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애 배서 나온다’는 섬, 여서도

 

하늘에서 내려다본 절해고도 여서도 풍경.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도의 중간쯤 바다에 있다.

 

청산여수(靑山麗水). 산과 물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이 말은 청산도와 여서도에서 비롯한 말이다. 청산도가 산과 들, 바다가 온통 푸르고 아름다운 섬이라면 여서도는 물이 좋고, 바다가 투명한 섬으로 통한다. 한마디로 청산도는 산이 좋고, 여서도는 물이 좋은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여서도를 일러 “여자가 애 배서(배어) 나오는 섬”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여서도가 지금처럼 매일 배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친 바다 날씨에 따라 오랜 동안 섬에서 발이 묶일 때가 많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여서도 인근 바다에 물고기처럼 지나가는 어선들.

 

또한 과거에는 제주도의 잠녀들이 여서도로 원정 물질을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섬에 오면 잠녀들은 상당기간을 머물러야 했으니, 제주도 처녀 잠녀와 여서도 총각 어부가 눈이 맞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실제로 여서도에는 제주도에서 시집왔다는 할머니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여서도에 물질 왔다가 아예 여서도 사람으로 눌러앉은 셈이다. 이래저래 여서도는 오래 전부터 오가기가 쉽지 않은 낙도였고, 지금도 하루에 한번 배가 다니기는 하지만, 한번 가려면 3시간여의 뱃시간이 걸리는 뭍에서 꽤나 멀고, 불편한 섬에 속한다.

 

여서도 여서분교 오르는 길에 만난 섬 사람들.

 

완도항에서 출발하는 여서도행 철부선은 버스로 치면 완행이나 다를 바 없다. 철부선은 장도, 소모도, 대모도(모서리와 모동리를 다 들러 간다)를 차례로 들렀다 갈 뿐만 아니라 올 때는 청산도에서 15분 넘게 정박했다 간다. 그러나 여서도행 배편이 닿는 섬들이 도서민이 많은 섬들이 아니어서 대체로 배는 한산한 편이다. 내가 여서도행 배를 탄 날에도 평일이긴 했지만, 고작해야 손님이 열댓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손님이 장도에 내리고, 소모도에 내리고, 대모도 모서리와 모동리에 내리고 보니 여서도행 손님은 고작 세 명만 남았다.

 

당집 언덕에서 바라본 여서도 마을 풍경(위). 물맛 좋기로 소문난 여서도의 공동우물(아래).

 

“여서도는 마지막 남은 청정지역이에요. 요즘엔 낚시꾼들이 더러 와서 물을 흐려놓고 있지만서두....” 배에서 만난 외항선원 출신의 말이다. 그는 오랜 동안 외항선을 타고 전세계를 떠돌다 5년 전 우연히 여서도에 왔다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물이 좋아 여서도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바닷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계곡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오히려 바닷물보다 좋다고 한다.

 

여서도의 명물, 돌담 골목과 밭돌담.

 

배안에서 만난 또 한 명의 할머니는 전직 해녀였다. “그럼 지금은 여서도에 해녀가 없나요?” 할머니에 따르면 아직도 여서도에는 3명의 해녀(완도에서는 해북녀라고도 한다)가 있다고 한다. 이즈음 해녀들은 문어도 잡고, 전복과 성게도 딴다. 해초로는 미역을 많이 딴다. 그러나 여서도에 남은 3명의 해녀는 거의 노인들이어서 여서도의 마지막 해녀가 될 것이 분명하다. 2시간 30분이나 걸리는 여서도 뱃길은 짙은 해무로 인해 여서도 선착장에 다 와서야 여서도의 맑은 바닷속과 산자락을 따라 고성같은 돌담을 두른 마을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여서도 섬마을에 핀 유채꽃.

 

섬에 내리자마자 나는 미로와도 같은 돌담길을 되는대로 올라갔다. 여서도 돌담은 참 기막힐 정도로 구불구불하다. 여름철 태풍과 겨울철 삭풍이라는 자연의 재앙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낙도의 환경이 만들어낸 생활의 예술이 바로 돌담인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이 돌담은 미학적인 관점보다는 기능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지극히 반미학적 구조물이다. 오로지 바람으로부터 집과 식구, 살림을 보호하고자 한 지극히 인간적인 의지가 오늘날 여서도의 돌담을 미학적인 삶의 예술로 만들어낸 셈이다.

