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섭 기자 입력 2021. 09. 29. 00:00 댓글 28

'이글'도 '벌처'도 아닌 '제3의 수리'
긴 다리와 육상위주 생활 등 여느 맹금류와 확연히 달라
리듬감 있는 발길질로 독사 밟아죽이고 삼켜

대통령 선거까지는 반 년 가까이 남아있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선거정국의 한복판입니다. 각 정파와 진영별로 이미 용쟁호투가 벌어지고 있죠. 그런 와중에 ‘제3지대’를 앞세우며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이들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제3의~’라는 수식어는 참 매력적입니다. 우선 어느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덜 알려져서 신비롭고 신선하다는 이미지도 선사하죠. 오늘 소개해드릴 새 역시 그 범주에 속합니다. 새들의 제왕 수리류 중 가장 신비롭고 매력적인 ‘제3의 수리’, 뱀잡이수리입니다.

머리뒤에 꽂은 특이한 깃털 때문에 비서새(Secretary Bird)라는 이름이 붙은 뱀잡이수리. /샌디에이고동물원 홈페이지

수리는 두 문파가 양분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물을 직접 덮쳐서 찢어발기는 살육자인 이글파(Eagle)파와 썩어문드러져가는 시체를 파고드는 청소부인 벌처(Vulture)파죠. 뱀잡이수리는 수리계(界)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족속입니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새’로 끝나는 Secretary Bird입니다. 맹금류중에서 일반명사인 ‘새’로 명명된 유일한 종류입니다. 영어이름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간혹 비서새 또는 서기관조로 부르기도 하죠. 그건 마치 서양에서 머리에 펜을 꽂고 일을 하던 사람들이 연상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머리 뒤쪽에 정말 일부러 장식을 한 것처럼 펜대 같은 깃털이 쏙쏙 박혀있거든요. 이글거리는 빨갛고 노란 얼굴 피부 안에는 길다란 눈썹이 있고, 그 아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있습니다. 만찢새(만화를 찢고 나온 새)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기이하면서도 빠져들게 하는 외모입니다.

대부분 육상생활을 하는 뱀잡이수리가 나무위에 앉아서 쉬고 있다. /샌디에이고 동물원 홈페이지

이 맵시있는 외모의 화룡점정은 타조나 황새를 연상케 하는 롱다리입니다. 어느 맹금류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롱다리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 새를 맹금류로 분류할지를 두고 논란도 있었다고 합니다. 뱀잡이수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두루미나 왜가리와도 빼닮았습니다. 뱀잡이수리의 ‘제3자적’ 특성은 식습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수리 양대 문파 중에서 이글은 공중에서 발톱을 치켜세우고 내리꽂아 먹잇감의 숨통을 끊어낸 뒤(간혹 숨이 붙어 있는 상황에서) 피와 살의 성찬을 벌입니다.

깜찍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는 뱀잡이수리의 모습. '만찢새'의 풍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샌디에이고 동물원 홈페이지

벌처는 공중을 선회하며 죽음의 냄새를 맡다가 썩어문드러져가는 짐승의 시체를 탐하죠. 수십마리가 한꺼번에 공동식사를 곧잘 합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뱀잡이수리의 식사 장면은 이 새의 이름이 왜 이런지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뱀잡이수리는 날지 못하는 새도 아니지만, 좀처럼 날아가는 걸 보기 어렵습니다. 대개 땅에서 롱다리로 맵시있게 걸어가거나 서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뱀잡이소리가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고 있다. /샌디에이고 동물원 홈페이지

기껏 날아봤자 나무 꼭대기에있는 둥지로 갈 때 정도죠. 먹이를 구할 때 굳이 날 필요가 없거든요. 쥐나 도마뱀, 개구리도 먹지만 이 새의 주식은 뱀입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바나가 주로 서식지인만큼 블랙맘바나 코브라 같은 초강력 독사들까지도 식탁 메뉴에 오릅니다. 이것들을 잡는데는 날개도 부리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늘씬한 종아리 아래 두 발이면 충분합니다. 퍽, 퍽, 퍽… 빠직. 그냥 몇번 밟아주면 끝이거든요. 그 어떤 강력한 독을 가진 뱀이더라도 몇 번의 발길질이면 끝납니다. 죽음의 탭댄스죠. 뱀을 발견한 뱀잡이수리는 홀로 리듬을 타듯 경쾌하게 발길질을 해댑니다.

 

때론 방정맞아보이는 이 탭댄스를 추면서 발바닥을 뱀의 머리를 향해 수차례 가격합니다. 뱀은 몸통이나 꼬리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잘리더라도 머리가 멀쩡하다면 여전히 물거나 독을 뿜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불상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 뇌와 독니가 있는 머리부터 집중 가격하는 것이죠. 위에서 내리찍는 킥이 정확히 가격되면서 머리의 내부는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짓뭉개집니다. 괴력난신같던 독사가 불과 수 분 수 초 내에 축 늘어집니다. 발바닥과 몸통 사이의 롱다리, 널찍한 깃털과 호들갑스런 날갯짓은 뱀이 반격할 여지를 거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사실상 걸리면 곧 죽음인것이죠. 이제 남은 것이라곤 국수가락을 훌훌 넘기듯 뱀의 몸뚱아리를 꿀떡꿀떡 넘기는 일 뿐이죠.

 

이 뱀고기는 오늘도 고단한 삶을 살아낸 어른 새의 든든한 양식이 되거나, 아니면 위장에서 한결 부드럽게 뭉근해진뒤 게워져서 둥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끼 수리들의 소중한 영양식이 되어줄 것입니다. 잠시 뱀의 입장이 돼 생각해봅니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연신 머리를 쿵쿵 밟아대니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차라리 단말마의 비명에 가도록 숨통을 끊어놓아 주는게 피식자에게는 그나마 자비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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