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전 한국인들의 생활상 귀한사진★


- Smokin', Gamblin', and Gossiping



- High Class Family



- The Short-Cut Home, or,
a Korean SPIDERMAN Does His Thing. SEOUL



- Kids On the City Wall, SEOUL



- A Crowed Scene on a Side Street, PYONGYANG



- A Rustic Road Near SEOUL



- The Bean Grinder, SEOUL



- A "Greasy Spoon" Restaurant in SEOUL



- The Chicken Seller, SEOUL



- Charcoal Carriers, SEOUL



- Junks Along the Han River at YUNG SAN,
a Logging Town Near SEOUL



- Two Kinds of Loads on the Streets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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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김 선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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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시절 가슴 찡 한 사진들

불행이란 악성바이러스를 이겨내는 항체’  

사진작가 최민식, 시인 조은이 엮어낸 감동적 사진에세이   

  

삶이 고단하고 힘드신가요?

‘인간의 불행이라는 악성바이러스를 꿋꿋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항체’가 여기 있습니다.

 50년간 인간을 주제로 삶의 진실을 파헤쳐왔던 사진작가 최민식(76)씨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불행'을 껴안는 그의 넉넉한 품이 그려집니다.

최근 시인 조은씨가 최씨와 함께 펴낸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샘터)는

 고단한 삶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최씨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담아왔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장사하다 끌려가는 아주머니와 고구마 몇 개 얹어놓고 행상을 벌이는 아이와 어머니,

 길가에 지친 몸을 기댄 부자(父子) 등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이 연이어집니다.

그 자신 또한 팔리지 않는 사진만 찍느라 줄곧 가난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네들 삶의 진실이 더욱 진하게 그의 사진에 묻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최씨의 카메라가 이처럼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치열하게 움직이며 찍어낸 사진에 시인 조은씨가

간결한 글로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최씨가 1950년대 후반부터 2004년까지

 담아온 여러 서민들의 모습과 느낌에 감동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찍고 써 내려간 과거의 불행으로 잠시 되돌아가봅니다.

과거를 보면서 힘겨운 현재를 잠시 위로 받아봅니다.

 인생을 담은 노사진작가와 한 중견시인의 질퍽한 감동의 사진에세이를 이제부터

간략하게 소개해봅니다. 

 

어머니...어머니...  

 

 

 

왜 어머니의 팔은 아이를 품어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어린 소녀는 힘겹게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일까요?  

 

(1969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서 있는 어머니 젖을 누나 등에 업힌 채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

 어머니는 손에 밴 비린내 때문에 아이를 안지 못 하고 있다.) 

  

 

 

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에게 이 순간, 손을 내밀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뒤에 있는 간판과 대비된다.) 

 

   

 

삶을 응시하는 자들이 키워가는 세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고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질서와 안정감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글픕니다. 

 (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일찍 어른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미래가 암초처럼 모습을 나타내곤 합니다. 

 (1957년 부산. 이 시절에는 두 소녀처럼 학교도 못 가고 가사를 돌보며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리의 부녀를 눈여겨보세요. 손으로 소음을 막아주고,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잡아주며 아버지는 딸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1963년 부산) 

  

 

 

본질에서 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빨래는 남루를 씻어버린듯 눈부시고 햇살은 명랑한 아이들처럼

골목을 뛰어다니지요. 

 (1963년 부산. 태극촌이라는 종교마을의 전경.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판자촌은 당시 북한과

타지방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불순함이라고는 없는 노동에 저토록 수모를 당해야 하다니 때로 세상의 정의가

불한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에 끌려가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 

 

   

 

육신의 한 부분을 미리 자연 속으로 돌려보낸 사람들의 삶도 도무지 가벼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삶의 속도에 의해서 진창을 벗어날 때도 있고 속도 때문에 진창에 처박힐 때도 있습니다. 

 (1978년 부산. 역전에서 비오는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튈까봐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 

 

   

  

이토록 다른 정서적 이질감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여유 있기 때문이지요.  

(2002년 부산. 역전의 공중전화에서 두 여인이 전화를 걸고 있지만

그 모습이 묘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장면)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  

 (1975년 부산. 범어사에서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어른들 세계로 팔을 쭉 뻗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빛을 향해 발돋움하겠지요.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자신의 삶을 스스로 더 가파른 곳에 올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라야 평지에 있는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것일까요?  

