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가장 멋진 대보름 잔치: 선구마을 줄끗기놀이


** 대보름이 코앞이고, 이번 주말에는 여러 지역에서 대보름 행사를 앞당겨 여는 곳도 많다. 그러나 신문에서도 포탈에서도 대보름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이다. 과거 설날보다 더 큰 명절로 여겨졌던 대보름이지만, 지자체나 관이 주도하는 대보름 행사가 아닌 자발적 마을 단위의 당산제나 풍어제는 그렇게 언론의 무관심과 대중의 외면 속에 사라져버렸고,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숭례문이 불탄 뒤, 문화재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휘발성에 가깝다. 이슈가 사라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외면해버린다. 그러고는 문제가 터지면 왜 그랬느냐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다들 지 잘났다고 떠들어대며 애국자가 된다. 평소엔 코딱지만큼의 관심도 없었으면서 일이 터지면 가장 관심있는 척한다. 언론도 그렇고 포털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위도 띠뱃놀이는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알아주겠는가. 유럽에서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라고 해도 그것을 외면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그냥 방치해버리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둘러보고 기록한 당산제와 풍어제는 연평도 풍어제, 위도 띠뱃놀이, 제주 칠머리당굿을 비롯해 부안 우동리 당산제, 돌모산 당산제, 고창 무림리 당산제, 남해 화계 배선대놀이, 선구마을 줄끗기 놀이까지 모두 8곳이다. 해마다 대보름이면 길을 떠나 당산제와 풍어제를 만난 셈이다. 아래의 기사는 남해 선구 줄끗기놀이를 보러 간 아주 간략한 여행의 기록이다. **   

 

 

선구마을 인근의 구미포구의 저녁 풍경. 포구의 방풍림이 멋진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남해 선구 줄끗기놀이를 보자고 하루 전에 남해에 도착했다. 선구마을 인근의 구미포구에는 일몰이 끝나 황홀했던 하늘이 파란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다. 구불구불 아무렇게나 뻗어 올라간 팽나무와 느티나무(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모두 365그루란다)가 막다른 바닷가에 그려내는 비정형의 실루엣을 보며 나는 오래오래 바닷가에 서 있었다. 마치 한 그루 사내처럼. 외로운 민박집에 짐을 풀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꺼내든다. 나는 이 책을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세 번 다 다른 느낌이다.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선구마을 줄끗기놀이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에 앞서 당산나무 앞 마늘밭에 옹기종기 모여 잠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보이는 것, 냄새, 감촉, 맛, 듣는 것, 지성---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아직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았지만, 성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밤은 대지로부터 솟아 나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책에서 그는 인간의 일생을 ‘짤막한 섬광이지만,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카잔차키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아내 헬렌에게 유언처럼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못다한 말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가 연필로 쓴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쓴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15분씩만 구걸해서라도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의 신은 그 약간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애당초 시간이란 인간의 몫이 아니며, 우리에겐 언제나 시간이 없다.

 


선구마을 제주들이 당산제를 지내고 나서 밥무덤 덮개돌을 열어 밥을 묻고 있다.

 

이른 아침에 1024번 해안도로를 달려 화계리에 먼저 도착했다. 선구 줄끗기놀이에 앞서 화계 배선대놀이를 보기 위함이었다. 둘 다 오랜 동안 전해져 온 자발적인 대보름 축제다. 화계 배선대놀이는 배선대 비석 앞에서 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높이 솟은 솟대 위에 세 마리의 오리가 앉아 있고, 솟대만큼 높이 솟은 깃대에는 오방기가 펄럭인다. 풍물놀이패가 한바퀴 제단 앞을 돌고 나면 한복을 차려 입은 제주들이 절을 올리고, 이어 항구에서 뱃고사를 지낸 뒤, 달집을 태운다. 배선대놀이의 절정은 뱃기를 꽂은 배들의 해상 행렬이지만, 이날은 파도가 높아 취소가 되었다. 날은 춥고 간간 눈발이 뿌렸으며, 바람은 점점 거세게 돌진해오는 날이었다.

 


제례용 밥을 묻어두는 밥무덤. 이 속에 든 밥은 세상을 떠도는 모든 굶주린 영혼을 위한 밥이다.

 

화계를 떠나 도착한 남면 선구마을에서는 이제 막 선구 줄끗기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줄끗기놀이에 앞서 한복을 입은 아낙들과 어르신들은 마늘밭 양지에 쪼그려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줄끗기놀이는 선구마을 뒷산 당산나무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산제가 끝나면 밥무덤에 제례 음식을 묻고, 고싸움에 나설 숫줄(북쪽)을 매고 마을로 내려간다. 이 모습이 실로 장관이다. 마을에 도착하면 이미 다른 당산에서 고사를 지낸 뒤 대기하고 있던 암줄(남쪽)이 포구앞 해변에서 숫줄과 만나 어우러진다. 그리고는 해변 자갈밭에서 한바탕 고싸움을 한다. 고싸움이 끝나면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 때 고와 고 사이에 비녀목을 끼워 남북(암수)이 서로 자리를 옮겨가며 줄을 당긴다. 여기서 북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남쪽이 이기면 풍어가 든다고 하는데, 선구마을이 어촌이다보니 남쪽이 이겨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선구마을 포구 옆 바닷가에서 북쪽 마을과 남쪽 마을이 서로 편을 갈라 고싸움을 한 뒤,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 선구마을 줄끗기(줄다리기의 의미)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줄을 매고 당기는 사람만도 양쪽이 모두 100여 명이 넘고, 마을의 참여자와 외지의 구경꾼까지 합하면 수백여 명에 이른다. 이웃의 여러 마을에서도 함께 참여하기 때문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곧바로 달집 태우기에 들어간다. 풍물패는 달집이 다 사그라들때까지 달집 주위를 돌며 풍물을 친다. 사람들도 너나없이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제껏 나는 이토록 신명나고 자발적인 마을 축제를 본 적이 없다. 축제가 모두 끝나자 해변에는 작은 잔치상이 차려진다. 삼삼오오 그냥 자갈밭에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눠먹는다. 나도 술 한잔에 떡과 고기와 생선으로 배를 채웠다.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백명이 다함께 둘러앉아 보름 음식을 먹는 풍경은 줄끗기놀이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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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나무다리, 섶다리

 


남대천 어성전 가는 길의 멋진 나무다리. 다리가 끝나는 우묵한 곳에 집 한채 있다.