 

마지막 여서분교 아이들. 2명이 전교생이었는데, 이중 한 명은 이미 졸업했다.

 

나는 미로와도 같은 돌담길을 따라 걷는 동안 어느 새 왔던 곳을 여러 번 와야 했고, 53가구에 이르는 마을을 샅샅이 둘러본다는 것이 해 지기 전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록 복잡하고, 이토록 원형이 제대로 남은 돌담은 내가 다녀본 섬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다.

 

쓸쓸하게 걸린 여서분교 팻말과 교실 앞의 앉은뱅이 걸상.

 

돌담길을 구불구불 돌아 올라간 마을의 꼭대기쯤에는 옛 모습이 제대로 남은 오래된 옛집도 만날 수 있다. 방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삭은 나무 기둥과 오래된 흙돌벽과 벌레 먹은 부엌의 판자문이 집의 오랜 세월과 내력을 말해준다. 마을에는 빈집이 허다하다. 그 중에는 옛날의 초가지붕이 삭을 대로 삭아서 바다 쪽으로 거의 쓰러질 듯 몸을 기울인 빈집도 있다.

 

여서도 포구에서 다시마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산에서 흘러내린 계곡가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공동우물이 있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이 물을 식수로 쓰고, 우물가에 나와 빨래도 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이 샘물은 참으로 오랜 동안 여서도 사람들의 생명수가 되어왔다. 마을의 맨 꼭대기에는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터에 가장 큰 집’이라 할 수 있는 청산초등학교 여서분교가 있다. 2005년까지 이곳에는 2명의 학생과 1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폐교처럼 남은 학교. 학교 울타리에 심은 동백은 꽃을 떨구고, 운동장을 빙 둘러선 벚꽃도 거의 다 졌다.

 

폐가로 남은 오래된 빈집. 이렇게 무너지고 쓰러져가는 것이 섬의 현실이다.

 

저녁이 다된 선창에는 저만치 매인 어선들마다 그물을 수리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물 맑은 바다는 그런 선창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어선에서 방금 내린 다시마를 포구 바닥에 널어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낚시꾼들은 등대 앞에 진을 치고 저녁놀을 배경으로 낚시에 빠져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는 그저 한참이나 황혼 속에 빛나는 포구와 저물어가는 바다를 본다. 외롭고 적막하기만 하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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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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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2009.4.5~7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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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향기를 찾아서
세상살이가 덧없고 또 덧없음을 아는 나이는 얼마쯤 될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는데...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다. 당연히 이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죽는 순간까지도 제 욕심을 이기지 못해 안타까워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일찌감치 득도해 한평생을 도사처럼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이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는 데는 어떤 계기가 작용하지 않나 싶다. 이런 계기가 일찍 오는 사람과 늦게 오는 사람 그리고 이런 계기를 겪고 난 후 사람의 태도변화 등이 개인차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닐까.
우리 역사 속에는 야인으로 한평생을 지냈던 인물들이 많다. 특히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야인 생활을 해야 했던 인물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역사에서 빼어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산 정약용. 그는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을 귀향살이로 보냈다. 다산이 살던 1800년 전후보다 더 어지러운 지금, 가족과 함께 홀로 초당을 지키며 살았던 다산의 향기를 찾아 떠자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정약용 선생은 실학을 집대성한 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불행한 일생을 보내야 했다. 22살에 과거에 급제해 두루 관직을 거치다가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 이후)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어, 58세까지 무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집필하여, 정약용이란 이름을 후세에 크게 남겼으니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유배가 풀린 후에는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와 조용히 살다가 75세에 고향집 뒷산에 묻혔다. 이 경기도 남양주에는 아직도 다산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과 여유당 뒤 낮은 언덕에 다산 선생의 묘가 있다.

현재 다산초당에는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다산4경이라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이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본래 윤단이란 사람이 건립하여 서당으로 쓰던 건물인데 다산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본래는 초가집이었는데,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기와집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해남 윤씨는 다산 선생의 외가라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는 집자한 것이라 한다.

