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사원의 심장, 간단사원


몽골 신앙의 구심점, 간단사원의 관음대불전 전경.

 

몽골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이는 오래된 티베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 몽골문자 또한 티베트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

티베트 또한 과거에는 몽골 출신 달라이 라마가 있을 정도로

정치/종교적으로 몽골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티베트라는 말 자체가 본래 몽골어의 투벳(Thubet)에서 유래한 것이다.

 


간단사원의 어린 스님이 대법당 지붕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몽골의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은 지금도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라싸에 가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며 산다.

오랜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위기를 맞았을 때는

공산당이 몽골의 권력을 장악한 1921년 이후이다.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불교 건축양식이 다양하게 어우러진 간단사원 대법당.

 

당시 몽골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지만,

상당수가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체포되거나 환속당했다.

이때 몽골의 모든 사원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당시 공산당 정권은 법적으로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시켰지만,

일반인의 개인적 신앙생활만큼은 눈 감아주었다.

 


대법당 주위에 있는 마니차와 마니라캉.

 

몽골에 다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체제의 변화가 시작된 1990년대 들어서이다.

망가진 사원이 복원되었고,

환속했던 승려가 돌아왔으며,

예전과 다름없이 불교신자들은 사원을 찾아 기도하고 오체투지를 했다.

종교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언제나

티베트 불교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당 일주문 앞의 마니차.

 

몽골의 신앙은 불교가 국교라 할 만큼 압도적이지만,

몽골의 불교는 전통적인 토테미즘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아궁이신이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불을 때는 난로에도 불의 신이 있고,

땅을 지키는 터줏대감과 아이를 내려주는 삼신이 있다고 믿는다.

 


대법당으로 향하는 순례자(위)와 법당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아래).

 

우리의 서낭당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높은 언덕이나 중요한 길목에는

‘어버’라는 돌무더기(한국에서는 서낭당, 티벳에서는 라체)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어버를 몇 바퀴 돌며

소원과 안녕을 빈다.

불교신자라고 해서 어버를 미신이라 여기는 법이 없다.

 


관음대불전 앞에서 젊은 스님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간단사원은 한마디로 몽골 사원의 중심이다.

‘간단’은 ‘위대하고 성스러운 곳’이란 뜻을 지녔다.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를 받아들일 때

몽골에 있던 800여 개의 사원이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몽골 신앙의 구심점이자 몽골의 심장인 간단사원만큼은 파괴할 수가 없었다.

 

26미터짜리 개안관음상(위). 관음대불전 앞에서 촛불을 켜고 예를 올리는 순례자들(아래).

 

그것은 몽골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몽골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곳 또한 간단사원이다.

간단사원은 특이하게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불교 건축양식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150여 명의 라마승이 현재 이 곳에 거주하고 있다.

 

관음대불전 앞의 룽다를 돌며 소원을 비는 순례자들(위). 대법당을 향해 날아가는 비둘기떼(아래).

 

간단사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26미터짜리 개안관음상이 보관된 관음대불전(1996년 복원)이다.

대법당은 의외로 소박해서 티베트 사원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대법당의 건축양식이 바로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불교 건축양식이

다양하게 가미된 건물이다. 

 


간단사원으로 가는 스님(위). 불교박물관으로 변해버린 초이진 사원 전경(아래).

 

울란바토르에는 시내와 외곽에 여러 사원이 들어서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고,

종종 게르를 사원으로 꾸민 소박한 ‘게르사원’도 볼 수 있다.

간단사원과 함께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는 초이진 사원은

현재 사원으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렸고, 대신 불교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이진 사원 입구(위)와 초이진 사원 지붕 장식. 우리나라 궁궐 지붕 장식과 흡사하다(아래).

 

여기에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 불화, 의식용 탈과 의상 등이 전시돼 있다.