 

몇 며칠 폭설 내려 오던 길 다 끊겼다. 산간에 들이박힌 집들도 저마다 눈을 한 키만큼 이고는 납작하게 짜부러졌다. 아랑곳없이 눈발은 자꾸 날려 산도, 마을도, 하늘도 저리 분간 없이 하얗다. 폭설로 뒤덮인 양양 남대천을 따라 어성전 가는 길. 어성전을 코앞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나무다리가 한 채 눈 내리고 얼음 덮인 남대천을 가로지른다. 이 멋진 나무다리는 개울에 자연적으로 솟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여러 개의 통나무를 지그재그로 놓아 여러 개의 나무다리를 하나의 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그리고 나무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조금 더 우묵하게 들어가면 외딴 집이 한 채 계곡에 들어앉아 있다. 그곳으로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이 다리는 저 외딴 집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인 셈이다. 나는 갑자기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추억의 나무다리를 몇 번이나 오가며 때늦은 외로움과 소통해본다.

 


평창 뇌운계곡 뇌운리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다리.

 

여기서 남대천을 따라 더 올라가면 법수치 계곡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에서도 해마다 겨울이면 질러놓는 외나무다리를 만날 수 있다. 이 외나무다리는 계곡의 중간쯤에 버팀돌을 쌓아놓고 양쪽에 깎아서 만든 두 개의 통나무를 질러놓은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통나무가 끝나는 곳에는 다시 징검다리를 몇 개 놓아 외나무다리를 연결해 놓았다. 물론 비가 많이 올 때면 떠내려가기 십상이어서 해마다 서너번씩 다리 놓는 일을 반복할 때가 많다. 내가 만난 또 하나 아름다운 나무다리는 평창강 상류에서 만난 뇌운계곡의 나무다리다. 뇌운계곡 뇌운리에서 볼 수 있는 이 나무다리는 외지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의 다리처럼 계곡의 상류를 가로지른다. 뇌운리 나무다리는 통나무를 여러 개 잇대어 놓은 다리로, 그 길이가 약 30여 미터에 이른다. 그러나 하루종일 다릿목에서 기다려보아도 이 나무다리를 건너는 이 아무도 없다. 너무 적막해서 쓸쓸하고, 쓸쓸해서 더 아름다운 나무다리에 나는 외로운 발자국 몇 개를 보태고 왔다.

 


판운리에서 볼 수 있는 섶다리 풍경.

 

그 옛날 물폭이 그리 넓지 않은 하천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다리가 바로 나무다리와 섶다리였다. 현재 섶다리는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에 있는 섶다리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볼만하다. 판운리에서는 과거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버드나무를 베어다 다릿목을 세운 뒤, 솔가지를 위에 얹고, 뗏장을 떼다 흙과 함께 덮어 해마다 섶다리를 놓았다. 본래 섶다리는 이듬해 장마가 지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마련이지만, 판운리에서는 장마 이전에 다릿목과 발판을 거두었다가 날이 추워지면 다시 내어다 썼다. 그러나 강 위쪽에 새로 시멘트다리가 생겨나면서 섶다리는 한동안 사라졌다가 몇 년 전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시금 부활하게 된 것이다.

 


지네발처럼 얼금설금 다릿목을 세운 판운리 섶다리.

 

사실 오래 전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 섶다리는 이웃 세상을 넘나드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섶다리라는 것이 여기저기 세운 버팀목에다 얼기설기 나무와 솔가지를 얹은 뒤, 뗏장을 덮은 것이라 그리 튼튼하거나 폭이 넓지 못했으니, 장날 술 한잔 걸치고 오는 날이면 누군가는 어김없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기곤 하였다. 시멘트 다리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섶다리는 강마을 사람들의 통로 노릇을 해온 대표적인 다리였다. 이런 섶다리는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선의 동강과 곡성의 섬진강 등에서도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영월의 판운리와 주천리 등에만 겨우 남아 있다. 추억의 풍경으로 남은 나무다리와 섶다리! 한번 놓으면 끄덕도 없는 시멘트 다리의 뻣뻣함이 어찌 나무다리와 섶다리의 곰살가움에 비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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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의 풍어제 ‘위도 띠뱃놀이’ 명맥 끊길 위기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위도 대리 선착장에서 띠배를 띄우기에 앞서 용왕제가 펼쳐지고 있다. 

 

설날을 하루 넘긴 음력 정월 초이틀,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행 막배에 몸을 싣는다. 정월 초사흗날에 열리는 위도 띠뱃놀이를 보기 위해 6년만에 다시 위도로 간다. 뒤늦게 도착한 띠뱃놀이 전수관에서는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띠뱃놀이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74)와 내일 원당굿과 용왕굿을 펼칠 2명의 ‘당골네’가 띠뱃놀이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담을 나누고 있었다. 선지국에 밥을 말아 게눈 감추듯 저녁밥을 해치우자 방안에서는 곧바로 이종순 씨와 당골네의 ‘리허설’ 공연이 시작된다. 내일 열릴 굿판에서 부를 무가를 장고와 징소리에 맞춰보려는 것이었다. 소리가 시작되자 밖에 나갔던 구경꾼들이 하나둘 들어 방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띠뱃놀이에서 온갖 궂은 잎을 도맡아 하는 원화장.

