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추천 3 조회 234 20.08.14 08:53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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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선사의 전심법요의 한 구절입니다.

'6바라밀과 만행의 공덕을 본래 구족하고 있으니 애써 수행해서 얻을 것이 없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고요할 뿐.

이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고, 모양에 집착해 애써서 정진하여 무언가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망상에 빠진 것이니, 도와는 어긋난다'

일체 모든 공덕과 6바라밀의 수행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본래부터 더 구족하고 있습니다.

원만구족해지기 위해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를 억지로 닦을 것도 없고,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 수행, 염불, 독경, 절, 좌선 등 온갖 수행들을 얼마나 많이 해 왔는지 모릅니다.

이 공부는 힘써 수행하고 정진해서 얻는 공부가 아닙니다.

진실로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이미 구족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내 마음이 이미 바로 부처임을 결코 믿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망상에 빠진 것이어서 도와는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분별망상, 생각을 진짜라고 여겨 쫓아가지만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생각, 망상, 분별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생각이 없을 때, 아무 일이 없고, 그 자리가 바로 본래 구족입니다.

그저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다시금 아무 일 없는 지금 이 자리, 당처로 돌아올 뿐이지요.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보내지 않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생각을 주인으로 삼지 않으며, 다만 지금 여기 눈앞의 이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분별 없이 본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
YouTube에서 '괴로워 죽겠다고? 상을 깨면 아무것도 아냐! 상을 타파하면 깨닫는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의 질문과 상을 깨는 답변' 보기
https://youtu.be/UYTbVAAdM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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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자들의 세상의 권리를 --

반세기 이전 남자들

남자라는 이유로 집안 어른의 위세 대단 했지요

남자라는 이유로 그 위세가--

 

이제 환갑나이를 넘긴 어느 할머니 기억 속에는

한 맺힌 어머니의 손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여자는

남편 잘만나면 마나님도 되고

남편 잘못만나면 평생 종년이 되는 거여--

항상 하신 어머니의 넋두리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한이 맺힌 손속에

세상살이 고뇌가 한으로 맺혀 있습니다

 

"썩을 놈의 남정네 잘 못 만나서~!"

 

지지리도 못난 우리 아버지에게 모처럼

말대꾸 했다가 억울하게 얻어맞고

 

그래도 머리에 수건 한 장을 쓰고 광주리 이고

먹고 살겠다고 풀 매러 콩 밭에 나가신다

 

혼잣 말씀 썩을 놈의 남정네 뭘 했다고

어머니 속마음이지-- 어데 말 할 수 있오

 

울 어머니 섧게섧게 사시다가

어느 추운 날 아픈 몸으로 일히시다 병 더쳐서

 

약 한첩 못 써보고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저세상으로 가시기전까지

자식새끼가 뭐 길래 언 손 불며

 

시집살이 내내 무명수건 한 장 머리에 쓰고

자식들 굶길가 봐 남의일 내일 가려본적 없이

 

썩을 놈의 남정네 우리 아버지 잘 못 만나

팔자 탓도 못하시고 일 하시다가 일만 하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는 우리 어머니

새우잠 주무실 때

몹쓸 놈의 남정네는 물심부름 시키려 깨우시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몹쓸 놈 남정네

종살이 하시다가 눈 감으시니 이제 편하리오

 

어머니~!, 어머니~!

썩을 놈의 남정네들 이제 ""가 죽었소

이제는 썩을 놈의 남정네들은 장가도 못 간다오

우리 어머니 세상은

알콜 중독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한 세대 앞서 살다간 여인들의 한 맺힌 말한마디

"남정네를 잘 못 만나서~!"

"남정네를 잘 못만나서~!"

 

남정네 잘 만나면 마나님도 되고

남정네 잘못만 나면

평생 종년으로 살다간 한 세대 앞서 산 여인들

 

여기 그 시대의 여인 어머니들의 험한 손

남정네 잘못만난 여인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하고 또 일을 해야 했기에

섬섬옥수 아낙의 손이--

 

---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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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고드름 추천 0 조회 7 20.07.30 14:12 댓글 0

 

♧요산요수 (樂山樂水)

 

산수의 자연을 즐기고 좋아하다.

 

산과 물의 경치와 자연을 좋아하는 것이

요산(樂山)이고 요수(樂水)다.

