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시골풍경

 


     ▲ 일본말로 구루마라 했던 소달구지 타보셨습니까?

바퀴 두 개 달린 달구지 위에 앉아

다리 요리조리 움직이며 졸아도 소는 집에까지 잘 끌고 옵니다.

그립습니다


      ▲ 써레질 하고 있는 농부와 소


▲ 산 골짜기로 모를 지고 소 몰고 가는 농부


▲ 풀 뜯기러 들로 나가는 아낙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 경운기, 머잖아 이 기계도 농업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겠지요


▲ 지게에 발채를 얹어 짐을 나르는 농부


▲ 이앙기로 모내기




▲ 옛집 담벼락. 이엉을 엮어 우지뱅이 씌운 그 담벼락이 그립다. 고샅길은 얼마나 정겹던지


 ▲ 눈 감으면 아늑한 곳


▲ 어렴풋이 밝아오는 시골의 아침


▲ 아직도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기분 참 좋습니다


▲  고향집 돌담


▲ 시골집





▲ 부엌


▲ 아궁이


▲ 가마솥


▲ 소죽 끓이고 밥하고 국 끓이고 방마다 군불을 때면 아랫목은 절절 끓었었지요


      ▲ 예전 부엌인 정지 내부 모습. 우리집 정지는 훨씬 넓고 설강이 컸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 그리고

웬만한 도구가 다 올려져 있었지요. 나무로 된 구유같은 커다란 설거지통도 있었는데..




▲ 애들 오면 잡아 주시려고 기르나 보다


▲ 이 닭의 주인이름이 "장모님"이라는 군요




▲ 장작과 고드름


▲ 옥수수가 있는 풍경


▲ 곶감 말리는 풍경


▲ 쌀 한 가마. 김치 두 독, 나무만 넉넉하면 잘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 향기 가득한 집


▲ 행랑채 앞에 이르면...


▲ 정지문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답니다


▲ 시골집 대표선수-가보 1호




▲ 겨울 장독대


▲ 메주


▲ 시루, 평소에는 콩나물 기르고 대사 치를 때는 떡하고 백중 때는 빵찌고


▲ 고구마 저장하던 뒤쥐


     ▲ 감나무 한그루

 

 

 

 

메모 :
잊지말자 625

 

6.25 전쟁은 400만 여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되는등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6.25전쟁 56주년을 맞이하여 북한 공산세력의 무력 적화통일 야욕을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헌신한 국내,외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아울러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값진교훈을

우리의 후세들에게 올바로 인식시켜 주어야 하겠읍니다. 

 



‘6.25 그 역사의 순간’ 미공개 사진 완전공개

▲ M-26 tank를 배경으로 자신의 남동생을 업고 사진을 찍은 소녀
 

 최근 한국전쟁 당시의 생생한 전쟁터 모습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주한미군에서 공개해 화제가 되고있다.

 

 플리커 닷컴(http://www.flickr.com/photos/imcomkorea/sets/72157607808414225)과 유튜브(http://www.youtube.com)를 통해 일반에 공개한 이번 사진, 영상들은 6.25 전쟁 당시 미군 사진사들과 카메라맨들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한국전쟁당시 참혹했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사진에는 탱크를 배경으로 아이를 업고있는 소녀의 모습과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슬퍼하는 사람들의 장면, 부상자를 헬기로 후송하는 장면, 북으로 진군하던 유엔군이 38선을 거쳐 퇴각하는 장면,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장면 등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모습이 담겨져있다.

 

 사진 중에는 특히 전장에서 동료를 잃은 슬픔에 다른 동료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는 한 미군병사의 모습 뒤로 다른 병사가 태연하게 사망자를 기록하는 모습과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남한에 주둔 중이던 1만 3천여명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을 앞에 두고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미국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위문공연 차원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 죽은 아버지를 잡고 슬퍼하는 가족들

 

 

▲ 미해병이 잡은 북한군들

 

 

▲ 길에서 혼자 울고있는 아이

 

▲ 자는 아이 옆에서 걱정하는 부모

 

▲ 미군에 입양된 고아

 

 

 

 

 

 

 

 

 

 

 

 

 

 

 

 

 

 

 

 

 

 

 

▲ 야간 로켓발사

 

▲ UN 공수부대 강하

 

▲ 피난 행렬

 

▲ 전장에서 동료를 잃은 슬픔에 다른 동료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는 한 미군병사의 모습 뒤로 다른 병사가 '태연하게' 사망자를 기록하는 모습

 

▲ 31연대 예배모습

 

▲ 마를린 먼로 위문공연
 

 

 

 

▲ 유엔총사령관 맥아더 장군
 


▲ 아내와 8개월된 아들을 안아주는 군인

 

 자료를 공개한 시설관리사령부의 에드워드 존슨 대변인은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 당시와 그 이후의 한국 역사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라며 공개된 자료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출처 : 산수원 대추마을
글쓴이 : 대추꼴 원글보기
메모 :

 

 

 

주한미군 '미샬로프'씨(밑에 초딩들이랑 사진찍으신분)가..

1968년 서울을 관광하며 컬러로 촬영한사진들과  35년후..

어느 한국인이 같은 장소를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같은 장소끼리 번갈아가며 올린것입니다.

(사진밑 2003이란 숫자는 스캔한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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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1960년대 한국의 농촌


.





