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탐구/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7>

불교는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중생에 삶과 죽음은 서로 충돌합니다. 삶은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은 삶은 밀쳐냅니다. 둘은 그렇게 상호 배제적이고 모순적입니다.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은 실로 받아내기 힘든 고통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삶과 죽음이 따뜻하게 만나는 통로는 없을까요. 불교도들은 죽음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면서 삶의 무게를 더 해가는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해법은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벽을 허물어 서로를 소통시키려면 무아 무분리 무소유 무집착의 지혜를 깨닫고 그 힘을 키워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의 모든 내용물들을 분리와 소유와 집착으로만 끌어안지 않는다면 죽음은 비로소 단절과 상실이 되기를 그칠 터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담담히 안을수 있는 것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

'목련 비구 어머니의 지옥 사건'은 불교의 생사관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련경'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생전 악업의 과보로 아귀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출하기 위해 목련(目蓮) 비구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우안거 해제 전날 수행승들에게 대중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힘에 의해 스스로 발심 참회하고 천상계로 올라 깨달음의 길로 나아갑니다.

정말, 천상 지옥 극락이 있는 것일까? 죽으면 그만 아닐까? 그저 착하게 살라는 얘기 아닐까? 이 목련 비구의 사건을 놓고 이렇게 본질적인 문제까지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하면서 행복을 구하는 다른 이들을 해친다면, 그는 다음 생에서도 결코 행복을 찾지 못하리. 자기 행복을 위하면서, 행복을 구하는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는 다음 생에 반드시 행복을 찾으리." 붓다는 '다음 생'에 대해 이같이 단순 명료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밧티 거리에서 뱀을 잡아 괴롭히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준 붓다의 설법으로, '법구경'에 기록돼 있는 사건입니다. 이 설법을 듣고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불교에서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악의 업(業) 보따리를 짊어지고 선하고 악한 세계를 오가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은 누구도 부정하거나 피할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아귀지옥에서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목련 비구의 어머니 모습은 어쩌면 멀지않아 당면하게 될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발심한 수행자는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토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깨닫기만을 추구합니다. 삶을 삶으로 보고 죽음을 죽음으로 볼 수 있는 부동의 깨달음에 이르기를 갈망합니다. 그런 까닭에 수행자들은 차라리 지옥의 수렁 속으로 뛰어듭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고독해 하는 이웃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헌신봉사야말로 가장 단순명료한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순수헌신이야말로 불성을 드러내는 최선의 수행이기입니다.

◇불교의 생사관

불교에서는 죽음을 인간으로서는 피할수 없는 현실로 보았습니다. 이 현실의 냉혹한 자각을 통해 죽음이라는 실상을 초연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체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극복을 통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후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었습니다. 즉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추구였습니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로서 번뇌를 꺼 버린다는 원의를 지닌 열반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열반(生死卽涅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가 됩니다. 불교에서의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며 마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무심(無心)의 상태, 즉 적정(寂靜)이며 열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때 해결됩니다.

붓다께서 기존의 종교와 사상체계를 거부하고 출가수행해 홀로 도를 닦아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가장 중요한 명분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벗어나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풍토가 싯달타 태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으신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생로병사를 있게 한 요인은 마음속의 번뇌망상이고 나를 위주로 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기준해서 지나치게 세운 기대가 어긋난다고 할 때 괴로운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뜰 앞의 단풍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나,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보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체험을 하신 게 부처님의 생사관의 특징입니다.

갈 것은 갈 때가 되면 가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강물이 흐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고이면 썩게 됩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야 영원히 푸르고 아름다운 거지요. 붓다나 큰스님들도 앞산에 구름이 생겼다가 진 것처럼 가셨습니다. 물질로 된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무상법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봅니다. 때가 됐으니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표는 생사를 두렵지 않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떳떳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자의 생사관입니다.


권오문 

종교신문 논설위원 omkwon@segye.com


<사진>혜암 큰스님의 다비식.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다.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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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통해 본 내세(來世)와 사생관(死生觀)


우리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찌 되는 것일까. 來世니 저승이니 하는 사후관계란 과연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 곳은 어떠하며 우리는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그 곳으로 가는 것일까? 더욱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고, 자기가 어떤 종교를 가졌던지 혹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각각 자기 나름의 死生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간의 죽음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 허다한 종교 중에 내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는 어떤 것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나의 사생관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내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은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현대 지성인으로서의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멀리 석양노을을 바라보며 한 번쯤 깊은 사색에 잠겨 봄직한 일이다.