요산은 부산에서 활약한 소설가 김정한의 아호로 친숙한 말이기도 하다.

즐길 락(樂) 글자는 악기 북을 나타내는 백(白)을 작고 작은(幺/ 요) 실로

나무(木/ 목) 받침대에 묶은 것을 형상화하여 풍류 樂(악)을 뜻하고,

누구나 즐기고 좋아하니 좋아할 樂(요)가 되었다고 한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이 말은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라고 한 공자 말씀에서 나왔다.

 

자연을 좋아하는데 무슨 구별이 있을까 싶은데 처음 뜻을 살펴보자.

‘논어’ 옹야 편에서 지자가 물을 좋아하고 인자가 산을 좋아한다면서

앞의 말 뒤로 이렇게 이어진다.

‘슬기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대체적인 풀이는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롭기 때문에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그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하는데,

어진 사람은 심지를 한 곳에 굳히고 쉽게 움직이지 않아 제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또 그 다음은 이렇다.

‘슬기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를 좇고자 항상 움직이므로

여러 가지 지식과 견문이 넓어지니 자연히 세상만물을 즐기게 되고,

어진 사람은 남과 맞서 싸우지 않고 화합하려 하기 때문에

위험에 빠질 염려가 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풀이다.

물론 지자의 즐거움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서 다스리는 데서 찾거나

자신을 완성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라고도 한다.

또 어진 사람의 장수는 오래 산다기보다 안정되었기에 떳떳함이 있어

오래 갈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슬기로운 사람, 어진 사람,

어떻게 풀이하든 다 좋은 말이다.

우스개로 낚시하러 바다로 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등산을 취미로 여기는 사람들은 슬기롭기 때문이라고 서로 자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세울 뿐 다른 취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혜로움과 어짊이 모두 중요한 덕목이지만

단지 어느 쪽이 더 두드러지는 것인가에 따라 성질이 달라질 뿐이다.

그렇더라도 지혜가 지나쳐 속셈만 차리고,

인자함이 넘쳐 매사에 맺고 끊음이 없이 물러터진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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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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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다.

현실의 어떤 부분은 즐겁고 어떤 부분은 괴롭다.

어떤 사람은 싫고 어떤 사람은 좋다.

괴로운 일을 떠올리거나, 싫은 사람을 생각할 때는 갑자기 힘들고 괴롭고 싫은 마음이 올라온다.

행복한 일을 떠올리거나, 좋은 사람을 생각하면 갑자기 행복해지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과 불행, 좋은 것과 싫은 것,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 등을 반복해서 생각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가, '괴로운 사람'이 되는 게임을 반복하며 산다.

그런데 이 게임의 특징은 반드시 '생각'해야만 그런 괴롭거나 행복한 마음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을 때라도, 잠깐 행복한 상상을 하면 금방 행복해 지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이 일어날 때만 우리는 그 즐겁고 괴로운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언제나 '생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모든 행과 불행이 일어나기 이전의 아무 일 없는 상태에 가 닿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근원에서는 언제나 아무 일도 없지만, 생각이 온갖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 행복과 불행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나면서 괴롭다는 환상, 즐겁다는 환상에 빠져드는 것뿐이다.

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이라는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보라.

한 생각이 나를 휩쓸더라도, 이 생각은 진짜가 아님을 문득 떠올려 보라.

생각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생각이 나를 휩쓸 때, 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생각이 없는 텅 빈 배경의 자리로 나앉아 보라.

곧장 아무 일이 없어진다.

왜 그럴까?

그 생각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만, 잠깐 작동하는 허상이고, 가짜이기 때문이다.

생각에 속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생각 이전의 근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근원에 뿌리내릴 수 있다.

언제나 여여한, 아무런 일 없는 자리, 지고의 평화에 곧장 이를 수 있다.


 

법상 추천 4 조회 397 20.06.18 22:06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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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나의 과거의 모든 삶은 그것 자체로 온전합니다.

거기에 시비를 걸지 마세요.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허물도 없습니다.

물론 잘못도 있을 수 있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으며, 악몽같은 과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만약 그 지나 온 과거의 특정 부분을 붙잡아 집착하거나, 질척대거나, 괴로워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되돌아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없는 환영을 내 의식으로 붙잡아 쥐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실하지 못하며, 허상을 붙잡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온 모든 과거를 문제 삼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으로 그대로 두세요.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단죄하려 하거나, 그 부럽단 시절로 돌아가려 하거나 하는 양 극단의 판단을 내려놓고, 과거와는 완전히 이별을 선언해 주세요.

