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의 체험을 복사해서 올립니다.스피커볼룸을 조정하고 보고 들으세요

                                                                          - kmryel-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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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 정목스님 그림 - 운곡 강장원님
      
    마음 공양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수행은
    마음을 공양하는 일입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상황들...
    생활 속에서 올라오는 온갖 마음들...
    괴로움, 서글픔, 답답함, 외로움, 화남...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이런 마음들을
    우린 하루에도 수십번 아니 수백번 씩 접하게 됩니다.

    너무도 많은 경계들이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음이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괴로움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수많은 경계를 한꺼번에 가져다 줍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갈길을 몰라 헤메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 가지 마음들이
    우리를 괴롭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그 속에서 그 마음에 이끌려 다니다가
    지쳐 잠이 듭니다.

    내 밖에서 일어나는 온갖 상황, 경계들을
    제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온갖 마음들을
    잘 닦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맑고 향기로워 질 것입니다.

    어찌하면 이 마음, 이 경계를 잘 닦아 낼 수 있을까요!

    순간 순간 올라오는 그 마음
    순간 순간 다가오는 그 경계
    이 모든 것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수련 과정입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 참생명
    그 밝은 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밝게 믿을 수 있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을 다시금
    나온 곳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 우리의 혼탁한 마음
    분별하는 마음들을 모두 드리면 그만입니다.
    내게 닥치는 경계 또한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 성품 가운데서 나온 것이기에
    그대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면 그만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외부의 경계 또한
    내 안의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결국은
    내 마음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행입니다.

    마음 공양!
    그 하나면
    안팎의 모든 경계가 적적해 질 수 있습니다.
    공양 중 최고의 공양이 마음공양입니다.

    부처님께 마음 공양을 올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최고의 마음공부입니다.

    어떤 마음이라도
    올라오는 순간
    부처님! 하고 돌려 놓는 것입니다.

    내게는 탁한 마음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라도
    부처님 참성품 그 밝은 자리에 가면
    모두가 부처님 마음으로 바뀝니다.

    마치 온갖 혼탁한 고철들이
    거대한 용광로에 가면 하나로 녹아내리듯...

    그처럼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에서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공양올리는 마음은
    너무나도 떳떳하고 당당하며 아름답습니다.

    공양올릴 때는
    순간 순간 올라오는 마음, 경계에 대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시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하셔도 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순간순간 올라오는 마음을
    '관세음보살.....' 이란 염불로
    마음 공양을 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염불 속에
    우리의 혼탁한 마음은
    이내 부처님 마음으로 조금씩 바뀔 것입니다.

출처 : 천불사 태산스님 (빙의,무병치료)
글쓴이 : 송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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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헌의 기쁨세상

귀신 붙은 나무
나무 밑을 지나갈 때 머리가 쭈뼛한 경우나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경험한다면 나무에 붙어있던 귀신들의 장난이다. 또 때때로 모습을 보여주거나 소리를 내어 자기 존재를 알려주기도 한다.


#귀신 붙은 나무

성황당은 사람들이 오가며 소원을 비는 나무이다 보니 나무에 얽힌 전설도 오랜동안 전해내려 온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나무나 생명이 없는 나무나 정성을 들인 대상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堂山洞)은 옛날 당산나무가 있던 동네였는데 그대로 부르다가 지명이 되어버렸다. 당산목은 영험이 증명된 나무로 위함을 받는데 매년 당산제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명이 되어버린 것으로 이와 비슷한 지명도 많이 있다.


#임하 댐 입구에 있는 나무

안동에 임하 댐이 있는데 댐 위로 난 길의 한 복판에 볼썽사나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도대체 도로 한복판에 나무가 서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관상용도 아니어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안동 MBC주부대학 강좌를 갔는데 사장이 시간을 내서 이곳의 관광지를 안내하는 과정에서 보게 된 나무인데 이런 말을 한다.

