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0, 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 날 50, 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 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 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 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 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가 넘는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무려 4,3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0, 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 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우표수집 한답시고 우체국 앞에서 밤새고 그럴 때, 친구들과 우표책을 비교해가며 열을 올리던 때,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우표시트였다.
한복과 목련이 잘 어울리는 웃는 얼굴이 좋았고, 은은한 4색의 색감이 좋았고,
뭔가 귀한 대한민국 모성의 캐릭터라는 알듯 말듯한 향수가 있어 끌렸기 때문이다.

 
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격된 직후 옆으로 쓰러지는 육영수 여사 (74.8.15)
 

 
다들 슬퍼했다.  꼬마들은 덩달아 슬퍼했다.

 
故 육영수 여사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 (1939. 1. 1)



양로원 방문

 
휴가 장병 급식 봉사장 방문 (1967년 4월 5일, 시민회관앞)


 
적십자 봉사활동 (1968년 9월 4일, 대한적십자사)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인쇄 |메일

답글(3) | 관련글(0) http://blog.empas.com/solim122/10326671

 
울릉도 시찰하는 박대통령
조회(1796)
◆박정희대통령 | 2005/09/05 (월) 19:04
공감하기 | 스크랩하기(7)


독자 '유비무환'님이 제보한 사진.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62년 최고회의 의장신분으로 울릉도를 시찰하던 진귀한 사진"이라고 말했다. 울릉도 도동에서 울릉경찰서 및 울릉초등학교 시찰 후 도동의 중앙로를 통하여 부둣가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모습.

이 사진을 보신 어떤 분의 감상문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군....
이 사람은 뭘 해도 해낼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만 느끼는 감정인가...
도데체 이 압도감이란 뭐지?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풍기게 하는걸까..

17년 후의 박정희 대통령
 

[강화 들녘에서..모심는 박정희]
내용 : 퇴임하면 농촌으로 돌아가고자 원했던
박대통령의 마지막 모내기가 된 강화 들녘에서
 

 
[포항제철소에서... ]
내용 : 박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를 위한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인쇄 |메일
답글(0) | 관련글(0) http://blog.empas.com/solim122/10326528
 
육사교장의 편지 / 박정희 대통령
조회(1427)
◆박정희대통령 | 2005/09/05 (월) 19:02
공감하기 | 스크랩하기(12)
'육사 교장의 편지' 인기 폭발(2004년 2월 7일 조선닷컴 기사내용)

- ''젊은 세대들 똑똑한데 어른들이 교육 잘못시켰어요''
김충배(金忠培) 육군사관학교 교장(중장)의 ‘편지’가 인터넷상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기자 조갑제의 세계’(www.chogabje.com) 등 유명 사이트마다 ‘육사 교장의 편지’란 제목으로 띄워져 높은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편지는 지지난해 11월 22일 김 교장이 교내 강당에서 전 학년 생도 1000여명에게 강연한 내용으로, 김 교장이 교수진으로부터 전달받은 외부인사의 글을 강연용으로 보충한 것이라고 육사는 6일 밝혔다.
편지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인 여러분들은 50·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아는가?”라고 시작한다.
이어 1960년대 초반 서독에 파견될 광부와 간호사의 봉급을 담보로 1억4000만마르크의 차관을 받게 된 경위 서독에서 시체를 닦은 간호사와 하루 10시간 넘게 지하 1000m에서 땀흘린 광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서독에서 이들을 만나 가난이 서러워 통곡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또 편지는 여인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과 전국 쥐잡기 운동으로 모은 쥐털로 만든 ‘코리안 밍크’의 수출 월남 참전 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건설한 경부고속도로 이야기 등을 실은 뒤 “간호사와 광부, 참전용사와 중동 근로자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편지는 이어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할 자격이 있는가”고 반문한 뒤 “국민소득 4만달러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뭉쳐야 한다”고 끝을 맺는다.
김 교장이 강연할 당시 생도들의 분위기는 숙연했으며 눈물을 흘리는 생도도 있었다고 육사는 전했다. 육사는 강연 내용이 인터넷상에 올려진 것과 관련, “강연 내용이 좋아 학교 간부들이 띄운 것 같다”며 “육사에서는 메일 등을 이용해 교수와 생도들이 자주 대화를 갖는다”고 말했다.
(구성재기자 sjkoo@chosun.com)
■ 편지 원문   김충배(金忠培)육군사관학교長의 말씀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후손은 팔려나오지 않게 지난 1964년 12월 독일의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간호사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작은 네모 사진은 광부·간호사들이 朴대통령 연설을 듣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모습.
 
내맘의 강물 /  테너 - 팽재유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때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마음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 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때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 고,박정희 대통령 장모(이경령 여사)의 팔순잔치 동영상 ★
 
고,박정희 대통령의 장모이신 이경령 여사의 팔순잔치 동영상을
처음접한것이 3년전인가 하다.
나의 사촌 남동생이 8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잘나가던 정치부 기자였었다.
70년대에는 이후락씨 따라서 이북에도 갔다오고 하였는데,
정권이 바뀌니까 낙동강 오리알이 되버리고,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엔
지방 방송국사장으로 밀려나가자 얼마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다.
그러게 새도 한 철이라고, 있을때 고개숙이지, 박정권 빽믿고 까불더니만...
 
