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눈물/이난영

 

 

 

목포의눈물 이난영

 

오늘은 목포하면 떠오르는인물 이난영,이난영하면 떠오르는 단어,목포의 눈물

(목포=이난영=목포의눈물 )이라는 공식이성립하는데 이는 대한민국 어느지역에서도 성립하기힘든

목포만이 가지고있는 정서요 문화요 또한 대한민국국민의 깊은 인식이다.

이난영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수로서 대성공을 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이난영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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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은 목포 양동의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잠시다녔는데

이난영의 아버지는 술주정이심해 아버지의 폭압에 못이겨 집을 나가 제주도로 떠난것으로 구전된다.

난영이라는 이름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은예명이고 본명은 옥례(玉禮)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호적과 학부에는

옥순(玉順)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호적에 올릴당시 기록원이 실수한것으로 보인다.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당시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1학년과3학년때 재수를했다는 기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을알수있고 결국 4학년때 자퇴를 하고 제주도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갔다고한다.

 

이난영 노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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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이난영은 극장을 운영하는 어느 일본인집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생활했다고한다.

그의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않음을 안 집주인이 당시 제주도로 순회공연을 온 극단에게 추천해서 막간가수로 출연을 하게된것이 첫 계기가 되었다. 이후 태양극단의 정식멤버가 되어서 무대가수로서 출발하게된다. 이후 이난영이 가수로서 성공한 것은 오케이 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의 만남때문이다.

 

백설희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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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극단이 일본 대판으로 공연을 갔는데 이때 이철사장 역시 레코드기획을 위해 그곳에 와있었던것이 인연이 되어 정식으로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되었다고한다.

흔히 '목포의 눈물'로 데뷔를 한것으로 알지만 그 이전에 1933년 불사조가 히트를 했고 1934년에는 '봄맞이'라는 곡이 있었고 1935년 '목포의 눈물'이 세번재 히트곡인 셈이다.

 

그 시대상황과 딱 맞아떨어진 목소리였으며 아무나 흉내내거나 따라할수없는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한다.

이난영은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관한 노래를 불러 자신뿐만아니라 고향인 "목포"를 유명하게만들었다.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제1회 향토찬가]공모에 당선되는데 이가사에 손목인의 작곡이 더해져 목포와 관련된노래를 목포의 작사가 문일석이 짓고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이 불러 더큰인기를 불러일으킨것이다.

 

목포는항구다 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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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은 한국 대중가요사상최고의 히트곡으로 등장했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이난영이 목포를노래한 또 다른 대표곡으로 1942년에 발표한 '목포는 항구다'를 들수있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것으로 더 의미가 있다.이외에도 목포와 관련된'해조곡' 을 비롯 목포를 염두에 두고 '항구,바다'등을 소재로 숱한 곡을 발표하였다.

 

이난영은 1937년 천재적인 음악가 김해송과 결혼을 한다. 본명은 김송규로 평안남도 개천출신이며 동경상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김해송은 기타연주자 겸 작곡자였고 직접 가수로도활동했다. 지금의 뮤지컬의개념을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고있다.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작곡자로 성공할수있게되었다고한다.

 

김나니 해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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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이 작곡한'다방의 푸른꿈'은 국내최초 블루스곡이라는 평가를 받기도하며 최초의 뮤지컬 극단인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치기도하였는데 화려한 재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춘 김해송에게는 항상 많은 여성들이 뒤따랐고 그로인해 이난영은 말못할 고충을 겪어야만했다.

 

그나마6.25가 발발한후 남편 김해송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는데 납북후 총살되었다고한다.

이난영과 김해송은 슬하에7남매를 두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 셜리번쇼에 출연하기도했다. 지금도 후손들이 LA에 살고있다.1962년 이난영은 자식들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가서 한1년정도 생활을 하지만 적응을 하지못하고 다시고국으로 돌아왔다.

 

열일곱 낭랑  김수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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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의 말년은 매우불행한데 남편을 잃은 이난영에게 힘이되어준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와 부부사이를 유지하고살았다.  그러나 두사람의 관계에도 사연이 많은데 원래 남편인 김해송에게 여자가 생겼는데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로 참으로 기구하게도 남인수의 원래부인이 바로 자신 남편의 여자였던 '김은하'였던 것이다.

