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侵 坑道 斷想 2
작성자: 군사고문관
조회: 5669 추천: 2
작성일: 2021-01-25 01:56:41
안녕하십니까? 군사고문관입니다.
오늘은 예전에 발제글로 올렸었던 『南侵 坑道 斷想』이란 주제를 이어서 써 나가보려고 합니다.
땅굴(坑道 갱도)의 전사적 의미와 탐지 방법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과거 사례들)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이지만 땅굴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삽이나 곡갱이 같은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power shove같은 중장비 기계로도 파더라도 막상 그것이 남침용(南侵用)인지는 쉽게 분간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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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 사용된 땅굴, 역사
땅굴 전쟁의 기나긴 역사라는 기고문을 쓴 Arther Herman(허드슨Hudson 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땅굴 전쟁史에서 현재 가장 치열하게 이용하고 있는 곳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GAJA Strip)와 한반도의 북한을 지나 한국으로 내려간 남침용 땅굴이라고 하였습니다.
땅굴을 이용해서 군사적 이용을 하려는 곳은 하마스와 북조선 노동당의 군부세력이라면서 하마스(HAMAS)를 지원한 북한당국의 군수지원을 그 근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 노동당의 남침용 갱도를 전문적으로 구축, 보수, 유지하는 부서의 도움이 없이는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최소한 31개의 땅굴을 정교하게 굴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위의 하마스 지하 터널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보호되는 위쪽과 좌우 벽을 지닌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하마스 지하 터널은 가운데로 병력과 무기, 탄약과 폭탄 운송을 위한 철로가 부설되어 있었고, 더 큰 규모의 땅굴은 트럭도 자유롭게 운행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마스 지하 터널의 구조는 단선이 아닌 위 아래로 연결되는 다층 구조라는 점입니다.
Arther Herman은 이러한 다층 구조의 땅굴 구조는 베트남 전쟁때 베트콩들이 구축한 구찌 터널(Cu Chi Tunnel)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북한도 이러한 구조를 참고하였을 것이며 아직 한국군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HAMAS 지하 땅굴 구조 (출처 : 月刊朝鮮)
IDF(Israel Defense Forces, 이스라엘 방어군) Gaza 지구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HAMAS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는 IDF의 방어영역에서 벗어난 지하인 이스라엘 영토로 들어오는 최소 31개의 군사용 땅굴을 발견하였으나 Gaza 지구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미로처럼 뒤섞여진 땅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HAMAS tunnel에 들어가서 무기를 들고 대기중인 테러리스트들
이러한 HAMAS의 이스라엘로 향하는 땅굴들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며 발견된 31개의 침공용 땅굴은 그 크기와 굴착의 공사수준으로 보았을 때 북한이 HAMAS 땅굴 굴설에 굴착용 기계들과 기술자들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발각되어 부서진 HAMAS 땅굴
HAMAS의 침공용 땅굴은 지상에서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지하 약 60피트 깊이에서 작동하는 전기 착암기를 가지고 굴착하였으며 여기에서 발생되는 많은 양의 버럭(돌과 흙)을 옮겨서 제거하였습니다. 그런 후 굴설된 땅굴의 위와 좌우 옆면들은 콘크리트로 발라졌으며 병력, 미사일, 이러한 병력물자들을 수송하거나 이스라엘에서 납치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지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요인들의 수송을 쉽게 하기 위해 철로가 부설된 것입니다.
이러한 HAMAS 땅굴들은 민간인들이 굴착된 땅굴들을 제거하는 것이 어렵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GAZA 지구의 하마스에 의해 구축된 침공용 땅굴 요도
Tunnel Shafts : 땅굴 수직 통로
레바논 국경(Lebanon border) 근처에서 발견된 헤즈볼라(Hezbollah)가 만든 터널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사이의 전쟁에 있어서 놀라운 발견은 바로 HAMAS가 은밀히 발전시킨 정교한 땅굴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그다지 큰 고급 기술이 없이도 뚫을 수 있는 땅굴들은 지상에 배치된 이스라엘의 현대식 무기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잠재적 무기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침공용 땅굴들은 구식의 전쟁 수단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땅굴의 군사적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매우 정교한 무기체계들과 비교해 볼 때 침공용 땅굴들은 이미 시간의 검증을 거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 세기 동안 전쟁에 사용된 땅굴들은 적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비교적 화력과 규모면에서 약한 전투부대로 하여금 발견되지 않는 이로운 점을 가지고 전쟁터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몰타(Malta) 사람들은 침입해 오는 터키인들을 피해 도시 아래로 지하 미로를 팠습니다.
