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슈트름게슈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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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1-04 17:42:51

 

 













 

 









 









 

 

 

 

 



한국 6.25 전쟁 당시 서울 1952년 겨울

 

 

 

그레이하운드버스, 어린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고속버스 

 

youtu.be/xsLtxP0M9VI

입력 2020.12.04. 09:27 댓글 72

 

-그레이하운드를 위한 버스

미국의 시외버스 회사인 그레이하운드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도 코리아그레이하운드라는 명칭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5층으로 구성된 기다란 3축 차체의 버스는 아직도 그레이하운드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버스는 GM이 오직 그레이하운드를 위해 만든 PD-4501 시니크루저(Scenicruiser)다.

자동차 히스토리 갤러리 이동


차명의 PD는 '객실용 디젤(Parlor Diesel)'을 뜻한다. GMC가 버스 라인업에 썼던 명칭이다. PD-4501의 디자인은 레이먼드 로위가 방향을 잡았다. 로위는 물방울 모양의 연필깎이와 코카콜라 병, 미국 펜실베이니아 유선형 기차 등을 디자인한 거물급 산업디자이너다. 그는 버스에도 유선형 기차의 디자인을 접목시키고자 했다. 둥그스름한 전면부와 차체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주름 등이 그 흔적이다. 그가 만든 프로토타입 GX-1은 완전한 더블 데커(2층)의 3축 구조를 지녔다. 두 번째 시제차인 GX-2는 롤랜드 게고가 디자인했다. GX-2는 앞뒤 데크의 높이가 다른 디자인을 채택했다. 이 디자인은 1920년 깜작 등장했던 비슷한 스타일의 버스를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결국 PD-4501는 GX-2의 형태를 따르게 됐고 1954년 출시됐다.

PD-4501는 독특한 외관뿐만 아니라 차체 크기 면에서도 차별화했다. 길이는 40피트(12.19m)에 맞췄다. 하지만 미국 대부분의 주가 35피트(10.66m)를 제한으로 설정해 일일이 규제 완화를 설득해야만 했다.


실내는 43석 규모다. 앞쪽엔 10명이 탑승하고 뒤편 1.5층엔 33명이 탈 수 있는 구성이다. 독특한 점은 1.5층 맨 앞에 또 다른 윈드쉴드를 설치한 것이다. 덕분에 1.5층 앞좌석에 앉은 탑승자들은 전방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1.5층 앞좌석은 항상 인기가 많았다. 지붕에는 4개의 선루프도 마련했다.

PD-4501의 특징 중 하나는 차체 맨 뒤편에 설치한 내부 화장실이다. 장거리 운송용으로 등장한 만큼 오랜 시간을 달리면서 탑승자들의 생리현상에 대응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볼 일을 보던 중에 나는 소리는 엔진음에 묻혔지만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1.5층의 하부는 적재공간으로 활용했다. 공간이 꽤 넉넉해 승객들의 짐을 다 소화할 수 있었다.

PD-4501의 엔진은 GM의 4기통 4.7ℓ 디젤 엔진 두 개를 유체 커플링으로 연결한 방식이다. 이후 1961년 디트로이트디젤이 8기통 엔진을 선보이면서 V8 9.3ℓ 디젤로 변경했다. 변속기는 3단 수동이던 것을 4단 수동으로 갈아 끼웠다. 최고출력은 320마력을 발휘했다. 연료효율은 낮았다. 차체와 엔진 배기량이 큰데다 6×4 구동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와 변속할 때의 충격이 제법 커 불편함을 겪는 탑승자도 있었다. 그러나 에어 서스펜션, 에어컨 등을 갖춰 기존 버스와 차별화했다.

PD-4501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구성이 약한 독특한 차체 구조 탓이다. 1962년 마지막 PD-4501가 GMC 공장을 빠져나왔다. 1,001번째 PD-4501였다. 이후 PD-4501는 1970년대부터 그레이하운드 노선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PD-4107이 물려받았다.

그러나 PD-4501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때마침 한국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고속버스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그레이하운드는 한국에 코리아그레이하운드를 설립하고 PD-4501 40대를 들여왔다. PD-4501는 국내에서 '개그린버스'로 통했다. 개그린버스는 그레이하운드의 심볼인 개를 그린 버스라는 뜻이다. PD-4501는 서울-부산, 서울-대전, 서울-전주 등의 노선을 오갔다.


1978년에는 코리아그레이하운드가 중앙고속에 인수되면서 PD-4501도 유니폼을 갈아입게 됐다. 중앙고속은 그레이하운드의 도장을 유지한 채 그레이하운드 대신 사자를 그려 넣었다. 이 도장은 아직도 중앙고속이 활용하고 있다. PD-4501는 그렇게 중앙고속에 소중한 유산을 남긴 채 1980년대에 모두 국산 버스로 대차됐다.

