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53·끝>br>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지상에서 생활 중 올바른 영혼성장에 힘써라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천국과 지옥’.
인간이 죽어서 가게 된다는 천당과 지옥은 우리에겐 아직도 영원한 미스터리인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의문,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질 수밖에 없는가. 영계(靈界)를 볼 수도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각자 종교적 신념이나 세계관에 따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종교인은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생물학적인 사망 이후에도 의식이나 생명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등 중동의 종교 전통과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의 종교 전통이 이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유교를 비롯한 중국 문화권의 종교 전통은 죽음이란 말 그대로 ‘존재의 소멸’로 간주합니다.

영계는 아직 우리에겐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계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지상인들에게는 혁명적 변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우선 교리적 차이나 이해타산에 따라 분열을 거듭해온 종교의 혼란을 수습할 뿐만 아니라 인간 각자의 생활태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이 증거하듯이 지상생활이 영계의 삶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세상에 이만한 구속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과 사,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물론 아직 지상의 삶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까지도 모두 사후에 전개될 세계에 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사후세계에 대한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증거를 통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통인(靈通人)이나 ‘사후 보고서’와 같은 영계 관련 서적들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계에서 수많은 영통인들을 통해 계시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각고의 어려움,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허물을 벗고 대자연의 품속에 안기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육신의 탈을 벗어던지고 시공을 초월하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식, 영계의 삶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계에 대한 증언의 공통점=사후세계에 대한 증언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영계는 천리법도, 원리원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나 정직과 같은 원리원칙이 인격의 잣대가 된다는 것은 영계나 지상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가난과 병마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된 것은 천리법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주나 인간의 육신에서 원리원칙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만일 영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는 이보다 더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많은 영통인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일탈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인간생활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부나 이웃 간의 사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지 간에 사랑은 늘 강조돼 왔습니다. 성인들도 물론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영계에서는 어떨까요. 영계에서도 사랑은 영인들의 인격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을 테고, 나라와 세계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만한 수준의 세계에 살 수 있습니다. 역시 남을 괴롭혔던 사람,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은 사랑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넘치는 곳, 살맛나는 세상이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계는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지상인이 임종 후 자기 스스로 심판하고 자신의 영적 기준에 맞춰 거처를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영계가 원리원칙이 강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영계에서도 좋은 곳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지상생활에서 영혼을 성장시킨 후에 영계에 가도록 돼 있습니다. 결국 육신의 허물을 벗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세계, 영혼의 세상에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육신생활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은 지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잘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욕심에 찌들려 살았거나 늘 의심의 눈초리로 타인을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영계라는 별천지 세계에서도 그 습관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비뚤어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잘못 형성된 영혼으로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 영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거나 인간을 그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스스로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영인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영계는 판사들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대심판관도 없다. 누구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처리한다. 자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 된다. 그러한 심판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상에서 한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기간 우리는 인격의 성숙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성장은 육체와 정신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즉 지상생활은 참인간으로 성숙되기 위한 훈련기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참인간으로 성숙될 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삶의 목표와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교육이나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왔고 성인이나 위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내용입니다. 종교인이나 영계 연구자들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지상생활의 최대 목표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분명히 그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각 종교단체는 영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영계에 대한 교육에 나설 때입니다. 각자는 지상에서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면서 영계의 삶을 준비할 때가 지금입니다.

◇영계에 대한 준비, 올바른 영혼 성장법=영계는 지상생활을 통해 성장된 영혼이 생활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이 행복하려면 지상생활에서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영계의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원칙을 특별히 지켜야 합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 즉 자연 순응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세상의 존재 목표가 있다면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순응적 삶, 다시 말하면 자연의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요즘 이야기하는 생태주의적 삶을 말합니다. 생태주의는 천지법도적 삶이요 도덕·진리적 삶입니다. 최근 각 분야에서 생태주의가 크게 부각되는 것은 마구잡이식 개발경쟁으로 자연환경의 훼손상태가 심각해진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은 바 그대로’, 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 없이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친화적 삶은 본래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살게 돼 있는 천리법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즉 상대방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체적, 공생체적 관계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로 돕지 않을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처럼 인간 서로 간에도 적용됩니다. 성인들이 부르짖은 사랑이나 자비, 인(仁), 희생적 삶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이기심이나 타락적 근성과 같은 것은 인간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경쟁논리도 따지고 보면 장점도 있지만 인간성을 말살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기독교의 주장대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목적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본연의 행복된 삶을 통해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한번도 창조본연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창조본연의 삶은 자연순응적 삶이요, 남과 어울려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행복의 극치를 지상에서 맛볼 때만이 영계에서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영계를 아는 이들의 증언입니다.