“댐을 만들면서 저 나무를 없애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나무를 베려고 시도하다가 7명이나 그 자리에서 죽거나 며칠 안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 아무도 나무를 베려고 나서지 않아 할수 없이 나무를 둔 채 길을 낸 것입니다.”

이 나무는 그런 연유로 여러번 방송을 탓던 나무다.


#이런 나무를 처리하는 방법

나무도 생명이다. 오래된 나무에는 영계에 가지 못한 영혼들이 깃들어 있어 자기를 위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이유를 모를 뿐 아니라 벌레가 먹거나 썩어가 차라리 베어버리는 것이 나은 경우도 많은데도 대부분 그대로 놔두는 것은 혹시 무슨 해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불교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모 스님의 얘기를 들어 보자.

“쉽게 얘기해서 오갈데 없는 영혼들이 공짜로 세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유도 모르게 철거되어 보십시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답이 나옵니다.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거나 사전통고라도 해야겠지요. 제사 지내듯 차려 놓고 알아 듣게 말하는 겁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귀신도 빌고 사정하면 들어줍니다.”

북관대첩비의 북한 인도를 하루 앞두고 올려진 환송 고유제(告由祭)에 대한 TV 뉴스를 보며 우리는 예부터 그렇게 제례를 지내온 현명한 민족임을 새삼 느꼈다.


#염주 묵주 불경 성경의 처리

염주나 묵주, 성경이나 불경 등은 사람의 정성이 들어간 물건들인데 십자가나 불상도 해당된다. 그러나 오래 되면 쓰다가 낡아서 버려야 할 경우도 있고 종교를 바꿔 필요없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대부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위함을 받던 물건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이미 영혼의 영향권에 들어가 이렇게 버려질 경우 대부분 뒷끝이 좋지 않다.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끼던 물건이나 정성을 들인 물건에는 영혼들이 붙게 마련이지요. 자신도 사랑과 위함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그냥 버리면 영혼들은 오갈 데가 없어 자기를 버린 대상이나 가족에게 해코지를 하게 되지요. 이럴 경우 자기가 믿던 종교기관의 성직자에게 처리를 부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분들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심리교육협회장

출처: 행복 에너지

 

2009/06/10 Alpus

 

 



I'd Love You To Want Me - Lobo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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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권오문-'한순간을 영원처럼'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신간리뷰>'한순간을 영원처럼' 죽음 이후의 세계 본격해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크게 부닥치는 것이 죽음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서 한평생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던 사람도 함께해온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지면 그것이 자신에게도 현실로 다가옴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종합일간지에서 오랫
동안 종교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인 권오문이 펴낸 '한순간을 영원처럼' 은 죽음에 대한 종교별 시각을 소개하고, 그 차이를 비교하는 한편 사후 세계와 자료를 집대성했다.

저자는 여러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영통인의 증언, 영계 관련 서적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죽음학’ 등 그간의 성과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독자들에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주고자 노력했다.

▲ 저자 권오문     ©브레이크뉴스
그동안 인간은 과학과 의학 기술을 동원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대부분 죽음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의료기술과 의사들에게만 맡겨버렸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어느 날 불쑥 죽음이 다가왔을 때, 대부분 이 실존의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기제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너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죽어갈 뿐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도움도 받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의 문제와 대면할 힘과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한 생명의 영원한 종말일까? 죽음 이후의 삶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수많은 종교인과 구도자, 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 왔다. 누구나 한번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마저 슬그머니 덮어버린다. 이제 이러한 혼란과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모호한 말이나 막연한 주장에 자신을 맡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후세계를 알면 삶이 보인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누구나 가져 보았을 법한 의문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모습은
달리하지만 또 다른 삶이 계속 이어진다고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 육신은 사용기한이 다 차면 땅으로 되돌아가지만 영혼은 그대로 남아진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정신이 주체이고 육신이 객체이듯이 정신은 육체와 상관없이 영적세계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 그 자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죽느냐’이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실제로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 죽음이 자신을 가장 극명하게 독대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 후회하기보다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일상 속에서 죽음의 임박성을 새기며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종교가 주장하듯이, 사후세계가 분명 존재하는데도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당황할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이 어떤 곳이라는 정보는 어느 정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프랑스의 수학자 파스칼도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 뒤에 우리 삶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죽음 뒤에 영원한 삶이 있다고 믿으라. 그래야 참된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죽음과 영계 문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더욱 희망이 넘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영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 권오문 의 저서    ©브레이크뉴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유사 이래 이러한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 왔지만 석연한 해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종교와 철학, 의학, 과학 등 모든 것을 동원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풀고자 했지만 그 해답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는 죽음의 문제와 인간이 죽으면 가게 되는 사후세계, 즉 영계(靈界)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오랜 동안 터부시했던 죽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종교에서만 논의됐던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활발해지고 임사(臨死)체험자들을 통한 사후세계의 탐구도 진척되고 있다.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사후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느냐는 사회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영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지상 생활은 영계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우리의 삶에서 이보다 큰 구속력은 없을 것이다.