1. 유교(儒敎)

유교에서는 천지만물이 음양(陰陽), 오행(五行)이라는 기(氣)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또한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지다고 한다. (聚則生 散則滅)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의 모임으로 태어났다가 그 기의 흩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다만 기에는 맑고 흐리고, 깨끗하고 더럽고, 순수하고 잡된 것이 있는데 사람은 그 중에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을 받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기의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生成消滅)점에 있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다 같은 자연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넋은 흩어진다(魂飛魄散)하여 날아가는 혼을 불러들이려고 亡人의 체취가 배인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흔들면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절차를 밟는다.



죽음 뒤에도 살아지지 않는다고 믿는 혼백(魂魄) 역시 음양의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마침내 흩어지는 것이고, 자연으로 돌아간 기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하여 代를 이어 감으로서 그 허무함을 달래고 영생의 욕구를 대신하려 한다. 대가 끊어지는 것은 영생이 단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을 못나면 아내를 쫓아내는 七去之惡이니 다른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아 오는 씨받이니 하는 습속(習俗)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生과 死를 天命(우주의 섭리)에 따른 氣의 集散으로 볼 때 인간의 죽음 역시 자연의 기로 돌아감이다. 자연은 인간의 모태(母胎)요, 본래의 고향이다. 따라서 죽음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자연과의 영원한 合一이다. 우주는 영존(永存)하는 것임으로 우주와의 합일인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변형된 영존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2. 도교(道敎)

유교와 더불어 중국에서 발생한 도교 역시 내세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둔 종교이다. 유교가 내세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 감으로서 영속성을 유지하려 했다면, 도교 역시 내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너무도 허무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長生不死와 신선이 되는 성선(成仙)의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도교의 대표적 저서인 포박자(抱朴子)를 쓴 晉나라의 갈홍(葛弘)은 불교처럼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것이나, 유교처럼 죽고 사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죽음을 피하고 수명을 늘리는 일에 힘써 궁극적으로는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하지만 천지는 다함이 없고, 사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만 거북과 학은 오래도록 산다 고 하면서 어찌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겠느냐고 그는 갈파한다.



그래서 초기 외단(外丹)에서는 불로초나 불사약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고, 후에는 내단(內丹)으로 방향을 바꾸어 정신적인 수양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죽음에 봉착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도교에서의 인간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독특하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사람은 죽은 체하고 평범한 의식에 따라 땅에 묻히지만 자기의 옷이나 지팡이에 시체의 모습을 담아 관 속에 남기고, 정작 자기는 무덤에서 빠져나가 영생하는 사람들이 사는 신선세계로 간다고 한다.



이것이 곧 도교에서 말하는 시해(尸解)요, 시해선(尸解仙)이다. 당당하게 선계(仙界)로 올라가지 않고 은밀히 하는 이유는 범인(凡人)들의 일상 사회를 혼란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니 과연 선인(仙人)다운 배려라 할 것이다.



3. 불교(佛敎)

같은 동양권이면서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유교나 도교와 달리 내세관이 뚜렷하다.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이요 종말이 아니라고 본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에 따라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과(業果)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듯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또는 축생으로 각자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윤회유전(輪廻流轉)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善業)을 닦고 내세를 예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사바세계에서 生老病死의 四苦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회의 고리를 끊고 그 사슬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래야 비로소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가 되는(成佛) 것이다.



이와 같은 윤회사상은 정업(淨業)을 닦으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대승불교의 정토신앙(淨土信仰)으로, 마음이 맑으면 대지가 맑아진다는 선종(禪宗)의 자성미타(自性彌陀)신앙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미학으로 승화되고, "죽음이란 한 조작 뜬구름이 스러지는 것이요,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4. 힌두교

힌두교하면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종교이지만 인도라는 나라 이름이 '힌두'와 같은 어원(語源)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케 한다. 인더스문명과 함께 기원전 2,500년경에 발생하여 후에 바라문교와 융합하고 불교를 파생시킨 인도의 토착종교로서 4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인도 10억 인구의 83%가 이를 신봉하고, 네팔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이다.



"마치 사람이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몸속에 살고 있는 아트만도 낡은 몸뚱이를 벗어 버리고 다른 새 몸뚱이로 옮겨 가는 것이다."



"풀벌레가 풀잎 끝에 다다르면 다른 풀잎을 잡고 건너가듯이 이 아트만도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육신을 벗어 버리고 다른 육신으로 건너간다.



