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민족의 안녕과 조국발전을위한 구국의혁명 60주년

 

박정희 운전 기사의 증언 화제

 

516혁명60주년새벽에 이글을 육영수 박정희 그리고 지만원 변희재 우종창[의병칼럼]

 

 

[LA행사] 제60주년 5.16혁명 기념식 /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좌승희 회장 / 미주 제3회 기념식 해외 인사말 / 5.16.2021

 

 

경제기적의 출발점, 5.16 혁명 60주년 1부

 

 

경제기적의 출발점, 5.16 혁명 60주년 2부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

양인자 추천 0 조회 16 20.05.30 23: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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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

이글을 읽고 넘 감명받아서 옮겨 봤습니다
정치적인 어떤 의도 같은 것이 아니라...정치인들 글구 현대통령 모두 비난할 것은 하더라도
배울 점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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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떄였다. 월남전참전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국가가 있었으니 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 (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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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일멋진 인생둥지 원문보기 글쓴이: 양인동

41년전 오늘 시작된 새마을운동,  

 세계 84개국에 전수되는 국가 브랜드 되다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41년전 오늘 중앙청회의에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세계 84개국에 전수되는 국가 브랜드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가꿔 나간다는

자조, 자립정신을 불러일으켜 땀 흘려 일한다면 모든 마을이

머지않아 잘 살고 아담한 마을로 바꿔지리라 확신합니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970년 4월 22일 오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청 회의장에서 처음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경기도 가평군 개곡리

 새마을사업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조선일보


▲ 새마을 운동./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새마을운동에 대한 각오를 적은 박정희 대통령 친필.

 새마을운동 10년사(내무부 발간,1980)/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1970년대 강원도 양양군 선양면의 말끔한 모습.

 초가지붕이 없어지고 스레트지붕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1984년 4월 10일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대운동장에서 거행되고 있는

 새마을 방범봉사대 발대식./ 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 새마을사업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새마을 운동에 참여한 농촌의 주민들이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한 흙 운반 작업을 하고 있다./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박정희 대통령이 가례면 가래리 새마을 사업장을 시찰하고 있다./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1972년 4월, 봄바람에 새마을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농촌 주민들이

마을길을 넓히고 있다. 우리 국민의 거의 전부(95.8%)는

새마을운동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새마을 운동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경기도 양주군 금곡리의 새마을 운동./조선일보
출처: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 박정희 대통령이 남제주군 배정읍 보상리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시찰을 하고 있다./조선일보

 

새마을 노래
 

 

출처 : " 내마음의 정원일기 Blog "
글쓴이 : 『슈퍼★탱크™』 원글보기
메모 :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옛 정이 그리워 지는구려 한많는 
배고품과 서려움이 우리의 인생사의 옛날이 
생각이 납니다.

박대통령 옛 사진

벼베기 대회 참가(65.10.11)

선산 성묘(65.9.11)

박정희 대통령은 추석 다음날인 11일 저녁

고향 경북 선산군 구미음 상모리 뒷산 선영에

 부인 육영수 여사와 아들 지만군,  딸 근혜 근영양과 함께

두 시간에  걸쳐 고향을 찾아 성묘했다. 

박대통령이 술을 따르고 향불을 피운 뒤

다섯 식구는 차례로

대통령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묘 앞에서

 묵례를 한 뒤 박대통령은 아들에게

'네게 증조할머니 묘다' 라는 등 일일이 설명


선산 성묘(71.10.4)

선산 성묘(71.10.4)

선산 성묘(71.10.4)

선산 성묘(71.10.4)

74년도부터는 추석명절날 국립묘지에도 들르셔야 했습니다.

 

국립묘지참배(74.9.30)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육영수'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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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육영수
 
 
출생 :  1925년 11월 29일
 
 
사망 :  1974년 8월 15일
 
 
출생지 :  충청북도 옥천
 
 
 
가족 :  남편 前 대통령 박정희, 딸 국회의원 박근혜, 딸 사회기관단체인 박서영
경력 :  양지회 명예재단 고문
특이사항 :  박정희 前 대통령의 부인, 1974년 8.15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에게 피살

 

박대통령은 1978년 9월 22일 귀로에

옥천 인터체인지에서 차를 돌려 옥천읍 교동 뒷산의
장인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에 들러

잠시 쉰 뒤 서울로 돌아오십니다. 

육영수여사 충북옥천지구

파월장병가족 방문 중 성묘(66.5.12)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7.9.17)

 

故육영수 여사 묘소를 찾는 국민들은

세월이 흘러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됩니다.
추모 2주기 때엔 현 박근혜 의원이

대 국민 감사의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추석 선산 성묘(77.10.8)

선산 성묘(79.10.6)

 

64년도 당시 비석 뒷면엔 육군 대장이며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라는 아들을 두고 김종필을

손자 사위로 가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형님댁 (67.5.7)    박대통령의 형님(박동희옹. 맞은 편)

 

고향 방문시 동네 주민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고 합니다.  


형님댁 (67.5.7)

그리고 농촌 주택 개량 사업 및 살림살이 등

동네를 관심 있게 둘러 보십니다.


