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북경 6.25전쟁박물관 소장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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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날입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조인 55년을 맞아 북경 조선전쟁박물관이 소장하고있는 사진들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1950년 11월 27일 - 12월 1일 사흘간 장진호탈출작전이 전개되었읍니다.

온세상이 눈으로 덮혀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읍니다. 

칼날같은 바람과 강추위속에 장진호 동쪽 비탈길 4십리를 전투와 후퇴를 밤낮없이 계속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데 미병력 3000명중에 1000명이 전사했읍니다.

그때 빼앗긴 미제31보병연대 깃발이 북경 조선전쟁박불관에 걸려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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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4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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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5일 - 11월 5일 전개된 일차 공세

중공군은 제38군, 39군 그리고 40군이 일차공세를 해 왔는데 각군은 3만명의 병력으로 되어 있읍니다.

거의 보병으로 짜여저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군으로 총기 다루는 기술과 군순찰등 베테랑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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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말 중공군 42군 제124사단 사령관 린치앙이 혜산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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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일 일차공세때 후퇴하고 있는 미군병력을 앞질러가서 미군 장교를 생포하는 장면.

미 제2대대 B중대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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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 공세에서 8기병연대소속 미군 생포장면.

중공군은 9mm Sten Mark2 기관총과 일제 6.5mm 38구경 장총을 들고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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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5일 계천(Gyechon)에서 적을 기다리는 중공군 39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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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5일 운산(Unsan)에서 한국군 6사단을 공격하는 중공군 40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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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1차 공세, 1950년 10월과 11월사이에 용산봉에 있던 한국군 1사단을 공격하는 장면.

고장(Kojang)에 있던 한국군6사단 7연대와 운산(Unsan)에 있던 15연대는

거의 전멸 되다싶이 했읍니다. 장비와 무기도 다 빼앗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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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공세에서 중공군 제4군이 청천강전투에서 소민봉을 공격하고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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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중공군 제39군이 UN군 추럭 수십대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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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미32연대 1대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준비하고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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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중공군 80사단이 미군 32연대 1대대를 공격하고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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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80사단이 괴멸된 미1대대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앞에 미군시체가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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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미제57야전포대대와 D중대 그리고 15대대가 버리고 간 장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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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6일 제2차공세에서 평양에 입성하는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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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진설명에 의하면 미제24흑인보병연대에서 생포된 포로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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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독립문을 통과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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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8일 한강을 넘는 중공군, 3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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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2일  횡성에서 한국군 8사단을 공격하는 중공군.

중공군3개사단과 북한군2개사단이 횡성지역에 있던 한국군 8사단과 3사단을 포위했읍니다.

포위망을 뚫고 원주로 후퇴하는데 병력손실이 극심했읍니다.

2월 11일-13일 사이에 사상자는

한국군 3사단   ---------- 1,238             장비손실  105mm 곡사포   ----   28

       5사단      ---     1,141                       155mm 곡사포   ----    6

       8사단      ---     7,465                        탱크    -------       6

미군   2사단      ---     1,769                        개인화기   ----    1,200              

       7사단                190

       187공수연대  --       59

   합계                  1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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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에 있는 중공군 7.62mm Ruchmoy Pulemyot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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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영국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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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에 참가한 중국 공군.

적기 1대를 추락시키고 3대를 파손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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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4일 제5차공세때

중공군 40군이 미24사단을 포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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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공세때 진군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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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쓰여저있는 글을 읽어주고있는 중공군 장교.

허리에 방망이 수류탄을 차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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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T34 대포를 산정상에 숨겨놓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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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개성 정전회담장에서 나오는 북한군과 중국군.

위의 사진들은 중공군측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출처 : 竹馬故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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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도시의 옛 모습

▲ 1920년대 남대문통의 모습. 

▲ 1935년 청량리역 앞의 모습.

▲ 1910년 용산역의 모습. 