다산초당 건물에서 동쪽으로 연못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동암(東庵)은 다산 선생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를 하던 건물이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의 저술작업이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다보면 초당 앞에 있는 서암(西庵)은 다산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 동암과 서암 모두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초당에서 동암을 지나 작은 모퉁이를 돌면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이 정자는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없던 정자이다. 이 자리는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선생이 가족이 그리울 때 나와 앉아 마음을 달랬던 자리라 한다.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여 전망이 빼어난 자리이다.

다산4경이라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모두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정석바위는 다산초당 뒤쪽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에 '정석(定石)'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약천(藥泉)은 다산초당 건물 뒤에 있는 샘으로 다산 선생이 직접 파서 만든 샘이라 한다. '다조'는 초당 앞에 있는 넓직한 반석으로 이곳에서 다산 선생이 이 돌을 부뚜막 삼아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시던 곳이라 한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에 있는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다산 선생이 탐진강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다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연지 옆으로 만덕산 기슭인데 대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산에서 흐르는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해놓았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있어 산길을 약 15~2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큰 길에 주차장에 있고 소형차는 초당 길로 들어와 귤동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도 있다.

다산초당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다산유물전시관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산 선생의 일생과 업적 등에 대해 비교적 잘 꾸며진 곳이다. 다산 선생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산 선생의 일생과 강진군을 소개하는 영상실이 있고,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다산 선생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산초당을 본 다음 백련사로 가보자. 백련사까지는 다산초당의 동암 위쪽으로 산길이 이어진다. 약 1km 정도의 산길로 운치있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백련사로 가서 백련사를 본 뒤 다시 다산초당으로 돌아오면 된다.

백련사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이곳에서 백련결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절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지만 만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전경이 아주 좋다. 또 주차장에서 백련사까지 약 5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게 되는데, 이 길 주변이 동백림으로 유명하다. 이 동백림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동백림으로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코스는 서울에서 당일로 돌아오기는 힘들다. 1박을 예정해야 하며 첫날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본 뒤 다음날은 보성의 보성다원이나, 해남의 땅끝마을 아니면 강진의 도요지 중의 하나를 골라 돌아본 뒤 올라오는 것이 좋다.


찾아 가는 길 - 자가운전
서울에서 전남 강진으로 가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장성을 지나면 톨게이트를 만난다. 이 톨게이트를 지나면 광산 나들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호남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 나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1번 국도에서 좌회전하여 곧바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13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나주 방향으로 간다. 13번 국도를 달리다가 다시 22번 국도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하여 나주 방향의 22번 국도로 간다. 22번 국도를 따라 나주까지 간 후 나주에서 영암으로 빠지는 13번 국도로 들어가야 한다. 이 13번 국도를 따라 영암을 지나 성전삼거리를 만나면 2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이 2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강진이다. 강진에서 18번 국도와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해남 방향으로 조금 달리면 다산초당 이정표가 나오고 이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여 계속 달리면 귤동마을 앞 주차장에 닿게 된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서 길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다산유물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에도 주차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에서 약 6시간 정도 거리이다.

찾아 가는 길 - 대중교통
시외버스를 이용해 강진까지 가야 한다. 강진에서 군내버스를 이용해 다산초당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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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란카의 고대도시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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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발렌시아 (Valencia)

스페인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발렌시아는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휴가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지역이다.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발렌시아는 무역과 생산의 중심지이다.

특히 세라믹 공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매년 다양한 페어와 컨벤션이 열린다.

 발렌시아市 全景

 

  발렌시아市 해변

 

 

 미켈레떼종탑

 발렌시아 대성당

 

 발렌시아 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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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트 경기장

 

 

 

 Calatrava 다리

 

 음악전당

 

 

 

 

 발렌시아의 초 현대식 건물 레이나 소피아 예술 궁전

(Palau del les Arts Reina Sofia)

 

 

  Opera House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라이벌 격인 스페인 발렌시아의 초 현대식 건물

 

 세계적인 지휘자인 로린 마젤(Lorin Maazel)은 이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첫 세 시즌을 맡았으며, 주빈 메타는

정기적인 음악 축제를 담당하게 된다고 한다.