 

2시간에 가까운 리허설이 끝나고서야 띠뱃놀이 전수관은 조용해졌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자정 무렵 원화장이 전수관 앞 우물에서 목욕재계를 했으나, 이제 이 의식은 생략된 듯하다. “옛날에넌 원화장 뿐만 아니라 화주와 부화장을 비롯해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목욕재계를 했어요. 목욕을 허고 나면 소변을 볼 띠도 손으로 못만지요. 나무를 깎아서 그것을 받치고 소변을 봤어요. 화장실을 대녀오면 목욕도 다시 해요.” 띠뱃놀이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뭍에서 장을 봐온 날부터 ‘제만집’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나 어릴 때는 전수관이 제만집인디, 이래 금줄을 치잖어요. 금줄을 친 이상 여자덜은 들어오덜 못해요. 여자가 임신헌 남자도 오덜 못허고, 타 부락 사람덜 아무도 못들어와요. 애럴 날 띠가 된 여자는 딴 마을로 가야 해요. 옛날에 한번 화주로 간 분이 메나리가 애기를 가진 줄 모르고 갔다가 용왕밥 느으러 갔다가 바다에 떨어져 죽다 살아난 적도 있어요. 음식을 만들 띠도 맛을 못봐요, 낙태한다고. 그래서 지금도 이 음식을 안 먹는 사람이 많어요. 전에는 화주도 돌아가민서 맡았어요. 어린 나이에도 생기만 맞으면 화주를 맡았어요. 화주를 맡으면 여기서 밥을 해먹고, 여기서 지내야 해요.”

 


원당굿에 앞서 축문을 외는 화주 장영수 씨.

 

이튿날 띠뱃놀이 준비는 새벽 댓바람부터 시작되었다. 전수관에서 잠을 청하던 나는 아침밥 준비를 위해 새벽에 들이닥친 마을 아주머니들로 인해 일찌감치 전수관을 나와 선착장으로 나섰다. 새벽 6시. 한시간쯤 희부윰한 선착장을 떠도니, 드디어 짙은 해무를 헤치고 해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전수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침 8시 30분. 아침 식사를 끝낸 마을 사람들이 드디어 풍물을 치며 띠뱃놀이의 서막을 울렸다. 띠뱃놀이의 차례는 원당굿, 주산돌기, 용왕제, 띠배 띄우기의 순으로 진행되지만, 지금은 마을을 한바퀴 돌며 풍물을 치는 주산돌기는 마을 들머리에 세운 장승에 예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원화장이 제물을 짊어지고 원당에서 내려와 용왕제가 열리는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다.

 

원화장과 부화장이 지게에 제물을 짊어지고 앞장서자 그 뒤를 당골네(무당)와 화주, 선주들과 농악대가 장고와 쇠를 치면서 뒤따르고, 이어 오방기와 뱃기를 든 사람들이 뒤따라나선다. 그러나 띠뱃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족해 바깥에서 구경온 사람들까지 총동원해 뱃기와 짐을 나른다. 원당이 있는 산 꼭대기까지는 몇 번이나 다리쉼을 해야 할 정도로 제법 가파른 비탈길이다. 더구나 눈이 수북히 쌓여 원당 오르는 길은 한발 올라서면 한발이 미끄러졌다. 그걸 미리 알고 마을 사람들은 새끼줄을 준비했다. 신발에 새끼줄을 친친 감으면 아이젠보다 가볍고 훌륭한 눈신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9시가 넘어서야 산꼭대기 원당에 도착했다. 띠뱃놀이 보존회장(전수자)인 장영수 씨는 서둘러 제상을 차리고, 기능보유자인 이종순 씨는 두껍게 꿴 돼지고기를 사방 벽에 내걸었으며, 당골은 명주천을 꺼내 매듭을 지어 벽에 내걸었다. 곧이어 전수자(화주)의 축문외기와 당골의 축수로 원당굿이 시작되었다.

 


대리 선착장에 만들어놓은 띠배. 용왕제가 끝나면 이 배를 바다 멀리 끌고 나가 띄어보낸다.

 

당 안에는 모두 일곱 신상을 모셔 두었는데, 각각의 모습은 산신상, 원당 마누라상, 본당 마누라상, 옥적 부인상, 아가씨상, 수문장상, 장군선왕상이다. 원당굿은 본래 일곱 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석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흥겹게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며, 술판을 벌인다. 당굿의 절정은 선주굿으로, 굿을 하는 동안 당골은 선주들에게 쌀을 집어 손바닥에 쥐어 준다. 이 때 선주는 쌀의 갯수가 짝수면 입안에 넣고, 홀수가 되면 버리고 다시 쌀을 받아 짝수가 되면 입안에 넣는데, 그 때마다 무당은 쌀을 받아든 선주가 어떤 신이 들었는지를 일러 준다. 예를 들어 “아무개, 장군선왕이야” 또는 “수문장상이야” 하는 식이다. 이렇게 일곱 석의 굿이 끝나면 다시 원화장을 앞세워 마을로 내려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원화장이 원당에서 내려올 때면 산 위에서부터 뒹굴면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가파른 비탈길에서 뒹굴어도 이제껏 단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신이 시키는 일이라 여기고 있다.

 


저녁 무렵 부안이 격포항에서 위도로 향하는 뱃길에서 바라본 풍경.

 

영하 9도에 폭풍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리는 날씨에도 당굿은 무사히 끝나 마을로 내려오니, 어느덧 점심 때가 다 되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이제 용왕굿과 띠배띄우기 의식이 기다리고 있다. 선착장에는 이미 띠배가 만들어져 용왕굿(용왕제)판을 지키고 있다. 이 띠배는 원당에서 굿이 벌어지는 동안 마을에 남은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데, 보통 길이는 3미터, 너비가 2미터 정도 된다. 이 띠배에는 반드시 다섯 개나 그 이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태우며, 이는 선원 또는 시종을 뜻하는 것으로, 용왕신을 달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 허수아비는 각각 동서남북의 방위신과 중앙신을 뜻하기도 하는데, 각각의 허수아비에는 동방청룡장군, 남방주작장군, 중앙황제장군, 서방백호장군, 북방현무장군이라 쓴 깃발이 달려 있다.