그리고 허상인 모든 과거가 아닌, 실상인 지금 이 순간과 새롭게 관계를 맺어 보세요.

지금 여기, 전혀 새로운, 과거의 그 누구도 아닌, 있는 이대로의 새로운 한 존재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바로 이 삶을 사십시오.

 

강형욱 추천 0 조회 33 20.06.13 14:46 댓글 0

 

 

 

함소아 추천 0 조회 22 20.06.06 08:51 댓글 0

 

 

유당 추천 0 조회 85 20.07.02 21:1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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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식(善知識)은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다

 

진정한 '발심'이란 곧, '온갖 법의 실상'을 요달(了達)해서,

<한 법도 구할 것이 없고, 한 법도 이룰 것이 없는 경지>를 지향하는 걸 말합니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지향할 건 또 무엇이겠어요? 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지면

이것을 일러서 '보리심을 발했다'(發菩提心)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불가에서의 '선지식'(善知識)은 세속에서의 '선생'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세속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앞에 하고,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복종하게 만들던가, 아니면 반대하게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선지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지식'이란 인간 본연의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즉 '성품'을 본, '청정한 제 마음'을 밝힌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 속에는

선·악을 비롯한 일체의 차별법의 자취가 없으며, 없다는 것조차 없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선지식'인 겁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학인'(學人)들에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일러줄

말이 없는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 아니면, 즉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지식'을 앞에

하고서도 아무 공덕도 입지 못합니다.

 

올바른 납자(衲子)라면 '선지식'을 대했을 때, 마치 세상 사람들이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바로잡듯이, 학인은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지견들로 꽉 차서, 마치 넝마 창고처럼 되어버렸는지를 비추어 보는 겁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경우 선지식은 「편견이 없어야 한다」「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 많은 선지석이 때때로 그렇게 말하는 걸 봤다고 하겠지요?

선지식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말할 때엔 제자의 지혜가 아직 충분히 열리지 못해서,

능히 '큰 지혜'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시 방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결코 선지식의 견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런 온갖 지견들이 전혀 허망한 것이어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파함으로써, 전혀 조작을 빌리거나 대처하는 일도 없이 문득 회심(廻心)하여야만

비로소 잠잠히 <그 자리>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리심'을 얻는 데는 별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리심'은 물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 그런 마음입니다. 즉 '보리'(菩提)는

<도시 '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보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밝히고 맑혀서 새로이 이루고 얻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별달리 방편에

의지해서 일을 도모할 것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법도 구할 것이 없다"고 아는 마음>과 <참으로 구함이 없어서 무심(無心)한

마음>과의 차이를 알 수 있겠어요? 만약 이 이치를 분명히 깨칠 수만 있다면,

'보리심'은 아무 공력(功力)도 들이지 않고 나날이 자라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염불'이니 '예불'이니 또는 '참선'이니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니 하면서, 뜻을 세우고

마음을 내면서,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것으로써 '수행'인 줄 안다면,

이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무리 애쓴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과법'의 굴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비극입니다.

 

용담(龍潭) 숭신(崇信) 선사가 어느 날 천황(天皇)에게 묻기를,···

『제가 여기 온 이래로 아직껏 화상께서 심요(心要; 마음법의 요체)를 일러주심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나는 그대가 온 이래로 그대에게 '심요'를 일러주지 않은 적이 없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에 용담이 묻기를, ···
『어디가 일러주신 경지입니까?』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그대가 차를 가져오면 내가 받아 마셨고, 그대가 밥을 가져오면 내가 받아 먹었고,

그대가 인사를 하면 내가 손을 들었었다. 어디가 '심요'를 보여 주지 않은 곳인가?』 하니,

숭신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천황이 말하기를,···

『보려면 당장 봐야 할 것이요, 이리저리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하니,

선사가 이 말 끝에 당장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기를,···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니, 천황이 말하기를, ···
『'성품'에 맡겨 소요(逍遙)하며, 인연을 따르되 모름지기 방광(放曠)하여 그 언행(言行)에

걸림이 없어야 할지니라. 다만 범부의 망정(妄情)을 다할지언정 별달리 '성스러운 견해'가

있는 게 아니니라.』 했습니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고, 또한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고,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가 없는,

이것은 항상 우리들 목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림자'나 '메아리'를 허망하다고 하는 거구요. 만약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실다운 체성'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 즉 나무나 음성과 같은 인연에 기댈 것 없이,

저들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이

'결과'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지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건 모두 '제 체성'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결과'가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어요?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정식'(情識)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이 모두가 <제주도 하루방이 애기를 배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전혀 잠꼬대와 같은 게 바로 '인과법'의 실상인 겁니다.