그 시대를 살았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정겹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 있지만

곳곳에 발전의 흔적도 보이네요.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어찌 이 날을 잊으랴?.....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필자 주>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2. 금강철교ⓒ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2004 박도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2004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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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2004 박도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2004 박도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2004 박도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2004 박도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2004 박도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2004 박도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2004 박도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2004 NARA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2004 NARA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2004 NARA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2004 NARA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2004 NARA



▲ 1950. 8. 15. 피난민 행렬ⓒ2004 NARA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稚뺙?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2004 NARA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2004 NARA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2004 NARA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2004 NARA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2004 NARA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2004 NARA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2004 NARA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2004 NARA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2004 NARA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2004 NARA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2004 NARA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2004 NARA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2004 NARA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2004 NARA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2004 NARA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2004 NARA



▲ 1950. 10. 1. 소공동 일대ⓒ2004 NARA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2004 NARA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2004 NARA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2004 NARA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2004 NARA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2004 NARA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2004 NARA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2004 NARA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2004 NARA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2004 NARA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2004 NARA



▲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6.25 전쟁 중의 삐라.

 

여순반란사건의 관계 전단지 자료들을 올려 봅니다.

쉽게 구경하기 어려웠던 귀한 자료들입니다. 
 



1. 독립행진곡. 1945년 해방 기념으로 나온 엽서 뒷면입니다.

여기에 독립행진곡 가사가 1절부터 3절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립행진곡은 지금까지 1절까지만 주로 알려져 왔습니다.





 

 2. 6.25 전쟁 발발 후 첫 삐라.
 

1950.6.29일 맥아더장군이 영등포 전선을 시찰한 직후인

30일경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들에게 뿌린 삐라로

일본주둔 미군이 참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주일 미군은 7.1일 참전, 삐라의 앞면에는 유엔마크 아래

국한문으로 뒷면에는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10*16센치 크기입니다.

 

국제연합회는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의 무법한 침략에 대하여 반항하는 귀국을

원조하라고 요청하였음으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원조하겠습니다.
 

견고, 침착, 대담하며 맹렬히 적을 대항하십시오.

우리는 한국과 힘을 합하여 침략자를 귀국으로부터 격퇴하겠습니다.





  

도민에게 고함.

6.25 당시 수도 서울을 사흘만에 함락당하고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계속 국민들에게는 승리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동요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도민 여러분
북한 괴뢰군은 불법하게도 남침을 감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용감한 군경은 그들을 맹렬히 반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 공군은 28일 밤에는 평양을 비롯한 이북 5대도시를

맹폭하고 30일 아치에는 재차 평양, 함흥, 원산, 평강 비행장을

폭격해서 그들의 비행기 60대 이상을 폭파하고 기지를

사용 불능케까지 하였습니다.
 

남침해 있는 괴뢰군은 그 후퇴로까지 완전히 단절당하여

독안의 쥐가 되고 그완전잔멸은 시간 문제입니다.

해안 역시 우리 해공군이 철통같이 수비하여 괴뢰군이

1인도 상륙할 여지없게 되어있습니다.

도민 여러분은 군경작전에 절대 신뢰하시고 유언, 억측 등에

동요되지 말고 각자 생업에 충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 4283년 6월 30일 경상북도 공보과 발표





6.25전쟁 당시의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한

최근의 미국 잡지 [스미소니안]입니다.
피난민과 미군이 서로 엇갈려 걸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25 전쟁 당시 중국 정부가 발행한 징집 통지서입니다.

 중국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전쟁(미제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 전쟁)이라 부릅니다.

'희보'(喜報,기쁜 소식)와 '항미원조 보가위국' (미제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자  국가를 보위하자)는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백선엽 장군이 발행한 귀순증명서.

지리산 지구 빨치산 토벌 작전 당시의 귀순증입니다.


 

 

6.25 전쟁당시 전선으로 보낼 혈액을 공급하기 위하여

미국당국이 제작한 헌혈을 권장하는 포스터로

1950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6.25 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포스터.

미션 오버 코리아 라는 제목의 영화
포스터 입니다. 1953년에 제작된 것.


 

 

미군 입대 독려 포스터.

1951년 미국에서 발행된 포스터로 군대에 자원

입대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유엔측에서 뿌린 삐라입니다.




 

북한에서 발행한 전쟁 포스터입니다.

1950년7월 15일 탁원길의 작품이며, '미제국주의'의 총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자의 모습을

표현하고있습니다. (서울 아트뱅크 소장)


 



1951년 겨울에 뿌려진 삐라입니다.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중공군은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만 북한군에

넘겨주고 있다. 왜? 북한이 약해져서 집어 먹기 쉬우니까..

북한주민들이여! 이젠 여려분이 중공군이 왜 북한군에 쏘지 못할

무기만 넘겨주는지 알았을 것이다.

중공군은 여러분의 적이다!!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참된 애국자로서 중공군이 한국에 들어오기를 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한국에 와 있는가?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있게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를 말살함으로써 덕을 보는 장본인이.....

그것은 로서아다. 반공! 항로!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북한과 중공지도자들은 그들이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로서아의

비밀승락없이는 감히 한국에 대한 침략전을 시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침략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한국사람이 죽었으며

수백만명이 집을 잃게되어 한때 자랑스럽고 아름답던

한국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나 로서아는

여전히 뒤에 앉아 불붙은 침략전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뒤에 서서 이 침략전을 지휘하고 있는 로서아의

침략정책으로 인하여 남녀노소 아까운 한국사람들만

마구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서아 식민지 노예 정책에 결사 반대하라!!