 


띠배를 끌고 바다로 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배 위에서 신명나게 풍물을 치며 논다.

 

이에 대해 부안의 향토사학자 유종남 씨(70)는 “허수아비는 신을 달래는 의미요, 깃발은 소원성취를 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순 씨는 띠배에 태우는 허수아비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 주었다. “옛날에 이복동 씨가 이장할 띤데, 60년댄가 그래요. 띠배를 해서 내보냈는데, 그 날 이장 꿈에 띠배가 도로 이 앞에 와 있드래요. 사람 한 사람을 안 싣고 와서 다시 왔다 그러면서. 실제로 새벽에 나가보니까 진짜 띠배가 이 앞에 와 있는데, 허수아비를 보니까 네 개밖엔 없드라는 거요. 그래 하나를 더 만들어 보낸 적이 있어요.”

 


드디어 모선이 띠배를 끌고 먼바다로 나가 띠배를 띄어보내면 띠뱃놀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띠배를 앞에 두고 용왕제가 시작되었다. 먼저 무당이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 마을 사람들이 따라서 일제히 절을 한다. 계속해서 무당의 사설과 춤이 이어지며, 중간중간 바깥 손님들을 불러 절을 시킨다. 눈발은 거세게 몰아쳤다가 그치고, 눈발 사이로 반짝 햇볕이 나기도 한다. 용왕굿이 끝나면 용왕에게 바칠 회식밥을 바다에 던지는 의식이 열리는데, 이 때 뒤따르는 사람들은 메김소리에 맞춰 흥겨운 ‘가래질 소리’를 따라부른다.


     어낭청 가래야     

이 가래는 뉘 가랜가

김첨지네 가래라네

어낭청 가래야

황금같은 내 조기야

어디 갔다 인제 왔나

어낭청 가래야

 


위도의 유일한 절집인 내원암에 걸린 초승달 풍경.

 

‘가래질 소리’와 함께 회식밥 노놔 주는 의식까지 다 끝나면, 물때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띠배를 띄우게 된다. 모선이 띠배를 매어 선착장을 출발하자 뒤따라 종선이 따라붙는다. 모선은 띠배를 맨채 먼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띠배 안에는 허수아비와 오방기뿐만 아니라 용왕밥을 주려고 만든 회식밥과 갖가지 소원을 적은 기원문도 함께 싣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띠배를 통해 모든 액을 바다 멀리로 실어보내는 것이다. 모선이 띠배를 끌고 오는 동안 배 위에서는 계속해서 풍물판이 벌어진다. 드디어 띠뱃놀이의 절정이다. 먼바다에 이르러 모선은 마을 사람들의 소원과 기원을 담은 띠배의 끈을 풀어버린다. 출렁출렁 띠배는 저 혼자 먼바다로 떠간다. 이로써 하루종일 이어진 띠뱃놀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폭설로 뒤덮인 위도 내원암 풍경. 그저 적막하다.

 

위도 띠뱃놀이가 소중한 것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어제의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도의 띠뱃놀이는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위도의 띠뱃놀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조차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손꼽는데, 정작 우리 땅에서는 모르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6년 전 처음 띠뱃놀이를 취재하러 갔을 때,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한 대학원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동아시아 풍어제>를 주제로 한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서 위도까지 왔다고 했다. 전수관에서 나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기도 한 그는 1박 2일 동안 위도의 띠뱃놀이 전 장면을 캠코더에 담으며, 매순간 감격스러워했다. 그에 따르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학의 인류학과에서는 위도 띠뱃놀이가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위도의 띠뱃놀이가 외국에서 도리어 ‘최고의 풍어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때의 기억으로 한번 더 나는 띠뱃놀이를 기록하러 위도를 방문했던 것이다.

 

폭설 맞은 겨울의 배롱나무. 뒤틀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6년 전에 왔을 때에도 풍어제가 끝나고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끊긴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번에도 풍어제가 끝나자 폭풍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6년 전만 해도 나는 배가 끊겨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번에는 이참에 위도를 찬찬히 한 바퀴 둘러보자고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나는 조선시대 관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리도 구경하고, 섬의 유일한 절집인 내원암도 둘러보았다. 내원암은 조선 숙종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절집은 섬의 가장 깊숙한 산중에 자리해 있다. 내원암 추녀끝에 걸린 풍경은 여느 절과는 달리 물고기가 아니라 나무 초승달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한낮에도 내원암 추녀에는 언제나 초승달이 떠있다. 암자 앞마당에는 용틀임하듯 가지를 비틀며 멋지게 자란 배롱나무도 몇 그루 만날 수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풍경. 아빠가 딸을 태운 눈썰매를 끌어주고 있다. 

 

위도의 정금 해수욕장은 장동건이 출연했던 영화 <해안선>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이곳에서 <불멸의 이순신>을 찍기도 했다. 본래 위도는 우리나라 3대 어장 가운데 하나인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영광굴비(조기)의 산지였다. 위도라는 이름은 섬이 고슴도치 모양이라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위도가 되었다. 옛날에는 유배지로도 이용되었으며,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위도라는 견해도 있다. 상상 속의 율도국. 그러나 현실의 율도국에서 펼쳐지는 띠뱃놀이는 최근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띠뱃놀이를 전수하려는 젊은이도 없을뿐더러 이제껏 띠뱃놀이를 지켜온 어르신들은 하나둘 저 세상으로 떠나고 있다. 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떠나고, 맥을 이을 사람들은 없다. 이것이 세계의 인류학자들이 아시아 최고의 풍어제로 손꼽는 띠뱃놀이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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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산중 최고의 집, 너와집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은 투막집 형태의 너와집.