본래 최고의 장인과 화공이 사원장식에 참여한 사원이므로

건물과 단청, 장식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저 유목민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던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초이진의 전시물이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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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7: 고비의 마지막 밤   그저 말이 필요 없는 고비의 하늘. 초원의 구름. 흘러다니는 상상력.   저녁 7시가 넘어 차는 에르덴달라이에 도착한다. 고작 네댓 채의 게르가 초원에 들어선 이곳에 오자고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 것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밥을 하고 밥을 먹는다. 몽골을 여행하며 이렇게 손수 밥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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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공룡을 만나다

 

몽골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타보사우루스 실물 뼈화석. 높이 15미터, 무게는 5톤 정도.

 

울란바토르의 자연사박물관은 공룡박물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곳은 고비에서 발견된 육식공룡 타보사우루스(Tarbosaurus,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속의 육식공룡으로 높이 15m, 무게 4~5톤 정도)의 거대한 공룡뼈를 실물 전시한 곳으로,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유명한 박물관(이곳은 세계적인 자연사박물관에 공룡뼈 화석을 공급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이다.

 

고비에서 옮겨온 공룡알 화석. 고비는 세계 최초로 공룡알 둥지가 발견된 곳이다(위). 초식공룡 사우루로푸스 실물 뼈화석(아래).

 

 

초식공룡의 뼈(실물 사우루로푸스 Saurolophus, 길이 8m) 와 공룡알 화석도 전시돼 있으며,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공룡알 둥지 화석은 관광객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있다. 이밖에도 자연사박물관에는 몽골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야생동물(고대 코뿔소, 매머드, 거북이 등)과 조류(독수리를 비롯한 맹금류를 포함)가 박제돼 있으며, 고대의 나무 화석도 만날 수 있다.

 

공룡 뼈화석지와 매머드를 비롯한 고대 생물 화석지를 표시한 몽골지도. 고생물학자들에게 몽골은 고생물화석 탐사의 낙원으로 불린다.

 

이곳에 전시된 공룡화석은 대부분 고비사막의 모래더미 속에서 8천만년 이상 잠을 자던 공룡들이다. 고비사막은 최근 전세계 고생물학자들로부터 가장 탐사하고 싶은 ‘공룡 화석탐사의 보고’로 통하고 있다. 고비에서는 세계 최초로 공룡알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타보사우루스를 비롯해 오비랩터, 프로토케라톱스 등 수많은 공룡화석도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의 공룡뼈 화석은 상당수가 모래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사진처럼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발굴하기도 편한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고비에서 발견되는 공룡화석은 그 보존상태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더욱이 암석이나 지층의 화석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모래더미를 걷어내면 곧바로 공룡뼈가 드러나므로 발굴이 편한 장점까지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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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산맥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다

 

알타이산맥 보르항 보다이 산의 만년설. 이제 꼭대기에만 만년설이 남았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한 자연의 역습이 심상치 않다. 미얀마에서는 엄청난 위력의 사이클론이 나라 전체를 덮쳐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피해 이후 최악의 사망피해를 가져왔고, 미국의 중부지역에서도 강력한 토네이도로 5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사이클론과 토네이도의 피해가 휩쓸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는 리히터 규모 7.8의 초강진이 쓰촨 지역에 발생, 수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최근의 자연재해는 상당부분 ‘지구온난화’에 그 원인이 있지만, 그 책임을 져야할 인간의 지구를 괴롭히는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보르항 보다이 아래서 만난 낙타떼. 만년설산에서 흘러내린 빙하수를 마시고 있다.

 

초원의 사막화, 1천여 개의 강과 호수가 사라졌다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청정무구한 몽골도 예외가 아니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닷새를 달려 도착한 알타이에서 나는 온난화로 몸살을 앓는 지구를 실감했다. 길안내를 맡은 몽골 국립대학 한국어과 비지아 교수(37)에 따르면, 최근 8년간 알타이 산맥의 여러 만년설산은 지난 30여 년간 녹은 빙하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10여 년 전보다 몽골의 겨울은 피부로 느낄 만큼 따뜻해졌고, 사막화로 황사바람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나 또한 알타이 가는 길에 바얀고비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비바람과 황사폭풍을 만났다. 비바람은 낮은 곳에서는 가랑비가 되었다가 언덕에서는 진눈깨비로, 고지대로 올라가면서 함박눈으로 돌변했다.