 

남인수와 이난영

 

이렇게 두사람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지독한 악연을 갖게되었는데 이난영이 불치병에 걸린 남인수를 지극 정성으로돌봤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남인수가 세상을 떠날때는 이난영을 멀리하고 원 부인인 '김은하'에게 속죄를 했다고 한다.

이런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 끊긴다. 이난영이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자를 자신의 아들이 장모로 모시고 살게된것이다.

이처럼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노랫말처럼 이난영은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것이다.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난영은1965년 4월11일 새벽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주변에 술병이 뒹굴고있는걸보고 한때 이난영이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된상태에서 술을마신것이 쇼크사로 이어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같다.

 

유달산(230m,목포),어민동산~노적봉

 

장례식에는 이난영의 자녀들이 참석을 못했는데 나중에 전해들은 바는 아버지가 납북되었기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면 다시 비자를 받을수없는 상태라 올수없었다고한다.때문에 사후5년이 지난1970년에 귀국공연을 한후 비로소 묘소를 찾게된다. 경기도 파주시에 무연고로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 등록되었던 이난영의 묘는2005년에 이난영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유가족과 묘소 이장문제에 전격합의하고 2006년 그녀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나오는 삼학도로 수목장을 통해 이장하게되었다. 사후 40년만에 고향의 품에 돌아온것이다.

 

목포이난영 가수의 공원

 

또 유달산 중턱 생가터에는 이난영 소공원이 조성되어져있는데 일부몰지각한 시민들이 이난영상에 낙서를 하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기도해 마음을 아프게한다. 1969년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졌는데 대중가요 노래비로는 전국에서 처음있는일이라고한다. 유달산에 가면 언제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있다. 재미있는건 노적봉바로앞에 사람들이 쉬어가는 휴식공간이있는데 관광오신 우리의 어머니들 노랫가락에 맞춰 관광춤(?)을 부지런히 추고계신다. 불멸의 가수이난영,여자로서 불행한 인생을 살다간 이난영, 잠시 그 가슴을 헤아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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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남인수-낙화유수1942년(1*2*3) [Nam In Soo.南仁樹.본명 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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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강문수] 최창수(崔昌洙)의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강문수(姜文秀)이다.일설에 의하면,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이 최창수(崔昌洙)였으며,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이 그의 조카라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다.

 

1935년 말에서 1936년 초 경에 시에론(Chieron)레코드사의 가수로 선발되었고, 1936년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1937년 오케(Okeh)레코드사로 이적,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1943년까지 전속가수로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등 130여 곡을 발표했다. 한편 1938년 발표된 「기로의 황혼」은 치안방해의 명목으로 가두연주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를 비롯해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감독 허영)의 동명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등을 불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음반제작이 중단된 1944년 이후로는 약초(若草)가극단 등에 소속되어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성난 아시아[怒りの亞世亞]」에 출연했다.

 

광복 이후 음반 제작이 많아,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음반 제작이 재개된 1947년 이후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1948년에는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9년 발매된 「여수야화」의 경우 정부와는 다른 입장에서 ‘여순(麗順)사건’을 다루어 판매금지를 당했다.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다.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회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다수의 곡을 발표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6월 26일 사망했다.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진주강씨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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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jB-33X5i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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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애환 깃든'바위고개'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입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고개이지만,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모든 국토가 바위고개입니다.”라고...

 

그래서 작사자 이서향은 <바위고개> 가사에서 <무궁화>를 조선을 상징한다고 금기시되던 시절이라 이것을 <진달래>로 바꾸고, <일제 식민지 시절의 핍박받은 국민들>은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던 머슴>으로 둘러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지명 중에 바위고개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중 낙동강변의 칠곡군과 달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없어진 작은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바위고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능선의 허리가 잘려서 고개는 없어지고 신작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위고개에 얽힌 가슴아픈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하늘에서 장차 우리나라에 크게 쓰일 장수 한 사람을 이 바위 속에서 키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잃합방과 더불어 일제의 마수가 여기까지 뻗치게 되었습니다. 일본관헌이 전설을 듣고 이 바위고개에 와 보니 듣던대로 낙동강 물줄기를 한 눈에 굽어보고 있는 이 고개와 바위가 범상치 않게 보였습니다.

