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공개] 金正日의 여인들

 
‘장군님의 여인’들은 대부분 연예인
 
김정일이 총애했던 성혜림, 고영희, 홍영희, 황금주, 이복희, 김정화, 우인희, 김옥, 윤혜영, 라혜경 등은 영화배우, 가수, 피아니스트, 무용수…

⊙ 김정일이 가장 총애한 여인은 ‘준마처녀’ 부른 가수 윤혜영.
    그러나 연인과 함께 목련관에서 투신자살 기도
⊙ 김옥은 기쁨조 출신으로 기쁨조 총괄 당 조직부 5과 별도직 과장 맡아 김정일의 채홍사 역할
⊙ 가장 최근의 ‘김정일 여자’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 라혜경

張眞晟 전 북한 조선노동당 작가

 <편집자 주> 필자 장진성씨는 평양에서 출생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노동당 작가 겸 김정일 찬양 서사시인(1호시인)으로 활동했다. 2004년 탈북한 그는 2008년 4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詩로써 고발한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했다.
 
  2009년 5월에는 김정일의 사생활과 궁중내막을 폭로한 서사시집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출간했다. 이 서사시집은 김정일의 기쁨조인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한국 언론이 金正日(김정일)이 네 번째 부인 김옥을 맞았다고 발표한 시기는 2006년 7월이었다. 이후 김정일 와병설로 세계 언론이 북한의 권력공백에 초점을 맞추면서 김옥의 ‘김정일 부인설’은 기정사실로 고착됐다.
 
  김옥의 지위와 위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국방위원회 과장 임명, 고영희 암살조종자, 김정일 침상을 유일하게 지키는 사람, 장성택과 함께 3남 김정운 후계를 지원하는 인물 등 최측근들도 알기 힘든 특급 비밀들이 우리 언론에 소개됐다. 오보는 수정하면 되지만, 문제는 이런 추측성 여론몰이가 우리 정부의 대북분석과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해 발언하면 그가 누구든 3대를 滅族(멸족)시킨다. 그런 엄격한 대외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김정일의 비밀 영역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을 두 번 만나며 ‘접견자’라는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필자는 在北(재북)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5과, 그 산하 의례원들과 私的(사적)으로 사귈 기회를 가졌다. 더욱이 김정일 최측근에서 근무하는 친인척과에 있었던 연고로, 그리고 김정일 찬양 서사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각 분야의 인사들을 취재할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북한에는 시인이 많지만 김정일을 직접 찬양하는 서사시인은 몇 명으로 한정돼 있다. 이는 神格化(신격화) 차원에서 김정일을 서사시적으로 찬양할 수 있는 창작능력이 국가문학작품심의위원회에서 인정돼야 가능하다.
 
  필자는 김정일 신격화 창작을 위해 측근에 있던 친척들과 그 레벨의 사람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김정일 초대소에서 근무하던 의례원들과의 만남으로 김정일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알게 됐다. 이를 계기로 2004년 탈북이라는 정치망명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김옥의 얼굴 잘못 알려져
 
북한 왕재산 경음악단 소속 ‘기쁨조’들이 김정일과 고위간부들 앞에서 현란한 춤을 추고 있다. 이 사진의 촬영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2006년 7월 한국 언론은 김정일이 네 번째 부인을 맞았다고 소개했다. 필자는 그보다 한 해 전인 2005년 8월 월간지 기고를 통해 김정일과 김옥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밝혔다.
 
  2004년 남한에 입국한 후 정보기관에서 진술할 때도 김정일의 동거녀들 중 김옥에 이어 라혜경 순으로 증언했다. 당시 조사관들은 “고영희 우상화작업이 지금 한창인데 무슨 소릴 하느냐”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김옥이 네 번째 부인이 됐다는 기사가 나오자 조사관들은 “당신이 제보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김옥과 언론이 전하는 김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김옥의 사진이 다르다. 김옥은 북한의 간부들과 각계 인사들이 다 아는 공개된 얼굴이다. 그의 사진은 북한 노동당출판사 도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김옥은 만수대예술단 국가독창조(클래식음악으로 김정일의 파티에 자주 참가) 시연회와 기쁨조 인사업무에도 공식 참여하곤 했다.
 
  우리 언론에선 김옥이 국방위원회 과장 직함으로 미국을 방문했었다고 하는데, 미국 정보기관은 그때의 김옥 추정의 ‘김선옥’이라는 여성이 趙明祿(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의 트렁크를 들어 주고, 문서를 챙겨 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는 위치였다고 한다.
 