영계에 대한 실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에게는 신비스럽고 복잡하기만 한 영계의 내용을 체계화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영계의 신비를 밝혀줄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만 갖는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안타깝게도 지상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영계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에서 전개되는 모든 생활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영계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타락성을 벗어버리는 교육,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천국생활을 위해 영계의 구조와 규범, 영인들의 자세 등을 담은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개인을 위한 삶은 생존 중심의 1차원적 삶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한 터전 위에서 2차원적 삶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적 삶, 공생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3차원의 삶인 영적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여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말 인간다운 삶, 영원한 세계를 위해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omkwon@segye.com

                                                                                                                             

 

Greenfe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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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불교 집안의 상가집에 가면 간혹 ‘생야일편 부운기 사야일편 부운멸(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즉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는 법문이 쓰여져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음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직접 경험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이러한 ‘오래된 질문’을 던져온 것이 인류사 특히, 종교사에서는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찾고 신(神)을 믿으며 영생을 갈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불교에서도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부처님의 출가동기가 생로병사의 해탈 추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도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인생고의 근본원인 중의 하나로 본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생과 사, 죽음과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상반된 고정된 실체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생로병사를 있게 한 요인은 마음속의 번뇌 망상이고 나를 위주로 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기준해서 지나치게 세운 기대가 어긋난다고 할 때 괴로운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뜰 앞의 단풍잎 하나 떨어지는 걸 보는 거나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보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체험을 하신 게 부처님의 생사관의 특징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일생의 대사는 생사’라는 이야기가 하나의 화두로 전해져 오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79년간을 사시다가 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내가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그 전에 의심나는 게 있으면 모두 물어라"하셨다. 그 때 많은 대중들이 무척 섭섭해하고 애통해했다. 부처님을 신앙의 의지처로 삼고 살았는데 부모를 잃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그런 슬픔이었다.

  그 때 아난 존자가 대중을 대표해서 질문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첫 날 첫 말씀이 뭡니까? 나의 생사는 이제 끝났다. 나는 열반을 증득했다. 감로의 물이 흘렀으니 모두 와서 마셔라.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셨는데 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까? 그 날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열반에 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열반에 드셔야 한다면 그 날 하신 말씀이 거짓이었다고 수정 발표를 하셔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제자들아, 여래가 열반에 든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요, 여래가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얼른 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마지막 말씀을 남겨 두셨다. 여래 또는 개개인의 인격체에는 열반에 든 부분과 아닌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열반에 든다고 하면 열반에 안 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든다고 하게 되고, 열반에 안 든다고 하면 열반에 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안 들었다고 하게 돼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법칙에서 어긋난다.

  육체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정신세계에 이르면 내가 지금 죽는구나 하더라도 이것은 뜬구름이 피어올랐다가 바람 따라 지나가는 걸로 무심히 볼 수가 있다. 이것을 일러 생사의 고통을 뛰어넘었다고 하는 이른바 초월한 경지이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를 ‘죽음 앞에 떳떳하기 위한 공부’라고 말한다. 올 바른 생사관은 삶을 즐겁게 누리고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는 길이 될 것이다.

 

 

 

하 늘 소 리
 

삶이란 하나의 커다란 도화지와 같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색으로 삶의 도화지를 채워라
(데니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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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로 가는길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를 살아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혼(anima)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혼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해 주는 기준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신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단계가 높아지면서 영계, 즉 영혼은 어디에 가서 거처할까 하고 궁금해 한다. 불교에서는 그곳을 극락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천당이라고 한다. 둘 다 같은 개념이다.

아미타경에 따르면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관장하는 영역으로 10억 부처를 지나서 있다고 한다. 거기서 거듭 태어나는 자는 심신의 괴로움이 없고, 다만 즐거움만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간적인 거리와 사람이 사후에 간다는 시간적인 거리는 물질적인 낙토관(樂土觀)을 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중생구제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10억 부처 너머에 아미타부처가 있다면, 은하계로 말하면 10억개의 은하계 저 너머에 극락이 있다는 이야기일까 하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사람의 머리로는 영혼이 거처하는 곳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저기가 아니다. 영혼은 그냥 우주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공간을 생각하는 인간들의 상상일 뿐이다.