 

너와집은 과거 화전민 마을이나 산중마을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기와집을 제외한 옛집 가운데 최고의 집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 땅에 남아 있는 너와집은 문화재로 지정된 삼척 대이리와 신리, 울릉도 나리분지에 모두 4채, 오대산의 암자 2채 등 6채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정선 숙암리 단임마을에 남아 있던 너와집 한 채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현재 천막을 씌워 놓았다. 이밖에 돌너와를 얹은 돌너와집은 평창 이곡리와 정선 유평리 등 전국적으로 약 10여 채가 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너와집과 돌너와집은 모두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너와 100년, 이왕이면 너와

 


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너와집, 대이리 너와집.

 

흙으로 빚은 것이 기와라면 나무를 쪼개어 만든 지붕재료가 너와다. 옛날 논이 흔하지 않은 산간마을이나 화전민촌에서는 볏짚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나무를 쪼개어 만든 널을 지붕에 얹는 너와집이 흔했다. 강원도에서는 너와집을 너새집, 능에집, 느에집이라고도 부른다. 너와 100년, 굴피 20년이라는 말이 있다. 기와지붕은 10여 년만 손을 보지 않아도 지붕에 잡풀이 돋고 이끼가 끼어 쇠락하지만, 너와는 몇십 년이 지나도 풀이 자라거나 이끼가 끼지 않는다. 때문에 산간에 살던 화전민이나 일반 촌부들은 집 가운데 너와집을 최고로 쳤다. ‘이왕이면 너와’라는 말도 있었거니와 구전되는 노래에는 ‘집이사 많다마는 너와집이 일품이라’고까지 하였다.

 


빈집으로 남은 신리 너와집.

 

너와집 주인은 해마다 몇 짐찍 나무를 준비해 두었다가 썩거나 비가 새는 부분은 그때그때 바꾸어 주었다. 너와는 송진이 많은 암소나무를 주로 골라썼는데, 소나무 중에서도 송진이 많아 벌건색을 띠는 것이 더 오래 간다고 한다. 알려져 있듯 너와는 질이 좋은 소나무나 전나무를 길이 60~70센티미터, 너비 30~40센티미터, 두께 5센티미터 안팎 정도로 쪼개 지붕에 차곡차곡 얹는다. 혹여 나무이기 때문에 쉬 뒤틀리고 사이가 떠서 빗물이 스며들 것 같지만, 나무는 젖으면 오히려 차분히 퍼지고 가라앉기 때문에 생각만큼 물이 새지는 않는다.

 


너와집으로 된 신리의 물레방앗간.

 

애당초 너와조각을 톱으로 자르지 않고 도끼로 쪼개는 까닭도 물이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만일 톱으로 자를 경우 나무는 섬유질이 파괴돼 쉽게 빗물이 스며들게 된다. 너와를 얹을 때는 서까래 위에 중간중간 너스레(지붕에 이리저리 걸쳐놓는 막대기)를 질러놓고, 그 위에 나무를 쪼개어 만든 널을 비가 새지 않을 만큼 포개어 얹는다. 그런 다음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군데군데 무거운 지지름돌(눌림돌)을 얹어놓는다. 눌림돌을 놓지 않을 경우 너와는 쉽게 바람에 날아갈 것 같지만, 너와 한 장 한 장은 드러난 면보다 2~3배의 길이가 뒷목에 끼어 있어 쉽사리 빠지거나 날려갈 염려는 없다. 다만 보다 확실하게 너와를 고정하고, 나무의 뒤틀림을 줄이기 위해 눌림돌을 얹는 것이다.


너와집, 씨가 마르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와집으로 손꼽히는 오대산 서대 수정암 풍경.

 

본래 너와라는 것이 나무조각을 꿰맞춰 놓은 것이라서 조각마다 아귀가 딱딱 맞지 않아 간혹 처마 밑이나 부엌에서 올려다보면 나무 틈새로 하늘이 보이기도 했는데, 틈새 많은 집치고는 그다지 춥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겨울에는 대개 눈이 와 지붕에 쌓이므로 쌓인 눈이 오히려 보온막 노릇을 하여 찬바람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반면 여름에는 지붕의 틈새가 통풍을 도와 집안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부터 나지막하게 지은 너와집의 구조도 추위와 습기에 잘 견딜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대산 수정암 너와집에 걸린 목탁과 너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늘.

 

너와집은 주로 산간 지역에서 지어졌는데, 이는 귀하고 비싼 기와 대신 산간에서는 나무가 흔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물론 재료를 구하기 쉽다고 해서 너와집이 쉽게 지을 수 있는 집은 결코 아니었다. 나무를 잘라 일일이 도끼로 쪼개는 일만 해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쪼갠 너와를 지붕에 얹을 때도 널과 널이 딱딱 맞물리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삼척 동활리 쓰러져가는 너와 헛간채의 이끼 덮인 지붕.

 

과거 너와집은 산간에서 최고의 집으로 통했으며, 화전민정리사업과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굴피집과 더불어 대표적인 산중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삼척과 정선을 포함해 전국에 남아 있는 너와집은 이제 몇 채 되지 않는다. 일반 서민들에겐 최고의 집이었지만, 양반문화에 길들여진 역대 정권의 눈엔 이것이 ‘보기 흉한 집’에 다름없었으니, 단지 지붕개량 대상일 뿐이었고, 폐기처분의 대상일 뿐이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너와집이 씨가 마른 것도 그 때문이다.


물고기 비늘을 이어놓은 듯 아름다운 돌너와집

 


정선 신월리에 있는 돌너와집.

 

돌기와를 지붕에 얹은 집도 있다. 이것을 돌너와집이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 돌지붕집, 돌기와집, 돌집, 돌능에(애)집, 돌능와집 등으로도 불린다. 돌너와집은 얇게 쪼개지는 성질을 가진 청석과 조석이 많이 나는 고장(강원도 평창, 정선, 충북 보은, 영동, 청원 등)에서 주로 볼 수 있었다. 돌너와집은 가까이에서 보면 손바닥만한 돌판에서부터 구들장만한 것까지 마치 지붕에 고기비늘을 이어놓듯 얇은 돌판을 서로 맞물려 놓은 모습인데, 멀리에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물고기 등짝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연출한다.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놓은 돌너와집의 지붕.

