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병기파일 No. 16 (무츠)

 

전함(戰艦) 무츠(陸奧)

 

성능제원

 

기준배수량 : 39,130t

전장 : 224.5m

최대 폭 : 34.6m

출력 : 82,000hp

속력 : 25kt

항속력 : 16kt로 8,650해리

무장 : 40cm연장포 4기, 14cm포 8기, 12.7cm연장고각포 4기, 25mm연장기총 10기

탑재기 : 수상정찰기 3대

승원 : 1,368명

동형함 : 나가토(長門)  

 

1918년 6월 1일 기공되어 1920년 5월 31일에 진수된 전함 무츠(陸奧)의 이름은 

구 일본지명인 무츠국(陸奧國)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가토 형(長門型) 전함의 2번함이다.

1921년 워싱턴 해군군축 조약으로 미완성함을 폐기하도록 되었는데 그 리스트 안에 무츠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무츠가 완성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미완성함이라 주장했다.

 

이 주장의 근거들은 일본측에 의하면 실제로 무츠는 해군에 1921년 10월 24일에 완성, 인도되었는데

정비 및 설비공사가 미완인 채로 인도되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미완성 함이라 주장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일본의 주장에 미국과 영국은 무츠의 보유를 인정해주었지만

그 대신에 미국은 폐기가 결정된 콜로라도 급 2척의 건조와

영국은 2척의 넬슨급 함 신축을 일본이 인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나가토(長門)와의 다른 점은 선수 페어리더의 위치가

거의 앞부분을 향하고 있는 것이 무츠이며 나가토는 후방을 향한다.

또 함교와 지휘장의 다른 형태도 나가토와 무츠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히로시마 주변에서 다른 함정과 같이 보유되다 1942년 6월 5일의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다.

그러나 부대후방에 있어서 전면전은 피하고 제 2항공함대 전멸 후 쿠레(吳)로 되돌아 와 그 후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태평양전쟁에 참가당시의 무츠

 

1943년 6월 8일, 히로시마 하시라지마(柱島)에 정박중인 무츠는

연합함대 기함인 나가토가 수리를 끝내러 하시라지마로 오는 바람에

오후 1시부터 교체될 예정이었는데 무츠의 항해과원이 이동준비를 마친 것이 12시 10분이었다.

 

그 때, 갑자기 3번포탑 부근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폭발이 일어나 한 순간에 선체는 두 동강이가 나고 앞부분은 곧 침몰했다.

뒷부분은 함선 후부를 위로 한 채 잠시 떠 있었지만 이윽고 가라앉고 말았다.

탑승원 1,474명 가운데 구조자가 353명으로 사망자의 대부분은 익사 내지 폭발에 의한 쇼크사였다.

 

무츠의 남남서 약 1,000미터에 정박중이던 후소(扶桑)는 <무츠폭발침몰, 1215>라고 발신,

이후 무츠에 관한 일체의 발신은 금지되었다.

또 부근에 항해금지령을 내리고 사망자 가족에겐 전사 급료를 송금하는 등

무츠의 침몰은 일반에겐 극비로 취급되어 일본국민들조차 전쟁이 끝나고서야 알았을 정도였다.

 

폭발사고 직후 조사반이 구성되어 사고원인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검토 결과 자연발화라고 보긴 어려우며 이 폭발은 이전 무츠에서 절도사건이 일어나

그 용의자를 수사하던 도중에 일어난 일이라 인위적인 폭발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지만

진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수수께끼만 남긴 무츠의 마지막은 소설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다. 

무츠 폭발의 원인은 스파이의 파괴공작설, 3식탄의 폭발설, 학대를 견디다 못한 수병의 자살설 등이 다루어져 왔는데

구 해군에서는 수병들의 자살 대부분이 자폭으로 인한 것이라고 밝혀졌는데 군부의 은폐로 명확한 원인을 아직도 알수 없다.

(또 무츠폭파시 제 1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시미즈 미츠미(淸水光美)중장은 책임을 지는 형태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3식탄에 의한 폭발설은 지금은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3식탄 설은 사고원인 조사 전에 가장 먼저 이루어졌는데

폭발직후 발생한 연기가 3식탄이 아니라 주포의 장비인 93식 1호

(니트로 글리세린과 면화약이 주성분)였다는 것이 증언되었기 때문이다.

 

폭발 직후 해군은 무츠를 인양하는 것을 검토했다.

가능하면 3개월의 공기로 재전력화한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조사 결과

선체의 파손이 재생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인양계획은 철회되었다.

1944년 7월, 무츠의 연료탱크에서 중유 회수작업이 이뤄져 약 600톤을 회수했다.

 

1948년에 서일본 해사공업주식회사가 함의 탑재물자를 회수하려 했지만 허가범위를 넘어서는 인양으로 기소되어 중지되었다.

1970년부터 후카다 해사공업소 주도에 의한 작업이 재개되어

야마구치 현 오시마군 슈호 오시마마치의 무츠기념관에는 인양된 선수부분과 무장일부, 승무원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부품들도 일본 각지에서 전시되어지고 있다.

 

선미후부도 원래 인양계획중이었지만 와이어 파손으로 단념했다.

그 후 제 4포탑이 인양되어 내부에서 몇 점의 유골이 회수되었다.

인양이 어려웠던 것은 무츠의 침몰장소가 얕은 세토나이카이지만

조류가 빠르고 시계가 불량해 지금도 잠수가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7일, 제 6관구 해상보안본부는 측량선<구루시마>의

멀티비젼 측정기를 이용해 무츠의 선체를 찍어 일반공개중이다.

 

 

도쿄 오다이바의 후네(船)노 카가쿠칸(科學館)앞에 전시되어 있는 무츠의 16인치 주포 

 

 

 

 

[출처]http://blog.naver.com/mirejet/110041258059

출처 : 해군 병기사 모임
글쓴이 : 송상교(하128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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