구기성 기자 kksstudio@autotimes.co.kr

 

 

 

 

 

 

 

 

 

 

 

 

 

 

 

 

 

 

 

 

 

 

 

 

 

추억의 연탄

 

 

 

 

형택이가 죽었다. 아침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했었다.

누가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항상 가장 먼저 등교하는 형택이가

조회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형택이가 지각을 한다는 건 아침에 해가 뜨지 않았거나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잊어버린 것만큼이나 낯선 일이었다.

형택이는 아이의 짝이었다.

동네는 서로 반대방향이었지만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형택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조회시간 종이 울려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장이 교무실에 가봤지만 "가서 기다려라."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왔다.

한참 뒤에야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납으로 만든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듯 침통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택이는 이제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

아이는 선생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택이는 죽었다.

1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에는 소문이 화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택이네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원흉은 역시 연탄가스였다.

작년 종구네 식구들이 죽은 뒤로 두 번째 참변이었다.

아이는 학교 뒤 으슥한 빈 공간, 형택이와 둘이서 자주 놀던 곳을 찾아가 펑펑 울었다.

2교시 종소리가 아이의 가슴에서 땡땡 울렸다.

 

 

 

아이는 슬프고도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형택이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꼬박꼬박 동치미국물을 머리맡에 떠다놓았다.

"자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어지러우면 문부터 열고 이걸 마셔라"

동치미국물을 떠다놓을 때마다 손자들에게 당부하고는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일가족을 하룻밤 사이에 죽일 만큼 무서운 연탄가스가 그깟 동치미국물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지 않았다.

 

 

나무를 때던 시절,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올라오고는 하던 방이었다.

그러니 연탄을 때는 지금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연탄가스는 얼마나 많이 새어들어 올까.

그리 생각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날 때면 머리가 무거웠다.

나무 때던 시절이 그리웠다.

지게 지고 나무를 하러갈 때마다 그렇게 지겨웠는데….

 

 

1960년대를 정점으로 연탄의 급격한 보급확대는 일종의 생활혁명이었다.

베어내고 긁어내어 늙은 짐승의 등처럼 헐벗은 산들은

갈수록 땔감을 공급하는데 인색해졌다.

나라에서는 홍수방지 같은 명분을 내세워 나무 채취를 엄격하게 금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연탄이었다.

연탄은 하루 종일 방을 따뜻하게 해줬고 언제나 밥과 국을 끓일 수 있는 매력적인 연료였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에서도 앞다퉈 연탄화덕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연탄은 화력도 좋고 값도 비교적 싼 편이었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연탄 값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나누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부잣집들은 온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창고에 쌓아놓고 땔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 장씩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저녁 무렵 새끼줄에 연탄 한 두 장을 꿰어들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가장의 등 굽은 뒷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서민들의 꿈은,

독에 쌀을 가득 채우고 광에 연탄을 높다랗게 쌓아보는 것이었다.

연탄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줬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제대로만 갈아주면 몇 년이라도 꺼질 리 없는 게 연탄이었지만,

새벽에 깜박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꺼져버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에서는 갈아줄 연탄이 없어서 가장이 사들고 올 때까지

눈물을 머금고 꺼트리기도 했다.

한번 달궈지면 밤새 따뜻하던 구들장과 달리 얇디얇은 시멘트 방바닥은 금세 식어버렸다.

 

새벽녘 연탄불이 꺼진 뒤, 아이들은 바들바들 떨고 가게문은 안 열리고,

주부들의 가슴은 연탄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번개탄(착화탄)을 사다가 불을 붙였다.

번개탄이 나오기 전에는 숯불을 피워 살리거나 옆집으로 밑불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추울 때는 무턱대고 불문(공기구멍)을 열어놓았다가 비닐장판을 새까맣게 태우고,

연탄은 후르르 타버려 불이 꺼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연탄을 갈 때 가장 곤혹스러운 건 불붙은 연탄이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였다.

타버린 맨 아래 연탄을 떼어내야 위의 연탄을 아래에 넣고 새 연탄을 올리게 되는데

이게 서로 붙어버리면 난감했다.

성급하게 두드리다가 위 연탄까지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녹슨 식칼로 떼어내기도 하고 삽 같은 도구를 동원하기도 했다.

 

연탄구멍을 맞추는 일도 나름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래와 위 연탄의 구멍을 잘 맞춰야 쉽게 불이 옮겨 붙는 것은 물론

연탄이 골고루 타고 가스도 적게 발생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라서

초보자들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낑낑거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가스를 들이마시게 되어 울렁울렁 어지럼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당기던 연탄화덕이 보일러로 진화한 뒤에는 많이 편해졌지만

물통을 연결하는 고무호스가 녹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건 말건 아이들은 즐거웠다.