아찌가, 역사소설을 준비한다고 자료를 모으다가 마침 찾아가서
간신히 비디오 자료 몇개를 건져왔엇다.
그나마도 홈페이지 만들어주는 사람이 자료들을 훔쳐가서
남은것이 별로 없지만, 그때 남은 자료중에 이 비디오도 있었다.
소포로 부친 이비디오를 보면서 한참을 울고,
올 1월인가 엠블을 통해서 보면서 울고,
또 오늘 이 자료를 올리면서 울고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왜 울었는지는 아래글을 마저 읽으시면 이해들 되실겁니다.
 
 
마우스 오른쪽 클릭해서 확대 누르면 전체 화면으로 감상할수 있습니다.

★ 간단한 요약 ★
( 뭐가 간단해, 이 자료 찾으면서 ?어보았는데 원더우먼이 올리는것이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다니까)
제작 - 국립영화 제작소
제작일 - 1975,1,22,
촬영 시간 (편집후) - 34분
 
★ 내용 ★
고,육영수 여사가 죽고 (1974, 8,15)  5개월여후인 1975년 1월에 촬영된 것인데,
육여사의 모친이자,  고,박정희씨의 장모이신 <이 경령 여사>의 팔순 잔치를 하게된다.
우선 사회자의,(사회자라고 하여도 박정희 측근중에 비서쯤 되는가보다.) 진행으로
한때 이 나라를 호령했던 최고 책임자의 장모님 팔순잔치치고는 소박한 례(禮)를 시작한다.
처음 비디오를 보았을때보다는 편집이 많이 된듯하여 자세한 선물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도자기 선물을 빼고는 소박하다.
음식또한, 소박한듯하여,1부로 양식이 마련되었고,2부로 한식이 차려져 나온다.
그 당시 <가정의례준칙>이라 하여 국민들에게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간결하게 준비하라는
법령을  실시하던때라, 아마도 그랬나보다.
하객또한, 삼부요인과 장관들은   없고, 화면에서 왼쪽으로는 박정희 측근과 오른쪽으로
이 경령 여사의 자제들이 배치되었다.
박정희씨 오른쪽에 있는사람은 그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후락씨이다,
지금은 용산 어딘가에서 살고있다는 이후락씨는 박정희씨가 가장 아끼던 오른팔이었다.
그 당시 최고로 맛난것만 먹어서 그런지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가지고서는
(이것도 인신 공격이되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중앙정보부장이란 사람치고는 허약하게 생겼다.
그리고, 홍정욱(남궁원씨 아들)의 처외조부이자, 한때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였고, 한일협정에 가담했던
김동조씨도 보인다. --- 이 당시 외무부 장관은 이동원인가 하는 사람일것이다.
이 경령 여사의 바로 옆에는 이 여사의 장남이자,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ㅇㅇㅇ씨가 자리한다,
그 옆으로 그의 부인, 자식들이 배치되어 앉아있고, 박 정희씨와 이 경령 여사의 자리인 본좌와
반대편에는 박 정희씨의 장녀인 박 근혜 (근영) ,차녀인 박 영혜(은영),  아들이자 시대의 불출인
박 영식(지만)이  이종사촌들과 자리하고 있다.
자 이제, 잔치하면 빼놓을 수없는 노래판에 대해 말해보자.
박정희 대통령의 <뱃사공>과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장면도 나오고,
외가쪽 친지인 젊은이(이 경령 여사의 손주인듯하다)가 노래를 시작하면서 흥을 돋구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노래부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노래를 잘 부르는것 같다.
여기 자료에서는 빠졌지만  집에서 보았던 비디오에는 박 근혜씨도 노래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박지만이 부르는 노래인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는 전국민적으로 부르게하였던 것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했던 노래인지라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도 줄줄 외웠던 노래이다.
그런데, 박 지만씨는 일부러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를 부른것 같은데, 노래 중간,중간을 끊어먹고 있다.
국민들은 강제적으로 외우다시피 하였는데, 그당시 학생이던 박지만씨가 그것도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새마을 운동>이란 노래를 못한다니 그건 어디나라 풍습인가 생각이 든다.
참 알다가도 모를일이 아니라, 모르다가도 알 일이다.
 
★ 마침표 ★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반대 정치적 입장을 보인다고, 목침으로 머리를 맞아
스무방을 꼬맸다니 그런 풍설도 나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고도의 국민들에게서 점수를 얻기위해 그런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랑을 했던 부인이였나 생각이 든다.

박 정희 씨에겐 첫 번째 부인이 있었다.
아들 하나를 낳았던 여인인데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의 여자로 박정희씨가 잠시 독립군 진영에 들어가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통해서 말이다. 아마도 해방을 맞으니까 독립운동을 하였던 상해임시정부가
나라의 정권을 잡지는 않나해서 들어간 것일것이다.
그 이후, 그녀와 헤어지고는 미군정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첫번째 부인은 많은 갈등으로 스님이 되었고)
이 박사(이승만)가 정권을 잡자   다시 미군하의 지금의 육사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걷게된다.
이때 만난 사람이 육영수 여사다. 육 여사또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가난해서 배우고자해도 제대로 배우기 어려웠던지라 선생님이 가장 부러웠던 모양이다.

잔치내내 자식들의 재롱에 기분이 좋아 음식 하나 입에 대지못하고 좋아하는 이 경영 여사의 웃는 모습에
웬지 허탈하기도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정권이 뭐길래,야욕이 뭐길래, 정치비사는 뭐라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것이지만,
정권을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죽게했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냉혹함에,
그 스스로도 마음이 굉장히 아팠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자라온 사람이기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던 육여사의 가족들이
곧 박 정희 그 자신의 가족이기도 하였기에, 그래서 다른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사람이 박 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랑하는 부인을 보내고, 마음이 아팠기에, 마지막으로 육여사에게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죄스러움에  장모이자 어머니인 <이 경령 여사>의 팔순잔치를 벌여준 것같다.