선산 성묘(71.10.4)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2.9.22)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7.10.8)

 

박대통령은 1978년 9월 22일 생가 입구에 있는

김덕용옹(99세)의 집에 들러 옛집보다 넓어졌지요라면서

인사를 했고, 옛날 천경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의 제자 주배씨(53세)를

단번에 알아보고 있다가

우리 집으로 오게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오후 2시45분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뒷산에 대나무 등이

드리워진 20평 남짓 한 생가에 도착

대문 앞까지 달려나온 형수 송임무(63세)의 마중을 받았다.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8.9.20)

 

박대통령은 마루에 올라 잠시 쉬면서

막걸리를 찾았으며  이 때 집으로 온

제자 주씨와  마주 앉았다.

예고 없는 귀향으로 풋고추와 김치 고추장으로

준비한 술상이 나오자 우리 집인데 내가 안 사니까

 대접이 이렇다고 농담을 하면서 

주씨에게 막걸리를 권했다.

박대통령은  옛날 자전거로 가정방문을

가면 수염이 긴 학부형들로부터 

막걸리를 대접받던 생각이 난다고  회상하면서

제자들의 안부를 물었다.

 약 45분 뒤 생가를 떠나면서 주민들

박수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고 마을 여귀의

경로당인 금오당 앞에

차를 세우고 그곳 안으로

들어가 추석을 잘 들 쉬셨습니까하고 인사.

박대통령은 청와대 구경을 하고 싶다는

노인들 건의를 받고 내년 봄에 연락하겠다면서

금일봉을 주었다.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8.9.20)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8.9.20)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9.10.6)

 

선산 성묘 및 주민과 환담(79.10.6)


박정희(朴正熙)  "왜 이따위 짓 했나? 절대 위해 가하지 말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김성진 전 문공장관 증언,
 
박정희 "즉각 돌려보내고 절대로 위해 가하지 말라"

'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과잉충성의 산물이며, 납치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 중정부장을 질타하며 김대중씨를 귀가시켰다는 김성진 전 문공장관의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이는 국정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의 "이 사건의 주범은 이후락 중정부장이지만 그 배후에서 박 전 대통령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중간결론과 정면배치되는 증언이어서 향후 적잖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박정희 "왜 이따위 짓 했나? 절대 위해 가하지 말라"

박정희 정권시절 문공부장관을 지낸 김성진씨는 16일 오전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장성민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국가차원에서 진상 조사가 진행중인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그 때 마침 제가 옆에서 지켜 볼 기회가 있었다"며 자신의 목격담을 상세히 전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처음에 전혀 모르고 있다가 제가 뉴스 내용을 박 대통령께 보고 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시더니 금방 세 군데에 확인 전화를 하셨다.
외무부, 중앙정보부, 경호실 이 세군데 지시를 내려 이런 일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다"며 "세 군데서 '전부 그런 일 없다', '모른다'고 대답이 왔다. 그러니까 박 전 대통령은 '아하, 이것이 야당에서 일부러 꾸민 트릭이구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이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청와대에 들어와 박 전 대통령에게 '김대중씨를 한국으로 데려왔다'는 보고를 했다"며 "그 순간 박 전 대통령은 깜짝 놀라시면서 '김대중씨를 당장 돌려 보내라,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셨다.
결국 김 대중씨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후 여러가지 신문에 보도된대로 문제가 커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차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단히 노했다 .
'왜 이따위 짓을 했나'고 하시면서 '절대 위해를 가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말씀하시면서 대단히 화를 냈다"며 "그 후에 무슨 기회가 있을 때 박 전 대통령은 '너희들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차라리 그 김대중씨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라' 이렇게까지 화풀이했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그는 "이런 것으로 미뤄볼 때 박 전 대통령은 김 대중씨 납치에 대해 사전에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후락 부장이 김대중 전대통령을 납치한 이유와 관련, "밑에 사람들의 일종의 과잉충성 때문"이라며 "중앙정보부와 경호실과 비서실의 경쟁자끼리 알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그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 생각이고 박 전 대통령의 참뜻을 읽지 못해 이런 사고를 저지른 것"이라며
"아마 지금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뜻을 잘못 읽고 이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쓸데 없는,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상조사위 추측에 동의 못해"

김 전장관은 국정원 과거진상조사위원회의 "이 사건의 주범은 이후락 중정부장이지만 그 배후에서 박 전 대통령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중간결론도 정면 부인했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며 "박 전대통령이 김대중씨를 꼭 납치해 와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나?
김대중씨가 정적이지만, 밖에 나가 있으면 안심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해외에서 하는 반체제 운동이야 밖에서 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나"고 말했다.

그는 "아마 지금 진상조사 위원회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 일을 지시하지 않았느냐'
이런 추측을 갖고 파고 들어간 것 같은데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뷰스앤뉴스
박태견 기자
 
 
출처 : 여산
글쓴이 : 여산 원글보기
메모 :
 
 
 
동영상/朴正熙의 서울死守 선언

1975년 월남 패망 뒤 총력 안보 체제를 다짐하면서 "南侵 때는 나도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법대로(회원토론방)   

 박정희 대통령 월남 패망과 관련 특별담화 


 [1/2]
 

 
 [2/2]
 

[ 2009-12-03, 22:39 ]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메모 :

故 朴正熙 大統領


              

   새마을 ♬새벽종이 울리네 

 
    백기완의 박정희 전대통령에대한 평가
 
  『 박정희는 우리 같은 사람 3만명을 못살 게 했지만

    김영삼 김대중은 3천만 명을 못살게 했다.』고 하는

    신산의 세월을 딛고 나서야 떨림의 음성으로 절규하는

    백기 완 선생의 충심어린 고백을 들어보고 유신을 비난하라. 