우주 본체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하여 만든 개념이다. 시간이란 원래 없는 것이다. 현재 이 순간이 태초이자, 과거 현재 미래이다. 지금은 무한히 계속되며 시작도 끝도 없다.

극락이나 천당이라는 것은 어떤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마음 가운데 근심걱정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 즉 해탈의 상태에서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 그런 상태를 극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완전히 안정된 상태에 진입한 영혼을 불교에서는 부처, 기독교에서는 성인(Saint)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천당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영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영적 세계인 것이다.


 

춘목(春牧) 칼럼니스트

 

 

 

  

마음이 청정하며/명상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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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론은 심리학, 사회학, 물리학, 생명과학이다
 
20년 전 여름, 나는 지방의 어느 암자에서 귀한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만난지 얼마 안되어 마음이 통한,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 분의 문학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한 원로시인의 주선에 따라 만난 손님은 주교 한 분과 대여섯 분의 신부 수녀들로서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겸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시작한 이런 저런 환담은 그 분들이 참여한 저녁예불에까지 계속되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다. 음주가 절집 안에서는 금기가 되어 있지만 그 때는 예외로 했다. 예수의 성찬의식의 전통에 따라 포도주를 신성히 여기고 즐겨 마시는 그 분들의 뜻을 존중해 마주앙 몇병도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쨌던 아름다운 산세와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산사의 청정한 분위기에서 가톨릭 신학자와 불교 승려가 마주앉아 공양을 같이 나누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흔치않은 일일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차와 과일을 들면서는 본격적으로 대화가 이어졌는데, 어느 지방의 대학장을 맡고 있는 신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개도 되고 소도 되고 또 짐승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데 그 것을 윤회라고 한다지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의 표정을 보니 마주앙을 몇잔 마신데다가 약간 열이 올라 상기한 상태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때만해도 나는 불교학이나 사회학문을 충분히 체득 못했던 터라 쉽게 설명을 못했으나, 내 기억으로는 당시 윤회설을 인간과 만물의 순환원리로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 것 같다. 쉽게 말할 수 없는 형이상적 문제를 두고 한 이런 직접적인 질문을 직설로 바로 대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지금도 다만 원리나 간접적인 비유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 때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으나 지인인 원로시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정하는 뜻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범신론으로 자연의 순환원리라고 본다며 나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의외였다. 그 분의 젊은 시절, 한분의 문단 대표시인과 승려시인 셋의 지상토론에서 본 그 분의 견해인즉 범신론은 혹세무민의 미신이요 유일신 하나님만이 우주와 자연의 주체라고 하신 분이 어떻게 지금은 180도로 달라졌을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돌아가시기 몇해 전 그 분의 대표작품은 <하나의 물방울과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흘러 흘러 강과 바다가 된다>는 범신론적인 작품을 남겼다. 생명 하나 하나가 신의 창조물이라 여기는 극히 단순한 논리의 기독교인에게는 이단같은 말이지만 모든 생명의 상생과 조화가 화엄의 세계, 즉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범신론적 사유인 것이다.
 
<윤회는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불교적 사후관인 윤회의 문제를 좀 더 쉽게 접근해 보자.
 
인간은 죽으면 끝이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 인간과 생명은 단지 물질로 이뤄졌을 뿐 사후엔 영혼도 사라진다는 유물론적 이론이 있고, 영혼은 있으되 죽으면 신의 의지와 심판의 타력에 의해 천당과 지옥에 갈 뿐이라는 유일신적 흑백론.양극론 등의 유신론,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는 윤회론이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종교이자 정치철학인 유교에서 공자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라며 내세를 모르거나 부정했다. 그래서인지 불교국 고려를 쿠데타로 뒤엎고 조선왕조를 세운 성리학 이론가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서 부처의 기도나 윤회인과설은 혹세무민이다"라며 부녀자들의 사찰출입도 금지한 불교의 탄압을 합법화시킨, 500년 불교말살의 일등공신이자 사대주의적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의 일등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피나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인과법칙과 윤회가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집 앞 공원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심호흡을 해 본다. 그 시간만큼은 무념무상, 곧 뇌와 마음이 빈 상태로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 아니면 명상의 시간도 좋다.
 