이 경령 여사의 기분좋아서 손까지 가려가면서 웃는 모습을 보자니,
자신의 딸이 5개월전 어떻게 비명횡사했는지 알고나 있는건지, 아니면 모르는건지
 
아마도 이 것이 가족인가 보다. 자식이 죽었다면 염라대왕의 할애비가 온다해도
잔치가 무엇이겠는가,
잔치는 고사하고 끼니조차 끊을 지경인데 말이다.
그런데 비명횡사했던 딸의 남편이자 사위가 차려주는 잔치에,
자신이 손수 낳아서 옥이야 금이야 길렀던 자손들로부터 재롱을 받는데 아니 기쁘겠는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도, 언제 그랬냐는 둥 돌아섰던 등도 다시 맞보는것이 가족이란 것이다.
 
박 정희 대통령은, 비명횡사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안타깝고 슬펐으랴.
장모의 팔순 잔치를 하면서 자손들의 재롱에 기뻐하는 어머님(장모)의 모습에
일말의 죄책감을 쓸어내렸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있는 부인이 이 자리를 본다면 야속한 지아비를 용서해줄거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육여사또한 모친의 팔순잔치를 보았다면 분명, 야속한 지아비를 용서하고 마음 편히 좋은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추신 --- 정치고 뭐고를 떠나서 가족이란 어떤것인가, 느껴볼 자료인것 같다.
             2004년,7월달에 KBS를 통해서 처음 공개된 자료라고 한다.
   

 

 
 
생가 방문한 박정희
◆박정희대통령 | 2005/07/05 (화) 09:24












 
 
   
 
 
1950.12.12 박대통령 결혼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박정희대통령 |




















































































































 
 
조회(226)
◆박정희대통령 | 2005/01/21 (금) 14:03
공감하기 | 스크랩하기(6)
1963년 제5대 박정희대통령 취임 연설 장면
1963년 박정희대통령 주재로 첫 국무회의 모습
1964년 경제 기획원 재무부 초도 순시 장면
1956년 한 일 회담 비준서에 서명 모습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김영삼 접견 환담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이승만전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접견 환담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가족 기념 촬영
1966년 박정희대통령 생신 기념 행사에 참석 어린이들이게 절을 받는 모습
1966년 7개국 마닐라 정상 회담 대표와 기념 촬영 모습
1966년 박정희대통령 월남 맹호부대 시찰 모습
1966년 남산 화재로 이재민 수용소 시찰하는 박정희대통령 모습
1967년 박정희대통령 구로동 수출산업 공업단지 준공식에 참석
1967년 박정희대통령 대구 유세장 장면
1968년 박정희대통령 경부선 고속도로 기공식 참석
1968년 박정희대통령 경부선 고속도로 건설현장 시찰 업무 브리핑 청취 모습
 
1968년 박정희대통령 제1회 무역 박람회 시찰
 
1968년 박정희대통령 주민등록증 수령 모습
 
1968년 박정희대통령과 미국 존슨 대통령접견 선물 교환 모습
 
1969년 박정희대통령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정상 환담 기념 촬영
1971년 박정희대통령 내외 선거유세 중 손을 흔드는 모습
1971년 박정희대통령 내외 대통령선거 투표 모습
1971년 박정희대통령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식 참석 연설
1971년 박정희대통령 농민과 벼 베기 참석
1971년 박정희대통령 서울 지하철1호 기공식에 참석및 연설
1971년 박정희대통령이 민주공화당 김종필 부총재 임명장 수여 모습
1972년 박정희대통령이 김종필 국무총리 접견 임명장 수여
1973년 박정희대통령 남해대교 준공식 참석
1974년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영구차 떠난뒤 눈시울 장면
1974년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 영구차 영구차옆 대통령 모습
       
1974년 유족들 육영수여사 묘소 참배 모습
1975년 박정희대통령 개헌안 국민투표에 관한 특별 성명 발표 장면
1974년 박정희대통령 국회의사당 준공식 참석
1975년 박정희대통령과 신민당 김영삼 총재 접견환담  
1978년 박정희대통령 모심기 행사 참석
1979년 박정희대통령 삽교호 준공식 참석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빈소에서 큰영애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영정을 바라보는 큰영애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 빈소에 분향하는 큰영애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박 정 희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1972년 吳源哲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核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 『1980년대 초, 高純度 플루토늄彈을 완성한다』

               

               

              플루토늄彈을 건의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 아래 진행된 한국 정부의 核무기 개발 계획이 최근 문서로 확인됐다. 이 核개발 비밀문서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1972년 9월8일 吳源哲(오원철ㆍ74) 당시 대통령 제2 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보고서는 그간 공공연한 비밀로만 알려져 온 朴대통령의 核개발 계획이 우리 국내 문서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史料的(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지를 포함,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核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吳源哲 수석의 이름, 그리고 職印(직인) 등이 찍혀 있고, 「원자 核연료 사업 계획을 별첨과 같이 작성」, 「별첨 계획의 결론에 의거, 원자핵 연료 사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核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核무기의 비교(도표)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생산과정(그림) ▲우리나라의 核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核연료 사이클(그림) 순으로 돼 있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장부터는 「核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둘째 장부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核무기의 종류로 「核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核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는 문제를 도표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우라늄 235폭탄의 원료는 90% 이상의 高濃縮(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폭탄의 원료물질은 90% 이상의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239, 수소폭탄의 원료도 液化(액화)중수소 및 三重水素(삼중수소) 또는 重水素化(중수소화) 리튬6」인데, 어떤 핵 원료 물질을 이용해 核을 개발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미뤄 청와대에 보고되는 核개발을 위한 최초 보고임을 짐작케 한다.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개발해야 할 核무기는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彈(탄)을 擇(택)함이 타당함」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우라늄彈엔 9억 달러 소요

