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OFuZkTJ79M

옆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그대 숨소리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굳이 이름을 말씀해

주실 것도 없습니다


주소도 알려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나의 이름을

알려하지를 마십시오


주소를 묻지도 마십시오

이름 없이 주소 없이 그냥

 

곁에 앉아계신 따스함 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와 나는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와

나의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우리는 황홀합니다


그리하여 인사없이

눈짓 없이 헤어지게 됨도

우리에겐 소중한 만남입니다

소중한 만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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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있다.

 

그리워 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피천득 / 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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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 법정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버릴 수 있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로 다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얻지 못하니
이것이 너와 내가 숨 헐떡이며 욕심 많은 우리네 인생들이
세상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라 하지 않더냐.

 

사람들마다 말로는 수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린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마음속에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려야만 하는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더 채우려 한단 말이더냐.

 

사람들마다 마음으로는 무엇이든 다 채우려고 하지만
정작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몸 밖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허울좋고 게걸스런 탐욕뿐일진데.

 

사람아..
그대가 버린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 또한 그 무엇이었단 말이더냐.

얻는 것이 비우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 얻는다 하였거늘
무엇을 얻기 위해 비운단 말이더냐.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끈적거린 애착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불만족스러운 무거운 삶뿐인 것을
비울 것이 무엇이며 담을 것 또한 무엇이라 하더냐.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다 무거운 짐인걸..

 

사람아 무엇을 비웠느냐

 

<세상 이런> 절절한 모성애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강아지는 출산 직후 약 7일 정도는 새끼 강아지 옆에 껌딱지처럼 항상 지키면서
새끼 강아지들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케어해주곤 합니다.
하룻동안의 식사시간 혹은 배변시간을 제하곤 24시간 쉬지도 않고 새끼들을 돌봅니다.

또한 식사, 배변을 마친 뒤에는 새끼들 곁으로 가는데 갓 태어난
새끼들 곁으로 돌아갈 때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살짝 거리를 두고 누워서
힘을 다해 기어다니는 새끼들을 지켜보곤 합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이유는 어미견이 곁으로 돌아온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어미에게 다가오는 새끼 강아지들을 행여 깔아 뭉갤까를 염려하여 이를 피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출산 후 어미견들은 늘 새끼들을 지키기위하여 예민해져 쉽게 흥분하는데
주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새끼들을 밟아서 큰 부상을 입힐 수 있으므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 시기에는 집에 낯선이를 들이면 안되며 함께 거주하는 가족일지언정
막무가내로 새끼들이 있는 집을 들여다보거나 다가가서 만지는
행위를 자제해주셔야 합니다.

또한 가족들 사이에도 강아지를 돌보는 이를 한명으로 합의를 봐서
갓 낳은 새끼들이나 어미견을 돌보는 사람은 1명만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새끼 강아지들이 자주 다른 이들에게 눈에 띌 경우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기곤 합니다.
이 행동은 동물원에서도 자주 보이는 행동으로써 맹수들의 경우
위험하다 판단이 된다면 새끼를 먹어치우는 행동까지 보이기 때문에
행여 안좋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출산을 마친 어미견들은 자신이 잠을 자는 시간 외의 시간에는
끈질기게 새끼들을 핥아줍니다. 뿐만아니라 새끼강아지의 분뇨까지 먹어 치웁니다.

이 행동은 새끼가 배설을 마친 뒤에 나중에 먹는 것이 아니라
어미개의 혀로써의 자극으로 배설을 촉진 시켜 배뇨를 하는
과정안에서 핥아먹게 되는 것 입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종종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어미견과 떨어져
인공포유를 하게됐던 새끼들은 배설을 하지 못하여 위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 위험을 방지하려면 탈지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어미의 혀를 대신하여
자극을 줘야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복부를 살살 문질러주는 것이 있습니다.