 



유엔군측에서 인민군에게 뿌린 삐리입니다.


인민군을 멀리하라. 우리측이 뿌린 삐라입니다.
 



 

전단지입니다.

여순반란사건 당시 지리산의 빨치산에게 뿌린 것인데,

갱지에 인쇄한 것이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해독 불능한 부분을 포함해 내용을 올립니다.

山사람이여 보라.

이치없는 주장과 불가능한 목적아래 희망없이 단말마적인

농산(籠山)을 계속하고 있는 산 사람 여러분!

군들이 그와 같이 굶고 헐벗고 산야를 헤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을 위함인가? 가족을 위함인가? 또는 자손을 위함인가?

민족을 위한다면 동족 상잔이 무슨 말이며, 가족을 위한다면 헐벗고

굶주리며살고 있는 그대의 가족들은 어찌 된 일인가?

이가 자손을 위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대들의 그릇된 사상과 행동으로 인한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리 민국을 해하며 민족을 상하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
 

그러타면 그대들의 사상과 목적이란 근본부터 전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이여 뉘우쳐라. 우리 민족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싸워야 하며

서로 죽여야 하겠는가 서로 서로가 우리 3천리 강토에서

새로 전 세계의 승인을 받은 당당한 대한민국을 받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타민족 타국가에 지지않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으려는가?

그대들이여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번은 과오가 있는것이고,

잘못을 생각할때 결연히 그 과오를 청산함에는 절대적인

용기가 필요하며 그는 우리도 잘안다.
 

군들이여 군들의 압길을 생각하여 보라.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며 식량 , 탄약 역시 결핍하여

질것이고 그 위에 정예한 우리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도

근일 중에 있을 것이라. 그러면 군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인가? 아니다. 단 한가지 살길이 있다.

그것은 즉 이번 대통령명령으로 또는 전투사령부에서 선명하신

1월말일까지 무기 지참자는 이유불문하고 즉시 석방함.

무기불지참자도 우(오른쪽)에 00하라는 관대하신 은전000.

산에 있는 그대들이여. 이것이 0000이니 돌연 과오를

청산하고 하루 속히 근방에 있는 지서나 대한청년단으로

귀순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가족의 안전은 물론

그대들도 무조건 석방할 것이다.

이를 믿지 못하는 자여. 대통령께서나 사령관께서

공적으로 천명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이유가 어데 있는가?

잘못을 뉘우쳐라. 결연한 결심을 가지고 이 관대한

은전을 굳게 믿고 하루 속히 나오라.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두손 들고 맞으리라.

                                              대한청년단보도부


 



전단지입니다.

 

제군들과 함께 싸우던 이 병사는 유엔측으로 넘어온

후로부터 조곰도 먹을 걱정없이 매일을 기쁘게 지나고 있다.

귀순한 10여만 동료들과 같이 그는 지난 날의 긴 야간 행군을 할 때

배고프던 그 쓰라림을 또 다시 겪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그는 지금 배부르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군들은 어떠한가. 왜 제군들은 유엔측이 먹을 것을 보증

하는데도 불구하고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어서 유엔군측으로 넘어오라!!





최근에 구한 현대사 자료입니다.

제목은 반란제군에 고함. 이 전단지의 작성일은 1949년 1월 15일.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항쟁하고 있는

'반란군'을 회유하기 위한 전단지로 보입니다.

식별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원문을 옮깁니다.
 

반란제군에 고함

제군은 다같은 백의민족이다. 혈통이 같고 풍속이 같고 언어가 같은

단군성조의 자손이 아니냐?? 일시적 그릇된 모략과 선동에 유인되어

자신을 희생하고 부모와 처자를 잃으며 선영을 욕되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 어느 사회에서나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인간은 한때의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고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제군이 어떠한 죄들을 지었다 할 지라도 하루빨리 이를 뉘우치고

자수해 돌아오면 제군의 신명을 안보할 수(편히 지킬 수) 있고

부모와 처자로 더불어 평화스러운 가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좌의 방침으로써 제군의 장래를 보장할 터이니 이 기회를 잃지말고

속히 돌아와 대한민국의 참다운 국민이되라. 만약 차시에

귀순 안한 자는 철처히 전멸 당할 것이다.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눈물로써 그대들의 귀순을 기다리고 있다.

깊이 반성하라.
 

1. 1월 말일까지 무기휴대 귀순자는 죄상여하를 불문하고 석방함.

무기지참치 안한 자도 선처한다.

기타 좌익 단체에 가입한 자도 자수한 자도 이와 같이 선처함

4282년 1월 15일

투사령관 제5구경찰서장
구례군수 대한청년단장
국민회 구례지부 구례군시국대책위원회



 

전장에피는꽃 / 블루벨즈

 

                                                        운호거사님 제공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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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걸작 사진10장

 
    


원조 금순이?  6.25전쟁이 터지자 생활필수품을 한보따리 싸서 머리에 인체 아기를 업고 피난가는

이 젊은 새댁 사진은 전쟁 발발 직후 발행된 미국 LIFE잡지(1950년 7월 10일자)에 전면 크기로 실렸다.

얼마전 워싱턴 근교에 선 일일 골동품 시장에 갔다가 이 잡지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 새댁의 모습이 요즘 인기 절정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왼쪽에 삽입한 사진은 필자가 TV화면을 보고 촬영한 것. 