 

일본 관헌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바위 한복판을 내려치자 바위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면서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고개 능선이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거의 다 자란 아기장수가 가슴에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장수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는 온 산과 바위를 물들이고 아래로 흘러내려가 낙동강 강물까지도 핏물로 붉게 물드렸습니다. 한편 아기장수가 죽을 때 건너편 바위에서는 한 마리 흰 용마가 뛰어나와 온종일 울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자 아기장수의 피로 물들었던 그 산에는 여기저기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진달래 꽃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kbsartsong)

 

◇ 내 어머니의 노래 '바위고개'/고정일

 


어머니의 노래를 들은 건 딱 한번이었다. 50년도 더 흐른 지금도 박꽃 같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 노래는 내 안에서 깊고 쓸쓸하게 울린다. 산내들과 온 마을이 눈 속에 잠긴 외갓집에서 보내던 그 겨울. 다섯살이던 나를, 마을 아이들은 ‘서울뜨기’라고 놀려댔다. 나는 그만 서울 집에 돌아간다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오산 읍내로 가는 산고개를 달렸다.

“정일아, 정일아!” 지쳐 헐떡이는 나를 뒤쫓아 부둥켜 안는 엄마의 눈엔 물기가 배어났다. “애들이 네가 귀여워 그러는 거야. 엄마가 까치밥 볶아줄게.” 산등성이 햇살 바른 곳엔 겨울잠 자며 한가득 열매를 단 까치밥풀이 무성했다.“까치가 겨울에도 통통하고 예쁜 건 이 까치밥을 먹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수수이삭보다 작은 자주색 까치밥을 훑어 앞치마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나를 업고 망월리 산모롱이를 내려가며 자장가처럼 노래를 불러줬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허공으로 잔잔하게 흩어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엄마의 노래 가락은 등에 기댄 내 몸을 애잔한 울림통으로 만들었다. 엄마의 하얀 목을 감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몇년 뒤 나는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한국전쟁과 1.4 후퇴... 온 마을이 포화로 무너지고 불타는 아비규환 속에 나는 애타게 엄마를 불러댔지만 피섞인 잿더미만 쏟아져내렸다. 타다 남은 옷조각 위에 어머니와 동생들 뼈를 추려 담는 아버지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 자루도 채 되지 않는 그것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끝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열 여섯살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와 스물여섯에 동족상잔의 제물이 되신 어머니. 당신은 그 뒤로 내 꿈속에서 살아온다. 한 낮도 저녁도 아닌 풍경이 눈 앞에 부유하듯 떠오른다. 바람 한점, 소리 한점 없다. 모든 것이 희부윰하게 가물거린다. 저만큼 망월리 산모롱이를 한 여인이 걸어간다. 쪽진머리 옆으로 도톰한 귓밥, 동그스름한 볼, 반달같은 이마, 상큼한 두 눈, 부드럽게 솟은 콧망울... 아, 아, 엄마...!

말은 언제나 목구멍에서만 맴돈다. 하얀 얼굴의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볼에 얼굴을 부빈다. 둘의 뺨에는 뜨거운 회한과 그리움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뭔가를 말하려던 엄마는 내게 손을 내민 채 슬픈 얼굴로 멀어져가고… 노래 소리만 아득히 귓가에 남는다.

언덕 위에 핀 꽃 진달래 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필자: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 가곡 '바우고개'(원래 곡명) 작사자는 내 남편

- 월북자 이유로 금지곡 될까봐 숨겨와
- 월북 연출가 이서향씨 아내 백난영씨가 밝혀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가곡'바위고개'1절)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대표적인 가곡 가운데 <바우고개>는 그 동안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작고)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작사자는 월북한 극작가겸 연출가 이서향(李曙鄕 본명 榮秀, 1915∼?)이 작사한 것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 이문학회 마루에서 포즈를 취한 백난영 여사

 

이서향의 아내 백난영(白蘭英 86)씨는 최근 발행된 이문학회(以文學會) 회보 <이문회우> 제 5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바우고개>는 남편이 14세이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 지은 것으로, 훗날 남편의 친구인 이흥렬 씨가 작곡해 주었다는 얘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이서향과 이흥렬 두 사람은 원래 동향(함남 원산) 출신으로 어릴적 친구 사이였다.

<바우고개>의 작사가가 이서향에서 이흥렬씨로 뒤바뀐 것은 이서향이 월북한 이후부터다. 이후 출간된 모든 음악서적에는 <바우고개> 작사자가 이흥렬로 둔갑돼 있다. 그러나 해방 전에 출간된 각종 자료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엄연히 이서향으로 나와 있다.