    젊은이들아!!
   금세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세종대왕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 그것도 무려 20%가 넘는
   최고의 인물로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국민소득 76불에서 1,500 불, 인류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단기간에 20배 성장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정치 꾼'이 아닌
   진정한 지도자이며, 애국자가 과연 누군지 아느냐 말이다.

  실의 도탄에 빠져 나태한 국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새마을 정신혁명으로 잠재력을 일 깨워 자신감을 안겨준 지도자,
  그가 바로 박정희 대통 령이다. 

  젊은이들아!!
  그런 그가 독재자였음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그 어느 지도자들보다도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 물,
  가장 친근감이 있어 대화하고 싶은 지도자가 박정 희라며
  그리워하는 이유는 또, 왠지 아는가?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새벽부터
  손이 부르트게 일을 하였지만 내일의 희망과 비전이
  있었으며 삶의 의욕이 충만해 즐겁고 행복했었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알아야 한다.

  독재자 박정희라?? 
  젊은이들 아, 당시 독재 시대라 해도 일반 대다수 국민은
  생활하 고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과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독재니 자유니 하며 이론적 정의만을 내세우는
  소수의 사람들과 정치를 하겠다는 극소수의 '정치꾼'들을
  제압하였으나 그 또한 누구를 위한 억압적 제압이었겠느냐?

  부정 축재하려고 그랬느냐?
  자식들과 친인척을 도와 주려고 그랬느냐?
  아니면 출세하여 족보에 남기려고 억압적 제압을 하였느냐?

  젊은이들아!!,
  1960년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대한민국 그때에서,
  자유, 독재,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고 박대통령을 생각해 봐라!!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식욕, 성욕, 금욕, 지배욕, 이라 했 다.
  그 첫째 '식욕', 먹는 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우선 될 수 없다고 본 다.

  경제력이 뒷밭임 없는 민주주 의!,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는 민주주 의!,
  모래사막 위에 탑을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

  당시 우리보다 몇 배를 더 잘 살던 필리핀과 북 한을 보고,
  타이, 말레이시아를 봐라, 지금 이들 국가 들이 어떤가를…….
  한 나라의 발전이 지도자가 누구냐 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겠 나.

  그래도 독재자 박정희라 폄하 하 며,
  그의 업적과 공을 깎아내리려 애쓰는 젊은이들이 많다.

  왜, 그럴까?
  16,000불에서 살다 보니 76불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이 다.

  보릿고개가 뭔지 모르고 다이어트에 신경 쓰다 보니
  과거 60년대가 실제로 어땠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유니 독재니 하며 교과서적 정의만 을 내세워 따진다.

  젊은이들아!!
  우리나라 정부 일 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지원으로 살았고
  춘궁기가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흔하게 발생했지 만,
  뉴스거리조차 안되던 때가 바로, 60년대였 다.

  배를 곯아 봐야 인생이 뭔지 삶의 철학도 깨우 칠 수 있음에
  너무나 잘 먹어 뱃살 빼기를 고민하는 젊 은이들아!!

  그때는 여성은 살이 쪄야 맏며느리 감 이라 인기가 있었고,
  남자는 살이 찌고 배가 나와야 사 장이며 인격, 신분 상승으로 여겨
  겨울이면 옷을 많이 입고 살쪄 배 나온 시늉을 하던
  그때를 아느냐 말이 다.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웃긴다고 할까?
  눈물겨운 일이라고 할까?

  젊은이들아!!
  과거가 없는 현 재가 있을 수 없으며, 과거를 모르면 현재의
  풍요로움 또한, 그 가치를 모르는 법!!.

  1960년 4월19일 학 생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과도정 부가 들어섰을 때, 각종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 동자, 농민, 상인, 이발사, 식당주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길거리로 몰려나와 데모…….

  학생들도 교장 선생님 조회 시간이 너무 길다 데모,
  짧 은 머리 기르자 데모, 공부시간 단축하자 데모,
  하다못 해 초등학생, 선생들까지도 데모, 데모,…….

  온 나라가 일 년 열두 달 365일 데모로 지새워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였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였겠는가?

  이를 지켜본 세계에서는 KOREA는 '데모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최루탄 가스를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워 밤이면 마음 놓고 밖을 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치안은 여기서 이 루 다 말할 수가 없이 무법이 판을 치던 그때,
  하다못 해 깡패도 주먹으로 정치를 하던 그때를 아느냐 말이다.

  더욱이 기가 막힐 노릇은 이승만 독재로부터 자유를 찾았으니,
  모든 것이 자유라며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발로 차거나
  주먹을 휘둘러대며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무지의 국민들이 많았으며, (당시에는 초등학교 무학자가 대다수였다.)

  더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서울 광화문에서 데모하는 모습을 북한에서
  라디오로 생중계하여 현장 실황을 남한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니,
  얼?떨? 많은 남파 간첩들이 포진되어 안보가 위태로웠는지,
  그때를 아느냐 말이다.

