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년 6월26일 새벽 釜山 앞바다에서 600명의 후방 침투 게릴라를 태운 북한군 수송선을 격침시켜 나라를 구한 백두산함은 6·25 직전 해군과 가족들이 돈을 모아 미국에서 사 온 고물선이었다. 2년간 백두산함의 생애를 추적해 책을 쓴 權主赫 이건산업 부사장에 의해 「대한해협 海戰」이 되살아났다. 이근미.
權 主 赫 (주)이건산업 부사장
1953년 서울 출생. 서울大 농대 임산가공학과 졸업.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 열대산림대학 수료. 1997년 해외자원개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 저서 「헨더슨 비행장」, 「여기가 남태평양이다」, 「바다여, 그 말하라!」 .[소년기의 감동을 찾아서,]
PC701 백두산함이 진주만에서 3인치포를 설치하는 장면.
(주)이건산업 權主赫(권주혁·50) 부사장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초에 「자유의 벗」이라는 월간잡지를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공적을 알게 되었다. 1950년 6월25일,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북한군을 싣고 오던 괴선박을 백두산함이 용감하게 무찔렀다는 「대한해협 海戰」 승전보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그는 커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인인 權主赫씨는 육군사관학교 31기 시험에 응시하려고 했으나 일요일에도 시험이 있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서울大에 입학하여 학군단(ROTC) 13기에 들어가 직업군인이 되고자 했으나 일요일에 열린 교육사열을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3년간 전방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군인은 되지 못했지만 백두산함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權主赫씨가 평소 친분이 있는 해군 관계자들에게 백두산함 관련 서적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결같이 자료가 부족해서 책으로 엮기가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대한해협 海戰이 가장 구체적으로 소개된 책은 1984년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韓國戰史」이다. 이 책에서 5페이지에 걸쳐 대한해협 海戰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나마 한 페이지는 전투가 벌어진 海域의 지도이다. 權主赫씨는 여러 자료를 찾았으나 대개 대한해협 海戰을 서너줄 정도 설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책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자 자신이 쓰기로 결심했다.
『승조원 가운데 생존한 분이 있는지 알아봤더니, 20여 분 살아 계시다고 하여 그분들을 만나면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존 승조원들을 찾아서
2001년 여름부터 해군본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를 찾아가 자료수집을 하면서 틈만 나면 백두산함 생존 승조원들을 찾아 나섰다. 權主赫씨는 올해 현충일에 백두산함 승전기록을 담은 「바다여, 그 말하라!」는 책을 기어이 펴냈다.
그는 이전에 이미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헨더슨 비행장」과 「여기가 남태평양이다」라는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이다. 전쟁 전문가가 아닌 그가 독특한 내용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이건산업 솔로몬 지사에서 20년간 근무하면서 태평양 일대를 답사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인이 되려던 꿈을 戰史 연구로 달래고 있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책을 앞으로도 계속 펴낼 계획이라는데, 그에 앞서 한국전쟁 관련 「바다여, 그 말하라!」를 먼저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앞에 낸 두 권의 책이 다 공군과 관련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해군에서 큰 관심을 보였어요. 해군 가운데 저에게 연락해오신 분도 많았고 책을 열 권씩 산 분도 있어요. 그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고, 백두산함 영웅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업을 해야겠다는 조급증도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책을 쓰게 한 동기였다고 말했다.
軍人 가족이 모은 성금으로 군함 마련
대한해협 海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백두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 태생부터가 대단히 감동적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태동은 1945년 8월21일 조직된 準군사단체 海事隊(해사대)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8월15일 정부가 수립될 때 해군 병력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보유 함정수는 105척(총 1만3000t)이었다. 미군이 인도한 노후한 소형 보병 상륙용 함정, 일본군이 남기고 간 소해정, 민간용 소형 화물선을 그대로 전용한 경비정 등이었는데 대부분 장비가 노후해 작전 가능한 배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장을 갖춘 전투용 함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해군은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면서 전투력을 갖기 위해 포를 장착한 함정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孫元一(손원일) 제독은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월급을 10%씩 공제하여 적립한 돈으로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자는 애국운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소위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던 崔英燮(최영섭·76·한국 해양소년단 서울연맹 고문) 예비역 대령은 당시 모금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장교 월급이 쌀 한 말 값도 안 되었어요. 대포 달린 군함을 사자며 월급의 10%를 공제했을 때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없었어요. 해군 장병들이 성금을 더 내기 위해 고철을 수집하여 고물상에 팔기도 했지요. 해군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바느질과 빨래를 해주고 양복을 고쳐 주어서 번 돈도 보탰지요. 아마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배를 구입한 예는 세계적으로 없을 겁니다』
해군은 모금한 돈 1만5000달러를 李承晩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전투함 한 척을 구입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해군의 정성에 감격한 李대통령은 한국 해군 고문관으로 파견 나와 있던 미국 해안경비대 소속 로빈슨 대위에게 즉시 쓸 만한 퇴역 전투함정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로빈슨 대위는 미국 뉴욕州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 소위號」라는 실습선을 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李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 사정이 극히 어려웠으나 李대통령은 국고에서 4만5000달러를 내주었다. 총 6만 달러로 함정과 포탄, 포, 연료, 수리비, 인건비를 다 충당해야 했다.
함정 구입을 결정하기에 앞서 함정을 살펴보기 위해 孫元一 제독과 로빈슨 대위는 항공편으로 미국으로 출발했다. 1949년 10월, 함정을 수리하여 몰고 태평양을 건너올 인수단원 15명이 뉴욕에 도착했다.
