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해설] 9.11테러 20년, 달라진 미국…‘미국 국익 우선’ 현실 직시해야 / KBS 2021.09.11.
요약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 벌어진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미국이 본토 공격을 당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며, 미국 안보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역사는 9·11 테러 전후로 나뉜다'는 말도 나온다
사건 개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여객기 충돌
2001년 9월 11일 오전 아메리칸 에어라인 11(AA11)편과 유나이티드 항공 175(UA175)편 2대의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했다. 이 두 비행기는 각각 오전 7시 59분과 8시 14분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비행기로, 대륙 횡단에 필요한 연료를 가득 탑재하고 있었다.
AA11편은 8시 14분께 5명의 납치범에게 납치당했다. 이들은 손칼로 승무원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저항하던 일부 승무원과 이스라엘 특수부대 소속 남자 승객을 칼로 찌른 뒤 호신용 최루가스를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에 뿌려댔다. 이후 조종사를 살해하고 조종석을 장악했다. 8시 42~46분 납치된 UA175편도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 여객기의 비행 경로
ⓒ United States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 Public Domain
보스턴 항로 관제센터는 AA11편이 항로에서 벗어나자 고도를 높이고 항로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납치범들이 내보낸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너희들과 비행기가 위험해질 것이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걱정말라"는 기내 방송이 실수로 관제센터로 전해졌고, 관제센터는 8시 37분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피랍사실을 보고했다. 사령부는 전투기 2대를 출격시켜 '중간 차단'을 지시했으나 이미 비행기는 세계무역센터 직전에 있었다.
테러 공격을 받은 세계무역센터
ⓒ Robert on Flickr | CC BY-SA
AA11편은 오전 8시 46분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의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다. 승무원과 탑승객 전원(테러범 제외 87명)이 사망했다. 이어 9시 3분 UA175편이 남쪽 건물의 77층과 85층 사이로 충돌했다. 두번째 충돌 당시 첫번째 사고를 보도하기 위해 방송사 카메라들이 세계무역센터를 촬영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CNN 등 방송 채널을 통해 UA175편의 충격적인 충돌 현장은 전세계에 생생하게 중계됐다. 언론사들은 첫번째 충돌까지만 해도 끔찍한 항공 사고 정도로 보도했으나, 두번째 충돌로 계획적인 테러임이 명확해졌다.
여객기가 건물에 충돌하자 10만 리터 가량의 항공유가 타면서 격렬한 화재가 발생했다. 충돌 지점보다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계단이 붕괴되어 대피로를 찾지 못했고 수많은 이들이 열기와 연기를 못이겨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이러한 상황도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됐다.
오전 9시 59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먼저 무너졌다. 이어 10시 28분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잔해에 맞아 47층 높이인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제7세계 무역센터 빌딩이 오후 5시 20분 33초경 붕괴됐다. 이외에도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수많은 소방대원과 의료진이 세계무역센터로 모여 수십층을 걸어 올라가 영웅적인 구조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수가 화재와 소음 등으로 붕괴 전 "건물이 붕괴되니 대피하라"는 무전을 듣지 못했고 343명이 목숨을 잃었다.
펜타곤 충돌
테러 공격을 받은 펜타곤 건물
ⓒ TSGT CEDRIC H. RUDISILL, USAF | Public Domain
미 국방부 건물인 워싱턴 D.C.의 펜타곤에도 비행기가 충돌했다. 이날 8시 20분 워싱턴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던 아메리칸 에어라인 항공 77편은 8시 54분 항로를 180도 바꾸어 다시 워싱턴으로 향했다. 9시 3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두번째 항공기가 부딪히고, 대규모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연방항공당국은 36분이나 AA77편의 항로 이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9시 32분에야 항공당국은 펜타곤 주변으로 접근하고 있는 항공기를 발견했고, 비행기는 펜타곤 주위를 맴돌며 고도를 낮추다 9시 37분 46초경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했다. 충돌했을 때 비행속도는 시속 850km 이상이었고, 본체가 건물의 기둥을 부수어 대폭발을 일으켰다. 다행히 펜타곤은 낮고 넓은 특유의 구조와 테러에 대비한 구조적 설계 덕분에 비행기에 직접 부딪힌 피격 구간만 붕괴되었을 뿐 옆 구간의 연쇄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아 피해가 적었다. 충돌로 펜타곤 직원 125명이 숨지고 항공기에 탑승한 64명이 사망했다.
UA93편, 승객 저항으로 추락
유나이티드 항공 93편도 납치됐다. 이 비행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승객들은 납치범들 몰래 가족들과의 연락을 시도했고 이 비행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승객들이 저항해 조종간을 빼앗으려 하다 10시 3분 11초경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했다. 승객 전원이 사망했고 이들은 추가 피해를 막은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9·11 테러로 인한 피해
이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는 2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펜타곤에서는 125명이 죽었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총 256명 전원이 사망했다. 뉴욕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 84명, 뉴욕 항만국 직원 2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공격으로 꼽히며, 총 인명 피해 3130명은 진주만 공습의 사망자 2330명보다도 800명이 더 많다.