19세기 몰타인들이 파낸 지하터널
냉전시기에 땅굴 파기에 가장 열심히 노력을 보였던 나라는 미국이라고 합니다.
물론 미국은 다른 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땅굴을 판 것이 아니라 핵 전쟁의 참화에서 견디기 위한 생존용, 방어용으로 땅굴과 개인호를 구비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전쟁의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땅굴을 파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삽을 들고 뒷마당으로 가서 방사능 낙진 대비용 지하 대피소느 은신처를 판 다음 물탱크를 들여놓고 Atomic Cracker라는 생존용 비스킷을 저장해 놓았습니다.
지하 방공호에 보관되어 뜯어진 Atomic Cracker
개인용 지하 피난처를 상품으로 내놓은 회사도 수백 군데나 되었습니다.
위네바고(Winnebago)나 Jacuzzi같은 장비는 기본형에서 고급형까지 다양한 모델을 구비하였을 정도입니다.
뉴멕시코주의 아르테시아(Artesia)는 지하 학교(Abo Elementary School)를 세웠습니다. 바깥 지상부분에 보이는 부분은 운동장 뿐이고, 420여명을 수용하는 교실은 지표면 아래로 들어가 있어서 핵 공격을 받으면 시민 2,000여명이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Abo Elementary School and Fall out Shelter
간이식당에 마련해 놓은 냉장고는 그 크기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이어서, 언제라도 시체 보관소로 전용될 수 있었습니다.
땅굴들의 지질학적인 역사는 성서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전쟁사를 갖습니다.
최소한 3천년 전에 전투부대원들은 강한 적 부대와 만나면 숨기위해 땅굴을 이용했으며 이러한 전술은 현대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위치해 있는 지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규모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로마 군단들에 맞서는 유대인들의 게릴라식 공격에 사용되었던 산악지대에 만들어 놓은 땅굴들을 포함해서 유대성지에는 약 450개 이상의 고대 동굴 구조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유럽의 라인강에서 다뉴브 강으로 이러지는 일련의 전선(戰線)들에서 땅굴들로 연결된 비밀 참호들을 파 놓고 로마병사들을 기습하기 위해 땅 위로 솟아 오르는 게르만부족들과 맞서 싸우는 때에 현재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직면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전술적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Chateau Gaillard envelopment (샤또 겔라드의 포위,1204年)
Chateau Gaillard
로마제국은 포위한 상태에서 공격하는 전쟁 무기로 땅굴들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성벽과 수직된 비밀 해자(垓字, Trench 참호)를 판 다음 지반을 약화시켜 성벽을 허물기 위해서 땅굴을 파들어감으로서 로마인들은 봉쇄에 의해 성안 사람들을 굶어죽기 이전에 오랜 포위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중일 전쟁당시인 1937년, 1938년에 Hebei 省의 Ranzhuang 마을에서 전투기간동안 중국인 게릴라들이 전쟁터의 은닉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그 마을 집들 사이로 약 9 마일 길이의 땅굴을 굴착하였습니다. 그 결과 후방에서부터 일본군들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갱도 입구와 출구는 보통 집 안과 집 안 벽에 나 있어서, 중국인 게릴라들은 방해받지 않고 들락거리기가 용이하였습니다.
Ranzhuang 마을 인근에서 일본군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땅굴을 판 모식도와 중국인들이 일본군들과 항전하는 모습의 그림(1942~1943)
Ranzhuang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 지하 터널을 파는 모습을 그린 그림.