연탄불에 별별 걸 다해먹었다.

라면을 끓이고 가래떡이나 쥐포를 구워먹는 건 기본이었다. 국

자에 '달고나'를 해먹을 때도 연탄불이 요긴하게 쓰였다.

까맣게 탄 국자를 뒤늦게 감춰보지만

저녁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들켜 경을 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국내에서 연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1960년대는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63년 말 국내의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영원히 서민들의 곁을 지킬 것 같았던 연탄도 세월의 창날을 비껴 가지는 못했다.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고 도시가스 같은 청정연료를 쓰게되면서 석탄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석탄산업은 본격적인 정리단계에 접어들었다.

탄광은 대부분 폐쇄되고 한 때 시커먼 모습으로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연탄공장들도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문을 닫았다.

 

 

달동네에 공급되거나 비닐온실 난방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연탄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탄소비가 다시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다시 바꾸는 집도 늘고 있다.

연탄 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때마침 불어온 복고바람 덕인지 거리에서 연탄구이집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연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몰라도 연탄으로 상징되던 고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찬바람이 기웃거리는 어느 골목길에는 내 가난한 어머니와 내 아픈 형제들이

터져나오는 기침을 깨물며 하얗게 바랜 서러움을 연탄재처럼 쌓아가고 있을지도….

 

 

 

게시글 본문내용     四時春 추천 0 조회 5 0.11.15 14:08 댓글 0

한국 현대시 100년 10대 시인 [글·사진정리 한국의산천]
올해는 육당 최남선이 신시 '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년)를 발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시인협회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과 교수 10명이 뽑은 '10대 시인과 대표작'을 2007년 12월 14일 발표했다.

 

10대 시인(괄호 안의 대표작)은 김소월(진달래꽃), 한용운(님의 침묵), 서정주(동천), 정지용(유리창), 백석(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수영(풀), 김춘수(꽃을 위한 서시), 이상(오감도), 윤동주(또 다른 고향), 박목월(나그네)이다. 이 중 김소월과 한용운, 서정주는 만장일치로 뽑혔다.

선정 작업은 평론가들이 각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시인 10명과 시인별 대표작을 추천하고, 이들 후보군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대로 10대 시인과 대표작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생존 작가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국 현대시 100년 10대 시인 대표작


진달래꽃 - 김소월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

 

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동천(冬天) - 서정주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유리창(琉璃窓) - 정지용(鄭芝溶)

 

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백석(白石)

 

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른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풀 - 김수영(金洙暎)

 

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金春洙)


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오감도(烏瞰圖)-시 제 1호 - 이상(李箱)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나그네 - 박목월


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1908년 11월 열여덟 살 청년 최남선이 잡지 ‘소년’의 권두에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정형시의 틀을 무너뜨린, 한국 현대시의 들목이 된 작품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년의 해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아내 온 현대시 100년사를 정리한다.》

 

1910, 20년대-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서정시 트로이카’

1930, 40년대- 이상 실험정신, 백석 서정주 詩지평 확대

1950, 60년대- 김수영 참여시, 김춘수 무의미시 눈길

1970년대 이후- 저항시대 거쳐 대중문화적 상상력 만발

 

○ 현대시의 불을 지핀 1910, 20년대
식민지에 살고 있다는 자의식과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함께했던 시대에, 재능 있는 시인들이 현대시사의 초석이 되었다.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김억, ‘불놀이’의 주요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 특히 도드라진 시인은 김소월과 한용운, 정지용이다. 1925년 나온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그를 ‘국민시인’으로 만든 시집이다. ‘진달래꽃’뿐 아니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전통적인 가락 속에 서정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명작들이 오랜 시간 애송시가 되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그 작품이 쓰인 시대(1926년 발표)가 얼마나 가팔랐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절절한 연시 아래에 역사성과 종교성을 스며 넣은 작품들은 시인의 굳은 심지와 예술성을 한눈에 보여 준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벼리는 시인의 임무를 탁월하게 맡아 낸 시인이 이 시기 중점적으로 활약한 정지용이다.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빛나는 ‘향수’ ‘유리창1’ 등도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시다.