한 예로 1934년 도쿄(東京) 상문사(桑文社)에서 간행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가곡 <행복>과 함께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서향(曙鄕)으로 분명히 나와 있으며, 또 1939년 6월 8∼9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全) 조선창작작곡발표 대음악제> 팸플릿에도 마찬가지로 나와 있다.

 

▲ 1934년에 간행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曙鄕으로 나와 있다.

 

음악계의 한 인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얘기였으나 아무도 이를 내놓고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사안"이라고 털어놨다. 백 여사는 "한동안 월북작가들의 이름조차 거명할 수 없었던 시대여서 이같은 사실을 밝힐 수 없었지만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 동안 '빨갱이 마누라'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발벗고 나서서 밝히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 니혼대(日本大)에 유학하여, 국문학과와 예술학과를 졸업한 이서향은 귀국 후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의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한 이서향은 6·25 당시 서울에 내려와 부인 백 여사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 일로 백 여사는 나중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자신이 <바우고개>의 작사자임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이서향의 가족을 설득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백 여사와는 동서지간이자 이서향의 친동생인 음악가 이호섭(李瑚燮·전 중앙대교수. 작고)의 부인 이화용(李和蓉, 80 경기 고양시 화정 거주) 씨는 "남편의 국민학교 시절 음악선생이었던 이흥렬 씨가 생전에 더러 집으로 찾아와서 (바우고개 작사 문제와 관련)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이 씨는 "아마 (바우고개가) 금지곡으로 낙인찍힐 것을 이흥렬 씨가 두려워했던 것 같았다"며 "그러나 이제는 원작자를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이흥렬 씨의 아들인 이영조(李永朝·58)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은 "이같은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는 "사실일 경우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1940년 4, 5월경 이서향과 찍은 약혼사진

 

남편이 월북한 이후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마저 꺾여버린 백 여사는 "남편 생각을 할 때마다 '이런 억울한 일도 있나'싶어 회한에 사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白麟濟) 박사의 맏딸로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백 여사는 미군정 시절부터 탁월한 통역(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온 재원으로 한동안 숙명여고 교사를 지냈으며, 이후로는 유명인사들의 영어 개인교수를 하며 지내왔다.

지난 해부터 백병원이 세운 경남 김해시 소재 인제대학교 생활관에 머물면서 해외 입양아 모국유학생들의 모국교육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슬하에 1남(영균·미국 LA거주·공인회계사)을 두고 있는 백 여사는 자신의 회한의 인생 회고기를 <이문회우>에 연재해 오고 있다.

(이문학회:http://cafe.daum.net/imoon, 전화:766-8269)
(원문: 오마이뉴스, 2001.12.11 18:24 정운현 기자(jwh59)

 

◇ 작곡자 이흥렬(李興烈 1909~1980)

작곡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 1937년에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하였다.

 

널리 알려진 곡으로 <봄이 오면>, <바위고개>, <자장가> 등이 있으며, 가곡, 동요 등 400여 곡을 작곡했다. 서라벌예대 교수, 숙명여대 음대교수를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9년과 1961년에 대한민국 문화상과 서울시 문화상,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 등이 있다.

(출처: 야후백과)

 

 

 

 

 

 

 

 

바위고개 - 작사 이서향 작곡 이흥렬  

 

이흥렬을 가리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깨끗하고 담백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곡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가곡 [바위고개]는 그가 25세 때 만든 작품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조국 산천을 바위고개로,

무궁화꽃을 진달래로 비유한 민족의 울분을 담은 가곡이다.

 

 

 

 

이흥렬 [李興烈 1909~1980]

피아니스트·작곡가·음악교육가.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함남 원산(元山)

주요수상 :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통령문화훈장 수상

주요저서 : 음악의 종합연구

주요작품 : 바위고개,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함경남도 원산(元山) 출생.

1931년 일본 도쿄음악대학[東京音樂大學]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

1957년까지 원산광명학교·경성보육학교 배재중학·풍문여자중고등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였다.

그사이 1934년에 처녀작품집 [이흥렬작곡집]을 출간하였으며,

이 중 [바위고개]는 일제하 민족의 비운을 노래한 곡으로

그 애틋한 가사와 가락으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1957∼1980년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있으면서 1957∼1964년 고려대학교 촉탁교수,

1963∼1974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969년 한국작곡가협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통령문화훈장, 고마우신 선생님상·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작품에는 이 밖에 [어머니의 마음][꽃구름 속에] 등 다수가 있고,

작품집에 [꽃동산][너를 위하여(제2작곡집)]

[가서 나 살고 싶은 곳(제3작곡집)] 저서에 [음악의 종합연구] 등이 있다.