Ranzhuang Tunnel (2010)
일본군은 중국인 게릴라들이 이용하는 땅굴들을 찾아내서 물이나 독가스로 그 땅굴에 주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물과 가스를 뽑아낼 수 있는 여과장치를 설치하여 일본군과 항전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양상은 일본군이 철수하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현재는 중국인들은 당시의 저항기념비적이며 항전의 흔적으로 주요한 관광명소로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땅굴 구축으로 저항해왔던 어려웠던 전투 경험을 토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에 맞서는 방안으로 땅굴 진지를 고안했습니다.
Peleliu Island에 일본군 땅굴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미 해병 전차부대
Peleliu 섬과 그 다음 Iwo Jima에서 정교한 땅굴 연결선으로 비밀 벙커들과 포 진지 기법을 이식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그곳에서 Suribachi 산 전체를 여러 출구를 지니게 하였고 빽빽하게 연결된 땅굴들과 벙커들의 벌집으로 만든 것입니다.
미 해병대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군이 굴착한 Peleliu 땅굴
미군의 Iwo Jima(이오지마) 일본군 폭격 목표물 지도
이오지마 일본군 땅굴 입구에 화염방사기로 발사하는 미 해병대
그 결과 땅굴들의 어느 한 부분을 기어 오르던 미 해병대는 전혀 생각을 못하던 다른 방향에서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일본군들의 사격에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일본군의 땅굴들을 파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일본군들과 마주치는 미 해병대는 화명방사기와 폭발물 그리고 수류탄을 많이 휴대하고 다녔으며 Peleliu 섬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이 구축한 땅굴들 때문에 Tarawa 해변 전투보다 몇 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에서 일본군들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도 여전히 일본군들이 만들어 놓은 땅굴들을 파괴하였습니다.
◆. 북한이 파내려온 남침 땅굴 발견 여정
1974년과 1990년에 한국의 국방부와 관련 부대들에 의해 북한으로부터 휴전선 군사분계선 아래로 뻗어 나오는 4개의 남침용 땅굴들을 발견되었습니다.
각 땅굴들은 약 2m 폭과 2m 높이로 지표면에서 약 100m 이상 아래로 내려가 굴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땅굴들은 쉽사리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가운데
1975년 2월 7일 제 2 땅굴을 발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張喜星(장희성, 육군종합학교 2基) 대령의 수기인 【우리가 찾은 땅굴】(1979년) 을 소개해 보면...
張喜星(장희성, 5군단 공병부여단장, 2015년 8월 4일 사망)
정보참모가 현지에서 보고 온 사항을 군단장님께 자세히 보고하고 난 뒤 우리에게 계속 중요한 사항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각 장교에게 보고 결과를 알려주고 우리들의 추정 판단이 정확했다고 다시 한번 실력들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자 모두 기뻐하는 표정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한층 더 자신을 갖는 것 같았다.
사실 <두더지 작전>의 분석은 우리 계획단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판단하는 추정방식이 실제로 실현된 셈이기 때문이다.
재차 시도된 물의 분석을 위해 지정한 4개 지역에서 채취한 물을 O 연대의 김중령이 물 시료병에 채취한 장소, 위치와 번호를 기록한 다음 국방과학기술연구소(ADD)에 보낼 채비를 해두었다.
즉 개천의 상류조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위치, 채취 장소의 선택, 채취 방법, 시간, 경계병력의 배치, 기구 등이 미리 검토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수색대원이 중앙분계선 가까이에서 채취해 온 것은 정말 사선(死線)을 넘어 떠온 물인 것이다.
김 중령에게 노고를 치하하고 필요할 때마다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추장소 준비에 따른 진입도로의 확장과 신설 또는 보수작업장의 충분한 공간확보, 사무실 및 숙영시설, 경계문제, 통신문제, 인원 및 장비의 보호문제, 철저한 신원조사로 DMZ 내에서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들이다.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대피시설과 훈련, 긴급사태시 지휘계통과 공사감독의 이원화, 급수문제, 전기공사문제, 월동공사에 대비한 준칙, 준수사항과 필요한 준비사항, 장비종별과 소요, 기술병과 정비지원사항 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시추공사시의 시추 간격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우선 작업장의 위치가 북한군 GP에서 불과 1.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남방한계선의 철책선보다 전방에 있는 점이었다. 적업장을 오고갈 때마다 북한군에게 관측될 염려는 물론 북한군의 접근이 용이한 지형에서 오는 게 공사진행상의 어려운 점이었다.