▲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현 서울)
그래도 제법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인다.
 

▲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의 보신각 주변.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

▲ 현재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
콜로니엄 양식의 건물들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길 오른쪽 붉은색 벽돌 건물은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
‘서울의 중심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 양쪽에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907년 3월에 찍은 광화문 거리. 

▲ 헤르만 잔더가 1907년 9월 무악재를 넘다가 찍은 사진.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 1925년의 서울역.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의 하나.
당시 경성과 부산을 오가던 특급 [아카즈키(あかづき=붉은 달)]
일등전망차의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일본 고관 및 친일 상류인사들이 주로 이용했다.
  

▲ 일제강점기 부산역사.

▲ 부산 세관의 모습.

▲ 1930년대 부산 초량 입구. 

▲ 1930년대 부산 청사의 모습.

▲ 1930년대 부산 연락선 출항 모습. 

▲ 1940년 부산 대청동.

▲ 일제강점기 대구역 앞 광장.

▲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 

▲ 일제강점기 대구시청의 모습. 

▲ 일제강점기 대구 본정통의 모습.

▲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시장의 모습. 

▲ 1940년대 대구역에서 바라본 중앙통의 모습. 

▲ 일제강점기 대구 원대통 거리.

▲ 인천의 일본인 거리 모습.

▲ 일제강점기 대전역의 모습.

▲ 일제강점기 대전역 주변의 모습.

▲ 1936년 9월 충청남도 대전군 회덕면 송촌리 쌍정당의 모습.

▲ 일제강점기 수원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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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꿈에본 내고향 

 

 

주한 미군 기지관리사령부

사진 150장 · 동영상 40여개 인터넷 공개

< 2009.  1.  6 >

 

 6·25전쟁 당시

미군 사진사들과 카메라맨들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다.

6일 미 군사전문지인 성조지(Stars and Stripes) 에 따르면,

주한미군 기지관리사령부(IMCOM-K)는

미 국방부 자료실로부터

6·25 전쟁 관련 동영상 40 여개와 사진 150장을 입수,

웹사이트에 올렸다.

 

기지관리사령부 공보관 에드워드 존슨씨는

이들 사진과 동영상들은

한국전과 그 이후 시기에 대한

역사적 정보의 보고(寶庫)

라고 말했다고 성조지는 전했다.

사진에는 전쟁 중 폐허로 변한 도시의 모습과

한국군·미군의 전투 모습 등이 다양한 형태로 담겨 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전장 시찰,

인기 코미디언 보브 호프와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미군을 위문하는 장면 등도 포함돼 있다.

 

동영상 가운데는 6·25 전쟁 격전지의 전투는 물론,

6·25전쟁 후

한국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

사진은

http://www.flickr.com/photos/imcomkorea/sets/72157607808414225/

 

에서, 동영상은

 http://kr.youtube.com/warinkorea

에서 볼 수 있다.

 

1.  men of the 24th Inf. Regt. move up to the firing line in Korea.

July 18, 1950. Breeding. (Army)

24 보병연대가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2.  July 24, 1950. Sgt. Riley. (Army)

철조망을 싣고 대구역을 출발하는 화물 열차. 

 

 

 3. July 25, 1950. Pfc. Tom Nebbia. (Army)

부상병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4.  July 29, 1950. Sgt. Dunlap. (Army)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 당한 병사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열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5.  July 30, 1950. Sgt. Girard. (ARmy) in Taegu, Korea.