 (1968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짐을 기다리던 지게꾼이 사진작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잘 찍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외로움과 죽음의 관념을 이겨내고 비로소 환해지는 우리의 영혼처럼...  

 (2004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할머니 머리에 잠시 앉았다.) 



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北漢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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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울 수 없는 그때 그시절

지울 수 없는 그때 그시절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이 사진들은 이미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을 엮어 낸 바 있는 소설가 박도씨가 미 국립 문서
기록보관청(NARA)이 보관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 관련 파일들 중에서 발굴한 것이다.

사진은 1951년 1월 촬영한 인천의 모습.


1950년 9월17일 탱크를 가로막은 시신들의 모습.


1950년 10월21일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군 함정의 모습.


1950년 10월26일 원산으로 돌진하는 상륙정들의 모습.


1950년 9월16일 상륙작전 직후 불타고 있는 인천 시가지의 모습.


1952년 10월2일 촬영한 남대문 전차역의 모습.

1952년 10월 2일 인천의 모습.

< >
1951년 7월 30일 미 해군 전투기에서 내려다 본 파괴된 철교의 모습.


1950년 12월19일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의 모습


1951년 5월24일 터널을 폭파하려는 영국군의 인솔하에 터널 밖으로 대피중인 피란민들.


19
53년 8월5일 억류중 당한 부당한 처우를 혈서로써 항의하고 있는 귀환 국군 포로의 모습.


1951년 2월 추위에 떨고 있는 중국군 포로들의 모습


1951년 9월20일 수풀에서 기어나와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의 모습


1950년 8월22일 면도중인 미군 병사와 거울을 들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1952년 부산 국군병원에서 퇴원하는 상이군인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1951년 2월16일 미군들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어린이들에게 DDT 살충제를 살포하는 모습


포항의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는 미군 병사의 모습.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동생을 업은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촬영한 한 가족의 모습.


1950년 8월18일 벌거벗겨진 인민군 포로가 유엔군 작전에 협조하고 있는 모습.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시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의 모습





종전후인 1954년2월26일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는 인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

 >
김포 비행장을 시찰중인 맥아더 장군.


움막에 살고있는 다섯 어린이.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중인 유엔군 병사들이 강추위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1950.12.6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1952.1.7


임진강 부교를 정비하고 있는 국군병사.1951.8.3


원산으로 돌진하는 상륙정들.
원산 상륙작전 1950년 10월 26일, 유엔 연합군의 상륙정들이 원산으로 돌진하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에 이은 원산항의 확보로 연합군과 국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다



한국 해병대원들이 야전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밥과 국뿐이며 반찬은 보이지 않는다

 

 

 

 

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北漢山., 원글보기
메모 :

 

옛날 옛적 사진들


1920년대 남대문통의 모습.

1935년 청량리역 앞의 모습.

1910년 용산역의 모습.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현 서울)
그래도 제법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인다.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의 보신각 주변.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

현재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
콜로니엄 양식의 건물들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길 오른쪽 붉은색 벽돌 건물은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
‘서울의 중심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 양쪽에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3월에 찍은 광화문 거리.

헤르만 잔더가 1907년 9월 무악재를 넘다가 찍은 사진.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1925년의 서울역.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의 하나.
당시 경성과 부산을 오가던 특급
[아카즈키(あかづき=붉은 달)] 일등전망차의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일본 고관 및 친일 상류인사들이
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부산역사.

부산 세관의 모습.

1930년대 부산 초량 입구.

1930년대 부산 청사의 모습.

1930년대 부산 연락선 출항 모습.

1940년 부산 대청동.

일제강점기 대구역 앞 광장.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

일제강점기 대구시청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본정통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의 모습.

1940년대 대구역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구 원대통 거리.

인천의 일본인 거리 모습.

일제강점기 대전역의 모습.

일제강점기 대전역 주변의 모습.

1936년 9월 충청남도 대전군 회덕면 송촌리 쌍정당의 모습.