 

알타이에서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보르항 보다이는 외국인이나 관광객이 거의 가지 않는 험로이다. 

 

“올해는 유례없이 가문데다, 최근에는 폭풍에 가까운 황사바람이 계속 불었다. 옛날에는 봄에만 황사가 있었는데, 이제 황사는 눈비가 오는 날을 빼고 사계절 발생하고 있다.” 비지아 교수의 말이다. 최근 몇년간 몽골은 계속해서 봄/여름 가뭄에 시달렸다고 한다. 계속된 가뭄은 몽골의 사막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수백만 마리의 가축 피해로 이어졌다. 국토의 대부분이 초원(준사막)과 사막인 몽골에서는 지난 20여년간 지구온난화로 인한 사막화 현상으로 약 1천여 개의 강과 호수가 말라붙거나 아예 사라졌다고 한다.

 

바얀고비에서 만난 엄청난 황사폭풍(위). 남고비로 흘러가는 유일한 강, 옹기 강은 바짝 말라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아래).

 

한국에서는 아직 ‘지구온난화’의 피해를 태풍과 집중호우 등으로 느끼지만, 몽골에서는 가뭄과 황사, 사막화, 빙하의 녹아내림과 겨울 온도 상승 등 다양하게 느끼고 있다. 몽골에는 커다란 두 개의 산맥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에서 남고비까지 이어진 알타이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 중서부에 걸쳐 있는 항가이 산맥이다. 몽골에서 항가이는 나무가 있는 산, 알타이(몽골어 ‘Altan’은 ‘금으로 이루어진’이란 뜻으로 알타이는 알탄에서 비롯되었다)는 바위가 있는 산을 가리킨다.

 

만년설산 아래 봄풀이 막 돋기 시작한 초원을 지나는 양떼와 염소떼.

 

울란바토르에서 알타이를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지만, 육로를 이용할 경우 대부분은 항가이 산맥 남쪽 루트를 이용한다. 이 남쪽 루트(약 1000km)는 쉬지 않고 달리면 3일, 평범하게 달려도 4일이 걸린다. 그러나 나는 이 편한 길을 놔두고 닷새나 걸리는 항가이 산맥 북쪽 루트(약 1400km)로 길을 잡았다. 이 길은 알타이를 가려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조차 거의 이용하지 않는 ‘사서 고생길’이나 다름없는 험로로 손꼽힌다.

 

보르항 보다이로 가는 황야의 길.

 

그러나 이 길은 산과 협곡, 초원과 습지, 몽골에서 보기 힘든 삼림지대와 크고 작은 강줄기를 차례로 만나며 가는 황금길이나 다름없다. 히터가 들어오지 않는 옛 공산시대의 초대소같은 숙소와 현지인 게르에서, 5월인데도 밤이면 영하 12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침낭 하나로 견디며 나는 꼬박 닷새를 달려 알타이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다섯 번의 펑크가 났다는 것 빼고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타이 산맥의 최고봉 후이툰(4355m) 인근(알타이 시내에서도 하루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곳)이 고향인 비지아 교수조차 이 북쪽 루트는 처음 경험하는 길이었다.

 

알타이산맥의 만년설산 보르항 보다이 전경. '보다이'는 붓다, 즉 부처를 뜻한다.

 

알타이산맥 만년설, 지난 30년간 녹은 양보다 최근 8년간 녹은 양이 훨씬 더 많다

 

울리아스타이를 지나 알타이 산맥의 항타시르 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비지아 교수는 어린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상념에 젖었다. “어릴 때 알타이 최고봉 만년설산 아래서 말을 탔다. 그 때는 만년설산 빙하가 산 아랫부분까지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8년 전 고향에 다니러 갔더니 빙하가 산 중턱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또 요즘에 가서 보니 만년설이 꼭대기밖에 남지 않았다. 최근 8년 동안에 녹아내린 빙하는 그 전 20~30년 동안 녹아내린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 녹아내린 셈이다. 남고비 홍고린 엘스로 흐르는 옹기 강도 메말라서 지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어릴 때에 비하면 지금은 겨울이 엄청 따뜻해졌다.”

