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당 추천 0 조회 85 20.07.02 21:1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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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식(善知識)은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다

 

진정한 '발심'이란 곧, '온갖 법의 실상'을 요달(了達)해서,

<한 법도 구할 것이 없고, 한 법도 이룰 것이 없는 경지>를 지향하는 걸 말합니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지향할 건 또 무엇이겠어요? 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지면

이것을 일러서 '보리심을 발했다'(發菩提心)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불가에서의 '선지식'(善知識)은 세속에서의 '선생'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세속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앞에 하고,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복종하게 만들던가, 아니면 반대하게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선지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지식'이란 인간 본연의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즉 '성품'을 본, '청정한 제 마음'을 밝힌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 속에는

선·악을 비롯한 일체의 차별법의 자취가 없으며, 없다는 것조차 없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선지식'인 겁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학인'(學人)들에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일러줄

말이 없는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 아니면, 즉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지식'을 앞에

하고서도 아무 공덕도 입지 못합니다.

 

올바른 납자(衲子)라면 '선지식'을 대했을 때, 마치 세상 사람들이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바로잡듯이, 학인은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지견들로 꽉 차서, 마치 넝마 창고처럼 되어버렸는지를 비추어 보는 겁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경우 선지식은 「편견이 없어야 한다」「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 많은 선지석이 때때로 그렇게 말하는 걸 봤다고 하겠지요?

선지식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말할 때엔 제자의 지혜가 아직 충분히 열리지 못해서,

능히 '큰 지혜'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시 방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결코 선지식의 견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런 온갖 지견들이 전혀 허망한 것이어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파함으로써, 전혀 조작을 빌리거나 대처하는 일도 없이 문득 회심(廻心)하여야만

비로소 잠잠히 <그 자리>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리심'을 얻는 데는 별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리심'은 물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 그런 마음입니다. 즉 '보리'(菩提)는

<도시 '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보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밝히고 맑혀서 새로이 이루고 얻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별달리 방편에

의지해서 일을 도모할 것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법도 구할 것이 없다"고 아는 마음>과 <참으로 구함이 없어서 무심(無心)한

마음>과의 차이를 알 수 있겠어요? 만약 이 이치를 분명히 깨칠 수만 있다면,

'보리심'은 아무 공력(功力)도 들이지 않고 나날이 자라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염불'이니 '예불'이니 또는 '참선'이니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니 하면서, 뜻을 세우고

마음을 내면서,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것으로써 '수행'인 줄 안다면,

이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무리 애쓴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과법'의 굴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비극입니다.

 

용담(龍潭) 숭신(崇信) 선사가 어느 날 천황(天皇)에게 묻기를,···

『제가 여기 온 이래로 아직껏 화상께서 심요(心要; 마음법의 요체)를 일러주심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나는 그대가 온 이래로 그대에게 '심요'를 일러주지 않은 적이 없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에 용담이 묻기를, ···
『어디가 일러주신 경지입니까?』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그대가 차를 가져오면 내가 받아 마셨고, 그대가 밥을 가져오면 내가 받아 먹었고,

그대가 인사를 하면 내가 손을 들었었다. 어디가 '심요'를 보여 주지 않은 곳인가?』 하니,

숭신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천황이 말하기를,···

『보려면 당장 봐야 할 것이요, 이리저리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하니,

선사가 이 말 끝에 당장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기를,···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니, 천황이 말하기를, ···
『'성품'에 맡겨 소요(逍遙)하며, 인연을 따르되 모름지기 방광(放曠)하여 그 언행(言行)에

걸림이 없어야 할지니라. 다만 범부의 망정(妄情)을 다할지언정 별달리 '성스러운 견해'가

있는 게 아니니라.』 했습니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고, 또한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고,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가 없는,

이것은 항상 우리들 목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림자'나 '메아리'를 허망하다고 하는 거구요. 만약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실다운 체성'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 즉 나무나 음성과 같은 인연에 기댈 것 없이,

저들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이

'결과'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지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건 모두 '제 체성'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결과'가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어요?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정식'(情識)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이 모두가 <제주도 하루방이 애기를 배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전혀 잠꼬대와 같은 게 바로 '인과법'의 실상인 겁니다.

'원인'도 '결과'도 다 '빈 것'임이 밝혀진 거죠.

