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쓸모없다



차를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속에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현재에 대한 자각 속에서만
우리의 두 손은 찻잔의 기분 좋은 온기를 느낄 수 있다.
현대 속에서만 그 향기를 음미할 수 있고,
그 달콤함을 맛볼 수 있으며,
그 오묘함을 감상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염려하면
우리는 한 잔의 차를 즐기는 경험을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찻잔을 바라보는 순간 어느새 차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인생도 그와 같다.
우리가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면,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현재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생의 느낌, 향기,
그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놓치고 말것이다.
그것들은 눈 깜짝할 수이에
우리를 스쳐 지나가게 될 것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그것으로부터 배운 다음 보내버리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 계획하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라.

걱정은 쓸모없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
결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현재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 속에서 기쁨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 틱낫한 -

 

 격려 글귀 명언

 

 

남의 허물을 탓하지 말라.

 

 

남의 허물을 탓하지 말라 말 한마디에 인격과

품위가 달려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보지도

않고 본 것처럼 말을 하여 남을 욕되게 하느니라.

 

인격을 갖춘 사람이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에 관한 말을 듣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남의

허물만 탓하여 죄를 짓지만 지혜자는 남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중히 앞뒤를

재어 판단하느니라.

 

못난 성품을 쓰고 못난 마음을 쓰면서 자신이 쓰고

있는 심성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자는 평생이 아니라

(世世生生)가더라도 박복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명심하고 명심하여 깨달아라.

 

못난 성품은 인과를 맺을 따름이요 좁은 소견의 마음은

앞길만 막을 따름이니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의 이야기와

남의 흉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진실된 사람일

것이니라.

 

자신의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하여 남을 헐뜯고 흉을 보는

사람은 소인의 행실이며 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충고의

말을 하고 없을 때에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대인이니라.

 

용서할 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느니라

자기자신을 항상 내세우는 사람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느니라.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모르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화합을 가져올 수 없느니라.

 

남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나의 죄업이 소멸되지

아니하며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나의 인과(因果)를

풀지 못하느니라.

 

정에 치우쳐 정직한 자를 가까이 쓸 줄 모르는 자는 실패의

원인이 되는 길이며 사정에 쏠리어 진실된 자를 살피어 쓸

줄 모르는 자는 망하는 원인의 길이 되는 것이니 사람으로서

사람을 잘 쓸 줄 알아야 성공의 길이 생기는 것이니라.

 

어리석은 자들은 부지런히 노력만 하면 잘 사는 줄 알고 있으나

사실 그렇지만은 아닌 것이니라. 사람은 운과 복이 많아야

괴로움과 시련을 격지 않고도 부지런한 노력 속에서 잘살게

되는 것이니 부지런히 선근(善根)을 심고 부지런히 노력을 하여

잘사는 기틀을 마련하여라.

 

재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마음도 넉넉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대성(大成)하기 어려운 것이며 재물이 넉넉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넉넉하면 그 사람은 대성(大成)할 수 있느니라.

 

옳고 그른 일을 가릴 때 남에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니라 양보를 하여 너도 나도 피해가 없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훌륭한 사람이니라.

 

자신의 못난 흉은 뒤로 하고 잘난 체하여 분수를 떠는 자가

되어 앞길을 어둡게 하지 말아라. 잘난 체하는 분수는 일체

사업이 어긋나는 인과가 생기고 똑똑한 체하는 분수는 매사가

그르쳐지는 인과가 생기는 것이니라.

 

몸 속에 똥을 가득히 채우고서 똥 냄새가 더럽고 추하다 피하는

거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온갖 죄업을 숨기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책망하고 있으니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서 믿을 수가 없고나 양심으로 사는 자만이 하늘에서

천복(天福)을 내려 주시는 것이니라.

 

어리석은 자는 잘못을 꾀로서 숨기려 하고 변명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여 일을 크게 만들어 화근이 되게 하는 것이나

지성자(至誠者)는 양심으로서 해결하고 책망으로 피하여 크게

복을 받는 것이니라.

 

노력만으로는 잘살 수가 없는 것이니 노력만 믿고 진리의

믿음을 업신여기다가는 고난의 시련으로 괴로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니라.

 

겉마음이 착하다 하여 속 성품까지 좋을 리 만무한 것이니

나에게 잘해준다고 어리석게 넘어가지 말고 냉정하게 대한다고

우매하게 멀리하지 말지니라.