  김옥의 사진은 후지모토 겐지(?本健二)의 책 <김정일의 요리사>에 나오는 미모의 얼굴이다. 그의 아버지가 중앙당 재정경리부 김효 부부장이라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1985년 김옥이 왕재산경음악단에 배치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인민무력부 군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여성의 아버지라도 前(전) 직업과 상관없는 해괴한 초고속 승진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것은 김옥이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했다는 부분이다. 현재 남한에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 탈북자들이 여럿 있다. 워낙 대학과정이 길기 때문에 김옥의 선후배들은 그녀를 알아야 하지만, 그들은 김옥의 재학 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김옥은 평양음악무용대학이 아닌 금성고등중학교 졸업생이다.
 
 
  김옥은 금성고등중학교 피아노과 출신의 기쁨조
 
한국언론이 김옥이라고 보도한 사진(왼쪽). 이 사진 속의 인물은 조명록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 대표단 일원으로 동행한 김선옥이란 여성이다. 오른쪽 사진이 필자가 국내 최초로 확인한 김옥의 얼굴. 〈김정일의 요리사〉를 쓴 후지모토 겐지도 이 여성을 김옥이라고 확인했다.

  서울에서 공연했던 평양학생소년예술단원 대부분이 금성고등중학교 학생들이다. 북한에선 전통적으로 12월 31일이면 金日成(김일성)이 관람하는 새해 어린이들의 종합공연을 하는데, 금성고등중학교는 이를 위해 신설한 전문학교였다. 평양시 중구역 평양학생소년궁전이 그 모체다.
 
  금성고등중학교는 인물 위주로 여학생들을 선발하고, 그 졸업생들의 상당수가 김정일의 기쁨조인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일명 ‘기쁨조 양성학교’로 불린다.
 
  1989년 초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이 신설되면서 금성고등중학교는 제1고등과 제2고등으로 분류됐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아닌 전문부 3년 과정을 추가한 전문학교가 됐다. 금성 제1고등중학교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 위치했는데,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5과의 관리를 받는다. 주로 김정일의 기쁨조 여배우들을 키운다. 금성 제2고등중학교는 일반 음악 神童(신동)들을 키워내는 학교다.
 
  제46기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생들의 나이가 1972~1973년생들이다. 만약 1967년생인 김옥이 평양음악무용대학을 41기로 졸업했다면, 그 시점은 1988년 혹은 1989년이 된다. 그러나 김옥은 금성고등중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1985년경 왕재산경음악단 피아니스트로 입단했다.
 
  북한에서 필자가 알던 왕재산경음악단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김옥이 처음부터 김정일의 눈에 든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은 김정일이 김옥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미모보다 당돌한 성품과 남다른 영리함,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김옥이 신입 당시에는 미모가 더 출중하고 키가 늘씬한 무용배우들이 김정일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었다. 김옥은 반주자에 불과했으나 그 반주가 김정일 곁으로 다가가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김정일은 공격적인 울림과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금관악기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노동신문은 김정일의 최고사령부 군악대와 여성취주악단 공연 관람 소식을 여러 번 보도하기도 한다. 북한에 최고사령부 군악대, 인민보안성 여성취주악단, 철도성 여성취주악단, 청년동맹 취주악단 등 금관편성의 악단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귀여운 言行으로 金正日의 총애 얻어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은 영화배우 성혜림(왼쪽 사진). 오른쪽은 김정일의 둘째아들 정철과 셋째 정운을 낳은 고영희.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 출신이다.

  김정일은 왕재산경음악단 반주에 맞춰 파티 때마다 직접 트럼펫 연주를 선보이곤 했다. 김정일에게 트럼펫을 가르친 사람은 유학생 출신의 당시 왕재산경음악단 트럼펫연주자(이름은 잘 모름)였는데, 북한 TV는 자주 그의 솔로연주를 방영했다. 연습 과정에서 반주자들과 어울릴 기회를 가졌던 김정일은 당시 피아니스트였던 김옥의 당돌한 지적과 충고를 즐겼다고 한다.
 