이와 같은 인도의 고대 경전에서 힌두교의 일관된 정신과 불교 윤회사상의 원류를 본다. 사람의 신분을 이른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사성계급(四姓階級)으로 나누어 철저하고도 가혹한 영구불변의 차등을 두고 있지만 그들은 비록 자기가 하층 천민계급으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보라고 믿기에 불만 없이 이를 감수한다.



동시에 현세에서 선업을 쌓아 내세에는 상층계급으로 태어나도록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윤회를 거듭하는 영겁(永劫) 속의 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어서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삶은 삶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요,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해탈이다.



5. 기독교(基督敎)


기원전 4세기 아테네법정에서 피할 수도 있었던 처형을 스스로 자초하여 태연히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는 "인생이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 기독교에 들어와 정통교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 26절)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요 이처럼 영생과 부활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다.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썩어 살아지지만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하나님 곁으로 보내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또한 우주공간에 오직 한 분인 唯一神 여호와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조상의 영혼을 죄 많은 세상에 초대할 이유도 없을는지 모른다.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내려오는(再臨) 날, 이 세상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는 그 앞에서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구원을 받는데 산자는 산대로, 죽은 자는 부활해서 들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것이 곧 재림이요 부활이요 휴거(携擧)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좌를 사(赦)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하고 기도한다.



6. 이슬람교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하면서도 가장 크게 갈등을 빚으며, 교리가 곧 법이요 생활규범이어서 사람의 일상생활을 극도로 불편하게 규제함에도 불구하고 중동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15억의 신도를 가진 세계 3대종교의 하나가 바로 이슬람교이다.


신이 땅을 빚자 "땅의 주인은 누구냐"고 천사들이 물었다. "나를 대신하여 땅을 다스릴 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 蘭湧繭"고 신은 대답했다. 그리하여 하늘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땅으로 내려왔는데 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땅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들은 변태의 과정을 한 번 거처야 했다.



이렇게 해서 땅에 내려온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사람은 신의 뜻에 따라 땅에서 신이 위탁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정해진 기간의 자기임무를 마치면 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천국의 환경이 땅과 다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서 내려올 때 변태했던 것처럼 그들도 천국의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태를 해야 한다. 즉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한 변태의 과정이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죄가 있다고 하는 원죄설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이슬람교에서는 죄란 현세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환경이나 사회환경에 의하여 오염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자범죄가 있을 뿐, 원죄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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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록 원죄는 없더라도 본의 아니게 오염된 때(垢)와 자기 스스로 지은 죄가 씻김을 받지 않고서는 순결무구(純潔無垢)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과 유사한 '바르자크' 단 甕 거처야 하고, 여기에서 씻김을 받는 것이 곧 죄를 사함 받고 변태하는 과정이다. 즉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이 변태의 과정이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죽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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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각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각기 다른 견해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산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항상 경험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혹은 聖者의 깨달음이라 하고, 혹은 신의 계시라 하며, 또는 영감에 의한 기록이라 하지만 이 또한 산 자가 말하는 죽은 자의 행적일 뿐, 죽은 자의 경험에 의한 죽은 자의 기록은 산 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산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어차피 피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종교의 고유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적선을 해야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 하고(유교), 도(道)를 닦아야 신선이 된다 하며(도교),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극락세계에 간다 하고(불교), 이웃을 사랑해야 천당에 간다(기독 교)고 하는 등, 각기 방편(方便)은 다르지만 그 목표는 오직 하나, 현세의 삶을 바르고, 의롭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가르침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하나로 귀결된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하는가 보다.

 

 

  