영계 존재의 인지 여부에 따라 지상에서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영계에 대한 연구는 시급한 과제다. 죽음 이후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아름다운 죽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준비한다면 죽음의 순간에 처절한 공포와 고독에 휩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 또한 더욱 보람되고 행복해질 것이다.

영계의 삶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적 주장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영계를 가고 있다. 그래서 영계에서 전개되는 모든 생활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사는 동안 정말 인간다운 삶, 영원한 세계를 위해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야
 
이 책은 <생로병사, 그 진실> <실체 드러내는 영적 세계> 등 2부로 나눠 기술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과 각 종교에서 보는 죽음에 대해 소개하고, 죽음이후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각종 영적 현상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결국 현상적 세계만으로서는 생로병사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진단한다. 각 종교에서 보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임종 이후 영계에 안착하는 한 젊은이를 통해 사후세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어 우리 인간에 사후세계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고 영계의 삶과 지상의 삶에 대한 특징적 내용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

인간과 자연의 조화, 즉 자연 순응적인 삶 ▶

인간과 인간의 조화, 즉 상대방을 위한 삶 ▶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 있다”면서 “우리는 이제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 전화 010-6213-5875. 성화출판사. 326쪽. 1만원>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한순간을 영원처럼 = 권오문 지음. 세계일보에서 오랫동안 종교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죽음에 대한 종교별 해석을 소개하고 그 차이를 비교하는 한편 사후 세계와 관련된 서적의 내용을 추려 펴냈다.

특히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무속인의 영적 세계 등을 소개하고, 사후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서구인들에게 알려진 스웨덴의 과학자
스베덴보리(1688-1772)가 남긴 천국과 중간세계 등도 상세히 전한다.                                                                                                                                 

 

 

 

 

 

                                                                                              

  

 

 

A Spirit  

 of Al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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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53·끝>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지상에서 생활 중 올바른 영혼성장에 힘써라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천국과 지옥’.
인간이 죽어서 가게 된다는 천당과 지옥은 우리에겐 아직도 영원한 미스터리인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의문,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질 수밖에 없는가. 영계(靈界)를 볼 수도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각자 종교적 신념이나 세계관에 따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종교인은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생물학적인 사망 이후에도 의식이나 생명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등 중동의 종교 전통과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의 종교 전통이 이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유교를 비롯한 중국 문화권의 종교 전통은 죽음이란 말 그대로 ‘존재의 소멸’로 간주합니다.