그 때가 바로 천상이요 천국이 아닐까.(천국의 시간이 너무 많은 게 탈이다)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뉴스와 신문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겹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바로 인간으로서 누리는 인간세상이다.
 
옷을 갈아입고 회사에 출근하거나 일을 위해서 문 밖을 나서면서부터는 많은 사물과 부딛히고 경쟁하며 가족들과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야말로 아수라같은 치열함과 사나움으로 세상과 대적하니 바로 아수라 세상이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어 범죄를 저지르고 평생의 위업인 재산을 탕진한다.
 
예컨데 사소한 말다툼으로, 또는 견물생심으로, 사람보다 돈이 더 탐나서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다. 매일같이 매순간 일어나는 짐승세계가 아닌가. 바로 축생세상이다.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에서 어떤 이는 배가 너무 불러서 태평천국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너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럽다. 밥을 굶은 사람이 날로 늘어가고(특히 배고픈 북한인), 상류층이나 비만환자는 살을 빼느라 고생하고 온통 다이어트 붐이다. 더 배를 채우고 새 곳간을 짓느라고 난리를 친다. 옛말에 만석꾼 부자가 한 섬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곳간을 넘본다는 말이 있고, 돈 많은 부자가 구멍가게의 푼돈을 보고 탐낸다.
 
(태산같은 산림과 자연, 관광객의 푼돈밖에 없는 불교재산을 엄청난 갑부인양 여긴다. 돈 많은 개신교는 불교가 부자거지라고 손가락질하고, 돈 많은 가톨릭은 불교가 알부자라고 한다. 어떤 것이 맞는가 물으면 이유도 모른다. 연관성이 떠올라 옆길로 갔다.)
 
무지하고 사납고 탐욕스러운 양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아귀세상다.
 
매일같이 교통사고로, 불치병으로, 자살 타살로, 독재시절때는 인권탄압과 고문 지명수배로 사람들이 죽고 지독한 고통을 받으니 바로 지옥세상이다.
 
매시간마다 자신을 관찰해 보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국이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마음 속에 시시각각으로 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도윤회는 사후세계에서 찾지말고 바로 현재 여기에서 자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회는 과거며 현재요 미래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전쟁, 병, 사고, 자살, 타살, 고문 등으로 죽은 생명들.... 특히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태아형의 죽음을 두고 <죽으면 끝>이라면.... 너무 허무한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일회용 소모품이요 시계의 부속품으로 생명의 가치와 고귀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유신론, 무신론을 내세우면 신이 만물의 중심으로 삼는 중세시대와 마르크스 이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단지 신을 믿는 신본주의시대의 개념으로서 근세 이전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본주의시대를 지나 생명과학과 우주시대를 맞고 있지만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뇌의 구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 수구보수주의에 머물고 있다.
 
한국에 몇번 다녀간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베르(파피용 등)의 작품세계는 17세에 접한 티베트불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개미, 뇌 등에서 인간의 업은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면서 기록된다고 한다. 뇌는 필름창고같이 무한한 시간, 즉 전세, 현세, 미래세를 기록하는 것으로 불성을 상징하며 작은 우주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인간의 운명 내지 삶은 어떤 절대자가 정해주는 숙명이 아니라 업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범신론의 만물평등, 유신론의 만물차별>
 
불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연기, 인과,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왜곡될 수 있다.
 
선불교에서는 유심론을, 밀교에서는 범신론을, 화엄학은 우주론과 생명과학이 되고, 법화경에서는 세상의 구원사상, 금강경에서는 교만을 없애는 예지를, 능엄경은 우주의 기원을, 아함경에서는 도덕율이 핵심이다. 원각경은 인간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용수, 마명, 원효는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공존해서 평화를 이룰지 철저히 분석한 대승불교의 대사상가이며 따라서 대승불교는 인류공존의 원리를 밝히는 인류평화학이라 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초심리학을 다루고, 인류역사의 오래된 윤회, 만물유전론은 일찌기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인도 전역에 퍼졌던 학설이요 신앙이었으나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금기로 굳어진 것이다.
 
나는 윤회, 인과, 공사상, 범신론, 무아론을 체득하기까지 평생의 시간이 걸렸다.
 
동서양 철학서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 사상서,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의 과학, 유불선의 서적과 스승을 찾았고, 그것도 모자라 인도, 티벳,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외 넓은 땅을 헤메면서 얻은 깨달음은 <문화인류학의 총체는 불교>라는 것이다.
 