 

자신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함이고 자신보다

남을 먼저 도와주는 것이 바로 나의 이득함이 되는 것이며

자신보다 남을 고맙게 하여 주는 것이 나의 성취로 돌아오는

이치를 명심할지니라.

 

- 좋은 글 중에서-

 

남의 허물을 탓하지 말라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비슷한 날처럼 보이지만

어제는 이미 가버린 과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새로운 탄생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어제까지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에 관념에 갇히면 창조력을 잃고
일상적인 생활습관에

타성적으로 떼밀려가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그 많은 날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있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날로 사라지고 만 것도

이 기존의 관념에 갇혀서

맹목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죽음은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 : 법정 스님 글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좋고,

 

내일은..

올 것이기 때문에 좋고,

 

오늘은..

무엇이든 할수있기 때문에 좋습니다.

 

나는 어제를 아쉬워하거나

내일을 염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오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찾고 받아들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하루 하루 새로운 아침이 주어지는 것은

새 기회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것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자기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가

좋아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리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시간들 되시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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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이야기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 속에 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며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을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 법정스님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 하라 중에서 -

 

이대로의 나자신을 사랑하면 된다 -법정스님

 

 

우리가 무언가에 싫증을 낸다는 것은

만족을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나름대로 소중한

느낌들을 쉽게 잊어가기 때문이요

 

내가 왜 이 물건을 사게 됐던가?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게 됐던가?

내가 왜 그런 다짐을 했던가?

 

하나 둘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그 처음의 좋은 느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변화합니다. 늘 같을 순 없죠

악기와도 같아요 그 변화의 현위에서

각자의 상념을 연주할지라도 현을 이루는

악기 자체에 소홀하면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변화를 꿈꾸지만 사소한 무관심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이따금

불협화음을 연주하게 되지요

 

현인들은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까이 있다.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눈에 새롭게 뜨고

주위를 바라 보세요

 

늘 사용한 구형휴대폰 어느새 손에 익은

볼펜 한 자루 잠들어 있는 가족들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 사랑했던 사람

지금 사랑하는 사람

 

먼저 소중한 느낌을 가지려 해 보세요

먼저 그 마음을 되살리고 주위를 돌아 보세요

당신은 소중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속상해 하지마세요

 

우리가 소중하게 떠올렸던 그 마음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가졌던 그 마음

 

볼펜을 종이에 긁적이며 고르던 그 마음

처음 휴대폰을 들고 만지작거리던 그 마음

그 마음을 가졌었던 때를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짓는 자신을 찾을 줄 아는 멋진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선물해요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선물해요

 

오늘 옷 참 잘 어울려요 라고 하면서

먼저 웃으며 인사해요

 

법정스님-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 법정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버릴 수 있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얻지 못하니
이것이 너와 내가 숨 헐떡이며 욕심 많은 우리네 인생들이
세상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라 하지 않더냐.

 

사람들마다 말로는 수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린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마음속에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려야만 하는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더 채우려 한단 말이더냐.

 

사람들마다 마음으로는 무엇이든 다 채우려고 하지만
정작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몸 밖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허울좋고 게걸스런 탐욕뿐일진데.

 

사람아..
그대가 버린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 또한 그 무엇이었단 말이더냐.

얻는 것이 비우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 얻는다 하였거늘
무엇을 얻기 위해 비운단 말이더냐.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끈적거린 애착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불만족스러운 무거운 삶뿐인 것을
비울 것이 무엇이며 담을 것 또한 무엇이라 하더냐.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다 무거운 짐인걸..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유당 추천 1 조회 13    20.10.03 10:09 댓글 2

 

 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이미 예견되었던 물음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부처’님이나 ‘보살’들에게 절을 하지 말라 하십니까?』

이에 ‘달마’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천마(天魔)나 파순(波旬), 아수라(阿修羅) 등이 신통을 나투어서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짓고, 갖가지로 변화했기 때문이니,

이는 외도(外道)인지라, 모두가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란 ‘자기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밖에 있는) ‘부처’에게 잘못 절을 하지 말라.

‘부처’란 ‘신령한 깨달음’(靈覺)이니, 근기 따라 중생을 제접(提接)하고,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박이고, 손발을 움직이고 하는 것 등이 모두가 자기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之性)이니라.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道)요,

‘도’가 곧 ‘부처’이니, 이 ‘부처’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또한 말하되, 「‘본래 성품’(本性)을 보는 것이 이 ‘부처’라」고 하시니,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면 ‘부처’가 아니니라.