영계는 아직 우리에겐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계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지상인들에게는 혁명적 변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우선 교리적 차이나 이해타산에 따라 분열을 거듭해온 종교의 혼란을 수습할 뿐만 아니라 인간 각자의 생활태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이 증거하듯이 지상생활이 영계의 삶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세상에 이만한 구속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과 사,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물론 아직 지상의 삶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까지도 모두 사후에 전개될 세계에 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사후세계에 대한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증거를 통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통인(靈通人)이나 ‘사후 보고서’와 같은 영계 관련 서적들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계에서 수많은 영통인들을 통해 계시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각고의 어려움,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허물을 벗고 대자연의 품속에 안기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육신의 탈을 벗어던지고 시공을 초월하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식, 영계의 삶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계에 대한 증언의 공통점

사후세계에 대한 증언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영계는 천리법도, 원리원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나 정직과 같은 원리원칙이 인격의 잣대가 된다는 것은 영계나 지상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가난과 병마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세상이 된 것은 천리법도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주나 인간의 육신에서 원리원칙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만일 영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는 이보다 더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많은 영통인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일탈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인간생활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부나 이웃 간의 사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지 간에 사랑은 늘 강조돼 왔습니다. 성인들도 물론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영계에서는 어떨까요. 영계에서도 사랑은 영인들의 인격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을 테고, 나라와 세계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만한 수준의 세계에 살 수 있습니다. 역시 남을 괴롭혔던 사람,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은 사랑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넘치는 곳, 살맛나는 세상이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계는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지상인이 임종 후 자기 스스로 심판하고 자신의 영적 기준에 맞춰 거처를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영계가 원리원칙이 강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영계에서도 좋은 곳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지상생활에서 영혼을 성장시킨 후에 영계에 가도록 돼 있습니다. 결국 육신의 허물을 벗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세계, 영혼의 세상에서 어느 곳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육신생활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은 지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잘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욕심에 찌들려 살았거나 늘 의심의 눈초리로 타인을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영계라는 별천지 세계에서도 그 습관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비뚤어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잘못 형성된 영혼으로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 영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거나 인간을 그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스스로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영인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영계는 판사들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러한 대심판관도 없다. 누구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처리한다. 자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 된다. 그러한 심판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상에서 한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기간 우리는 인격의 성숙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성장은 육체와 정신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즉 지상생활은 참인간으로 성숙되기 위한 훈련기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참인간으로 성숙될 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삶의 목표와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교육이나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왔고 성인이나 위인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내용입니다. 종교인이나 영계 연구자들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지상생활의 최대 목표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분명히 그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각 종교단체는 영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영계에 대한 교육에 나설 때입니다. 각자는 지상에서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면서 영계의 삶을 준비할 때가 지금입니다.

◇영계에 대한 준비, 올바른 영혼 성장법

영계는 지상생활을 통해 성장된 영혼이 생활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삶이 행복하려면 지상생활에서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영계의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 영혼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원칙을 특별히 지켜야 합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 즉 자연 순응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세상의 존재 목표가 있다면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순응적 삶, 다시 말하면 자연의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요즘 이야기하는 생태주의적 삶을 말합니다. 생태주의는 천지법도적 삶이요 도덕·진리적 삶입니다. 최근 각 분야에서 생태주의가 크게 부각되는 것은 마구잡이식 개발경쟁으로 자연환경의 훼손상태가 심각해진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은 바 그대로’, 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 없이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친화적 삶은 본래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살게 돼 있는 천리법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리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즉 상대방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체적, 공생체적 관계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로 돕지 않을 경우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처럼 인간 서로 간에도 적용됩니다. 성인들이 부르짖은 사랑이나 자비, 인(仁), 희생적 삶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이기심이나 타락적 근성과 같은 것은 인간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경쟁논리도 따지고 보면 장점도 있지만 인간성을 말살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기독교의 주장대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목적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본연의 행복된 삶을 통해 영혼을 올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한번도 창조본연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창조본연의 삶은 자연순응적 삶이요, 남과 어울려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행복의 극치를 지상에서 맛볼 때만이 영계에서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영계를 아는 이들의 증언입니다.