그래서 사단에서 모든 경계를 해가면서 철책선을 작업장 전방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북한군의 관측에 걸리지 않도록 위장막을 쳐 가며 도로공사와 병행하고 있다.
북한군의 도발에 철저히 대비해서 필요시 작전준비를 갖추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 일전도 불사할 전투태세 까지 갖추고 이 작업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제 2 땅굴 (1975년 3월 19일 발견)
2월 15일 토요일 (북서풍, 맑음, -4℃)
아침 일찍 대대장과 같이 현장에 올라가 일명 옆굴이라고도 부르는 북한 땅굴 차단갱인 관통갱 공사준비 상태와 장비투입을 확인했다.
불도저는 벌써 표토제거작업을 상당히 해치운 뒤였다. 그런데 너무 아래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이를 약간 윗쪽으로 이동시켜서 콤프레셔 위치도 폭파시를 대비하여 현재의 노출된 장소에서 파편 돌이 날아오지 않을 모퉁이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폭파로 인해서 야기될지도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아군 GP가 위치하고 있는 고지의 후사면(後斜面)에 대피하도록 했다.
구축될 때 까지는 우선 마대와 잡목 등을 엮어 북한군의 GP로부터 엄폐가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관통갱이 형성되면 그 자체가 훌륭한 대피호가 될 수 있겠으나 그 동안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를 임시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파 앞으로는 콘크리트나 철골조 등으로 완전한 대피호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입구가 되는 쪽이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어 앞으로 맞을 해빙기에 대한 안전대책도 세워야 되리라 여겨졌다.
관통갱공사에 필요한 천막과 연락용 통신자재, 난로 등을 여단에 요청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기자재도 보내 줄 것을 아울러 요청했다.
남침 땅굴 탐사를 위해 시추된 지점의 이상징후(지하에서 분출되는 이상한 냄새 유무)를 확인하는 장희성 대령 모습
2월 21일 금요일(북서풍, 눈, -11℃)
회의 준비사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간부들에게 지시한 후 여단으로 출발하였다.
여단장님과 함께 서울을 향해 달리면서, 나는 지난번 여단장님과 지금처럼 육군본부에 가다가 남산1호 터널에서 차가 뒤집혀 혼이 났던 생각을 했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미처 치료할 틈이 없어 그대로 회의에 참석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여단장님께서도 아마 그때 일을 떠올랐음인지 운전병에게 거듭 거듭 안전운전을 강조한다.
우리는 무사히 육군본부에 도착하였다.
회의장에서 2.6 위원회의 각 부장과 자문위원 전원, 미8군의 밤낚시 공사(Operation Night Fishing) 지원반 등 많은 인사들이 이미 와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우리는 가지고 간 챠트로서 지금까지의 이상 징후 내용과 주상도의 비교, 분석판단, 그 밖에 여러 전문위원들의 의견들을 항목별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지난 2월 19일 통제부에서 얻어 낸 결론을 발표하였다.
이제껏 궁금해하던 공내 사진의 판독 결과와 공기 분석내용이 여기서 발표되어 오늘의 결론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장희성 대령이 슬라이스 파인애플(slice pineapple)같다고 표현한 북한 땅굴 탐사공 내 촬영사진, (1975년 3월 29일, 대한뉴스)
미국에서 현상인화되어 온 공내사진을 보았으나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잘 판독을 할 수 없었다. 얼핏 슬라이스 파인애플(slice pineapple)을 흑백으로 촬영해 놓은 것 같았다.
그 사진의 원리와 특징 그리고 사진에 나타나 있는 현상 등을 자세히 설명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것 같았다.
