리에는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창을 보통은 4면에 하나씩 하고 사이에 사천왕 등을 새기는데, 8면으로 다 화창을 낸 것이 특이하지요. 손에 공양물을 올린 접시를 들은 공양비천상이 독특해 보입니다. 서역의 냄새가 좀 나지요. 아마도 나옹스님의 스승이신 지공스님이 인도분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석종 뒤로 해서 산 능선을 타고서 대장각기비 쪽으로 가다보니 문득 소나무에 꽃다발을 붙여 둔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수목장을 한 것 이네요. 그냥 화장을 해서 뿌리면은 조금 서운하고, 묘소를 만들면은 후에 관리나 묘소로 쓸 땅의 소모 등 문제가 있는데 이렇게 수목장을 하면은 두가지를 다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입니다. 고려말 이곡이 대장경을 인출하여 대장각을 짓고 모시기를 발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나옹스님의 제자들과 이곡의 아들인 목은 이색이 합동하여 대장경을 인출하여 모시고 그 내용을 비석으로 세웠는데, 글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서 썼다고 합니다.

     

     

    신륵사는 고려 때 벽절로 불리웠는데 바로 이 벽돌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라시대 경주와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전탑이 고려시대 말에 남한강 가에 세워지게 된 연유는 확실치가 않네요.  어찌 되었던 세워진 위치로 보아서 홍수를 감시하고, 강을 통한 뱃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귀의처가 되며 동시에 위험한 지역 임을 알려주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비보탑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전탑은 주기적으로 벽돌을 교환해 주어야 합니다. 신륵사 전탑도 여러차례에 걸쳐서 보수를 받았겠지요. 예전의 별돌들에는 하나 하나에 이렇게 연꽃무늬를 새겨서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후대에 끼워 넣은 벽돌들은 그저 밋밋하니 때깔이 나지 않는군요. 세상을 보는 안목들이 이것 밖에 안되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 탑이 있는 자리가 나옹스님의 화장터가 아닐 까 합니다. 이곳에서 다비를 하여 모셨겠지요. 그리고 후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나옹스님의 호인 강월헌을 따서 누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누각에서 보는 경치가 아주 시원한 것이 그만이지요. 마음을 다스려 고요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면 깨달음의 본체인 달이 삼매의 강물 위에 비친다는 말인것 같습니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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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기회에 언니부부따라 전남 곡성나들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비내리는 봄날의 여행은 운치있어 멋이 있어좋았지만,

    혼자만의 자유가 있어 더 행복했던것 같았습니다.

    때론 혼자이고 싶었던 일상들~~~

    일상 탈출의 행복을 맘껏 누렸던 하루였습니다.

    이비 그치고 나면 봄이 성큼 우리곁에 와 있겠지요^^*

    아름다운 봄날을 기대하면서 ~~

    우리님들 가슴속에도 행복 한움큼 가슴에 담는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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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불암에서 칠불사(七佛寺)로

    몇년 전에 왔을 때는 분명 칠불암이었는데 지금은 칠불사다. 규모나 창건사로 보아 승격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10남 2녀가 있었는데 맏이는 대를 이었고 둘째와 셋째는 모후인 허씨 성을 따르게 되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고, 남은 7왕자가 외삼촌인 장유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지리산 토끼봉 아래 해발 830m 지점에 있는 지금의 칠불사(당시는 운상원)에 서기 101년에 도착하여 용맹정진한 끝에 일곱왕자가 모두 성불한 것은 103년이라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가야는 고구려(소수림왕 4c)나 백제(침류왕 4c)보다 200년 이상, 신라(법흥왕 5c)보다는 3백년이나 앞서 불교를 받아 들인 것이된다.

     

    길을 잘 만들어서 대형버스도 일주문 근처까지 올라온다. 다소 숨가쁜 엔진소리를 낼 망정 쌍계사를 출발해서 불과 15분 정도 걸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먼저 나의 눈을 어리둥절케 한 것은 일주문이다. 없던 것이 생겨서 그렇고 매끈한 모양새가 일품이기 때문이다.맛배지붕에 네개의 보조기둥이 있어 안정감을 더해 준다.