어미견이 새끼 강아지를 핥아줄 때 유심히 관찰해보면
핥아줬던 새끼를 다시금 핥아주거나 핥아주지 않은 새끼가 있다거나
하는 실수는 없는데 이 때 짐작하길 냄새로 새끼를 구별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출산 직후의 어미견은 새끼의 태반을 먹고 분뇨를 먹기 때문에 위장에
많은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소화하기 쉽게 나온
사료를 준다거나 영양제, 우유, 계란, 생선등을 첨가해 배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후 새끼 강아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 젖을 먹는 양이 늘어날 경우
식욕이 왕성해지기 때문에 사료의 양을 늘려줘야 합니다.
또는 아침과 저녁 외, 낮에 한번씩 유동식을 주며 조절해주는 좋은 방법도 있습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새끼가 생후 2주 정도 지나면 어미견은 이전과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새끼 강아지를 집에 두고 장시간 외출은 기본이고
새끼들이 지내는 집에 일절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을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새끼 강아지들은 배가고파
집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어미견이 새끼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뒷다리에 힘이 어느정도 붙어진 새끼 강아지들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함으로써 걷는 방법을 배울 때 어미견은 낯선 이가
오는지 경계하며 주위를 살핍니다.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

출산 후 한달이 지나면 젖을 떼는 시기가 오는데 이시기에
어미견은 식 후 30분 쯤에 토를 합니다.
이는 어미견에게 질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새끼 강아지가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먹이를 주려는 본능입니다.
이를 모른 채 새끼강아지들에게 먹이를 또 따로 챙겨준다면
과식의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귀여운 새끼강아지들과 이를 낳은 어미견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발짝 물러서
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반려견에대한 예의 입니다.



[출처] 구래동 동물병원ㅣ강아지에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작성자 김포 힐동물의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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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6

국내여행

2020. 11. 4.

충남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광덕산 광덕사(廣德寺) 호두나무

천안 광덕 광덕사는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공주 마곡사에서 30분 거리인 천안 광덕사는 10년 만에 찾는 곳이다.

사찰을 자주 찾는 이유는 고즈넉하고 조용하고 주위 풍경이 아름답고 사찰 앞에는 먹을거리가 많아서 절을 찾는다.

광덕사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우리나라 최초 호두나무

일주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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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pC9IfpOor8

 

 

https://youtu.be/gFdr3QHb_IM

 

 

https://youtu.be/LHI_zAttj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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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불스님 추천 1 조회 25 20.10.02 05:07 댓글 4

 

 

 

절에가면 비사리 구시 (통나무를 파네어 밥을 담았든 큰 도구)

광주에 숲 해설사로 계시는 강영란 선생님 께서 송광사의 비사리 구시 와 관련된 얘기다.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여윈 할머니가 아들 며느리 손자 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저승 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으로 간 할머니는 먼저온 많은 사람들이 염라대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광경을 보게 됬다.

 

염라대왕은 사람들에게 송광사를 다녀 왔는지 묻고 예 라고 답하는 이들에게 비사리구시 크기가 얼마나 되는 지를 물었지만 송광사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 대부분은 답을 못해 저승으로 보내 졌다.

마침네 차래가 되어 염라대왕 앞에서 할머니는 송광사에 초파일 에도 가고 보조국사 제사 날에도 가보고 해서 비사구리도 여러번 보았지만 재어 보지를 않아 정확한 크기를 말할수 없다고 하자 염라대왕은 정직 하다고 칭찬 하면서 좀더 살다가 오라고 했다.

 

할머니가 눈을 뜨니 죽었다고 난리를 떨던 아들은 감짝놀랐고 할머니는 자초지종 비사리구시 의 크기를 묻든 염라대왕 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길로 할머니와 아들은 송광사로 가서 비사리구시의 크기를 쟀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길이가 17자 높이가 3자 너비가 4자라고 알렸지만 일주문을 나서자 마자 할머니는 금방 잊어먹고 다시금 아들에게 묻곤 했다 하는수 없이 아들은 비사리구시의 길이 높이 넓이를 명주실로 각각끊어 할머니 주머니 속에 넣은후 나중에 염라대왕 이 물으면 이명주실을 꺼내서 길이와 높이 넓이가 요만큼 된다고 말씀드리라 했다.

 

할머니는 그후 천수를 누렸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주변의 많은 노인들은 비사구리를 젠 명주실을 넣은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후 송광사를 찾는 노인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비사리구시에 얽힌 염라대왕과 할머니 이야기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윤달 을 맞아 삼사 순례를 하고 생전 예수제도 지낸다.

직장 때문에 삼사 순례도 못가고 생전예수제도 올리지 못한 불자도 만을 것이다.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된다.

믿음이란 알고 보면 막연한 것이다.

부처님을 잘 아는 것과,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물의 맛은 마셔 보아야 알수 있다.

그와 같이 현재에 체험하는 모든 현상들이 다 불법이다.