               철모쓴 어린이들 

   어른들은 왜 싸울까? 전투 중인 미군 아저씨들로부터 철모를 얻어쓴
두 꼬마 아가씨가  대포 소리가 너무 무서워 귀를 막고 있다. 난리통에
부모를 잃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명한 사진기자 David D. Duncan이
찍은 보도 사진이다.

 
      

  이게  유토피아? 인천 상륙작전이 끝난 뒤 한 해병이 파괴된 인천 시내를 순찰하다가

어린 아이와 만난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행운아들이다.

"유토피아"(이상향)이라는  다방 간판이 폐허가 된 거리 풍경과

아이러니칼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 사진) 


          고집불통 노인
 

       "피난을 가더라도 갓은 써야지"   미군 ?차에 실려 두 손자와 함께 피난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사진인데, 사진 설명을 보면,

중공군과 전투가 있으니 동네를 떠나달라는 미군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동네 

이장인 이 할아버지가 피난 가기를 거부, 할수없이 ?차로 모시고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방향이 다른 두 행렬 

    군인은 북쪽으로, 피난민은 남쪽으로  6.25가 터진지 열흘이 지나서

미군은 처음으로 오산 죽미령에서 인민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계속 남하하는 북한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으로 행진하는 미군들과

그 정반대 방향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겁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아이와 탱크 

      탱크도 무섭지 않은 아이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탱크가 지나가도
마차가 지나는것 처럼 무관심한 어린이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식량 구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아줌마들 
    
  아줌마는 강하다!  머리엔 무엇인가 잔뜩 이고 지팡이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아줌마...

아마도 식량을 구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길 옆에서는 미군들이 대포를 쏠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엄마는 위대하다

엄마는 위대하다   피난길에 걸어가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이 아기가 지금은 56세쯤 되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8순 할머니가 된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고 있을 것이다.  

 (LIFE 잡지 사진) 




         탱크와 피난민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  북진하는 탱크에 방해가 될세라

얌전히 길 한쪽에 한줄로 서서 걸어가는 피난민 대열.

자세히 보면 젊은 사람은 없고  노인들과 아녀자들 뿐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초컬랫
 
헬로! 땡큐! 
미군으로부터 초컬랫을 받고있는 어린이. 