     

    조금 오르면 높은 계단을 만나고 바로 '동국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낯설지 않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부류,백암 스님이 주석을 했고, 용성,석우,효봉,금오,서암,일타,청화스님이 안거를 한 곳이니 금강산 마하면 선원과 함께 2대 선원으로 꼽히는 곳다운 현판이다.

     

    대웅전의 후불탱과 7왕자가 성불한 것을 목각탱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문수전에는 문수보살을 모셨는데 전설적으로 이 보살은 중국의 산시성[山西省] 우타이산[五臺山]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강원도 오대산과 지리산에 있다고 하여 지금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와 지리산 칠불사는 문수를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예불하며 수행하는 도량(道場)이 된 것이다.

     

    칠불사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 스님들의 수행처인 아자(亞字)방이다. 대웅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데 유리로 간막이가 되어 있어 들어가 볼 수도 없고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세계건축대사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亞字房)은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우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고 한다.

     

    1900년이 넘는 고찰이지만 지금의 당우는 1978년에 세운것이라고 하니 불과 30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국가지정문화재가 한 점도 없다는 것이다. 아자방이 지방문화재일뿐이다.옛것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는 것이다. 1900년 전에 세운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면 불교전래사를 다시 써야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질구레한 것도 기록으로 남겨두면 후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배꼽시계는 시장끼를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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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에 찾았을 때는 웅장한 일주문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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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제일선원이란 현판 글귀가 낯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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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불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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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주존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목조후불탱이 입체감을 살려 조성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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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우측면에 목조 탱으로 조성한 7왕자의 성불한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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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좌측면에도 목각탱으로 조성한 보살상과 신중이 있다.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을 아쉽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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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아(亞)자방이 자리한 당우, 유리같은 것으로 가려놓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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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방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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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방을 알리는 사진과 글, 스님들이 면벽하여 참선하고 있는데 아자모양으로 생겼음을 잘 보여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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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전>

    <문수전에 모신 문수보살상, 이 사진도 인터넷에서 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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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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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불사 범종,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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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아름 다운 사찰

    관악산 연주대




    월출산 무위사




    두륜산 만일암터




    두륜산 대흥사




    충남 가야산 개심사




    충남 가야산 개심사




    충남 가야산 보원사터




    도봉산 망월사




    도봉산 망월사




    태백산 망경사




    태백산 망경사




    삼각산 진관사




    삼각산 진관사




    운길산 수종사



     

    운길산 수종사




    금정산 범어사




    금정산 범어사




    금정산 범어사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수덕사




    추월산 보리암




    강천산 강천사




    속리산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주왕산 대전사




    설악산 봉정암




    천태산 녕국사




    포천 이동 백운산 흑룡사




    지리산 쌍계사




    지리산 쌍계사




    지리산 연곡사




    지리산 연곡사




    팔영산 능가사


    수도산 수도암




    수도산 수도암




    수도산 수도암




    비슬산 대견사터


    마이산(馬耳山) 탑사(塔寺)


    관악산(冠岳山) 연주대(戀主臺)




    관악산(冠岳山)연주암


    가야산 용탑선원




    가야산 마애불입상




    가야산 석조여래입상(보물264호)




    가야산 해인사




    가야산 해인사




    가야산 해인사




    설악산 봉정암




    월악산 미륵사지




    화암사 쌍사자석등과 무학대사의 부도




    화암사




    내장사(內藏寺)




    내장사(內藏寺) 백련암에서 바라본 전망대




    운주사(雲住寺) 9층석탑



     
    운주사(雲住寺)




    운주사(雲住寺)




    운주사(雲住寺와 와불


     

    운주사...가운데 석실안에는 등을 맞대고 앉은 부처가 있다.