 

현상과 현실을 부정하고 부처님을 믿는 것은 무명이요. 어리석음이다.

진리를 아는 것도 중요 하지만, 진리와 함께 살아갈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 가르침이 삶속에 녹아 내려야 진정한 믿음이 된다고 본다.

믿으면 안심이 되지만, 수고(실천) 하고 노력(봉사)하지 않은다.

믿는 다는 것은 쉽다.

맹목적으로 믿으면 위험하다.

현실을 부정하고 현재를 떠나서 찾는 것은 맹목적의 맹신이다.

 

큰 절마다 가면 가람 모퉁이에 길게 누운 나무통이 비사리구시다.

절을 찾아서 절밥을 먹으면 착해야 겠다고 자신을 생각하게 한다.

대중의 모든 밥을 나무통에 퍼서 큰 스님 작은 스님 구별 없이 나누어 먹는 뜻이 담겨 있다.

 

왕은 백성 위에 군림 하지만

부처님은 중생과 함께 존재 하는 평등함을 가르치는 의미가 담긴 비사리구시다.

늘 함께 있는 자성 부처를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 집에서 직장에서 인터넷 법당을 통해서 자기을 점검하고

기도 하라는 말이다.

바른 공부란"

자기를 잊어버리지 않은 공부이다 .

향불선원 /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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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 추천 1 조회 13    20.10.03 10:09 댓글 2

 

 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이미 예견되었던 물음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부처’님이나 ‘보살’들에게 절을 하지 말라 하십니까?』

이에 ‘달마’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천마(天魔)나 파순(波旬), 아수라(阿修羅) 등이 신통을 나투어서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짓고, 갖가지로 변화했기 때문이니,

이는 외도(外道)인지라, 모두가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란 ‘자기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밖에 있는) ‘부처’에게 잘못 절을 하지 말라.

‘부처’란 ‘신령한 깨달음’(靈覺)이니, 근기 따라 중생을 제접(提接)하고,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박이고, 손발을 움직이고 하는 것 등이 모두가 자기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之性)이니라.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道)요,

‘도’가 곧 ‘부처’이니, 이 ‘부처’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또한 말하되, 「‘본래 성품’(本性)을 보는 것이 이 ‘부처’라」고 하시니,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면 ‘부처’가 아니니라.

설사 천경만론(千經萬論)을 설할 수 있어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일 뿐이요, ‘불법’은 아니니라.

‘지극한 도’(至道)는 깊고도 그윽하여 말로는 이해할 수 없나니,

경전으로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되느니라.

‘성품’을 보면 곧 ‘부처’이니, 이 ‘성스러운 본체’(聖體)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느니라. 모든 말씀이 다 ‘성인의 마음’으로 좇아 일어난 작용인지라,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空)하여서, ‘이름’이나 ‘말’로는 미칠 수 없거늘,

십이부경(十二部經)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고 증득하고’(修證) 할 필요가 없고,

‘도’는 빛깔이나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미묘하여 보기 어렵느니라.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물의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나니,

따라서 남을 향해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라.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으며, 그 밖의 ‘사람과 하늘’(人天) 등의 무리는

도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므로 ‘겉모양’에만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일이나 형상이나 모든 법에 집착하여

외도에 떨어지느니라. 만약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줄 알면 마땅히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근본 성품’을 보면 십이부경이 모두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이 오직 이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契合)하여 알면

교법(敎法)이 무슨 소용이리요?

‘지극한 이치’(至理)는 말을 떠났는데, 교법은 다만 이 말일 뿐이니,

실로 ‘도’가 아니니라. ‘도’는 본래 말이 없나니, ‘말’은 이 허망일 뿐이니라.

만약 꿈속에 누각이나 궁전, 상마(象馬)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깐이라도 즐겨 집착할 생각을 내지 말지니,

― 이 모두가 다 <‘삶’이 의탁하는 곳>(托生之處)인지라, 부디 뜻에 두지 말지어다. ―

임종할 때, 전혀 ‘모습’을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곧 의혹을 제할 수 있겠거니와,

털끝만한 망념이라도 일으키면 곧 마(魔)에 끄달리리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느낌’(受)이 없건만, 다만 인연에 미혹하여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이에 망령되이 업보를 받아서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느니라.

지금에라도 만약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으리라.