 A Spirit  

 of Alpus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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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생을 아는 것은 통(通)도 명(明)도 아니다 !! 옛날 어떤 백정[屠兒]이 아사세왕에게 가서 한 가지 소원을 청하였다. 왕은 물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그는 대답하였다. “왕께서 명절 모임 때에는 반드시 짐승을 잡을 것인데, 그 일을 제게 맡기시면 제가 다 하겠습니다.” “짐승을 죽이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데, 너는 왜 그것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저는 전생에 가난하여 백정 집에서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사천왕(四天王)에서 났다가 거기서 천수가 다하여 인간으로 태어나 계속해서 양백정 노릇을 하였고, 거기서 목숨을 마치고는 둘째 천상에 났습니다. 이렇게 여섯 번 양백정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여섯 하늘에 두루 나서 한량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왕에게 청하는 것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비록 네 말과 같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그것을 알았는가?” “저는 전생 일을 압니다.” “저것은 거짓말이다. 저런 하천한 사람이 어떻게 전생을 알겠는가?” 그 뒤에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대답하였다. “진실로 그 말과 같고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도 전생에 일찍 벽지불을 만나보고 기쁜 마음이 생 겨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 머리를 우러러 보고 그 발을 내려다보다가 곧 착한 마음을 냈습니다. 그 공덕으로 낱낱 여섯 하늘에 두루 나게 되었고, 인간에 내려와 나서는 스스로 전생 일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덕이 익었기 때문에 여섯 번 천상과 인간에 나게 되었고, 그 죄가 아직 익지 않아 지금 당장은 과보를 받지 않지마는, 저 몸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 양백정의 갚음 을 받을 것이요, 지옥에서 나와서는 양의 무리로 태어나 낱낱이 그 갚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전생을 아는 지혜가 옅어서 오직 여섯 천상의 일만 을 알고, 과거의 일곱째 몸은 모르기 때문에 양을 잡는 것이 곧 하늘에 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다만 전생 일만을 아는 것은 통(通)도 아니요, 명(明)도 아닙니다.” - 잡비유경(雜譬喩經) -

여기는 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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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산사의 명상음악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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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21> 임사체험④

고차원적 의식의 세계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천장부근을 떠다니면서 내가 수술받는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체외이탈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러스트.
핀란드 출신 미국의 의학박사인 라우니 리나 루카넨 킬데(Rauni-Leena Luukanen-Kilde)는 196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면서 급성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됩니다. 그는 전신마취로 의식을 잃을 상태에서 임사체험을 하게 됩니다.

“전신마취를 했기 때문에 의식을 잃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장부근에 떠다니면서 내가 수술받는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수술을 하고 있던 의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메스를 들고 자르려고 하고 있구나, 그런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르려는 부분에 작은 동맥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도 어찌된 일인지 알았어요. 그러나 의사는 그것을 몰랐는지 그 동맥을 잘라버리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지시키려고 소리를 쳤습니다. ‘거길 자르면 안돼! 거기에 동맥이 있어!’ 그러나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상한 대로 그는 동맥을 잘라버렸지요. 피가 분출해 천장까지 솟아오르는 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터널 속은 캄캄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편에 밝게 빛나는 빛이 보였고 나는 거기로 들어갔지요. 그곳은 자유의 여신상만큼 거대하고 강한 빛을 품고 있었습니다. 빛은 따뜻하고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빛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나는 직접 볼 수 없었어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앞에 꿇어 앉았습니다.”(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임사체험 상)

킬데씨는 임사체험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수술 중이었습니다. 그 후 진료기록부를 확인한 결과 임사체험 중에서 본대로 수술이 이뤄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체외이탈과 초현실적 현상= 킬데씨는 “임사체험이란 일상세계를 성립하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죽음의 실체는, 3차원의 세계에서 우리들이 입고있는 육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면 아주 어려운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텔레비전 채널을 지상파에서 위성방송으로 전환하는 것과 같아요. 텔레비전을 지상시스템에서 우주시스템으로, 그 시스템의 차원을 바꾸더라도 당신의 존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3차원 세계에서 고차원으로 존재 시스템을 이동시켜도 육체를 떠난 당신의 본질적 존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다른 차원에서 당신은 계속 존재하고, 계속 생각하고, 계속 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의사들도 빨리 그 사실을 깨달아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플라톤이 “인간의 혼은 육체라는 감옥에 사로잡혀 있는 수인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육체는 혼 혹은 에너지체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에너지는 불멸이고 다만 모습이 바뀔 뿐이라는 것입니다. 혼을 에너지체라고 한다면 에너지불멸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고, 그래서 영혼이 영원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킬데씨는 손발 등 말초혈관의 혈류를 점점 감소시켜 혈류가 심장과 뇌에 집중되도록 자기체면을 걸어 체외이탈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체외이탈을 통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게 됐고 자유롭게 생각대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육체 곁으로 내려가 열심히 관찰하기로 마음먹고 호흡수를 헤아려 보기도 했습니다. 마취의사도 겸하고 있는 그녀는 정상치의 절반인 1분에 10회 정도 호흡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싱키의 부모님 집 거실로 날아가는 체험도 했습니다. 다음날 집으로 전화를 해보니 임사체험을 통해 보았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킬데씨는 이 경험을 통해 체외이탈이 초현실적 현상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글을 쓰고= 킬데씨의 저서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초현실적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절반이 킬데씨가 자신의 임사체험을 쓴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51세에 죽은 종형에 의해 씌어진 것입니다. 그 부분은 사람이 왜 죽는가, 왜 인간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불행과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등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있는 의문에 대해 답하는 내용입니다.