  왕재산경음악단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파티 때 김정일이 김옥의 다리를 만지면 “왜 그래 정말!” 하고 반말로 화를 냈고, 김정일은 통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절대 권력으로 순종만을 보아 왔던 김정일에게 그녀의 ‘귀여운 언행’들은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김옥의 돌발언행들은 어린애의 응석이고, 김정일은 그것을 받아 주는 어른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간부들은 김옥에게 김정일과 똑같은 예의를 차렸다. 아니, 그 한 여자만이 아니라 김정일이 특별히 아끼는 기쁨조 여자들에게도 주인을 대하듯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북한이다.
 
  그중에서도 김옥은 김정일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셈이다.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워진 김옥은 파티 때마다 김정일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고, 간부들에게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술도 제법이어서 김정일 대신 마시기도 하고, 가끔 그 취기로 미워할 수 없는 호통도 쳤다고 한다.
 
  성혜림, 고영희도 예술인 출신이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궁중 여자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반면에 김옥은 김정일의 기쁨조로 발탁됐고, 최측근들과의 섹스파티에 동참하여 김정일 옆에서 유흥을 시중들던 여자였다.
 
  김정일은 최측근들과 섹스파티를 자주 열곤 했는데, 그런 파티 때마다 김정일의 파트너에 불과했던 김옥을 김정일이 정식 부인으로 맞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김옥은 김정일 부인 될 수 없어
 
78명으로 구성된 평양학생소년예술단 2000년 5월 2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하고 있다. 단원 대부분이 금성고등중학교 학생들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격화로 체제유지를 하는 김정일이 정식으로 네 번째 부인을 맞기는 어려울 듯 보인다. 김일성조국, 김정일민족 운운하며 신격화 차원에서 봉건 유교적인 克己復禮(극기복례·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름)를 설교하는 북한에서 그 모범이 돼야 할 지도자가 딸 같은 27년 연하의 김옥을 부인으로 맞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권력의 나이로 이성의 젊은 감각만을 탐욕했던 그가 이제 와서 취향을 갑자기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자기가 만든 신격화와 유일사상 때문에 김정일은 이혼녀인 성혜림도, 재일교포였던 고영희도 정식 아내가 아니라 동거녀로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남들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독재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결국 다 가지는 것과 동시에 다 잃었다. 권력의 정체성을 고집하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고, 그래서 김정일은 여자를 만나면 서로의 나이를 잊고 상대의 인간적 매력만을 탐하는 듯하다.
 
  북한에선 중앙당(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5과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챙기는 부서로, 업무활동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이 부서는 초대소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공급, 5과생들에 대한 관리를 담당한다. 전국 각 도·시·군에까지 산하 조직들을 가지고 있는 5과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전국 시골에 이르기까지 담당 지역 여중생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들의 업무 대상은 13~14세 여중 3학년생들이다. 그 나이에 생리를 시작하면서 애티를 벗고 처녀꼴이 잡히기 때문이다. 전국의 5과 직원들은 이 나이의 여중생 중 미모가 뛰어난 이들을 찾아내 리스트를 만들어 졸업할 때까지 해마다 신체검사와 얼굴 변형을 체크한다. 졸업할 나이인 16세가 되면 최종 선별한 여중 졸업생들을 군에서 시로, 시에서 도를 거쳐 중앙에서 종합 인물심사를 한다.
 
  이렇게 엄격한 심사를 거쳐 통과된 100여 명의 16~17세 여중생들을 해마다 일정한 교육을 시켜 김정일초대소에 공급한다. 중앙심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 특혜를 준다.
 
 
  미모의 여성을 ‘5과생’으로 불러 
공훈배우 리경숙.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도 자신의 책에서 “처 엄정녀는 16세 때 기쁨조로 들어왔던 여자였다”고 회고했다. 5과 미녀차출부서 부원들의 업무평가는 누가 어떤 미모의 여성들을 더 많이 발굴했으며, 그렇게 선발한 여성이 김정일 곁으로 가까이 갔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북한 주민들은 미모의 여성을 ‘5과생’으로 부른다. 김정일의 기쁨조인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도 중앙당 조직지도부 5과가 관리한다. 선전을 통한 주민세뇌를 강요하는 북한에선 모든 가요가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만 일반에 공개된다. 그 노래들 중 대부분이 이 두 예술단에서 창작되거나 재형성되기 때문에 기쁨조 역할만이 아니라 북한의 음악을 주도하는 예술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본인들은 물론 그 직계가족에 대한 대우도 상당하다. 보천보전자악단의 직계가족은 노동당 간부들 사택이 밀집된 중구역 창광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재산경음악단 직계가족들은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관문동 호화아파트에 위치하고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유일하게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조금화.