이건 '인과법'을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게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을 계기가 되어준 것뿐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뭐가 있어요? 따라서 물론 '지금의 것'이

옛날로 간 일도 없구요. 아무것도 실지로 가고 오고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참 알고 보면 범부들의 마음이 너무나 혼미해 있어서, 전혀 본래 문제가 될 것도 없는

문제들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원인'이건 '결과'건, 이 모두가 다 '빈 이름'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앞뒤가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뒤에 이어 닿는 게 없는데, 거기에 무슨 '탈'이 붙을

수 있겠어요? 일체의 '범정'(凡情)과 '이름'이 붙을 여지가 없으며, 그것은 '그것'이라는

지칭대명사조차 붙을 수 없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스스로 청정한 존재인 겁니다.

아니, 여기에 이르러선 그 '청정'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군말이 되고 맙니다.

도대체 '그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마당에 '무엇'에 대해서 '청정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어요? 이 흔하게 쓰이는 '청정'이라는 말은 사실 그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은연중에 <청정하고자 하는 바람>을 일으켜 왔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들의 마음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때'(垢)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청정'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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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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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찾고 벗 가리기를

앤풀빛 추천 0 조회 200 09.07.24 14:5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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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 立志

 

입지를 산 같이 하면 결정할 시기 오리니 __  스승 찾고

벗 가리기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__  아득한 벼랑에서

손 놓아 버리고 몸 굴리면 __  철저히 온 몸으로 정안 正眼

열리리라 __

 

 

 

 

어리석지 않은 중생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 했다.

때는 반드시 찾아오고 그 때를 위해 항상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라 했다.

스승을 항상 존경하고 벗은 나에게 바른 벗인가

나쁜 벗인가를 가리라고 했다.

그것을 게을리하면 때가 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차라리 힘들면

아득한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굴려라.

그러면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정안 正眼 이다.


꿈에서 벗어나라 /청담 스님

정수 추천 0 조회 24 19.11.26 11: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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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벗어나라  / 청담 스님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현실이라는 것도
그대로 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생시가 바로 꿈이라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대들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 꿈(생시)이
영원한 꿈인데도 꿈인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연애해 가지고
아들딸 낳아서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서 손자를 보고 하여 잘 산다.
이처럼 우리가 꿈속에서 겪는 세계나 생시의 일들이
너무도 같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산소 수소가 있으며 온 우주가 다 거기 있다,
꿈에서도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날씨가 차고 더우며 어린애들 낳아서 키워보면
어려서부터 점점 자라서 커간다.
그러니 아러한 것을 어떻게 꿈인 줄로 알 수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꿈을 깨어볼라치면
시간은 불과 몇 분도 채 안된다.

인생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이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 거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이다.

정말 실상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돼있으니 꿈꿀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자는 시간도 대체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 시간 동안에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한 해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나 반나절 꿈도 꾸지만은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나절 꿈도 꾸지만은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 시간보다 꿈 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된다.​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마음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에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세계를 창조헤 놓는다.
꿈울 깰 때에도 꿈속에 있던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들어서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든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밖에 개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이다.
뜨겁고 찬 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다.
주객이 둘이 아니므로
우리의 인식밖에 기둥과 기둥이 있을 수 없으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을 쉰 이 청정한 본래의 마음법에는
기둥도 기둥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저 기둥한 가지를 볼 때에는
곧 기둥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꿈이 아무리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깨기 전에는
꼼짝없이 사실인 고와 낙을 받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종생들을 업습에서 일어나는
천당 지옥의 꿈을 벗어날 길이 없다.
꿈에서 죽고 꿈에서 태어난다.




108배의  의미

 

 모든 생명을 지극히 내 안에 모시고 살림의 장을 확산해 나가는 생명과 평화를 위해

108배를 올립니다.

1.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며 첫 번째 절을 올립니다.

2.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3.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4. 나의 진정한 얼을 찾기 위해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5. 나의 몸과 영혼의 귀중함을 생각하며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 나의 영혼과 육체의 건강함을 위해서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 내가 원하는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8. 나부터 찾고 나부터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9. 오늘 여기 살아 있는 목숨이 귀중함을 생각하며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 나의 생존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열 번째 절을 올립니다.