 

○ 아름답고 침울한 1930, 4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프로문학이 쇠잔해지는 것으로 1930년대가 시작됐다. 문화적·문학적으로 다양한 실험이 전개된, 한 사람의 시작(詩作)이 하나의 경향이 됐던 시기였다. 많은 스타 시인이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바람을 일으킨 이상과 김기림. 해독이 어려운, 그럼에도 폭발적인 마니아를 만들어 낸 ‘오감도’의 시인 이상은 그림과 건축 분야도 수월하게 넘나들었던 천재였다. ‘바다와 나비’ 같은 시뿐 아니라 앞선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의 경향을 창작과 이론으로 함께 알린 시인이자 평론가 김기림도 돋보였다.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뒤늦게 빛을 본 백석의 존재는 귀하다. 평북 방언을 시적으로 부리면서 내면의 감정을 세련되게 묘사한 시편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으로 시사가 풍요로워졌다. 노천명 모윤숙이 등장해 광복 이후 김남조로 이어지는 여성 시인의 계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41년 서정주가 낸 시집 ‘화사집’은 충격이었다. 원죄의식과, 그럼에도 싱싱한 생명력을 관능적인 모국어로 묘파한 ‘화사집’에 이어 서정주는 ‘귀촉도’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등 60여 년 생애에 펴낸 시집 한 권 한 권마다 다양한 시세계를 선보였다.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로 분류되는 유치환도 ‘깃발’ ‘생명의 서’ 등을 통해 허무의식 속에서도 도도한 시심을 노래했다.

끝이 가까워 오는 일제 강점기의 압제를 시인들은 순결한 시 쓰기로 견뎌 냈다. 자연에 대한 청아한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시의 본령을 지키고자 한 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진실한 인간과 시인의 길을 탐색했던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랬다.

 

○ 혼돈의 시대, 6·25전쟁과 1960년대
좌우 이념으로 대립된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 뒤이어 민주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시는 그 혼돈의 역사에서 솟아났다. 이 시기가 온전히 시력(詩歷)이 된 시인이 김수영이다. 해방공간에서 모더니즘 정신으로 충만한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냈으며, 4·19 이후 ‘풀’ ‘푸른 하늘을’ 등의 작품에서 날카로운 현실 참여의식을 보인다. 김수영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김춘수가 꼽힌다. ‘꽃’ ‘꽃을 위한 서시’ 등 이른바 ‘무의미 시’를 통해 인간 내면의 순수한 표정을 발견한 공이 크다. 1960년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 낸 시인 중 한 사람인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금강’ 등에서 그 치열한 사회참여 정신이 형형하게 드러난다.

순수와 무욕을 시뿐 아니라 삶 전체로 증거한 천상병의 ‘귀천’, 절제된 언어로 모더니즘 정신을 구현한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한의 미학’이 미학적인 시어로 표현된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 혼란의 시대에 우리 시의 성과는 컸다.

 

○ 쉼 없는 열정, 1970년대 이후
1970, 80년대 시는 억압적인 군부 정권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1970년 발표한 담시 ‘오적’으로 김지하가 구속됐다. 신경림의 ‘농무’, 고은의 ‘백두산’도 가파른 시대에 맞서 쓴 작품이었다. 서정성을 다양한 형식으로 감각적으로 표출해 낸 황동규 정현종, 여성 시인의 맥을 이으면서 ‘허무’를 시적 주제로 승화시킨 강은교 등의 시작(詩作)이 의미 있는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1980년대 황지우의 실험적인 ‘해체시’, 이성복의 낯설고 독특한 이미지의 시편들이 주목받았다. 다른 한편에 창작자의 노동 체험을 새로운 소재와 주제로 자리 매김시킨 박노해의 시편들이 있었다. 죽음의 관념이 짙게 드리워진 기형도의 시는 시인의 짧은 생애와 달리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이전까지 시에서 온전하게 발화하지 못했던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고정희 김혜순 최승자의 작품은 이후 여성시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장석남은 눈으로 보이는 장면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신(新)서정’의 세계를 보여 준다. 대중문화적 상상력과 어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유하와 장정일의 시가 다른 한편에 서 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 시인들의 세대는 어느 때보다 폭넓다. 그만큼 다양한 시편으로 우리 시단은 풍요롭다. [동아닷컴 김지영 기자]

 

◆ 현대시가 등장한 지 100년. 그 현대시 100년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주역은 단연 시인들이었다. 시가 고도의 언어 예술인 만큼 시인에게는 천재적인 예술적 영감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시 작품은 시인들의 어떤 삶의 배경에서 빚어졌을까. 시혼(詩魂)을 불태우기 위해 시인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때로는 시와 생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시 하나만을 위해 의연하게 살아 온 시인들. 한국 현대 시인의 삶 100년사를 들여다본다.

 

시인은 곧 지식인

일제강점기에 많은 인텔리가 문인의 길을 택했다. 식민 통치하에서 사회적 학문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란 요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은 곧 문인을 가리켰다.