처음 보는 것이라 과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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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희귀자료 모음 001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향원정(香遠亭)경복궁 후원의 정자. 인공연못인 향원지에 작은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워 나무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 다니게 했다. 아래와 위층이 같은 크기이며 겹처마와 육모지붕으로 단장한 화려한 정자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어졌는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002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경복궁 강녕전(康寧殿)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003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 집옥재(集玉齋)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다.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004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005 창덕궁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 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006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다.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007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일부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008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궁중 연회에서 가무는 주로 의녀(醫女)들이 맡았다. 의녀들은 의술 이외에도 악기와 노래, 춤을 배워야 했다. 사진은 덕수궁에서 연회를 마친 뒤 양복 입은 귀빈을 모시고 여악(女樂)을 맡았던 기녀들이 앞에,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뒤에 서서 기념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009 의정부(議政府) 의정부(議政府)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의정부는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 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되었다.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010 남산 주변 남산 주변1893년 남산 기슭에 세워진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011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서울 신문로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012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서울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적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았다. 1869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에 전차표 판매소가 보인다. 013 비각 비각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 (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014 대관정(大觀亭) 대관정(大觀亭)1897~98년경에 세워진 2층 양식 건물로 외국의 귀빈이 묵던 호텔이다.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어 고관이나 외국인들의 연회가 잦았다. 1905년에는 일본군사령관저로도 사용되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쪽 언덕에 있었는데 1928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에 자리를 내줬다. 015 영국공사관 영국공사관서울 정동에 검은색과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1890년에 착공해 1892년에 준공했다.1898년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총영사관으로 낮아졌다. 현재의 영국대사관이다. 016 러시아공사관 러시아공사관덕수궁 북쪽에 건립된 단층의 벽돌 건물. 한국전쟁 당시 본관이 파괴되어 지금은 종탑만 남아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 감시하의 경복궁을 벗어나 파천하여 1년간 머무른 곳으로 유명하다. 017 한강철교 한강철교서울의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도교. 1899년 9월 노량진과 인천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뒤 1900년 7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가 완성되었다. 경인선 부설권은 애초 미국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인수하여 완성한 것이다. 한강철교는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 길이 약 630m로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다. 현재의 철교는 한국전쟁 중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018 독립문 서울 현저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석조문으로 높이 14.28m, 너비 11.48m다. 독립협회의 발기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20일 완공되었다. 1980년 1월 고가도로가 나면서 이전돼 현재는 원위치에서 서북쪽 70m 떨어진 곳에 있다. 019 독립관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되던 건물. 독립문 근처에 있으며,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해 만들었다. ‘독립관’ 현판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한글로 쓴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도 강연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020 원각사지(圓覺寺址)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높이 12m. 국보 제2호. 탑골공원 자리는 조선 초기 원각사라는 큰 사찰이 있던 곳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화려함과 기교에 있어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021 원각사비 원각사비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1471년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4.9m, 비신(碑身) 너비 1.3m이다. 보물 제3호. 귀부(龜趺)는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이다. 탑골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022 노량진 도선 노량진 도선노들나루라고 불린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1910년대 인도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023 관왕묘(關王廟) 관왕묘(關王廟)관우(關羽)를 받들기 위하여 건립한 묘당으로 지금의 신설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남대문 밖에 건립되었는데, 이후 동대문 밖에도 동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1602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024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자락에 있던 누각. 현재는 주춧돌만 남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취를 즐기던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025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추운 겨울, 한강이 얼면 강태공들은 한강에 나가 빙판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했다. 한 가족일까, 손에 쥔 물고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낚시가 이들의 생업임을 짐작케 한다. 026 마포 풍경 마포 풍경 마포는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 북안의 포구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부리던 교통의 요지였다. 포구 주변의 경치가 수려해 시인묵객들이 즐겨 이곳의 경치를 예찬했다. 인근에 정자나 누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027 동대문 밖 무덤의 문인석 동대문 밖 무덤의 문인석 무덤 앞의 문인석과 양석(羊石)으로 보아 왕족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동대문 밖 꽤 높은 산허리에 위치해 있다. 해가 중천에 있는데 세상 모르고 자는 이는 나무 하러 온 아이일까. 028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은 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에는 그 휘하기관이 됐다. 2층의 벽돌건물이었는데, 1915년 경성우편국 새 건물이 들어선 뒤 그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 주변에서 인력거꾼과 지게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029 대한의원 대한의원1907년 세운 국립병원 겸 의학교로, 일본인들이 의료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종로구 연건동 마두산 언덕에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되었는데,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중앙에 시계탑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구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030 일본군 사단사령부 일본군 사단사령부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사령부가 처음엔 필동에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군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031 통감 관저 통감 관저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동시에 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엔 남산 기슭의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하다가 1907년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었다. 통감 관저도 이때 지은 것이다. 032 경성이사청 경성이사청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서울의 일본영사관이 경성이사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1896년 현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벽돌 2층 건물의 영사관을 신축했는데, 1910년 이후 경성부청으로 사용하다가 1930년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들어섰다. 033 평양 대동문(大同門) 평양 대동문(大同門)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034 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칠성문(七星門)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035 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현무문(玄武門)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036 평양 부벽루(浮碧樓) 평양 부벽루(浮碧樓)산 위의 사람들은 대성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037 평양 모란봉(牧丹峯) 평양 모란봉(牧丹峯)대동강 주변의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綾羅島)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轉錦門),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淸流壁)이다. 038 평양 을밀대(乙密臺) 평양 을밀대(乙密臺)모란봉 중턱에 있는 누각.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고구려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축대의 높이는 11m에 달한다. 039 평양 득월루 평양 득월루 대동강변에 보이는 누각이 득월루, 아래의 문이 전금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기린굴(麒麟窟)이 나오고 계속 올라가면 을밀대에 닿는다 040 평양 연광정(練光亭) 평양 연광정(練光亭)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것이 능라도다. 041 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자릉(箕子陵)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똘똘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짐짓 포즈를 취했다. 042 대동강 얼음 채취 대동강 얼음 겨울에 채취,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강 얼음을 채취해 얼음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는 것은 평양의 오랜 관습이었다. 얼음을 캐낸 자리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043 대동강에서의 빨래 대동강에서의 빨래이른 봄, 대동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아낙들이 강기슭에서 겨우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 강이 다 녹지 않아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강 건너편은 선교리인 듯하다 044 대동강 철교 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 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 아래로 나루터가 보인다.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045 평양 신시가지 평양 신시가지 평양의 일본인 거리. 한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가 내걸린 건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된다. 046 평양이사청 평양이사청 이사청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뜻으로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047 진남포 전경 진남포 전경1897년에 개항된 삼화부(三和府)로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던 항구. 일본과 청의 상인이 많이 거주했으며, 1910년 진남포부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본의 주요 군수품 수송기지로 활용되었다.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메모 :

 

          육혈단포

  총구,방아쇠,노리쇠가 두 개씩인 쌍혈 단총으로 개화기 이전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성기

   해방 전후에 유행했던 SP축음기와 판이다. 손잡이로 태엽을 감고 바늘을 판 위에 올리면 바늘 위쪽에 있는 소리통이 울린다.


   유성기판의 한면에는 대개 1곡 정도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유성기를 소유했던 사람의 집에는 축음기 소리를 듣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인기를 독차지했다.


   오른쪽 유성기판은, 장일타홍(張一朶紅)의 "창부타령",  김옥엽(金玉葉)의 "아리랑", 성광현(成光顯).신불출(申不出).나품심(羅品心)의 폭소극인 "엉터리", 임방울의 "쑥대머리". "고고천변(皐皐天邊)" 등이 수록되어있는 판이다.

 

 

잡화점

 

   1920년대 잡화접의 모습으로 갓신,나막신,짚신,가위,안경집 등 온갖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상투를 틀고 긴 담뱃대를 문 주인의 모습이 이채롭다.         

 

1920년대 조선의 아이들

 

   무명 저고리 치마에 쪽찐 머리를 하고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이 마냥 선하다.

 

<엽서>남대문 옆 길

 

   경성 남대문 옆 길로 흰 옷 입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수레,전봇대,건물 등에는 일제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엽서>1920년대의 서울

 

   앞 쪽에는 신식 건물들이 즐비하고 뒤 쪽으로 낮은 건물들 사이로 넓은 도로  끝에 조선침략의 본거지인 총독부 건물만이 눈에 띈다.   

 

<엽서>평양 시장

 

   평양의 어느 시장 안 풍경이다.