4개소의 공내 사진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로 <인위적인 동굴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에 문외한인 우리로서는 그 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만 미국의 전문가들이 판독한 것이라는 것만을 믿었다.
제 2땅굴 굴착 탐사 설명 보도 (1975년 3월 29일, 대한뉴스)
ADD의 공기분석 결과는 전에 전화로 연락받은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인위적인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동굴이란 (북한)적이 뚫은 동굴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제 2땅굴 탐색을 '청진기'로 폭발음 추적한 李建榮 장군
이건영(李建榮, 1926년 9월 2일 ~ , 국방경비대에서 육군사관학교 7基로 입교)
1998년 출판된 『장군의 비망록』(김문 지음)에는 이건영 장군의 제 2땅굴을 추적하는데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 李장군은 청와대에서 보직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朴 대통령으로부터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땅굴작전에 임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李장군이 부임하기 전인 그 해 11월 고량포에서 이미 제 1땅굴이 발견되었고 그 한 달 전인 10월 6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땅굴 굴착으로 보이는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李장군은 군단장에 부임하자마자 본격적인 땅굴탐색작전을 벌이도록 명령했다. 땅굴탐사를 위한 첨단장비가 없던 시절이어서 청진기를 통해 폭발음을 계속 추적하는 한편, 서울대 토목과 교수,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 광업진흥공사 관계자, 전매청 냄새탐지기술자, 공병장교 등으로 구성된 땅굴탐사연구단을 구성했다.
또한 이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맞굴(역갱도)을 뚫기 위해 현대건설 작업반들이 투입되었다.
작전명은 '밤낚시 작전(Operation Night Fishing)' 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혹한과 싸워야 하고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병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야 했다.
그러기를 3 개월여 밤낚시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 3월 24일 유엔군사령부는 제 2땅굴을 발견했다고 전세계에 공표했다.
李장군은 당시 영국 BBC 방송 여기자와의 인연 등 '땅굴과 여자'에 얽힌 기묘한 일들을 몇 가지 공개했다.
땅굴이 발견되자 한,미 1군단장은 외부손님 50여명을 초청하여 땅굴을 견학토록 했다. 일행 중에는 수녀 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다녀간 후 마무리 작업(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차단벽을 뚫는 일)을 벌이던 역갱작업반원들이 갑자기 군단장을 욕하면서 일을 전혀 안하는 것이다.
사연인즉 지하굴착 작업 때 여자와 휘파람은 절대 금기인데 수녀들이 다녀갔으니 큰 사고가 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미신이었지만 위험한 작업에 동원된 그들의 고집을 묵살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李장군은 마땅한 예방책이 없느냐면서 작업속개를 설득했다. 그러자 현대건설 작업반원들은 북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꺾어오되 개소리나 닭소리를 전혀 안들은 것으로 해야 하며 소금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다. 일종의 부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李장군은 수색대를 시켜서 인적이 드문 곳에서 복숭아가지를 꺾어 오도록 했다. 인부들은 그것으로 굴내부에 부적을 만들었고 소금을 뿌려대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신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지하 50 m 깊숙히 설치된 차단벽을 뚫고 있던 작업반원 중 1진 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곧이어 뒤 따라간 2진 4명도 또 변을 당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망원인은 굴속에 가득 찼던 아황산가스에 의한 질식이었다.
당시 방위산업관계를 담당하는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지시에 의해 북쪽방향으로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으나 굴속이어서 그런지 불은 붙지 않고 아황산가스만 가득 차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7명의 수녀가 다녀간 뒤 기이하게도 작업반원 7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된 1975년 4월 어느 날 李장군은 서종철(徐鐘喆) 국방부 장관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BBC 방송기자가 땅굴이 한국측의 정치적 목적인지 아니면 실제로 북한군이 파내려온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보고 싶다고 하니 현장을 잘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李장군은 6사단장 정명환(鄭名煥, 육사 8기) 장군에게 이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이윽고 BBC 기자가 헬기편으로 땅굴 지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남자인 줄 알았던 방송기자가 여자가 아니지 않은가!!