영계에 대한 실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에게는 신비스럽고 복잡하기만 한 영계의 내용을 체계화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영계의 신비를 밝혀줄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만 갖는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안타깝게도 지상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영계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에서 전개되는 모든 생활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영계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타락성을 벗어버리는 교육,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천국생활을 위해 영계의 구조와 규범, 영인들의 자세 등을 담은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개인을 위한 삶은 생존 중심의 1차원적 삶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한 터전 위에서 2차원적 삶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적 삶, 공생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3차원의 삶인 영적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여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말 인간다운 삶, 영원한 세계를 위해 영혼을 올바로 성장시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권오문 논설위원/omkwon@segye.com

 

 

 

 

 

 

 

 벨리니(Bellini)
노르마 서곡(Overture No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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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9>

무슬림이 생각하는 사후세계

이슬람교의 사후세계에 대한 시각은 한 뿌리를 두고있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 뿐이고 그 분은 죽음 이후 심판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인간은 의롭고 윤리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의롭게 산 사람은 죽은 후에도 하느님이 예비해놓은 낙원에 들어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그것을 ‘아흘 알타위드’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은 이들의 영혼이 무덤에서 부활할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 모든 사람이 함께 경험하게 되는 종말론적인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시간이나 역사는 창조의 때와 종말의 때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알두냐’라고 하고, 저 세상은 ‘알아키라’라고 합니다. 이슬람 가정에서는 어린시절부터 알아키라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의 알두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이슬람교에서는 육체를 떠난 영혼은 긴 여행길에 들어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여행을 미라즈(mi´raj)라고 부릅니다. 그 여행은 무하마드의 인도를 받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혼은 처음에 하늘로 올라가서 지옥의 여러 단계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의롭게 산 영혼들은 죽을 때도 영혼이 육체로부터 아무런 고통없이 분리돼 향기속에 휩싸이게 되며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를 받아 천국의 7계단을 통과해 그가 있을 곳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행의 종말에서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후에 영혼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거기에서 머물게 됩니다.

간악한 자들은 죽어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 큰 고통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취를 견디어야 하며 가장 낮은 하늘의 단계에서 조차 그들의 입장이 거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그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환상을 본 후에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심판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죽을 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이 ‘문카르’나 ‘나키르’ 같은 천사의 방문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과 무하마드나 이슬람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되는 지를 묻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 능력에 따라 의로운 영혼인지 신앙심이 없는 영혼인지를 결정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비이슬람적인, 즉 토속적인 것이 편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또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합니다. 선한 행동을 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무덤 꼭대기로부터 창문이 열리고 낙원으로부터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을 느낄수 있지만 악한 영혼에게는 무덤 밑이 열리고 지옥의 뜨거운 악취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산 사람은 천국의 향기로운 냄새를 느낄수 있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반대의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전이라도 벌써 그 영혼의 행동결과에 따라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무슬림들은 그 처벌의 내용들이 마치 모두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내려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낙원이냐 불이냐

후의 심판 날 영혼은 원칙적으로 낙원의 기쁨이냐, 지옥의 불로 떨어지는 고통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에는 죽은 의인의 잠정적 거주지를 말하는 곳인 ‘알아라프’, 즉 ‘림보’개념이 있습니다. 즉 아무 죄 없이 죽은 어린이 등이 불의 심판이나 저울로 그의 행위를 달아보는 것은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낙원으로 들어가거나 지옥의 불로 떨어지지 않는 영혼이 머물러있는 장소가 마련돼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에 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낙원과 불의 지옥을 너무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사후에 대해 너무 유물론적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느냐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에서 묘사되는 낙원과 지옥의 고통 등은 대부분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이어서 이러한 비난을 받을만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란 자체는 낙원의 영역이나 불의 영역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코란 15장에는 ‘게헨나’라는 7 단계의 불이 있는데, 그에 해당하는 죄인들이 불의 처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불의 단계와는 달리 낙원의 8단계도 있다는 것입니다. 낙원에서 가장 넓고 높은 부분은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바로 그 아래에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의롭게 산 사람은 기쁨을 얻고, 의롭지 못하게 산 사람은 고통을 받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무덤이라는 것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을 계속적으로 바라보는 비전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세상에 그들이 받을 상금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불의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도 먼 미래에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권오문