윤회, 공사상은 심리학, 생명과학, 종교, 철학, 정신의학, 사회학, 천문학, 지리학같은 고도의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을 단지 특정종교의 교리, 신앙차원에서 보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으로 본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밀교)에서 윤회는 실상을 말한 것 뿐이다. 윤회가 목적이 아니다. 끝없이 죽고 태어나는 생사윤회의 삶을 벗어나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얻으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와 고통, 상극과 대립, 허무의 불행한 삶에서 해탈과 열반(자유(해방), 평화, 행복)으로 인도하고저 한다.
 
도올 김용옥의 친형인 한국기독교과학협회장 김용준 박사는 몇해 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인간과 벌레는 유전자가 98% 일치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인간과 짐승, 동물과 곤충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차별적으로 보 지만, 생명과학에서는 불과 2% 차이라고 하니 충격적이 아닐까.
 
500만년 진화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1%, 즉 99%의 유전자가 동일하다고 보면 인간은 원숭이와 사촌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억겁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아닌 우주와 생명의 시간, 곧 윤회를 반복해서 오늘을 만든 것이니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만물을, 강자가 약자를, 동물이 식물을 지배한다는 만물지배론이나 약육강식론은 강자에게 축복을, 약자에게 저주와 죽음을 합리화시키는 권력도구였다.
 
반대로 풀을 먹는 동물과 약한 동물이 있기에 강한 동물이 있는 것이며, 육식보단 채식이 장려되고, 모든 동식물 때문에 인간의 삶이 유지된다는 상생화합의 겸손한 철학과 평화주의는 어떨까.
 
이미 서구의 육식성 정복주의는 스스로의 미망을 깨닫고 동양의 자연환경주의, 채식주의, 평화공존주의, 신과 인간의 이원론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말하는 범신론, 생명과학주의의 윤회, 인과, 무아, 공을 인식하고 폭넓게 실천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뗏목이나 병을 고치는 약이 방편이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윤회론은 중요하다. 방편, 혹세무민으로 윤회를 보는 사람은 단순논리에 집착하거나 심안(心眼)이 열리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윤회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큰 '지구생명'이란 나무에서 나온 공존, 평등,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윤소암 (시인·시사평론가)

출처 :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글쓴이 : ♣영원한 기다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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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능력이 생기게 만드는 요소들

영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별 관심대상이 아니지만 때때로 영적                   

 

능력이 생기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충격, 의문, 명상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영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길에 서서 꾸준히 갈고 닦으면 반드시 영 능력이

 

생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치신 분이다.

 

 처음에 카피라 성문 밖을 돌아보고 중생들이 생노병사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그들의 아픈 생활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 왕자로서 편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

 

이게 사는 것이란 말인가 ?

 

 영원히 사는 법이 과연 무엇일까 ? 여러모로 고민한다.

 

이 과정이 바로 의문을 가지고대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서 성을 떠나 스승들을 구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기 혼이 스승임을 깨우치고 설산으로 향한다. 이 부분이 바로 명상이다.


충격 >  의문 > 명상 이 3단계는 누구나 수행자에게 반드시 요청되는 중요과정이다.


그럴듯한 직책 맡아서 위세나 부리고 힘주려 하는 이들은 평생 이 과정이 다가올 까닭도도 없을 것이며

 

큰 그릇으로 커지지도 않는다.


충격이란 문자 그대로 충격이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아니면 인생길에서 큰 상처를 입고 도저히

 

일어서지 못할 상황에서 영능력이 생기는 일이 흔하다.


그 예로서 무당 들 중에서 애인에게 버림을 받고 그 날부터 울고불고  몇 십일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방에

 

칩거하다가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뛰쳐나오는 경우가 바로 이런 현상이다. 내면을 살펴보면 신이 온 것

 

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다시 재가동되기 시작한 일일 뿐이다. 쉽게 말해서

 

그 동안은 인간적으로 뇌에 의지하여 살다가 비로소 영혼의 존재가 충격으로 인하여 겉으로 드러나서

 

활동하기 시작한 일이다. 오직하면 , 경희대 명예교수님이신 서정범 교수님이 이런 내용의 말을 하셨겠는가.