만약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경지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로 잡된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니, 성인은 역순(逆順)에 자재하여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성인의 지위’를 이룬 지 오래 되면 큰 위덕(威德)이 있나니, 온갖 품류(品類)의

업습(業習)이 다 성인의 운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거늘, 천당과 지옥인들 그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범부는 어두워서 성인의 안팎이 명철(明徹)함과는 같지 못하나니,

― 만약 의심이 있더라도 ‘짓지를 말라’(不作). 지으면 곧 생사에 유전(流轉)하나니,

후회해도 구처(救處)가 없느니라. 빈궁함과 고통이 모두 망상에서 생겼나니,

만약 ‘마음’을 알아서 서로 경책하되, 다만 <지음이 없이 지으면>(無作而作) 곧

‘부처 지견’에 들리라.

 

초발심의 사람은 신식(神識)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니, 만약 ‘꿈’(여기서 꿈과 현실은

둘이 아님) 속에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선뜻 의심을 내지 말지니,

이 모두가 다 ‘자기 마음’이 일으킨 것이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니라. 만약 꿈에

광명이 나타나기를 햇빛보다 더한 것을 보면, 곧 ‘남은 습기’(餘習)가 몰록 다하고

‘법계의 성품’(法界性)이 나타나리라.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 ‘성불의 요인’(成佛之因)이 되리니, 이것은

자기만이 알 뿐이요, 남에게 말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하다가 크고 작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결코 남에게 말하지 말며, 집착하지도 말지니, 이것 역시

‘자기 성품의 광명’(自性光明)이니라.

혹시 어두운 밤에 행주좌와하다가 대낮 같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지니, 이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아지려는 징조니라.

혹 꿈에 별과 달이 분명히 보이면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의 모든 반연(攀緣)이

쉬려는 조짐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만약 꿈에 혼혼(昏昏)하여 어둠 속을 다니는 것 같으면 이 역시 자기 마음의

번뇌장(煩惱障)이 무거운 탓이니, 또한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리라.

 

만약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았거든 독경(讀經),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나니,

많이 배우고 널리 아는 것이 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정신이 어두워지느니라.

교법(敎法)을 시설해 놓은 뜻은 오직 ‘마음’을 표방(標榜)하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알면 ‘교법’을 볼 필요가 없느니라.

만약 범부가 성인의 경지에 들려고 하거든 마땅히 그 업(業)을 쉬고 정신을

기르면서 분수 따라 세월을 보낼지어다. 만약 성내거나 기뻐하는 일이 많으면

도(道)와 더불어 어긋나나니, 스스로를 속일 뿐, 조금도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가운데 자재하게 드나들며, ‘숨고 드러남’(隱顯)이 일정치 않나니,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며, 능히 ‘삿된 마군이’(邪魔)를 무찌르느니라.

중생이 ‘근본 성품’을 보기만 하면 곧 여습(餘習)이 몽땅 다하고, 정신이 어둡지

않느니라. 참으로 ‘도’를 알고자 원한다면 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어서 정신을 기를지니, 여습이 다하면 스스로 밝아져서 공력(功力)을

빌릴 필요가 없느니라.

 

외도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력은 가장 많이 들이나,

‘거룩한 뜻’(聖旨)을 거슬리므로, 종일토록 서둘러 염불하고, 경을 읽어도 정신이

어두워서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지라, 어찌 분주히 뛰어다닐 필요가 있겠으며, 명리(名利)를

널리 구한들 후일 무엇에 쓰리요? 그런데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경을 읽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정진하고, 하루에 여섯 차례 예불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널리 배워서 많이 아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으려 하니, 이와 같은 중생은 모두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니라.

앞의 부처, 뒤의 부처가 오직 「‘성품’을 보라」는 말씀만 하셨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되, 「내가 ‘위없는 도’를 이루었노라」 한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사람이니라.

십대 제자 가운데서 경희(慶喜; 阿難)가 많이 알고 널리 배워서 그 식견이

으뜸이었으나, 부처님께서 늘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문(聲聞), 외도(外道)로 하여금 오직 알음알이가 없게 하라」 하셨으니,

‘알음알이나 수효’(識數)를 아는 것으로써 ‘닦아 증득한다’(修證)고 하면

인과법 가운데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이는 중생의 업보여서 생사를 면치 못하며,

부처님의 뜻에 어기는 것이니,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인지라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천제(闡提)는 ‘믿는 마음’(信心)을 내지 않으므로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殺却無罪)」 하시니, 만약 진정한 신심이 있으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 지위의 사람’(佛位人)이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했거든

결코 어진 이를 비방하지 말지니라.