               

               비밀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과 플루토늄 239탄에 대한 비교도 곁들이고 있다.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됐던 우라늄 235탄은 한 개의 核무기를 만드는 데 농축 우라늄(원자번호 235) 25kg이 필요하고,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플루토늄 239탄 1개를 만드는 데는 고순도 플루토늄 239가 8kg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라늄 235탄은 천연우라늄→농축→고농축 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탄은 천연우라늄→원자로→高純度 플루토늄 239의 과정을 거쳐 제조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는 우라늄 235탄은 고농축 시설 건설에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우라늄 235탄 1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간 우라늄 134kg을 생산해야 하고, 그 투자액은 약 9억 달러, 시설 건설기간에 8년이 소요된다고 지적했다. 우라늄彈을 만들기 위한 소요전력만도 200만kW가 들어가는데다 기술의 도입이나 개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라늄탄은, 농축시설을 보유하면 상업발전용 농축 우라늄 연료도 생산할 수 있고, 수소폭탄의 「방아쇠」로 유리하며, 毒性(독성)이 없어 취급이 안전하다는 장점 등도 꼽고 있다.

               

               플루토늄彈의 경우, 고순도 플루토늄 생산에 비교적 투자비가 적게 든다는 점을 들었다. 그 예로 연간 8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투자비가 약 4200만 달러, 시설 건설기간은 6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플루토늄은 원자력 발전용 연료로 사용도 가능해 一擧兩得(일거양득)임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플루토늄은 有害(유해)물질이므로 취급하기에 위험이 따른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초 플루토늄 생산」

               

               이 비밀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核개발을 위한 플루토늄도 얻고 발전도 할 수 있는 「중수로형 원자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일한 原電인 古里(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非정상 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즉 정상 가동으로 생산되는 플루토늄은 연간 I00kg이지만, 플루토늄의 純度(순도)가 70% 이하이므로, 군사용(90% 이상의 純度 요구)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고서는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두 가지 案(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고순도 플루토늄의 생산 및 발전이 가능한 「겸용爐(로)」에 의하는 방법이다. 건설될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 제2호기를 50만kW급 「천연 우라늄, 중수형 발전로」로 해 연간 高純度 플루토늄을 200kg 정도 추출하는 방법으로, 日本ㆍ印度(인도)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商用(상용)발전과는 별도로 플루토늄 생산용 「연구로」를 도입하는 방법이다. 연간 8kg의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4만kW의 「천연 우라늄, 중수형 연구로」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자유중국(대만)이 그 예라고 밝혔다.

               

               高純度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겸용로」를 건설하는 데는 총 2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분석했다. 발전로는 1억5500만 달러(경수로는 1억1000만 달러), 再처리 비용 4200만 달러, 가공비용 300만 달러가 든다.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의 투자비용은 총 4200만 달러가 소요되는데, 발전로 가격이 2900만 달러, 再처리 비용이 1100만 달러, 가공비용이 2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겸용로」를 채택하면, 商用 발전을 겸할 수 있는 데다가 플루토늄 量産(양산)이 가능하고, 核彈(핵탄) 수요가 없을 때는 발전로 및 재처리 공장을 商用으로 전환할 수 있으나, 비교적 투자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연구로」를 채택하면, 투자비가 적은 장점이 있으나 商用발전을 겸할 수 없고,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어 核彈 수요가 없을 경우에는 연구목적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1案인 「겸용로」를 택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에 따라 古里발전소 2호기를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重水爐(중수로)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核연료인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시기를 1980년대 초로 잡았다.

               

               

              「해외 한국인 기술자를 불러오라」

               

               비밀 보고서는 核무기 비밀 개발계획을 다음과 같이 종합,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核개발 주무 부서와 인력확보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摘示(적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술수준,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철저한 기초작업을 수행한다. 1974년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원자력연구소는 상기 목적에 맞도록 개편ㆍ보강한다.

               

               가.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함.

               

               나. 기술자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되 반드시 특정 임무를 부여하여 전문훈련을 받도록 함.

               

               다. 현재의 실험 원자로 및 기타 시설은 원자력 전공 대학생의 교육훈련용으로 50% 이상을 할애함.

               

               라. 원자력을 전공하고자 하는 대학생 전원에 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여 원자력연구소에서 실기교육을 받고, 졸업 후 원자 核연료 사업에 종사토록 함>

               

               보고서의 마지막 章 상단에는 캐나다産 원자로인 「캔두(CANDU)」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한국은 1974년부터 캐나다와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는 CANDU型 중수형 원자로의 교섭에 나섰다.

               

               한국이 再처리 시설 도입을 프랑스와 교섭하고, CANDU형 원자로까지 도입키로 하자 포드 행정부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核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고 갖가지 외교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5년 5월, 印度에서 原爆(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사용한 원자로가 바로 한국에서 도입하기로 한 CANDU型 원자로였던 것이다.

