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탈북자 2만명 중 병원에 입원 치료중이었던 북한 서해교전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북한의 소주급 유도탄정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렌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새까만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북한의 서흥급 유도탄정. 구소련의 코마급과 동형이다.
북한의 사리원급 초계함으로 모두 3척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50톤으로 구소련의 트랄급과 푸가급을 참고하여 북한에서 자체 건조한 초계함이다
북한에서 탱크포인 100mm 함포로 개량한 소1급 대잠전 함정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나서 다시 이어갔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정말 방탄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보위지도원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훈장 2, 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칼라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의 “세 파편” 연극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2차 연평해전 北포대장 서주철 '영웅' 칭호
양강도 출신 탈북자들 "고향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 조직"
지난 2002년 6월 2차 연평해전 당시 우리 해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힌 북한 초계정 등산곶 684호의 함포장이 양강도 혜산시 연봉동 봉흥중학교 출신 서주철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당시 북한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우리 측 함정 참수리 357호를 공격해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북한은 교전 직후인 2002년 9월 참수리 고속정 357호를 격침시킨 공로를 평가해 서주철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고, 고향방문과 모교방문을 비롯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조직한 바 있다고 양강도 출신 탈북자들이 12일 전했다.
북한 장전항의 북한 함정들 모습...
지난 2006년 양강도에서 탈북한 조경철(가명·43) 씨는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참수리 357호를 격침시킨 북한 경비정의 함포장이 양강도 혜산시 봉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97년에 해군에 입대한 서주철이다”고 확인하면서 “서해교전 이후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고 군관(장교)학교를 거쳐 지금은 NLL주변 해군함대 함장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5년 양강도 혜산시에서 탈북한 김준학(가명·37) 씨도 “서씨의 집은 혜산시 연봉 2동에 있었다”며 “그의 아버지는 가위, 칼 등을 제조하는 혜산 철제일용품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직업이 없는 부양가족으로 혜산 연봉산에서 뙤기밭(다락밭) 농사를 짓고 술장사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전했다.
양강도 혜산시 연봉 2동은 시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혜산시에서도 비교적 빈곤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양강도 출신 탈북자들에 의하면 서주철은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지난 1997년 18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고, 1999년에 벌어진 1차 연평해전에 함포수로 참가했다. 그는 1차 연평해전 당시에 '남한괴뢰군 함정을 격침시겼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고속정을 공격한 북한 경비정 684호의 함포장으로 승진했다.
서 씨의 공로로 혜산 봉흥중학교는 혜산 제1중학교와 함께 ‘영웅학교’ 칭호를 받았다.
북한 당국은 연평해전 후 서씨의 고향방문과 더불어 연봉동에 있던 부모의 집을 리모델링 해주며 영웅만들기에 공을 들였다. 서 씨의 모교인 봉흥중학교는 김정일로부터 악기와 운동기구들을 비롯한 선물들을 받았다. 2004년에는 5대의 컴퓨터를 특별히 배정받았다.
당시 서 씨는 혜산시 여러 중학교들과 대학들을 돌면서 연평해전 승리에 대한 전투담과 무훈담을 강연했다. 간부강연회에도 출연하여 김정일로부터 받은 배려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연평해전 당시 상황을 상당히 과장한 내용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혜산 의학대학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한 서 씨는 “십여 척의 적 함선들이 정상적인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함정을 불의에 기습하여 남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며 “적들은 저들의 수적인 우세를 믿고 어리석게 행동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적들의 탄알이 빗발치는 속을 뚫고 단독으로 돌진하여 적함을 한방에 산산조각 내고 주변에 있던 다른 적함들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며 “적들은 저마다 살 구멍을 찾아 꼬리를 사렸지만 용감한 우리 인민군 전사들은 빗발치는 적탄속에서도 서로가 동지의 몸을 덮어가면서 원수들을 무리로 격멸시켰다”고 말했다고 한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은 2차 연평해전 당시 노동신문을 비롯한 출판보도물들을 통해 ‘서해북방한계선이 북한의 바다라는 사실은 남조선(남한)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대학생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라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한 예로 노무현 정부 당시 관변학자들이 내놓은 'NLL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제안'을 소개하면서 "저들(남측)이 불법이니 우리에게 타협하려 한다"는 논리를 사용했다는 것.
북한은 당시 남한의 모 대학 아무개 교수, 모 대학 아무개 대학생이라는 형식으로 NLL은 ‘미제가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바다’라는 내용을 선전하기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북한은 서 씨에 대해 이렇게 공로를 세웠다고 치하하면서도 TV를 비롯한 출판보도물들에는 일절 소개하지 않았고 심지어 양강도 지역신문인 ‘양강일보’에 조차 그의 공로를 내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2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많은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초계정 684호가 반파된 채 퇴각했다.
조경철씨는 “북한은 이렇게 참혹하게 패한 전투도 승리로 날조해 참전자들을 대우해 주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동안 서해해전 희생자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면서 “이번 NLL 도발 사건을 계기로 연평해전 참전용사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우대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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