키가 작달만한 여기자의 이름은 크즐리 사라(Kizzle Sarah,미혼)였다. 정명환 장군은 내심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번 수녀방문으로 7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이번에 또 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군단장으로부터 절대 '여성출입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정명훈 장군은 군단장의 명령이라면서 출입을 막았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완강한 저지에 부딪혀 여기자는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자는 스틸웰 미 8군 사령관을 만나 "땅굴이 한국측에서 판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땅굴 내부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날 밤 李장군은 서종철 국방부장관과 노재현(盧載鉉)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연거푸 질책섞인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李장군은 서장관에 직접 찾아가서 '여기자이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땅굴과 여자의 상극관계'를 설명했다. 그러자 서장관은 어떻게든 잡음 없이 잘해보라고 하면서 여기자의 땅굴방문은 북한의 남침야욕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건영 장군과 2 땅굴을 방문하러 온 BBC방송 여기자
3일 후 BBC방송 여기자가 다시 찾아 왔다. 이번에는 李장군이 직접 맞이했다. 이에 앞서 李장군은 사단장을 시켜 땅굴 근처에 있는 병사들을 전원 취침토록 하고 대신 보초들을 모두 장교로 대체했다.
李장군은 여기자와 함께 직접 지하 50 m 까지 내려가 파내려온 제 2땅굴 내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기자는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를 간파한 李장군은 땅굴을 견학하고 나오면서 '서양인들은 금요일을 싫어하는데 맞느냐, 13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李장군은 다시 '그렇다면 금요일과 13일이 겹친 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여기자는 '더 나쁘겠지요'하고 대답했다.
李장군은 '바로 그거다. 서양에도 미신이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특히 땅굴작업 때 여자가 들어오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지난 번 수녀가 방문한 뒤로 7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땅굴입구에 세워진 위령탑을 가리켰다.
여가지는 깜짝 놀라면서 '왜 진작 말을 안해줬느냐' 면서 매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자는 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李장군과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또 李장군에게 북한의 남침야욕을 전세계에 알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 뒤 떠났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이 또 터졌다.
여기자가 다녀간 며칠 뒤 땅굴수색을 하던 소대장이, 북한군이 매설해 놓은 지뢰를 밟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소대장은 중상을 입었고 옆에 동행했던 하사관 한 명은 눈에 파편을 맞고 후송됐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이건영 장군은 5군단장 시절의 자신을 땅굴 단장에 비유했다. 재임 1년 9개월 동안 제 2땅굴 발견작업에 시간을 거의 쏟았기 때문이다. 혹한기에 노무자들의 뒷바라지에서 부터 믿을 수도 안믿을 수도 없는 땅굴과 여자에 얽혀진 미신의 후유증까지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 제 2 땅굴 발견을 물적, 심적으로 지원한 정명환 준장(발견 후 소장으로 진급)
정명환(鄭名煥, 예비역 소장, 1949년 육사8기 특별 3반 졸업, 2009년 10월 24일 사망)
당시 정명환 준장은 제 2 땅굴을 발견한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본부 민사군정감, 국방대학원 입교,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제2군수지원사령관을 거쳐 1980년 8월 31일 전역하였습니다.
한국전력 감사와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지낸 뒤 경기도 과천에서 은퇴생활을 보낸 후 2009년 10월에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생전에 정명환 장군은 북한의 남침 땅굴에 대한 소견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관련 내용을 소개해 드리자면...
"북은 지금도 땅굴을 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땅굴은 판문점과 서울 사이의 한 복판을 출구로 삼고 있지 않을까?
북은 지난 74년 스웨덴에서 하루에 30~50 m를 팔 수 있는 기계 5~6기를 도입했다. 이 기계는 지금 어디에 배치되어 있을까? 아마도 전선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이 기계로 지하 200~400m 까지 파 내려간 다음 남쪽으로 굴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명환 장군을 인터뷰한 기자는 무슨 정보를 가지고 그러한 판단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정명환 장군은 다음과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 1977년 국방대학원에서 공부를 할 때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 사령부를 방문하여 정보참모와 북한의 남침 땅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장교는 북한이 지하 약 400m의 깊이로 땅굴을 뚫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상식으로는 지하 100~150m 정도의 심도라고 판단하여 탐사시추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지하 400m 까지 깊게 급경사를 뚫었다가 완만하게 상승하면서 남한지역으로 파고들면 후방 깊숙이 침투할 수가 있는 것이다."