대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모여 있다 

 

 

6.  July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해군 병사들이  배  난간에 기대어 쉬고 있다 

 

 

7.   Pusan, Korea. August 1, 1950. Cpl. Crowe. (Army)

3개의 BD-100A와 BD-96을 제임스가 조작하고 있다 

 

 

8.   August 6, 1950. Sgt. Dunlap. (Army)

상륙후 부두에서 쉬고 있는 미군 병사들 

 

 

9.   Sangju, Korea.

August 9, 1950. Pfc. Charles Fabiszak, Army. (USIA)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때 무전병이

신문을 보며 음식을 먹고 있다 

 

 

10. August 1950. INP. (USIA)

새로 부산항에 도착한 미 해병 대원들이 전선으로 이동하기 전의 모습 

 

 

11.  September 2, 1950. Sgt. Turnbull. (Army)

전사자 모습  

 

12.  September 3, 1950. Cpl. Thomas Marotta. (Army)

9보병연대 병사들과 M26 탱크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강에 대비히고 있다 

 

 

13.  September 4, 1950. S. Sgt. Walter W. Frank. (Marine Corps)

북한군포로의 모습, 그는 전쟁 포로라는

판을 목에 걸고  유엔법에 따라 관리되었다 

 

 

14.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해병대를 태운 상륙정이 인천 해변으로 향하고 있다 

 

 

15.  September 15, 1950. C.K. Rose. (Navy)

4척의 상륙정으로부터 병력과 장비가 내려지고 있다 

 

 

16.  September 15, 1950. S.Sgt. W. W. Frank. (Marine Corps)

사다리를 싣고 인천 상륙을 위해 상륙정에 승선한 해병들 

 

 

17.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에서 북한군을 소탕 중인 해병대 

 

 

18.   September 15, 1950. S.Sgt. W.W. Frank. (Marine Corps)

해병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인천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이 공격은 신속했으며 부상자는 놀랄 정도로 적었다 

 

 

19.  Brig. Gen. Courtney Whitney; Gen. Douglas MacArthur,

Commander in Chief of U.N. Forces; and Maj. Gen. Edward M.

Almond observe the shelling of Inchon from the U.S.S. Mt. McKinley,

September 15, 1950. Nutter (Army)

상륙 작전중 인천 해안을 살피는 맥아더 사령관 

 

 

20. September 16, 1950. Pfc. Ronald L. Hancock. (Army)

어린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다.

미해병과 한국 해병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 

 

 

21.  September 17, 1950. Kondreck. (Army)

Al jolson이 부산 운동장에서 공연을 하고있다

그는 자비로 공연을 했으며 한국에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22.  September 18,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북한군의 공격으로 김포 공항에서 파괴된 비행기가

1950년 9월18일 다시 미군의 손에 들어왔다. 

 

 

23.   September 18, 1950. Hunkins. (Army)

31연대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24.  September 18, 1950. Pfc. Francis Mullin. (Army)

신당동에서 미군에 잡힌 북한 소년병 둘이 신문을 받고 있다 

 

 

25.   September 19, 1950. Cpl. Dennis P. Buckley. (Army)

낙동강을 건너다 부상 당한 병사가 들것에 누워 있다 

 

 

26.   September 20, 1950. Lt. Robert L. Strickland  (Army)

시가전 중인 유엔군 Seoul, Korea.

 

 

27. September 26, 1950. S. Sgt. John Babyak, Jr. (Marine Corps)

             탱크가 포로 행렬을 따르고 있다 

 

 

 

28. September 27, 1950. Sgt. John Babyak, Jr. (Marine Corps)

미대사관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29. September 27, 1950. M. Sgt. E. T. Tarr. (Army) Chonju

북한군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신 옆에서 오열하고 있는 한국인 

 

 

30. October 7, 1950. Marks. (Army)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다리 위의 탱크 Suwon, Korea.

 

 

31. October 17, 1950. (Navy)

한국군 헌병이 무너진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2.  October 18, 1950. Sfc. Cecil Riley. (Army)

 서울의 주거지의 파괴된 모습.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33.  October 19, 1950. Sfc. Albert Guyette. (Army)

한강에 새로 건설된 철교에 처음으로

지나가는 기차 앞에서 62공병대 병사들과 사병들 

 

 

34. October 21, 1950. (Navy)

북한군의 통신 단절을 위한 청진에서 16인치포 일제사격, 

청진은 중국에서 39마일 떨어져 있다 

 

 

35. October 23, 1950. Capt. Bloomquist. (Army)

밥 호프의 위문공연을 보며 웃고 있는 병사들. Seoul, Korea.