종교심문 논설위원 omkwon@segye.com


<사진>이슬람교에서는 육체를 떠난 영혼은 무하마드의 인도로 긴 여행길에 들어서게 된다고 믿고 있다. 사진은 상류계급의 매장의식. 코란이 낭송되는 가운데 유체를 목욕시킨 다음 하얀 천에 싸 메카를 향하도록 누인다. 뒤의 돔 모양 건축물은 유복한 무슬림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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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안한 명상음악 모음 1. 귀 소 - 김영동 2. 해 후(邂逅) - 김영동 3. 아침의 소리 4. 霞 琳 城 5. 마음을 다스리는 경 음악 6. 진정한 행복 7. 바람을 그리며 8. 새 날 9. 무소유(가야금) 10. 인생은 한바탕 꿈 11. 한결 같은 사랑 12. 영혼의 피리 13. 산사의 아침 14. 비 개인 삼림 - 비에 젖은 신록 15. 안개의 향연 - 수풀 저 편에는 16. 대니보이 - 나나 무스꾸리 17. 어메이징 그레이스 - 나나 무스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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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의 명상음악.1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1 西來意(서래의)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2 밤은 깊고 산은 비어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3 봄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4 벗에게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5 바람 잔곳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6 삼매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7 그대 얼굴 가을 달이여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8 東山에 올라
    산사의 명상음악(1집) - 09 자네를 보내며
    산사의 명상음악(1집) - 10 비오는 날
    산사의 명상음악1 - 11 정월 보름달
    산사의 명상음악(1집) - 12 일 없는 것이
    산사의 명상음악(1집) - 13 해묵은 뱃사공
    산사의 명상음악(1집) - 14 구멍없는 피리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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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2>

    일상사로 다가온 죽음, 죽음학의 등장

    죽음은 누구도 부인하거나 회피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의 생활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행동하거나, 죽음은 인정하나 머나먼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현군자나 영웅호걸도 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모두 죽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말입니다.

    현대사회에는 의학의 발달로 사망자 대부분이 노인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반드시 노인에게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사처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보듯이 현대문명은 인간의 수명이 다해 가만히 누워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종교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늘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른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죽음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반도가 북한의 핵 문제 때문에 시끄럽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대량살상무기는 지구의 종말이 현실화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어쩔수 없이 죽음과 친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죽음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의 끝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제 인류사회가 죽음을 다시 개개인에게 친숙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잘 죽는다는 것

    내세에 대한 관심, 죽음에 대한 이미지의 보편화와 친근감에 따라 죽음이 신성하고 두려운 것에서 언제라도 닥칠 '나의 일반적 문제'로 변화한 것은 수많은 죽음 관련 서적과 영상물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화, 비디오 등 동영상에 익숙한 어린이와 신세대 젊은이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에 접근하고 죽음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결국 현대인은 대중문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반복하면서 죽음의 이미지를 친밀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자살사이트를 통해 동반자살을 모의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이 죽음을 실행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는 정도와 관계가 있으며, 사회변동이 급격하여 미처 대처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지만 자살의 증가는 죽음의 일상화 현상의 하나입니다.

    죽음은 시대적 차이나 문화적 차이, 사회.역사적 배경 차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고 있으며,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반응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죽음은 인류역사상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철학과 예술, 특히 문학에서의 대명제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친숙한,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다가 잘 죽는 것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한 번뿐인 유한적인 운명임을 깨닫고 또한 나의 생활이 매일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할 때 내 삶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며 충실하게 적극적으로 살도록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죽음학'의 대두