일제강점기 수원역 모습.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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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미사 원글보기
메모 :

6.25 당시 인민군과 좌익(左翼), 남한 민간인 4만 3천여명 학살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6.25 전쟁당시 북한 인민군과 좌익(左翼)측의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적(敵)에 대한 대량의 보복 처벌이었다.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


특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좌익들이 활개치면서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통해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를 사용해 학살을 자행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 당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위 사진은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로 학살당한 함흥 주민들의 모습으로 사진에 보이는 동굴에서만 300여 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진출처 : 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당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후송을 하되, 후송 곤란시에는 즉결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우익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전남 지역 피살자만 4만 72명(전체의 72.6%) 

 

총 4권으로 이루어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공보처 통계국. 작성일 1952년 3월31일)에는 5만 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부는 범례(凡例)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부에는 5만 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 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 4,008명, 여자가 1만 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중 1만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 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 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함흥에서 학살된 민간인 시체를 우물에서 건져 올리고 있는 국군의 모습

 


 

 

영광군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군(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이외에도 6.25 전쟁 당시 소위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 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미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마자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우물 속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 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처: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1955년판《대한민국통계연감》은 6.25 전쟁 당시 학살당한 인원이 12만 8,936명이고, 납북자가 8만 4,532명, 전쟁 중 사망자는 24만 4,653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6.25 전쟁 당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위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인민군의 학살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사진출처: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전시(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
   -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 <출처: '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출처 : 배낭여행(backpacktour)사랑~*^0^*
글쓴이 : 배낭사랑 원글보기
메모 :

 

 .6.25 한국전쟁이 남긴 귀한 사진들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

;필자 주>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2004 박도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2004 박도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2004 박도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2004 박도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2004 박도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2004 박도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2004 박도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2004 박도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2004 박도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2004 NARA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2004 NARA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2004 NARA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NARA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2004 NARA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2004 NARA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2004 NARA

 




1950. 8. 15. 피난민 행렬ⓒ2004 NARA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2004 NARA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2004 NARA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2004 NARA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2004 NARA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2004 NARA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2004 NARA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2004 NARA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2004 NARA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2004 NARA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2004 NARA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2004 NARA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2004 NARA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2004 NARA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2004 NARA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2004 NARA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2004 NARA

 




1950. 10. 1. 소공동 일대ⓒ2004 NARA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2004 NARA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2004 NARA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2004 NARA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2004 NARA

 



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2004 NARA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2004 NARA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2004 NARA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2004 NARA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2004 NARA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2004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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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시골전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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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장사 1900년대

 

옹기장사 1900년대

 

나무장사 1900년대

 

나무장사 1900년대

 

돼지장사

 

부산 자갈치시장 60년대

 

짚신장사 100년전역사

 

해운대

 

식수탱크 부산

 

무료극장 (가설극장) 극장이 없는 시골에 찾아가 무료로 관람하게 해주던 시절

 

서울역앞 ㅅ빌택시 행렬

 

 

서울역 전차와 승합버스들

 

시장 사기그릇을 파는 사기전

 

60년대 아동만화

 

60년대의 약장수

 

제주 모슬포 빨래터

 

60년대 종로거리 홍수

 

찹살떡~~~

 

부산 영도다리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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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 주먹의 황제 김두한
 
김두한의 가족들(가운데 따님 김을동)
김두한의 결혼식 사진
우리들의 영원한 큰 형님 김두한
 민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김두한
 
혁명자 박정희 소장과 함께
 그 당시 우미관 식구들
 한때나마 김두한으로 불리었던 세 사람
졸린 눈에 팔자걸음? 이 사람이 바로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 사람이 바로 정치 깡패 이정재 (박정희의 혁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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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련 화 / 배 호


    목련화 고운 얼굴 이 밤도 비에젖어 타향의 긴 한숨만 구름처럼 흩어져 이 발길 저 발길에 찬바람을 스치며 뒷골목 인생길에 슬피우는 목련화~

    목련화 고운 얼굴 이 밤도 비에젖어 타향의 길을 물어 걸어보는 이 발길 외로운 밤 하늘에 찬이슬을 적시며 뒷골목 인생길에 슬피우는 목련화~
      
       

    가사에 마우스 커서를 올리면 일단 중지, 내리면 다시 진행됩니다 " 

     

     

    출처 : 산 울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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