 발렌시아 출신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하였으며

공사에는 총 3억 3백만달러가 들어갔으며,

밤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광채를 띄고 있다.

 칼라 트라바는 이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14년간을 몰두 했다.

1,800명을 수용하는 이 극장은

심포니 오케스트라 콘서트 홀, 발레, 연극, 오페라 등

4가지 공연이 열리며, 별도로 2,500석 규모의 야외 관람석을 갖추고 있어

모든 공간에서 공연이 열릴 경우 총 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IMEX 영화관

IMEX 영화관 과 Opera House

 

 

 

 

 

 

 

 문화과학 Center

 문화과학 Center

 

 

 

 문화과학 Center

 

 

 

 

 

George Baker - Morning Sky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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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학문의 신을 모시는 태재부천만궁 [太宰府天滿宮] 
 
 
 
  일본 규슈 여행 첫째날, 부산항에서 저녁 7시에 출항하여 약 6시간 행해후 시모노새끼항 가까이에서 정박하여 일과개시시간에
맟추어 08:30분에  하선하여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친 일행은 뻐스에 올라 4박 5일의 규슈 여행이 시작 되였다. 작년에 오사까
여행길에는 일본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는 관문대교 밑으로 배를 타고서 지나 갔으나 이번에는 대교 위를 뻐스를 타고 지나   
규슈로 넘어 왔다. 영상 10도 정도의 조금 쌀쌀한 날씨에 구름이 끼여서 여행하기는 좋은 날...  첫번째 여행지인 후꾸오까에 
있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태재부천만궁,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는 유명했던 시인이자 학자이며, 철학자였던 菅原道眞(스가와라노 미치자네, 845~903)

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곳으로, 다자이후에 905년에 건립되였고,  현재의 본전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스가와라노미치자네는 왕의 친애를 받아 일찍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서 규슈의 다자이후에 

귀양을 오게 된다. 그가 죽는날 매화가지가 교토에서 규슈로 날아와 하루밤새에 6천그루나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 있다.

위의 사진 본전앞 우측끝에 있는 매화(도비우메,飛梅)라고 불리우는 꽃나무가 바로 이 전설을 가진 나무이다.             

이곳의 매화는 해마다 다른 지역의 꽃보다 먼저 봉우리를 떠뜨리는것이 유명하다. 그래서 이곳 다자이후로 들어서는   

길에 '우메가에 모치'라고 하는 떡이 유명한데, 이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도 맑아지며, 시험에 딱 하고       

붙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도 밎져봐야 본전이니 조금 달콤한 맛의 '우메가에 모치'하나를 맛있게 먹었다.               

 

 

 혼텐(本殿)앞에는 130종, 6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유명하다는데 조금 늦은 계절이라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이 곳은 아기자기 가꾸어 놓은 일본 정원과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한결 깊은 맛과 품위가 엿보이고 중후한

느낌의 건물들과 연륜이 쌓인 큰 고목들, 고풍스러운 느낌이 멋을 더해준다.
 

 

 

다자이후역에서 긴 선물가게과 잡화점이 늘어선 길을 지나면 큰 도리이(鳥居)를 만나게 되고, 그 앞에 소가 앉아있는       

동상을 만나게 된다. 신사에 왠 소 동상인가 싶긴한데, 이 소가 끄는 마차에 스가하라노미치자네의 유체가 실려 나가는데,

  이 우마차가 갑자기 멈쳐서서 꼼짝달싹 안해서, 그를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가 죽고 그를 이곳으로 좌천시키는데 가담한

인물들이 모두 이유모를 사건과 병으로 죽게된 후, 그를 모시는 텐만궁을 이곳에 짓게 된다.                                          

 

 

 

 

소 동상을 지나면, 붉은색으로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나오는데, '다이코바시'라고 불리운다. 이 다리를 지나면,     

현세와   내세를 연결한다고 해서,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곳 연못에는 거대한 거북이와 자라가 살고 있고, 큰 잉어들이 유유히 노니는 모습을 볼수있다. 
                                 