    요즘 학계에서는 어떻게 하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죽음학 또는 임종학(Thanatology)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임종학은 죽음에 대한 의학적, 문화적, 종교적, 법적인 의미와 접근방법, 죽음에 대하여 알 권리, 인공적인 생명연장에 대한 논의, 안락사, 존엄사, 임종간호, 통증 관리 등 죽음과 임종(dying)에 관련된 다양한 의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죽음학에서는 죽음의 의미와 대응방법을 가르쳐야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합니다. 대학가에서 죽음학 강의가 화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안락사, 호스피스, 살인과 사형제도, 자살, 죽음과 종교, 장례의식 등의 주제에 대해 연구발표를 하고, 죽음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또한 유서를 써보고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학의 거장인 노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서구문명사회가 죽음과 노화를 은폐하고 젊음과 건강을 강조하면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부정과 왜곡된 공포가 죽어가는 인간을 고독과 절망 속에 빠뜨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이제 올바로 잡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의미와 사후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죽음의 순간을 잘 맞이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 omkwon@segye.com


    <사진>우리나라의 전통 장례문화를 엿볼수 있는 임권택 감독의 '축제' 영화포스터. 현대인들은 영화나 책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의 이미지를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길래 -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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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6>

    기독교의 영생관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영생' 또는 '영원한 생명'이란 영혼불멸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 하느님과 예수와의 교제로써 주어지는 새 생명임과 동시에 마지막 날에 완성돼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임한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보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14).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영생입니다(요한복음 6:56∼57). 하느님과의 교제 단절을 뜻하는 죽음과 반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영생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해 뚜렷한 영생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는 구세주

    신약성서에서는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사후 운명문제는 거의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이에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및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했지만 개인의 사후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초기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 과정을 거쳐 완성된 까닭에 신구약 중간기의 상황적 배경을 알지 않고서는 추론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587-539 B.C.) 이후 유대민족은 자신의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야훼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습니다. 암울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하느님의 주권과 이스라엘 구속의 도래, 그리고 그 계시를 땅이라는 제한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인 것으로 넓혀졌습니다. 그러면서 죄와 저주 아래 낡고 퇴폐하여 무서운 파국으로 돌진하는 이 시대와 의인들이 보게될 영광과 기쁨 가운데 다가오는 새로운 하느님의 시대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가 자리잡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유대교의 신학 가운데 나오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실상 인간을 통전적으로 하나로 봤으며, 영혼불멸에 대한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창조됐으며, 죽음 역시 하느님의 의지 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의로운 자의 죽음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구원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이로인해 부활의 개념이 더욱 발전됐습니다.

    ◇사후보다는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던 예수의 영생관

    신약성서 학자인 캐드브리(Henry Cadbury)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청중들은 사후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새롭게 정립하거나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나 그의 청중들에게 있어 사후문제는 논쟁거리나 물음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후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정의나 범위 등을 알려주는 어떤 암시가 예수에게는 없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캐드브리는 예수와 그 무리들은 당시에 널리 통용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미래의 부활과 죽은 자의 심판 등 유대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존 힉(J. Hick) 역시 이미 죽었던, 그리고 지금은 잠들어 있는 의로운 자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며, 하느님의 왕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B.C.2세기경 묵시문학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부활에 대한 대중적 개념은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 등 복음서에 기록된 죽음과 사후에 관한 기록들은(예수가 말했건 혹은 후대 공동체가 말했건 간에) 대체로 유대종교에 편만했던 죽음에 관한 개념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는 죽음의 문제가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죄'라고 부르는 어떤 결정적 요인 때문에 인간생명 안에 들어온 비정상적 상태로서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롬 5:12, 6:23,고전15:22). 바울에게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적 심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죽음은 죄의 값이며, 죽음이 쏘는 아픈 가시의 힘은 죄가 지닌 힘 때문인 것으로 해석합니다(고전 15:55). 따라서 '죄'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듯이 죽음 또한 멸망받아야 할 원수로서 이해되고 있습니다(고전15:26).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에게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살전 4:14)이라는 믿음 속에서 죽음을 극복합니다.

    기독교의 영생관의 기초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나 사도 바울 등의 사생관이 보여주는 중요한 점은 현재적 삶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의 사생관은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며, 때로는 상반된 주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만약 이것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리가 필요했다면 이들은 온통 그것에 관심을 쏟고 이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습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 omkwon@segye.com


    <사진>승천하는 예수. 사도 바울은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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