11.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열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12. 가족 간에 항상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열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13. 사랑 속의 강함과 기쁨의 성장을 체험하기 위해 열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14. 오로지 사랑 속에서만 기쁨을 찾기 위해 열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15. 하나의 사랑이 우주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알기 위해 열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6. 길을 잃어 헤매는 나에게 환한 빛으로 길을 열어준 스승님에게 열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7.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열일곱 번재 절을 올립니다.

18. 나의 스승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생각하며 열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19. 내 생명의 생물과 우주 뭇 생명의 기원이 내 안에 살아있음에 열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20. 항상 모든 조상과 모든 신령이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계심을 알고 믿으며

    나를 향하여 스무 번째 절을 올립니다.

21.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며 스물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22. 진실로 자신을 생각하여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스물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23.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않으며 스물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24.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않으며 스물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25. 남의 찬한 일은 드러내고 허물은 숨기며 스물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6. 중요한 이야기는 남에게 발설하지 않으며 스물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27. 남에게 원한을 품지 않으며 스물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28. 남에게 성내는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물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29.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 하지 않으며 스물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30.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하지 않으며 서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1. 일을 준비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서른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32.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서른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33.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않으며 서른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34. 매 순간이 최선의 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서른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35. 세상을 정의롭게 살기 위해 서른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36. 작은 은혜라도 반드시 갚을 것을 다짐하며 서른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37.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아니하며 서른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38. 남에게 지나치게 인색하지 않으며 서른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39.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서른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40. 조그만 것을 투기하여 더욱 큰 것을 얻으려는 사행심에 마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41. 모든 탐욕에서 절제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며 마흔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42. 생존의 가치가 물질의 노예로 떨어지지 않기를 빌며 마흔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43.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임을 알며 마흔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44. 내가 파놓은 구덩이에 내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매함에 마흔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45. 나약하고 비겁하지 않은 지혜의 힘을 기르며 마흔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6. 참는 마음과 분한 마음을 이겨 선행 할 수 있게 하며 마흔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7. 강한 자와 결탁하여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마흔 일곱 번재 절을 올립니다.

48. 아첨하지 않고 정직을 근본으로 삼으며 마흔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49.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마흔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50. 행복, 불행, 탐욕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을 알며 쉰 번째 절을 올립니다.

51.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드는 것임을 알며 쉰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52. 평범한 것이 소중한 것임을 깨달으며 쉰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53.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근심하지 않으며 쉰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54. 소유하되 일체의 소유에서 벗어나기 위해 쉰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55. 인내는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며 쉰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6. 참회하는 마음이 으뜸이 됨을 알며 쉰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57. 지혜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기 위해 쉰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58. 마음을 쫓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길 쉰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59. 자신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며 쉰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60. 나를 강하게 하는 시련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예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1. 시간이 흘러도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예순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62. 모든 것에 감사하는 충만한 마음속의 기도를 위해 예순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63. 침묵 속에서 나를 발견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예순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64. 자신의 삶에 충실 할 수 있는 고귀한 순수를 모시며 예순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65.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모시며 예순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6. 가난으로 굶주리고 힘겨운 생활을 하는 빈민을 모시며 예순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67. 우리의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땀 흘리는 농민을 모시며 예순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68.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남을 위해 나누는 마음을 모시며 예순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69. 내 몸을 밀어 귀한 생명으로 태어난 자식을 모시며 예순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70. 나와 더불어 사랑으로 하나 된 배우자를 모시며 일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71.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장애우들을 모시며 일흔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72.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길을 가는 친구를 모시며 일흔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73. 누릴 수 있으나 절제하는 자발적 가난을 모시며 일흔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74. 자신을 낮추어 낮은 곳으로 자리하는 겸손을 모시며 일흔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75. 항상 나보다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양보심을 모시며 일흔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6. 지구, 자연이 병들어 감을 생각하며 일흔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77. 사람의 생명과 지구 자연의 모든 생명은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일흔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78. 인간의 욕심에 파괴되어 고통 받고 신음하는 생명들을 위해 일흔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79. 병들어 가는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일흔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80. 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든 번째 절을 올립니다.