설사 천경만론(千經萬論)을 설할 수 있어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일 뿐이요, ‘불법’은 아니니라.

‘지극한 도’(至道)는 깊고도 그윽하여 말로는 이해할 수 없나니,

경전으로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되느니라.

‘성품’을 보면 곧 ‘부처’이니, 이 ‘성스러운 본체’(聖體)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느니라. 모든 말씀이 다 ‘성인의 마음’으로 좇아 일어난 작용인지라,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空)하여서, ‘이름’이나 ‘말’로는 미칠 수 없거늘,

십이부경(十二部經)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고 증득하고’(修證) 할 필요가 없고,

‘도’는 빛깔이나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미묘하여 보기 어렵느니라.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물의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나니,

따라서 남을 향해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라.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으며, 그 밖의 ‘사람과 하늘’(人天) 등의 무리는

도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므로 ‘겉모양’에만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일이나 형상이나 모든 법에 집착하여

외도에 떨어지느니라. 만약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줄 알면 마땅히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근본 성품’을 보면 십이부경이 모두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이 오직 이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契合)하여 알면

교법(敎法)이 무슨 소용이리요?

‘지극한 이치’(至理)는 말을 떠났는데, 교법은 다만 이 말일 뿐이니,

실로 ‘도’가 아니니라. ‘도’는 본래 말이 없나니, ‘말’은 이 허망일 뿐이니라.

만약 꿈속에 누각이나 궁전, 상마(象馬)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깐이라도 즐겨 집착할 생각을 내지 말지니,

― 이 모두가 다 <‘삶’이 의탁하는 곳>(托生之處)인지라, 부디 뜻에 두지 말지어다. ―

임종할 때, 전혀 ‘모습’을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곧 의혹을 제할 수 있겠거니와,

털끝만한 망념이라도 일으키면 곧 마(魔)에 끄달리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느낌’(受)이 없건만, 다만 인연에 미혹하여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이에 망령되이 업보를 받아서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느니라.

지금에라도 만약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으리라.

만약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경지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로 잡된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니, 성인은 역순(逆順)에 자재하여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성인의 지위’를 이룬 지 오래 되면 큰 위덕(威德)이 있나니, 온갖 품류(品類)의

업습(業習)이 다 성인의 운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거늘, 천당과 지옥인들 그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범부는 어두워서 성인의 안팎이 명철(明徹)함과는 같지 못하나니,

― 만약 의심이 있더라도 ‘짓지를 말라’(不作). 지으면 곧 생사에 유전(流轉)하나니,

후회해도 구처(救處)가 없느니라. 빈궁함과 고통이 모두 망상에서 생겼나니,

만약 ‘마음’을 알아서 서로 경책하되, 다만 <지음이 없이 지으면>(無作而作) 곧

‘부처 지견’에 들리라.

 

초발심의 사람은 신식(神識)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니, 만약 ‘꿈’(여기서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님) 속에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선뜻 의심을 내지 말지니,

이 모두가 다 ‘자기 마음’이 일으킨 것이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니라. 만약 꿈에

광명이 나타나기를 햇빛보다 더한 것을 보면, 곧 ‘남은 습기’(餘習)가 몰록 다하고

‘법계의 성품’(法界性)이 나타나리라.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 ‘성불의 요인’(成佛之因)이 되리니, 이것은

자기만이 알 뿐이요, 남에게 말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하다가 크고 작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결코 남에게 말하지 말며, 집착하지도 말지니, 이것 역시

‘자기 성품의 광명’(自性光明)이니라.

혹시 어두운 밤에 행주좌와하다가 대낮 같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지니, 이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아지려는 징조니라.

혹 꿈에 별과 달이 분명히 보이면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의 모든 반연(攀緣)이

쉬려는 조짐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만약 꿈에 혼혼(昏昏)하여 어둠 속을 다니는 것 같으면 이 역시 자기 마음의

번뇌장(煩惱障)이 무거운 탓이니, 또한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리라.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았거든 독경(讀經),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나니,

많이 배우고 널리 아는 것이 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정신이 어두워지느니라.

교법(敎法)을 시설해 놓은 뜻은 오직 ‘마음’을 표방(標榜)하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알면 ‘교법’을 볼 필요가 없느니라.