  보천보전자악단의 유명가수 겸 인민배우 김광숙, 북한 유명 노래 ‘휘파람’을 부른 가수 겸 인민배우 전혜영, 공훈배우들인 리분희·리경숙도 금성고등중학교 졸업생이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유일하게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여자는 조금화다.
 
  김옥은 김정일의 신임을 얻으면서 기쁨조 일원에서 기쁨조를 담당하는 지위로 승격됐다. 김옥이 만수대예술단 국가독창조 시연회나 기쁨조 인물들을 직접 선발한 것은 누구보다 김정일의 異性(이성) 취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감정기복이 심한 김정일의 정서와 감정코드에 맞춰 그때그때 기쁨조를 선별해 초대소에 보내야 하는 역할은 오직 김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김옥의 위상은 더 공고해져 초대소와 기쁨조를 총괄하는 중앙당 조직부 5과의 별도직 과장 직함도 갖게 됐다.
 
북한노래 ‘휘파람’을 부른 가수 겸 인민배우 전혜영.

  2001년부터 김정일이 인민군 시찰을 가거나 공개행사에 고영희와 동행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는 후계준비 차원에서 생모의 업적을 남기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도 있지만, 평생 궁에 갇혀 산 아내의 건강과 고독을 고려한 김정일의 배려였을 수도 있다. 당시 김정일의 고영희에 대한 관심은 비상하게 높았다.
 
  고위직 간부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측근들과의 파티나 회의에서 노망들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고영희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실제 ‘1호 행사’ 때마다 김정일은 거의 고영희를 대동했다.
 
  김정일이 조선인민군공훈합창단 공연이나 군인가족예술소조원들의 공연을 관람할 때면 객석을 채우기 위해 간부들과 접견자들을 초대한다. 필자도 그 1호행사에 참가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정일 주변에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옆에는 고영희, 뒤에는 두 사람을 보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옥이었다. 후지모토 겐지가 제공한 김옥의 사진도 김정일의 뒤에 서 있는 실무 일꾼의 모습이다.
 
  우리 언론이 말한 김옥의 기술서기 직함이란 이렇듯 5과의 별도직 과장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선 접대비서이고 비공식적으로는 김정일의 ‘즐거운 밤’을 보장하는 직책인 셈이다. 후지모토 겐지가 <金正日의 요리사>란 책에서 초대소 음식 재료구입에 필요한 돈을 김옥 비서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정일 옆자리에 피아니스트 라혜경 등장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 수업 시간 외에는 대동강이나 모란봉 등에 가서 자유시간을 갖기도 한다. 김정일의 최근 여인인 라혜경은 평양음악무용대학을 48기로 졸업했다.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술집 마담에게 장가 가지는 않는다. 북한 간부들과 각계 인사들이 다 아는 ‘뒷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영부인이 되어 나타난다면 지도자의 신격화된 인격이 망가지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김옥에 대한 김정일의 총애가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는 1992~1993년이다. 이때 김옥은 자기의 매력 포인트를 최대한 부각시키던 때여서 간부들을 함부로 대했다. 이로 인해 김일성에게 이 사실들이 보고됐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김정일의 권력독점과 횡포에 불만이었던 김일성은 정치국 위원들과의 정례모임에서 “당 조직비서에게 여자가 너무 많다”며 공개 비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국내외 중요 사정은 물론 자신의 사생활도 비밀로 하던 김정일이었기에 김옥은 父子(부자) 갈등의 핵으로 부각됐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잠시 마카오로 나가게 됐다.
 
  1996년 초,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 전 지역이 국가적인 3년祭祀(제사) 기간이었을 때에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국가보위부에서 나왔다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당 비서 방에서 회의를 했고, 뒤이어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학생들은 대학 측으로부터 “피아노 특설학부 재학 중 갑자기 사라진 라혜경의 사진들을 모두 당 조직에 바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만약 사진을 갖고 있다가 발견되면 퇴학조치는 물론 그 가족은 엄중한 정치적 과오로 처벌받는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당 비서실로 사진들이 속속 들어왔고,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을 또다시 불러들여 비밀을 요구하는 등 이중삼중의 회수조치가 이뤄졌다. 특히 라혜경과 같은 반 학생들과 담임선생의 자택에는 양복 입은 사람들이 불시에 방문해 가택수색을 하기도 했다.
 