잡념을 제거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모임에 나가면서 그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원인 모를 강한 힘이 오른 손을 공중에 꽉 잡아두었고, 그후 ‘솔베이지’라는 종형의 이름이 씌어진 뒤에야 손을 아래로 내릴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솔베이지는 자기의 이름을 쓰고 난 뒤 또 ‘나는 살아있다’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솔베이지는 ‘1981년에 너는 책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될 것이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1981년이 되자 갑자기 ‘쓰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통틀어 24시간 만에 이 책 의 일부를 쓴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쓴 적도 있다는 것입니다.

킬데씨는 트랜스상태에 빠져 있어서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이 보이지 않는 장갑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되어 그 장갑이 마음대로 움직이며 내 손을 조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이 무엇을 쓰려고 하고 있는가는 자신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쓰고 난 다음 그것을 읽고 나서 ‘아, 이런 걸 쓰고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됐다”고 증언했습니다. 즉 스스로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영적 존재에 의해 글이 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례는 여러 사람에게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로즈마리 브라운이라는 여성은 베토벤, 바흐, 쇼팽, 슈베르트, 슈만, 라흐마니노프 등 유명작곡가의 영이 차례로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고 말하며 6년 동안 400여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는 것도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이 과학적으로 볼 때는 허무맹랑할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하고 초현실적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현상이 존재한다면 과학은 그것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 보편적 원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과학은 비정상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 왔지만, 그러한 태도는 동시에 가장 창조성 넘치는 부분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고차원적인 의식의 세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됐습니다.


 

출처: 종교신문

 

권오문  omkwon@segye.com

 

 

 

 

G. Donizetti / Il Duca d'Alba 中 Angelo casto e bel
(정결하고 아름다운 천사여)

 


 Luciano Pavarotti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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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22> 임사체험⑤

 

 神은 한 분, 眞理는 하나

◇ “내가 벽 너머에서 보았던 그 에너지와 사랑으로 가득찬 빛 자체, 그것이야말로 신일 거라고 생각해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며, 진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힘주어 주장하곤 한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도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도 하나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며, 진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힘주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 교회의 신앙행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 코네티컷대학의 케네스 링 교수가 임사체험자의 의식변화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각도에서 조사를 한 뒤 그 결과물로 펴낸 ‘오메가를향해(Heading toward OMEGA)’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체험전 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하나님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정수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거대한 에너지원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핵에 있고, 우리들 인간은 그 핵에서 떨어져 나온 원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계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신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임사체험자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실감있게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기독교에서 증거하고 있는 논리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본질에 다가섰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믿음= 그러나 임사체험자들은 현재의 형식적인 교회체제와 영계에 무지한 신앙생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고 보니 요즘 신앙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체험전 나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교회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임사체험후 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마찬가지로 안 갑니다. 나는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을 하나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는 방식이 싫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고 청중을 협박하는 말을 곧잘 합니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후로도 내 나름의 신앙심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케네스 링은 임사체험자의 종교에 관한 의식변화를 총괄하면 다음 7 가지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자신을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영적인 존재라 생각한다. (2)내적으로 신을 친근한 존재로 느낀다. (3)예배 등 기존 종교의 형식적 측면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4)종교적 신앙과는 무관하게 사후의 삶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5)윤회전생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또한 동양종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공감을 느끼게 되었다. (6)모든 종교가 기본적인 본질 부분에서는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7)전인류를 포용하는 보편적 종교의 확립을 원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신에 대한 새로운 파악입니다. 핀란드 출신의 의학박사인 라우니 리나 루카넨 킬데 씨는 “신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인 것입니다. 개별적인 도그마를 고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도그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신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표명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신의 편재감(遍在感), 신과의 일체감,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이같은 주장이 임사체험자에게도 잘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인식에서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이 나옵니다.

