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눈물/이난영

 

 

 

목포의눈물 이난영

 

오늘은 목포하면 떠오르는인물 이난영,이난영하면 떠오르는 단어,목포의 눈물

(목포=이난영=목포의눈물 )이라는 공식이성립하는데 이는 대한민국 어느지역에서도 성립하기힘든

목포만이 가지고있는 정서요 문화요 또한 대한민국국민의 깊은 인식이다.

이난영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수로서 대성공을 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이난영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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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은 목포 양동의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잠시다녔는데

이난영의 아버지는 술주정이심해 아버지의 폭압에 못이겨 집을 나가 제주도로 떠난것으로 구전된다.

난영이라는 이름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은예명이고 본명은 옥례(玉禮)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호적과 학부에는

옥순(玉順)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호적에 올릴당시 기록원이 실수한것으로 보인다.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당시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1학년과3학년때 재수를했다는 기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을알수있고 결국 4학년때 자퇴를 하고 제주도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갔다고한다.

 

이난영 노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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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이난영은 극장을 운영하는 어느 일본인집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생활했다고한다.

그의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않음을 안 집주인이 당시 제주도로 순회공연을 온 극단에게 추천해서 막간가수로 출연을 하게된것이 첫 계기가 되었다. 이후 태양극단의 정식멤버가 되어서 무대가수로서 출발하게된다. 이후 이난영이 가수로서 성공한 것은 오케이 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의 만남때문이다.

 

백설희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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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극단이 일본 대판으로 공연을 갔는데 이때 이철사장 역시 레코드기획을 위해 그곳에 와있었던것이 인연이 되어 정식으로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되었다고한다.

흔히 '목포의 눈물'로 데뷔를 한것으로 알지만 그 이전에 1933년 불사조가 히트를 했고 1934년에는 '봄맞이'라는 곡이 있었고 1935년 '목포의 눈물'이 세번재 히트곡인 셈이다.

 

그 시대상황과 딱 맞아떨어진 목소리였으며 아무나 흉내내거나 따라할수없는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한다.

이난영은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관한 노래를 불러 자신뿐만아니라 고향인 "목포"를 유명하게만들었다.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제1회 향토찬가]공모에 당선되는데 이가사에 손목인의 작곡이 더해져 목포와 관련된노래를 목포의 작사가 문일석이 짓고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이 불러 더큰인기를 불러일으킨것이다.

 

목포는항구다 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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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은 한국 대중가요사상최고의 히트곡으로 등장했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이난영이 목포를노래한 또 다른 대표곡으로 1942년에 발표한 '목포는 항구다'를 들수있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것으로 더 의미가 있다.이외에도 목포와 관련된'해조곡' 을 비롯 목포를 염두에 두고 '항구,바다'등을 소재로 숱한 곡을 발표하였다.

 

이난영은 1937년 천재적인 음악가 김해송과 결혼을 한다. 본명은 김송규로 평안남도 개천출신이며 동경상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김해송은 기타연주자 겸 작곡자였고 직접 가수로도활동했다. 지금의 뮤지컬의개념을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고있다.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작곡자로 성공할수있게되었다고한다.

 

김나니 해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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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이 작곡한'다방의 푸른꿈'은 국내최초 블루스곡이라는 평가를 받기도하며 최초의 뮤지컬 극단인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치기도하였는데 화려한 재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춘 김해송에게는 항상 많은 여성들이 뒤따랐고 그로인해 이난영은 말못할 고충을 겪어야만했다.

 

그나마6.25가 발발한후 남편 김해송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는데 납북후 총살되었다고한다.

이난영과 김해송은 슬하에7남매를 두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 셜리번쇼에 출연하기도했다. 지금도 후손들이 LA에 살고있다.1962년 이난영은 자식들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가서 한1년정도 생활을 하지만 적응을 하지못하고 다시고국으로 돌아왔다.

 

열일곱 낭랑  김수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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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의 말년은 매우불행한데 남편을 잃은 이난영에게 힘이되어준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와 부부사이를 유지하고살았다.  그러나 두사람의 관계에도 사연이 많은데 원래 남편인 김해송에게 여자가 생겼는데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로 참으로 기구하게도 남인수의 원래부인이 바로 자신 남편의 여자였던 '김은하'였던 것이다.

 

남인수와 이난영

 

이렇게 두사람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지독한 악연을 갖게되었는데 이난영이 불치병에 걸린 남인수를 지극 정성으로돌봤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남인수가 세상을 떠날때는 이난영을 멀리하고 원 부인인 '김은하'에게 속죄를 했다고 한다.

이런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 끊긴다. 이난영이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자를 자신의 아들이 장모로 모시고 살게된것이다.

이처럼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노랫말처럼 이난영은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것이다.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난영은1965년 4월11일 새벽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주변에 술병이 뒹굴고있는걸보고 한때 이난영이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된상태에서 술을마신것이 쇼크사로 이어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같다.

 

유달산(230m,목포),어민동산~노적봉

 

장례식에는 이난영의 자녀들이 참석을 못했는데 나중에 전해들은 바는 아버지가 납북되었기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면 다시 비자를 받을수없는 상태라 올수없었다고한다.때문에 사후5년이 지난1970년에 귀국공연을 한후 비로소 묘소를 찾게된다. 경기도 파주시에 무연고로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 등록되었던 이난영의 묘는2005년에 이난영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유가족과 묘소 이장문제에 전격합의하고 2006년 그녀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나오는 삼학도로 수목장을 통해 이장하게되었다. 사후 40년만에 고향의 품에 돌아온것이다.

 

목포이난영 가수의 공원

 

또 유달산 중턱 생가터에는 이난영 소공원이 조성되어져있는데 일부몰지각한 시민들이 이난영상에 낙서를 하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기도해 마음을 아프게한다. 1969년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졌는데 대중가요 노래비로는 전국에서 처음있는일이라고한다. 유달산에 가면 언제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있다. 재미있는건 노적봉바로앞에 사람들이 쉬어가는 휴식공간이있는데 관광오신 우리의 어머니들 노랫가락에 맞춰 관광춤(?)을 부지런히 추고계신다. 불멸의 가수이난영,여자로서 불행한 인생을 살다간 이난영, 잠시 그 가슴을 헤아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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