실제로 많은 시인이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불놀이’의 주요한은 열여덟 살에 일본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제일고에 입학했으며, 이때 도쿄대에 다니던 소설가 김동인을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창조’를 만들었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기림도 보성고보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를 졸업했다.


윤동주도 일본 유학생이었다. 문학의 길을 반대하는 부친에게 맞서 단식과 가출을 감행할 만큼 열렬히 문인이 되고자 했고, 일본 도시샤대를 다니면서 꿈을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사상범으로 체포돼 스물여덟의 나이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난다. 생전엔 무명의 문학청년이었지만 광복 뒤 문우들이 펴낸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 됐다.


○ 시인들의 직장은 언어를 다루는 곳
시작(詩作)만으론 먹고살 수 없으며 생계를 유지하려면 직업이 필요한 법. 일제강점기 시인들이 택한 직장은 대개 교사나 기자였다. 이런 직장은 언어나 문자를 다룬다는 점에서 시 창작과 멀지 않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광복 때까지 휘문고보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깃발’의 유치환은 일제 말 압제를 피해 만주에서 가족과 지내다 광복 뒤 귀국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통영과 대구, 경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창작활동에 임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은 함경북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그의 수업을 받은 학생들은 “뛰어난 기억력과 훌륭한 영어발음을 갖춘 ‘모던보이’”로 스승을 기억했다. 교사가 되기 전 그의 직업은 기자였다. ‘광야’의 시인 이육사도, ‘오랑캐꽃’의 이용악도 기자로 활동했다.


○ 궁핍한 시대, 열정과 낭만의 시인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의 생애는 도드라진다. 뛰어난 건축가였던 그는 총독부 건축부서에 들어갔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에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마다하고 직장을 나온다. 이후 다방 ‘제비’를 개업해 이태준 김유정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창작에 매진하는 한편 여성들과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펼친다.


양계와 번역으로 생계를 이은 김수영의 삶은 그의 시가 쓰인 1950, 60년대의 핍진함과 일치한다. 동아방송에서 효과음악을 담당하면서 좋아하는 고전음악에 흠뻑 빠져 지낸 김종삼 시인은 그러나 말년에 알코올의존증으로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 다양해지는 시인들의 직업
일본 유학생 중심이었던 광복 전 문단과 달리, 대학이 자리 잡은 뒤 주로 국문과와 문예창작과에서 많은 시인이 배출됐다.


시만으로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시인들이 택한 직업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교사나 기자로 일하는 이가 적지 않다.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 씨가 현재 교사이거나 교사 출신 시인으로 잘 알려졌다. 가르치는 아이들을 통해서 시심을 얻는다는 김용택 씨의 얘기처럼, 이들 시인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탄탄하다. 강은교 김명인 김혜순 씨 등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작을 함께 하는 사례도 많다. 기형도는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고, 고은 시인도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다. 예나 지금이나 활자를 다루는 직업이 잘 맞는 편이어서 이병률 김민정 씨 등의 시인이 출판사 편집자로, 김경미 시인 등이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시 쓰는 일과 무관할 것 같은 직장을 다닌 시인들도 있다. 김기택 씨는 두산 식품BG 구매팀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문태준 씨는 불교방송 PD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직업이 그저 밥벌이로 머문 것만은 아니다. 김 씨의 회사에서의 체험은 ‘사무원’이라는 명시로 거듭났고 문 씨가 PD로 일하면서 만난 불교도들은 그의 시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와 닿아 있다. [DongA.com김지영 기자]

◆ “현대시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나’”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가다', '이', '하다', '없다' 등의 단어도 시어로 많이 쓰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1923년에서 1950년 사이에 창작된 한국 현대시 작품을 대상으로 시어를 분석한 '한국 현대시어 빈도사전'(한국문화사 펴냄)을 2일 출간했다.


김병선 한중연 교수의 책임 연구로 나온 이 책은 한중연이 지난 10년간 수행해온 '한국 현대시 텍스트 말뭉치 구축사업'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이 시기에 창작된 8천200여 편의 현대시 작품으로부터 약 61만2천65개의 어휘를추출해 기본형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대명사 '나'가 총 1만1천343회 쓰여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냈다.


이는 현대시가 대부분 화자의 정서를 읊은 서정시의 범주에 들기 때문이라고 연구원은 분석했다.
이와 함께 '가다'(5천91회), 관사 '이'(4천652회), '하다'(4천444회), '없다'(4천405회), 의존명사 '것'(4천167회), 관사 '그'(4천95회), 대명사 '너'(3천915회)순으로 뒤를 이었다.
명사 가운데는 '밤'(3천90회), '속'(2천618회), '소리'(2천615회), '때'(2천582회), '마음'(2천485회) 등이 자주 등장했다.
명사 '사랑'과 동사 '사랑하다'는 각각 1천205회, 661회 사용돼 59위와 123위에올랐다.