테러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됐다. 당시 미국 영공을 비행중이던 4200여 대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됐다. 바다에서도 뉴욕항이 봉쇄됐고, 여객선과 화물선이 대피한 뒤 항공모항 전단이 입항했다. 전국에 비상휴교령이 내려졌다.
미국 정부는 테러 당일부터 일주일 간 증시를 열지 못했고, 테러 발생 6일 후 재개장한 뉴욕 증시에서는 S&P500지수가 19일까지 7% 떨어졌고, 환율도 불안한 움직임을 보였다.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분기대비 -1.1%의 역성장을 했다.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2000년 12% 성장했던 전 세계 교역규모는 2001년에 2% 줄었다. 당시 한국 증시도 테러 다음날 정오에 지연 개장했으나 전날보다 12% 폭락해 사상 최대의 하락폭을 보였다.
테러 용의자 수사
배후
생애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출생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복무 알카에다 막타브 알키다마트 근무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 Hamid Mir | CC BY-SA
FBI는 9.11 테러의 배후에 테러 단체 알 카에다를 지휘하는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벌 2세 출신인 빈 라덴은 1979년 알 카에다을 설립하고 1988년 무장조직으로 재정비했다. 그는 계속 미국에 대한 성전을 촉구했고, 알카에다는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트럭 폭탄테러 사건,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동시 폭탄테러 사건 등을 일으켰다. 1998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압박에 그의 시민권을 박탈한 이후 탈레반 정부의 보호 아래 아프가니스탄에 은신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거듭 9·11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으나 2004년 10월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인정하고 자신이 직접 19명에게 공중납치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1982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베이루트 고층 빌딩이 붕괴하고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테러 이후 오바마 빈 라덴은 은신하며 10년 간 미국 FBI, CIA의 추적을 따돌렸다. 빈 라덴은 파키스탄 북서부 아보타바드 내 한 시설물에 은신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2011년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군 공격에 의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계획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 Taken by U.S. forces when KSM was captured. | Public Domain
9·11 테러 계획을 최초로 낸 사람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라는 인물로, 1993년 2월 조카인 람지 유세프가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 테러를 벌였을 때 이를 지원했다. 람지 유세프는 건물 지하 2층에서 트럭에 장착된 폭탄을 터뜨렸고, 이로써 7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과 달리 테러는 건물의 지하주차장만을 무너뜨리는데 그쳤다. 그는 1998~1999년 사이 알카에다에 합류하고, 빈 라덴의 승인 하에 9·11 테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조직
알 카에다의 비행기 테러 계획이 진행 중일 때 독일 함부르크의 아랍 유학생 4명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훈련캠프에 찾아왔다. 이후 FBI로부터 '함부르크그룹'으로 불린 이들은 그룹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영어에 능통한 이들로, 부유층이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고학력 지식인들이었다. 빈 라덴은 이들을 미국 침투 및 9·11 테러의 적임자로 보고 미국에 잠입해 비행 훈련을 받을 것을 지시했다.
함부르크 그룹 중 비자가 거부된 1명을 제외하고 3명이 2000년 5~6월 미국에 입국해 플로리다의 비행 학교에서 조종술을 익혔다. 9·11 테러의 행동대장으로 AA11편을 납치해 가장 먼저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한 모하메드 알 아미르 아타가 함부르크 그룹이다. 이들에 더해 비행면허를 가진 기존의 알카에다 대원 하니 한주르와 여타 15명이 2000~2001년 봄 미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각 비행기마다 4~5명으로 한 조를 이뤄 테러를 감행했다.
비용
9·11 테러위원회는 알카에다가 테러를 감행하는데 쓴 총 비용이 40~50만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탈레반 정권외에 어떤 외국 정부도 알카에다를 재정적으로 돕지 않았으나 알카에다의 자금 모집책들이 사우디 등 주요 중동국가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봤다.
9·11 테러위원회
공식명칭은 '미국 테러 공격에 대한 국가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on Terrorist Attacks Upon the United States)'다. 9·11테러 사건에 대한 완전하고 전반적인 설명을 하도록 설립된 공인 기관으로 국가적 초당적 위원회다. 조사위원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추천한 10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부위원장은 야당이 임명했다. 위원회는 약 20개월 동안 활동하며 12차례의 청문회 개최, 1200여 명의 관계자 인터뷰, 250만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분석했으며 그 결과 약 2만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를 2004년 7월에 발표했다.
911 테러 당시 현장 영상
사고 당시
추락하는 사람들
테러 사고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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