  김일성 자서전에 당시 남침하지 못한 것 후회한다 했지 않은가.
  그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아!!

  이렇듯, 굶어 죽지 않으면 공산화되기 일촉즉발의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하고자 구국에 일념으로 박정희가 나타난 것 아닌 가.

  역사에 만약 이란 없다 하지만 당시에 박정희 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당리당략과 사 리사욕, 출세욕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고 보면 지금 쭘 이 나라는 어떻게 되였을까?

  너희들이 제일 좋 아하는 축구가 월드컵 세계 4강에 올라 대한민국,~,
  짝 , 짝, 짝~, 하며 즐거움을 맞볼 수가 있었을 것이며,
  올림픽을 개최하여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수가 있었을까?
  또, OECD 경제 대열에 오르는 오늘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아,
  사업가는 10년, 정치가는 최소한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지혜가 있어야 하며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 추진력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당 시 일본으로부터 대일 청구권으로 받은 돈으로 동남아 국가들은
  호텔 짓고, 백화점 짓고, 선박 구입 등, 비생산적인 곳에 썼지 만,
 
  박대통령은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하며
  이승만정권 때부터 14년간이 나 지지 부진하게 끌어 오던 한일수교를,
  결단, 결행, 단행하여

  산업의 쌀이라 일컫는 제철공장 짓고, 고 속도로 등, 경제 재건을 위한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여 지금은 조선업, 철강업, 기타,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 1, 2위로 일본과 경쟁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는 지역간 격차를 줄이고 산업의 동맥으로 토목 건설
  기술 축적으로 지구촌 곳곳에 건설수주 외화 획득, 매년 고도성장을
  30년 이상 지속, 지금은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업적을 기반으로 가 아닌 가.

  젊은이들아!!
  그런 그를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파청산이란 명제하에
  알 수 없는 정치적 잣대로 재고 재단하여 매도하고 자,

  공(功)은 빼고 과(過)만 조명하는 '친일파 박 정희' 만화책 만들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세뇌시키려 하고 살인범 김재규를
  민주화인사 운운하며

  세계 수십여 개 국가, 수만 명이 하루가 멀다 날 아와
  가르쳐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배워간 새마을운 동까지도
  사실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다 하니 도대체 이 럴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 박 대통령에 탁월한 지도력을 배우고자 연수용
  교재로 '박 정희 전기'란 책이 중앙 위원회 산하 당정 고위 간부들의
  교과서가 되였으며 서점에서는 베스트에 올라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함인 데,

  이 나라에서는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독재자 김정일에게는 '님'을 꼬 박꼬박 붙여가며
  존칭을 쓰고 통큰 지도자라며 추켜 세 우면서도

  박대통령에게는 '님'은 커녕, 그가 쓴 친 필이라 해서 광화문,
  운현각 현판을 뜯어내 부시고 빠 개고, 하다못해 그 시절에
  심어 젓 다해서 나무까지 뽑 아내 그의 흔적까지 지워버리려 하니
  이런 기가 막힐 노릇이 어디 또 있는가 말이다.

  또, IMF 때보다도 살기 힘든다고 아우성인 경제는 뒷전이요,
  진보라 자칭 하며 개혁하겠다고 과거 캐기에 국론 분열을 일삼으며

  국민 80%가 반대하는 국보법을 김정일이가 원하는 대로 폐기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들!! 그래서 국민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그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전직 국무총 리, 대법원장, 국회의장 등을 비롯해
  대한민국 건국이 래 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 각계 원로 9,000여 명이
  시 국선언을 하였으니 도대체 이들이 누구며,
  왜 이러는 지 진짜 알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세대 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좌파들에 부화뇌동하는 젊은이들아!!,

  한 번의 실수는 5년이 아니라 10년이 갈 수도 있으며
  한번 잘못 선택한 지도자로 겪어야 할 고통의 대가는
  자손 대대로 후회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천하에 사기꾼 김대업을 이용하고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휘어잡고선 탄핵 땐 예수 부활을 비교하면서 다시 태어났다고
  자랑하는 좌파정권, 그 배후세력들이 지금까지의 언행 을 보면,

  아마도 언젠가는 독재자 부인 육영수여사 살해했다고
  살인범도 의인으로 추대하여 광화문에 이순 신 동상 철거하고
  문세광 동상 세우자고 촛불 든 젊은 이들 선동할까 정말 걱정된다.

  똑바로 알아라!!
  비록 한 인간이 죄가 있다고 하여도 그 죄를 불공평하 게 들추어내는
  행위는 죄악이며 어떤 사회든 부조리가 있고 사회적 병리가 없는
  문제없는 사회가 없는 데,

  역사 바로 세워야겠다며 유독, 하나만 싸잡아 성토하고, 그래서
  갈아 치우고자 한다면 이는 인정될 수 없는 반, 민주적 행태가 아닌가.

  개혁이란 명제 하에 법을 현실보다 고도의 도덕적 가치 기준에
  매달아 놓고 그 기준에 걸리면 모조리 갈아 엎어 버린다면,

  칼자루를 쥔 쪽에서 의도적으로 휘둘러대는 알 수 없는 심판의 잣대로
  매장시키려 한다면 이 어찌 민주를 부르짖던 자들의 행태란 말인가!!