이 사전에서는 또 수록된 시어들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일일이 대조, 분석해 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많은 숨겨진 우리 말들도 발굴해 실었다.
한중연은 "최초의 현대시어 빈도 사전인 이 사전은 현대시에서 시어의 쓰임새에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와 문인은 물론 우리말 표현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에게도유용한 사전"이라고 말했다. 1천51쪽. 6만원. (서울=연합뉴스)

 

조선닷컴에서 현대시 100년을 맞아 100명의 시인이 소개한 애송詩 100편이 연재될 예정이지만 2008년 1월 1일 부터 오늘까지 10편이 발표되었습니다.약 보름 걸렸습니다.그렇다면 한달에 약 20편이 소개되고 5개월이 지나야 100편의 시를 다 볼수있겠군요. 천천히 세월을 기다립니다. [한국의산천 ]

 

작성자: lob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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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9-04 16:55:25


 

 

 

 


 

옛날 담배.jpg

 

P-80 전투기

미국의 제트전투기 역사를 열다

 

P-80은 미국 최초로 실전 배치된 제트전투기다. 한국전쟁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우리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 출처 : Public Domain >


개발의 역사

Me 262와 관련한 자료를 보면 이를 처음 상대한 연합군 조종사들이 받은 충격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많다. 때문에 나치의 비밀 무기라는 가십거리로 많이 거론되지만 사실 제트전투기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놀라게 한 총포처럼 갑자기 등장한 낯선 무기는 아니었다. 이미 1910년대부터 제트기 연구가 시작되었을 정도였기에 제트전투기의 등장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독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한창 개발 중이었다.

최초 P-80이었으나 공군 독립 후인 1948년 F-80으로 제식명을 변경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영국도 글로스터 미티어(Gloster Meteor)를 배치하고 있었다. 다만 개선할 부분이 많았기에 실전 등판을 보류했을 뿐이었다. 반면 궁지에 몰린 독일은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일단 전투에 투입했다. 만일 전성기였다면 이처럼 서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39년에 He 178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으나 이후 계속 승승장구하자 독일은 제트전투기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때문에 Me 262가 보유한 최초로 실전에 사용된 제트전투기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전쟁 말기 독일의 어려움을 알려준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제트전투기의 개발은 쉽지 않았다. 결국 본격적인 제트전투기의 시대는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열릴 수 있었다. 미국이 최초로 실전 배치한 제트전투기인 P-80 슈팅스타(Shooting Star)도 그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불과 143일 만에 P-80을 개발한 켈리 존슨. 그는 P-38, F-94, F-102, F-117, U-2, C-130 등의 유명 군용기의 개발을 주도한 항공 분야의 천재 엔지니어다. < 출처 : Public Domain >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주요 교전국들이 한창 제트전투기를 개발 중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조급해졌다. 업체들이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는 했으나 군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진전된 것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당장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제트엔진부터 문제였다. 결국 해당 분야의 선도국인 영국의 도움을 받아 GE에서 J31 제트엔진을 면허생산하면서 기술을 축적해 나갔다.

덕분에 1942년 10월에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벨(Bell)사의 P-59가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속도를 비롯한 모든 비행 성능이 프로펠러 방식의 기존 전투기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66대를 끝으로 제작이 중지되었고 실험 및 훈련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이에 1943년 록히드(Lockheed)는 켈리 존슨(Clarence "Kelly"Johnson)이 이끄는 팀이 설계한 L-140 개발안을 군에 제출했다.

초기 양산형인 F-80A. 인테이크를 측면에 장착한 덕분에 확장이 용이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L-140은 기존 프로펠러 전투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구조의 동체에 제트엔진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제트전투기에 개발에 나선 여타 국가들도 택한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그동안 제트엔진이 고민이었으나 앞서 언급처럼 영국의 도움 덕분에 하나의 벽을 넘은 상황이었다. 미 육군항공대가 제안을 받아들여 제식 부호 XP-80을 부여하자 록히드는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제트기는 반드시 인테이크와 노즐을 설치해야 하므로 나셀(Nacelle)의 구조가 고민이었다. Me 262나 글로스터 미티어처럼 주익에 엔진을 장착하는 방식과 He 178나 글로스터 E.28/39처럼 동체에 삽입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존슨은 정비의 용이성, 구조의 단순화를 고려해 후자를 택했다. 다만 제1세대 전투기의 대부분이 기수에 인테이크를 설치한 파이프 형태였지만 XP-80은 기체와 주익을 연결하는 결합부에 인테이크를 설치했다.