               

               기자는 지난 7월8일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청평호반으로 차를 몰았다. 문건을 작성한 吳源哲 당시 경제 제2수석을 만나 核무기 개발 계획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묻기 위해서였다. 吳 前 수석은 『내가 작성한 문서가 틀림없다. 이 보고를 한 얼마 후 다시 유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그 이상은 답변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보고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核연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지 核개발과는 무관하다』면서, 기자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당시에 (미국 정부에) 당한 것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는 『金正日이 核을 갖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도 核개발을 했었다고 하면 똑같은 「망나니」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비밀 보고서를 朴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작성했는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튿날 오후 기자는 金正廉(김정렴ㆍ79)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를 찾아가 문서를 보여 주었다. 그는 결재란에 자신과 대통령의 「서명」이 없다면서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吳수석이 朴대통령에게 直報(직보)했다는 뜻인가요.

               

               『그건 불가능해요. 朴대통령은 외부인을 접견할 때 비서실장을 꼭 배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참모장(비서실장)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요. 참모(수석)가 참모장을 제치고 총사령관(대통령)에게 불쑥 이야기한다는 것은 군인 출신이었던 그분이 용납을 안 했을 겁니다』

               

               ─보고서는 청와대 보고 양식인가요.

               

               『그렇습니다. 보고번호 제48호는 경제수석실 자체 문서 분류 번호일 겁니다』

               

               그는 核개발에 관한 문서가 2급으로 분류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문서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일반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아요』

               

               ─대통령이 核개발을 지시했을까요.

               

               『朴대통령이 직접 「核무기 개발」이란 말을 입에 담으신 적은 없습니다. 만약 吳源哲 수석이 문서를 작성했다면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했으니까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챙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최근 비밀 해제된 美 외교문서에 나타난 한국의 核개발

               

               朴正熙 대통령은 왜 核무기를 가지려 한 것일까. 朴대통령은, 1969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주한 美 7사단의 일방적인 철수로 自主國防(자주국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不信에서 출발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의 목표는 카터(1977~1980년)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철회시키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核무기 개발문제를 놓고 韓·美 양국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朴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 1971년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을 1972년 초까지 개발하는 「번개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극비리에 核무기와 이를 운반하기 위한 장거리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개발도 진행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장비를 제조하려는 것이 아닐까, 「색안경」을 끼고 주시했다. 첨단 미사일 생산능력을 갖추고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다면 한반도 정세에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朴대통령의 지시로 비밀 核개발이 추진되면서 원자력 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再처리 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1972년 崔亨燮(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프랑스와 再처리 기술 및 시설도입 교섭에 나섰다. 연구용 원자로는 核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배출할 수 있는 高순도의 사용 후 核연료를 만들어 내며, 재처리 시설은 이 사용 후 核연료로부터 플루토늄을 뽑아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吳源哲 청와대 수석을 사령탑으로 한 核개발팀은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의 NRX형을,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1973~1974년 이를 적극 추진했다. 캐나다의 중수로 원자로를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의 국제상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원자력 연구소는 파키스탄 등 核개발을 꾀하는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社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키로 하고 1973년 9월 고위관계자가 SGN사를 방문,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社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캐나다로부터 CANDU(캔두)형 중수로의 도입을 추진했는데, 이는 평화적인 원자력 발전소 확보 외에 중수로가 수시로 사용 후 核연료를 꺼낼 수 있어 비밀 핵개발에 유리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제 경수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발전소 가동을 중단시킨 뒤 연료를 교체한다. 미국은 이 점에 착안, CANDU型 원자로의 획득이 재처리 기술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한국 측에 민감기술(sensitive technology)을 넘겨주기로 돼 있던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등에 압력을 가했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 중수로 1기와 함께 한국에 끼워 팔기로 돼 있던 NRX 연구로의 판매협상을 중단했다.

               

               1977년엔 원자력 연구소가 벨기에 BN社와 추진하던, 플루토늄을 재사용한 제2핵연료 가공사업도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은 再처리 연구에 필수적인 것으로, 再처리 사업이 싹도 틔워 보지 못하고 사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간 미국 정부가 공개를 거부해 온 96건의 비밀 외교문서 중 朴대통령 시절의 核 관련 문건 15건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당시 공개된 비밀 문서들은 제럴드 포드(1974~ 1977년) 美 행정부에서 작성, 보고된 것들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국 정부의 핵개발 계획과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의 총력 외교전을 담고 있다.

               

               미국의 온갖 압박으로 한국은 1975년 12월경부터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정부는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협력이라는 대가를 선택한 것이었다.

               

               

              주한 미군 철수 포기를 이끌어 내다

               

               CANDU형 원자로를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데 대해 미국은 核무기 개발에 대한 의구심뿐만 아니라 利害(이해)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농축 우라늄 공급은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상업적 시장이었다. 한국이 원자력 수입선을 다변화한다면 미국은 이 시장을 잠식당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한 基의 건설비가 20억 달러씩 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각국은 대통령 자신이 원자력 발전소 판매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캐나다로부터 구입하기로 했으니 미국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원자로 판매를 하지 말라고 캐나다에도 압력을 가했고,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라고 프랑스에도 압력을 가했다. 한국은 美 국무부와 의회의 압력으로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비준했다. 그러나 1977년에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美 의회는 수출입은행에 대해 古里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를 결의하기도 했다.