 

 

 

 

<바위고개>에 대한 해설

 

옛날 어느 산골에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고 있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아래 윗집에서 너 나 둘이 하며 소꿉놀이 하던 동무였는데,

이제 나이 들어 이성을 그리워할 때가 되자

갑순이는 건너 마을 공장에 나가고, 갑돌이는 마을 근처 산에서 나무를 하였다.

갑순이가 공장에서 돌아올 때면 갑돌이는 바위고개 위에 숨어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나란히 바위고개를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날마다 되풀이 되는 숨바꼭질에도 두 사람은 마냥 재미나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돌이는 머슴살이 하러 고향을 떠나고 갑순이는 혼자 남아 계속 공장을 다니게 되었다.

혼자 돌아오는 고갯길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구나!

보고싶은 갑돌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순이의 고운 얼굴엔 어느덧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마루 넘어올 때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혹시나 하고 되돌아와

바위 뒤에 수풀 뒤에 갑돌이를 찾았으나 노루 새끼 한 마리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때 갑순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화사하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이었다.

고개 위에 핀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꺽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꽃은 지고, 또 피고, 세월은 흘러

갑순이도 시집갈 나이가 되어 고향을 떠나 머나먼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한편 갑돌이는 갑순이를 다시 만날 생각에 10년을 일주일처럼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였는데,

이제 그 보람이 있어 장가밑천도 마련하고 대갓집의 집사가 되어

드디어 갑순이를 데리러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바위고개 위에서 꿈에도 그리던 갑순이를 기다리며 꺽고 또 꺽은 진달래는 어느덧 한 지게나 되었다.

그 가운데 예쁜 것만 고르고 골라 한 아름 안고 있는데 동네 친구 하나가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 갑순이의 소식을 듣게 된 갑돌이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 멍하니 정신을 잃고 바위에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이 노래는 어찌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만 했던 불쌍한 청춘남녀를 위한 애틋하고 슬픈 노래인 것이다.

 

 

바위고개 이흥렬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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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도야 울지마라

 

 

 

 

홍도야 우지마라-악보와 노래

사랑에속고돈에울고

연극작품

1936년 임선규(林仙圭)가 쓴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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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홍도야 우지 마라분야연극유형작품성격희곡창작년도1936년작가임선규시대근대성격희곡창작년도1936년작가임선규

정의

1936년 임선규(林仙圭)가 쓴 희곡.

키워드

내용

일명 「홍도야 우지 마라」으로, 4막 5장으로 구성되었다. 1936년 7월 동양극장(東洋劇場)의 전속극단인 청춘좌(靑春座)가 공연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으며, 동양극장의 주된 레퍼터리였다.

임선규는 박진(朴珍)·이서구(李瑞求)·송영(宋影)·김영수(金永壽) 등과 함께 동양극장의 전속극작가였는데, 이들은 관객층을 분석하고 연기자의 성격에 맞추어 쓸 것을 요청받았다.

특히, 동양극장의 주요 단골관객인 여성층과 기생층의 비위에 잘 맞추어 쓰는 것이 신파극의 성공을 결정지었다. 이 작품은 한 기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화류비련(花柳悲戀)의 멜로드라마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자랐는데, 여동생 홍도는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해 기생이 된다. 홍도는 우연히 오빠의 동창생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명문가의 아들인 홍도의 애인은 명문인 박대감집 딸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홍도를 사랑한 나머지 동거생활로 들어가고, 그의 집안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완고한 그의 부모도 두 사람의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홍도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남편이 유학을 떠나자 시어머니는 기생며느리를 박대하고 내쫓음으로써 극적 전환을 맞는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음모를 꾸며 며느리를 부정한 여자로 만든다. 그때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홍도는 순사가 된 자기 오빠와 함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시댁으로 간다. 그러나 음모자들인 시댁 식구와 남편은 그녀를 부정한 여자라고 박대하고, 남편은 전 약혼녀와 결혼하려고까지 한다.

너무 억울하고 분노가 치민 홍도는 순간 제 정신을 잃고 전 약혼녀를 과도로 찔러 살인을 하게 된다. 그때서야 그녀의 결백이 밝혀지면서 남편도 오해를 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순사인 오빠에 의해 손목에 수갑을 차고 끌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진다.