XP-80 프로토타입에 장착된 영국 드 하빌랜드의 고블린 엔진. 정식 명칭은 할포드(Halford) H-1이다. < 출처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

이런 구조를 택한 이유는 기수에 랜딩기어와 무장을 장착하다 보니 인테이크를 설치할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전투기들이 이런 구조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하면 상당히 시대를 앞선 결정이었다. 개발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져 불과 143일 만에 영국의 드 하빌랜드에서 공급받은 고블린 엔진을 장착한 XP-80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고 육상 테스트를 거쳐 1944년 1월 8일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 최초로 고도 2만 피트에서 시속 500마일을 돌파했고 각종 실험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1944년 4월 P-80 슈팅스타라는 이름으로 양산이 결정되면서 미국 최초로 실전 배치된 제트전투기에 등극했다. 하지만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사고가 벌어지면서 시험 조종사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순직했는데, 그중에는 40기의 적기를 격추시켜 현재까지도 미군 최고의 기록을 보유한 리처드 봉(Richard Bong)도 있었다.

P-80은 미국 최초로 실전 배치된 제트전투기가 되었다. < 출처 : Public Domain >


특징

불과 6개월의 개발 및 배치 과정만으로 알 수 있듯이 P-80은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라는 의의를 제외한다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개발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성능이 검증된 구조의 기체에 제트엔진을 장착한 형태다 보니 충분히 성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안정성, 신뢰성 등은 좋았지만 전후 노획한 Me 262와 비교했을 때 속도 등의 성능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왔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폭탄을 장착하고 출격 준비 중인 모습. MiG-15가 등장하면서 제공 임무를 F-86에 넘겨주고 공격기 역할을 담당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종종 실속이 벌어져 이착륙 시 사고가 발생하고는 했다. 노련한 조종사도 사고사를 당했을 만큼 초기형은 조종이 쉽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P-80을 기반으로 동체를 연장한 T-33 연습기나 전천후 전투기인 F-94 스타파이어(Starfire)에 와서야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비행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다만 에어 인테이크를 동체 측면에 설치한 덕분에 확장성이 좋았다.

버지니아 랭글리 기지에 배치된 F-80B < 출처 : Public Domain >

최초 개발 당시에는 영국에서 직도입한 엔진을 장착했으나 본격 양산형부터는 앨리슨 J33 엔진을 탑재했고 주익 끝단에 보조 연료 탱크를 부착해서 항속 거리를 늘렸다. 그러나 P-80을 비롯한 직선익 구조의 제1세대 전투기들은 동력이 제트엔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전 프로펠러 전투기와 비교했을 때 커다란 변화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무래도 과도기적 성격이 컸던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운용 현황

최초 미군은 5,000대를 획득할 예정이었다. 1945년 3월에 영국, 이탈리아에 배치가 시작되었으나 5월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실전은 벌이지 못했다. 태평양 전선 투입도 고려했으나 점령지에서 일본 본토까지 비행할 수 없어 무산되었다. 종전 후 획득 예정 수량이 2,000대로 축소되었고 최종적으로 1,715대가 제작되었다.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능이 P-51을 능가했기에 곧바로 주력 전투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한국전쟁 당시 출격 준비 중인 F-80 < 출처 : Public Domain >

미 공군이 별도로 독립한 직후인 1948년에 제식 부호가 F-80으로 변경되었고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실전을 치렀다. 6월 26일, 주일 미 공군 소속의 F-80가 서울 상공에서 북한군의 IL-10을 격추시킨 것을 시작으로 신속히 제공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때부터 그해 10월까지가 F-80의 전성기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MiG-15에 열세임이 입증되고 F-86이 구원 등판한 후부터 공격 임무를 수행했다.

어레스팅 후크가 장착된 미 해군 VMF-311 소속 TO-1 < 출처 : Public Domain >

비록 최초로 제트 전투기 간 공중전을 벌여 항공전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더 이상 주인공으로 활약하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해외 운용국 모두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6개국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들은 1970년대까지 주력기로 운용했다. 해군형도 개발되었으나 50대 납품으로 그쳤고 주로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 이를 기반으로 개발된 T-33 훈련기를 700여 대나 도입했다.