'원인'도 '결과'도 다 '빈 것'임이 밝혀진 거죠.

이건 '인과법'을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게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을 계기가 되어준 것뿐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뭐가 있어요? 따라서 물론 '지금의 것'이

옛날로 간 일도 없구요. 아무것도 실지로 가고 오고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참 알고 보면 범부들의 마음이 너무나 혼미해 있어서, 전혀 본래 문제가 될 것도 없는

문제들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원인'이건 '결과'건, 이 모두가 다 '빈 이름'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앞뒤가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뒤에 이어 닿는 게 없는데, 거기에 무슨 '탈'이 붙을

수 있겠어요? 일체의 '범정'(凡情)과 '이름'이 붙을 여지가 없으며, 그것은 '그것'이라는

지칭대명사조차 붙을 수 없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스스로 청정한 존재인 겁니다.

아니, 여기에 이르러선 그 '청정'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군말이 되고 맙니다.

도대체 '그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마당에 '무엇'에 대해서 '청정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어요? 이 흔하게 쓰이는 '청정'이라는 말은 사실 그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은연중에 <청정하고자 하는 바람>을 일으켜 왔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들의 마음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때'(垢)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청정'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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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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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찾고 벗 가리기를

앤풀빛 추천 0 조회 200 09.07.24 14:5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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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 立志

 

입지를 산 같이 하면 결정할 시기 오리니 __  스승 찾고

벗 가리기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__  아득한 벼랑에서

손 놓아 버리고 몸 굴리면 __  철저히 온 몸으로 정안 正眼

열리리라 __

 

 

 

 

어리석지 않은 중생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 했다.

때는 반드시 찾아오고 그 때를 위해 항상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라 했다.

스승을 항상 존경하고 벗은 나에게 바른 벗인가

나쁜 벗인가를 가리라고 했다.

그것을 게을리하면 때가 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차라리 힘들면

아득한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굴려라.

그러면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정안 正眼 이다.


꿈에서 벗어나라 /청담 스님

정수 추천 0 조회 24 19.11.26 11: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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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벗어나라  / 청담 스님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현실이라는 것도
그대로 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생시가 바로 꿈이라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대들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 꿈(생시)이
영원한 꿈인데도 꿈인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연애해 가지고
아들딸 낳아서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서 손자를 보고 하여 잘 산다.
이처럼 우리가 꿈속에서 겪는 세계나 생시의 일들이
너무도 같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산소 수소가 있으며 온 우주가 다 거기 있다,
꿈에서도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날씨가 차고 더우며 어린애들 낳아서 키워보면
어려서부터 점점 자라서 커간다.
그러니 아러한 것을 어떻게 꿈인 줄로 알 수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꿈을 깨어볼라치면
시간은 불과 몇 분도 채 안된다.

인생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이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 거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이다.

정말 실상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돼있으니 꿈꿀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자는 시간도 대체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 시간 동안에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한 해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나 반나절 꿈도 꾸지만은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나절 꿈도 꾸지만은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 시간보다 꿈 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된다.​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마음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에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세계를 창조헤 놓는다.
꿈울 깰 때에도 꿈속에 있던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들어서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든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밖에 개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이다.
뜨겁고 찬 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다.
주객이 둘이 아니므로
우리의 인식밖에 기둥과 기둥이 있을 수 없으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을 쉰 이 청정한 본래의 마음법에는
기둥도 기둥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저 기둥한 가지를 볼 때에는
곧 기둥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꿈이 아무리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깨기 전에는
꼼짝없이 사실인 고와 낙을 받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종생들을 업습에서 일어나는
천당 지옥의 꿈을 벗어날 길이 없다.
꿈에서 죽고 꿈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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