 

돌너와를 올리는 방법은 이러했다. 용마루를 진흙으로 이겨 올리고 흙이 마르기 전에 사방 1~2자 짜리 돌기와를 진흙에 박아놓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작은 돌로 이어서 내려가다 처마끝 부분에 또다시 1~2자 크기의 돌을 이어 물받이가 되도록 했다. 여름 장마 때 심한 비바람 속에서도 물이 쭉쭉 빠져 처마 밑으로 떨어지게 되고 중심부분의 작은 돌들은 상층부와 하층부의 큰돌에 힘입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돌너와집 지붕에 올리는 돌은 무게로 따지면 대략 4~5톤에 이른다고 하며, 그 크고 작은 돌판의 수도 약 1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게에도 돌너와집은 한번 이어 놓으면 20년까지는 손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때 농촌에서는 돌너와집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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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옛집 1호 굴피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60년된 빈지골 굴피집 풍경. 왼쪽에 짚이엉을 덮은 것은 뒷간채이다.

 

지난 10년간 <옛집기행>이란 책을 내기 위해 내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옛집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땅에서 그 수가 가장 적게 남은 옛집이 바로 굴피집(살림집 3채, 굴피 통방아 1채)이었다. 아울러 사라지기 전에 보존대책이 가장 시급한 옛집 또한 굴피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굴피집은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남은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 한 채와 굴피 통방아(중요민속자료 제222호)가 유일하다. 나머지 두 채의 굴피집은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함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면 집을 양도하거나 재산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지금의 문화재 정책이 집주인을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굴피집, 결국 사라지는가


굴피집은 너와집이나 샛집과 더불어 옛날 산중에서 흔하게 지어진 집이다. 굴피는 한번 지붕을 이어 놓으면 그럭저럭 10년은 버틴다. 10년쯤 되면 다시 위아래를 돌려놓으면 되었으니, 이래저래 20년은 거뜬하다는 얘기다. 지붕에 덮는 굴피는 한 장이 보통 너비 세자(약 1미터), 길이 네자 정도인데, 14평 정도를 덮으려면 무려 지게로 스물다섯 짐(무게로 1.5톤 정도)이나 필요하다. 굴피 채피는 나무에 물이 오르는 처서(處暑) 쯤에 하며, 20년생 정도의 참나무를 벗겨서 쓴다. 처음 벗긴 참나무 껍질은 나무 모양으로 오그라들어서 얼마 동안(두어 달에서 1년) 돌멩이로 눌러서 반듯이 펴지게 한 다음 지붕에 앉혔다.

 


굴피집 추녀에서 낙숫물 떨어진다.

 

굴피를 지붕에 앉힐 때에는 밑에서부터 쌓아올려야 흘러내리지 않는다. 본래 지붕에 덮는 굴피는 눈이 많이 오면 밀려 내려오기 때문에 보통 굴피집(투비집)을 지을 때는 처마를 땅에 가까이 닿게 한다. 또 굴피가 날려가거나 흘러내리지 않게끔 5~7자(2미터 안팎) 정도 되는 지지름대(굴피 위에 질러놓는 통나무)를 질러놓고, 중간중간 20센티미터 안팎의 지지름돌(눌림돌)을 얹어놓는다. 굴피는 껍질 안쪽이 여러 켜의 해면질 코르크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샐 염려가 전혀 없으며, 바람을 잘 통하지 않으므로 보온과 흡음(吸音), 밀폐에 효과적인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비늘처럼 이어놓은 굴피지붕의 모양새는 아름답기로 치면 집 가운데 으뜸이다.


하지만 요즘은 삼림자원보호와 입산금지 등의 규제로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굴피를 채피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결정적으로 굴피집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굴피를 벗겨낸 나무는 몇 년 후 벗긴 자리에 다시 껍질이 생겨나므로 굴피를 벗겨냈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법은 없다. 또한 굴피집도 몇 채 없으니, 굴피집 주인에게만이라도 굴피 채피를 허가한다면, 삼림에 피해를 줄 정도는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굴피집이 남아 있는 곳은 삼척의 대이리와 신리, 대평리 사무곡, 양양의 빈지골 등이다. 삼척의 미로면 내미로에도 굴피집이 한 채 있었지만, 몇 년 전 지붕을 개량해 버렸다. 과거 대이리에는 20여 채의 굴피집이 있었지만, 화전민정리사업과 지붕개량사업 등으로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한 채만이 남았을 뿐이다.  


60년 된 굴피집의 원형 그 자체: 빈지골 굴피집


양양군 서면 남대천을 따라가 만나는 내현리 빈지골에 굴피집이 한 채 남아 있다. 이 곳의 굴피집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굴피집 가운데는 옛 굴피집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집이다. 물론 집안 천장에는 벽지를 바르고, 나무 굴뚝이 플라스틱으로 교체되긴 하였다. 하지만 굴피를 여러 겹 얹고 그 위에 돌멩이와 나무를 눌러놓아 바람에 날려가거나 눈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솜씨가 한결 정겨운 ‘옛멋’을 풍긴다. 부엌으로부터 삐죽 삐져나온 외양간도 역시 굴피를 해 이었다.

 


빈지골 굴피집 부엌에 걸린 성주 신체(위)와 지붕의 눈이 녹아 낙숫물이 떨어지는 굴피집 풍경(아래).

 

굴피를 채피할 때는 참나무를 생나무 상태에서 빙 둘러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벗겨낸 껍질은 한동안 돌멩이로 눌러서 펴지게 한 다음 지붕에 물고기 비늘을 잇듯 앉힌다. 이렇게 앉힌 굴피지붕에는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지지름돌과 지지름대로 한번 더 눌러놓는다. 현재 빈지골의 굴피집 부엌에는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도 모셔놓고 있다. 부엌과 안방 사이의 대들보에 걸린 이 성주는 굴피집의 60여 년 역사와 함께 한 탓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다. 굴피집 앞에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뒷간이 차분하게 짚이엉을 얹고 있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초가집으로 보인다. 초가 뒷간과 굴피집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다.