    운주사




    쌍봉사(雙峰寺)




    쌍봉사(雙峰寺) 철감선 사탑




    선암사(仙巖寺)




    선암사(仙巖寺)




    선암사(仙巖寺)




    두타산(頭陀山) 삼화사(三和寺)




    내연산 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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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開泰寺

     

    개태사를 옆구리에 매달고 말을 달리는 형상을 한 천호산 12 봉의 원래 이름은 황산(黃山).

     

    세력을 넓혀가던 왕건이 이 근처 연산 뜰에서 후백제군과 자웅을 겨루던 중 수세에 몰리게 되었는데

    갑자기 황산(黃山)에서 신장을 들고 말을 탄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후백제군을 물리치게 되었고

    내친김에 견훤의 아들 신검의 무릎을 꿇리고 실질적으로 대업을 이룬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고려 건국과 치국 이념의 바탕은 불교였다던가?  개국에 대한 의미 부여와 미륵의 보살핌을

    기원하는 장소로서도 이 곳은 매우 적절 했기에  그는 친히 절 이름을 짓고 기원문까지 지어

     호국의 원찰로 삼았던 모양. 물론,후백제 유민들을 다독거려 그 들의 민심을 얻고

    숨진자들의 원혼을 달려려는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의미도 담겨있으리라.

     

    개태(開泰)는 부처의 원력으로 태평성대를 연다는 뜻이고, 산 이름을 황산에서 천호(天護)로 바꾼것은

    하늘의 보살핌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 사진은  두 번째 문 이다 *

     

     

    저 유명한 개태사 석조 삼존불을 안치한 건물인데

     "용화대보궁"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   *보물 제219호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경내(境內)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을 주시하고 있다.

                        본존불은 높이 4.15m 크기로 복연(伏蓮:아래로 향한 연꽃) 의 방형 기단상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부에 만들어진 방형의 불대(佛臺) 후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형태는 크게 돌출된 육계에 둥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이마에 백호가 선명하고 이목구비의 형태가 뚜렷하나 얼굴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형상이다.

                        불상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듯한 양손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붙이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것처럼 만들었는데, 이로 미루어 본존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시무외인, 여원인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다르게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보살상은 각각 지름 2m 내외의 팔각형 연꽃 대좌에 올려져 있으며, 높이는 3.12m 내외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얼굴은 육계가 크며, 본존불보다 더욱 치졸하다.

                        머리띠 장식은 귀 뒤로 어깨까지 내려져 있으며, 양팔에는 팔찌를 돌리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양팔에서 좌·우로 늘어져 있고, 배에서 무릎까지 한줄의 매듭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

     

    본존불을 가까이...

     

    한동안 법회가 진행 중이더만 갑자기 우루루 법당을 빠져나와  모두들 점심 공양에  정신이 없을 즈음

    혼자서 고요한 법당을 전세내어 촬영에 들어가게되었는데 법당 기둥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법당 내부 사진 촬영 금지 -

     

     

    본존불에 더 가까이

                                                

                                                        개태사가 다시 복원된 것은, 이 마을에 살던 김광영 보살에 의해서 라고.

                                                        1930년 정월, 꿈에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아 미륵불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안 된다”는 계시가 내려서 계룡산으로 들어가 천일기도 치성 후,

                                                        천호산의 벽력석으로 석불의 머리를 조성하여 ‘발굴해낸 몸체’와 함께 복원했다고.

     

     

    좌 협시보살

     

     

    간이 작은 관계로 자세히 오래도록 살피진 못 했으나

    여기저기 성형 흔적이....