   머리에 이고 지고 끌고 흰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엽서>독립문

 

   우뚝 선 독립문 옆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제염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다.

 

<엽서>수원 화성 팔달문

 

   화성(華城)은 정조(正祖) 20년(1796)에 완성된 성으로 정조 임금의 효심과 개혁의 뜻이 담긴 성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축성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되?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팔달문(八達門) 앞 상점의 모습과 2층 누각의 뜯겨진 벽이 보인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 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한국 정자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이 각루는 평면구조가 아닌 다각화된 형상으로 사계절 변화의 미가 지금도 독특하다.      

 

 

화홍문(華弘門)

 

   광교산에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는 곳에 북수문과 남수문을 설치하였다. 


   북수문은 풍광이 아름다운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아래에 일곱 개의 아치형 석조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누각을 세웠다. 


   이것이 화홍문으로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華城)내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성벽은 장안문(長安門)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딘 발길을 재촉하던 이 긴 고개가 지지대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는 정조의 효심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순조7년(1807)에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각 안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수원신사(水原神社)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 황실과 그 공로자들 추모하는 곳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천도교 월보

 

   1910년 8월 15일부터 1937년 5월까지 발행했던 천도교의 월간 기관지이다. 창간호부터 한글로 글을 싣고 있는 이 월보는 민중을 계몽하고 교양을 보급하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천도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설치한 재판소이다.    

 

 

화성 창룡문(華城蒼龍門)

 

   현재는 다시 복원되었지만 이 엽서 사진은 6.25 동란 중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얕은 언덕에 옹성을 두르고 연무대(鍊武臺)와 마주하고 있는 동쪽 성문으로 장안문이나 팔달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화성 화서문(華城華西門)

 

   사진처럼 예전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서쪽문이다.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은 직접 성문 안으로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도시화되어 그 면모를 잃었다.


   그 규모는 창룡문과 비슷하다.

 

화성 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성내를 조망할 수 있는 등성이에 건물과 조련장을 마련하였다. 


    앞에는 창룡문 옆으로는 동북공신돈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역

 

   1930년대 조선 풍물 안내첩에서 수원역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전통 관청 건축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수원역사 건축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과 더불어 이러한 면모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입공희보(立功喜報)

 

   이 증서는 1951년 8월 31일 한국전쟁 중, 중국 조선 철로 군사 관리국에서, 중국 요서성 철도현 형국동(邢國棟)에게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6.25 사변 중에 북한을 도운 공로로 표창한 증서이다.

 

제국신문

 

   1898년 8월10일 창간되어 1910년 8월2일 폐간된 신문이다. 


   사장은 이종일(李鍾一)이고, 이승만(李承晩)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기자로는 이인직(李人稙). 이해조(李海朝) 등이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한글 전용으로 민족 언어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B4 판형의 절반 크기 정도의 2단제에서 1907년 6단제로 확대되어 매일 4면씩 2000부 내외로 발행되었다.


   당시 일본 세력이 우리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던 상황에서 이 신문은 무능한 정부와 관리의 부패 및 일본 세력의 국권 침탈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따라서 일본 당국이 실시한 사전 검열 기사가 삭제되거나 정간처분을 받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먼저 간행된 '황성신문'이 한자 해독계층을 위한 특수층의 신문이라면, [뎨국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함으로써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민중 계몽과 국권 회복을 위한 신문이었다.

 

 선교 기념 스테레오 뷰 사진

 

   1900년초 언더우드가 찍은 선교 기념 사진으로 당시 개화에 앞장 선 흰 옷 입은 아이들과 갓을 쓴 어른들이 선교회 서양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특수한 기계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는 사진이다.

 

전우(田愚) 선생 초상

 

   조선 시대의 마지막 정통 유학자이신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의 초상 사진이다.   


   선생은 아산에서 임헌회(任憲晦)로 부터 학문을 사사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며,[안자편(顔子篇)], [오현수언(五賢粹言)], [연원정종(淵源正宗)] 등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강원도도사.사헌부장령.순흥부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자 군산도,계화도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여도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학군자로 자처하는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선생의 초상을 대하면 꼿꼿한 대학자의 맑은 면모가 느껴져 어지러운 이 시대에 위안이 된다.

 

 남궁억 선생의 탑골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답사 사진

 

   1904년 남궁억 선생이 잡초에 덮인 탑골 원각사터에서 우산을 들고 대원각사비를 바라보고 있는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구한말에 잠시 제작된 이 스테레오뷰 사진은 특수한 장치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도록 만든 사진이다. 뒤쪽에 당시 군악대 건물인 듯한 건축물과 한옥들이 보인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 조선 세조 때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석으로 현재 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다. 높이 4.9m, 너비 1.3m로 1471년(성종 2)에 건립되었다. 비의 앞면은 김수온(金守溫)·성임(成任),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徐居正)·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대리석제의 비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 있다. 반구형의 이수는 비신과 한 돌로 보주를 받든 형상의 쌍룡이 조각되었다. 이수 아래쪽에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전액을 강희맹(姜希孟)의 글씨로 새겼다.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기하무늬를 새겼으며 연잎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와 다리가 특이하다. 전체적인 조형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따라 복고적이나 조각이 번잡하고 사실적 표현이 미숙하다.