이 작품은 봉건도덕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한 전형적 신파극이며, 고등신파(高等新派)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동양극장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상업주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한국현대희곡사』(유민영,홍성사,1982)
  •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서울대학교 출판부,1966)

집필자

집필 (1995년)유민영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랑에속고돈에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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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ㅡ 모윤숙

 

 

호국영령들께 바치는 노래 - 비목(碑木)비목 - 작시 한명희 / 작곡 장일남 /노래 신영옥

 

https://youtu.be/ew0G09K1Ix4

비목(碑木)의 유래

 

매년 6월이 되면 생각나는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비목(碑木)”은 우리 가곡이다.

"비목"은 1969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한명희는 군 복무시절 강원도 화천 백암산 부근에서 십자 나무만 세워져 있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의 비목을 보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장일남이 곡을 붙인 우리 가곡이다.

 

6.25전쟁 휴전 후 7년이 되는 1960년에 현제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백암산(1179m) 계곡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배속 되여

군 복무중이였던 소대장 육군 소위 한명희(당시 25세)는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요량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뼈와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나무에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나무에 박힌 총알과 파편 때문에 망가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순찰 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망가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슨 철모나 무기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시 1951년 7월의 우리 국군과 중공군의 '백암산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이다.

 

 

 

그 후 어느 날 한소위는 순찰중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총의 주인공이라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였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 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가 산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당시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 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붉은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 산새 소리가 산간의 정적을 깨는 어느 한적한 해질녘 무렵,

한소위는 잡초 우거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자 칙칙한

푸른 이끼에 덮인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한다.

오랜 세월 동안 풀 넝쿨에 휘 감겨 썩어가는 십자형 비목을 보고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무더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무덤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러운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의

무덤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바로 병사들과 함께 무덤을 손질하고 십자가 비목을 다시 새우고

비목에 철모를 얹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 군 복무를 마치고 TBC(동양방송) 음악부 PD로 근무하던 어느 날,

그때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 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머리속을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 산 골짝이에 뒹굴고 있던 녹슨 철모와 이끼 덮인 돌무덤,

 

무덤 머리에 꽂혀있는 십자가 비목과 그 옆을 지켜 섰던 새하얀 산 목련이 떠올랐고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이름 모를 돌무덤의 주인이 자기 또래의 젊은이가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 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 목련을 주인공 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순찰 중에 대원들이 길에서

잡아온 수놈의 궁노루(사향노루)의 짝 잃은 암놈이 달빛이 쏟아지는

매일 밤마다 낭군을 생각하며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깊은 산속을 메아리치면 대원들도 잡아 온 것을 후회하면서

함께 울고 온 산천이 오열한 일들의 생각이 떠올라서

노래 가사를 작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노래로

온 국민이 애창하게 되었고 특히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우리 가곡이다.

*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백암산이 가까운 평화의 댐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곡인

"비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에 ‘비목공원’을 조성하고 비목탑과 비목 노래비를 세웠다. 그리고 이 비목공원에서 1996년부터 매년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젊은 나이에 순국하신 호국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평화의 댐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 행사에

비목 작곡가인 장일남 선생도 참석했다고 한다.

 

 

*작사가 한명희 선생은 1939년 생으로 올해 82세. 제대 후에

TBC PD로 근무하다가 1975년 방송국을 사직하고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작사 활동을 하였고 19년간 교수로 재임했던 서울시립대학에서는

2004년 정년퇴임했고. 그 후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한편, 장일남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6.25 때 격전지 철원에서

전투경찰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한명희 PD가 만든 ‘비목‘의 가사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즉석에서 멜로디를 붙였다고 한다.

장일남 선생은 한양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오페라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으며 알츠하이머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6년 9월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https://youtu.be/_oJPCVzQ_TM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 윤 숙

-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 {풍랑}, 1951)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산 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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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D5opKQHKs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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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GtB4hGg9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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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숙 - 숨어 우는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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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K-DbbpKl4Q

이소라 - 바람이 분다

 

잔잔하면서 허스키한 이소라의 목소리가

가을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페퍼님들도 들어보세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앞에서

서정적인 윤도현의 가을노래.

https://youtu.be/dIY6y5f98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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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KXop61JfpU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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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ffWskFDxkQ

[AUDIO] 허공 - 조용필 | 30주년 기념 PART

허공 - 조용필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허공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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