“종교는 모두 동일한 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교는 달라도 그 신앙 내용의 중요 부분에는 아주 작은 차이만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신 아래, 하나의 진리 아래, 하나의 정신적인 신앙 아래 모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 종교를 연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깨달은 것은 결국 순수한 종교는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차이는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어요= 케네스 링의 연구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임사체험후 삶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체험자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체험전에는 물질적 욕망만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 소유물과 내 욕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체험후에는 이 지상에서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내일의 일 따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서 운송을 하고 있는 앨런 설리반(59)의 경우 심근경색 발작을 일으켜 응급수술을 받을 당시 체외 이탈하여 임사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이 뿌리째 바뀌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불가지론자로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 체험을 한 후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물론 종교를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벽 너머에서 보았던 그 에너지와 사랑으로 가득찬 빛 자체, 그것이야말로 신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완전히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때까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로 흑인이나 호모를 대단히 싫어했고, 여러 사람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요.”(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임사체험 상)

임사체험자들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임사체험을 한 후 삶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더욱 더 잘 살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쨌든 죽을 때는 죽는다. 사는 것은 사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아무리 고뇌해도 소용없는데 언제까지나 이래저래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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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종교심문

 

권오문omkwon@segye.com



  G. Faure / Cantique de Jean Racine (라신느 찬가) / 
The Monks & Choirboys Of Downside Abbey 
 

출처 : 행복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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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프,스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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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高原 - 李娜(리나)

1994년,드라마 연속극 <天路>의 주제가

 

是谁带来远古的呼唤
그 누가 아득한 태고의 부름을 가져왔나요,

是谁留下千年的祈盼
그 누가 천년의 희망을 남겨 놓았나요,

难道说还有无言的歌
아직도 말 없는 노래가 있다는 건가요?

还是那久久不能忘怀的眷恋
아니면 오랫동안 사무치게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있는가요.

哦 我看见一座座山一座座山
아아 나는 한 줄기, 한 줄기 산, 한 줄기, 한 줄기 산과 강을 보았네,

一座座山川相连
끝없이 이어지는 한 줄기, 한 줄기 산과 강을,

呀啦索 那可是青藏高原
야라쏘, 그 곳이 청장고원이에요.


是谁日夜遥望着蓝天
그 누가 밤낮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요,

是谁渴望永久的梦幻
그 누가 영원한 꿈과 환상을 갈망하고 있어요,

难道说还有赞美的歌
아직도 찬미의 노래가 있다는 건가요?

还是那仿佛不能改变的庄严
마치 바꿀 수 없는 없는 장엄한 분위기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哦 我看见一座座山一座座山川
아아 나는 한줄기, 한 줄기 산, 한 줄기, 한 줄기 산과 강을 보았네,

一座座山川相连
끝없이 이어지는 한 줄기, 한 줄기 산과 강을,

呀啦索 那就是青藏高原
야라쏘, 그 곳이 바로 청장고원이에요.

                             
                                가사번역:바람의 집-바람처럼 살고 싶다 블로그
 
                        티베트고원을 중국에서는 칭짱고원[靑藏高原]이라고 한다. 장족들이 
                             살고 있는 중국 티베트(西藏)자치구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이
                             100만㎢, 평균 해발고도는 4,500m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고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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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이 녹아 흘러 개울물을 만들고)

-아시아의 문명을 일으킨 커다란 강은 대부분 이곳에서 시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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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게왕국으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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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에도 나비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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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끼고 가는 서장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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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티벳의 황혼)

 

 

 

** 지도상에 사라져버린 티벳의 '캄' **

동부 티벳지역을 일컷는 지명으로 현재도 쓰이는 지명이다.

캄을 외부 세계에 알리고 차마고도를 따라 티벳으로 들어간 최초의 서양인인
프랑스 저널리스트의 기록을 바탕으로 마방 캐러밴의 생활,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캄 주민들이 어떻게 오늘 날까지 전통을 지켜 왔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사진들이다.




































































































출처 : 만다라불교미술연구원
글쓴이 : 만다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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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드름 낙수 소리
2.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3. 동굴 낙수 소리
4. 여름 폭포 소리
5. 몽돌 파도에 휩쓸리는 소리
6. 대나무 부딪히는 소리
7. 천둥 소리
8. 장마 비바람 소리
9. 우박 떨어지는 소리
10. 가시연꽃밭의 폭우 소리
11. 불어난 계곡물 쏟아져내리는 소리
12. 벼이삭 부딪히는 소리
13. 낙엽 지는 소리
14. 싸리비로 낙엽 쓰는 소리
15. 낙엽 밟는 소리
16. 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
17. 억새 부딪히는 소리
18. 갈대 부딪히는 소리
19. 눈보라 소리
20. 설피 신고 눈 밟는 소리
21. 겨울 얼음장 깨지는 소리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석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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