 

 

36. October 24, 1950. PhoM3c. Burke. (Navy)

북한군을 향해 로켓을 발사하는 미해군 전투기 

 

 

37.  October 24, 1950. Sgt. Ray Turnbull. (Army)

유엔의 날에 한국의 부통령(이시영)이 만세삼창을 선창하고 있다  

 

 

38.  October 26, 1950. Cpl. Alex Klein. (Army)

위문 공연을 온 밥 호프와 함께 포즈를 취한 병사들 

 

 

39.  October 1950. United Nations. (USIA)

마산 근처의 ching pung면에서 피난 온 가족.

지금은 장생포에 있다

 

 

40.  November 1, 1950. Capt. C. W. Huff. (Army)

폐허가된 서울에서 할머니가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41.  November 1, 1950. Capt. F. L. Scheiber. (Army)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땔감을 찾고 있다

 

 

42.   November 8, 1950. Cpl. Robert Dangel. (Army)

한국의 여류시인 모윤숙이

어떻게 유엔군이 올때까지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산에 숨어 지냇는지 말하고 있다

 

 

43.  November 15, 1950. (Navy)

미해군 폭격기가 신의주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고 있다
 


44. November 17, 1950. Pfc. Fulton. (Army)

집없는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작은불을 쬐고있다. 

 

 

45.  November 20, 1950. Pfc. James Cox. (Army)

청천강에서 북한군 진지를 겨냥하고 있는 병사들 

 

 

46.  November 27, 1950. Cpl.Fred Rice. (Army)

 환자들을 위해서 조지 밀러가 피를  모으고 있다 

 

 

47.  December 3, 1950. Cpl. W. T. Wolfe. (Marine Corps)

부상당한 목사님이 전사한 해병들을 위해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48. December 7, 1950. Pfc. Donald Dunbar. (Army)

밥을 짖고 있는 세 병사 

 

 

49.  December 8, 1950.

부상 당한 병사들은 의족 의수를 어떻게 쓰는지

익숙해 질 때 까지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했다 

 

 

50.  December 11, 1950. Pfc. Emerich M. Christ. (Army)

 공산군의 맹공으로 흥남에서 철수하는 보급품과 장비들 

 

 

51.  December 13, 1950. (Navy)

UN군의 LST가 인천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52.  December 13, 1950. Cpl. Uthe. (Marine Corps)

전사한 미해병들의 무덤에서 추도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53.  December 13, 1950. Cpl. Uthe. (Marine Corps)

 전사한 미해병들의 무덤에서 추도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54.   December 16, 1950. Acme. (USIA)

투루먼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55.  December 19, 1950. (Navy)

북한의 피난민들이 흥남을 떠나고 있다.

 

 

56. December 19, 1950. (Navy)

 피난민들이 LST에 승선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피난민들은 우마차에서 짐을 내려 어선에 옮기고 있다. 

 

 

57. December 26, 1950. (Navy)

흥남으로 함폭 사격 중인 미해군 

 

 

 

58.   December 26, 1950. Cpl. McDonald. (Marine Corps)

전투기의 근접 지원 후 전진 중인 미해병 

 

 

59.   December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중공군의 맹공에 후퇴하는 미군 

 

 

60.   December 1950. INP. (USIA)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서

중공군의 철수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소련 대표 

 

 

61. 1950 (Marine Corps)

논을 따라 이동중인 북한군 포로들

 

 

62.  1950. Sgt. W. M. Compton. (Marine Corps)

 미해병이 지키고 있는 북한군 포로 

 

 

63.   1950. (USIA)

평양으로부터 철수하여 38선을 건너는 유엔군 

 

 

64. 1950. (Marine Corps)