국내 유일의 굴피 문화재: 대이리 굴피집과 통방아


대이리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 이종순 씨네)은 300여 년 전 현재 이종옥 노인이 사는 너와집에서 분가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집도 처음에는 너와집이었다고 하는데, 1930년경 너와 채취의 어려움 때문에 대신 굴피를 얹게 되었단다. 이 집은 온돌방과 도장방(창고), 외양간, 봉당 등이 한지붕 밑에 있는 전형적인 겹집에 속한다. 부엌에는 불씨를 따로 보관하는 화티와 호롱불을 놓아 불을 밝히던 두둥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이리 굴피 통방아(위)와 대이리 굴피집 부엌 천장에 걸린 생활도구들(아래).

 

굴피 통방아도 마을 앞 개울가에 자리해 있다. 이 통방아(중요민속자료 222호)는 100여 년 전 이 마을 방앗간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명 물방아, 물통방아, 벼락방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통방아의 주요 시설은 확(곡식을 찧는 돌통)과 공이, 수대로 되어 있는데, 물통에 물이 담기면 그 무게로 공이가 올라가고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떨어져 방아를 찧게 되는 원리를 따랐다. 이 통방아의 공이 위에는 원추형으로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아 주변 풍경과 어울리게 했다. 그러나 오래 전 고장이 난 상태여서 전시용이 되어 버렸다.


혼자 굴피집을 지키며 산다: 사무곡 굴피집


신기면 대평리 사무곡(士武谷)에도 문필봉 8부 능선쯤에 굴피집(투비집) 두 채가 들어서 있다. 한 채는 빈집이고, 다른 한 채는 집주인인 정상흥 노인이 오며가며 집을 돌보고 있다. 정씨는 30세 때 산 아랫녘에서 이 곳으로 올라와 손수 목수며 미장이가 되어 집을 짓고, 40여 년 동안 이 굴피집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굴피집을 지켜간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굴피지붕의 수명이 20년은 된다고 하지만, 수시로 덧덮어주지 않으면 빗물이 새기 십상이다. 굴피 채피를 처서 이전인 8월 정도에 하는 까닭은 처서가 지나면 물이 안 올라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굴피를 벗길 때 너무 어린 굴참나무는 껍질이 얇아서 못쓰고, 너무 큰 나무는 억세서 못쓴다고 한다. 적당히 자란 나무라야 껍질도 부드럽고 잘 벗겨지는데, 한번 껍질을 벗긴 나무는 3년쯤 지나야 속껍질이 다시 나온다고 한다. 사무곡 굴피집은 대지 90평 정도에 세칸(두 개의 방과 부엌, 툇마루)으로 지어졌는데, 마디가 가는 산죽으로 지붕속을 하고 그 위에 굴피를 여러겹 덧덮는 방식으로 지붕을 이었다. 이렇게 하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빗물도 새지 않을뿐더러 겨울에도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무곡의 정상흥 노인이 굴피 지붕을 손보고 있다.

 

지붕속에 넣는 산죽으로는 댓자리도 만들어 방바닥에 깔아놓았는데, 이 또한 산중의 굴피집에서 흔히 하는 방식이다. 정씨에 따르면, 처음에는 억새풀처럼 생긴 ‘부들’이란 것으로 ‘부들자리’를 깔았으나, 1년도 안돼 썩는 바람에 10년은 너끈히 버틴다는 산죽으로 댓자리를 만들어 깔았다고 한다. 부엌에는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화티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외양간도 부엌에 맞닿아 있다. 집안 곳곳에는 설피와 씨오쟁이, 창애(덫)를 비롯해 여러 옛 물건들이 걸려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직도 여기서는 등잔을 쓰고 있으며, 4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물처럼 간직해오고 있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삼척 인근에서는 굴참나무 껍질인 굴피를 곡식 공출해가듯 징수해갔다고 한다. 굴피가 코르크 병마개를 만드는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정씨 또한 여러 번 굴피를 공출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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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소를 ‘생구’라 불렀던 까닭

 

봄 밭갈이 하는 풍경.

 

실오라기 같은 논두렁길에 덕석을 씌운 암소가 앞장서고, 아직 코뚜레도 하지 않은 송아지가 줄레줄레 뒤따른다. 그 뒤에는 고삐를 쥔 농부가 이랴이랴, 어뎌뎌뎌, 하면서 소를 몰아가고 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종종 만날 수 있는 소몰이 풍경이다. 소는 집안에 두고 키웠지만, 날이 따뜻해지고 들판이 푸릇한 잡풀로 우거지면 되도록 풀밭에 내다 매었다. 겨우내 먹은 여물죽이 지겨웠던 소로서는 향긋한 풀을 맘껏 먹을 수 있고, 농가에서는 따로 여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이래저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모내기철과 추수철이 되면 소는 덩달아 바빠졌다. 논갈이와 논삼기, 볏섬 나르기가 모두 소가 해야 할 몫이었다. 소가 힘을 쓰는 날이면 농부는 쇠죽에 겻가루와 쭉정이콩을 듬뿍 넣은 특별식을 해 주곤 하였다. 옥수숫대나 수숫대궁도 덤으로 먹였는데, 이는 소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나면 소 팔자도 한결 좋아졌는데, 농부도 농사 밑천인 소를 어여삐 여겨 추위가 심해지면 소의 등에 덕석을 덮어 춥지 않게 해 주었다. 지역에 따라 덥석, 덕새기라고도 불리는 이 덕석은 짚으로 엮은 겨울용 소옷이었는데, 겨울 나들이를 나서는 소의 모습은 이 덕석으로 인해 더 운치가 있었다.