 

보르항 보다이 만년설산의 최고봉. 이곳의 만년설은 지구온난화의 피해로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다.

 

알타이 산맥에는 모두 800여 줄기, 약 600km2 면적의 빙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수년 전의 보고이므로, 이중 상당수는 이미 사라졌거나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알타이에서 내가 찾아간 보르항 보다이 산(3705m)과 하삭트 하이르항 산(3370m)의 만년설도 이제 꼭대기에만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을 뿐이다. 알타이에 도착한 이튿날 보르항 보다이 만년설산으로 가는 길에 나는 엄청난 자연현상을 목격했다.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모래기둥이 그것이다. 계곡의 회오리바람이 만들어내는 모래기둥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자연현상이지만, 몽골에서는 아주 흔하게 만나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것을 찍으려 할 때마다 감쪽같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것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만년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수 인근에 터를 잡은 유목민 게르 한 채와 빙하수를 마시는 고원의 낙타떼.

 

초원의 신기루도 몽골초원에서 흔하게 만나는 풍경이다. 아지랑이와 햇빛의 반사가 만들어내는 초원의 신기루는 마치 지평선에 호수가 있거나 물이 흐르는 듯 보이는 게 특징이다. 내 눈에는 이런 풍경이 마냥 신기한 것이지만, 몽골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풍경이어서 눈길을 끌지도 못한다. 보르항 보다이로 가는 길은 협곡과 초원과 언덕을 번갈아 건너는 롤러코스트 같은 길이다. 만년설산이 가까워질수록 초원에 보이는 소떼는 야크떼로, 말은 낙타로 바뀌어간다. 몽골 유목민의 삶은 이 높고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 만년설산이 보이는 언덕과 구릉에도 드문드문 게르 몇 채가 보인다.

 

양을 치던 양치기가 말을 타고 멀리서 달려와 오랜만에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

 

멀리 설산이 보이는 언덕에서 양과 염소를 몰던 양치기는 난데없이 설산 아래 차와 사람이 나타나자 말을 타고 달려왔다. 비지아 교수와 운전기사가 양치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날씨가 쌀쌀해 나는 교수님이 지피고 간 마른 야크똥 불길에 손을 쬔다. 야크똥은 금세 불이 붙는데다 화력 또한 좋았다. 알타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중간에 먹을 데가 없어 빙하수가 흘러내리는 개울가에 차를 세우고 물을 끓여 컵라면으로 점심을 떼웠다. 컵라면을 먹는 동안 낙타떼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십여 마리 넘게 개울로 모여들어 차디찬 빙하수를 마시고 있다. 불과 40여 미터 위에 녀석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가 떠날 때까지 오랜 시간 물을 마셨다.

 

날이 추워 야크똥으로 피운 불(위). 알타이로 길안내를 해준 비지아 교수가 말을 쓰다듬고 있다(아래).

 

염소떼가 몽골의 사막화를 부추긴다

 

알타이에 머문 지 3일째 되는 날은 날씨가 하루종일 흐렸다. 하삭트 하이르항 산으로 가는 동안 눈앞에 보이는 만년설산은 하늘에 뜬 회색구름에 덮여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는 초원마다 어김없이 양떼와 염소떼를 만난다. 그런데 초원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염소떼가 몽골의 사막화를 부추긴다는 이야기였다. 비지아 교수가 들려준 이 이야기는 실제로 몽골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 어버(돌서낭당)에서 만난 유목민.