81. 생명은 영혼의 율동임을 깨달으며 여든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82. 생명은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임을 알고 느끼며 여든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83. 맑은 시냇물 소리에 정신이 맑아짐을 느끼며 여든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84. 맑고 고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여든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85. 시원한 바람소리에 내 몸을 맡기며 여든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86.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여든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87. 항상 제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들꽃에 여든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88. 좌우를 품고 침묵하며 바람과 눈으로 일러주는 산과 들에 여든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89. 모든 식생을 살리고 언제나 생명들을 살리는 대지에 여든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90. 모든 생명들을 키워주는 하늘에 감사하며 아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91. 나 자신의 평화를 기원하며 아흔 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92. 뭇 생명들과 함께하는 평화를 기원하며 아흔 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93.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평화를 위해 아흔 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94. 의미없이 나뉘어진 지역과 지역간의 평화를 위해 아흔 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95. 정치적 이해로 다투는 국가과 국가간의 평화를 위해 아흔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96.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 아흔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97. 산 것과 죽은 것의 평화를 위해 아흔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98. 사람과 자연의 평화를 위해 아흔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99. 깨달음으로 충만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아흔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0.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손잡음을 위해 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1.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손잡음을 위해 백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2.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손잡음을 위해 백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3.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살을 위해 백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4. 나로 인해 어지러워진 모든 인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백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5.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사람들에 감사하며 백 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6. 내가 누리는 모든 선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백 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7. 나의 생존의 경이로움과 지금 여기 끊임없이 생성하는 생존에 대해 감사하며

      백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108. 이 모든 것을 품고 하나의 우주인 귀하고 귀한 생명인 나를 위해 백 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When anger is released, life is released.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것은 독을 안고 사는것과 같다. 
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게한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와진다.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Anger is the source of all misery.
Living with anger is like living with a poison.

Anger hurts relationships with others
To close many doors of life

So when you rule anger
We feel like we have hate, envy, despair
Free

Loosen all knots intertwined with others
You can get real happiness.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 
그안에는 기쁨과 사랑, 즐거움과 희망과
긍정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미움, 절망, 좌절, 시기,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씨앗도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을 만끽하면서 사는 사람은 드물다.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표정에서 알 수 있다. 
Our heart is a field.
In it, joy and love, joy and hope,
There is a seed of affirmation
Hate, despair, frustration, envy, fear
There is also a seed of injustice.

Which seeds to water and flower
It's up to you.

Everyone was born to be happy.
However, few people live while enjoying happiness.

Happy and not happy people
It can be seen from the expression‎.
행복한 사람은 늘 미소짓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며 찡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화를 내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일까? 
시기, 절망, 미움, 두려움 등은 모두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독이다.
이 독은 하나로 묶어 '화anger' 이다. 
마음속에서 화를 해독하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Happy people always smile
If not, the person frowns and frowns.

Why then are we angry?
What makes us angry?

Envy, despair, hate, fear
It is a poison that pains the heart.
This dock is tied together.

If you can't decipher anger in your heart
We can never be happy.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외부로 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마음 한가득 퍼진다. 
화는 예기치 못한 큰일에서 올 때가 있지만
대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자잘한 문제에서 온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 때 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잃어버린 작은 행복들을
다시금 찾을 수 있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유용한 도구가 있다. 
Anger is usually hidden in our minds.
But when stimulated from outside
Suddenly my heart spreads.

Anger may come from unexpected big things,
It usually comes from the small problems you face in your daily life.

So every time you control anger
We've lost the little happiness
You can find it again.

To control anger
There is a useful tool.


의식적인 호흡, 의식적으로 걷기, 화를 끌어안기, 나의 내면과 대화하기...등 이러한 도구들을 사용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화가 일어날 때 마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부정적인 씨앗이 아닌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평화의 길이며 행복을 만드는 법칙이다.
Conscious breathing, walking consciously, embracing anger,
Conversing with my inside ... etc

Using these tools
Whenever we get angry in our minds
You can cope wisely.

We are not negative seeds
Try to water the positive seeds.

This is
The way of peace over your heart,
It is the law of happiness.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틱낫한스님*


이렇게 하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법 구 경 핵심법문

샤벳 | 조회 644 |추천 1             



이렇게 하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법구경]


*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
그러므로 기쁨과 슬픔의 양 극단을
잘 조화시키고 다스려
선도없고 악도 없었을 때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지난날의 그림자만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면
꺾어진 갈대와 같이
말라 비틀어지고 초췌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일을 참회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몸도 마음도 건전해지리라.


*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그리하여 지금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
지금 이 순간을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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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소중 할까            

묘림조 | 조회 35 |추천 1 |2020.02.12. 20:15 http://cafe.daum.net/hknetizenbonboo/NDUR/4099 


            



                                                              


   

    

 

무엇이 소중 할까.?