 

 

 

후꾸오까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다자이후텐만궁은 학생들의 수학여행코스로 역사를 직접 배우고

체험하는 학습장으로, 수험생 학생들의 입시철 합격을 기원하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로 유명한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시험에 합격해 달라고, 또한 성적이 좋아지도록 동전 몇잎을 던지고 각자 개인의  소원을 빌고 있다.

 

 

 학문의 신을 모시고 있는 만큼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500엔을 주고산 나무 명폐에 각자 소원을

적어서 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거나 동물상에 꽂아놓은 부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부적을 파는 태재부천만궁의 아가씨... 얼굴이 예뻐서 카메라를 들여대니 예쁜 미소를 지어준다.

 

 

 

 

 

  소쿄쿠 - 로쿠단노 시라베(六段の調べ)

출처 : 竹馬故友
글쓴이 : 오인의 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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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수도권 요지에 위치해 항상 올림픽대로나 자유로를 이용하며 보는 곳이지만 그리 쉽게 가지지는 않는 곳이다. 한동안은 행주산성 주위의 유명 음식점을 찾은뒤 산책겸 올라오는 그런 곳으로 전략 되기도 했었다. 그후 산성이 복원되고 또 성역화 되면서 이제는 제대로 된 산텅으로의 면모를 찾았다고 할 수 있겠다. 행주산성은 행주산성의 의미보다는 치마에 돌을 날라 전투의 도움이 되었던 "행주치마" 의 이미지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이 더욱 떠오르는 그런 곳이다. 행주대첩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전반 생략하고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짧은치마에 돌을 날라 전투에 기여하여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행주산성 안내도...]

행주산성(幸州山城)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56호.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 (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안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대첩문이란 현판이 걸린 행주산성 유적지 삼문...]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 백과사전에 서술되어 있다.

[권율장군 동상...]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 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한양으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뜨리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 한양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승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한양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권율장군 동상...]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 군은 권율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 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셀 수 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관 군"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관 군 - 권율 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였을 때에 큰 북을 세 번 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큰 칼을 뽑고 진두 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 졌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의 병"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의 병 -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자원한 민간인으로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훨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승 군"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승 군 - 승군은 승리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웠다. 이때에 권율 장군이 전투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여 성" 이라는 주제의 전투도...]

여 성 - 우리 군은 산성 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그 후부터 "행주치마" 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고 해설이 쓰여져 있다.

[새로 조성된 쉼터...]

[오르는 길목은 한산하기만 하고...]

[충장사 입구 홍살문...]

[삼도와 삼문의 의미를 알려주는...전에도 우리는 우측통행을...]

[충장사 삼문...]

[행주대첩 중건비의 내용이 적힌 조형석...]

[충장사 중건비...]

충장사 앞에 놓여 있는 중건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비의 뒷면에 조인영이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비문을 짓고, 이유원이 글씨를 썼다.

[충장사 중건비...]

[충장사 삼문이 활짝...]

[권율장군 영정이 모셔진 충장사...]

충 장 사(忠 莊 祠)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충장사는 권율(權慄) 장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곳으로, 원래는 행주 나루터 안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행주기공사(記功祠)가 있었으나 6.25사변 때 소실되어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 곳에 충장사를 다시 지었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 건평 842평방m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이며 사당 안에 봉안된 권율장군의 영정은 장우성(張愚聖) 화백이 그린 것이다.

[권율장군 영정...]

[삼문 옆담이 갈라져...]

[토성으로 가는 삼거리 길...]

[기감천(奇甘泉)이라 쓰인 약수터...]

[우이동에 불이났다더니 연실 물을 퍼나르는 소방헬기...]

[행주 기씨 유허비...]

[행주 기씨 유허비 안내문...]

[행주 기씨 유허비...]

[토성으로 오르는 길...]

[행주산성 토성에 대한 안내문...]

[복원된 토성의 모양...]

[계속 야트막한 토성이 이어지고...]

[또한번 급히 오르며 꺾어지고...]

[이제 정말 성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높은 토성...]

[정상부에 오르면 숭의정이...]

[행주산성 숭의정...]

[숭의정 건물 처마의 멋진 선...]

[충의정 난간에서 내려다 본 고양시 강매동 인터체인지와 창릉천...]

[멀리 북한산이 그림같이 병풍을 이루고...]