  그런 기형적 사고의 두뇌로 개혁 이다 역사 바로 세우겠다 한다면
  그 누구도 '왕따' 시 켜 매장시킬 수 있으며,

  세종대왕도 독재자로 몰아 세우고 그분의 많은 업적을 모조리 비판하여
  쓰레기통 으로 집어넣어야 하며 한글도 때려 치워야 되는 것 아닌가.

  젊은이들아!!
  사람의 가치관은 정권이 바 뀌고 물질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며
  세월이 아무리 흘러 간다 할지라도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라!!.

  권좌, 출세를 위한 일이면 그 어떤 가치와 업적도 부정하려 드는
  부도덕한 정치인들과 그 배후 세 력들,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부 젊은이들이 오늘 의 잣대로 비판하려 애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두 손을 불끈 쥐고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오늘을 살던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신앙을 굳게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노라고 떳떳하게 대답하자.'라고 한 민족중흥의 시 조,
  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어 생각해 본 다.

젊은이들아!!
고박정희 대통령을 제대로 알자!!

 

 救國300正義軍決死隊長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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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메모 :

 

 

 

 

 


** 故 박정희 대통령의 삶의 사진 공개 ** 

 




 




 




 




 




 




 




 




 




 




 




 




 




 




 




 




 




 




 




 


 

 

 

 

출처 : 행복 에너지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박 정 희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1972년 吳源哲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核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 『1980년대 초, 高純度 플루토늄彈을 완성한다』

               

               

              플루토늄彈을 건의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 아래 진행된 한국 정부의 核무기 개발 계획이 최근 문서로 확인됐다. 이 核개발 비밀문서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1972년 9월8일 吳源哲(오원철ㆍ74) 당시 대통령 제2 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보고서는 그간 공공연한 비밀로만 알려져 온 朴대통령의 核개발 계획이 우리 국내 문서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史料的(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지를 포함,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核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吳源哲 수석의 이름, 그리고 職印(직인) 등이 찍혀 있고, 「원자 核연료 사업 계획을 별첨과 같이 작성」, 「별첨 계획의 결론에 의거, 원자핵 연료 사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核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核무기의 비교(도표)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생산과정(그림) ▲우리나라의 核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核연료 사이클(그림) 순으로 돼 있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장부터는 「核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둘째 장부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核무기의 종류로 「核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核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는 문제를 도표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우라늄 235폭탄의 원료는 90% 이상의 高濃縮(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폭탄의 원료물질은 90% 이상의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239, 수소폭탄의 원료도 液化(액화)중수소 및 三重水素(삼중수소) 또는 重水素化(중수소화) 리튬6」인데, 어떤 핵 원료 물질을 이용해 核을 개발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미뤄 청와대에 보고되는 核개발을 위한 최초 보고임을 짐작케 한다.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개발해야 할 核무기는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彈(탄)을 擇(택)함이 타당함」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우라늄彈엔 9억 달러 소요

               

               비밀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과 플루토늄 239탄에 대한 비교도 곁들이고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됐던 우라늄 235탄은 한 개의 核무기를 만드는 데 농축 우라늄(원자번호 235) 25kg이 필요하고,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플루토늄 239탄 1개를 만드는 데는 고순도 플루토늄 239가 8kg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라늄 235탄은 천연우라늄→농축→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탄은 천연우라늄→원자로→高純度 플루토늄 239의 과정을 거쳐 제조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은 고농축 시설 건설에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우라늄 235탄 1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간 우라늄 134kg을 생산해야 하고, 그 투자액은 약 9억 달러, 시설 건설기간에 8년이 소요된다고 지적했다. 우라늄彈을 만들기 위한 소요전력만도 200만kW가 들어가는데다 기술의 도입이나 개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라늄탄은, 농축시설을 보유하면 상업발전용 농축 우라늄 연료도 생산할 수 있고, 수소폭탄의 「방아쇠」로 유리하며, 毒性(독성)이 없어 취급이 안전하다는 장점 등도 꼽고 있다.

               

               플루토늄彈의 경우,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에 비교적 투자비가 적게 든다는 점을 들었다. 그 예로 연간 8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투자비가 약 4200만 달러, 시설 건설기간은 6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플루토늄은 원자력 발전용 연료로 사용도 가능해 一擧兩得(일거양득)임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플루토늄은 有害(유해)물질이므로 취급하기에 위험이 따른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초 플루토늄 생산」

               

               이 비밀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核개발을 위한 플루토늄도 얻고 발전도 할 수 있는 「중수로형 원자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일한 原電인 古里(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非정상 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즉 정상 가동으로 생산되는 플루토늄은 연간 I00kg이지만, 플루토늄의 純度(순도)가 70% 이하이므로, 군사용(90% 이상의 純度 요구)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고서는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두 가지 案(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고순도 플루토늄의 생산 및 발전이 가능한 「겸용爐(로)」에 의하는 방법이다. 건설될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 제2호기를 50만kW급 「천연 우라늄, 중수형 발전로」로 해 연간 高純度 플루토늄을 200kg 정도 추출하는 방법으로, 日本ㆍ印度(인도)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商用(상용)발전과는 별도로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도입하는 방법이다. 연간 8kg의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4만kW의 「천연 우라늄, 중수형 연구로」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자유중국(대만)이 그 예라고 밝혔다.

