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고개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 바위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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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애환 깃든'바위고개'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입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고개이지만,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모든 국토가 바위고개입니다.”라고...

 

그래서 작사자 이서향은 <바위고개> 가사에서 <무궁화>를 조선을 상징한다고 금기시되던 시절이라 이것을 <진달래>로 바꾸고, <일제 식민지 시절의 핍박받은 국민들>은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던 머슴>으로 둘러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지명 중에 바위고개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중 낙동강변의 칠곡군과 달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없어진 작은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바위고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능선의 허리가 잘려서 고개는 없어지고 신작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위고개에 얽힌 가슴아픈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하늘에서 장차 우리나라에 크게 쓰일 장수 한 사람을 이 바위 속에서 키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잃합방과 더불어 일제의 마수가 여기까지 뻗치게 되었습니다. 일본관헌이 전설을 듣고 이 바위고개에 와 보니 듣던대로 낙동강 물줄기를 한 눈에 굽어보고 있는 이 고개와 바위가 범상치 않게 보였습니다.

 

일본 관헌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바위 한복판을 내려치자 바위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면서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고개 능선이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거의 다 자란 아기장수가 가슴에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장수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는 온 산과 바위를 물들이고 아래로 흘러내려가 낙동강 강물까지도 핏물로 붉게 물드렸습니다. 한편 아기장수가 죽을 때 건너편 바위에서는 한 마리 흰 용마가 뛰어나와 온종일 울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자 아기장수의 피로 물들었던 그 산에는 여기저기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진달래 꽃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kbsartsong)

 

◇ 내 어머니의 노래 '바위고개'/고정일

 


어머니의 노래를 들은 건 딱 한번이었다. 50년도 더 흐른 지금도 박꽃 같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 노래는 내 안에서 깊고 쓸쓸하게 울린다. 산내들과 온 마을이 눈 속에 잠긴 외갓집에서 보내던 그 겨울. 다섯살이던 나를, 마을 아이들은 ‘서울뜨기’라고 놀려댔다. 나는 그만 서울 집에 돌아간다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오산 읍내로 가는 산고개를 달렸다.

“정일아, 정일아!” 지쳐 헐떡이는 나를 뒤쫓아 부둥켜 안는 엄마의 눈엔 물기가 배어났다. “애들이 네가 귀여워 그러는 거야. 엄마가 까치밥 볶아줄게.” 산등성이 햇살 바른 곳엔 겨울잠 자며 한가득 열매를 단 까치밥풀이 무성했다.“까치가 겨울에도 통통하고 예쁜 건 이 까치밥을 먹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수수이삭보다 작은 자주색 까치밥을 훑어 앞치마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나를 업고 망월리 산모롱이를 내려가며 자장가처럼 노래를 불러줬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허공으로 잔잔하게 흩어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엄마의 노래 가락은 등에 기댄 내 몸을 애잔한 울림통으로 만들었다. 엄마의 하얀 목을 감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몇년 뒤 나는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한국전쟁과 1.4 후퇴... 온 마을이 포화로 무너지고 불타는 아비규환 속에 나는 애타게 엄마를 불러댔지만 피섞인 잿더미만 쏟아져내렸다. 타다 남은 옷조각 위에 어머니와 동생들 뼈를 추려 담는 아버지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 자루도 채 되지 않는 그것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끝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열 여섯살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와 스물여섯에 동족상잔의 제물이 되신 어머니. 당신은 그 뒤로 내 꿈속에서 살아온다. 한 낮도 저녁도 아닌 풍경이 눈 앞에 부유하듯 떠오른다. 바람 한점, 소리 한점 없다. 모든 것이 희부윰하게 가물거린다. 저만큼 망월리 산모롱이를 한 여인이 걸어간다. 쪽진머리 옆으로 도톰한 귓밥, 동그스름한 볼, 반달같은 이마, 상큼한 두 눈, 부드럽게 솟은 콧망울... 아, 아, 엄마...!