 

“몽골 유목민은 염소와 양을 함께 키우는데, 염소는 전체 무리의 10~20%만 있어야 한다. 양은 식물의 줄기만 잘라먹지만, 염소는 식물의 뿌리까지 캐먹기 때문에 염소가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최근 바얀홍고르 등의 대초원에서 염소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유는 염소털, 즉 캐시미어 때문이다. 양털이 1kg에 100투그릭인 반면, 캐시미어는 1kg에 무려 4만 투그릭이나 한다. 그러니 유목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초원의 사막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삭트 하이르항 가는 길에 만난 할머니 양치기.

 

하삭트 하이르항 산중 계곡에는 외국인이 아예 오지 않는 휴양소가 자리해 있다. 알타이에서 3시간 거리의 산중에 있는 휴양소를 외국인이 찾아간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알타이가 고향인 비지아 교수도 가는 길에 몇 번이나 길을 물어 겨우 찾아갔다. 외국인을 거의 본 적 없는 안내원과 그의 딸과 두 마리의 몽골견은 처음 찾아온 외국인을 위해 양을 몰다 말고 계곡의 길안내를 맡고 나섰다. 여기저기 샘솟는 약수와 나무가 우거진 빙하수 계곡과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동굴 얼음까지 다 보여주고서야 안내원은 계곡을 내려갔다.

 

하삭트 하이르항 만년설산 휴양소의 안내원과 그의 딸.

 

알타이 산맥은 거의 한반도 남북 길이 2배 정도인 총길이 2,000k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산맥으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에 걸쳐 있지만, 몽골에 가장 넓고 길게 뻗쳐 있다. 알타이 산맥은 고비알타이, 몽골알타이(보통 알타이산맥이라고 함), 소비에트알타이 등 세 지맥으로 나뉘는데, 삼림지대를 이루는 산맥의 서남쪽에 비해 산맥의 북동쪽인 몽골지역은 스텝과 준사막을 이룬 곳이 많다. 환경이 척박한 몽골의 알타이 산맥에는 동물의 분포도 많지 않아서 늑대나 스라소니, 야생염소가 이따금 발견될 뿐이다. 다만 알타이 산맥과 그 부근에는 앞발이 짧은 타라바그 같은 설치류가 많아 이것을 포식하는 솔개와 독수리 등 맹금류가 꽤 많이 분포한다.

 

하삭트 하이르항의 만년설이 흘러내리는 건천에 가까운 개천.

 

사실 알타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학교에서 배운 알타이 어족에 한국어가 속한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민족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알타이는 바이칼 호수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유력하게 손꼽히는 곳이다. 공교롭게도 알타이족의 시조신화와 부여의 시조신화는 너무나 비슷하다. 알타이족의 시조는 개구리왕 탄자강이며, 부여의 시조 또한 ‘금개구리왕’ 금와왕이다. ‘알타이’의 ‘Altan’이 ‘금으로 이루어진’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니 ‘탄자강’은 바로 금개구리왕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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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태어난 이 어여쁜 생명들

 

유목민 게르 앞에 앉아 있는 어미 양과 그 옆에 서 있는 어여쁜 새끼양.

 

과거 우리나라엔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는 춘궁기를 일컫는 말이다.

몽골에는 ‘젖고개’라는 말이 있다.

봄에 가축들이 새끼를 낳는 철을 일컫는다.

새끼 낳는 시기에는 가축을 잡을 수도 없고,

새끼를 낳은 가축들은 잘 나오지도 않는 젖을 새끼에게 먹여야 하므로

사람이 먹을 젖도 부족해 젖고개라 했던 것이다.

 

제 어미도 아닌 옆의 양 등에 올라탄 새끼 염소 한 마리.

 

유목민들은 아무 때나 가축을 잡지 않는다.

늦가을 살이 통통하게 올랐을 때 가축을 잡아 게르에 매달아 놓고 그것을 봄까지 먹는다.

여름에는 가축에서 나오는 유제품으로 고기를 대신한다.

봄에는 가축들이 겨우내 먹이가 부족해 바짝 마른데다

새끼도 낳아야 하므로, 봄에 가축을 죽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유목민 아이 게렐치멕(7세)이 새끼 염소를 들어올리고 있다.

 

어찌됐든 몽골 초원의 가축들은

봄풀이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4~5월에 새끼를 낳는다.