     

     

    우 협시보살

      

     

    요사채인 우주당에서 바라본 "용화대보궁"

     

     

    정법당을 오르는 계단 옆에 조용하게 자리한 "석불좌상 "

     

     

    충남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철확

                          

                                세간에 널리 알려진 개태사  철확(鐵鑊) 가마솥이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큰 스님 한 분이 개태사를 찾아와서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이 위험할 것이니

                                이 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쇠 솥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가마솥의 뚜껑은 인근 천의 어디 엔가에 묻혀 있어 지금도 흐린 날에는 ‘윙’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

                                   조선조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로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기 저기로 옮겨다니가

                                   연산 읍으로 옮겨진 후, 서쪽 냇가에 묻혀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 발굴하여

                                   서울에서 열린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한 사연 많은 솥이다.

     

                                   후엔 연산공원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개태사의 우주정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일인에 의해 1435년 부산까지 반출해갔다가 솥에서 울려 나오는 큰 소리 때문에 반출되지 못하고,

                                   도둑의 손에 고철로 부서질 때도 뇌성 같은 소리와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져 모두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그 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

     

     

     

    팔각 형태의 건물인데 안에 들어있는 주인공과 바로 옆 건물에

    들어있는 주인공이 아무래도 서로 뒤바뀐 느낌이다

     

     

    세상에....! 저 삐딱하게 걸린 편액 하나도 반듯하게 바로잡을 자가 이 절엔 없단 말인가.?

     

     

    여러개의 방석을 깔고 앉은 이는 사연 많은  "나반존자"님 이시라고...

      

     

    정법궁이라는 편액이 내 걸린 청기와 건물

    저 안엔 단군과 부처, 그리고 관우의 영정이 들어있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진 못했다.

    그 중에서도 단군 영정은 오원 장승업을 사사 했다는 '심전 안중식(1861~1919)이 그렸다고 한다.

     

     

     

    정법당에 그려진 청룡

     

    청기와가 어지러히 지붕에 흩어진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도대체 절집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가면 죄다 낙상이라도 한단 말인가?

     

     

    문 아랫쪽에 조각된 거북

     

     

    분명 기와 불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데 정법당

    건물을 저 지경으로 방치하는데는 무슨 사연이라도...?

     

     

    원래의 자리에 신축한 우주당

    개태사 미륵삼존불이 뫼 山 형상이고, 이 우주장의 건물도 뫼 山 형상이다.

    이 뫼 山 두개가 합쳐지면 날 出 이되는데 이는 미륵의 강림을 의미한다나 뭐라나....

     

     

    개태사오층석탑 (開泰寺五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74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396


     

                           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옛 터에 남아 있었는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옮길 당시 아래 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즉, 높직한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다.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에는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용화대보궁"에서 바라본 천호산 12 봉

     

    저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줄기 아래 수 많은 역사적 부침이 있었지만 그 중 최고의 이벤트를 꼽으라면

    단연 황산벌 전투가 아닐까...? 계백의 원혼이 서린 곳. 계룡산의 관문이기도 한 이 곳 황산벌.

    계백이 신라의 화랑 관창의 목을 날린 관동리도  이곳이요, 계백의 결사대가 숨을 거둔 장소도 이 근처다.

    그런가 하면 왕건이 맞수였던 견훤의 아들 신검의 무릎을 꿀려 항복을 받아 낸 곳도 이 곳이지 않은가?

    한 마디로, 뭔지 알 수 없는 수승하고 영험한 기운이 서려있는 산 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고나 할까?

     

     

    개태사를 나와 황산벌을 가로질러 찾아간 곳은  계백의 묘와 "백제군사박물관".

     

     

    백제군사박물관 트레이드마크

     

     

    박물관 입구가 마치 무령왕릉을 연상케 한다.

     

     

    마치, 계백의 포효가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그 시대의 각종 무기

     

     

    도검류

     

     

     

    무기 제작 모습의 재현

     

     

     

    황산벌 전투 미니어쳐

     

     

     박물관 문살

     

     

    한창 피어나는 떼죽나무꽃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사당

     

     

    계백 장군 영정

     

     

    사당 추녀의 공포 형식과 단청의 문양과 색감이 쉽게 접 하기 어려운 형태.?

     

     

     

    계백의 달

                                                          - 윤순원-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 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친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 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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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정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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