말은 언제나 목구멍에서만 맴돈다. 하얀 얼굴의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볼에 얼굴을 부빈다. 둘의 뺨에는 뜨거운 회한과 그리움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뭔가를 말하려던 엄마는 내게 손을 내민 채 슬픈 얼굴로 멀어져가고… 노래 소리만 아득히 귓가에 남는다.

언덕 위에 핀 꽃 진달래 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필자: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 가곡 '바우고개'(원래 곡명) 작사자는 내 남편

- 월북자 이유로 금지곡 될까봐 숨겨와
- 월북 연출가 이서향씨 아내 백난영씨가 밝혀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가곡'바위고개'1절)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대표적인 가곡 가운데 <바우고개>는 그 동안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작고)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작사자는 월북한 극작가겸 연출가 이서향(李曙鄕 본명 榮秀, 1915∼?)이 작사한 것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 이문학회 마루에서 포즈를 취한 백난영 여사

 

이서향의 아내 백난영(白蘭英 86)씨는 최근 발행된 이문학회(以文學會) 회보 <이문회우> 제 5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바우고개>는 남편이 14세이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 지은 것으로, 훗날 남편의 친구인 이흥렬 씨가 작곡해 주었다는 얘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이서향과 이흥렬 두 사람은 원래 동향(함남 원산) 출신으로 어릴적 친구 사이였다.

<바우고개>의 작사가가 이서향에서 이흥렬씨로 뒤바뀐 것은 이서향이 월북한 이후부터다. 이후 출간된 모든 음악서적에는 <바우고개> 작사자가 이흥렬로 둔갑돼 있다. 그러나 해방 전에 출간된 각종 자료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엄연히 이서향으로 나와 있다.

한 예로 1934년 도쿄(東京) 상문사(桑文社)에서 간행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가곡 <행복>과 함께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서향(曙鄕)으로 분명히 나와 있으며, 또 1939년 6월 8∼9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全) 조선창작작곡발표 대음악제> 팸플릿에도 마찬가지로 나와 있다.

 

▲ 1934년에 간행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曙鄕으로 나와 있다.

 

음악계의 한 인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얘기였으나 아무도 이를 내놓고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사안"이라고 털어놨다. 백 여사는 "한동안 월북작가들의 이름조차 거명할 수 없었던 시대여서 이같은 사실을 밝힐 수 없었지만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 동안 '빨갱이 마누라'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발벗고 나서서 밝히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 니혼대(日本大)에 유학하여, 국문학과와 예술학과를 졸업한 이서향은 귀국 후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의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한 이서향은 6·25 당시 서울에 내려와 부인 백 여사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 일로 백 여사는 나중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자신이 <바우고개>의 작사자임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이서향의 가족을 설득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백 여사와는 동서지간이자 이서향의 친동생인 음악가 이호섭(李瑚燮·전 중앙대교수. 작고)의 부인 이화용(李和蓉, 80 경기 고양시 화정 거주) 씨는 "남편의 국민학교 시절 음악선생이었던 이흥렬 씨가 생전에 더러 집으로 찾아와서 (바우고개 작사 문제와 관련)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이 씨는 "아마 (바우고개가) 금지곡으로 낙인찍힐 것을 이흥렬 씨가 두려워했던 것 같았다"며 "그러나 이제는 원작자를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이흥렬 씨의 아들인 이영조(李永朝·58)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은 "이같은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는 "사실일 경우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1940년 4, 5월경 이서향과 찍은 약혼사진

 

남편이 월북한 이후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마저 꺾여버린 백 여사는 "남편 생각을 할 때마다 '이런 억울한 일도 있나'싶어 회한에 사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白麟濟) 박사의 맏딸로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백 여사는 미군정 시절부터 탁월한 통역(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온 재원으로 한동안 숙명여고 교사를 지냈으며, 이후로는 유명인사들의 영어 개인교수를 하며 지내왔다.

지난 해부터 백병원이 세운 경남 김해시 소재 인제대학교 생활관에 머물면서 해외 입양아 모국유학생들의 모국교육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슬하에 1남(영균·미국 LA거주·공인회계사)을 두고 있는 백 여사는 자신의 회한의 인생 회고기를 <이문회우>에 연재해 오고 있다.