               

               高純度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겸용로」를 건설하는 데는 총 2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분석했다. 발전로는 1억5500만 달러(경수로는 1억1000만 달러), 再처리 비용 4200만 달러, 가공비용 300만 달러가 든다.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의 투자비용은 총 4200만 달러가 소요되는데, 발전로 가격이 2900만 달러, 再처리 비용이 1100만 달러, 가공비용이 2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겸용로」를 채택하면, 商用 발전을 겸할 수 있는 데다가 플루토늄 量産(양산)이 가능하고, 核彈(핵탄) 수요가 없을 때는 발전로 및 재처리 공장을 商用으로 전환할 수 있으나, 비교적 투자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연구로」를 채택하면, 투자비가 적은 장점이 있으나 商用발전을 겸할 수 없고,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어 核彈 수요가 없을 경우에는 연구목적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1案인 「겸용로」를 택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에 따라 古里발전소 2호기를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重水爐(중수로)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核연료인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시기를 1980년대 초로 잡았다.

               

               

              「해외 한국인 기술자를 불러오라」

               

               비밀 보고서는 核무기 비밀 개발계획을 다음과 같이 종합,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核개발 주무 부서와 인력확보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摘示(적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술수준,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철저한 기초작업을 수행한다. 1974년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원자력연구소는 상기 목적에 맞도록 개편ㆍ보강한다.

               

               가.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함.

               

               나. 기술자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되 반드시 특정 임무를 부여하여 전문훈련을 받도록 함.

               

               다. 현재의 실험 원자로 및 기타 시설은 원자력 전공 대학생의 교육훈련용으로 50% 이상을 할애함.

               

               라. 원자력을 전공하고자 하는 대학생 전원에 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여 원자력연구소에서 실기교육을 받고, 졸업 후 원자 核연료 사업에 종사토록 함>

               

               보고서의 마지막 章 상단에는 캐나다産 원자로인 「캔두(CANDU)」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한국은 1974년부터 캐나다와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는 CANDU型 중수형 원자로의 교섭에 나섰다.

               

               한국이 再처리 시설 도입을 프랑스와 교섭하고, CANDU형 원자로까지 도입키로 하자 포드 행정부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核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고 갖가지 외교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5년 5월, 印度에서 原爆(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사용한 원자로가 바로 한국에서 도입하기로 한 CANDU型 원자로였던 것이다.

               

               기자는 지난 7월8일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청평호반으로 차를 몰았다. 문건을 작성한 吳源哲 당시 경제 제2수석을 만나 核무기 개발 계획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묻기 위해서였다. 吳 前 수석은 『내가 작성한 문서가 틀림없다. 이 보고를 한 얼마 후 다시 유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그 이상은 답변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보고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核연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지 核개발과는 무관하다』면서, 기자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당시에 (미국 정부에) 당한 것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는 『金正日이 核을 갖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도 核개발을 했었다고 하면 똑같은 「망나니」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비밀 보고서를 朴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작성했는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튿날 오후 기자는 金正廉(김정렴ㆍ79)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를 찾아가 문서를 보여 주었다. 그는 결재란에 자신과 대통령의 「서명」이 없다면서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吳수석이 朴대통령에게 直報(직보)했다는 뜻인가요.

               

               『그건 불가능해요. 朴대통령은 외부인을 접견할 때 비서실장을 꼭 배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참모장(비서실장)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요. 참모(수석)가 참모장을 제치고 총사령관(대통령)에게 불쑥 이야기한다는 것은 군인 출신이었던 그분이 용납을 안 했을 겁니다』

               

               ─보고서는 청와대 보고 양식인가요.

               

               『그렇습니다. 보고번호 제48호는 경제수석실 자체 문서 분류 번호일 겁니다』

               

               그는 核개발에 관한 문서가 2급으로 분류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문서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일반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아요』

               

               ─대통령이 核개발을 지시했을까요.

               

               『朴대통령이 직접 「核무기 개발」이란 말을 입에 담으신 적은 없습니다. 만약 吳源哲 수석이 문서를 작성했다면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했으니까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챙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최근 비밀 해제된 美 외교문서에 나타난 한국의 核개발

               

               朴正熙 대통령은 왜 核무기를 가지려 한 것일까. 朴대통령은, 1969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주한 美 7사단의 일방적인 철수로 自主國防(자주국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不信에서 출발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의 목표는 카터(1977~1980년)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철회시키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核무기 개발문제를 놓고 韓·美 양국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朴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 1971년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을 1972년 초까지 개발하는 「번개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극비리에 核무기와 이를 운반하기 위한 장거리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개발도 진행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장비를 제조하려는 것이 아닐까, 「색안경」을 끼고 주시했다. 첨단 미사일 생산능력을 갖추고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다면 한반도 정세에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朴대통령의 지시로 비밀 核개발이 추진되면서 원자력 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再처리 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1972년 崔亨燮(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프랑스와 再처리 기술 및 시설도입 교섭에 나섰다. 연구용 원자로는 核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배출할 수 있는 高순도의 사용 후 核연료를 만들어 내며, 재처리 시설은 이 사용 후 核연료로부터 플루토늄을 뽑아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吳源哲 청와대 수석을 사령탑으로 한 核개발팀은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의 NRX형을,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1973~1974년 이를 적극 추진했다. 캐나다의 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원자력 연구소는 파키스탄 등 核개발을 꾀하는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社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키로 하고 1973년 9월 고위관계자가 SGN사를 방문,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社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캐나다로부터 CANDU(캔두)형 중수로의 도입을 추진했는데, 이는 평화적인 원자력 발전소 확보 외에 중수로가 수시로 사용 후 核연료를 꺼낼 수 있어 비밀 핵개발에 유리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발전소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교체한다. 미국은 이 점에 착안, CANDU型 원자로의 획득이 재처리 기술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한국 측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주기로 돼 있던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등에 압력을 가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던 NRX 연구로의 판매협상을 중단했다.