Lt. General, James Francis Hollingsworth (1918 ~ 2010)
" 귀국한 뒤 한미 연합야전사령관 홀링스워스(James Francis Hollingsworth) 준장을 만나서 남침 땅굴에 관한 견해를 물었더니 하와이에서 들었던 같은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1979년 9사단 지역인 한강변에서 지하 작업음이 청음되어 북한이 한강을 건나 땅굴을 파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시추를 한 적이 있었다.
제2군수지원사령관 재직 시절 홀링스워스 장군의 권유로 현장에 나가보았는데 심도 150m 이내의 얕은 시추를 하고 있어 나무란 적이 있다.
여기서는 땅굴 발견에 실패했다. 지하 소리를 놓친 것인데 이는 (남침) 땅굴이 일선을 통과, 후방으로 빠졌다는 뜻이다. "
▲. 美 극동공병단(FED :Far East District) 역사책자에 소개된 남침 땅굴
FED symbol Far East District Building
1970 년대 FED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북한이 남침목적으로 ) 건설 된 지하 터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에 의해 DMZ 아래에 있는 지하터널은 밀수업자들의 터널이 아니라 (북한) 군대를 용이하게 하도록 설계된 대형 통로였습니다.
침입목적의 터널 활동 증거인 첫 번째 힌트가 나타났습니다.
1973 년 한국 순찰대가 DMZ 중앙 지역에서 지하 폭발 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을 때.
1974 년 11 월 15 일, 한국군 병사들은 땅 아래에서 탈출. 더 나아가 검사, 그들은 덜 얕은 터널을 발견
수면 아래 2 피트 이상, 약 3,600 km길이였습니다. 한국군의 발견은 그 이후 의심이 강하게 되는 터널의 경우 탐지를 시작했습니다
북한 보병 사단마다 하나씩 남침 땅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Cholwon(철원) 주변 지역에 대한 탐색을 DMZ를 중심으로 하였고, 한국 광물 회사를 고용하여
56곳의 드릴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69 개의 시추공 이후 추가 터널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1974 년 말, FED의 우물 용 고정 시추장비를 한국군이 8 군을 통한 지원 요청 하였습니다.
1975 년 3 월 FED는 연중무휴 시추를 위해 한국군에 정밀 시추공 드릴링 유닛 및 2 개 장비와 대원들을 파견했습니다.
1978년 6월 미 8군 시추팀 장비로 휴전선 인근에서 작업하는 모습
주한미군 땅굴 탐사팀은 하루 24시간에 각각 8 시간씩 3 교대로 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2 일 후 집약적인 시추를 하였고, 그 노력의 성과는 155 피트 표면 지하에 드릴 중 하나가 공허에 부딪혔습니다.
두 번째 터널을 발견했습니다. 통로는 높이가 3 피트이고, 폭이 3 피트로서 군대와 무기를 이동하기 위한 협궤 철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한국군 공병부대와 미 8군 소속 FED 소속 시추팀의 도움으로 발견한 북한의 남침 땅굴 모습
두 번째 터널을 발견 한 후, 美 제8군은 FED가 기술 및 물류지원기술을 제공하는 터널 중립화 팀 (TNT)을 설립했습니다.
시추팀은 추가 터널을 찾기위한 DMZ의 전체 길이와 1978 년 탈북자를 통한 정보 수집 및 위성 이미지, 시추 요원은 판문점과 휴전선 마을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도하였습니다.
제 8군 지원팀은 해가 떴을 때 가능한 모든 시간을 사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978 년 6 월 10 일, 운이 좋았는지 시추공은 버려진 오래 된 건물의 지하쪽에서 다이너마이트 충전의 결함으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추공은 몇 년 전에 심은 것이었습니다.