(이문학회:http://cafe.daum.net/imoon, 전화:766-8269)
(원문: 오마이뉴스, 2001.12.11 18:24 정운현 기자(jwh59)

 

◇ 작곡자 이흥렬(李興烈 1909~1980)

작곡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 1937년에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하였다.

 

널리 알려진 곡으로 <봄이 오면>, <바위고개>, <자장가> 등이 있으며, 가곡, 동요 등 400여 곡을 작곡했다. 서라벌예대 교수, 숙명여대 음대교수를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9년과 1961년에 대한민국 문화상과 서울시 문화상,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 등이 있다.

(출처: 야후백과)

 

 

 

 

 

 

 

 

바위고개 - 작사 이서향 작곡 이흥렬  

 

이흥렬을 가리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깨끗하고 담백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곡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가곡 [바위고개]는 그가 25세 때 만든 작품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조국 산천을 바위고개로,

무궁화꽃을 진달래로 비유한 민족의 울분을 담은 가곡이다.

 

 

 

 

이흥렬 [李興烈 1909~1980]

피아니스트·작곡가·음악교육가.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함남 원산(元山)

주요수상 :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통령문화훈장 수상

주요저서 : 음악의 종합연구

주요작품 : 바위고개,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함경남도 원산(元山) 출생.

1931년 일본 도쿄음악대학[東京音樂大學]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

1957년까지 원산광명학교·경성보육학교 배재중학·풍문여자중고등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였다.

그사이 1934년에 처녀작품집 [이흥렬작곡집]을 출간하였으며,

이 중 [바위고개]는 일제하 민족의 비운을 노래한 곡으로

그 애틋한 가사와 가락으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1957∼1980년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있으면서 1957∼1964년 고려대학교 촉탁교수,

1963∼1974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969년 한국작곡가협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통령문화훈장, 고마우신 선생님상·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작품에는 이 밖에 [어머니의 마음][꽃구름 속에] 등 다수가 있고,

작품집에 [꽃동산][너를 위하여(제2작곡집)]

[가서 나 살고 싶은 곳(제3작곡집)] 저서에 [음악의 종합연구] 등이 있다.

 

 

 

 

<바위고개>에 대한 해설

 

옛날 어느 산골에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고 있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아래 윗집에서 너 나 둘이 하며 소꿉놀이 하던 동무였는데,

이제 나이 들어 이성을 그리워할 때가 되자

갑순이는 건너 마을 공장에 나가고, 갑돌이는 마을 근처 산에서 나무를 하였다.

갑순이가 공장에서 돌아올 때면 갑돌이는 바위고개 위에 숨어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나란히 바위고개를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날마다 되풀이 되는 숨바꼭질에도 두 사람은 마냥 재미나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돌이는 머슴살이 하러 고향을 떠나고 갑순이는 혼자 남아 계속 공장을 다니게 되었다.

혼자 돌아오는 고갯길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구나!

보고싶은 갑돌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순이의 고운 얼굴엔 어느덧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마루 넘어올 때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혹시나 하고 되돌아와

바위 뒤에 수풀 뒤에 갑돌이를 찾았으나 노루 새끼 한 마리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때 갑순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화사하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이었다.

고개 위에 핀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꺽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꽃은 지고, 또 피고, 세월은 흘러

갑순이도 시집갈 나이가 되어 고향을 떠나 머나먼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한편 갑돌이는 갑순이를 다시 만날 생각에 10년을 일주일처럼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였는데,

이제 그 보람이 있어 장가밑천도 마련하고 대갓집의 집사가 되어

드디어 갑순이를 데리러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바위고개 위에서 꿈에도 그리던 갑순이를 기다리며 꺽고 또 꺽은 진달래는 어느덧 한 지게나 되었다.

그 가운데 예쁜 것만 고르고 골라 한 아름 안고 있는데 동네 친구 하나가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 갑순이의 소식을 듣게 된 갑돌이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 멍하니 정신을 잃고 바위에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이 노래는 어찌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만 했던 불쌍한 청춘남녀를 위한 애틋하고 슬픈 노래인 것이다.

 

 

바위고개 이흥렬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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