               

               1979년 6월, 카터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1978년에 철수한 병력 3400명을 제외하고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사실상 철회했다. 朴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은 미사일을 비롯한 核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카터 행정부에 전달한 결과였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前 주한 美 대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의 核개발은 核 확산 방지체제에 대한 중대 도전일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에 위험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1975년 초 포드 행정부는 한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해 직접적 행동에 나서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정이 있기 전 수 개월에 걸쳐 미국은 한국이 核 재처리 장비 및 기술과 플루토늄 생산 중수로를 프랑스 및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협의와 노력을 계속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의 기본적인 안보관계가 위험에 빠졌다고 인식하자 核 노력을 포기하겠다고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미국은 그 문제를 비밀로 하기로 하고 체면을 세워 주는 보상조치에 합의했다>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지 않게 할 것』

               

               미국의 방해로 재처리 시설 도입과 CANDU형 원자로 도입이 좌절된 1976년 무렵,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과 吳源哲 수석을 청와대 내에 있는 서재로 조용히 불렀다. 朴대통령은 『원자력 산업을 종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金실장의 말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일본式으로 원자력 산업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은 원자력 발전소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 일본은 필요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核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公知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核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원자력 산업정책에 대해 일본은 미국을 위시한 어떤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지 않다. 문제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원자력 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

               

               吳源哲 수석은 원자력 산업의 종합계획을 작성해서 裁可(재가)를 받고 재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金실장은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는 대통령 지시를 극비로 추진하라는 말로 해석했다고 한다. 우선 착수한 사업이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할 核 연료봉을 만드는 공장의 추진이었다.

               

               연료봉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경수로용 연료봉과 중수로용 연료봉이다. 경수로용 연료봉을 제조하려면 미국에서 농축 우라늄을 구입해서 제조해야 한다. 그런데 중수로용 연료봉은 천연 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제조가 용이하다. 그래서 정부는 우선 중수로용 연료봉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를 위해 1976년 12월1일 핵연료개발공단이 발족했다. 이것이 바로 원자로용 연료봉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核연료개발공단에서는 「화학처리 대체 사업」을 했다. 하도 미국 정부에 시달리다보니 「再처리」는 금지된 언어가 돼 버렸고 대신 「화학처리」로 둔갑해서 재처리 기술을 우회적으로 배우려고 한 것이었다. 재처리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술을 따로 익혀 놓은 뒤 나중에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략이었다.

               

               한국 정부가 연료봉 공장 건설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한국이 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에서 도입하려고 했을 때, 미국 측이 『한국에서 再처리 시설을 건설하겠다고 하는데, 再처리 시설에서 타고 남은 우라늄을 분리해 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는 이 우라늄을 써서 연료봉을 만드는 시설도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데 대해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은 꾸준히 원자기술의 自立을 추구해 왔다. ▲원자로 설계 기술 ▲核연료 설계 및 제작 기술 ▲농축ㆍ재처리 등 민감 기술 확보 및 原鑛(원광)에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까지의 核연료 공급 주기의 완성 ▲운전 기술 등 원자력 기술의 자립항목 중에서 한국은 「농축ㆍ재처리」만 제외하고는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뤘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가동하고 있는 原電은 18基로 발전용량(40%)으로 따지면 세계 4~6위권의 원자력 대국이다. 月城1호기의 경우, 세계 최고의 운전효율을 기록하고 있는 원자로로 손꼽힌다고 한다. 아무튼 1979년 10월 朴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은 후견인을 잃었다. 核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 1980년대 全斗煥 정권 출범 초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자라는 싹마저 잘라 버렸다. 核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의 이름마저도 「원자력」이란 말을 떼어 버린 것이다.

               

               

              남북한의 核개발 경쟁

               

               우리나라의 원자력 역사는 1956년 2월3일 韓美 간에 체결된 「원자력의 非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연구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한국은 1957년 8월18일 IAEA(국제원자력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58년 3월11일에는 원자력법이 공표됐다. 이 法은 우리나라의 法 중 483번째로 제정, 공포됐으니 꽤 일찍 제정된 법이다. 1959년 1월21일에는 원자력원이 창설되고, 1959년 3월1일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개소됐으며, 1962년 3월30일에는 비록 250kW의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가 가동을 개시했다. 미국 원조 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73만 달러가 투자된 이 원자로는 교육 및 기초 연구용이었다.

               

               우리나라는 1968년 7월1일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서명했으나 인준만은 보류해 왔었다. 남북이 함께 NPT에 가입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력 기술은 李承晩 대통령을 거쳐 朴正熙 대통령 연간에 이룩된 것들이다. 이후 대통령들은 원자력 발전에 획기전인 轉機(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원자력 개발도 우리와 시기는 비슷하다. 金日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무기를 위협수단으로 휴전협정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보고 핵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의 원자력연구개발은 1950년대 중반 舊소련의 드브나(Dubna) 연합 核연구소에 최학근을 대표로 하는 약 250여 명의 과학자들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舊소련 과학자들 또한 북한을 방문해 원자력기술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金日成 종합대학과 김책공대에 원자물리학부를 개설했고, 과학원 산하의 연구소에서 원자력 분야 훈련을 주관하였다. 1959년 북한과 소련은 북한에 의해서 「가구 공장」으로 명명된 북한 원자력연구단지 건립을 지원하는 상호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연구용 원자로 건설, 지질조사, 전문가 훈련 등을 소련이 지원하였다.