 

 

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

 

   1955년 학예사에서 펴낸 안두희(安斗熙)의 수기이다. l949년6월26일 12시45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흉탄은 아직도 이 나라 민족정기의 암울한 그늘로 우리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누가 이 수기를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려 한다지만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솟구치는 분노는, 오히려 오늘을 사는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연민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아니, 오늘의 우리는 지금도 김구선생님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의 진정한 통일과 자주독립을 이끄는 자가 지금  이 땅에 있는가?
   안두희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응징 처단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모두 안두희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1930년대 전기 난로


전기 스토브

 1930년대  전기 난로와 스토브

 

   일제 식민지 시대 사용되었던 전기 난로와 스토브이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가 사용했던 전기 도구들로 추정되며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디자인이 독특하고 정교하다.

 

 밭가는 농부 스트레오뷰 사진

 

   1901년 '흰 옷 입은 한국의 농부'라는 제목으로 미국 Keystone 사에서 제작한 사진이다.  흰 바지 저고리에 상투를 틀고 쟁기로 밭을 가는 우리의 친구 황소, 이렇게 천년을 살아왔던 것인데 근대화의 한 순간, 과거로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 오던 그 삶의 모습 모든 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갔다.

 의병장의 칼

 

   두꺼운 가죽띠에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는 무명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창의병(倡義兵)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투혼으로 이렇게 흔적만 전해질 뿐이다.

 

 한국 전쟁 중 포격 사진

 

   기와집이 보이는 뒷밭에서 7명의 UN병사들이 방금 포를 발사하고 귀를 막고 있는 6.25 전쟁의 생생한 장면이다.

 

당시 20대의 젊은이들, 지금 살아있다면 70대의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43×35㎝의 대형 원판 사진으로 미국 ebay사로부터 구입한 사진이다.

 

황성신문 1899년 4월 5일자

 

   1898년(광무 2) 9월 5일에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남궁 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국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맞아 사장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장지연이 구금되고, 신문도 정간당하였다가 수개월 만에 복간되었다.

 

이 신문은 고종황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독자도 중류층 이상에 두었는데, 일본의 국권침탈로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다가 동년 9월 14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부인의 외출- 스테레오 뷰 사진

 

  1904년 가마를 타고 외출을 하는 양반 댁 마님을 외국인이 촬영한 스테레오 뷰 사진이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흰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하인의 모습과 부인의 표정이 이채롭다.

 


이왕전하(李王殿下)와 전하비(殿下妃)

 


이왕세자(李王世子) 은(垠)과 왕세자비(王世子妃)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영흥선원전(永興璿源殿)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동경조거판어전(東京鳥居坂御殿)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이왕가 기념 사진첩(李王家記念寫眞帖)

 

   1919년 일본 동경 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 발행한 조선 이왕가 기념 사진첩이다. 서언(敍言)에서 태조와 세종의 큰 덕을 칭송하고, 고종황제가 동양대세에 의해 일한합병한 후 훙거하여 유감이라 하고, 약력과 장례 광경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다.

 

 위 자료는 목차에 나오는 사진으로 태조대왕 단(旦=이성계)과 고종황제 희(熙), 이왕전하 척과 이왕세자전하 은(垠)의 약력을 기록한 뒤 사진을 싣고 있다.

 

 근정전 근위병의 스테레오뷰 사진

 

   1903년 미국 그레이브가 찍은 근정전의 청동 향로와 근위병의 모습이다. 외세의 눈에 비친 망국의 현장으로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화면에는 시름이 가득하다.

앞

 

 

구한말 훈련대

 

   구한말 대한제국 훈련대 병사들의 집총 훈련 광경 사진으로 미국 언더우드사에서 제작한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궁궐안에 자리한 시위대(侍衛隊) 병사들로 보인다.


   1897년에 성립된 대한제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자체적인 국방강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새롭게 군복식을 제정하고, 외국에서 신식 화기와 장비를 도입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러한 시도도 열강들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한제국의 시위대는 1897년 1월 1개 대대로 창설되어 각개훈련, 소총조작법, 제식훈련, 총기 분해결합, 사격술 등 러시아식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898년 5월 시위연대로, 1902년 10월에는 2개 연대로 증편되었으나 1905년 4월 다시 시위보병 1개 연대로 감축되었고, 1907년에는 1개 대대만을 남기고 모두 해산되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 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출처 : 竹馬故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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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동영상/美軍의 6.25

<제공 :조갑제 닷컴>김덕조(펌)   
 

이 자료는 한국전의 발발에서 부터 휴전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담은 매우 귀중한 영상 자료입니다.

일부러 구하려고 노력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인데

이렇게 14편 전질을 모아서 보내드리오니 저장하여 두시고

차근 차근 보시면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보여 줌으로서 그들에게 우리의 시련의 역사를 알려주심은

기성세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라로 된 韓國戰 필름>

최근에 찍은 영화처럼 생생한,

칼라로 된 韓國戰 필름 최초 공개!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는가?!