미 8군 시추팀은 "우리는 지하 갱도의 수면이 심어둔 시추공과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하 갱도를 통한 시추공은 바위구조였다고 FED의 시추 책임자였던 Michael King이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남침 터널의 짦은 거리 내에 있었어야 했다"고 하였습니다.
FED는 터널 內 수로의 경사도를 대략 계산했습니다. 변칙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갱도 경사도의 계산 결과를 토대로 1978년 6월 12일에 시추요원들은 지하 213m에 위치한 정교한 세 번째 터널을 발견하였습니다.
터널은 짧은 거리 내에 있어야합니다.
지하 6 피트, 높이 6 피트, 폭 7 피트 였습니다.
북한의 제 3땅굴 발견후 한국군 탐색팀이 진입 작전하기 전 가스마스크를 착용하는 모습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은 역갱도 굴착공사에 착수했지만 FED 직원은 원래 터널의 경우 북한군 굴착팀이 갱도안에 물이 많이 들어차게 역대책을 하여 역갱도 작업자들를 익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깊은 지하의 양수 펌프를 사용하여 FED 직원은 물을 퍼내어 주고 기타 기술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
유엔중립국 정전관리들은 터널이 완공 되었더라면 매 시간마다30,000 명의 무장 군인이 통과 할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그 후 한국군은 터널을 탐지하는 부대를 더 만들고 여전히 다른 시추공들을 계속 탐지했습니다.
1980년에 극동공병단은 계속해서 한국군의 땅굴 탐사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예를 들어, 1988 년에 FED는 총 15,400피트 깊이로 FED 팀은 공동으로 시추공을 뚫었습니다.
한국군 시추팀이 역갱도로 관통된 제 3땅굴
4 개의 드릴 장비가 하루에 12 시간씩, 7 일 동안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극동공병단의 숙련된 직원은 이후 몇 년 동안
작업의 대부분을 다루는데 분류되었고, 극동공병단은 한국군의 남침 터널 무력화 노력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1990 년대, 한국이 남침 땅굴 탐사 활동을 완전히 인수했습니다.
북한의 극히 비정상적인 활동이었던 DMZ 근처의 터널 굴착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저열한 행위들이었습니다.
★. 제 4땅굴 발견을 한 이진삼 장군
이진삼(李鎭三, 1937년 2월 10일 ~ ) 육군사관학교 15基
이진삼 장군의 자서전인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2017년 발행)에 제 4땅굴 발견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21사단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육군의 탐지 방향은 서부전선에 집중되었고,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21사단 지역의 갱도 탐지 활동에 대한 상급 부대의 관심은 저조하였다.
당연히 사단 장병의 탐지 의욕 또한 저하되거 있었다. 나는 전 장병에게 사단 지역 내 적의 땅굴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며 갱도 탐지 업무 활성화를 내세웠다.
연중무휴 작업과 주야간 작업을 하는 대신 인력은 3배 이상 보충하도록했다.
혹한기 난방 시설을 포함하여 특식을 제공하도록 명령하는 등 최고의 관심 지역화를 하였다.
우선은 지금껏 시추한 후 방치하고 있는 시추공들을 정비하여 관찰하도록 했다.
시추공이 흙으로 덮이면 그 안에서의 변화, 수위 변동 등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군본부를 방문하여 산악지형인 동부에 시추기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매주 일요일 오전에는 2개 시추 지역을 방문하여 독려하면서 사기를 양양시켰다.
그 다음으로 청음 집중 분포 지역인 OOO 와 OOO 2개 지역을 중점으로 시추하도록 했다. DMZ 및 철책선 근무요원의 관측 및 청음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적의 예상출구에 대한 수색도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였다.
시추 간격을 10 m 이내로 좁히고 , 시추공 심도를 증가하는 한편 청음요원의 교육과 전방 지역 주민 홍보도 실시했다.
청음 분석 자료를 참고하여 비교 분석, 탐지 일지를 기록함으로써 청음 시간과 횟수를 그래프로 만들어 분석했다.
상세한 내용은 보안상 책자에 기록을 유보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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