               

               이때 영변 구룡강 기슭에 현재의 영변 원자력연구단지가 결정되었고, 30여 명의 소련 核과학자들이 단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는 1967년에 조성이 완료돼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李升基(이승기) 박사가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內에 건설된 방사화학연구소는 그 후 1975년에서 1987년까지 再처리 공정을 개발 완료하였고, 이 일이 현재 북한 核문제를 유발시킨 근원이 되었다.

               

               북한의 核개발 시스템은 북한산 천연 우라늄→연구로→再처리 공장으로 이어지는 核연료 순환 사이클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외국에서 간섭할 방법이 없어 외교적 압력이 잘 먹히지 않는다. 사회시스템도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데 유리하다.

               

               

              核보유는 失이 더 크다

               

               核물리학자인 鄭根謨(정근모ㆍ63) 박사는 한국의 초기 核개발과 관련,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核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등 核 관련 조약이나 기구에는 모두 가입한 상태여서 국제적인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核개발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의지」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북한 등 저개발 국가가 국제적인 감시망을 뚫고 核개발에 성공하려면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核개발을 강행할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核개발 자체는 1940년대의 기술로서,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核무기를 만들 수 있는 「비밀 자료」들이 수두룩하게 널려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核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폐쇄된 북한과는 엄연히 달라요. 우리는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을 무시한다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옵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고, 핵우산下에 있는 상황에서 핵을 보유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스위스, 스웨덴 등 核개발 능력이 있는 나라들도 왜 核을 갖지 않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核보유 필요에 대한 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南阿共(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核무기를 폐기했고, 우크라이나ㆍ카자흐스탄도 核무기를 러시아에 반납한 사례를 들면서 『요즘 핵무기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得(득)보다는 失(실)이 많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核 전문가들은 『한국은 평화적 再처리 기술 개발을 全세계에 선언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核개발은 남한의 강력한 대응개발을 초래하고, 북한이 자진해서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北核 해결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M16 과 박정희  




              ☆ 대통령 박정희는 이런 사람이였습니다. ☆


                지금 이야기는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 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의 핵심 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인하여 그 동안 소원해졌던 미국
                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이 월남전
                에서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물질적인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게 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M-1 소총으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낡은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한 핵심인사는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 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례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
                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러나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습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행색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그의 허름한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는 긴장감을 맛
                보았습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 저고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한 없이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아, 네, 각하!"하면서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
                을 그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
                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그 순간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깨닫고 실망하면서,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큰 느낌마져 많이 동요하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
                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 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힘있게 말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습니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이
                보였습니다.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며칠 전 한나라당의 한 의원과 점심을 먹었는데, 그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더군요.
              박정희 대통령 얘기를 하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청와대에서 오래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박대통령은 무슨 보고를 하면,  보고서에 밑줄 치고 깨알같이 당신의 의견을 적어 내려보냈습니다. 보고서가 아무리 두껍더라도 다 읽었습니다. 더 상세하게 보고하라고 야단친 적도 있습니다. 그때 얘기를 하려니까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당시 서해 5도는 무방비 상태였는데, 박대통령이 서해 5도를 튼튼히 하는 방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보고를 하면, ‘현장에 가봤느냐’ ‘어디는 어떻게 했느냐’ 등 꼬치꼬치 따졌습니다. 서해5도의 구석구석을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국방부장관이 몇번이고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때 튼튼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거기서 말썽이 없었던 겁니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더니 모든 보고서를 한장으로 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행사 때마다 말씀자료를 만들라고 하는 겁니다. 서너명이 만나도 말씀자료, 몇십명이 만나도 말씀자료……. 청와대에 어디 인력이 많습니까. 청와대는 해당부처에 지시하게 되고, 해당부처에서는 사무관이나 주사가 대통령 말씀 자료를 만들게 됩니다. 대통령이 결국 주사나 사무관이 만든 말씀자료를 읽고 있는 겁니다.”

               

              “박대통령은 기름값이 올랐다 하면, 실내온도를 몇도씩 내리는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부터 내복을 입고 실천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위에서 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말이죠. 박대통령은 항상 부하들에게 경어를 썼습니다. 박대통령이 군인 출신이라 나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요.”
              “박대통령이 인권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그런 지도자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박대통령 같은 리더십이 필요한데…….”

              이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대통령을 보며, 박대통령을 떠올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愛國, 愛族, 愛民하는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 조선일보 주용중 기자 블로그 2004년 12월5일



               

              집무실, 식당, 침대 머리맡까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청와대 집무실과 상황실 심지어 식당에까지 온통 지도와 각종 차트로 가득했다. 인척도가 나날이 체크되었다. 처음 만드는 고속도로이므로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육사 출신의 우수한 공병장교들을 뽑아서 각 공사 구역마다 배치하여 건설업자들을 기술 지도하고 감독토록 했다. 야당은 고속도로가 드러누워 있기에 망정이지 서 있는 것이라면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 宋孝彬 <가까이서 본 박정희 대통령>

               

              ■박대통령의 성격이 아주 세밀해요. 청와대 침대 머리맡에 ‘소양강 댐 며칠 착공, 며칠 완공’, ‘영산강 댐 며칠 완공’하고 쓴 쪽지를 핀으로 붙여 놓았어요. 담당 장관한테 체크하면 될 텐데, 직접 현장소장에게 전화를 해요. 얼마나 진행됐나 대통령이 반드시 확인을 하니까, 일을 지시받은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 책임자까지 벌벌 떠는 거예요. 제가 “각하, 주무실 때라도 편히 주무시지 이런 걸 왜 붙여 놓으십니까” 하니까 대통령이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이렇게 점검을 하니까 계획대로 되는 거야” 그러세요. 학생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 같아. / 金龍泰 증언 / 월간조선 2002년 4월