변형 및 파생형

XP-80(Model L-140) : 드 하빌랜드 고블린 엔진 탑재 프로토타입

XP-80 < 출처 : (cc) Arjun Sarup at Wikimedia.org >

XP-80A(Model L-141) : GE I-40 엔진 탑재, 주익 등을 개량한 프로토타입

XP-80A < 출처 : Public Domain >

YP-80A : 저율 생산형

F-80A : 앨리슨 J33 엔진 탑재 초기 양산형

F-80A < 출처 : Public Domain >

EF-80 : 엎드려 조종(Prone Pilot) 실험기

EF-80 < 출처 : Public Domain >

XP-80R : P-80A 기반 고속실험기

QF-80A : F-80A 기반 무인표적기

RF-80A : F-80A 기반 정찰기

RF-80A < 출처 : Public Domain >

F-80B : 엔진 등을 강화한 양산형

F-80C : 주익을 강화한 전폭기형

F-80C < 출처 : Public Domain >

RF-80C : F-80C 기반 정찰기

TF-80C : F-80C 기반 연습기. 후에 T-33로 개칭

TF-80C < 출처 : Public Domain >

TO-1 : 해군용 고등훈련기. 1952년 TV-1으로 제식명칭이 변경되었다.

TO-1 < 출처 : Public Domain >

TO-2 : 해군용 2인승 고등훈련기. 1952년 TV-2로 제식명칭이 변경되었다.

TO-2 < 출처 : Public Domain >

F-94 : T-33 기반 전천후 전투기

F-94 < 출처 : Public Domain >

 


제원(P-80C)

전폭 : 11.81m
전장 : 10.49m
전고 : 3.43m
주익 면적 : 22.07㎡
최대 이륙 중량 : 7,646kg
엔진 : 앨리슨 J33-A-35 터보제트(4,600hp)
최고 속도 : 956km/h
실용 상승 한도 : 14,300m
전투 행동반경 : 2.220km
무장 : 12.7mm AN/M2 브라우닝 기관총 X 6
127mm HVAR 무유도로켓 X 8
1,000 파운드 폭탄 X 2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그 때 그물건들


할머니 어머님이 쓰시던 다리미와 인두...

02.부억 아궁이에 불 지필때 쓰던 풍로...
03.엿장수들이 메고 다니던 엿판.옛날 엿치기 많이 했죠...
04.되(곡식을 사고 팔때쓰던 되와 말)...
05.양은 도시락과 목 도시락...

06.다식판(떡.다식을 눌러 박아내는 틀)

07.다식판(떡.다식을 눌러 박아내는 틀)

08.나무로 만던 나막신...
09.장군과 지게(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지고 다녔죠...)
10.화장대위의 목침(대청마루에 목침을 베고 낮잠을 잤지요)...
11.물레(무명과 삼베의 실을 뽐는 기구)...
12.베틀과 장구(우리 옛 여인들의 한이서린 베틀이지요)...
13.먹과 벼루


14.남포동...
15.등잔(석유를 부어 쓰던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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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원의향기
글쓴이 : 명왕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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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그때를 아십니까 - 그옛날 장사꾼

짚신장사의 모습입니다. 

 

짚신 꾸러미를 든 양반의 모습입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방물-장사의 모습입니다. 

 

 역시 방물-장사의 모습입니다.

 

 소쿠리를 파는 장사의 모습입니다.

 

 장독과 뚜껑을 파는 장사의 모습입니다.

 

독을 파는 장사의 모습입니다

 

피륙을 파는 가계의 모습입니다.

 

 

물장사의 모습입니다. 

 

장작을 파는 장사군의 지게에 쌓인 장작의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들은 오래전 취미삼아 모아둔 귀한 사진들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우리의 조상님들의 삶을 조금은 아실수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소 화질이 떨어지고 적은 사진이라 보시기 불편하지만

우리의 옛모습을 보는 귀중한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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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화 목 한 사람들
글쓴이 : 금 바 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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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흥남철수 기적' 美 레인빅토리호, 67년만에 '한국 U턴'

입력 2017.07.14. 11:07


피란민 7000여명 목숨 구해 명성
LA 역사박물관 보존…정부 인수
거제도로 옮겨 평화기념공원 조성
文대통령 부모가 탔던 배는 폐선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해 피란민 7000여 명의 목숨을 구한

 ‘레인 빅토리호’가 67년여만에 국내로 돌아온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10만5000명의 군인과

9만1000여명의 피란민, 차량 1만7500여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

 거제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당시 두 척의 상선이 배에 가득 실은 무기와 장비를 내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그중 한 척이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탔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다.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살린 메러디스빅토리호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시킨 배로 인정돼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지만 1993년 안타깝게도 중국에 팔려 고철이 돼버렸다.


흥남철수작전때 피란민 9만 1000명을 실어나르는데 투입됐던 빅토리호 중 1대인 레인 빅토리호.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당시 7000여 명의 피란민을 구한 레인빅토리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피드로항구에 정박해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하기사 생략>

http://v.media.daum.net/v/20170714110716746?rcmd=rn 




퇴역전함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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