               

               1977년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社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핵연료 가공사업도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은 再처리 연구에 필수적인 것으로, 再처리 사업이 싹도 틔워 보지 못하고 사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간 미국 정부가 공개를 거부해 온 96건의 비밀 외교문서 중 朴대통령 시절의 核 관련 문건 15건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당시 공개된 비밀 문서들은 제럴드 포드(1974~ 1977년) 美 행정부에서 작성, 보고된 것들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국 정부의 핵개발 계획과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의 총력 외교전을 담고 있다.

               

               미국의 온갖 압박으로 한국은 1975년 12월경부터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정부는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협력이라는 대가를 선택한 것이었다.

               

               

              주한 미군 철수 포기를 이끌어 내다

               

               CANDU형 원자로를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데 대해 미국은 核무기 개발에 대한 의구심뿐만 아니라 利害(이해)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농축 우라늄 공급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상업적 시장이었다. 한국이 원자력 수입선을 다변화한다면 미국은 이 시장을 잠식당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한 基의 건설비가 20억 달러씩 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각국은 대통령 자신이 원자력 발전소 판매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로부터 구입하기로 했으니 미국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원자로 판매를 하지 말라고 캐나다에도 압력을 가했고,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라고 프랑스에도 압력을 가했다. 한국은 美 국무부와 의회의 압력으로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비준했다. 그러나 1977년에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美 의회는 수출입은행에 대해 古里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를 결의하기도 했다.

               

               1979년 6월, 카터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1978년에 철수한 병력 3400명을 제외하고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사실상 철회했다. 朴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은 미사일을 비롯한 核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카터 행정부에 전달한 결과였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前 주한 美 대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의 核개발은 核 확산 방지체제에 대한 중대 도전일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에 위험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1975년 초 포드 행정부는 한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해 직접적 행동에 나서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정이 있기 전 수 개월에 걸쳐 미국은 한국이 核 재처리 장비 및 기술과 플루토늄 생산 중수로를 프랑스 및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협의와 노력을 계속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의 기본적인 안보관계가 위험에 빠졌다고 인식하자 核 노력을 포기하겠다고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미국은 그 문제를 비밀로 하기로 하고 체면을 세워 주는 보상조치에 합의했다>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지 않게 할 것』

               

               미국의 방해로 재처리 시설 도입과 CANDU형 원자로 도입이 좌절된 1976년 무렵,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과 吳源哲 수석을 청와대 내에 있는 서재로 조용히 불렀다. 朴대통령은 『원자력 산업을 종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金실장의 말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일본式으로 원자력 산업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은 원자력 발전소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 일본은 필요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核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公知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核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원자력 산업정책에 대해 일본은 미국을 위시한 어떤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지 않다. 문제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원자력 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

               

               吳源哲 수석은 원자력 산업의 종합계획을 작성해서 裁可(재가)를 받고 재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金실장은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는 대통령 지시를 극비로 추진하라는 말로 해석했다고 한다. 우선 착수한 사업이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할 核 연료봉을 만드는 공장의 추진이었다.

               

               연료봉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경수로용 연료봉과 중수로용 연료봉이다. 경수로용 연료봉을 제조하려면 미국에서 농축 우라늄을 구입해서 제조해야 한다. 그런데 중수로용 연료봉은 천연 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제조가 용이하다. 그래서 정부는 우선 중수로용 연료봉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를 위해 1976년 12월1일 핵연료개발공단이 발족했다. 이것이 바로 원자로용 연료봉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核연료개발공단에서는 「화학처리 대체 사업」을 했다. 하도 미국 정부에 시달리다보니 「再처리」는 금지된 언어가 돼 버렸고 대신 「화학처리」로 둔갑해서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이었다. 재처리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익혀 놓은 뒤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다.

               

               한국 정부가 연료봉 공장 건설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한국이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에서 도입하려고 했을 때, 미국 측이 『한국에서 再처리 시설을 건설하겠다고 하는데, 再처리 시설에서 타고 남은 우라늄을 분리해 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는 이 우라늄을 써서 연료봉을 만드는 시설도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데 대해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은 꾸준히 원자기술의 自立을 추구해 왔다. ▲원자로 설계 기술 ▲核연료 설계 및 제작 기술 ▲농축ㆍ재처리 등 민감 기술 확보 및 原鑛(원광)에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까지의 核연료 공급 주기의 완성 ▲운전 기술 등 원자력 기술의 자립항목 중에서 한국은 「농축ㆍ재처리」만 제외하고는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뤘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가동하고 있는 原電은 18基로 발전용량(40%)으로 따지면 세계 4~6위권의 원자력 대국이다. 月城1호기의 경우, 세계 최고의 운전효율을 기록하고 있는 원자로로 손꼽힌다고 한다. 아무튼 1979년 10월 朴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은 후견인을 잃었다. 核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 1980년대 全斗煥 정권 출범 초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자라는 싹마저 잘라 버렸다. 核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의 이름마저도 「원자력」이란 말을 떼어 버린 것이다.