참호에 있는 미해병 

 

 

65.  1950. Acme. (USIA)

캘리포니아 오크랜드에 있는

극동태평양사령부로부터 보급된

병대 탱크가 항구에서 내려지고 있다 

 

 

66.   1950. INP. (USIA)

수원비행장의 한국인들이 철수하는 동안

대전차포가 수리를 위해 트럭에 의해 이동되고 있다 

 

 

67. 1950. Black Star. (USIA)

국 캘리포이아 샌디에고에서

한 장교와 그의 아내가 자동차에 조용히 앉아서

장교가 한국으로 타고 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68. 1950. Washington Post. (USIA)

애기와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미군 병사

 

 

꿈에본 내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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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년전 (경성)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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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도의 서울 모습 ☆

 
손탁 호텔과(위) 손탁 호텔에서 바라본 1930년대 서울 (아래)

 
 
 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1930년대 초의 모습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 

  

화신 백화점



                       오른쪽 건물이 현 신세계 백화점


 
1936년 서울중앙우체국앞 인력거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 
 

 
 반도  호텔 
 

 
조선 철도 호텔
 



















 
  경성 남대문 정차장(서울역 전신)


 
  경부철도 개통식(경성역. 지금의 서울역)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박 문 사 
















 
장 충 단 공 원 



종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1930년대 초의 모습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서울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 



경성  법원 

 
남 대 문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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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5. 전화(戰禍) *****

 

다시 보기 어려운 처음 공개 귀한 자료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아~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새로운 공개되지않은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2. 금강철교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2004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2004 박도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2004 박도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2004 박도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2004 박도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2004 박도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2004 박도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2004 박도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2004 박도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2004 박도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2004 박도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2004 박도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2004 NARA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2004 NARA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2004 NARA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2004 NARA



▲ 1950. 8. 15. 피난민 행렬 ⓒ2004 NARA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稚뺙?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2004 NARA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2004 NARA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2004 NARA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 ⓒ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2004 NARA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2004 NARA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2004 NARA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2004 NARA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2004 NARA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2004 박도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2004 NARA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2004 NARA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2004 NARA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2004 NARA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2004 NARA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2004 NARA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2004 NARA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2004 NARA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2004 NARA



▲ 1950. 10. 1. 소공동 일대 ⓒ2004 NARA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2004 NARA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2004 NARA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2004 NARA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2004 NARA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 ⓒ2004 NARA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2004 NARA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2004 NARA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2004 NARA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2004 NARA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2004 NARA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2004 NARA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2004 NARA



▲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메모 :

 

 

 

이것이 일본의 실체 입니다..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

하드니 그래도 모자라

다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점령 할려고 합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끔찍한 사진이 많으니 심장이 약한분은 주의가 필요 합니다.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안녕하셨습니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64번째로 맞는 광복절이 되었습니다.

 

희미하게 잊혀저가는 그때 방송국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정리 해서 오늘 8편을 

보내 드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  시간 있으실때 보시고

더 보실분은 메일의 맨 밑부문 싸이월드를 클릭하셔서 8.15와

 광복 카테고리에 들어 가시면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더위에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날 되셔요.  

 

 

 

  

 

 8.15 광복과 방송 그때 그얘기 

 

 

일제강점기 기다리고 기다리던

민족의 소원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방송을 통해서 일본천왕 히로히토의

목소리로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그때  방송국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시던 분은 세분이 생존해 계십니다.

일제 강점기에 오랜 기간 우리말을 지켜 오시고

해방된 나라에서 두 번에 걸쳐 중앙방송국장을 지내신

 이혜구선생님(101세)과 방송역사 연구가이기도 한 유병은

선생님 (93세)  그리고 해방되던 다음날부터 방송기자가 되어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가 되신 문제안(90세)선생님이 그분입니다.