 

덕석을 입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외양간 밖을 내다본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소를 생구(生口)라 하여 다른 가축과 달리 한 식구로 여겼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식구라는 뜻이다. 농경문화의 바탕에서는 소가 없어서는 안될 가축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생구’라 했던 것이다. 사실 경운기가 생기기 이전만 해도 힘깨나 쓰는 일은 모두 소의 힘을 빌어야 했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송아지는 팔아서 농사 밑천 하고, 외양간에 깔았던 짚북세기는 나중에 퇴비로 썼다. 그러니 소를 한 식구로 여겼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소의 노고를 기리는 뜻에서 소에게도 오곡밥을 먹이는 관습까지 있었다.

 

창문처럼 뚫어놓은 외양간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착한 소.

 

날씨가 따뜻한 중부 아래 지방과 평야지대에서는 소를 헛간 한 켠 외양간에 두어 길렀지만, 날씨가 추웠던 경북 북부와 강원, 중부 산간지대에서는 거개의 집들이 외양간을 부엌에 두었다. 이들 지역에서 소를 밖에 두지 않고 부엌에 두었던 까닭은 그만큼 소라는 가축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산간 마을에서는 산짐승의 습격이 잦았으므로 소를 집 내부에 두어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 날씨가 추운 지역이라 부엌의 아궁이 온기를 외양간 소에게까지 쪼이게 하려는 배려도 담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식구처럼 여겼던 소도 언젠가는 팔아치워야 한다. 힘이 다해 농사를 질 수 없거나, 새끼를 낳아 두 마리를 다 먹일 수 없을 때는 둘 중 한 마리는 우시장에 내놓아야 했다. 우시장에 소 팔러 가는 날이면, 소도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여물도 먹지 않고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다 결국 굵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움머 움머 우는 소를 외양간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농부의 마음도 편치 못해 우시장까지 가는 길이 그저 허허롭고 안쓰러워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내 소를 팔고 온 농부의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와 쇠고기 한 근이 들려 있었지만, 마음에는 내내 봉투보다 더 두툼하고 쇠고기보다도 더 묵직한 허전함이 짓누르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구멍 뚫린 외양간 벽틈으로 보이는 소의 실루엣.

 

그러나 경운기가 생겨나고, 새로운 농기계들이 속속 보급되면서 농촌에서조차 소들은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비육우로 키우는 한우마저 미국산 쇠고기 개방으로 더 이상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우는 고유한 우리의 품종으로 성질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다. 빛깔은 적갈색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적갈색에 검은 무늬가 있는 얼룩배기 칡소도 있었다. ‘생구’라 부를 정도로 친근하고 한 식구처럼 여겼던 한우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한우 농가는 지금 생구를 우시장에 내다 파는 심정보다 더한 서운함과 슬픔에 잠겨 있다. 더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 농부들의 마음은 지금 배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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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닭, 산속에 알을 낳다

 

시골닭의 봄볕 나들이.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암탉이 알 낳는 모습을 숱하게 보았을 것이지만,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나 요즘 아이들에겐 이런 풍경이

그저 책이나 TV에나 나오는 낯선 풍경일 것이다.

 

시골닭이 수풀 속 가랑잎 둥지에 낳은 달걀.

 

얼마 전 시골에 내려갔다가 어린시절에나 보았던

닭이 알 낳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집 뒤란에 대충 그물을 치고 문을 달아 닭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10여 마리 남짓한 닭들은

자유롭게 닭장을 들락날락거렸다.

 

방금 알을 낳고 수풀 속 둥지를 빠져나가는 암탉.

 

아침에 꼬꼬댁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

뒤란으로 나가보니 닭장은 텅 비어 닭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은 죄다 뒷산으로 올라가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닭장의 모이보다 땅속을 파헤쳐 잡아먹는 벌레가 이 녀석들에게는 더 별미인 것이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은밀한 수풀 속에 암탉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알을 낳는 중이었다.

 

또다른 곳에 낳은 달걀.

 

잠시 후 녀석은 꼬꼬댁거리며 수풀 속을 뒤뚱뒤뚱 걸어나왔다.

좀더 위쪽의 나무등걸 아래에도 또 한 마리의 암탉이 웅크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닭장이나 닭장 인근에 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은밀하고 은폐된 숲속에 알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암탉이 처음 낳은 달걀이거나 석회질이 부족하면 이런 말랑말랑한 달걀이 나온다.

 

암탉이 걸어나간 자리를 살펴보니 푹신한 가랑잎 위에 세 개의 알을 낳았다.

위쪽의 둥지에도 역시 세 개의 알이 있었다.

좀더 위쪽의 숲길에도 덩그러니 알 하나가 보였는데,

이 알은 석회질이 부족한 녀석이 낳았는지,

아니면 이제 처음 알을 낳는 첫경험 암탉이 낳았는지

햇빛에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미숙한, 말랑말랑한 알이었다.

 

그물로 대충 만들어놓은 시골닭의 닭장. 이곳의 문은 24시간 개방이다.

 

시골에서 닭을 키워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본래 이 녀석들은 알 낳으라고 닭둥우리를 만들어놓아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은밀한 곳에다 알을 낳곤 한다.

그래서 녀석들의 알을 찾는 일은 언제나 ‘보물찾기’나 다름없다.

요즘 사람들이야 어디 이런 재미를 알까.

심지어 달걀이 마트에서 나오는 줄 아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열 마리도 안되는 시골닭이 아침 나절 산속에 낳은 알들을 다 모아보니 10개다.

 

양계장에서 알 낳는 기계가 다 된 불쌍한 닭들이 낳은 달걀은

이렇게 시골닭이 아무렇게 낳은 달걀의 맛을 따라올 수 없다.

어쨌든 닭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시골닭이 낳은 달걀을 서리해 오늘은 계란찜을 해 먹는다.

파는 달걀과 주워온 달걀의 ‘맛의 차이’는 아는 사람만 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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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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