“ 무당들은 정신적으로 무척 외로운 사람들이예요. 사랑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증환자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실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이 많지요. 저는 신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기를 가지고

 

신이라고 말합니다.”우리나라 사람이 많거나 적은 신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유도 이런 한 맺힌 과정이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병석에 누워서 죽을 날 만 기다리던 환자가 갑자기 일어나서

 

 병이 다 나았다고 외치며, 그날부터 영 능력이 생겨 타인 점을 보는 일도 있다. 그런 경우는 병고라고 하는

 

고통이 그에게 충격을 주어 “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하는 사생결단의 의지가 발동한다.


그 의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드디어 살아 있는 영혼의 커튼이 서서히 열려 젖혀지는 일이 바로 영 능력의

 

 발현이다.그 다음 과정이 명상이다.불가에서는 이를 가리켜 참선이라고도 말한다


영 능력은 글자 그대로 자기 영혼의 능력이다.


영혼의 능력은 명상을 통하여 뇌기능을 쉬게 해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뇌라고 하는 신체부분은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시적, 통관적인 감각을 무시하고 오로지 육신으로 전달된 정보만을

 

 가지고서 일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 차이가 들어나는 경우에 머리가 좋으니 요령이 좋으니 통찰력이

 

있느니 어쩌니 하는 얄팍한 부분적인 능력 차이로 말을 하게 된다.


명상은 충격을 받은 자가 그 의문을 깊이 새겨서 뇌의 기능을 쉬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부처님이 되기도 하지만, 최소한 자기의 영적 능력을 틔우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불가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이 현명해지게 만드는 결정적 성과를 내어준다.


수행과정에서 아나함. 사다함. 아라한의 과정이란 이런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야식이니 말라 식이니 하는 용어도 뇌 의식 구분이 아니라 영혼의식의 구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충격을 받기 싫어하고 곱게 자란 사람들이 그저 쉽사리 영 능력을 얻겠다고 힘쓰는 일이다. 더구나

 

신을 받으면 그날부터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란 정말 눈뜨고 못 볼 일이다.  그들이 신을 받아

 

보았댔자  소용이 없다. 신은 자기의 영혼을 통하여 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천시하는 무당들이 무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쓰라린 신고를 겪었는지를 안다면 그런 가증스러운 말이

 

 안 나올 것이다.그래서“무당도 못 되는 것이 무슨 수행자냐 ?”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처 : 비비디바비디부
글쓴이 : 리치본 Bizlin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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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침몰 예언과 그 외 지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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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는 1934년에 일본, 유럽, 극지방의 지각변동 등에 대해서도 중요한 예언을 했다.

① 일본의 침몰: “일본의 대부분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The greater portion of Japan must go into the sea.)

② 유럽 지역의 변화: “유럽의 북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될 것입니다.”

③ “북극과 남극지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열대지역에서는 화산폭발이 있을 것입니다.”

④ 소련의 미래: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에
각자가 자기 민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원칙
이 그 곳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⑤ 중국의 미래: “중국은 여러 계급과 교파를 통합하게 되고
이들은 민주주의의 길을 향해서 단합할 것입니다.”

 

일본 침몰에 대한 케이시의 리이딩은 그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위의 영어 원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유독 일본에 관해서만은 일반 예언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머스트(must)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케이시는 일본열도가 운명적으로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

극이동에 의한 대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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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케이시의 극이동에 대한 예언에서 중요한 것은, 천지의 대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우주 변화의 어떤 순환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이 이동합니다. 극의 이동이 생길 때 ‘새로운 사이클’이 생깁니다.

이는 곧 ‘재조정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케이시가 말한 이 내용은 분명 지구 최대의 신비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지구의 극은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 것일까?

또한 극이동 후에는 지구의 사이클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일까?

즉, 그가 말한 새로운 사이클의 대진전이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개벽의 핵심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시원스런 해답을 주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이 때에 일어나는 변화의 현상에 대해서만 약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케이시는 지구 기후의 현저한 역행을 가져올 극점 이동의 서곡으로

‘북극 및 남극지방의 대변동’과 열대지역의 화산 폭발에 대해서 말했다.

출처 : 이것이 개벽이다. 상 / 안경전 저/ 대원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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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열(熱) 받고 있다
 
남극서 떨어져 나가는 빙산 급증

미국의 국가빙하센터(NIC)는 지난 11일 남극대륙을 덮고 있는

빙붕(氷棚)에서 거대한 빙산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고 발표했다.