그날의 얘기를 육성으로 들려 주 실 분은 현재 문제안 선생님밖에

안계십니다.  올 64돐 광복절을 계기로 문제안선생님의 육성을

통해서 그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기록으로 보존한다는 마음

으로 8분으로  요약한  동영상을  제작했습니다,   문제안

선생님의  모습과 자료화면을 담았습니다.

 

제작에 힘을 기울여주신 방우회

 노익중  이사님에게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동영상은 전체화면으로 보실 수 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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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날 방송국에선, 최초의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165

 

1945년 광복의 날! 방송에 참여한 아나운서들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66

 

해방 후 최초로 산임된 전국방송국 책임자 

http://blog.daum.net/jc21th/17780170

 

일제 강점기 최후의 일본인 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045

 

동영상, 일제강점기 한국에 있던 일본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167

 

일제 강점기의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168

 

일제 강점기의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2 )

http://blog.daum.net/jc21th/17780169

  

[파일:2]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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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와 그림들
 

▲ 수확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점치는 풍경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점보는 풍경을 그린 것 같은데 복장이
한국인의 복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음.

 

 


 

                                                            ▲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 서울 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비인 현감 이승렬.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초이다.
1826년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 등 서해안 탐사 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례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이들의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818년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었다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홀 일해의 상륙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년 8월 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었던 나폴레옹을 방문하였다.

나폴레옹과 홀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피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아,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때 홀은 대답하기를,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

 ▲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산 등이 그려져 있다

.

 

 


 
▲ 소청도 주민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 것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 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어 있다. 

 

 


▲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 엿장수 소년들.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외국에서 발행된 엽서로 추산이라는 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 문화 속에서
심지어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란 비법도 유행했다.
전녀위남법이란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가문을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면
소박맞는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시절,
후사를 잊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 가운데 '임신 중여아를 남아로 바꾼다'는
이른바 전녀위남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이다.
가슴을 내놓는 행위는 젖먹일 아들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매우 흥미롭게 이러한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매우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 『코레아 코레아』1904)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 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리 위까지 녹색 장옷을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 듯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싸면서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하겠다는 가냘픈 조선 여인의 태도는
모슬렘이나 터키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거북스럽고 불필요한 의상을 조롱이나 하듯이 유방은 내놓고 다닌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  1901)
  
 
 

 
▲ 온돌,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다.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사진. 구들장(온돌)을 놓는 모습이다.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 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100년 전 우리 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이 '뜨거움'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상당히 편리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자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으나
얼마 후 추워서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오분 후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 안에 아주 배어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 때가 있어 그럴 때에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코레아 코레아 > 중 )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한 것이다.
그 곳은 열기와 벌레들, 빨래할 더러운 옷가지들과 '메주'라고 하는 간장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는 콩,
그리고 다른 저장물들로 가득 차 있어 누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은 남겨두고 있다.
밤이면 뜰에 밝혀진 너덜너덜한 등롱과 방의 등잔불이 손으로 더듬거리며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조명을 제공한다.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섭씨 33도 정도가 평균 온도이며, 자주 35.5도로 올라간다.
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897 )

조선 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 6척 높이에 넓이는 8척 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 써야 하는데도,
밖의 기온이 영하 15∼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돌방 밑에 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다란 돌을 덮어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 사람들이 빵을 구어 낼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방바닥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딱하다가는 엉덩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 곳 사람들이야 수백 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 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 써드의 『서울 견문록』중에서)

▲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있는 사진으로 '궁궐 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

 

 


 
▲ 미혼의 한국소년.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an unmarried korean boy'(미혼의 한국 소년)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고종황제.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

 

 



▲ 결혼한 한국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Korean married man'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음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제목은 'Woman employed in the palace'.

 

 


 
▲ 다양한 한국인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한 여인', '겨울
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 군인 모자(설명이 잘못된 듯)'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지게를 진 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지게를 진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것임.

 

 



▲ 황제의 시종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servants of the emperor'라는 설명이 붙어있음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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