몽골에서는 ‘오축’이라 하여 소(야크 포함), 말, 양, 염소, 낙타를

가장 귀중한 다섯 가축으로 여긴다.

다섯 가축 모두 약속한듯 봄에 새끼를 낳는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위).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새끼양(아래).

 

봄이면 몽골의 초원은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새끼들은 음메~거리고 이힝~거리며 엄마를 따라다닌다.

몽골의 하늘과 초원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갓 태어난 새끼와 어미가 한데 어울린 모습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태어난 지 2~3개월쯤 된 새끼 양떼.

 

보통 몽골에서는 낙타나 말은 게르에서 좀 떨어진 곳에 방목을 하고,

소나 양과 염소떼는 게르 인근 초원에 방목을 한다.

저녁에 따로 게르 인근으로 몰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소떼(야크)나 양과 염소떼는 반드시 저녁이면 게르 주변으로 몰고온다.

아직도 몽골에는 무리에서 이탈한 새끼만을 노리는 늑대가 꽤 많은 편이다.

 

벌판에서 길을 잃은 새끼 염소. 염소의 주인과 함께 여행온 동료들까지 모두 7명이 30분간이나 이 염소를 잡으려고 애쓴 끝에 겨우 새끼 염소를 무리에 데려다 주었다.

 

실제로 이크올의 현지인 게르에서 묵었을 때

게르에서 좀 떨어진 망아지 한 마리가 늑대에게 뒷다리를 물려 돌아온 적이 있다.

게르 주인은 어떻게 알았는지 산자락에서 이 망아지를 구해 돌아왔다.

어미말은 놀랐는지 주인 외에는 망아지 곁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다.

 

이크올 인근 현지인 게르에서 만난 이 망아지는 늑대에게 뒷다리를 물려 게르로 돌아왔다(위). 늑대에게 물린 망아지의 뒷다리(아래).

 

몽골의 유목민들은 양과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저녁에 새끼들만 따로 우리에 가둔다.

우리는 한달 이상된 새끼를 가두는 커다란 우리 안에

또 작은 우리를 만들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따로 보호한다.

우리 안에 새끼들이 있으므로 어미와 다른 가축들은 밤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어미 젖을 먹고 있는 새끼 야크.

 

소와 야크도 새끼 우리를 따로 만들어 보호한다.

소와 야크, 말과 낙타는 어미의 젖을 짤 때도 새끼를 이용한다.

새끼에게 먼저 젖을 먹이는 ‘최유’를 한 뒤, 새끼를 어미 옆에 묶어놓고

어미의 젖을 짜는 것이다.

반면 양과 염소는 새끼와 상관없이 어미를 묶어놓고 젖을 짠다.

 

붐브그르 마을 한가운데 공터에서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소.

 

일상적으로 몽골에서는 양과 염소의 새끼를 돌보는 일은 아이들 몫이다.

나아가 양떼를 몰아와 새끼를 우리에 넣는 일도 아이들에게 시킬 때가 많다.

유목민 사회에서는 아이들도 유목생활의 일원이다.

너무 이른 봄에 새끼를 낳았을 때는

갓 낳은 새끼를 아이로 하여금 게르에서 데리고 자도록 할 때도 있다.

몽골의 봄은 4~5월에도 밤이면 영하 15도까지 내려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델게르 초원에서 만난 새끼 낙타의 젖 먹는 풍경(위). 공동육아를 하는 듯 새끼 세 마리를 거느린 어미 낙타(아래).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몽골에서 유목하는 오축의 수는 모두 3억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양이고, 다음이 염소, 소와 야크, 말, 낙타 순이다.