만약 범부가 성인의 경지에 들려고 하거든 마땅히 그 업(業)을 쉬고 정신을

기르면서 분수 따라 세월을 보낼지어다. 만약 성내거나 기뻐하는 일이 많으면

도(道)와 더불어 어긋나나니, 스스로를 속일 뿐, 조금도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가운데 자재하게 드나들며, ‘숨고 드러남’(隱顯)이 일정치 않나니,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며, 능히 ‘삿된 마군이’(邪魔)를 무찌르느니라.

중생이 ‘근본 성품’을 보기만 하면 곧 여습(餘習)이 몽땅 다하고, 정신이 어둡지

않느니라. 참으로 ‘도’를 알고자 원한다면 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어서 정신을 기를지니, 여습이 다하면 스스로 밝아져서 공력(功力)을

빌릴 필요가 없느니라.

 

외도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력은 가장 많이 들이나,

‘거룩한 뜻’(聖旨)을 거슬리므로, 종일토록 서둘러 염불하고, 경을 읽어도 정신이

어두워서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지라, 어찌 분주히 뛰어다닐 필요가 있겠으며, 명리(名利)를

널리 구한들 후일 무엇에 쓰리요? 그런데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을 읽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정진하고, 하루에 여섯 차례 예불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널리 배워서 많이 아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으려 하니, 이와 같은 중생은 모두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니라.

앞의 부처, 뒤의 부처가 오직 「‘성품’을 보라」는 말씀만 하셨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되, 「내가 ‘위없는 도’를 이루었노라」 한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사람이니라.

십대 제자 가운데서 경희(慶喜; 阿難)가 많이 알고 널리 배워서 그 식견이

으뜸이었으나, 부처님께서 늘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문(聲聞), 외도(外道)로 하여금 오직 알음알이가 없게 하라」 하셨으니,

‘알음알이나 수효’(識數)를 아는 것으로써 ‘닦아 증득한다’(修證)고 하면

인과법 가운데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이는 중생의 업보여서 생사를 면치 못하며,

부처님의 뜻에 어기는 것이니,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인지라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천제(闡提)는 ‘믿는 마음’(信心)을 내지 않으므로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殺却無罪)」 하시니, 만약 진정한 신심이 있으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 지위의 사람’(佛位人)이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했거든

결코 어진 이를 비방하지 말지니라.

스스로 속여서는 이로울 것이 없느니라.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 과가 분명한지라,

천당과 지옥이 오직 눈앞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는 까닭에

흑암지옥(黑暗地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나니,

오직 업장(業障)이 무거우므로 믿지 않느니라. 마치 소경이 「햇빛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설사 그에게 말해 주어도 역시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눈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분별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들도 이와 같아서, 방금 축생 등 잡된 무리에 떨어졌거나 빈궁(貧窮)

하천(下賤)한 무리에 태어나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느니라.

비록 이와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직접 물어보면 도리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쾌락하기를 천당과 다르지 않다」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태어난 곳’으로써 낙을 삼아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겠도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오직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니라.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치 않나니,

백의(白衣; 俗人)도 역시 ‘부처’니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더라도 역시 외도(外道)니라.』 하였습니다.

이 법문(法門)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부처 자리’에 안치하는, 가히 불세출(不世出)의

법고(法鼓)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불제자들은 새삼 옷깃을 여미고, 이 위대한

가르침을 오늘에 우뚝하게 붙들어 일으키는 데 심기일전의 용맹심을 발휘해

주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이제 이 법회를 마감하면서, 현대에 정법(正法)을 현양(顯揚)하기 위한 초석으로

‘일승법’(一乘法)을 고여놓고, 이에 현대과학의 정수인 양자이론(量子理論)을

곁들여서, ‘불법’이 안고 있는 종교적 한계성의 탈피를 기하고, 나아가 그 마무리를

‘달마 혈맥론’(達磨血脈論)과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으로 회향하여, 모든 속세적

올가미(羈絆)를 일거에 좌단(坐斷)하게 함으로써 모든 도반들로 하여금 당대에 기필코

성불하여지기를 기약했던 당초의 비원(悲願)이 헛되지 않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의 이 조그마한 불씨가 여러 도반들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만 회향합니다.

여러분의 배전의 정진을 빕니다.

 

- 대우거사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 마치면서

그간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를

애독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저가 2000년경에 이책을 접하고 그간 풀리지 않았던

진리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강동적이어습니다

초보 입문하는 사람들은 직접 법문을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지만 반복 정독하신다면

견성 해탈을 위하여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료를 공유하신 현정선원에게 감사드립니다

 

- 유당 합장

 

 

 

 

 

 

법상 추천 3 조회 234 20.08.14 08:53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황벽선사의 전심법요의 한 구절입니다.