 

가슴으로 보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알았으면 실천에 옮겨야 하고.

고마우면 감사의 표현을 하길 바란다.

 

공짜에는 복의 싹이 트지 않는 다.

공짜에 습을 드리면 어느날 자기가 거지가 되어 있음을 본다.

 

부처님 께서 마지막 부촉하신 말씀은 .

                  자등명 법등명 이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살 것이며.

나의 가르침 인 법을 등불로 삼으라 하셨다.

 

주유소 기름으로나 전기로 켜는 등불이 아니라.

지혜로써의 등불 반야 바라밀의 등불을 밝히라는 말씀이다.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

지식은 책속에  도서관 이나 배움 속에서 있어서 남이 가진 돈과 같다.

음식의 종류 많이 알고 요리의 방법을 아무리 잘 안다 하여도 실천에 옮겨서

요리하여 음식을 먹어보지 않으면 그림에 그려진 떡과 밥이란 말이다.

 

사랑의 소설을 아무리 아름답게 쓰고 논문을 발표하여도.

자신이 그런 사랑을 체험 하지 않으면 꿈속의 사랑일 뿐이다.

 

지식 이란 영화관에서 보는 대리만족에 환상이다.

텔래비의 연속극 사랑에 자기가 주인공 인양 모두가 착각에 울고 웃는다.

결국 지식은 비교에 속한다.

 

지혜란 한 마디로 실천을 말한다.

지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하며 상처받은 아픔을 통해서

생명의 존엄한 가치와 사랑에 희생된 갈등과 후회를 통해서 지혜가 얻어진다.

 

쉽게 풀이 하자면

지식은 밖에서 오고,

지혜는 내면에서 온다는 말 이다.

 

지식은 남의 돈과 같은 것이다.

은행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가 쓸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말로만 따지고 ,이해득실 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신용불량자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곧 신용불량자란 말이다. 

 

무엇이 소중 할까.?

아내 가 소중하고 남편이 소중하다.

말로만 소중하면 사랑의 불량자다.

 

자등명 .스스로 감사 하고.

법등명 .사랑과 자비로 실천하라.

 

성불 하십시요

 







마음의 주인이 되라 - 법정스님 에세이집《무소유》중에서|┣▶오늘의 법문

지관 혜봉(만봉) | 조회 0 |추천 0 |2019.12.17. 06:39 http://cafe.daum.net/manbong4684/JtI9/1370 


♣ 마음의 주인이 되라 ♣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 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 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 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법정스님 에세이집《무소유》중에서


내가 알게 된 참 겸손          

지관 혜봉(만봉) | 조회 0 |추천 0 |2019.12.11. 08:55 http://cafe.daum.net/manbong4684/5YXV/9709 

내가 알게 된 참 겸손
     
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습니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습니다.

【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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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괴로울때 따라 외치세요.|┣▶시,글,그림,영상들

지관 혜봉(만봉) | 조회 1 |추천 0 |2019.11.06. 07:43 http://cafe.daum.net/manbong4684/5YXV/9675 

힘들고 괴로울때 따라 외치세요.

나는 존경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칭찬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겠습니다.
남을 이기고 남의 위에 서겠다는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은 따로이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생명인 부처님 생명이 나의 참생명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에게는 남이 없습니다.
모두가 나일 뿐입니다.
남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나인 그 모든 형제들에게
언제나 심부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법회 때 한탑 스님을 따라서 합창했던 내용입니다.
괴로움은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절망은 나를 상대유한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이므로
본래부터 영원한 아미타 절대생명이 드러나는
염불에 의지하라고 따뜻하게 일러주십니다.
공포스러워해야할 것은 본래 없다구요.

바꿔야 할 남은 없다.
내가 바뀌면 남도 바뀐다.
내가 바뀔 때 가정이 바뀐다.
내가 바뀔 때 나라가 바뀐다.
내가 바뀔 때 세계도 바뀐다.
무엇으로 바뀌느냐?
나무아미타불로 바뀐다.

법문 감사합니다.

오늘도 집과 직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일체 모든 부처님 생명,
그러나 저는 제가 맞다고,
제가 본 것만 옳다고 우기면서 괴로워하네요.
불쌍하게 봐 주세요.
나무아미타불
(05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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