1949년 10월7일, 1만8000달러를 주고 450t짜리 화이트헤드 소위號를 구입했다. 이 배는 정원 73명, 만재 배수량 450t, 길이 52.9m, 폭 7.06m, 속력은 최고 18노트였다. 화이트헤드 소위號는 이미 오래 전에 뉴저지州 호보켄 부둣가에 있는 하버보트빌딩회사라는 조선소로 옮겨져 있었다. 배는 몹시 낡아 녹이 많이 슬었을 뿐만 아니라 기관을 움직여 본 지가 2∼3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인수요원들은 중위에서 중령까지 모두 장교였다. 인수요원들은 배에서 숙식을 하며 미국인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낮에는 페인트칠, 기관수리 등 잡일을 하였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인 노무자들에게 맡기면 경비 지출이 너무 크므로 인수요원들이 직접 잡일을 한 것이다.
호보켄은 조선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1990년까지 몇 개의 조선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작은 조선소 하나만 남아 있다.
權主赫씨가 백두산함의 역사를 찾기 위해 2003년 2월 호보켄을 찾았을 때 화이트헤드 소위號의 수리를 책임졌던 하버보트빌딩회사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국 해군의 첫 전투함을 인수한 곳을 꼭 찾고 싶다고 하자 우체국장이 나왔어요. 마침 우체국장 토미 테식이 아버지가 킹스포인트 해양학교를 졸업했다면서 옛날 조선소 사정을 좀 알더군요. 테식이 지도를 갖고 와서 조선소 위치를 알려 주어 정확히 호보켄 어느 지역에서 배를 인수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한국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 탄생
인수요원들이 호보켄에서 배 수리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갑판부의 이성호 중령(5代 해군참모총장)과 김동배 소령은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3인치 포 운용 훈련을 받았다.
호보켄 부두에서 함정 수리가 다 끝나자 마지막으로 인수요원들은 배의 앞부분에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흰색 페인트로 크게 「701」이라고 썼다. 12월24일 701호는 호보켄 부두에 정박된 밧줄을 풀고 맨해튼 섬의 남쪽을 돌아 롱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있는 미국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 정박하였다. 12월26일 오전 10시, 제8부두에서는 한국 해군의 최초 전투함정인 초계함 백두산함의 명명식이 뒷갑판에서 열렸다. 이 명명식에는 당시 駐美 한국대사관의 장면 대사, 孫元一 제독, 교민 여러 명, 美軍, 승조원 등 30여 명이 참석하였다. 마스트에 태극기를 게양한 뒤 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던 일행은 모두 목이 메었다.
명명식이 끝나자 드디어 백두산함은 태극기를 펄럭이며 후일 제2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함장 박옥규 중령의 지휘에 따라 뉴욕 항구를 빠져 나왔다. 파도가 몹시 거세 대원들은 모두 멀미를 하며 힘든 항해를 했다. 12월31일 마이애미에 도착해 급유를 받은 후 1950년 1월1일 아침 7시 다시 출발했다. 거친 항해 끝에 1950년 1월24일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교민들은 한국 군함이 들어온다고 하여 큰 기대를 하고 있다가 막상 들어온 백두산함이 조그만 경비정 같은 함정이어서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독립군과 上海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낼 정도로 애국심이 높았던 하와이 교포들은 조국이 군함을 갖게 된 것에 긍지를 가졌다.
백두산함은 이틀 후 진주만의 해군 수리창으로 이동하여 앞 갑판에 3인치 대포 한 문을 장착하기를 기다렸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백두산함에 3인치 포가 장착되었다. 3인치 포를 앞갑판에 설치한 후 오하우 섬 앞바다에 나가 몇 발을 쏘아 보며 포의 성능을 시험하였다. 3월20일 하와이를 출발한 백두산함은 괌 섬 아프라 항구에 들러 美 해군으로부터 3인치 포탄 100발과 기름을 구입한 뒤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비밀병기라고 접근 못 하게 해
4월9일, 태평양을 가로질러 온 백두산함이 우리나라 남해안 근해에 나타나자 조업하고 있던 어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리나라에 군함이 없는 줄 알고 있던 어부들이 태극기를 달고 나타난 백두산함을 보고 감격한 것이다. 4월10일, 뉴욕을 떠나 석 달 반 동안 대서양과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백두산함이 드디어 진해 기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3인치(76mm)포 1문만 장착한 백두산함에 해군은 50mm 중기관총 2정을 설치하였다.
백두산함은 초계정급이다. 초계정은 연안감시 임무를 가진 작은 함정으로 배수량은 300~500t, 수용할 수 있는 승조원은 40~80명 정도이다. 해군에서 승급시켜 백두산함은 초계함급이 되었고, 함정 책임자의 직책도 정장에서 함장으로 승급하였다. 백두산함이 진해에 입항한 이후 제2대 함장으로 崔龍男(최용남) 중령이 임명되었다.
백두산함 생존 승조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예비역 대령 崔英燮씨는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해군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내가 해사 3기인데 갑판과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기관과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김종식 소위도 백두산함에 배치되었어요. 부사관들도 성적순으로 백두산함에 배치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데 그때는 백두산함이 비밀병기라며 100m 밖에다 새끼줄을 치고 헌병을 배치해서 접근을 막았어요. 그때만 해도 3인치 포를 장착한 군함이 없었으니 비밀병기라고 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 첫 군함이어서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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