[방화대교 입구를 깃점으로 난지 하수처리사업소 건물쪽 새로 건설되는 다리가...]

[행주대첩비탑의 옆모양...]

[오래된 살구나무가 위엄을...]

[방화대교가 바로 밑으로 보이는 덕양정...]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한강 습지공원...]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방화대교...]

[덕양정에서 내려다 본 방화대교 아치...]

[덕양정에서 올려다 본 행주대첩비탑과 대첩비각...]

[행주대첩비탑과 대첩비각의 어울림...]

[행주대첩비탑 주위엔...]

[행주 대첩비탑...]

[행주대첩비탑...]

[행주대첩비탑 밑 석판에 큰글은 고 박정희 대통령것이고 글은 시석호, 글씨는 서희환쓰다. 1970년 11월...]

[행주대첩비탑에 조각되어 있는 전투도, 병사를 지위하고 있는 권율장군...]

[행주대첩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행주대첩비...]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초건비로 불리우는 한 기는 선조 35년(1602)에, 또 중건기로 불리우는 또 한 기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이다. 덕양산 정상에 세워졌던 비가 바로 이 초건비 인데,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오래 되어 글씨가 닳아 없어져 알아보기 어렵다. 현재 탁본을 대첩기념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헌종 때 다시 세운 비는 그 이전에 세운 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헌종에 다시 세운 비 는 1970년 건립된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입구에 있다.

[행주산성에 펄럭이는 순시 깃발...]

[행주대첩비탑 앞에서 내려다 본...]

[다시한번 올려다 본 행주대첩비탑...]

[앞쪽엔 행주대교가 뒤로는 김포대교가 보이고...]

[행주대교 뒤로 전호산이 예쁘게...]

매년 3월 14일에는, 행주대첩을 기념하고 당시 공을 세운 권율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행주대첩제가 열려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하는데, 일주일 늦게 찾게 되어 아쉽다. 내년엔 화이트데이를 찾을께 아니라 권율장군과 행주대첩을 생각해보는 그런날로 하루를 보내고 싶어진다.   -<끝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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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천야경...사진촬영/ 

 

 

 

 

 

 

 

 

 

 

Ethereal Glory/Frederic Delarue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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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 맹사성 묘소, 그리고 검은 소 무덤...

 

맹고불...

지난 여름 여름 휴가 길에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맹씨행단을 찾은 데 이어

초겨울, 그의 유택을 찾은 것을 보면 올해는 그와의 인연이 깊은가 보다.

(맹씨행단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 분류 <역사기행-사진>의 2008년 10월 8일의 글에

상세히 소개해 놓았으니 참조하시면 될 것 같다.)

 

 

고불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다.

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설명이 없이 가기가 조금은 까다롭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하게 설명드린다.

광주시 태전동에서 시내를 끼고 계속 상류로 차를 몰고 올라오면 직동에 이른다.

광주시내에서 직동으로 오는 버스의 종점엔 조그만 정자가 있다.

옆에는 직리쉼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그리고 맞은 편에 그럴 듯하게 지어진 한옥이 있는데 의령남씨의 사당이다..

 

고불묘소에 가기 위해서는 아래 사진의 하얀 싼타페가 있는 쪽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차가 갈 수 있는 길은 여기 까지이다. 

팻말에 0.3km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실제로는 500미터 쯤 되는 것 같다.

 

아래 철망문 옆으로 빠져 올라가면... 

 

찔레의 열매도 만나고...

 

폐농가를 지나면...

 

삼거리에 이른다.

삼거리에서는 오른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개망초 꽃은 겨울이 되면 이런 모양이 되나보다.

 

쇠사슬로 차량들의 통행을 막은 이 곳을 지나 올라가면...

 

멀리 하얀 안내판이 보인다.

으레 고불의 묘소 안내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안내판이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용되는 기우취적(騎牛吹笛 :소를 타고 피리를 불다)이 현실로 나타나는 안내판이다.

 

좀작살 나무의 열매...

 

안내판에서 오른 쪽으로 보이는 이 길의 위가 바로 고불의 묘소이다.

 

 

려말선초의 무덤의 특징인 사각의 기단석위에 올려진 봉분...