'6바라밀과 만행의 공덕을 본래 구족하고 있으니 애써 수행해서 얻을 것이 없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고요할 뿐.

이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고, 모양에 집착해 애써서 정진하여 무언가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망상에 빠진 것이니, 도와는 어긋난다'

일체 모든 공덕과 6바라밀의 수행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본래부터 더 구족하고 있습니다.

원만구족해지기 위해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를 억지로 닦을 것도 없고,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 수행, 염불, 독경, 절, 좌선 등 온갖 수행들을 얼마나 많이 해 왔는지 모릅니다.

이 공부는 힘써 수행하고 정진해서 얻는 공부가 아닙니다.

진실로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이미 구족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내 마음이 이미 바로 부처임을 결코 믿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망상에 빠진 것이어서 도와는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분별망상, 생각을 진짜라고 여겨 쫓아가지만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생각, 망상, 분별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생각이 없을 때, 아무 일이 없고, 그 자리가 바로 본래 구족입니다.

그저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다시금 아무 일 없는 지금 이 자리, 당처로 돌아올 뿐이지요.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보내지 않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생각을 주인으로 삼지 않으며, 다만 지금 여기 눈앞의 이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분별 없이 본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
YouTube에서 '괴로워 죽겠다고? 상을 깨면 아무것도 아냐! 상을 타파하면 깨닫는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의 질문과 상을 깨는 답변' 보기
https://youtu.be/UYTbVAAdM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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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

게시글 본문내용

모든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다.

현실의 어떤 부분은 즐겁고 어떤 부분은 괴롭다.

어떤 사람은 싫고 어떤 사람은 좋다.

괴로운 일을 떠올리거나, 싫은 사람을 생각할 때는 갑자기 힘들고 괴롭고 싫은 마음이 올라온다.

행복한 일을 떠올리거나, 좋은 사람을 생각하면 갑자기 행복해지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과 불행, 좋은 것과 싫은 것,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 등을 반복해서 생각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가, '괴로운 사람'이 되는 게임을 반복하며 산다.

그런데 이 게임의 특징은 반드시 '생각'해야만 그런 괴롭거나 행복한 마음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을 때라도, 잠깐 행복한 상상을 하면 금방 행복해 지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이 일어날 때만 우리는 그 즐겁고 괴로운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언제나 '생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모든 행과 불행이 일어나기 이전의 아무 일 없는 상태에 가 닿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근원에서는 언제나 아무 일도 없지만, 생각이 온갖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 행복과 불행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나면서 괴롭다는 환상, 즐겁다는 환상에 빠져드는 것뿐이다.

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이라는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보라.

한 생각이 나를 휩쓸더라도, 이 생각은 진짜가 아님을 문득 떠올려 보라.

생각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생각이 나를 휩쓸 때, 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생각이 없는 텅 빈 배경의 자리로 나앉아 보라.

곧장 아무 일이 없어진다.

왜 그럴까?

그 생각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만, 잠깐 작동하는 허상이고, 가짜이기 때문이다.

생각에 속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생각 이전의 근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근원에 뿌리내릴 수 있다.

언제나 여여한, 아무런 일 없는 자리, 지고의 평화에 곧장 이를 수 있다.


 

법상 추천 4 조회 397 20.06.18 22:06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나의 과거의 모든 삶은 그것 자체로 온전합니다.

거기에 시비를 걸지 마세요.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허물도 없습니다.

물론 잘못도 있을 수 있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으며, 악몽같은 과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만약 그 지나 온 과거의 특정 부분을 붙잡아 집착하거나, 질척대거나, 괴로워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되돌아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없는 환영을 내 의식으로 붙잡아 쥐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실하지 못하며, 허상을 붙잡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온 모든 과거를 문제 삼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으로 그대로 두세요.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단죄하려 하거나, 그 부럽단 시절로 돌아가려 하거나 하는 양 극단의 판단을 내려놓고, 과거와는 완전히 이별을 선언해 주세요.

그리고 허상인 모든 과거가 아닌, 실상인 지금 이 순간과 새롭게 관계를 맺어 보세요.

지금 여기, 전혀 새로운, 과거의 그 누구도 아닌, 있는 이대로의 새로운 한 존재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바로 이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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