순서대로 아래 주소를 클릭해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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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변천사

                               화폐에 얽힌 에피소드

○…1956년 발행된 500환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전면 중앙에 위치했다.<그림7> 그러나 발행 직후 대통령의 초상이 두쪽으로 찢어지거나 절반으로 접혀지는 등 손상된 화폐가 시중에 나돌았다. 항간에는 대통령을 욕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초상을 중앙에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등장했다. 이에 대통령의 한 측근은 “나라의 국부(國父)이신 대통령의 초상을 지폐 중앙에 집어넣어 용안이 찢겨지거나 접혀지는 등 욕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처사이니 즉시 도안을 교체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한은은 대통령 초상의 위치를 오른쪽으로 바꾼 새로운 500환권을 2년뒤인 1958년 발행했다.
○…1962년 5월16일 발행된 100환권 지폐에는 일반인이 도안 모델로 등장했다.<그림8> 한복을 차려 입은 어머니와 아들이 당시 책처럼 생긴 통장을 들고 있는 도안은 국민들에게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이 100환권은 우리 화폐사상 유통기간이 가장 짧아 발행된지 20여일 뒤인 그해 6월10일 제3차 통화조치 실시로 새로운 화폐로 대체되며 폐기됐다.
○…1972년과 73년 발행된 5000원권과 1만원권에 등장하는 이이와 세종대왕 초상은 갸름한 얼굴에 큰눈과 오똑한 콧날 등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그림9> 당시 국내 제조기술로는 은행권의 원판을 제작할 수 없어 영국의 은행권 제조회사인 토마스 델라루 사에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때 영국인들의 정서를 기준으로 콧날을 높이는 등 인물을 서구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1972년 한은은 앞면에는 국보 24호인 석굴암 본존불을, 뒷면에는 불국사 전경을 소재로 한 1만원권을 발행키로 결정했다.<그림10> 이에 따라 시쇄품에 박정희 대통령의 서명을 받고 발행공고까지 마친 후 본격적인 유통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공고 이후 종교계의 반발이 심하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세종대왕상과 경복궁 근정전이 도안된 새로운 형태로 이듬해 발행됐다.
○…화폐에 사용되는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의 초상은 표준영정이다.<그림11> 표준영정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기준없이 제각각 그려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1973년 당시 문화공보부가 동상ㆍ영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표준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이순신은 월전 장우성, 이황은 현초 이유태, 이이는 일랑 이종상, 세종대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각각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됐다.
○…지난해 더이상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폐기처리된 지폐는 10억3000만장, 금액기준으로 5조9764억원에 달했다. 폐기된 지폐의 무게는 1172톤으로 이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경부고속도로를 188회 왕복할 수 있고 쌓아두면 에베레스트 산의 12배 높이에 달한다.
폐기되는 지폐는 장당 수천조각으로 나뉘고 700~800g 무게의 소시지나 케익 형태로 사출돼 재활용 업체를 통해 전산실 바닥재나 자동차의 충격완화장치 등에 재활용된다.
현대 화폐 변천사

1910년 한일 합병을 단행한 일본은 이듬해 3월 구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편했다. 조선은행은 이후 40년 가까이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며 태평양전쟁 중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도 통용되는 은행권을 남발해 일본의 전쟁비용 조달 지원책을 담당했다.
1950년 6월12일 설립된 한국은행은 6ㆍ25전쟁 중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했고 전후에는 통화개혁을 단행,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평가절하한 ‘환’ 표시 화폐를 발행했다. 또 5ㆍ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일환으로 화폐단위를 10분의 1로 평가 절하한 한글 ‘원’ 표시 화폐를 발행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권= 조선은행권은 1914년 100원권을 시작으로 해방전까지 총 18종이 발행됐다. 100원권 도안은 재복을 상징하는 신인 대흑천(大黑天)을 사용했고 10,5,1원권에는 긴 수염에 관을 쓴 노인이 사용됐는데 이 노인에 대해서는 조선말기 문장가인 운양 김윤식의 초상이라는 설과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의 화신인 수(壽)노인이라는 설로 양분돼 있다.<그림1> 해방 뒤 미 군정에 의해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총 13종으로 대부분의 권종에는 긴 수염에 관을 쓴 노인상이 사용됐고 1949년 발행된 10,5원권에는 독립문이 새로운 도안으로 채택됐다.<그림2>
▶최초의 한국은행권=1950년 6월 한국은행법에 의해 설립된 한국은행은 설립당시 통용되던 조선은행권과 일본정부의 소액 보조화폐를 승계했고 6ㆍ25전쟁중인 1950년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1000원(圓)권과 100원권을 발행했다.<그림3> 전쟁중 북한군이 조선은행권을 불법 발행함에 따라 1953년 1월까지 5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과 1대1로 교환,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정지시켰다.
1953년 2월15일 정부는 한국전쟁 여파로 인한 경제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했고 1953년 지폐 형식인 1000,100,10,5,1환권이 발행됐다.<그림4> ▶경제개발계획 이후 화폐개혁=1962년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화폐단위는 또다시 ‘환’에서 ‘원’으로 변경(10환=1원)됐다. 한은은 500,100,50,10,5,1원권 등 6종의 새로운 은행권을 발행했고<그림5> 1966년에는 10,5,1원 주화가 새로 도입됐다.
1970년대는 현행 액면체계가 확립된 시기로 한은은 1970년 100원화, 1972년 50원화를 발행, 은행권을 주화로 대체했고 국내 경제의 급속 성장에 따른 고액권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1972년 5000원권, 1973년 1만원권을 발행했으며 1975년 1000원권을 발행했다.<그림6> 이후 한은은 1982년 500원권을 주화로 대체하고 1983년 주화 종류별로 불일치되던 앞뒷면의 액면표시 등을 조정, 현용 화폐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그해 6월 이후 발행된 화폐에는 부분노출 은선, 광간섭무늬, 미세문자, 시변각잉크 등 위변조 방지요소가 강화됐다.
류정일 기자






























출처 : 竹馬故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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