 
  ‘장군님’은 연예인을 좋아해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이 2002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당시 모습을 게재했다. 이 주간지는 “김 위원장과 동행한 ‘기쁨조’를 하바로프스크역에서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며 “오른쪽 여인은 작년에도 동행했던 여인으로 전형적인 기쁨조 스타일이지만, 왼쪽 사진의 숏커트 스타일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인사비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당 비서나 간부과에서는 “라혜경에 대한 소문을 함부로 퍼뜨리지 말라”는 경고를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수차례 언급했다.
 
  의무병역제도를 실시하는 북한에서 유독 군 면제가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학교가 평양음악무용대학이다. 부단한 숙련을 요구하는 직업 특성을 고려한 일종의 특혜다. 때문에 북한의 고위층 자녀들이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많이 입학하는 관계로 정보 유통이 빠르다.
 
  더욱이 김정일이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북한 연예계는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된다. 처음엔 라혜경이 김정일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뒤이어 김정일 근친 가계의 며느리가 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들이 김정일 파티에 초대됐다. 파티에 참가한 모두가 놀랐다. 김정일 옆에 자신들의 제자인 라혜경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라혜경은 직접 교수들을 찾아와 “제가 보고 싶다고 졸라 장군님께서 소원을 풀어 주셨다”고 귓속말로 알려주기도 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제48기 졸업생인 라혜경은 1976년생으로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부속유치원인 평양경상유치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대학에 입학해 특설학부 코스를 밟았다.
 
  그녀가 정상적으로 졸업했다면 1997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1년 전 대학에서 사라졌다. 라혜경의 아버지는 현재까지 중앙당 조직지도부 간부(인사)담당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라혜경은 자신의 아버지와 20년 차이가 나는 무용배우 출신 후처와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김정일의 여인 중 가장 출신성분이 좋은 셈이다. 김정일이 2006년 5월 9일 평양음악무용대학을 현지 시찰한 것도 라혜경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40세부터는 不惑(불혹)의 나이라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王(왕)의 아들이었던 김정일의 경우, 너무도 쉬웠던 성취감들에서 오히려 공허를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지금도 무엇인가 끝없이 갈망할 것이다. 그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내적 갈망을 각기 다른 음감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자들은 대부분 연예인이었다.
 
  김정일의 여자 중 연예인이 아닌 대표적 인물이 김정일의 소꿉친구이자 대학동창이며 첫 이성이었던 문석금이다. 그녀는 사망 전 중앙당 금속공업부 부부장으로서 북한 여성 중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 다음으로 출세한 인물이다. 남편은 송익범으로 북한 태권도연맹 위원장을 지냈다.
 
  김정일의 첫 동거녀였던 홍일천도 음악과 상관없는 교육자였다. 그는 김형직사범대학 총장으로 근무하다 현재 자궁암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이 유일하게 결혼했던 여자, 그에게 이혼경력을 남겨준 音癡(음치) 김영숙은 시골 출신 미녀였다.
 
 
  영화배우, 가수, 피아니스트…
 
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홍영희. 18세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과거 왕조 역사를 보면 권세가의 집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왕들이 훗날 妻家(처가)의 커진 권력에 밀려난 사례가 많다”며 신분이나 외형보다 평범을 중시한 결혼을 강요했다. 김일성의 ‘명령중매’로 김영숙과 결혼했지만, 김정일은 영화배우 성혜림과의 동거로 자기 운명을 주장했다.
 
  성혜림에 이어 고영희도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였고, 그 뒤의 동거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순 섹스파트너도 연예인들을 선택했다.
 
  북한은 당 사업을 선전부에서 시작한 김정일의 업적을 ‘문화혁명’이라고 치켜세운다. 김정일의 위대한 문화예술지도로 꼽히는 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홍영희는 18세에 김정일의 여자로서 당시 연예계의 꿈이고 명예였던 공훈배우 칭호를 받아 문화계를 경악시켰다.
 
  당시 대형 뮤지컬 여주인공들도 김정일의 침상을 거쳐 그 대가로 지금은 해외대표부 부인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1970년대 북한 TV를 독점했던 메조소프라노 가수 황금주를 비롯해 영화 <처녀이발사> 주인공 이복희, <이름 없는 영웅들> 여주인공 김정화도 마찬가지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여주인공 김정화.