C-19로 명명된 이 빙산의 크기는 길이 196.4㎞, 폭 30.6㎞에 이르러,

면적만 놓고 볼 때 5948.64㎢로 여의도 면적의 무려 71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올 들어 분리된 빙산은 모두 4건에 달하며, 현재까지 빙산 44개가

남극 대륙 근방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으로 추적되었다.

만일 남극 얼음이 다 녹을 경우 지구 해수면은 5m 가량이나

상승할 것으로 추정된다. (2002. 5.17 기사)

 

  가장 필요한 일 : 대개벽의 소식을 널리 전하는 것

 

제스 스턴이 말한 바와 같이 대격변의 시간표가 이미 예정되어 있어서 그 운명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경건주의자였던 케이시의 다음과 같은 도덕적인 진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에게 신의 찬란한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현상을 알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는, 지구의 내부와 외부의 변화 요인 가운데에서

특히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생기는 파괴가 지구에 밀어 닥치게 됨으로써 시작된다고 하였다.
에드가 케이시는 마지막에 일어날 변국의 종합적인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전쟁, 지구 내부의 변동 및 극점을 연결하는 축(軸)의 변화에 의한 지구의 전이(轉移)입니다.

대적인 예언을 부정했던 그도 전쟁이나 대파괴의 시기에는

각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거의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아마 이는 그의 수준 높은 지성의 예지력으로 가슴 깊이 느꼈을 우주의 숙명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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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글쓴이 : 맒은 영혼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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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지구 대재앙’은 예언 아닌 과학
아포칼립스 2012/로렌스 E 조지프 지음, 강미경 옮김/황금나침반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6500만년 전, 10㎞ 너비의 혜성, 또는 소행성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직경 175㎞에 이르는 구멍을 만들었다. 그 충격으로 공룡을 비롯한 지구상에 있는 종의 70%가 절멸했다.

‘64만년 전,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대규모 화산이 폭발했다. 이때 100만㎥에 이르는 화산재가 공중으로 흩어졌고, 미국 대륙 전체가 최소 1m 두께의 재로 덮였다. 그 재가 흩날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10년 넘게 햇볕을 구경하지 못했다.’

지구의 대재앙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사례들이다. 과학과 종교와 역사를 근거로 2012년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는 신간 ‘아포칼립스 2012’도 이런 사례를 드는 것은 같지만, 최신 과학의 성과에 보다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책을 쓴 이는 제임스 러브록 등과 함께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정의한 ‘가이아 이론’을 처음 소개한 자연과학 저술가 로렌스 E 조지프.

책이 지구의 종말 날짜를 2012년 12월21일 24시로 보고 있는데는 유사종교의 예언을 보는 느낌이 없지 않다. 마야의 천문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친 관측 결과와 장기 계산법으로, 2012년 동지인 12월21일을 기해 인간 역사의 새로운 시기가 열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야의 학자들이 달과 금성의 궤도를 1000년 단위로 하루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태음월의 길이를 29.53020일로 잡아 현재의 태음월인 29.53059일과 비교해 34초의 오차밖에 내지 않은 최고의 시간학자라 하더라도, 이런 유의 예측에는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날짜 예언에 ‘주역’과 힌두교 경전, 기독교의 ‘성경’까지 마음대로 해석해 동원한 것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책에서 지구 종말이 임박했다며 제시하는 과학적 근거는 훨씬 정교하고 설득력이 있다. 1940년대 이후, 그 중에서도 특히 2003년 이후 마지막 빙하기 이래로 1만1000년 만에 태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행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2012년 쯤에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는 점, 유해한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지구의 자기장에 큰 구멍이 생겨 북극과 남극의 자극 위치가 뒤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점, 태양계가 행성의 대기를 불안하게 만드는 성간 에너지 구름층에 진입했다는 점, 지구상에 6200만~6500만년 주기로 발생했던 대규모 멸종의 순환주기가 도래한 점, 60만년 주기로 폭발했던 옐로스톤 화산의 다음 폭발이 초읽기에 들어간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런 과학지식을 근거로 저자는, 마야문명의 흔적인 과테말라와 지구의 자기장을 관찰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헤르마누스 자기 관측소, 1963년 화산활동으로 탄생한 아이슬란드 쉬르트세이 섬 등지를 발로 누비며, 지구 종말의 징후들을 포착한다. 하지만 책은 종말론 숭배집단이 그렇듯이 머잖아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도래할 것이므로, 각자 살아남거나 죽음을 초월하기 위해 대비하라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대재앙이 있을 때마다 그랬듯이, 머잖아 인류가 겪을지도 모르는 재앙도 지구의 멸망을 향해 질주해온 인류의 위대한 각성이 이루어지거나, 보다 새롭고 차원 높은 문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지구에서 발생할 재앙을 단지 자연의 탓이 아닌 인류의 탓도 큰 것으로 보고, 이에 대비한 인간의 노력을 강조한 것도 가이아 이론을 소개한 저술가의 책답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출처 :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글쓴이 : 선심초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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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보고싶은 날.. " -이해인- 요즘엔 당신이 더욱 보고싶습니다 지척에 당신을 두고서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멍들게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마음에 견딜 수 없을 때면 이런 상상을 합니다 당신이 꿈이었으면 당신이 꿈이었으면 꿈속에 들어가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텐데 하루 종일 꿈속에 있기 위해 영원히 잠속에 빠져들수도 있을텐데..
        당신은 지금 현실속에 있습니다 냉혹한 현실은 내 마음에 화살이 되고 저는 과녁이 됩니다 또 한번의 그리움의 고난이 끝나면 남겨지는 내 삶의 체취들 눈물들 그리움들 그리고 사무치는 고독들.. 조용히 생각하며 내 자신을 달랩니다. 당신이 꿈이었으면
        당신이 꿈이었으면..