최영장군의 무덤의 형식은 그의 손녀사위인 고불 맹사성의 무덤까지는 이어져 온다.

 

 

 

 

 

 

 

 

 

세종대왕 때의 좌의정...

 

 

씁스레하게 만드는 안내판...

 

묘소 뒤에 있는 돌인데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누가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불순한 시도는 아니었으면 한다.

 

그리고 흑기총 안내팻말에서 보이는 10 미터는  30미터는 족히 될 것 같다.

 

미물도 주인의 죽음이 섧어서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는데...

흑기-검은소를 말하는 것이니 아마 전통한우의 하나인 칡소를 말함이렷다...

 

펑퍼짐한 봉분, 비석이 이곳이 소의 무덤인 것을 알려준다.

 

참고로 지난 여름의 맹씨행단 사진을 서너 점 올린다.

 

맹씨고택...

 

은행나무...

 

 

 

사당, 세덕사...

 

출처 : 보헤미안의 유토피아
글쓴이 : 月 明 居 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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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로렌스강의 '1000섬'


(Thousand Islands)



Rockport의 유람선을 타는 곳..



유람선에 몸을 싣고서..



그 유명한 Heart Island...



모습을 드러내는 Boldt Castle(볼트성)..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은 아름다운 볼트성..



120개의 방이 있는 거대한 볼트성..



볼트성의 뒷모습..



볼트성의 side view



볼트성의 뒷정원



볼트성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있는 곳에 위치한 작은 돌섬



집이 있는 왼쪽섬은 캐나다 영토, 다리를 건너 앞마당이 있는 오른쪽섬은 미국영토..



미국성조기가 있는 섬인 미국영토..



외롭게 떠있는 작은 집 하나..



집 한채도 지을 수 없는 작은 돌섬..



미국 성조기가 보이는 미국영토의 섬



마치 수중위에 지은 성같은 저택..



아름다운 미국영토섬에 있는 집..


섬위의 아름다운 저택..
천섬은 캐나다와 미국의 경계를 이루는 세인트로렌스강 위에 있는 수많은 섬들을 일컫는 지명.
그렇다고 딱 천개의 섬이 있는 것은 아니구요, 80Km의 거리에 있는 세인트로렌스 강위에 있는
약 천 팔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는 곳 .그들 섬 중에 반은 미국령이고 나머지 반은 캐나다
령에속해 있는 그런 특이한 지역.그래서 섬에 게양되어있는 국기를 보면 어느 쪽의 영토인지 
알게 되지요.
어느 섬에 지어진 집을 보면 집이 지어진 곳은 캐나다땅이고 앞마당이 있는 섬은 미국땅인 특이
하고 재미있는 집도 있다고...정말 보면 볼수록 그림엽서같이 아름다운 곳.유람선에 몸을 
싣고 바라다 본 크고 작은 섬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꿈의 섬들. 미국과 캐나다의 억만장자들의 
여름 별장들이 있는 곳. 그리고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들 그리고 언론계나 유명 호텔주인들이 
바로 이 아름다운 천섬의 주인들이라고...
강바닥 밑으로 공사를 해서 전기와 수도를 끌여들이고, 매주 오물수거를 배가 섬을 돌면서 수거해 
간다. 그곳에 살려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닌 바로 모터보트. 천섬의 우편
배달부는 모터보트를 타고 우편물들을 그 천 팔백 개가 넘는 섬들중 제일 대표적인 관광지는
Heart Island에 있는 Boldt Castle(볼트성)으로 그 당시 초특급 호텔인 뉴욕의 Waldorf Astoria 
Hotel의 주인이며 호텔 재벌인 George C. Boldt가 중세의 성모양의 건축양식으로 1900년도에 
그의 부인 Louise에게 사랑의 정표로 짓기 시작했다.
6층의 건물로 120개의 방이 있는 이 성은 완공 6개월을 앞두고 사랑하는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904년에 모든 공사가 중단이 되었고 그 이후 Boldt씨는 그 섬에 다시는 돌아오지 
아니하고. 미완성으로 남은 Heart Island의 Boldt Castle!
출처 : 雲谷: 운곡
글쓴이 : 연주하는사장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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