               

              나는 현실주의자……그러나 이상은 있다

               

              ■아버지께 제가 여쭸어요. “아버지는 낙관주의자세요, 아니면 비관주의자세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나는 현실주의자야. 그러나 나에게도 이상은 있어” 그러셔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이상을 맞춰볼까요? 자주국방, 자립경제, 인정이 넘치는 사회 아니예요?”하고 아버지가 늘 강조하시던 것들을 꼽았죠. 그러니까 아버지가 거기에 하나를 더 붙이셨어요. “공정한 소득분배도 이루어져야 해” / 고 박대통령 내외 기념관건립 추진, 박근혜씨 / 주간조선 1988년 11월13일
               
              ■아버지가 메모를 하신 게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들여다보면 정말 아버지는 완전히 60년대, 70년대에 그냥 어떡하면 나라를 빨리 발전시킬까 거기에 모든 것을 기울이셨다는 것이 절절히 나타나요. 그러니까 한해 대책을 강구하시면서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으시고 일단계는 어디다, 이단계는 어디다 하고, 또 예를 들면 농업정책을 구상하시면서 소 한 마리 값이 충청북도는 몇십만원이고, 어디는 몇십만원이고, 양송이는 평당 가격이 어떻고, 그런 것을 전부 이렇게 실제 계산을 하시고 수익이 얼마, 투자가 얼마고 하는 기록이 나타나지요. 심지어 아버지는 나라를 빨리 발전시켜야 하는데 혹한기 겨울에는 산업발달에 지장이 많잖아요, 날씨 때문에. 그 기간까지도 아까우셔 가지고 그래서 쭉 매년 산업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진가, 이것을 유심히 보셨다가 어떤 때는 12월초부터 아주 추워질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12월말까지도 따뜻한 해가 있고 또 3월도 그렇고, 그래서 결국 우리나라 산업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기간은 12월 중순부터 3월초까지다, 그런 결론도 내리시고 말하자면 그런 발자취가 여기 담겨져 있습니다. / MBC-TV 박경재의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1989년 5월19일

               

              ■아버지는 시작한 일을 흐지부지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가 정말 대단하셔서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챙기셨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자나깨나 고속도로 생각을 하면서 길을 어느 쪽으로 내는 것이 좋을까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몇 번이나 현장을 순시하셨다.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의 구조는 어떻게 할까 종이에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직접 그려보시기도 했다.


              제주도에 농장을 지어 귤을 재배하는 일을 계획하실 때는 1년 수익이 얼마나 될까를 전문가들과 일일이 계산하셨고 나무를 어떻게 심어야 할지까지 생각하셨다. 공업단지를 지정할 때도 반드시 직접 사전답사와 현장확인을 하신 후 결정하셨다. 그렇게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나 역시 어떤 일을 할 때는 끝까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 박근혜-언제나 진지했던 아버지의 식탁 강의 / 신동아 2003년 6월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는 조국 산하
               
              ■1973년 9월20일 헬리콥터 편으로 충남 아산만과 이리공업단지를 돌아본 그는 헬기 아래로 푸른 산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자고 말해 왔는데 지금 바로 내려다보이는 저 풍경이야말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그림 같다”고 만족해 했다. 한편 산기슭에 있는 논들을 가리키며 “저렇게 고지대에 있는 천수답에까지 풍작이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2주일 내지 4주일 동안 일기가 좋아야 대풍을 그대로 거둬들이게 될 터인데…”라고 말했다. / 朴源卓 <역사의 점화> 

               

              ■박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 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대통령은 자기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 金正濂 <아, 박정희>

              비가 와야 할 텐데……

               

              ■수리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당시에는 가뭄으로 국민들이 고통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자나깨나 가뭄 걱정을 하셨다. 식사할 때도 “오늘은 비가 와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도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오늘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 가족의 간절한 바람 자체가 ‘비가 오는 것’이 되었다. 아버지의 노심초사 때문에 우리 모두가 나라 걱정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가뭄으로 갈라진 국토를 순례하다가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박근혜-언제나 진지했던 아버지의 식탁 강의 / 신동아 2003년 6월

              고속도로와 강릉 오리의 추억

               

              ■고속도로를 따라 아버님과 함께 여행을 하는 적이 때때로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설명이 끝이 없다. 저 마을은 새마을 모범부락으로 몇년도에 상을 받았다. 저쪽 산은 조림이 잘못되어 저렇게 보기 싫게 됐지만 이렇게 고친다. 심지어 저 마을에 큰 나무가 다섯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세그루밖에 없다고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국토에 대해서 손바닥을 들여다보시는 것 같다. / MBC-TV 신년특집-박근혜 1977년 1월3일

               

              ■지난번 고속도로 개통식 때 강릉에 가신 적이 있었는데 경포대 쪽에 오리들이 많이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가거나 차가 지나가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택시 운전사에게 여기 오리들은 어째서 사람이 다가가도 무서워하지 않고 태평하냐고 물었더니, 그 운전사가 대답하기를 대통령 빽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아버지께서 우연히 전해 듣고 자랑스럽고 좋으셔서 여러 사람에게 농담삼아 하시는 것을 들었다. / 

               

              TBC-TV 박근혜 1975년 12월14일

              출처 : 지식백과
              글쓴이 : 삽살개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