      * 잠시 그리운 옛날을 회상하면서...


    //
    출처 : 이강산애
    글쓴이 : 잉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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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에도 바람은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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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사오십대를 꺼져가는 등불이라 했나 ?
    바람 앞에 등불처럼
    때로는 위태로운 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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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만큼 꿈도 많았고
    만난 만큼 그리움도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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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약해지는 가슴이지만
    아직도 해지는 저녁 무렵이면
    가슴에선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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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날 무딘 칼날처럼
    어느 가슴 하나 벨 수 없지만
    바람소리 요란한 들판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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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는 마음들이
    날카로운 갈퀴를 세우고
    어디론가 용감히 달려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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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그리움이 저 혼자이고
    마주하고 살아도 외로움 많던 시간들이
    때로는 별밤에 울려 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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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첼로소리처럼 눈물겹지만
    붙잡지 않아도 떠날 수 있고
    기다리지 않아도 갈 수 있다..





    누가 사오십대를
    눈물겹게 저무는 노을이라 했나
    아직도 사랑 앞에 서면
    북소리처럼 둥둥 울리는 가슴인데 ...
    .
    .
    봅바람이 차가웁네요
    오늘도 그바람과함께
    즐건날 되십쇼~~~^^*


     

    출처 : 이강산애
    글쓴이 : 초롱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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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노장생 회춘의 묘약 "솔잎 사이다"

    ★재 료
    솔잎, 흑설탕, 물 ※ 물 500cc에 흑설탕 100g비율 ● 완숙꿀이라면 더 좋습니다 ● ★만드는법 ◆ 7∼8월경에 새로난 솔잎을 채취해 깨끗이 씻어 투명한 큰유리병에 채워놓고 끓여 식힌물을 약간 채운다음 흑설탕을 가하여 병마개를 막아 햇볕이 잘드는 곳에 둔다. ◆ 여름에는 일기가 좋으면 5∼6일이면 완전히 발효되어 솔잎은 회색으로 변해버린다. ◆ 봄 가을에는 2주일 가량 걸린다. ◆ 발효가 완전히 끝나면 다른용기에 즙을 옮기고 차로 마신다. ◆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주의사항 ◆ 솔잎은 적송(赤松)이든 흑송(黑松)이든 상관없으나 적송이 잎도 부드럽고 맛도 좋다. ◆ 태양열을 이용해 만들어야 한다. ◆ 그러므로 장마철이나 비가 올 때 담궈서는 안된다. ★참고사항 ◆ 차맛이 청량음료 같은 맛이 나서 일명 사이다 라한다. ◆ 마치 사이다와 같은 거품이 일기 때문에 "솔잎사이다"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혹자는 솔잎술'이라고도 하지만 알콜이 전혀 없으므로 술이 될 수 없다. ◆ 이 솔잎사이다는 옛부터 고혈압과 동맥경화증에 많이 마셔왔다.
    출처 : 사이고-성
    글쓴이 : 방 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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