  그들은 현재 김정일이 하사한 외제승용차를 몰고 있는 북한 연예계의 주인공들이다. 비밀이 클수록 위험도 큰 법이다. 김정일의 여자 중 가장 불행하게 운명한 여자는 북한의 미녀 영화배우였던 우인희다.
 
  재일교포 주정기와 치명적인 불륜사건으로 안전부에 구류되었던 우인희는 조사과정에서 김정일과의 관계를 들먹이며 조사관들을 협박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공개처형을 지시했고, 결국 우인희는 비밀발설의 교훈으로 문화예술부 공개사상투쟁회의에서 처형됐다.
 
  2000년 이후 김정일이 가장 아꼈던 여자는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 윤혜영이었다. 윤혜영은 2000년 금성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천보전자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그가 부른 북한 유명 노래 ‘준마처녀’는 남한의 인터넷에서도 쉽게 검색된다.
 
 
  ‘준마처녀’ 부른 윤혜영 가장 총애
 
김정일을 만나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 부부. 가운데가 기쁨조 출신으로 후지모토의 부인인 엄정녀. 무슨 이유인지 후지모토의 손 부분이 먹으로 지워졌다.

  김정일은 집단체조 ‘아리랑’에 ‘준마처녀’를 삽입하도록 직접 지시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생일날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김옥도 윤혜영처럼 그런 공개 행사에서 옆 자리에 앉힌 적이 없었다.
 
  당시 궁중내막을 알 수 없는 집단체조 참가자들은 김정일의 옆에 있던 여자를 북한의 유명 유도선수인 계순희, 혹은 세계마라톤선수권대회 우승자인 정성옥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석단 가까이 객석에서 본 사람들은 유난히 긴 머리채와 미모에 장군님 딸이라고 생각했다.
 
  측근들은 윤혜영을 공주 모시듯 했다. 김정일은 윤혜영의 무대의상과 액세서리 구입을 위해 파리와 유럽으로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했고, 목란관도 이 시기에 다시 리모델링했다.
 
  그러나 윤혜영은 보천보전자악단 피아니스트였던 한 남성과 남몰래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김정일 관계자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 차원에서 하고 있는 도청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윤혜영은 사랑이 발각되자 목란관 지붕 위에서 애인과 함께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 목란관은 남북 1차 정상회담 때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을 위한 환영파티가 열렸던 곳이다.
 
  남자는 현장에서 죽고 윤혜영은 고위간부 전용 남산진료소로 후송됐다. 배신감에 떨던 김정일은 “무조건 살려낸 다음 죽이라”고 지시했지만 2003년 말 그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링거를 꽂은 채 처형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청과 다름없는 대내검열을 마친 보천보전자악단은 목란관으로부터 만수대예술극장 3층 소형극장으로 이전당했고, 김정일은 이후 보천보전자악단이 아니라 인민군공훈합창단 공연을 줄곧 관람했다.
 
  2003년 11월경, 조선인민무력부 문화예술부 소속으로 4·25문화회관에 위치해 있던 조선인민군공훈합창단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5과 소속으로 격상돼 만수대예술극장 대형극장을 갖게 됐다.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 
평양시내 대동강변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이 공연되고 있다. 김정일은 윤혜영을 위해 집단체조 ‘아리랑’에 ‘준마처녀’를 삽입하도록 지시했다.

  또 김정일의 예술단이라는 명예에 맞게 舊(구)소련 대사관 앞 중앙당 부부장 아파트에 조선인민군공훈합창단 주요 지휘관들과 창작가들을 입주시켰고, 2003년 말 당시 김정일 최측근들이 거주하는 대동강구역 은덕촌 앞에 배우들을 위한 새 아파트들을 건설했다.
 
  북한 정권은 윤혜영 자살사건을 은폐할 목적으로 관계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최근 탈북자들 속에서도 윤혜영에 대해 증언을 할 만큼 이미 ‘준마처녀’의 처형은 북한 문화계에 제2의 우인희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절대 권력으로도 가질 수 없었던 여자. 아니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했던 여자. 만물을 자기의 소유물로 착각했던 독재자에게 권력보다 더 강한 사랑을 목숨으로 깨우쳐 준 그는 진정한 북한의 미녀였다.
 
  하여 김정일로 하여금 사랑 앞에 허물어지는 자기 권력의 마지막도 암시하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윤혜영을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고 본다.⊙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