               

               

              남북한의 核개발 경쟁

               

               우리나라의 원자력 역사는 1956년 2월3일 韓美 간에 체결된 「원자력의 非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연구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한국은 1957년 8월18일 IAEA(국제원자력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58년 3월11일에는 원자력법이 공표됐다. 이 法은 우리나라의 法 중 483번째로 제정, 공포됐으니 꽤 일찍 제정된 법이다. 1959년 1월21일에는 원자력원이 창설되고, 1959년 3월1일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개소됐으며, 1962년 3월30일에는 비록 250kW의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가 가동을 개시했다. 미국 원조 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73만 달러가 투자된 이 원자로는 교육 및 기초 연구용이었다.

               

               우리나라는 1968년 7월1일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서명했으나 인준만은 보류해 왔었다. 남북이 함께 NPT에 가입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력 기술은 李承晩 대통령을 거쳐 朴正熙 대통령 연간에 이룩된 것들이다. 이후 대통령들은 원자력 발전에 획기전인 轉機(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원자력 개발도 우리와 시기는 비슷하다. 金日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무기를 위협수단으로 휴전협정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보고 핵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의 원자력연구개발은 1950년대 중반 舊소련의 드브나(Dubna) 연합 核연구소에 최학근을 대표로 하는 약 250여 명의 과학자들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舊소련 과학자들 또한 북한을 방문해 원자력기술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金日成 종합대학과 김책공대에 원자물리학부를 개설했고, 과학원 산하의 연구소에서 원자력 분야 훈련을 주관하였다. 1959년 북한과 소련은 북한에 의해서 「가구 공장」으로 명명된 북한 원자력연구단지 건립을 지원하는 상호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연구용 원자로 건설, 지질조사, 전문가 훈련 등을 소련이 지원하였다.

               

               이때 영변 구룡강 기슭에 현재의 영변 원자력연구단지가 결정되었고, 30여 명의 소련 核과학자들이 단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는 1967년에 조성이 완료돼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李升基(이승기) 박사가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內에 건설된 방사화학연구소는 그 후 1975년에서 1987년까지 再처리 공정을 개발 완료하였고, 이 일이 현재 북한 核문제를 유발시킨 근원이 되었다.

               

               북한의 核개발 시스템은 북한산 천연 우라늄→연구로→再처리 공장으로 이어지는 核연료 순환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외국에서 간섭할 방법이 없어 외교적 압력이 잘 먹히지 않는다. 사회시스템도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데 유리하다.

               

               

              核보유는 失이 더 크다

               

               核물리학자인 鄭根謨(정근모ㆍ63) 박사는 한국의 초기 核개발과 관련,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核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등 核 관련 조약이나 기구에는 모두 가입한 상태여서 국제적인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核개발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의지」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북한 등 저개발 국가가 국제적인 감시망을 뚫고 核개발에 성공하려면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核개발을 강행할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核개발 자체는 1940년대의 기술로서,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核무기를 만들 수 있는 「비밀 자료」들이 수두룩하게 널려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核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폐쇄된 북한과는 엄연히 달라요. 우리는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을 무시한다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옵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고, 핵우산下에 있는 상황에서 핵을 보유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스위스, 스웨덴 등 核개발 능력이 있는 나라들도 왜 核을 갖지 않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核보유 필요에 대한 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南阿共(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核무기를 폐기했고, 우크라이나ㆍ카자흐스탄도 核무기를 러시아에 반납한 사례를 들면서 『요즘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得(득)보다는 失(실)이 많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核 전문가들은 『한국은 평화적 再처리 기술 개발을 全세계에 선언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核개발은 남한의 강력한 대응개발을 초래하고, 북한이 자진해서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北核 해결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1980 년 육군본부의 ‘창군전사(創軍前史)’가 발행된 이 책은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군사연구소,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군사(軍史) 연구 자료로 쓰이고 있다.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1979 년 10 월 26 일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화로 인하여 흉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료에 의해 1980 년 8 월 18 일 창군 전사에 기록 되었다.

              한동안 박정희가 독립군을 수천명 학살하고, 수백회 토벌에 나섰다는 좌경주의자들의 글을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 다녔으나,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친일의 역사는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져야 하겠다.

              김일성 시절부터 박정희가 죽어야만 적화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주사파들과 386 좌파 세력들은 북한 공산당이 날조 왜곡한 기록들을 가지고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지금도 그들은 박정희를 철천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하였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이승만도 아닌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날조되었던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그렇게 박정희를 씹고 또 씹으면서 부관참시를 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신기남,김희선.이미경 등 진짜 악질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말 그대로 3 대를 떵떵거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출처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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