스스로 속여서는 이로울 것이 없느니라.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 과가 분명한지라,

천당과 지옥이 오직 눈앞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는 까닭에

흑암지옥(黑暗地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나니,

오직 업장(業障)이 무거우므로 믿지 않느니라. 마치 소경이 「햇빛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설사 그에게 말해 주어도 역시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눈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분별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들도 이와 같아서, 방금 축생 등 잡된 무리에 떨어졌거나 빈궁(貧窮)

하천(下賤)한 무리에 태어나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느니라.

비록 이와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직접 물어보면 도리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쾌락하기를 천당과 다르지 않다」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태어난 곳’으로써 낙을 삼아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겠도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오직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니라.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치 않나니,

백의(白衣; 俗人)도 역시 ‘부처’니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더라도 역시 외도(外道)니라.』 하였습니다.

이 법문(法門)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부처 자리’에 안치하는, 가히 불세출(不世出)의

법고(法鼓)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불제자들은 새삼 옷깃을 여미고, 이 위대한

가르침을 오늘에 우뚝하게 붙들어 일으키는 데 심기일전의 용맹심을 발휘해

주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이제 이 법회를 마감하면서, 현대에 정법(正法)을 현양(顯揚)하기 위한 초석으로

‘일승법’(一乘法)을 고여놓고, 이에 현대과학의 정수인 양자이론(量子理論)을

곁들여서, ‘불법’이 안고 있는 종교적 한계성의 탈피를 기하고, 나아가 그 마무리를

‘달마 혈맥론’(達磨血脈論)과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으로 회향하여, 모든 속세적

올가미(羈絆)를 일거에 좌단(坐斷)하게 함으로써 모든 도반들로 하여금 당대에 기필코

성불하여지기를 기약했던 당초의 비원(悲願)이 헛되지 않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의 이 조그마한 불씨가 여러 도반들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만 회향합니다.

여러분의 배전의 정진을 빕니다.

 

- 대우거사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 마치면서

그간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를

애독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저가 2000년경에 이책을 접하고 그간 풀리지 않았던

진리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강동적이어습니다

초보 입문하는 사람들은 직접 법문을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지만 반복 정독하신다면

견성 해탈을 위하여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료를 공유하신 현정선원에게 감사드립니다

 

- 유당 합장

 

 

 

 

 



누구나 이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시찰하고 온 사람 이야기로는
천국과 지옥을 가보기 전에는 천국에는 백화가
난만하고 모든 것이 풍성한 낙원인데 비해

 

지옥은 이와 반대로 그 환경이 살벌하고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유황 불 속에서 악인들의 신음과 절규가
끊어질 틈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지를 가서보니 천국과 지옥이 마찬가지로 경치가 아름답고 제반 된 것이
유사 한데 비해 유감스럽게도 한가지 방법이
다르더랍니다.


천국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양상태가 좋아서 얼굴 화색이
좋은 반면에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여위고 말라
빠져서 피골이 상접하고 꼴이꼴이 아니다는 것 이였습니다.


어떤 면이 달랐을 까요?
자세히 살펴보니 식사 때 사용하는 수저가 이승과는
달리 자루가 한발씩 되어 있고 이 수저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팔에 동여 매여져 있더란 것입니다.


헌데 지옥에서는 이 수저를 사용하여 자기 입으로 음식을
끌어 드리려 애쓰지만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반면에
천국에서는 똑같은 조건 아래서 서로 먹여 주더랍니다.


스웨덴 속담에
<나눈 슬픔은 절반밖에 슬프지 않고 나눈 기쁨은 두 배나
기쁘다.>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서로 먹여주듯 서로 돕는 일상을 심오하게
생각해보고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라 말 할 수 있는
너와 나라는 개념의 간격을 좁혀 나갈 수 있는 나날이
이여 지길 간망 해봅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천국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천국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다른 점은 동일한 조건 아래서 일련의
행동이 다를 뿐입니다.


자신은 이 예화가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로 믿고싶고 사실로
받아드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렵니다.


돌이켜보면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 속에서 슬픔을 극복하고
망각 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내 주의에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위로 격려를 아끼지 않고 슬픔 때나 기쁠 때
함께 슬퍼 해주고 함께 기뻐 해주는 이웃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우리 사는 세상에
더 많이 더 접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김용호 영원의 양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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