그러나 최근 몽골의 급격한 사막화와 기후변화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피해를 입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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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칭기즈칸의 후예들: 유라시아를 정벌한 칭기즈칸의 전술

 

800여 년 전 유라시아를 정벌한 칭기즈칸의 부대를 초원에 재현하고 있는 칭기즈칸의 후예들.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동북아의 초원에 거대한 몽골제국이 탄생한다. 초원에 흩어져 있던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고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은 테무친, 바로 칭기즈칸(1162~1227)이다. 그는 몽골 건국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 정벌에 나서 세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6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하는 순간(1227년 8월)까지도 전선에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백수십 년이 지나면서 세계제국이었던 몽골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한 것만큼이나 빠르게 몽골은 지배력을 잃었고,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위풍당당 칭기즈칸의 후예들.

 

몽골제국이 탄생(1206년)한 지 8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칭기즈칸은 몽골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귀환’이라 불릴만큼 칭기즈칸은 요즘 몽골과 몽골인들에게 다시금 몽골의 자부심과 영웅심리를 일깨우고 있다. 2년 전 <칭기즈칸 800년만의 귀환>이라는 몽골 건국 800주년 기념축제를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비롯해 칭기즈칸과 관련된 이벤트는 지금도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다. 몽골인들에게 칭기즈칸은 곧 몽골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시대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칭기즈칸은 글로벌 시대의 전략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800여 년 전 칭기즈칸 부대의 전투 재현 모습.

 

테무친은 1162년 오논 강이 흐르는 몽골의 북동부 초원에서 유목민 씨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몽골은 여진족의 금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위구르왕국, 거란족의 서요, 호라즘왕국 등 인종과 문화가 다른 종족과 나라들이 사분오열 들어선 난세였다. 테무친은 몽골 부족의 동맹과 결속을 내세워 권력을 잡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몽골 부족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의 이상과 꿈은 부족을 통일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로 묶는 세계제국을 꿈꾸고 있었다.

 

 

 

 

사실상 칭기즈칸의 인생은 전쟁과 전투의 연속이었다. 전투에 나선 그는 배신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지만, 적장일지라도 절개와 충성을 지키는 자는 끝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당시 칭기즈칸의 부대 편제는 오늘날의 군대처럼 질서정연하고 효율적이었다. 기병과 창병, 궁수와 도병, 투석병을 따로 두었으며, 친위대와 수송대(낙타부대), 별동대를 적절하게 운용하였다.

 

 칭기즈칸 선봉부대의 재현.

 

가령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의 경우도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누어 선봉에 세웠고, 그 뒤에는 투석기와 투창기를 갖춘 대형공격부대와 병참부대를 두었으며, 따로 예비군을 편성해 두었다. 유목민답게 칭기즈칸의 부대는 가축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 가축들은 병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 무엇보다 칭기즈칸이 당시에 중요하게 여긴 전술은 바로 정보전이었다. 그는 척후병이나 첩자를 이용해 적의 정보를 철저하게 수집하였으며, 그것은 곧 적을 무너뜨리는 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마상 활쏘기와 올가 잡기.

 

당시 몽골군의 무기는 활과 칼, 창과 같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활용도는 남달랐다. 우선 그들의 칼은 끝이 뾰족하고 등이 구부러진 모양으로, 칼을 뽑기 편하게 만들었다. 말을 타고 싸우는 그들에게는 칼을 먼저 뽑는 것이 곧 살아남는 길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칼의 사용법이었는데, 몽골 기병들은 이 칼을 오로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활을 지녔던 사수는 보통 60여 개의 화살을 가지고 다녔는데, 멀리 쏠 때는 가벼운 화살을, 접근전에서는 무거운 화살을 사용했다.

 

대초원의 하늘을 찌르는 칭기즈칸 후예들의 기치창검.

 

무엇보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선 채로 말을 타는 몽골군 특유의 ‘입식마상’ 자세는 언제든 자유롭게 화살을 쏠 수 있는 유리한 자세가 되었다. 창을 들고 싸웠던 중기병은 갈고리가 달린 특이한 창을 지니고 다녔는데, 이는 적을 찌르기 위한 것보다는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의 기병들이 보유한 창이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것에 비해 몽골군의 창은 훨씬 가벼운데다 고리가 달려 있어 기동력에서 앞선 몽골군은 실전에서 유럽의 기병들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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